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1화 (11/315)

# 11

011. 다시는 방심하지 않는다 (1)

의심만큼이나 진한 어둠이 천중명과 곽대출을 뒤덮었고, 형광등과 함께 피어난 붉고 파란 TV의 불빛이 믿기 어려운 현실처럼 마당을 뛰어다녔다.

“가장 힘들 때 찾아오라며?”

곽대출은 아예 말을 잊은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이 바뀌었다고 몰라봐?”

“씨발! 그 말을 믿으라고?”

주둥이가 뚫린 곽대출을 향해 천중명이 피식 웃었다.

“다른 말 할 거 없이 그냥 이렇게 됐다. 거기에 당장 오늘 밤에라도 날 죽이겠다고 달려들 놈들이 있고.”

“내가 아는 성창욱은 그런 거 걱정할 놈 아냐!”

“믿을 놈이 필요해. 등을 믿고 맡길 놈. 내가 자빠져도 끝까지 지켜줄 놈.”

천중명은 곽대출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떠오른 게 너밖에 없었다. 다른 놈? 함께했던 동기야 또 있지. 그런데 너 정도의 독기를 가진 놈은 없었거든. 죽음을 코앞에 두었을 만큼 위험한 날들이 계속될 테니까.”

눈과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 전하는 말이었다.

“죽을 뻔했었다. 아니 죽었었다. 전기에 새카맣게 탄 상태에서 쇠파이프 맞고, 칼에 찔려서. 그때 혼자 남을 어머니하고 너의 그 꼴통 같은 면상만 떠오르더라. 너만 옆에 있었어도 그따위로 죽지 않았을 텐데 싶었거든.”

굳게 닫혀 있던 곽대출의 주둥이가 씰룩였다.

“모습이 바뀐 거? 인정한다. 그런데 너라면 어쩐지 내 눈을, 그리고 내 말을 믿어줄 것 같았다.”

말을 마친 천중명이 숨을 나직하게 내쉴 동안에도 곽대출은 꼼짝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믿으라는 것이 무리일지 모른다.

곽대출처럼 단순한 놈이라면 더 더욱.

“알았다. 나라도 네가 이런 식으로 찾아왔다면….”

어차피 설명이 안 되는 일을 더 떠들어서 뭐하겠나.

천중명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그리고는 짧은 한마디를 던진 뒤에 낡아빠진 대문을 향해 움직였다.

“거기 서.”

천중명은 대꾸조차 않고 삐뚜름하게 열린 대문을 잡았다.

“야! 성창욱!”

곽대출의 다부진 음성이 지금은 버린 이름을 외친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천중명이다.”

“아, 거 진짜! 짜증나게!”

신발을 직직 끌며 대문 앞으로 다가온 곽대출은,

끼이익! 콰앙!

대문을 거칠게 밀어 잠갔다.

“커피 마셔? 안 마셔?”

“물 많이 부을 거면 그냥 가고.”

“에이, 개새끼! 그러니까 진짜, 진짜 같잖아!”

천중명의 눈을 노려보던 곽대출이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일단 들어와.”

“물은?”

“알았다고! 어디까지 부어줘?”

“한 봉이면 손잡이 아래, 두 봉이면 손잡이 위쪽.”

곽대출은 아예 고개까지 젓고 있었다.

“속을 때 속더라도 내가 인정하고 만다. 씨발, 진짜!”

“욕 좀 그만해, 이 새끼야!”

몸을 돌리는 천중명을 따라 곽대출이 처음으로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드르륵.

댓돌에 신발을 벗고 들어선 곽대출의 집 안은 문짝도, 마룻바닥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 모든 것이 지나치게 검소해 보일 정도로 여전히 허름했다.

“방에 들어가 앉아.”

“홀아비 냄새나잖아.”

“어쩌면 너는 그렇게 하나도 안 바뀌었….”

대꾸를 던지던 곽대출이 입을 꽉 다물고 주전자의 물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힘겹게 불이 붙었고, 맥 빠진 느낌으로 불꽃이 올라왔다.

금이 찍찍 간 낡은 컵 두 개에 봉지 커피 두 봉씩을 털어 넣은 곽대출이 아직 채 끓지도 않은 물을 부었다.

“야! 이왕 타는 거, 물 좀 더 끓이지.”

“그냥 마셔.”

곽대출이 이가 빠진 잔에 담긴 커피를 앞에 놓아주며 천중명의 맞은편에 앉았다.

“담배는?”

“흠!”

신음을 삼킨 곽대출은 방으로 가서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재떨이를 들고 나왔다.

찰칵.

둘이서 담배를 물고서 불을 붙였고, 커피도 한 모금씩 마셨다.

“엿 같이 됐다.”

그 상태에서 천중명은 지난 1년과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커피를 마셔가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와, 씨발. 흥미진진하기는 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곽대출의 첫 번째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천중명이다? 지경그룹의 셋째 아들?”

천중명은 고개만 끄덕였다.

“야! 그러면 너 혹시 경마나 로또번호 뭐 그런 거 기억나는 거 없냐?”

“아, 진짜 좀!”

짓궂게 웃은 곽대출이 잔을 들었다가 빈 것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나 한잔 더 마실 건데 너는?”

“물 제대로 끓이면.”

놈은 주전자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로 움직였다.

그래놓고는 또 물이 펄펄 끓기 전에 얼른 컵에 부었다.

“나더러 뭘 하라는 거야?”

“내 개인비서.”

곽대출이 맞은편에 앉으며 커피가 담긴 잔을 놓아주었다.

“믿기 어려운 것도 알고, 힘든 것도 안다. 반대로 저쪽에서 볼 때는 내가 하루아침에 바뀐 거다. 그러니 내가 지금 털어놓은 말이 내 최대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몸뚱이가 바뀌었다는 말을 누가 믿어?”

“저쪽은 갑자기 변한 내가 의심스럽지 않겠냐? 저축은행 앞에서 죽은 성창욱을 조사하게 되면 너도 나올 테고.”

“듣고 보니 그러네?”

턱을 만지던 곽대출이 생각난 듯 천중명을 보았다.

“좋아. 네 말을 믿는다고 치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가능한 한 빨리 주변 정리해서 내가 사는 곳으로 옮겨.”

“같이 살면 불편하지 않을까?”

“방이 많아서 괜찮아. 씻는 것만 좀 매일 해라.”

“그러면 기름 빠진다니까.”

“내가 매일 기름진 음식 먹여준다.”

“오! 그럼 시간 끌건 없겠는데?”

하여간 이렇게 단순한 놈이라니.

“이 집은 어떻게 할래?”

“회칼 몇 개 묶어서 트랩 설치하지 뭐. 거실이나 창문 여는 순간에 몸뚱이에 콱콱 박히게. 요즘 고무가 탄력 정말 죽여준다.”

어쩐지 이놈을 부른 게 실수일까 싶은 생각에 천중명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간다. 가능하면 내일 보자.”

“자고 가.”

“그러고 싶긴 한데 아무래도 저쪽에서 의심할 것 같아서.”

“위험하다면서?”

“하루쯤이야 견디지.”

천중명을 따라 일어선 곽대출이 묵묵하게 대문 앞까지 따라나섰다.

딸강. 끼이익.

문은 천중명이 열었다.

“간다.”

“그래.”

기껏 상황 설명했고, 함께 킬킬댔으며, 가능한 한 빨리 합치기로까지 했다.

그런데도 인사를 위해 고개를 돌렸던 천중명의 눈에 곽대출의 어색한 표정이 들어왔다.

막상 헤어지려니까 천중명의 얼굴이 낯설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천중명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내키지 않으면 연락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널 원망하거나 서운해 하는 일은 없을 거다.”

곽대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끼리는 도깨비로 살았었다. 안 와도 되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라. 힘 빠진다.”

그런 곽대출을 두고 천중명은 천천히 낡은 대문을 나섰다.

과거의 성창욱과 헤어지는 마지막 문을 통과한 느낌이었다.

골목으로 나온 천중명은 주변을 살핀 뒤에 승용차의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

천봉서는 삼성동의 집에 돌아와 서재에 머물렀다.

입의 혀처럼 구는 천상기가 늦은 시간임에도 책상 옆에 진득하니 앉아 질문에 답을 하거나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놈에게 회사를 맡기는 것이 옳다?”

“그렇습니다, 회장님.”

천봉서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갸웃했던 고개를 다시 가로젓는 모양이 그랬다.

“어차피 그대로 두면 그놈이 경영을 제대로 할 리도 없습니다. 결국, 자금을 도와달라고 조르다 코를 물리게 될 거구요.”

“놈이 회사를 살리면 오히려 앞뒤로 꽉 막힌다.”

“그렇게 되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친 표정이던 천봉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천상기를 보았다.

“계획대로 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위험해서 중명이 놈을 시키려던 일이다. 그걸 네가 직접 하겠다고?”

“그놈이 회장님의 앞을 막아서는 꼴을 보느니 그렇게라도 하겠습니다. 회장님은 모르셨던 일로 하십시오.”

결심이 안 선 건지, 아니면 책임을 피하고 싶은 건지 천봉서는 말이 없었다.

“어차피 지분이 건너가는 것도 아니고, 이사회를 통해 대표이사만 교체하는 일입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이사회를 미룰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이사회를 마치시고 바로 발표하십시오.”

“흠.”

신음 같은 한숨을 뱉어내며 천봉서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노조는?”

“위원장 놈이 1억을 요구해서 준비했는데 이번 기회에 놈을 이용할 계획입니다.”

“노조가 들고 일어나게 하겠다? 그랬다가 경영이 더 어려워지면 괜히 중명이 놈을 대표로 선임한 것에 대한 책임을 떠안게 되지 않겠냐?”

“새로운 대표이사까지 선임했으나 적자가 발생했고, 노조가 계속 회사의 발목을 잡아 직장폐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을 불러서 그렇게 발표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책상에 팔을 짚은 천봉서의 얼굴에 마침내 결단이 스치고 있었다.

“이 기회에 사업장 폐쇄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입니다. 무엇보다 총수님께 경영을 맡기겠다고 말씀드렸던 점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걸 잊고 있었구나.”

천봉서의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길었던 의논이 끝났다.

“공연히 늦은 밤까지 애썼다.”

“저야 회장님이 총수가 되실 때까지, 되고 나신 뒤에도 변함없이 이렇게 모실 겁니다.”

“그래. 이래서 핏줄, 핏줄 하는 거겠지.”

천상기가 앉은 자세에서 고개를 숙였다.

“윤 실장은?”

“총수님 주변에 머무는 것은 분명한데 이상하게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왕회장님도 참! 무슨 욕심이 그리 남으셔서.”

“그러게 말입니다. 회장님께 넘겨주고 여행이나 다니시면 모두가 행복할 텐데 끝까지 저리 붙들고 계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천상기는 무척이나 갑갑한 얼굴이었다.

“하여간 평택 공장을 통해 회장님이 총수가 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말을 조심해. 말을.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만 일어나고 내일 중으로 중명이 놈에게 아이들 더 붙이는 것 잊지 마라.”

“예,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선 두 사람은 서재를 나섰다.

계단을 내려서자 거실에서 잡지를 보고 있던 강승애가 냉큼 몸을 일으켰다.

“가시게요?”

“예, 이사장님.”

“이사장님이라니요? 대표님은 가족끼리 너무 격식을 차려요.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냥 편안한 호칭을 사용하세요.”

“회장님이 총수가 되셨을 때 아랫것들이 존경하게 하려면 저부터 몸을 낮춰야 않겠습니까?”

낯간지러운 대화를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에야 천상기는 삼성동의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힌 다음이었다.

“회장님. 절대 방심하시면 안 돼요.”

“누구? 상기?”

“예. 회장님이 그룹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는 절대! 그 뒤에도 빈틈을 보이지 마세요.”

천봉서는 고개를 느긋하게 끄덕였다.

“평택공장을 중명이 놈에게 넘기려는 것도 그 때문 아닌가. 1년이면 다 끝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힘드셔서 어째요.”

“안에서 챙기느라 당신이 더 힘들지.”

침실로 두 사람이 들어가자 삼성동 천봉서의 거실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

1억이 넘는 독일제 승용차를 타고, 100평이 넘는 최고급 빌라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어서 하얗게 빛나는 가로등을 양쪽에 세운 도로는 막힘이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뒤엉킨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내일 의식이 돌아올 어머니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감전에 숨겨진 비밀도 알아내야 했다.

미래가 보인다니!

감전을 한 번 더 당해볼 각오는 그래서 생겼다.

그래도 이성과 배움이 있는 천중명이다.

무식하게 전기 코드를 직접 이용하기보다는 전기충격기 따위를 구매할 계획쯤 세웠다.

설마 꼭 전선을 타고 들어온 전기만 되는 건 아니겠지?

별생각을 다 한다.

픽 웃은 천중명은 습관처럼 룸미러로 뒤를 살폈다.

검은색 승합차 하나가 걸렸고, 아까부터 뒤를 따라오는 택시도 눈에 거슬렸다.

짐작했던 일이다.

천봉서에게 대놓고 대들었는데 아무렴 그들이 지켜보기만 하겠나.

곽대출만 함께 있어 준다면 어지간한 놈들 겁날 것도 없겠다만, 놈이 어떤 결정을 할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별다른 일 없이 빌라에 도착했다.

자동으로 열리는 정문을 지나며 살폈을 때는 승합차나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천중명은 빌라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아직 낯설다.

온통 대리석으로 처바른 거창한 빌라와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데다 한적하기까지 한 복도와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복도에는 은은한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하긴, 전기요금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 일은 없을 거다.

피곤했다.

이제는 혼자서 좀 더 여유 있는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삑삑삑삑삑삑삑삑. 띠루룩.

그러나 문을 연 천중명은 곧장 들어서지 못했다.

거실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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