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002. 내가 원하는 건 (1)
성창욱은 거실의 소파에 있었다.
편안하게 앉은 것이 아니라 소파의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치고서 다리를 길게 편 자세였다.
깨어나서 4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오전 10시였다.
염병할.
볼을 백 번쯤 꼬집어 봤고, 손잡이까지 쇠로 만들어진 독일제 주방 칼로 왼손 새끼손가락도 그어봤다.
아팠고, 피도 붉게 나왔다.
거울도 아마 백 번쯤 들여다봤을 거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달력, 인터넷, TV를 통해 확인한 날짜는 지도교수인 김학로가 천중명에게 전화하겠다고 한 바로 그날이었다.
“후-.”
그러니까 1년 전으로 온 거다.
또렷하게 기억하는 힘겨웠던 1년과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까지 모두 상상 속에서, 혹은 꿈에서 겪은 일이라고 치자.
다 좋다.
악몽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런데 왜 천중명의 몸뚱이를 하고 이렇게 소파에 앉아서 피가 배어 나온 새끼손가락을 내려다보고 있느냐는 거였다.
“후우.”
성창욱은 갑갑한 심정을 한숨에 섞어 뱉어냈다.
1년 전 오늘 김학로 교수는 오전 11시에 천중명에게 전화를 걸겠다고 했었다.
성창욱은 소파 옆에 둔 휴대전화기를 들어서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잠시 뒤인 11시에 실제로 김학로 교수의 전화가 오면 이건 완벽한 현실 기반 악몽쯤 되는 거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천중명, 그 개새끼는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 들었던 걸까?
아니다! 그거보다 중요한 걸 먼저 해결하자.
의식의 흐름이 이리저리 뒤엉키고 있었다.
“천중명. 너는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말을 뱉어낸 성창욱은 고개를 숙여 몸뚱이를 훑어보았다.
완벽하게 돈으로 만들어진 몸이었다. 기계가, 피트니스 코치가, 그리고 게을러 보이지 않으려는 절박한 사명감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의식의 흐름이 뒤로 돌아갔다.
김학로 교수가 전화를 걸어와서 정말 비서를 추천한다면 과연 어떤 이름을 꺼낼까?
추천한다는 졸업생이 성창욱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그 몸뚱이 속에는 누가 들어 있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성창욱이 버릇처럼 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손에 들린 휴대전화기가 몸을 떨었고, 액정에 ‘김학로’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잠시 전화기를 노려보던 성창욱은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엄지로 밀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천중명 대표님? 나, 김학로입니다.
염병할, 이게 정말 꿈인 거야? 실제 상황인 거야?
- 여보세요?
“아, 예. 말씀하세요.”
- 너무 일찍 전화 드렸나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다른 게 아니라,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개인비서에 적합한 학생을 추천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성창욱은 나직하게 숨을 들이마신 뒤에,
“예.”
하는 답과 함께 천천히 뱉어냈다.
어떤 이름이 나올까?
- 이번 졸업생 중에 나이도 좀 있고, 사회 경험도 풍부한 데다, 특수부대 출신이라 일종의 보디가드 역할까지 할 적임자가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학생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 아, 그게요.
빤히 이름을 알 텐데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김학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름을 좀 빨리 말하시라고!
- 예. 성창욱이라는 학생입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성창욱은 오랜만에 심장이 커다랗게 뛰었다.
“그 학생을 볼 수 있나요?”
- 내일 보내겠습니다.
아차차! 먼저 확인할 게 있었지!
“혹시 그 학생과 오늘 면담하셨습니까?”
- 그게 원래는 몇 가지 주의사항과 다짐을 받으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성창욱 학생도 우리 천 대표님을 모시고 싶어 하니까요. 허허허.
고개를 숙이며 전화를 받던 성창욱은 눈을 치켜들어 앞에 있는 진열대를 보았다.
양주와 그에 걸맞은 잔을 품은 진열대의 유리가 천중명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 연락되는 대로 약속을 잡아주세요.”
- 시간을 제가 정해도 되겠습니까?
“사람을 쓰는 일인데요. 결정되는 대로 알려주세요.”
- 역시 사업가는 다르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시간 정해지는 대로 우선 문자 드리겠습니다.
혹시 몰라 통화가 종료되었는지 액정을 확인한 뒤에야 성창욱은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냈다.
“미치겠네, 진짜!”
다른 사람 아니고 성창욱이란다.
사회 경험 풍부하고 나이도 있는 특수부대 출신의 졸업예정자 성창욱 말이다.
진열대를 향해 고개를 든 성창욱이 픽 웃었다.
진짜 성창욱은 여기 있는데 그럼 그 몸뚱이에 처박힌 놈이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도 천중명 말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당황한 진짜 천중명이 지금쯤 황당한 상황을 이해하고 이곳을 향해 숨 막히게 달려오는 것뿐이었다.
오냐, 이 개새끼.
이게 비록 꿈일지라도, 혹시 너무 억울해서 죽기 직전에 보는 환각이더라도 마음껏 즐겨주련다.
“흐흐흐. 흐하하하. 흐하하하.”
통쾌하게 웃고 싶어서 웃음을 터트렸는데 시원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고개를 좌우로 꺾은 성창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을 향해 걸었다.
거실 밖으로 종합운동장과 그 앞의 탄천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100평짜리 빌라였다.
형 둘을 제치고 지경그룹을 처먹겠다는 천중명이 정말 좋아하는 집이었다.
빠르게 샤워를 마친 성창욱은 옷장에서 놈이 즐겨 입던 정장 바지와 셔츠를 꺼내 입었다.
비싼 건 확실히 느낌이 좀 다르다.
샤워실과 침실 중간의 드레스룸 거울 앞에서 성창욱은 빠르게 주먹을 뻗어보았다.
힘이 부족한 느낌은 들지만, 이 정도면 뭐.
다음으로 성창욱은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뒤로 넘겼고, 드레스룸에 있는 세면대에 손을 씻은 다음 대나무 바구니에 있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이 집은 오후 1시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온다.
그 비용을 회사에서 부담하는데 누구 한 사람 말하는 이는 없었다.
“악몽이라도 이 정도면 괜찮은 거지?”
성창욱이 거울을 보며 픽 웃었을 때였다.
삑삑삑삑삑삑. 띠루룩.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비밀번호를 저렇게 망설임 없이 누를 놈이 누가 있겠나?
왔구나, 천중명!
성창욱은 숨을 들이마신 뒤에 거실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현관에 들어서던 천중명과 마주쳤다.
눈과 눈이 마주쳤고, 10초쯤 꼼짝도 하지 못했다.
현관에 서 있는 천중명은 거실로 나온 성창욱의 자신감 가득한 눈빛에 눌린 얼굴이었다.
“뭘 그러고 있어? 들어와.”
“너… 너는… 너….”
“말 배워? 뭘 그렇게 같은 말을 계속해? 천중명답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뜬 천중명이 불쑥 거실로 뛰어들었고, 숨 막히게 성창욱의 앞으로 달려왔다.
“너! 너도 그런 거지? 너 성창욱이 맞지? 이 새끼….”
짜아아악!
성창욱은 있는 힘껏 천중명의 따귀를 갈겼다.
털썩!
천중명이 아니라 성창욱 자신의 몸뚱이가 쓰러진 걸 보는 게 편치 않았다.
그건 그거고 하여간 지금은 해야 할 게 있었다.
자세를 낮춘 성창욱은 천중명의 울대를 꽉 움켜쥐었다.
“컥!”
“어디서 함부로 욕을 해?”
“꺽! 너…! 성창…. 커헉!”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인데 말이야. 이제 좀 알아야 하지 않겠어?”
“끄으… 끅.”
천중명이 양손으로 성창욱의 손목을 붙든 채 버둥거렸다.
확실히 완력은 아직 성창욱의 몸뚱이가 훨씬 강한 게 분명했다.
울대를 잡은 왼손이 자꾸만 밀려나는 게 그랬다.
퍼억! 퍽!
그래서 성창욱은 천중명의 귀 아래쪽과 목덜미를 잔인할 정도로 매섭게 두들겼다.
그런 뒤에 거칠게 왼손을 뿌리쳤다.
털썩!
“커흑! 컥! 컥!”
비련의 주인공처럼 거실 바닥에 쓰러진 천중명이 시뻘건 얼굴로 연신 기침을 쏟아냈다.
“상황을 잘 봐야지. 내가 명령만 하면 너 같은 놈 하나쯤 바로 죽여서 파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래.”
“어쩔… 어떻게 하려고….”
널브러진 천중명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차마 존댓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직 자존심이 살아서 수그러들지 않는 눈빛이 그랬다.
그런데 놈의 눈빛을 보자 비참하게 쓰러졌었던 평택 공장에서의 일이 불쑥 떠올랐다.
천천히 다가간 성창욱은 바닥에 반쯤 기울어진 천중명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퍼어억!
“끅!”
콱! 콰악! 콱! 콱!
“으어어! 으아아!”
성창욱이 발길질을 멈췄을 때 천중명은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그러게 왜 멀쩡한 사람을 그렇게 죽여?
월급을 주는 거지, 노예를 산 게 아닌데, 직원이 너의 소유도 아닌데 왜 그 지랄을 떨어서….
유리 진열대로 걸어간 성창욱은 의자를 잡아당겼다.
받침대가 둥그런, 하여간 더럽게 비싼 의자인데 중간에 발을 걸 수 있는 발판이 있는 형태였다.
성창욱은 발판에 발을 걸고 앉아서 서럽게 울부짖는 천중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나만 묻자. 왜 날 죽이려고 했던 거냐?”
질문을 받은 천중명이 울음을 멈추고는 시선을 들었다.
그런데 돌아보는 놈의 눈에는 아직도 분하고 억울한 기색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담겨 있었다.
“네가 잘 모르는 게 있어.”
대뜸 의자에서 일어난 성창욱은 곧바로 놈에게 다가가 세차게 발을 뻗었다.
퍼억! 퍽! 퍽! 퍽!
“가난해도!”
퍽! 퍽! 퍽! 퍽!
“정당하게 벌려고 네 밑에서 일한 거지!”
퍽! 퍽! 퍽! 퍽!
“끄아! 그만! 그마-안!”
“네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고!”
퍽! 퍽! 퍽! 퍽!
10여 분쯤 정성과 인내의 발길질을 날렸던 성창욱이 몸을 세웠을 때, 천중명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인 얼굴로 축 늘어져 있었다.
“끄으응.”
“그래도 진짜…!”
놈의 신음이 뚝 그쳤다.
“과거에 내가 어떤 훈련을 했는지 알면 지금 얼마나 봐주는 건지도 알 거다. 군대가 취향이냐고? 이 개새끼가 진짜!”
천중명이 늘어졌던 발을 잽싸게 당기며 몸을 움츠렸다.
“후-. 다시 하자.”
성창욱은 아까 그 의자에 올라가 앉아 발을 중간에 걸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
답은 없었다.
성창욱은 말없이 의자에서 상체를 세웠다.
“그건….”
그렇게 내려서려는 순간 천중명의 말이 힘겹게 새어 나왔다.
“알고 있었잖아…요.”
“뭘?”
성창욱은 정말이지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공장에 화재를 내려고 했었던 거 알고 있었잖아…요.”
성창욱을 힐끔 본 천중명이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보험금을 받으려고…요. 그거 알고 그만둔다고 그랬던 거 아니닙…니까?”
“말을 똑바로 해, 좀!”
“이천 냉동창고요. 보험금 타려고 했던 것 알고 그만두겠다고 했던 거 아니냐구요?”
의자에 올라가 앉은 성창욱을 향해 천중명은 인생을 파산한 얼굴로 상체를 세웠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어차피 들킨 것 같으니까 차라리 평택 화장품 공장으로 목표를 바꾼 뒤에, 회사를 잘린 것에 앙심을 품고 공장에 방화한 것으로….”
“경비 아저씨가 봤는데?”
“CCTV랑 다 없애고….”
“경비 아저씨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냐고!”
“화재 사고에서 함께….”
한숨을 푹 내쉰 성창욱은 바닥에 퍼져있는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정적이 100평 빌라의 내부를 휩쓸고 지났고, 그렇게 또 시간이 10여 분쯤 흘렀다.
“왜 그렇게까지 했냐? 돈이라면 차고 넘치잖아?”
정적만큼 나직한 음성으로 성창욱이 물었고,
“그 화재 사건 뒤에 후계자 결정이 있었다…요.”
억울한 감정을 겨우 이겨낸 천중명이 말끝을 추슬렀다.
“후계자를 정하는 데 왜 화재가 필요해?”
“나는 형님들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에라, 이 등신아! 너를 총알받이로 쓰려고 했었겠지! 너는 어차피 후보에도 못 들던 놈인데!”
답답한 속을 토해낸 성창욱은 거실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해서 뭐가 뭔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후계자가 되면 어떻습니까?”
이 개새끼가 가뜩이나 속이 시끄러운데 별!
성창욱의 독한 눈을 본 천중명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더러운 후계자 자리에는 관심 없어! 이따위 꼴도 싫고! 내가 원하는 건 몸을 되찾는 방법이라고.”
“그러니까 후계자가 되라고요. 그럼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볼 수 있잖아…요.”
엉뚱한 희망을 품은 천중명의 눈을 바라보며 성창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