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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헨젤가의 아가씨 (2/62)

chapter 1. 헨젤가의 아가씨

「……생애 최초의 마법을 성공하는 순간, 마법사는 자신만의 문장을 가진다. 문장은 대단히 고유하고 복제 불가능한 것으로, 이제까지 학계에 보고된 문장 중 겹치는 것은 한 개도 없다. 그러한 이유로 마법사는 문장을 서명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 이것만 알면 사기를 피할 수 있다 中」

기차는 왕국 멜브란트의 전역에 거미줄처럼 깔려있었다. 천재 마법사 바일런 섀덤의 역작인 기차가 멜브란트에 가져온 변화가 얼마나 많은지는 열 손가락으로 다 꼽기 어려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거주 지역을 옮기고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됐다는 걸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며칠의 급여를 다람쥐처럼 모아 급여가 좋다는 타지로 갈 표를 샀고, 적당히 저금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가까운 여행지에 갈 표를 샀다. 마지막으로, 돈에 구애받지 않는 일부의 사람들은 기차 여행 자체를 즐겼다.

기차 칸치고는 꽤 높은 천장을 장식한 마법등, 창문마다 걸린 비단 커튼, 널찍한 실내 곳곳에 놓인 테이블을 장식한 꽃과 조각들. 1등칸 손님들만 출입할 수 있는 식당칸은 그 도도한 문턱만큼이나 호화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드리는 식당칸 입구 부근의 커튼으로 몸을 가리고 서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값비싸고 귀한 것들로 치장한 남녀들이 일행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지지배배 떠드는 와중에,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테이블이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실내가 추운 것도 아닌데 마법사의 로브로 몸을 꽁꽁 싸맨 걸로도 모자라 후드를 푹 눌러쓴 사내가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식기를 다루는 손이 고운 걸로 보아 여자일 수도 있겠지만, 착각하기에는 언뜻 보아도 골격이 너무나 남자다웠다.

사내는 마치 자석처럼 오드리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소곤소곤 떠드는 소리들이 풍성하게 겹쳐져 오케스트라의 합주처럼 울리는 와중에 그의 주변에만 깊은 침묵이 호수처럼 고여 있었다.

저 호수에 손을 넣고 휘저으면 어떤 파문이 일까.

호기심이 오드리의 등을 떠밀었다. 인생의 절반은 우연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몸을 가리던 커튼을 치우고 나와 사내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낯선 기척에 놀란 듯, 사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달빛을 모아 뽑아낸 실처럼 고운 은발이 조화로운 이목구비를 감싸고 흐르고, 눈 내린 속눈썹 아래로 얼음 낀 강물처럼 묘한 푸른빛 도는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색이 옅은 입술이 아주 약간 벌어졌다. 오드리는 마치 예술품을 앞에 두고 앉은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렇게 눈에 띄는 분을 왜 이제까지 몰랐는지 알 수가 없네요. 나는 헨젤 백작가의 장녀, 오드리랍니다. 침묵을 둘러쓴 마법사께서는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상대가 거절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 자신감이 눈부시다. 사내는 갑작스러운 접근에 당혹스러워하며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나 테이블의 빈자리를 차지한 그녀는, 한여름을 가져다 담은 것처럼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화려한 아가씨였다. 여름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울창하게 가지를 뻗은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선 것 같았다. 자꾸만 신경을 거스르던 기차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셰비언입니다.”

“어머나, 그런 농담은 재미없는데.”

지나가던 급사가 오드리의 앞에 물잔을 내려놓았다. 오드리는 보글보글 탄산이 올라오는 물을 마시며 자칫 일그러질 뻔한 입술을 감췄다.

멜브란트 왕국의 최북단,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북부지방에는 하늘에 닿을 듯 솟아오른 절벽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전쟁의 신이 쌓은 성벽 같다 하여 셰비언 성벽이라고들 불렀다. 멜브란트 국왕의 보관에 장식된 다이아몬드가 바로 그 셰비언 성벽에서 나왔다.

“농담 아니고, 본명입니다.”

셰비언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진실임을 주장했지만, 오드리의 귀에는 그게 전부 거짓말로 들렸다. 아무리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위인의 이름을 딴 것도 아니고, 지명을 딴 이름을 누가 본명이라 믿을까. 그녀는 인상을 쓴 채 물잔의 받침을 톡톡 두드렸다.

“마법사,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존대를 하기가 어려워지는데. 내가 하대를 해도 상관없나?”

“사실을 말했는데도 못 믿는다면야 어쩔 수 없는 거겠죠.”

“하, 참…….”

오드리는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귀족에게 존댓말 듣기 싫어하는 마법사가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해 보았는가 말이다. 푸른 피에게서 존댓말을 들을 때 타고난 마력과 재능을 갈고닦은 보람을 느낀다는 말은 실컷 들어보았는데.

“레이디 오드리께서는 왜 제 앞에 앉으셨습니까? 딱히 절 아는 것도 아니시면서.”

“레이디 오드리가 아니라 레이디 헨젤. 이 시끄러운 와중에 혼자 침묵을 즐기는 마법사가 신기해서 와봤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게 신경이 두껍나, 궁금해서.”

셰비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드리를 이리저리 살피는 시늉을 했다. 신경이 두껍다는 말은 그가 아니라 오드리가 들어야 할 말이었다.

염색한 게 분명한 초록색 머리칼,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차이 나는 가무잡잡한 피부. 오드리가 식당칸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그녀에게로 몰려들었다. 지금도 노골적이지만 않을 뿐이지 다들 그녀를 화제로 속닥대고 있는데, 이렇게나 태연하게 굴다니 귀가 달리긴 한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셰비언의 시선을 느낀 오드리가 씨익 웃었다. 하얀 이가 반짝거렸다. 우아한 몸가짐을 최고로 치는 귀족 영애답지 않은 미소였다.

“가무잡잡한 피부가 어때서? 이건 태양의 축복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레이디께서는 남쪽 지방 출신이신가 봅니다? 제가 만탈락에서 닷새를 보냈는데, 거기 사람들은 다들 가무잡잡하더군요. 하긴, 해가 어찌나 뜨거운지 피부가 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죠.”

“호오, 만탈락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오드리가 눈을 빛내며 흥미를 보였다. 그녀는 이 기차를 만탈락에서 탔다. 나고 자랐던 집에서 쫓겨나 어머니의 친정도시였던 만탈락에 처박혔던 나이가 열 살. 이제 열일곱 살이니, 그녀의 소녀 시절은 고스란히 만탈락에 있었다.

셰비언은 자신이 겪은 만탈락을 떠올렸다.

강렬한 태양빛이 살갗을 찌르고, 커다랗고 넓적한 잎을 매단 나무들이 낮은 건물들 사이로 껑충하니 솟아오른 가운데 형형색색 원색의 천으로 몸을 감싼 사람들이 길을 오가는 활기찬 도시. 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축하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들뜬 분위기가 특이했었다.

그러나 그를 만탈락에 잡아두었던 건 브란젤 못지않게 유통되는 물자나 향락적인 분위기, 매일 밤 이어지는 공연 따위가 아니었다. 로렐라이 상단의 본점에서 취급하는 마법도구들, 비非마법과 마법이 접목된 그 독특한 마법도구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하루만 둘러보고 가려고 했던 일정이 하루만 더, 하루만 더…….

“로렐라이 상단의 마법도구가 하도 재미있어서요. 비마법을 그렇게 교묘하게 잘 쓰는 건 처음 봤습니다. 정말 신기했습니다. 로렐라이의 수식 제작 마법사는 대체 어떤 천재이기에 그런 발상을 해낸 건지…….”

“비마법과 마법의 조화에 관심이 많은가 보지?”

가벼운 질문이었으나, 셰비언은 퍽 진심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 낀 호수 같던 눈동자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무척이나. 이 기차만 해도 그렇죠. 마법을 이용해서 동력을 만들어내고, 그걸로 철제 상자를 빨리 달리게 하다니! 보통은 마법을 이용해 물건을 나를 생각만 할 텐데 말이죠!”

기차에 대한 찬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물론 기차는 대단한 발명품이었다. 마법동력의 개발자이자 기차의 설계자인 바일런 섀덤이 괜히 천재 마법사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그가 십 년만 더 살았더라면, 기차보다 더한 걸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공공연했다. 하지만 오드리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셰비언, 마법을 이용해서 물건을 나르는 것과 기차는 근본적으로 같은 게 아닌가? 물론 기차는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마법동력을 사용하지만, 본래 마법은 도구에 깃들게 해서 사용하는 것이잖나.”

“이런.”

오드리는 당연한 상식을 말한 것이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셰비언의 미소는 미묘했다. 그는 그때까지도 손에 쥐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고 접시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눈 빠른 급사가 얼른 접시를 치우자 테이블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본래 마법은 도구에 깃들게 해서 쓰는 거라고요?”

셰비언이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손가락이 닿은 자국마다 뽀얀 빛이 피어났다가 사그라졌다. 검지로 강하게 테이블을 꾹 누르다가 떼자, 거기서 작은 살구만 한 빛구슬이 튀어나왔다.

그는 시장통에서 카드놀이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야바위꾼처럼 빛구슬을 굴렸다. 그러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집중하는 오드리의 손을 잡아 제 앞으로 끌어당기고는, 당황한 오드리의 손 위에 빛구슬을 올려놓았다.

“이 세상에 잊혀진 마법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단정하십니까?”

오드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귀를 울리는 박동 소리가 어찌나 큰지, 세비언에게 들릴까 걱정될 정도였다. 약간 서늘한 체온이 손목을 잡은 것은 둘째치고라도, 손바닥 위에서 숨이라도 쉬는 것처럼 깜빡이는 빛구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쩐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오드리가 다른 손으로 빛을 잡으려 하자, 셰비언이 낼름 빛구슬을 가져가 손으로 눌러 꺼버렸다. 오드리는 빛구슬을 찾아 테이블을 더듬거리는 것도 모자라 셰비언의 손을 잡고 샅샅이 살피기까지 했지만,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테이블은 그냥 테이블이고 손은 그냥 손이었다.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재주를 본 건지…….”

“마법을 보신 거죠.”

셰비언은 잡힌 손을 뺄 생각도 않은 채 키득거리고 웃었다. 이미 꺼뜨린 빛구슬을 찾겠다는 것처럼 손을 만지작대는 따뜻한 체온도 그렇지만, 가장 짙은 여름을 담은 것처럼 반짝이던 초록 눈동자가 혼란에 빠져 흔들리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이게 마법이라고…….”

오드리는 마치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셰비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에 기이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셰비언은 저도 모르게 오드리에게로 몸을 기울여 시선의 높이를 맞췄다. 그녀의 눈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주변의 다른 풍경이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셰비언이라고 했지.”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하녀가 오드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입술을 우물대던 오드리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때까지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가무잡잡한 뺨에 홍조가 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다이앤? 왜?”

“곧 브란젤 역이에요. 내리셔야죠.”

“아……. 벌써.”

오드리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셰비언이 그녀를 향해 한들한들 손을 흔들었다.

한데 다이앤을 따라 나가던 오드리가 우뚝 멈춰 서더니, 휙 돌아서서 셰비언이 있는 탁자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그대가 정말로 마법사라면, 마법사협회의 정기적인 발표회가 브란젤에서 열리는 건 알고 있겠지? 이번에는 로렐라이의 수식 제작 마법사도 참여할 거라던데, 흥미롭지 않나?”

당연히 흥미롭다. 셰비언은 벌떡 일어나다 말고 엉거주춤 선 채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도 아니면서,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오드리가 이제까지 장식품처럼 들고 있던 클러치에서 웬 작은 금속판을 꺼내 셰비언에게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 살펴보니, 용과 꽃이 음각된 금속 명함에 로렐라이 상단의 이름이 화려한 필치로 새겨져 있었다.

“이걸 로렐라이 상단에 가져가면 두 말 하지않고 채용해 줄 거야. 이건 내 호의로 주는 선물이니, 거절하지 말도록. 그런 건 예의도 없는 데다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짓이야. 그런 무례는 내게 가명을 댄 것 한 번으로 족해.”

“가명 아닙니다. 본명이에요.”

셰비언이 볼을 부풀리며 허공에 마법사의 문장을 그려냈다. 은빛으로 빛나는 손바닥만 한 문장은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가득 차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웠다. 하나 마법사의 문장이 중요한 순간에 서명으로 쓰인다고는 해도 문장은 그저 문장일 뿐, 그게 진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드리는 손을 내젓고 웃으며 돌아섰다.

“로렐라이의 특급 고객으로서 장담하는데, 로렐라이는 그대에게 정말로 잘 어울릴 곳이야.”

브아아아아앙-

역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소음이 어느새 거의 비어버린 식당칸을 가득 채웠다. 셰비언은 개구쟁이처럼 미소 짓고 멀어지는 오드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내릴 준비를 했다.

* * *

왕국 멜브란트의 수도 브란젤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귀족가들이 저택을 두고 생활했다. 남부 명문 귀족인 헨젤 백작가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헨젤 백작가는 남부의 비옥한 대평원의 생산력에 기반한 지주 가문에 불과했다. 그러다 멜브란트 왕국 건설의 한 축이었던 랄리우스 후작가가 쇠락하는 걸 기회로 삼아 가세를 확장해 중앙에 진출했고, 이후 대대로 탁월한 돈 관리 능력을 발휘하며 재무국을 장악했다. 현재 헨젤 백작가는 명실공히 왕실의 금고지기 가문으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헨젤 저택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오랫동안 수도를 떠나 있었던 아가씨가 사교계 데뷔를 위해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고용인들은 해가 뜨기 무섭게 온 집안을 쓸고 닦아 광을 냈다. 또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가구들의 먼지를 털었고, 새로이 방을 꾸몄다. 2인분의 음식이 3인분으로 늘어났으니 부엌 역시 할일이 많았다. 모두가 정신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하녀장 알신다는 영 마음에 차지 않는 새 하녀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저, 저, 그놈의 소개소에 확 불이라도 질러야지…….”

아가씨를 모시기 위해 급히 뽑았더니만 일하는 것도, 태도도, 마음에 차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점심나절이면 오신다던 아가씨는 해가 머리꼭지를 훌쩍 넘어갔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아가씨는 도대체 언제쯤 오시는 거람!”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게. 아무렴, 해 지기 전에는 오시겠지.”

“정말이지!”

집사는 고군분투하는 알신다를 향해 안쓰러움을 가득 담은 시선을 보내다가, 곧 자신의 일도 잔뜩 밀려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새 식구는 산더미 같은 일도 함께 가져왔다.

‘데뷔탕트는 치르셔야 한다고 해도, 계속 브란젤에 있게 하실 줄은 몰랐는데…….’

헨젤 백작은 겨우 열 살의 어린 딸을 먼 남부 도시 만탈락으로 보내놓은 뒤, 단 한 번도 딸을 브란젤로 부른 적도, 찾아간 적도 없었다. 다들 그녀가 만탈락에서 일생을 마칠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열일곱이 된 지금에서야 브란젤에 머물게 하겠다니, 저택의 고용인들 전체가 백작의 결정에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휴, 내가 그분의 속을 어찌 알겠나.”

집사는 족히 30여 년 동안 헨젤 백작을 모셨지만, 그의 속내는 여전히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자식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는 몇 번이나 괜히 혀를 찬 다음에야 쌓인 일을 향해 돌아갔다.

하지만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다 바쁜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겨우 몇 년을 함께 산 이후로는 얼굴을 보지 못하고 편지만 오가던 누나가 온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던 어린 도련님, 하델은 누나를 가장 먼저 마중해 주기로 결심했다. 소년은 날랜 몸놀림으로 저택의 대문이 가장 잘 보이는 정원수 위로 기어 올라갔다. 널찍한 대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덕분에 소년의 시종인 알렉스는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날다람쥐처럼 잽싸고 날렵한 도련님이 설마하니 나무에서 떨어지겠느냐마는, 알렉스의 걱정거리는 따로 있었다.

“이렇게 늦는 거 보면 더 늦으실 거라니까요. 도련님, 제발 수업 좀 들어가시죠!”

“아냐. 누나는 해 떨어지기 전에 오실 거야.”

“아, 그럼 오셨을 때 바로 나오시면 되잖아요. 예? 아무리 수업 중이라도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실 텐데요!”

“싫어. 미리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제일 먼저 마중할 거야.”

“으아…….”

알렉스가 단정하게 정리해 놓았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가씨를 기다린답시고 오전 내내 예정되어 있던 수업을 죄다 빼먹었다는 걸 백작님이 알면 거하게 깨지는 건 철없는 도련님이 아니라 말리지 못한 알렉스 자신이었다.

“하여간 저 고집불통…….”

주변에서 오며 가며 시선으로 안타까워해 주는 고용인들 중 누구도 알렉스의 근처에 오려 하지 않았다. 분명 오늘 일의 불똥은 그 혼자 뒤집어쓸 게 틀림없었다. 도련님이 그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는 건 헨젤 백작의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어, 왔다, 왔다!”

“예? 아직 하녀도 안 왔는데……. 으아아아아! 도련님!”

알렉스가 이를 갈거나 말거나, 하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무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느라 앞섶의 단추가 다 떨어져 나간 것도 모른 채 대문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알렉스는 바닥에 떨어진 단추를 주워 모으며 정신없이 하델의 뒤를 따라 달렸다. 햇살에 반짝이는 검은 고수머리가 그렇게 미운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내가 못 살아. 차라리 마구간에서 말똥을 푸고 말지, 도련님 시중은 더 못 들겠네.”

헨젤 백작 앞에서는 차마 꺼내지도 못할 말을 투덜거리며 대문가에 도착한 알렉스는, 그만 소중하게 주워 모았던 단추를 와르르 떨어뜨리고 말았다. 귀하디귀한 백작가의 아가씨가,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와 있었다. 그것도 승마 드레스가 아니라 남자들이나 입을 법한 승마복을 입고서 말이다.

‘부, 분명 베텔 경이 모시러 갔었는데……. 멀쩡한 마차는 어디로 가고……. 아니, 뭣보다 저게 뭐야? 웬 초록색 머리카락? 거기다 바지? 진짜 저러고 오신 거야?’

알렉스는 바로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초상화를 봤을 때도 어이가 없었던 초록색 머리카락이 오드리의 등 뒤에서 화려하게 흩어졌다. 헨젤가의 특징인 검은 머리카락 따위는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피부가 가무잡잡했다! 이목구비는 단정하니 아름답고 그중에서도 특히 깊게 그늘진 눈매가 그윽하니 힘이 있었지만, 피부가 까만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지!

거기에 더해 딱 달라붙어 다리 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승마복 바지라니. 자꾸만 눈이 가는 것을, 그저 흘끔대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뿐이었다.

그러나 하델의 눈에 그런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높은 말안장 위에 올라앉아 햇살을 등에 지고 있는 누나가 그저 눈부시고 멋져 보일 따름이었다. 사랑받으며 자란 소년은 경계심 없이 팔을 활짝 펴고 누나를 환영했다.

“누나!”

“안녕, 하델.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니 반갑구나. 아직 어릴 때의 얼굴이 남아 있는걸? 이리 오렴.”

오드리의 승마술은 훌륭했다. 그녀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하델을 단숨에 들어 올려 자신의 앞에 태웠다. 아무리 하델이 열두 살에 불과하다지만, 찻잔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 없을 일반적인 귀족 영애라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저분은 말괄량이야. 틀림없어.’

알렉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드리가 말에서는 내릴 생각도 않고 알렉스를 향해 턱짓을 했다.

“뭘 하고 있니? 어서 안내하렴.”

“예? 예에. 그런데, 저어…… 아가씨, 분명 베텔 경께서 마중을 나가셨는데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대대로 문관을 지낸 헨젤 백작가에는 봉직하는 기사가 많지 않았다. 카프러스 베텔은 그런 헨젤가에 몸담고 있는 몇 안 되는 기사들 중 하나였다. 카프러스는 젊고 실력도 좋았다. 알렉스는 종종 카프러스가 왜 헨젤가에 머무는지 의문을 품고는 했다. 더 좋은 조건의 집안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그런 그가 7년 만에 수도로 돌아오는 아가씨를 위해 마차를 끌고 직접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헌데 베텔과 마차는 보이지 않고 아가씨 혼자 말을 타고 오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하나 오드리는 그런 알렉스의 혼란을 풀어줄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말이 낯설어 떨어질락 말락 하는 하델을 추어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곧 오실 테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나저나 하델, 한동안 편지가 오가지 못했었지? 그동안 어찌 지냈는지 들어볼까?”

오드리의 허리를 끌어안은 하델이 신이 나서 조잘조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동안 알렉스는 말고삐를 잡고 정원을 가로지르며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마중 나간 기사마저 떼어놓고 올 정도의 말괄량이 아가씨라니, 이제 자신의 앞날은 이제까지보다 더 깜깜해질 게 분명했다.

“그렇구나. 누나를 보려고 수업도 모두 빠지고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고?”

“네!”

“오전 수업은 어떤 것들이었는데?”

“어어…… 역사 수업이랑…… 음…… 그리고…… 알렉스, 뭐였지?”

“살론어(語) 수업이 있으셨습니다. 역사는 물 건너갔지만 살론어 수업은 지금 바로 준비하시면 들어가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대요.”

살론어는 멜브란트와 이웃하고 있는 살론 왕국의 언어로, 대륙에서 공용어에 가깝게 쓰여 상위계층이라면 누구나 다 배워야 하는 외국어였다. 멜브란트와는 오랜 앙숙이지만 그들의 영향력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는 하델의 얼굴엔 수업을 가겠다는 의지와 열의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제 동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드리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미소를 지었다. 하얗게 드러나는 이가 짐승의 이빨처럼 사나웠다. 하델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소년은 제 누나가 왜 기분이 나빠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구나. 알렉스, 네가 고생이 많겠어.”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퉁명스레 답하는 알렉스의 말에 가시가 삐죽삐죽했다. 그는 되도록 천천히 걸으려고 노력했다. 안 그래도 손이 모자란 저택인데, 새로 온 하녀들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며 하녀장이 고함을 지르고 있던 게 바로 조금 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아가씨께서 연락도 없이 오셨으니 지금쯤 발칵 뒤집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빗자루와 걸레를 든 채 난리통인 모습을 보여줄 수야 없지 않은가.

그렇게 알렉스가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집사와 하녀장을 비롯한 고용인들은 과업을 끝내고 오드리를 마중할 수 있었다. 훌쩍 말에서 뛰어내려 하델을 챙기는 오드리를 향해 고용인들이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는지요?”

“집사, 정말 오랜만이야. 어린 시절에는 놀리느라 할아범이라고 불렀는데, 이젠 정말 할아범이 되었군. 여행이야 편했지. 기차를 타고 왔는데 뭐가 힘들었겠어. 그나저나 이쪽이 하녀장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알신다라고 합니다, 아가씨. 하녀장으로 일한 지 이제 육 년이 되었습니다.”

꾸벅 허리를 굽히는 알신다의 자세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성격이 불같고 까탈스러운 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오드리가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알신다……. 들어본 적이 있어. 가엘이 종종 칭찬하던 그 하녀로군. 가엘이 은퇴하면서 하녀장이 되었나 보지? 늦었지만 승진 축하해.”

“……감사합니다.”

알신다의 인사는 조금 늦었다. 오드리가 설마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오드리가 만탈락으로 쫓겨갈 당시 알신다는 일개 하녀에 불과했다. 그녀가 하녀장 자리를 차지한 건 그 다음 해의 일이었다.

알신다는 오랜만에 돌아온 아가씨가 앞으로 매우 성가신 존재가 될 것을 직감했다. 쏟아지려는 한숨을 침과 함께 꿀꺽 넘기며 눈을 내리깔았다.

“알신다, 내 방은 어디지? 내가 어린 시절에 쓰던 그 방 그대로인가?”

“그 방은 지금 하델 도련님께서 쓰고 계십니다. 존경하는 아가씨를 위해 서쪽 별관의 방을 비워두었습니다. 서재와 응접실을 비롯해 드레스룸과 파우더룸은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벨라가 아가씨를 안내해 드릴 겁니다.”

긴장한 빛이 역력한 하녀가 뛰어나와 인사를 올렸다. 오드리가 그 하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미소, 다정한 태도인데도 고용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등줄기를 식히는 한기를 느꼈다.

‘성질이 보통이 아닐 거 같아.’

‘랄리우스의 핏줄이 어디 가겠어? 게다가 쭉 만탈락에 있었잖아.’

‘어휴, 저 옷차림 좀 봐……. 여자가 바지라니, 징그럽고 소름끼쳐!’

헨젤 백작의 부재가 고용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오드리 본인을 앞에 두고도 소곤소곤 말들이 오간다. 눈앞에서 욕을 한대도 직접 지목당한 게 아니라면 모른 체하는 것이 상류계급 아가씨의 미덕이라지만, 매우 무례한 태도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알신다는 다시금 그 빌어먹을 소개소에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오드리는 소리 내 비웃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부친이 자신을 기다릴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고용인들의 상태마저 이 꼴이라니. 자신을 잠깐 머물다 갈 손님 정도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이럴 수 없었다.

“그래……. 내 방이 그대로가 아니란 게 아쉽지만, 서관의 방도 적응하면 괜찮겠지. 그나저나 하델, 넌 여기 서서 뭐 하니? 얼른 옷을 갈아입고 수업에 가렴.”

“예? 전 누나와 함께 있을 거예요. 저택 안내도 해주고, 내 비밀의 장소도 가르쳐 주고, 수도 구경도 같이 나갈 거라고요.”

알렉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머리를 싸쥐었다. 하델이 저렇게 우기기 시작하면 당할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구원자는 뜻밖의 곳에서 나타났다. 오드리가 하델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기곤 엄하게 꾸짖은 것이다.

“네 성적이 지나치게 낮다 싶더니,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구나. 넌 장차 헨젤 가문을 이을 후계자다. 그런 네가 학문을 가벼이 여기면 가문의 앞날이 어떻게 되겠니? 당장 그 엉망진창인 옷을 갈아입고 수업에 들어가라.”

“어…… 하지만…….”

“하지만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당장 가렴. 난 제 위치도 모르는 멍청한 동생을 갖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제까지 하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사람은 없었다. 하델은 충격받은 낯을 하고 몇 번을 더 졸랐다. 그러나 오드리가 꿈쩍을 않고 고용인 누구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몹시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터덜터덜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알렉스는 급히 하델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말괄량이라고만 생각했던 오드리 아가씨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착각이 들어서였다.

오드리는 그렇게 하델을 떼어놓고 제게 주어진 서관에 발을 디뎠다. 한때 어머니가 쓰던 건물이었다.

싸늘했다.

키 큰 나무들이 바로 옆에 있어 해가 잘 들지 않는 서관의 방은 오후의 늦은 햇살을 이제야 들이마시고 있었다.

오드리는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만탈락의 따뜻한 기후에 맞춘 옷은 이 계절의 브란젤에는 지나치게 얇았다. 그게 드레스가 아닌 승마복이라고 할지라도.

“서늘하구나.”

“벽난로를 땔까요?”

“그래주렴.”

벨라는 벽난로를 때고는 오드리의 눈치를 보며 방 한쪽 구석에 시립했다. 미리 벽난로를 때놔야 했는데, 알신다의 닦달에 시달리다 보니 깜빡 잊었다. 뒤늦게 여태 하지 못한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목이 탔다.

오드리는 그런 벨라는 내버려 둔 채 다시금 방을 살폈다. 역시 시간이 시간인지라, 그녀가 기억하던 물건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방을 채운 모든 것이 다 새것이었다.

“벨라, 드레스룸에 내 옷이 준비되어 있겠지?”

“그럼요. 보내주신 치수에 맞춰서 잔뜩 준비해 뒀는걸요. 지금 갈아입으시게요? 목욕물을 데워 올리라 할까요?”

“그래. 좀 씻고 싶구나.”

벨라가 허둥지둥 목욕물을 준비하러 나간 사이, 오드리는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시절 그녀가 뛰어놀았던 정원은 형태만 간신히 남아 있을 뿐, 예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하델의 취향에 맞춰서 재정비를 한 것일 터다.

그럼에도 오드리는 아련한 향수에 사로잡혔다. 늘 침대에 누워 있던 어머니는 가끔 상태가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저 정원에 테이블을 펴고 어린 딸과 함께 차를 마셨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해가 뜨면 해가 떠서 좋다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연했다.

“어머니, 저 드디어 돌아왔어요.”

자그마치 칠 년이 걸렸다. 열 살에 쫓겨나, 열일곱 살에 돌아온 것이다. 계집아이는 수나 놓고 춤이나 배우며 아름답게 미모를 가꾸다가 좋은 곳에 시집가는 게 제일이라던 부친이 이렇게 아슬아슬한 나이가 될 때까지 미룰 줄은 몰랐다.

좀 더 이른 때에 불러다 재빠르게 팔아 치우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만탈락에 던져놓은 채 잊어버릴 줄 알았거늘. 차라리 후자를 바랐건만, 부친은 기어이 자신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곧 떠날 거예요.”

부친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팔려갈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곳에 눌어붙어 있을 생각도 없다. 그녀는 왼쪽 가슴 위를 지그시 눌렀다. 어쩐지 심장이 뛰었다.

“그러려고 로렐라이를 만들었는걸요.”

속삭이듯 한 말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로렐라이가 대체 무어냐. 세상 물정에 어두운 자들은 용에게서 마법을 훔쳐내 세상에 뿌렸다는 전설적인 대도의 이름이 아니냐 말하겠지만, 요즘 로렐라이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창의적인 마법도구를 만들어내는 상단의 이름으로 더 유명했다.

로렐라이의 시작점은 남부의 역사 깊은 소도시 만탈락. 오드리의 외가인 랄리우스 가문의 근거지인 도시이기도 했고, 오드리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세금과 행정에 대한 권리 일부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로렐라이의 성장과 함께 무섭게 발전한 만탈락 덕분에, 오드리는 일반적인 귀족 영애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더불어 고가의 물품을 주로 취급하는 로렐라이의 특급 고객이기도 했다.

현재, 로렐라이 상단의 주인은 베일에 감춰져 있었다. 다들 주인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방팔방 주인의 대리인이라는 자들만이 돌아다닐 뿐이었다.

사람들은 왕족 중의 누군가가 얼굴을 감추고 로렐라이를 운영하는 게 분명하다고 멋대로 생각했다. 로렐라이가 왕실의 은근한 지원을 받으며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숨겨진 주인의 정체가 오드리라는 게 밝혀지면 놀라 뒤로 넘어갈 사람이 여럿일 것이다.

‘일단 팔려가는 것부터 막아야겠지.’

오드리가 생각에 잠길 때의 습관대로 손가락을 튕기는데, 목욕물을 준비하러 갔던 벨라가 오드리의 뒤에서 기척을 냈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뛰어오는 발소리마저 요란했다.

“아가씨, 목욕물이 준비되었…….”

“알았다. 목욕 시중은 필요 없으니, 나가 있거라.”

“예?”

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드리는 이번에야말로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딜 감히 주인의 명령에 의문을 가지는가.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하녀였다.

“네 시중은 필요 없다는 말이야. 내 하녀가 오거든 그 애를 들여보내도록 하고, 넌 가서 쉬고 있으렴.”

벨라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녀는 오랜만에 브란젤로 돌아오는 오드리를 위해 뽑힌 하녀였다. 잡일에는 영 재주가 없어 시녀장 알신다에게는 미운털이 박혔고 오드리의 시중 말고는 맡겨진 일도 없는데, 첫날부터 이래서야 해고당해도 할 말이 없다. 그녀는 꿀꺽, 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아가씨, 시중은 제 일이니,”

“내가 두 번 말한 걸로는 모자라니?”

결국 벨라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얌전한 것은 앞에서의 얼굴일 뿐, 뒤에서는 역시 말괄량이는 어쩔 수 없다고 투덜대며 다른 하녀들과 함께 오드리의 흉을 보았다. 헨젤가의 특징인 검은 머리를 초록색으로 물들인 과감함과 보통의 귀족영애들과는 달리 가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결정적으로 승마복 바지가 만들어낸 선입견이었다.

이 모든 걸 짐작하면서도, 오드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말들이 두려웠다면 머리카락을 초록색으로 염색한 채 브란젤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따끈한 욕탕에 몸을 담그고 느긋하게 수면을 두드리며 다른 생각을 했다.

카프러스 베텔,

기사로서의 출세를 기대하기 힘든 헨젤 백작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괴상한 기사에 대하여. 오드리가 그를 만난 건 브란젤역에서가 처음이었다.

* * *

역사 깊은 브란젤역은 그 호화로움과 소란스러움이 왕국에서도 수위에 꼽힐 만한 곳이었다.

브란젤역의 뾰족한 지붕을 타고 내려온 봄의 햇살이 역사 건물을 장식한 천사상의 날개를 쓰다듬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 천사상이 수십이니, 브란젤역 앞 광장을 지나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모자를 고쳐 썼다.

역사 내부도 호화로웠다. 드높은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마법등이 역사 구석구석까지 채워진 대가의 작품을 밝혔다. 승강장의 기둥 하나, 계단참 하나까지도 모두 예술품이었다. 비록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역사 유지에 동원되는 왕궁마법사들뿐이지만 말이다.

브아아아아앙-

마법동력으로 움직이는 기차가 특유의 소리를 내며 기차역에 들어오면, 팔 물건들을 옆구리에 끼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소년들이 기차의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신문 사세요! 신문! 그저께 나온 최신 신문이요!”

“잡지도 있습니다! 마법사협회에서 발간한 마법연구발표집 최신간입니다!”

“주전부리 있습니다! 달콤한 말린 과일, 고소한 비스킷!”

소란 속에서 1등칸의 승객들이 내리고 난 뒤, 곧이어 2등칸, 3등칸의 문도 열렸다. 그때쯤 되니 넓은 역사 전체가 사람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이 혼잡해져 부딪치지 않고 걷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오드리는 1등칸의 승객이었지만, 사정이 있어 조금 늦게 내렸다. 그랬더니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브란젤역의 광장까지 도저히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나 아무리 혼잡 해 봐야 기차가 출발하고 나면 가시겠지 싶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 많은 사람 사이를 뚫고 카프러스가 나타난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았다. 저 사람이 나를 마중 나온 이로구나. 상대도 그녀를 알아본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오드리는 남부식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남부 특유의 하늘거리는 천으로 만든 드레스를 걸치고, 남부식으로 베일 달린 모자를 썼다. 웬만한 사람들은 날씨에 맞지 않을뿐더러 이질적이기까지 한 차림을 보고도 예의를 차리느라 어떻게든 고개를 돌렸는데, 그는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오드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에 그을린 가무잡잡한 피부와 초록색 염색 머리를 보고 당황한 게 분명했다. 그런 것치고는 눈을 마주치고 굳어 있던 시간이 몹시 길긴 했지만, 그거야 어디 하루 이틀 겪는 일이어야지.

오드리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조차 아가씨는 눈이 왜 이렇게 강렬하냐며, 남들과 다른 피부색도 머리카락 색도 다 잊혀져 버린다고 투덜대지 않았던가. 어떻게든 얌전하게 그려보겠다며 애를 쓴 화가 덕분에 초상화 속의 오드리는 실제와 꽤 많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런 탓인지 카프러스는 오드리를 알아보고도 혼란을 겪는 것 같았다. 그는 멍하니 오드리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기사의 상징과도 같은 긴 칼을 옆구리에 차고 있었지만, 혼잡한 가운데 가만히 서 있으니 사방에서 그를 치고 지나갔다.

카프러스가 오드리의 눈에서 헨젤 백작을 보고 놀라 굳어 있었다는 것 따위, 오드리는 영영 알 길이 없을 테다. 핏줄은 속일 수 있는 게 아니라더니, 생김새는 판이해도 그 눈빛만은 똑같아 깜짝 놀랐다는 말을 들어서야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카프러스 역시 오드리를 본 순간의 자신에 감상이 어땠는지 입에 올릴 일은 없을 것이다.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굳은 자신이 우스웠다는 것도, 그녀의 웃음을 본 순간 멈춘 줄도 몰랐던 숨이 겨우 돌아왔다는 것도.

카프러스는 기사답지 않게 머뭇거리면서 오드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이 끌려가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가는 건지 구분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혹시…… 오드리 아가씨 되십니까? 저는 헨젤 백작가의 기사, 카프러스 베텔입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베텔 경인가요. 바깥에서 보기로 했는데, 이 복잡한 안쪽까지 찾으러 오다니요. 내가 늦어 괜히 불편하게 했군요.”

분명 말 내용은 늦도록 나가지 않은 자신을 탓하는 말인데, 어째 카프러스는 그녀가 자신을 책망하는 것만 같아 등에서 땀이 흘렀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니, 아가씨께서는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가문의 아가씨이시니, 카프러스로 충분합니다.”

“……그렇군요. 가문의 기사로군요. 그래도 명색이 기사인데, 내가 이름을 막 불러도 되겠어요?”

“아가씨께서 편한 대로 하시지요. 자, 가실까요? 역 바깥에서 마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프러스는 오드리에게 팔을 내밀었다. 보호자 없이 사람들 틈을 헤쳐 가야 하는 레이디를 위해 에스코트를 자청한 것이다. 오드리는 물끄러미 그 팔을 내려다보다 카프러스가 의아해할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손을 얹었다. 빙긋 웃는 얼굴이 어쩐지 말썽꾸러기 악동 같았다.

“브란젤은 역시 사람이 많아요. 베텔 경, 나는 브란젤에 오면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가문에 가기 전에 들러도 괜찮겠지요?”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늘은 리즈비아 거리의 극장들이 쉬는 날입니다.”

리즈비아 거리는 브란젤 제일의 극장 거리이자 예술의 거리였다. 큰 극장이 서너 개나 있고, 일 년 내내 미술 전시가 열리는 화랑들이 그 주변에 몰려 있었다. 독특한 개성으로 승부하는 상점들도 부근에 많이 있어, 브란젤의 귀족 영애들이 신발굽이 다 닳도록 들락거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정말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초록빛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예쁜 빨간 입술을 가릴 생각도 없이 웃자 주변이 환하게 물들었다.

“이런……. 경, 내가 어디서 왔는지 듣지 못했나요?”

“예? 그야, 만탈락에서……. 아. 실언했습니다.”

카프러스가 민망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때는 그저 그런 소도시였다고 해도, 지금의 만탈락은 수도 브란젤 못지않은 향락과 소비의 도시였다. 그곳에서 온 오드리가 굳이 리즈비아 거리를 찾고 싶어 할 리가 있겠나.

“괜찮아요. 다들 브란젤이 최고라고 생각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오드리는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카프러스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표정은 그대로인 채 기색으로만 민망해하던 기사는 끝내 헛기침을 하며 용서를 구했다.

“제가 감히 어림짐작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용서하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아가씨, 이만 백작가로 모시겠습니다. 어딜 가고 싶으시든, 일단 집에 가시는 게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말투도 태도도 정중하나 강요에 가깝다. 오드리는 찌푸려지는 미간을 억지로 펴고 웃었다. 그녀는 새삼 실감했다. 여긴 브란젤이지, 만탈락이 아니었다. 버릇대로 손가락을 튕기며 물었다.

“글쎄. 수도 저택에 아버님이 계신가요?”

“그…… 아닙니다. 백작님께서는 일이 있어 저택을 비우셨습니다.”

카프러스는 대답을 하면서도 슬쩍 오드리의 눈치를 보았다. 칠 년여 만에 돌아가는 집이건만,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지 않다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담아서. 하나 오드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요, 그럼 조금 천천히 가도 되겠지요. 경, 난 항상 로렐라이 상단의 브란젤 지점이 궁금했거든요. 잠깐 들러서 구경을 좀 하고 싶어요.”

“예? 로렐라이 상단이야말로 만탈락에 본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더 궁금하죠. 난 로렐라이 상단의 특급 고객이거든요. 브란젤 지점은 만탈락과 어디가 어떻게 다를까요? 날씨도 날씨거니와 사람들의 옷차림이 이렇게나 다른데, 지점에서 구비한 물건들도 분명 아주 다르겠죠?”

오드리는 카프러스가 끼어들 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그녀는 카프러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마차에 타자마자 마부에게 지시를 내렸다.

“필리아 거리, 로렐라이 상단 브란젤 지점으로 가자.”

“아가씨…….”

“아저씨, 빨리 가요. 아가씨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카프러스가 말문을 잃은 사이 오드리의 하녀, 이디케와 다이앤은 재빨리 짐을 추슬러 마차에 싣고 마부를 재촉했다. 마부는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다가, 카프러스가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겨우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랴! 마차가 흔들리며 복잡한 광장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마차의 내부는 백작가의 마차답게 꽤 넓은 편이었다. 그러나 건장한 기사인 카프러스와 여자 셋, 거기에 채 지붕에 싣지 못한 짐까지 자리를 차지하자 내부가 꽉 차고 말았다. 비워놓은 자리에 이디케와 나란히 앉은 오드리야 자리가 넉넉했지만, 카프러스는 사정이 달랐다.

“윽!”

“아, 미안합니다.”

카프러스와 나란히 앉아 있던 다이앤이 그의 검에 정강이를 부딪치고 신음을 흘렸다. 벌써 세 번째. 덜컹거리는 마차는 다이앤의 다리가 멍투성이가 되는 데에 일조하고 있었다. 카프러스는 민망해하며 다시금 검을 수습했다.

‘말을 타고 와야 했는데.’

복잡한 브란젤역의 사정을 생각해 말을 두고 나온 것이 몹시 후회됐다. 혼자 탔을 때는 별문제 없던 검이, 이렇게나 거추장스럽게 여겨질 줄이야. 검집을 움켜쥔 손에 핏줄이 섰다. 게다가 맞은편의 오드리가 자신을 내내 관찰하고 있으니, 그 시선이 몹시 신경 쓰였다.

그는 공연히 시비를-본인은 시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겠지만- 걸었다.

“로렐라이의 상품은 굉장한 고가라던데, 얼마나 사셨기에 특급 고객이십니까?”

“어머나…….”

오드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족도, 연인도 아닌데 씀씀이를 궁금해하다니 대단한 실례였다. 뒤늦게 실수를 알아차린 카프러스가 다급히 말을 거두기 전에, 오드리가 까르륵 소리 내어 웃었다. 햇살에 탄 카프러스의 얼굴에 붉은 물이 들었다.

“만탈락은 랄리우스 가문의 도시였고, 내 어머니는 랄리우스의 마지막 후손이셨어요.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도시를 지참금으로 삼으셨지만, 유언으로 내게 만탈락의 권리 일부를 남기셨죠. 로렐라이가 잘되는 건 내게도 좋은 일이에요.”

“그…… 알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긴, 귀족 영애가 개인 재산을 가질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본래 자식의 것은 부모의 것이니, 어머니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이런 사치는 부릴 수 없었겠죠.”

오드리는 웃는 낯으로 제 귀에 걸린 귀걸이를 찰랑거리게 했다. 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제 몸에 걸치는 장신구를 두고 사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헨젤 백작은 도시의 권리만으로도 이미 분에 차고 넘친다며 오드리에게 돈을 주지 않았고, 그런 사정은 헨젤가의 고용인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카프러스는 이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까지 민망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로렐라이의 물품들은 대개 고가이지만 적당한 가격대도 꽤 있어요. 경의 월급으로 살 수 있는 물건들도 있을 테니, 마음에 둔 여성이 있다면 선물하는 것도 좋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내가 하나쯤 사줄 수도 있구요. 경도 알다시피, 만탈락이 발전하면서 나는 꽤 부자가 됐거든요.”

오드리가 작은 지갑에서 금화를 꺼내 손가락 사이로 굴리는 재주를 선보였다. 요즘엔 쓰는 사람도 드물어진 금화가 레이스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를 자유자재로 헤엄쳤다. 카프러스는 이쯤 되어서야 오드리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제가 살 겁니다.”

“그래도 되고요. 나야 돈 아끼고 좋죠.”

채 감추지 못한 억울한 표정이 제법 웃겼다. 그녀는 입을 가리지도 않은 채 크게 웃었고, 꾹꾹 웃음을 눌러 참고 있던 이디케와 다이앤도 끝내 웃음소리를 흘렸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꽤 화기애애해졌다.

전부 다, 오드리가 로렐라이 브란젤 지점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진상을 부리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 * *

체온이 올라 붉어진 입술 사이에서 피식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베텔 경이라고 했지. 생각보다 참을성이 있는 남자였어.’

카프러스는 오드리의 제멋대로인 요구를 꾸역꾸역 수용했고, 그녀가 로렐라이 상단의 브란젤 지점에서 엄청난 금액의 쇼핑을 할 때도,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며 상단의 점원을 괴롭힐 때도, 심지어 승마복으로 갈아입을 때조차 놀람 이상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마차의 말을 풀어버리고 안장을 얹을 때는 기겁을 했지만 말이다.

마차에 매여 있던 말은 두 마리. 오드리가 한 마리를 타고 왔으니, 남은 건 한 마리뿐이다. 그 말을 풀어 타고 오면 금방이겠지만, 로렐라이 브란젤 지점에는 그녀의 하녀들이 남아 있었다.

오드리는 어쩐지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입술을 핥았다. 잠깐 만난 것뿐이지만, 카프러스가 요즘 기사답지 않은 신사라는 걸 깨닫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본래 기대했던 대로 오드리를 쫓아오느라 하녀들을 내팽개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하녀라지만 낯선 도시에 막 도착한 여자 둘이었다. 심지어 이디케와 다이앤은 젊고 아름다웠다. 그들의 존재가 카프러스의 발을 묶어두었으리라.

‘이디케가 잘 해주겠지만……. 역시 안 되려나.’

생각에 빠진 사이 물이 식었다. 오드리는 욕조 부근 선반에서 불이 담긴 커다란 수정구를 찾아 꺼냈다. 작년 겨울, 로렐라이 상단에서 내놓은 뒤 왕국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간 온수 마법구였다. 유효 시간은 약 이십 분에 불과한 일회용품이지만, 혼자 쓰는 욕조 하나를 따뜻하게 데우기엔 충분했다.

마법구를 욕조에 담그고 아주 약간의 마력을 불어넣자 마법구에 담겨 있던 마법이 활성화됐다. 식었던 물에서 다시 훈김이 오르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건가?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하녀야……. 대체 어디에서 데려온 하녀인지 모르겠네.”

알신다가 들으면 또 뒷목을 잡을 불평을 하다가, 문득 기차에서 만난 마법사를 떠올렸다. 얼음으로 만들었나 싶게 비현실적인 긴 은발과 엷은 얼음이 낀 호수처럼 신비한 눈동자를 가진 마법사. 눈에 확 띄는 외모도 외모지만, 그보다 놀라울 정도의 실력이 먼저 보였었다.

마법은 당연히 물건에 불어넣어 도구로 만들어 써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그녀의 앞에서 손가락 사이로 빛을 굴리는 재주를 선보였던 마법사.

‘이 세상에 잊혀진 마법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단정하십니까?’

오드리는 그 순간 직감했다. 육 년 전, 한 마법사와의 만남이 그녀의 인생을 바꿨듯이, 이 마법사와의 만남도 그럴 것이라고. 어쩌면 이 순간이 운명으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고. 그녀는 이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운명 같은 인연을 반드시 잡아챌 셈이었다.

“피곤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눅진하게 쌓여 있던 피로가 풀려나가는 느낌이 꽤 괜찮았다. 기차를 타고 왔다지만 먼 거리였고 긴 여행이었다.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았다.

“……씨! 아가씨! 아이참,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귓가가 시끄러워 잠에서 깼다. 오드리는 자신에게 타박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젖형제이자 하녀이며 가장 가까운 벗, 이디케다. 오드리는 눈을 뜨기는커녕 머리칼을 쓰다듬고 목을 주무르는 손길에 편안히 몸을 맡겼다.

이디케는 헛웃음을 흘리며 오드리의 머리카락을 감겼다. 그녀의 아가씨는 꼭 욕조에 몸을 담근 채로 고민을 하다 잠드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면 시중드는 사람을 다 내쫓기까지 하니, 항상 젖형제인 자신이 깨워줘야만 했다.

“또, 또 욕조에서 잠드시고. 이러다 물고기가 되시겠어요.”

“그것도 좋지……. 이왕이면 큰 물고기였으면 좋겠네. 음, 그래. 고래 정도?”

“보신 적도 없는 고래는 왜 찾으신대. 큰 고래는 만탈락 저택의 연회장만 하다는데 이런 작은 욕조에 들어나 가겠어요?”

“후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 일은 잘 보고 왔어?”

“그럼요. 신속, 정확, 깔끔! 로렐라이 상단인걸요. 불시 감사였어도 서류는 완벽했어요. 자, 받으세요.”

이디케가 마법처리가 완료된 종이를 내밀었다. 물에 닿아도 젖지 않는 서류는 욕실에서 일하기에 아주 좋은 아이템이었다. 비싸지만 돈값 하는 녀석이란 얘기다. 오드리는 겨우 반쯤 눈을 뜨고는 서류를 살폈다. 잠이 아직도 남아 있어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베텔 경이 방해되진 않았어? 뭐, 이렇게 일을 보고 온 거 보면 그가 결국 자리를 비우긴 한 것 같지만.”

“하, 하하……. 생각 이상의 신사인 데다 대처도 아주 빨랐어요. 아가씨께서 그렇게 가시자마자 지점장을 닦달해서 새 말을 구입하고 저희는 마부에게 맡기던데요. 정말이지, 놀랐다니까요. 하녀 같은 건 당장에 팽개치고 아가씨를 따라갈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말 가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뭐, 가문에서 대겠지. 너보다 빨리 왔겠네.”

“그렇죠. 저보다 훨씬 빨리 오셨죠.”

이디케의 어조가 심상치 않다. 오드리는 괜히 물속으로 좀 더 몸을 담갔다. 과연, 쌕쌕 숨을 몰아쉬던 이디케가 다다다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기사답게 판단도 빠르시고 신사답게 하녀들도 잘 챙기셨는데, 단지 그것뿐인 분이셔서요. 돌아오시고도 어찌나 말이 없으셨는지, 다들 제멋대로 떠들어대고 있더라고요. 제가 정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들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딱 한 마디만, 아가씨를 감싸는 딱 한 마디만 해줬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라고요.”

“그것까지 바라면 안 되지. 내가 지점에서 얼마나 진상을 부렸는데? 없다는 상품을 내놓으라고 떼쓰고, 직원 대응에 일일이 트집을 잡고, 끝내는 옷을 갈아입어야겠으니 방을 비우라고 난리를 쳤지. 아, 그러고 보니 브란젤 지점 직원들 대응이 훌륭했어. 다음 달 월급에 보너스 붙여서 지급해.”

“…….”

“베텔 경이 흉을 안 본 게 대단한 거야.”

“알죠! 알지만 화나는 걸 어떡해요.”

웃전과 외부인 앞에서는 절대 열리지 않는 입도, 같은 하녀들 사이에서는 쉬이 열린다. 더구나 그게 권위 없는 주인을 모시는 하녀 상대라면 더더욱. 사전에 모의한 바가 있어 폭발하려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아야만 했던 이디케의 원망이 헨젤 백작을 향했다.

“그래요, 아가씨 차림을 두고 수군거리는 건 그렇다 쳐요. 그러라고 그런 거니까. 하지만 백작님은 대체 뭐예요? 칠 년 만에 돌아오는 딸인데, 이제 곧 데뷔탕트도 있는데, 이런 시기에 출장이라뇨!”

오드리는 저 대신 화내주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류를 넘겼다. 매출은 예전과 비슷한데, 순수익이 줄었다. 아무래도 고가의 물품을 팔다 보니 수요층이 한정되어 있는 게 문제였다. 이제 슬슬 수출 쪽으로 눈을 돌리거나 고객층을 넓혀야 하는데, 두 가지 모두 오드리의 마음대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수출은 신규 사업자를 경계하는 기존 사업자들 때문에 벌써 몇 달째 헛물을 켜며 벽을 두드리는 중이고, 가격을 낮추거나 다른 방향의 제품을 개발해서 고객층을 넓히자니 땍땍대며 잔소리를 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여간 말 많고 귀찮은 인사들 같으니라고.’

로렐라이를 만들 때 설마 하며 거금을 투자했던 몇몇 사람들이 계속 거슬렸다. 반신반의하며 돈을 냈던 그들은 상단이 커지자 어떻게든 영향력을 확대해 보려 기를 썼다. 마음 같아서는 확 밟아 죽이거나 쳐내고 싶었다.

그러나 멜브란트 왕국에서 미혼 귀족 여성의 경제활동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진다는 게 문제였다. 악착같이 자신에게 도시의 권리를 물려주신 어머니를 입방아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으니, 그녀가 베일 뒤에 숨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게다가 아직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고, 함부로 건드리기에는 너무 덩치들이 컸다.

오드리는 끝까지 읽고 확인한 서류를 향초 불에 태웠다. 서류는 순식간에 거뭇한 재만 남기고 타버렸다.

“글쎄……. 헨젤은 왕실의 금고지기이니, 외부에 말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거겠지. 이 얘기는 이제 그만. 그나저나 수익이 줄고 있으니, 슬슬 신제품을 내야겠어.”

“생각해 두신 게 있으세요?”

“워커에게 말해놓은 게 있잖아. 이제 결과가 나올 때가 되었지. 조만간 시제품을 확인하러 가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있을까 모르겠네. 아무래도 데뷔탕트가 코앞이라…….”

난감해하는 오드리의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데뷔탕트란, 나이가 찬 귀족 영애들이 사교계에 나서는 의식이었다. 하급 귀족의 여식들은 그저 왕실의 무도회에 초대받을 뿐이지만,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집안의 여식들은 직접 왕비를 만나고 축복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데뷔탕트를 마치고 나면 결혼을 할 수 있는 다 큰 처녀로 인정받아 감금이나 다름없는 저택 연금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교계의 각종 모임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집안의 살림에 손을 대는 것도 가능해졌다.

당연히, 매우 중요했다. 15세가 되면 치르는 게 보통인데 오드리는 이미 17세였다. 더 미룰 수 없는 나이였다.

“그러게요. 들고 오라고 할 수도 없고, 배달을 시키기도 그렇고……. 조만간 어떻게든 기회를 마련해 볼게요. 이런. 아가씨, 그렇게 찌푸리지 마세요. 데뷔탕트잖아요. 데뷔탕트를 치르고 나면 어디든 가실 수 있어요. 더는 저택에 묶여 있지 않으셔도 돼요. 좋은 것만 생각하자구요.”

“만탈락에서는 내가 저택에 묶여 있었나?”

“뭐……. 그건 그렇죠. 묶여있긴 무슨. 다들 아가씨 일이라면 보고도 못 본 척 했는데 여기보단 훨씬 자유로웠죠. 그럼 예쁜 옷 입을 기대나 해볼까요. 예를 들어……어깨를 드러낸 무도회 드레스라거나? 분명 굉장히 잘 어울리실 거예요.”

“나보단 너와 다이앤이 더 기대하고 있는 거 같은데?”

오드리가 밉지 않게 이디케를 흘겼다. 이디케는 그런 시선을 모른 척 오드리의 젖은 몸을 닦아주고 실내복을 가지러 갔다가, 온통 분홍색과 노란색, 리본과 프릴로 장식된 옷을 앞에 두고 가까스로 비명을 삼켰다. 누구의 센스인지 정말 최악이었다. 차마 실내복을 잡아 뜯지는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뒤에서 오드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런. 죄다 내 피부색에는 안 어울리는 것들뿐이네.”

“아가씨……. 제발 목욕 수건 감은 채로 돌아다니지 마세요. 풀리면 대참사예요. 그나저나 미리 초상화를 보냈는데도 이런 옷들이라니. 아무리 마님이 안 계셔도 이럴 수는 없는데!”

“살림을 고모님께서 맡아 하시는데 뭘 더 바라겠어. 고모님 댁의 사촌도 이번에 데뷔한다던데 거기에 온 정신이 다 팔리신 거겠지. 보아하니 급한 대로 어린 아가씨들이 좋아할 법한 걸로 골라 보내신 것 같은데.”

정말 그랬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헨젤 백작부인 대신 헨젤 백작가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사람은 백작의 누이인 그웬 백작부인으로, 그녀는 자신의 딸인 네이기스가 이번에 데뷔탕트를 할 예정이어서 오드리에게까지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다. 오드리가 수도로 온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다가 부랴부랴 의상실을 털어 보낸 옷들이 드레스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색이라니.’

오드리는 드레스 자락에 팔을 가져다 대보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어머니를 닮아 보이도록 정성들여 태운 가무잡잡한 피부색과는 전혀 맞지 않는 가벼운 분홍색과 노란색이었다. 그녀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고모님과 어머님은 사이가 안 좋았지. 일부러 보냈을 수도 있겠는데.’

그웬 백작부인이 들었다면 억울하다 할 의심이었으나, 오드리에게는 퍽 합당한 의심이었다. 어린 오드리를 앞에 두고도 불꽃 튀는 대화를 오죽했어야지.

“데뷔탕트를 치르고 나면 정식으로 살림을 이어받아야겠어. 그동안 대체 어떻게 일을 하셨던 건지 궁금하네. 이디케, 가져온 옷을 꺼내줘.”

“그건 다림질도 못 했는걸요.”

“어차피 입으면 구겨져. 저따위 색의 옷을 입느니 차라리 구겨진 옷을 입겠어.”

이디케는 울상을 지은 채 오드리에게 구겨진 실내복을 입혔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주름을 펴보겠다고 기를 쓰는 그녀를 향해 오드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다이앤도 아니고, 그런 재주 없잖아. 일찌감치 포기해.”

“그러게요……. 다이앤이라면 어떻게든 해냈을 텐데.”

이렇게 두 사람이 입을 모아 아쉬워하는 다이앤은, 오드리를 따라 이디케와 함께 브란젤에 온 다른 하녀였다. 대대로 약초를 다루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서 그런지 손재주가 기가 막혔다.

그 손재주가 기가 막힌 다이앤은 지금 브란젤의 마법사협회 건물 구석에서 오드리의 심부름을 하는 중이었다. 그 심부름이란, 누군가를 만나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로렐라이 상단이 자랑하는 독창적이면서 안정적인 마법 대부분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수식제작 마법사, 워커 크라티우스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 어쩔 수 없이 망가지고 마는 것이 마법의 속성이련만, 워커가 만들어내는 마법은 다른 마법보다 오랜 시간 지속되었고 형태의 제약에서도 자유로웠다. 오드리는 그런 워커를 늘 천재라고 칭했다. 마법 수식 제작의 천재, 그리고 불성실의 천재.

워커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다이앤의 눈길을 피했다. 그가 그럴수록 다이앤의 눈꼬리는 점점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아니, 아직도 안 끝났단 말이에요?”

“금방 돼요. 금방 할 수 있으니까…….”

“아가씨 데뷔탕트가 얼마나 남았다고 금방 같은 소릴 하는 거예요? 워커 씨는 우리보다 훨씬 빨리 브란젤에 왔잖아요. 요구대로 연구실도 숙소도 마련해 줬고 기한도 넉넉했는데 그동안 뭐 하고……. 설마.”

다이앤의 예쁜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짐작 가는 게 있는 탓이다.

“또 그놈의 비마법 비행도구……, 되도않는 연구를 하느라 뒤로 미뤄놨나 보죠? 대체 몇 년이야. 이제 포기할 때 안 됐어요?”

“안 됐는데요. 난 절대 포기 같은 거 안 할 거니 다이앤이야말로 내 연구 두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포기하지 그래요?”

내내 눈을 피하고만 있던 워커가 정색했다. 다이앤은 그의 고집스러운 눈빛을 마주 보다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끝도 보이지 않고 성과도 나오지 않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그가 답답하지만 어쩌겠나. 그녀의 주인도 나무라지 않는 것을 주제넘게 참견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

“알겠어요. 내가 너무 나갔어요. 아무튼 마법잉크에 관해서는 시기가 정말로 중요해요. 금방 된다 같은 말은 그만하고 이제라도 본격적으로 시작해요. 늦지 말란 말이에요.”

“절대 안 늦어요. 아, 정말이지 다이앤도 어지간하네요. 이렇게 볶는 사람은 이디케뿐인 줄 알았더니만…….”

투덜대는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다이앤이 정말 때리고 싶지만 보는 눈이 많아 참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워커는 괜히 어깨를 풀며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막 발표회가 끝난 마법사협회의 로비는 마법사들로 북적거렸다.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권위 있는 마법연구발표회다 보니 모여든 사람들의 면면이 만만치 않다. 학회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잡지에 단골로 이름을 올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흔하게 돌아다녔다.

“워커 씨.”

워커의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헤맸다. 찾는 사람이 있었다. 다들 비웃기만 하는 그의 연구를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 다이앤에게 끌려 나오지만 않았어도 그 사람을 찾아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워커 씨!”

워낙 특이한 은발을 가진 사람이었다. 눈에 띄는 게 싫은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음에도 그 반짝임에 눈길이 갔었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이면 찾아낼 자신이 있는데, 워낙 사람이 북적이니 구분이 어렵다.

아쉬워하며 찾기를 그만두려 할 때쯤, 그 사람이 보였다. 연구잡지를 읽느라 푹 숙인 고개를 따라 특징적인 은발이 흘러 내려와 있었다. 반가워하며 그리로 가려다가, 옷자락이 잡혔다. 워커는 그제야 다이앤 생각을 하고 윽, 혀를 깨물었다.

“다이앤……. 하, 하하하……. 그러니까, 내가 일부러 무시한 게 아니고…….”

“사과는 됐어요. 당신에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예의와 상식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니까. 아무튼, 아가씨 전언이에요. ‘꽤 괜찮은 마법사를 발견했으니, 잘 얘기해서 로렐라이로 영입해 와.’”

워커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는 마법을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서 비마법 비행도구를 꿈꿨다. 당연히,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답이 없는 이단아로 통했다. 그에게 후원을 하는 로렐라이 상단을 두고 돈을 허공에 버린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그런데 마법사 영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가 채 입을 떼기도 전에 다이앤의 말이 이어졌다.

“기차에 특히 관심이 많은 마법사라고 하셨어요. 그것도 마법과 비마법의 조화에 큰 흥미를 보였다고요.”

“아하. 그러니 내 연구로 관심을 끌어서 로렐라이에 영입해 봐라?”

“그렇죠. 매양 돈만 먹는 연구인데 이런 데에라도 좀 써보시라고요. ……아니, 뭐 그 과정 중에 꽤 괜찮은 물건이 나오기도 하니 아주 쓸모없다는 건 아니고요.”

다이앤은 말을 뱉어놓고 너무 심했나 싶어 워커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워커는 그녀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매일 듣는 말이었다. 그의 신경은 다시 그 마법사에게로 쏠렸다. 나가기 전에 잡아야 하는데.

“마법사치고 비마법에 흥미 있는 별종은 드문데. 아가씨는 그런 희귀한 마법사를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다이앤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워커는 아무래도 본인도 그 별종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것만 같았다.

“아가씨 지론대로죠. 인생의 절반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만하네요. 그래서 그 마법사 이름이 뭔데요?”

“셰비언. 성은 밝히지 않았고, 긴 은발이 특징적인 남자예요.”

“셰비언?”

워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셰비언이라니, 본명이라기엔 믿기 어렵고 가명이라기엔 너무 성의 없는 작명이 아닌가. 멜브란트 왕실 소유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곳이 셰비언 성벽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의 의아함을 이해한다는 듯 다이앤이 어깨를 으쓱였다.

“황당한 이름이긴 하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자신의 문장까지 걸고 본명이라는데.”

“끙……. 아무튼 알겠어요. 일 마무리하고 조만간 연락 넣을게요.”

“조만간이 아니라 빨리, 빨리요!”

“알겠다니까요. 마차 탈 줄 알죠? 저기 뒤로 나가면 영업 마차들 많으니까 그중 하나 알아서 타고 가요.”

워커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잡지를 보던 마법사가 나가려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혼자서 잘 갈 수 있죠? 다음에 봐요, 다이앤! 이왕이면 당신 말고 이디케가 오면 더 좋고!”

“아니, 난 뭐 좋아서 온 줄 알아요? 이봐요, 이봐요? 워커 씨!”

다시 뾰족해진 다이앤을 뒤에 내버려 두고, 워커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은발의 마법사를 향해 나아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마법사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기이한 전율이 워커를 관통했다. 마치 눈 덮인 겨울 숲에 발을 디딘 것과 같은 한기가 전신을 감쌌다. 그는 하고자 했던 말을 잊었다.

“……뭡니까? 이렇게 갑자기.”

무례를 책망하는 목소리는 나직한 저음으로, 몹시 듣기 좋았다. 워커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기도 전에, 은발의 마법사가 먼저 워커를 알아보았다.

“아, 그…… 비행도구!”

“예……. 정확히는 비마법 비행도구죠. 제 발표를 진지하게 들으셨던 게 인상에 남아서, 이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 이름은 워커 크라티우스입니다. 당신은…….”

면구한 낯을 쓸며 건넨 소개는 어색했다. 워커가 자신의 모자란 언변을 내심 타박하는 동안, 은발의 마법사는 뭔가 고민에 빠진 듯했다. 그는 괜히 입술을 문지르며 망설인 끝에 후드를 젖히고 얼굴을 드러냈다.

길게 기른 은발이 마치 눈보라처럼 후드 바깥으로 쏟아졌다. 놀라우리만치 아름답게 조형된 얼굴은 조각과 같은데, 얼음 낀 호수처럼 시린 푸른 눈동자가 워커를 향해 빙긋 웃었다. 창피하게도, 워커는 또 말을 잊었다. 정말 놀라우리만치 잘생긴 사내였다. 주변이 다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저, 그러니까…… 미남, 미남이시네요.”

“셰비언입니다.”

조금 전, 다이앤이 언급했던 이름이 이렇게 튀어나오다니.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들었다. 워커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안 그래도 이미 거의 정점을 찍고 있던 호감인데, 이젠 상대의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였다. 그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다른 곳에 가서 좀 더 이야기를 해 보는 건 어때요? 아무래도 일반적이지는 못한 연구라,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분을 뵈니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말이죠.”

“좋습니다. 비마법 비행도구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발상이라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궁금합니다.”

워커와 셰비언은 자리를 옮겼다. 카페 디노, 어두침침하고 소란스럽지만 브란젤의 마법사란 마법사는 죄다 모여드는 가게였다.

워커는 몇 마디 말을 나눈 것만으로도 셰비언이 꽤 괜찮은 마법사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셰비언이 제시하는 마법은 창의적이고, 기발했으며, 그걸 구현할 만한 이론 전개 능력도 준수했다. 그가 로렐라이에 들어온다면, 지금처럼 새로운 마법물품의 개발이 죄다 워커에게 집중되어 있는 아슬아슬한 구조가 바로 개선될 게 틀림없었다.

‘놓치면 안 돼.’

혹시라도 놓쳤다간 일에 치일 때마다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워커는 셰비언을 위해 가벼운 주머니를 탁탁 털어 차가운 맥주를 더 주문했다. 옷자락 안에 넣어둔 로렐라이 상단의 명함을 만지작대며 슬쩍 운을 뗐다.

“셰비언, 혹시 지금 마음에 둔 곳이 있어요?”

“음……. 북방의 셰비언 절벽부터 남쪽 달튼 섬까지 다 돌아봤습니다. 굳이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왕궁 정도?”

“……가보고 싶은 여행지를 묻는 게 아니라, 소속으로 활동하고 싶은 곳이 있는지 물은 겁니다. 왕궁마법사는 꿈도 꾸지 말아요. 당신처럼 기발한 생각을 해내는 사람은 그곳에 안 맞으니까.”

“왜?”

“시키는 일만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겠어요? 안정적인 게 장점이라지만 그 안정 찾다가 지루함에 눌려 죽을걸.”

왕궁마법사에 대한 워커의 평가는 신랄했다. 시키는 일만 할 줄 아는 꼭두각시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게으름뱅이들.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들이야 왕궁에서 일한다 하면 우와, 하고 대단하게 본다지만, 마법사들 사이에서 왕궁마법사는 영 수준이 떨어지는 놈들이라는 게 통설이었다. 시키는 일, 주어진 일에만 매몰되어 있다 보면 멀쩡하던 놈도 바보가 된다나.

“자유 연구가 뭔지도 모를 놈들이 남의 연구 주제를 가지고 허가를 내주느니 마느니 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죠.”

워커는 한참 동안 꽉 막힌 왕궁마법사 놈들에 대한 욕을 한 뒤, 슬쩍 로렐라이 상단의 명함을 내밀었다. 오드리가 셰비언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따로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로렐라이 상단의 일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 특별한 금속 명함은, 로렐라이 상단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었다. 워커는 어깨를 펴고 뻐기듯 명함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셰비언, 여기 어때요?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인데, 분위기가 아주 괜찮아요. 내 비마법 비행도구 연구에도 아낌없이 돈을 대주시는 분이라니까요.”

“흥미롭긴 해도 영 실현 가능성은 안 보이는 그 연구에 돈을 댄다고요? 상단에서?”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열렬하게 토론하던 사람이 할 말이에요, 그게?”

“흥미롭다는 점에서야 좋은 연구 주제지만, 그 이상을 바란다면 어렵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당신이 기차를 발명한 그…… 누구더라…….”

“바일런 섀덤.”

“그렇지. 그 바일런 섀덤도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그 바일런 섀덤을 따라잡을 천재라는 말을 듣고 자란 게 납니다. 두고 봐요, 언젠가는 반드시 내 비행도구가 하늘을 날 거니까.”

워커가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을 했다. 빛나는 자신감이 카페 디노의 낮은 천장을 뚫을 듯했다.

셰비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워커의 얼굴 위로 조금 전에 만난 어떤 아가씨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인상적인 초록색 머리칼을 보란 듯이 반만 묶어 늘어뜨린, 가장 생명력 넘치는 나뭇잎보다 더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아가씨.

흘끗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다가오지 않던 사람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와 제게 말을 걸고, 이름을 묻고, 별것 아닌 말에 크게 흥미를 보였다. 낭랑하게 울리는 웃음소리는 여름날의 파도 소리 같고, 곱게 휘는 눈매는 가을의 초승달 같았다.

‘인상적이었지.’

여행 중 마주쳤던 수많은 이들 중에서도 유독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스쳐 간다면 스쳐 갈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발을 붙들어 매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대로 잠시 쉬어도 될 것만 같았다.

셰비언은 품에서 얇은 명함을 꺼냈다. 용과 꽃이 음각된 금속 명함을 확인한 워커의 눈이 툭 치면 굴러 떨어질 것처럼 커졌다.

“안 그래도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곳이라면 분명 내게 어울릴 거라면서요.”

“어, 그러면…….”

“본래는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잠깐 스치는 만남이었는데 날 얼마나 알겠느냐 싶어서. 특이한 마법사를 만났으니 그저 흥미로 주신 거겠지 싶기도 했고. 하지만 워커 당신을 후원하는 상단이라니 정말로 특이하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정말로 내게 어울리는 곳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입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워커.”

“나야말로! 나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워커는 기쁨에 차서 셰비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손은 마법사답지 않게 단단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아가씨는 대체 이런 마법사를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지? 그분의 등에는 포모스가 업혀 있기라도 한가?’

행운의 여신 포모스는 게을러빠진 변덕쟁이라,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우연히 만난 수준 높은 마법사가 로렐라이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생각을 가졌고, 우연히 로렐라이의 마법을 만드는 워커와 만나고…….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데 어쩜 이렇게 좋은 일들뿐인지, 정말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했다.

그러나 오드리가 워커의 생각을 알았다면 대번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자신이 정말로 포모스를 등에 업고 있었다면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열 살에 집에서 쫓겨났을 리가 있겠느냐고.

게다가 요즘의 오드리에게는 악질적인 소문이 몇 개나 붙어 있었다. 헨젤가의 영양은 고삐를 채우지 못한 야생마와 같다나 뭐라나. 아직 데뷔탕트를 하기 전이라 저택의 대문 밖으로는 한걸음 뗀 적도 없건만, 승마복을 입고 브란젤의 대로를 내달린 효과가 아주 탁월했다.

집안 내부의 평판도 나빴다. 로렐라이의 일을 하기 위해 이디케와 다이앤 이외의 하녀들을 모두 물린 탓에, 기대했던 시중 대신 허드렛일에 투입된 하녀들이 여기저기에 악담을 하고 다녔다.

헨젤가의 아가씨는 고모님인 그웬 백작부인을 싫어해서, 그분이 보낸 옷을 전혀 입지 않는다더라. 의심이 하늘 끝에 닿은 성미라 만탈락에서 데리고 온 하녀들의 시중만 받는다더라. 공부를 싫어하고 매일 밖에 나가 놀기만 해서 피부가 그렇게 까맣다더라.

알신다는 나불대는 하녀들을 내버려 두었다. 핑계는 구차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정식으로 고용한 이들인데 주인이 안 계신 사이에 함부로 해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핑계를 들었을 때 이디케와 다이앤은 당장 쓰러질 것처럼 화를 냈지만, 오드리는 그저 웃었다.

“아가씨는 화도 안 나세요? 성심껏 모셔야 할 아가씨를 불청객 취급하는데요!”

“이런,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좋았겠니? 아무리 고모님이 살림을 맡아 하셨대도 분명 빈 곳이 있었을 거야. 알신다가 그 부분을 메웠겠지. 얘들아, 손톱만 한 권력도 권력이라고 쥐고 놓지 않으려 드는 게 몹시 귀엽지 않니?”

“하여간 우리 아가씨 취향 이상해…….”

“이디케, 아가씨는 어릴 적에도 저러셨어?”

오드리를 모신 지 겨우 삼 년째인 다이앤이 이디케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디케는 거의 울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널 주웠겠니…….”

다이앤이 오드리를 처음 만난 곳은 만탈락의 감옥이었다. 약이 아닌 독을 함부로 다룬 죄로 갇혀 있던 그녀를, 오드리가 그 재주 빼어나다며 데려다 제 하녀로 삼은 것이다.

다이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래.”

이렇게 오드리가 개의치 않으니, 결국 이디케와 다이앤도 고용인들 사이의 소문에 점차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알신다의 방치와 오드리의 방관 아래, 소문은 점차 살을 붙여가며 덩치를 불렸다.

“새로 오신 아가씨 성미가 그렇게 불같다며? 마음에 안 드는 하녀들을 죄다 쫓아내는 바람에 아가씨에게 크게 약점 잡힌 애들만 울며 겨자 먹기로 곁에 남아 있는 거래. 그 약점도 억지로 아가씨가 만든 거 아니냐고 다들 그러더라.”

부엌 하녀가 오드리의 심부름을 온 알렉스에게 고용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을 진지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구니에 과일을 보기 좋게 담아 내밀었다. 잘 구운 쿠키 한 조각은 덤이었다.

“알렉스,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아가씨께 그렇게 붙어 다니지 말란 말이야.”

“저야 시종일 뿐인데 무슨 힘이 있겠어요. 이거면 되는 거죠?”

“그래, 그거 가져가면 돼. 어휴, 불쌍한 녀석. 도련님 직속 시종이란 녀석이 이런 심부름이나 하러 다니고. 자, 이 과자 먹으렴. 내가 너 안쓰러워서 이거라도 먹고 힘내라고 챙겨주는 거야.”

이런 심부름은 도련님도 많이 시키셨는데 뭘 새삼스럽게. 알렉스는 하녀가 준 과자를 입에 물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도련님이 시키는 온갖 잡심부름을 하러 돌아다닐 땐 다들 당연하다고만 하더니, 아가씨가 어쩌다 한 번 시키는 심부름에는 온갖 동정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가씨께서 많이 괴롭히시지?”

아니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턱 걸렸다. 알렉스는 자신의 양심이 시키는 대로 진실을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좋아하는 아가씨가 시킨 대로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잠시간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알렉스의 고민을 제멋대로 해석한 하녀가 쯧쯧, 혀를 차고는 과자를 하나 더 꺼내주었다. 그리고 바쁜 주방일로 다시 돌아갔으니, 잠깐이나마 과자에 눈이 팔렸던 알렉스는 해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소년은 터벅터벅 오드리의 방으로 돌아갔다.

“알렉스! 왔니! 그래, 잘했다.”

“왜 과일 심부름은 저만 시키시는 거예요?”

“네가 가야 풍성하게 담아오거든. 이디케를 보내면 개미 발바닥의 때만큼 가져온단다.”

과일 바구니를 안고 돌아온 알렉스를 오드리가 반색을 하고 반겼다. 그녀는 지금 데뷔탕트를 코앞에 두고 극단적인 식이조절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예쁘다는 오드리와 그래도 일생의 한 번뿐인 데뷔탕트라는 이디케의 힘겨루기에서 이디케가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자신의 신분을 십분 활용해 여기저기에서 요령껏 먹을 것들을 공수하고 있었다.

“이디케 누나가 없을 때 자꾸 뭘 드시니까 누나가 그러는 거잖아요.”

희희낙락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가 정곡을 찔린 오드리가 허연 낯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수업이 싫다고 떼쓰는 하델을 군말 없이 수업에 들어가게 만드는 그런 얼굴이었다. 오드리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는 알렉스의 어깨를 꽉 붙들고 눈을 맞췄다.

“얘, 알렉스.”

“네? 네?”

“사람은 굶기는 게 아니란다. 말 못 하는 짐승도 배는 곯리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니. 배가 고프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자연히 마음도 좁아지고, 머리도 안 굴러가서 결국 될 일도 안 되게 된단다. 허기를 채우는 건 생물의 당연한 본능이고, 배가 고프면 다른 것들은 전부 후순위로 밀리게 되는 거야…….”

횡설수설하고 있지만 결론은 하나다. 배고파서 못 살겠으니 네가 눈 감아라. 알렉스는 한숨과 함께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리는 착한 시종의 빠른 눈치에 만족해하며 냉큼 딸기를 입에 넣었다. 상큼하고 달콤한 과육이 입안에서 뭉그러지는 느낌이 최고였다. 저절로 눈이 풀어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딸기가 좋으신 거예요, 뭔가를 먹어서 좋으신 거예요?”

“먹어서 좋은데 그게 딸기라 더 좋구나.”

딸기를 좋아하시는구나. 알렉스는 마음속의 메모장에 메모 한 줄을 추가했다. 얌전히 수업을 듣고 있는 하델이 알면 참 좋아할 내용이었다. 물론 알렉스도 좋았다.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는 망아지 같던 하델에게 고삐를 채운 사람이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보고만 있지 말고 너도 먹으렴.”

게다가 이렇게 뭐든 좋은 게 생기면 알렉스에게도 꼬박꼬박 나눠주기까지 하는데 말이다. 알렉스는 적당히 배를 채운 오드리가 지나던 하녀들을 불러 과일을 나눠주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분인데 대체 왜 그런 이상한 소문이 나는지, 그리고 아가씨는 그런 소문을 내버려 두는 거로도 모자라 부추기기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알렉스가 이 궁금증을 말로 꺼내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시장에 가서 저녁때나 돌아온다던 이디케가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쳤다. 오드리는 시침을 뚝 뗐지만 허둥지둥 딸기를 숨기는 알렉스를 본 것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한 이디케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아가씨, 다이앤은요? 다이앤은 어디로 보내셨어요?”

울컥 화부터 낼 줄 알았건만, 낮게 목소리를 깔고 묻는 게 몹시 무섭다. 오드리는 일부러 더 어깨를 펴고 뻔뻔하게 나갔다.

“그야 당연히 심부름 보냈지. 브란젤이 생각보다 추운 데다 보석 유행도 달라, 새 천과 보석이 필요할 것 같다 하니 신나서 나가던데.”

이디케는 그만 이를 갈고 말았다. 다이앤은 보석을 미치도록 좋아했다. 수집욕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보는 걸 좋아하는 것이다. 분명 지금도 브란젤 유수의 보석가게에 오드리의 이름을 대고 들어가 실컷 구경하느라 일찍 돌아올 생각 같은 건 다 잊어버렸을 게 틀림없었다.

“아가씨, 다이앤이 늦을 걸 뻔히 아시면서 심부름 보내신 거죠? 다이앤도 저도 다 내보내 놓고 뭔가를 또 드시려고!”

“뭐. 왜. 겨우 딸기 몇 개 먹은 거뿐이야! 중부식 드레스는 코르셋이 지독해서 뭐가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오드리가 신경질적으로 배를 두드렸다. 얇은 드레스를 가슴 아래에서 가느다란 끈으로 묶어 마무리하는 남부식 드레스는 코르셋이 필요 없었기에, 오드리는 브란젤에 와서야 말로만 듣던 코르셋의 끔찍함을 체험하는 중이었다. 숨쉬기도 어렵고, 걷기도 어렵고, 수시로 현기증이 이는 데다 끼니를 챙겨 먹는다지만 평소의 절반도 들어가지 않아 종일 배가 고팠다.

그러나 이디케는 이런 사정을 다 알면서도 봐주지 않았다. 잠깐 있다가 돌아갈 거라면 모를까, 계속 브란젤에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적응해야지 어쩌겠나. 살을 빼서 허리 둘레를 줄이는 게 그나마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길이었다.

“코르셋을 차는 드레스니까 식이조절을 하셔야죠! 아침에는 속이 비었다고 스프! 점심에는 잘 먹어야 한다고 정식! 오후에는 저 몰래 간식을 드시고! 저녁에는 하델 도련님과 저녁을 드시죠! 이래서야 언제 살을 빼실 건데요!”

“운동하잖아, 운동! 승마가 얼마나 살 빼기 좋은 운동인데!”

“안 먹고 운동해야 살이 빠지죠! 먹고 운동해 봐야 근육밖에 더 생겨요?”

“내가 먹어봐야 애들 코딱지만큼 밖에 더 먹어? 그거 먹고 생길 근육이면 숨만 쉬어도 생겨!”

“아가씨께 근육은 이미 넘치도록 있으니까 좀 줄여봐요!”

분명 뭔가 용건이 있어서 왔을 텐데 한 마디도 안 지고 싸운다. 알렉스는 왁왁대는 두 여자 사이에서 슬그머니 몸을 뺐다. 두꺼운 문을 닫자마자 주변이 바로 조용해졌다. 알렉스는 무사히 벗어났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조용한 복도를 총총히 걸어 제 주인에게로 향했다.

“아가씨 날씬하신데. 허리도 개미허리인데.”

입 밖으로 꺼냈다간 쪼끄만 게 벌써 여자 몸매 품평이나 한다고 쥐어박힐 걸 알아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중얼대면서 말이다.

어쨌건 그날 이후로 오드리가 사람을 부려 먹을 걸 공수하는 일은 뚝 끊겼다. 오드리는 데뷔탕트가 얼마 안 남아서 그런 거라고 주장했고 이디케는 자신이 옆에 착 달라붙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주장했으나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오드리가 식이조절에 힘쓰는 며칠 사이에도 소문은 계속해서 덩치를 불렸다. 오드리 옆에 붙어 있는 이디케 대신 다이앤의 감시역이 되어 그녀와 함께 포목점이며 보석상을 돌아다녔던 알렉스는 소문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악랄해질 수 있는지 몸소 경험했다. 그러나 상인에게 따지려 할 때는 다이앤이 막고, 오드리에게 물으려 할 때는 이디케가 막으니 결국 데뷔탕트의 그날까지도 묻지 못했다.

오드리의 데뷔탕트 드레스는 짙은 암녹색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초록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에 가장 잘 맞는 색이라 고른 것이지만, 데뷔탕트 드레스라기에는 지나치게 어두운 색이라 하델은 불만이 아주 많았다.

하델은 한낮부터 치장하느라 정신이 없는 오드리의 주변을 맴돌며 다른 드레스를 입으면 안 되느냐 칭얼거렸다. 겨우 열두 살 소년이라, 드레스 한 벌 맞추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지 몰라서 이러는 것이다- 하고 내내 자신을 달래고 달래던 오드리가 결국 신경질을 냈다.

“이 옷 한 벌 맞추는 데 들어간 공이 얼만데 인제 와서 바꾸라 마라 하니!”

“하지만 누나, 너무 어둡단 말이에요. 다들 환하고 밝은 옷을 입을 텐데 누나만 어둡게 보이는 거 싫어요. 고모님이 보내주신 옷들 환하고 예쁘던데 그거 입어요. 네?”

“나한테는 이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하델, 제발 누나를 그만 괴롭혀 주겠니? 한 번만 더 고모님이 보내주신 드레스 운운했다간 속옷만 입혀서 정원 한복판에 세워놓을 테니 그만하렴.”

오드리는 허언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하델이 겪은 오드리는 그랬다. 체벌하겠다고 했을 땐 정말로 때렸고 저녁을 굶기겠다고 했을 땐 정말로 굶겼다. 속옷만 입혀서 정원에 세우겠다는 건 극단적인 벌이었지만 오드리라면 정말 할지도 몰랐다. 하델은 풀이 죽어 입을 다물었고 오드리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한껏 빈정대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장녀라도 그렇지, 가문의 후계자에게 망신을 주겠다는 말을 쉽게도 하는구나.”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하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오랫동안 출장을 나가 있었던 헨젤 백작이 돌아온 것이다. 많이 늦기는 하였으나, 데뷔탕트에서 가문의 남자에게 에스코트를 받아야 하는 오드리를 위해 시간에 맞춰 돌아온 것일 테다.

“아버지!”

“하델, 잘 있었느냐. 내가 없는 동안 집안을 잘 지켰겠지?”

헨젤 백작이 하나뿐인 아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햇살 같은 애정이 하델의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하델은 망설임 없이 아버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신뢰와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몸짓이었다.

놀라우리만치 서로에게 다정한 부자를 보면서, 오드리는 부친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마구 뛰던 심장이 가라앉고 몸이 빳빳하게 굳어가는 걸 느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열 살에 만탈락으로 쫓겨 간 이후 부친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타박과 야단으로 점철된 편지가 신년인사를 겸해 날아올 뿐이었다.

그런 시간이 무려 칠 년.

열 살의 오드리가 아무리 영특했어도 결국 아이였다. 어머니를 잃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아버지에게 내쳐진 충격이 그녀를 난도질했다. 비뚤어지겠노라 다짐하고 그대로 실행하던 중 워커를 만나고 후원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로렐라이 상단을 만들고…….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이제는 부친 따위 상관없다고,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오드리. 진정해!’

오드리는 자꾸 굳어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긴장을 풀었다. 자신은 이제 열일곱 살이나 먹었는데, 열 살 어린 꼬맹이였던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자랐는데, 자칫하다간 왜 나를 내쫓고 찾지 않으셨느냐, 칠 년은 너무 길지 않았느냐, 볼썽사납게 원망부터 쏟아낼 것 같았다.

‘열일곱 살이야. 데뷔탕트가 코앞이야. 삼 년만 더 지나면 성년이야. 어른스럽게 굴자.’

그러나 그렇게 애쓴 것도 다 헛일. 세월이 스쳐 갔어도 기억과 다를 바 없이 싸늘한 눈을 마주 본 순간, 오드리는 다시 열 살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말았다. 부친의 꾸지람과 호통 아래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어깨를 떨던 그때로.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헨젤 백작은 창백한 낯을 하고 몸을 떠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긋지긋한 짙은 피부색은 물론이고 이목구비마저 자신을 닮은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어디를 보나 죽은 제 어미를 빼다 박았다. 쯧. 그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오랜만에 보는 아비일 텐데, 인사도 안 하는 거냐. 이런 녀석이 무슨 동생 훈육을 하겠다고…….”

“아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셨는지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인사는 남부식일망정 흠잡을 데가 없었다. 헨젤 백작은 표정 없는 얼굴로 딸의 인사를 받았다. 그는 이전에 그랬듯 여전히 오드리에게 싸늘하고 가혹했다. 온기 없는 목소리가 채찍처럼 오드리를 후려쳤다.

“나야 바쁘게 지냈다. 그런데 너는 잘 지낸 것 같지 않구나. 너와 달리 수도 저택에서 자란 동생이 밉기라도 했느냐? 내가 없는 사이 뭔 짓을 했기에 네 말 몇 마디에 그렇게 움츠러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밝은 아이가,”

“하델이 아직 어려 저 하고 싶은 것만을 하기에, 손위 형제로서 벌을 주었습니다.”

“아비의 말을 그리 끊다니, 손위 형제를 운운하기 전에 네 예의부터 확인해 봐야 할 성싶구나. 게다가 하델은 아직 어린아이다. 벌을 주는 것으로 쉬이 가르치려 들지 말고 칭찬할 것부터 찾아야지.”

오드리는 대답을 하는 대신 입술을 꽉 깨물고 마주 잡은 손을 움켜쥐며 버텼다. 지금 이 순간 입을 열면, 그동안 벼려왔던 시간을 모두 헛일로 만들고 말 것만 같았다.

헨젤 백작은 끝내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오드리의 고집스러움이 낯설지 않았다. 그의 딸은 죽은 제 어미와 생김새만 닮은 게 아니라 성격까지 꼭 닮아 있었다.

“됐다. 데뷔탕트에서 망신만 당하지 않게 해라.”

그게 끝이었다. 헨젤 백작은 딸을 안아주지도, 떨어져 있었던 동안의 근황을 묻지도 않았다. 그는 더 가타부타 말을 잇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아버지와 누나 사이에서 흐르는 심상찮은 기류에 당황하던 하델도 헨젤 백작을 따라 나가니, 방에 남은 건 오드리와 그녀의 두 하녀뿐이다.

오드리는 망연히 서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이미 짐작하였건만,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건만, 상상과 실제는 달랐다. 또다시, 그리고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차갑고 무정한 시선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게 축 처진 어깨를 노려보던 이디케가 오드리를 억지로 의자에 끌어 앉혔다.

“아가씨, 앉으세요. 화장을 마저 해야죠. 다이앤, 아무래도 뺨에 홍조를 더 넣어야 할 것 같지 않아? 지금은 너무 창백해.”

“아냐, 괜찮아. 더 칠했다간 데뷔탕트가 긴장되어 술이라도 진탕 마시고 왔느냐는 식의 오해를 살걸.”

이디케도 다이앤도 조금 전의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그리하기로 이미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약속이 너무 버거워, 오드리는 끝내 이디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디케, 내가…… 내가 잘못한 거니? 하델이 바라는 대로 해야 했을까? 그 애에게 화도 내지 말고, 짜증도 내지 말고, 누나답게, 너그럽게…….”

“아뇨. 백작님께서 불공평하신 거죠. 지금의 도련님보다 어린 나이셨던 아가씨가 작문 수업에서 철자 하나를 틀린 걸 두고 멍청하다며 꾸중하셨던 걸 제가 똑똑히 기억하는데요.”

“아가씨, 전 아가씨나 도련님의 어린 시절은 모르지만요, 백작님께서 공평한 분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요. 전 백작님께서 아주 무정하고 싸늘한 분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도련님께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아버지시던걸요.”

이디케도 다이앤도 단박에 오드리의 편을 들었다. 이 순간의 오드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위로였다. 그녀는 다정한 위로의 말들을 소중하게 귀담아들었다.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겨우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을 내저어 하녀들의 입을 막았다.

“그래……. 고마워. 이제 그만 해도 돼. 다이앤, 머리 염색은 빼지 말자.”

“네? 진짜로요? 초록색인데요?”

막 염색약 제거제 통에 빗을 담그던 다이앤이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를 숨기지도 않고 물었다. 오드리의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이면 암녹색 드레스와 멋지게 어울릴 텐데, 자못 우스워 보이기까지 하는 초록색 머리칼을 고수하겠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오드리는 단호했다. 나무라며 지적한 것도 아닌데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하녀 둘 모두 사색이 되었지만, 오드리의 황소고집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아가씨 검은 머리칼이 얼마나 예쁜데 그걸 감추시겠다고……. 어휴, 아까워라.”

“유치한 반항으로 시작한 일이지만은, 이왕 한 거 끝까지 가봐야지.”

“아가씨도 참.”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다이앤은 이후로도 몇 번이나 오드리의 의사를 물었으나 오드리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왕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른 오드리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선명한 초록색이었다.

먼저 마차에 타서 기다리고 있던 헨젤 백작은 딸의 머리색에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만탈락에 처박혀 칠 년을 살았다 해도 정도는 지킬 줄 알았거늘, 설마 정말로 초록색 머리통을 하고 데뷔탕트 무도회에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결국 그는 급하게 보던 서류마저 내려놓고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

“제법 잘 어울리지 않나요? 제 하녀, 다이앤의 역작이랍니다. 만들어놓고도 이렇게까지 어울릴 줄은 몰랐다고 한탄을 했지만요.”

“쓸모없는 재주 때문에 제 주인을 망신시키는 하녀로구나.”

연신 혀를 차면서도 헨젤 백작은 마차를 돌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시간을 썼다. 이제 와서 염색을 빼고 새로 머리를 올리다간 시간에 맞추지 못할 게 뻔했다. 그는 딸의 머리색을 더 나무라는 대신 서류를 마저 보는 편을 택했다.

헨젤 백작도 오드리도 말이 없으니 마차 안은 온통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이디케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오드리의 치마 주름을 잡아주며 흘끔흘끔 헨젤 백작을 훔쳐보았다. 얼굴마저 가물거리는 때에 만난 큰 주인님은 그녀의 기억보다도 더 차고 무정했다.

‘도련님께도 이러시면 본래 이런 분이시다, 생각하고 말겠는데…….’

하델은 햇살 같은 소년이었다. 사랑받고, 사랑하며, 그런 자신의 환경에 대해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소년의 전신에 흘렀다. 꾸밈없는 미소와 다정한 태도, 발랄한 몸짓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곤 했다.

이디케는 그게 하델의 천성인 줄 알았다. 본래 사랑이 많고 밝은 소년이라고만 생각했다. 헨젤 백작이 아들에게는 유독 다정한 아버지가 되는 걸 보지 못했다면 끝내 몰랐을 것이다. 그는 대체 왜 그렇게 자식을 차별하는 것인가. 자문해 보았으나 알고 있는 지식의 배경이 너무나 빈약했다.

이디케가 하델의 성장 배경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오드리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서류 처리에 정신이 팔린 아버지에게 말을 붙일 기회. 그러나 헨젤 백작은 덜걱대는 마차에서 멀미도 나지 않는지, 묵묵히 서류에만 정신을 쏟고 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 이렇게 일이 많을 리가 없는데…….’

헨젤 백작가는 대대로 왕실의 금고지기를 맡아온 가문. 할 수만 있다면 저 서류를 모조리 빼앗아 자신이 대신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니, 오드리는 자꾸 거북이처럼 길어지려는 목을 단속했다.

“아버님.”

“왜.”

“데뷔탕트가 끝나면 에스코트 기사를 붙여주실 거죠? 누굴 염두에 두고 계시나요?”

데뷔탕트를 치르더라도 미혼의 귀족 영애는 혼자서 가문의 저택 밖을 나돌아 다닐 수 없다. 쇼핑이야 귀족 영애끼리 간다지만 그 외의 사교 활동은 얘기가 달랐다. 수석하녀인 이디케가 어디든 함께할 테지만 하녀는 동행으로 치지 않으니, 가문의 뜻을 대변하고 외부에서 귀족 영애를 보호할 남자가 함께해야 했다.

정식으로 혼담이 오가는 사이의 남성이 없다면 가문의 남자가 맡아주는 일이지만, 헨젤 백작은 공무로 바쁘고 하델은 너무 어렸다. 아마도 가문의 기사 중 하나가 그 일을 맡아주리라.

오드리는 자신을 마중 나왔던 카프러스를 생각하고 꺼낸 말이건만, 헨젤 백작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기대에 어긋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사교 활동을 할 거냐?”

“그게 필요해서 저를 브란젤에 두겠다고 하신 거 아니었나요?”

사교 활동은 물 위의 첩보전이다. 이른 아침의 승마 모임, 한낮의 티타임, 저녁의 야회. 어느 것 하나 괜히 열리는 건 없다. 그러나 헨젤 백작가에는 사교 활동에 나설 여자가 없었다. 칠 년은 지나치게 오랜 기간이었다. 아무리 헨젤 가문이 남부의 명가라지만 눈과 귀가 반쯤 막혀 있는데 들어오는 정보가 온전하겠는가.

오드리는 만탈락에 처박아둔 자신을 굳이 불러내 브란젤에 머무르게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헨젤 백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보탰다.

“하델을 위해서라도 사교계에 나갈 사람이 필요하시잖아요.”

“그걸 아는 녀석이, 그따위 차림을 하고 브란젤의 대로를 내달려?”

헨젤 백작이 나직이 화를 냈다. 남자들이나 입는 승마 바지를 걸치고 브란젤의 대로를 내달린 백작 영애의 이야기가 벌써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헨젤가의 영애는 날뛰는 망아지만큼이나 다루기 어려울 것이다.’

살론의 사략해적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들은 이야기가 그따위였다.

꽤 험한 기세의 헨젤 백작을 앞에 두고도 오드리는 그저 태연했다. 그녀는 오히려 큰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나, 그걸 눈치챈 사람은 이디케뿐이었다.

“헨젤의 이름 정도면 다 묻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동이었을 텐데요.”

“정신 차려라. 여기가 만탈락인 줄 아느냐? 만탈락의 시민들은 네가 랄리우스의 피를 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애지중지했겠지만, 이곳은 달라. 브란젤은 멜브란트의 오랜 수도이자 심장이야. 몸가짐을 조심해야 할 거다. 또다시 그따위로 굴면 그때야말로 저택에 가둬놓고 꼼짝도 못 하게 할 테니.”

“네, 아버님. 다음을 말씀하시는 걸 보니 한 번의 기회는 있는 모양이죠. 생각해 두신 기사가 있으신가요?”

“생각해 뒀던 기사는 있지만 네 옆에 붙어 있겠다고 할지는 모르겠구나. 소문이 아주 어마어마해서 말이다.”

모시는 레이디의 평판은 기사의 평판과도 직결된다. 단순히 가문의 아가씨를 모시는 거라도 마찬가지였다. 헨젤 백작은 딸이 스스로 깎아 먹은 평판까지 수습해 줄 의사가 없었고, 그런 그의 성정은 가문의 기사라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소문이 두려워서 데뷔탕트를 마친 딸을 집에 박아두시려고요?”

“말을 조심해라. 박아두다니.”

“기사를 안 붙여주시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겠죠. 기껏해야 쇼핑하러 나갈 때 말곤 나갈 수 없을 테니, 소문이 더 부풀겠군요. 헨젤가의 딸은 사교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어머니가 남겨준 재산으로 사치를 부린다고요.”

헨젤 백작은 무심결에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한 가정이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입안이 버석하게 말라왔다.

‘빌어먹을 랄리우스, 빌어먹을 밀리나.’

죽음의 신 칼레이의 품에 안긴 지 팔 년이나 지난 부인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젠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꼭 닮은 얼굴을 보자 흐릿해졌던 게 다 거짓말 같았다. 크흠, 큼.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었다.

“네 고모에게 부탁해 두마. 네 사촌 오라비가 곧 살론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다고 했으니 마침 좋을 게다.”

“고모님께 살림을 맡긴 것으로도 모자라 딸도 맡기시려고요. 정작 그 고모님은 제 초상화도 제대로 보지 않아 영 맞지 않는 드레스만 잔뜩 보내셨는데 말이에요.”

“오드리!”

“고모님께 딸이 하나 있는 건 알고 계시죠? 네이기스도 이번에 데뷔탕트를 한답니다. 유학에서 돌아온 제 사촌 오라비는 여동생의 에스코트를 하느라 바쁠 거예요. 대체 아버님께서는 집안 살림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동안 네 고모가 얼마나 애썼는지를 알면 네가 그따위 소리는 못 할 게다. 바빠서 미처 챙기지 못한 게 있더라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에스코트 기사에 대해서는 내가 돌아가는 대로 한 명 뽑아 붙여주마.”

“……네, 아버님. 감사해요.”

오드리가 감사 인사를 했지만 그게 헨젤 백작에게 닿았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는 딸의 얼굴을 흘끗 흘긴 것을 끝으로 다시 서류에 고개를 처박았으니 말이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다시 정적에 잠긴 마차는 오래지 않아 왕궁으로 향하는 대로에 접어들었다. 이름하여 영광의 길. 오래전, 긴 전쟁 끝에 멸망 직전까지 갔던 멜브란트 왕국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 개선식을 했다는 길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 유명한 길의 풍경이 궁금해진 오드리가 슬그머니 창문의 커튼을 걷었다. 늦은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작은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단단한 돌이 깔린 길은 오드리의 상상보다 더 넓었다. 옛 양식으로 지어진 오래되고 견고한 건물들은 요즈음의 양식들과는 다르게 우아한 맛이 있었다. 물결치듯 이어진 곡선의 지붕 위로 비둘기 몇 마리가 황금빛 햇살을 가르며 날아갔다.

건물들의 1층은 상점으로 가득 차 거리 전체가 활기로 넘쳤다. 상점들은 각자 자신 있는 물품들을 펼쳐놓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그 상점마다 지나던 사람 서넛이 붙어 구경했다. 동전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왕궁을 향해 줄지어 가는 마차들에게 동경 어린 시선을 보내던 처녀들 몇이 오드리와 눈을 마주치고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면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가할 자격은 없어도 나이가 찬 처녀들이 일제히 혼인시장에 나오는 시기가 바로 이쯤이었다. 기념이 될 만한 값나가는 선물들이 제법 잘 나가는 때이기도 하고.

‘대목이네.’

퍽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상인에게나, 귀족 영애에게나. 이 시기에 로렐라이 상단이 올릴 수익금을 생각한 오드리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영광의 길을 지나, 왕궁의 정원을 지나, 데뷔탕트가 이루어지는 왕비의 궁에까지 왔을 때쯤엔 오드리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호사스럽다기보다는 품격 있게 화려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궁은 작금의 왕실이 얼마나 대단한 위세를 가졌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했다.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은 오드리는 이제 숨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느슨하게 맸다지만 낯설고 갑갑한 코르셋이 그녀의 숨통을 졸랐다. 헨젤 백작은 자꾸만 헐떡거리며 입으로 숨을 몰아쉬는 오드리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그녀의 등을 툭, 쳤다.

“가자. 언제까지 그렇게 굳어 있을 셈이냐.”

마차 안에서는 계속 서류에 코를 박고 있던 헨젤 백작이지만, 막상 궁까지 오자 제법 멀쩡한 에스코트를 해주었다. 오드리는 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금색과 흰색으로 치장된 복도라든가, 보는 것만으로 안목을 높여줄 장식품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숨이 모자란 탓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두 사람은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헨젤 백작은 오드리에게서 깔끔하게도 팔을 빼냈다. 부지불식간에 의지할 곳을 잃은 오드리가 휘청 흔들렸다. 그녀는 곧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쏟아지는 시선 때문에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문을 지키던 시종들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대기실이다. 난 들어가지 못하니, 따로 밖에서 기다리마.”

오드리의 낯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발갛게 익었던 뺨이 어찌 그리 쉽게 창백해지는지 놀라울 정도이건만, 헨젤 백작은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됐어……. 짐작했잖아.’

홀로 남은 오드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달랬다. 뭐 기대할 게 있다고 새삼 매달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눈짓을 받은 시종이 매끄럽게 문을 열었다. 그녀만큼이나 긴장한 채 대기실을 메우고 있던 귀족 영애들의 눈길이 데뷔탕트에 어울리지 않는 암녹색 드레스에 꽂혔다.

‘막 살기로 했는데 뭐가 무섭다고.’

귀족 영애답게, 아가씨답게, 그렇게 사는 걸 집어치운 게 이미 한참 전이었다. 오드리는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새로운 세상, 진즉에 그녀가 접했어야 하는 세상이 눈앞에 있었다. 죄다 집어삼키고 꿀떡 소화시켜 버릴 테다. 바위와 같은 결심이었다.

데뷔탕트 대기실은 오드리의 긴장이 무색해질 정도로 조용했다. 다들 극도로 긴장한 상태라 자신 외의 다른 사람에게 쏟을 신경이 없었던 탓이다. 덕분에 오드리의 암녹색 드레스에 쏟아졌던 시선마저도 금세 거둬졌다. 하녀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라, 다들 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정돈하느라 바빠 보였다.

오드리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긴장을 풀었다.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꾸 애먼 곳으로 달려가는 상상력에 고삐를 채웠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왕비 전하시잖아, 괜찮아…….’

수없이 되뇌는 사이 몇 명의 영애가 더 도착했다. 하얗고 노랗고 꽃잎처럼 살랑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오드리는 겨우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등을 타고 흐르는 긴장이야 여전해도 주변을 둘러볼 정도의 여유가 생겼단 얘기다.

오드리는 왕궁의 인테리어에 관심을 쏟았다. 그녀가 보아온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안목을 높일 수 있다면 좋은 일일 테다. 그녀는 천천히 걸으며 벽에 걸린 그림과 태피스트리를 감상했다.

그런 오드리의 곁으로 한 아가씨가 다가왔다. 옅은 꽃무늬가 들어간 노란 드레스도, 예쁘게 말아 올린 적갈색 머리칼도 꽤 아름답다. 눈 닿는 곳 모두 공을 들인 태가 난다. 오드리를 바라보는 눈에 꽤 짙은 호의가 묻어 있었다.

“오드리 언니…… 되시죠? 저는 그웬 백작가의 네이기스예요.”

“어머나, 내 사촌 여동생을 여기에서 만나네요.”

“와, 역시! 정말 반가워요!”

네이기스는 오드리가 의아해할 정도로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아마도 편히 말 붙일 사람이 없었기에 그런 것이리라 짐작하지만 오드리는 약간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대답을 해주면서 슬쩍 뒷걸음질을 쳤지만, 네이기스는 오드리의 그런 기색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바짝 다가붙으며 미소를 지었다.

“초상화에서 본 것보다 더 멋진 색이에요.”

“네? 뭘 말하는 거죠?”

“그야 당연히 머리카락이죠. 마치 여름의 신록 같잖아요. 오드리 언니가 여름의 숲 가운데에 서 있었다면 저는 언니를 전설 속에나 나오는 정령으로 착각했을 거예요.”

네이기스의 말간 연두색 눈동자가 순진무구하게 빛났다. 오드리는 자신의 팔뚝에 돋아난 소름이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 만나보는 타입의 사람이 낯설어서 그런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썩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좋아요. 언니의 머리카락 색은 정말로 특별하네요.”

“어차피 염색인걸요. 그나저나, 고모님과 함께 초상화를 보신 건가요?”

“네에. 어머니는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을 왜 물들였냐며 혀를 차셨지만 저는 굉장히 부러웠어요. 이 적갈색 머리카락을 보세요. 마른 낙엽처럼 우중충한 색이잖아요.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밝은색으로 염색하고 싶었어요.”

“적갈색 머리카락도 충분히 예뻐요. 말린 장미처럼 우아한 색인걸요. 네이기스의 희고 아름다운 피부를 굉장히 돋보이게 해주네요.”

얼굴은 웃고 입으로는 칭찬하는 와중에도 오드리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하도 끔찍한 색을 보냈기에 초상화를 안 본 줄 알았더니, 보고도 그따위 드레스를 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염색한 게 별로였나? 아니면, 미리부터 길들이기를 시도한 건가?’

어느 쪽이든 오해다. 그웬 백작부인은 정말로 완벽하게 오드리의 데뷔탕트를 잊어버렸을 뿐이다. 물론 늦게라도 신경을 썼다면 좀 더 괜찮은 색의 옷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네이기스를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바쁜 일정과, 피부색이 어떻든 간에 막 데뷔탕트를 치르는 어린 귀족 아가씨라면 당연히 그런 색을 좋아할 거라는 안이한 생각이 결합한 결과물이 그런 끔찍한 드레스로 나타났을 뿐이다.

그러나 오드리가 그웬 백작부인의 그런 사정을 신경 써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만약 만탈락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하고 예전의 조용한 소도시 그대로였다면, 그래서 오드리가 충분한 소지금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이 암녹색 드레스를 맞추지 못했을 게 뻔한데.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어색하게 입고 와서 주눅 들어 있었을 것이다.

‘모른 척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역시 안 되겠네. 곳간 열쇠를 꼭 돌려받아야겠어.’

오드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집안의 일에는 되도록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역시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오드리가 네이기스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데뷔탕트 의식이 시작되었다. 시종이 대기실을 채우고 있던 영애들을 의식이 치러지는 홀로 입장시켰다. 순서는 가문의 작위 순이었다.

현 왕비, 오스미다 일테니아 하루마키스는 세월이 내린 머리칼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준 지혜와 연륜이 등에 걸친 망토보다 더한 위엄이 되어 그녀를 장식했다. 어린 아가씨들은 구름 낀 푸른 눈동자가 보내는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올해의 봄은 몹시 향기롭겠군.”

평년에 비해 데뷔탕트에 나선 귀족 영애가 많아서 나온 말이지만, 데뷔탕트에 평생에 한 번 참석하는 아가씨들이 평년이 어땠는지 알겠는가. 코르셋이 주는 압박감에 헐떡이며 실수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었다.

“레이디 체이니.”

“레이디 콘체라테.”

“레이디…….”

이름이 불린 귀족 영애들은 차례로 오스미다의 앞에 나아갔다. 새하얗게 깔아놓은 융단 위를 홀로 걸어 오스미다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 오스미다가 다가와 드러난 어깨를 부채로 두드리며 축복의 말을 해주고, 새 부채를 나눠주었다.

“그대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오스미다의 축복을 받고 돌아서서 다시 흰 융단을 밟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면 의식이 끝난다. 의식이 끝난 귀족 영애들은 오스미다에게 받은 부채를 꼭 쥐고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썼다.

일련의 과정 모두가 평가였다. 융단 위를 걷는 귀족 영애의 걸음걸이, 표정, 손짓, 몸짓. 이 모든 게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한지, 예법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드레스와 장신구는 어떤 걸 골랐는지. 그 자리에 참석한 귀족 영애들 모두가 평가자가 되어 서로를 눈여겨보았다. 결혼 시장에서 매겨지는 가치의 절반은 이 자리에서 결정 났다.

“레이디 헨젤.”

마침내 오드리의 차례가 왔다. 그녀가 암녹색 드레스 자락을 끌며 융단을 밟은 순간, 잔잔한 술렁거림이 귀족 영애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저런 색 옷감을 쓰다니……. 어울리긴 하지만 때에 안 맞잖아.’

‘헨젤 백작가면 검은 머리가 자랑일 텐데. 염색했나?’

‘피부색이 가무잡잡해. 종일 말을 타고 돌아다닌다던 소문이 진짜였어?’

‘옷 재단 방식이 조금 다른 것 같아. 어디서 맞춘 거지? 저 드레스, 코르셋을 안 쓰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가?’

‘허리를 봐, 코르셋을 안 차고 자란 거 같아. 역시 남부 지방…….’

호기심, 경계, 불쾌함 등등이 뒤섞인 시선이 오드리의 옷자락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오드리는 당당하게 걸었다. 어떤 수군거림도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것처럼.

오스미다는 그런 오드리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슷비슷한 옷과 화장을 한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아가씨라, 좀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드레스 색, 디자인, 장신구, 머리칼 색까지 뭐 하나 평균에 맞는 게 없는데 예법만이 완벽하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무릎 꿇는 동작마저 흠잡을 곳이 없었다.

무도회 드레스를 입어 드러난 어깨는 가무잡잡했다. 얼굴이나 팔이라면 몰라, 평소 드러낼 일 없는 어깨까지 가무잡잡한 걸 보면 본래 피부색이 그런 것일 테다. 설마 멀쩡한 흰 피부를 까맣게 태워왔을 리는 없으니까.

‘헨젤 백작 부인이 남부 출신이었나? ……아, 레이디 랄리우스. 그래. 레이디 랄리우스가 뉴터 헨젤과 결혼했었지.’

오스미다는 아득한 기억을 더듬었다. 멜브란트가 세워질 때 손을 보탰던 명문가, 랄리우스 후작가의 후손들이 딱 저런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데다 점점 손이 귀해진 끝에 멸문했지만, 레이디 랄리우스는 오스미다의 기억 속에서 퍽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레이디 헨젤.”

“예.”

“그대는 먼저 간 헨젤 백작 부인을 많이 닮았구료. 곧은 나무 같은 사람이었소.”

뜻밖의 말에 오드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다급히 다시 숙였지만, 오스미다에겐 그마저도 귀여웠다. 주름진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레이디 헨젤, 그대에게 축복이 있기를.”

오스미다는 오드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복했다. 수십 년 동안 데뷔탕트 의식을 주관하며 수없이 많은 축복을 내렸지만, 이 정도로 진심인 축복은 참 드문 일이었다.

‘왜 이렇게 호의적이시지?’

오드리는 생각지도 못한 호의를 받으며 얼떨떨하게 돌아 나왔다. 오스미다의 호의 덕분인지, 날카롭게 날이 서서 삐죽삐죽하게 그녀를 찌르던 시선들이 퍽 누그러졌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네이기스가 자신을 지나치는 오드리를 향해 속삭였다.

“오드리 언니, 멋있었어요.”

“고마워.”

멋있다, 라는 게 여성을 상대로 적합한 찬사였던가? 오드리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따로 묻기 전에 네이기스의 차례가 되었다.

“레이디 그웬.”

흰 융단 위를 걷는 네이기스는 아름다운 노랑나비 같았다. 얇게 비치는 긴 치마 끝에 장식된 보석들이 샹들리에의 빛을 비추며 화려하게 흔들렸다. 꼼꼼한 머리 손질, 아름다운 드레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게 틀림없는 장신구들.

그웬 백작 부인이 조카마저 잊고 공들인 결과물은 꽤 성공적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부러움과 감탄의 탄식 소리가 울렸으니. 아마 네이기스는 성공적으로 사교계 내에 흡수될 수 있을 것이다.

오드리는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계속 네이기스를 보고 있다간, 가엾은 어머니를 원망하게 될 것 같았다. 죄 없는 동생을 미워하게 될 것 같았다. 지금도 미운 아버지를 증오하게 될 것 같았다.

아가씨다운, 귀족 영애다운 삶 같은 건 이미 오래전에 포기해 버렸는데. 분명 그랬는데, 무언가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부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으로 데뷔탕트 의식을 마친다. 이제 무도회를 즐기도록.”

오드리는 퍼뜩 놀라 눈을 떴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었던 시간이 길었던 건지, 막 모든 축복을 내린 오스미다가 자리를 비우는 중이었다. 그녀는 늦지 않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하마터면 왕비가 나가는데 뻣뻣하게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이런.’

오드리는 뒤늦게 자신의 부채를 확인하고 몰래 혀를 찼다. 섬세하게 자수 놓은 비단을 써서 만든 아름다운 접부채가 반쯤 뒤틀려 있었다.

데뷔탕트 의식 다음에는 무도회였다. 의식에 참여했던 상급 귀족 영애들과, 무도회 참여만 가능한 하급 귀족 영애들, 특별히 무도회 참여를 허락받은 부유한 중간 계급의 여식들, 그리고 그들의 보호자들이 한데 뒤엉키는 거대한 사교장.

바쁜 나머지 마차에서도 서류를 들여다보던 헨젤 백작이지만 이 무도회만은 놓칠 수 없었다. 그는 한참을 헤맨 끝에 구석에 서서 씁쓸한 얼굴로 부채를 들여다보는 딸을 찾아내 팔을 낚아챘다.

“뭐 하는 거냐? 무도회 입장을 하려면 둘이 같이 가야 하는 걸 모르느냐?”

“아아……. 그랬죠, 참. 워낙 혼자 다녀 버릇해서 그만 잊어버렸어요.”

“만탈락에서야 네 멋대로 하고 살았겠지만 여긴 브란젤이다. 잊지 마라!”

그놈의 브란젤. 오드리는 말끝마다 브란젤 타령을 하는 헨젤 백작을 향해 입을 삐죽대고는 얼른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사교 활동을 할 테니 에스코트 기사를 달라 청한 입장에서 데뷔탕트 무도회에 빠질 수야 없는 노릇이었으니.

무도회에서도 오드리의 암녹색 드레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석처럼 끌어모았다. 다들 보기 드문 색상의 드레스를 한 번 보고, 오드리의 얼굴을 보고,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헨젤 백작을 보고도 다가오려는 사람이 없어 두 사람 주변으로 동그란 원이 생겼다.

그 상태로 춤곡이 시작되었다.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춤이었다. 오드리는 자연스레 헨젤 백작과 파트너가 되어 자세를 잡았다.

하나, 둘, 셋, 턴.

하나, 둘, 셋, 턴.

화사한 드레스 자락들이 장미처럼 펼쳐졌다가 나팔꽃처럼 오므라들었다. 헨젤 백작은 왕실 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를 커튼 삼아 딸에게 잔소리를 했다.

“그러게 머리 염색은 좀 빼지 그랬느냐.”

“제 머리가 뭐 어때서요. 왕비 전하도 아무 말 안 하셨는데.”

“여전히 말대꾸는 따박따박 잘도 하는구나.”

“만탈락에 있었으니까요. 아버님께서 짐작하시는 대로, 그곳의 주민들은 제게 동정적이거든요. 제 피부색만 봐도 마음이 약해지는 모양이에요.”

헨젤 백작은 끝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춤이 끝난 뒤, 그는 오드리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딸을 소개하다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싶자 바로 제 누이를 찾아 나섰다.

그웬 백작부인, 메너트 그웬.

메너트는 네이기스를 데리고 무도회장 전체를 누비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고 얌전한 딸은 그녀의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따님이십니다, 라는 칭찬을 들을 때마다 주체할 수 없이 콧대가 높아졌다.

한창 기분이 고양된 상태였던 메너트는 달갑지 않은 남동생의 얼굴조차 꽤 너그럽게 보아줄 만한 상태였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헨젤 백작과 오드리를 맞아들였다.

“뉴터, 넌 여전하구나. 내가 보낸 보양식을 죄다 고양이 밥으로 주기라도 한 거니?”

“누님도 여전히 기운이 넘치십니다. 그러니 하나뿐인 조카쯤이야 충분히 돌봐주실 수 있으시겠죠. 오드리, 인사드리거라. 네 고모님이시다.”

“안녕하세요, 고모님. 오드리 헨젤입니다.”

“어머나……. 정말로 네 어머니를 닮았구나. 뉴터, 걱정하지 말고 가서 일 보렴. 귀여운 조카는 내가 챙기마.”

“잘 부탁드립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대화. 메너트가 보내는 시선은 몹시 날카로울뿐더러 희미한 경멸마저 어려 있었다. 오드리는 무언가 묵직한 것이 목구멍을 간질이는 걸 느꼈으나,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견뎠다. 간지럽다고 토해 버리기엔 아직 일렀다.

헨젤 백작은 금세 오드리의 손을 떨쳐 내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오드리는 메너트의 보호 아래에 놓였다.

메너트는 자신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조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암녹색 드레스, 초록색 머리카락, 가무잡잡한 피부. 제법 얌전한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 어디 껍질에 속을까 보냐. 그녀는 그때까지 잘 접어 쥐고 있던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오드리, 내가 보낸 드레스는 어디에 두고 새 옷을 맞춰 입은 거지?”

“드레스룸에 잘 보관하고 있답니다. 만탈락에서 오래 지냈더니 아무래도 코르셋은 익숙지 않아서……. 부끄럽게도 도저히 못 입겠더군요.”

“……네 어머니도 같은 말을 했었지. 뉴터는 왜 널 만탈락에 보내서는…….”

당황한 네이기스가 제 어머니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메너트가 저를 향해 눈을 치켜뜨자 움찔거리다 손을 놓고 말았다. 그녀는 부모님께 순종하는 착한 딸이었다. 메너트의 시선은 다시 오드리에게로 돌아갔다.

“오드리, 이제는 내가 널 살뜰하게 보살펴 주마.”

“감사합니다, 고모님. 네이기스 정도로 살펴주시길 기대해도 되겠죠?”

“그야 당연하지.”

“정말 안심이 되는군요. 그렇다면 고모님, 제가 지금 몹시 피곤하고 지쳤는데 잠시 쉬어도 될까요?”

메너트는 오드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승마로 다져진 탄력 있는 몸매, 지친 기색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는 건강한 낯빛, 바르고 곧은 자세 같은 것을. 시선을 느낀 오드리가 가볍게 제 허리 부근을 두드렸다.

“지금 저는 숨 쉬는 것도 힘들답니다.”

“……그러렴. 저쪽으로 나가면 휴게실이란다.”

메너트는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부채 뒤에 가려진 입매가 웃고 있는 것을, 네이기스는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다시금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머니, 에이쉬 오라버니가 곧 올 텐데…….”

“오드리가 피곤하다지 않니. 에이쉬를 소개하는 건 뒤로 미루자꾸나.”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메너트는 딸의 뒷말을 단숨에 끊어냈다. 네이기스는 더 용기를 내지 못했고, 오드리는 홀로 무도회장을 떠났다.

하지만 오드리는 휴게실을 그냥 지나쳐 왕비궁의 정원에 발을 디뎠다. 지독한 향수 냄새와 달큰한 술 냄새가 아닌, 이제 막 싹이 돋는 신록의 향기가 갑갑한 폐를 씻어냈다. 절로 심호흡을 하던 오드리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망할 놈의 코르셋…….”

몸이 좋지 않다는 건 진짜였다. 익숙하지 않은 코르셋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아까부터 머리가 어지러웠으니까. 정말 만나야 할 사람은 헨젤 백작이 다 만나게 해주었으니, 조금은 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코르셋을 풀어버리고 싶지만, 사람 없는 정원이래도 겉옷을 다 벗고 속옷 차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코르셋의 압박감을 잊으려 애쓰면서 천천히 걸었다.

다행히 왕비궁의 정원은 오드리의 신경을 죄다 빼앗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휘영청 떠오른 달, 달빛 아래에서 여린 나뭇잎을 흔드는 나무들, 이제 막 피어난 봄꽃들이 풍기는 달콤한 향기, 시원한 소리를 내는 분수가 튀기는 물방울. 사람 형상을 한 꽃들이 모인 무도회장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탓에 아름다운 정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없나?”

오드리는 드넓은 정원을 혼자 차지했다는 생각에 퍽 고무되었다. 어딜 가든 하녀를 비롯한 고용인들에 둘러싸여 있는 게 평생의 삶이었던 그녀가 이렇게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었던 기회가 몇 번이나 되었겠나.

“진짜…… 진짜 혼자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피던 오드리는 슬그머니 치마를 걷고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 정원의 길을 포장한 포석에 살그머니 발을 디뎠다. 밤바람에 식은 돌에서 싸늘한 냉기가 올라와 뒷목까지 시원해졌다. 맨발로 걷는 기분은 아주 색달랐다. 상상했던 이상으로 즐거웠다.

오드리는 맨발로 깡충깡충 걸어 분수대에 다가갔다. 분수대에 빠진 달이 계속 쏟아지는 물에 치여 수십 조각으로 일렁거렸다. 달을 품은 물에 손을 넣었다가, 발을 넣었다가, 물이 튄 치맛자락을 끌고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드리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키 큰 정원수들이 봄바람에 몸을 부비며 달빛을 쪼개 땅에 쏟아냈다. 어떤 샹들리에보다도 더 화려한 조명이었다.

‘춤이라도 출까?’

코르셋을 차고 무도회장에 있을 땐 끔찍하기만 하던 춤인데, 맨발에 닿는 풀의 감촉이 오드리를 부추겼다. 장난 삼아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마치 파트너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잡아왔다. 서늘한 체온이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흠칫 놀라 손을 뺐다.

미간을 좁히고 조심스레 허공에 팔을 휘저어보았다.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달콤한 꽃향기를 실은 서늘한 바람이 드러난 팔과 어깨를 쓰다듬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착각이겠지…….’

그래, 착각일 것이다. 코르셋을 너무 꽉 죄어서 현기증이 난 탓에 착각한 것이다. 오드리는 몇 번이고 중얼거렸지만 춤을 출 마음은 싹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춤을 추는 대신 그저 걷기로 했다.

정원은 소소하게 눈을 즐겁게 할 만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쁘게 장식된 벤치, 어둠을 밀어내는 마법등, 옹기종기 피어난 꽃 등. 오드리는 정말 오랜만에 순수하게 풍경을 즐겼다.

그렇게 밤이 끝날 때까지 걸을 듯하던 그녀는 어느 커다란 나무 아래에 와서 발을 멈췄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 끝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는 가지마다 하얗고 작은 꽃을 가득 매달고 있었다. 꽃이 무거워 가지를 늘어뜨린 모습이 마치 늦은 눈을 얹은 나무 같았다.

“눈이…… 내렸네…….”

바람이 불었다. 흰 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눈송이가 떨어지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쫓겨나 지냈던 만탈락은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도시였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내리지 않는 눈을 바라며 날씨의 신 하랄에게 기도를 올렸는데, 이런 나무가 있었다니. 어쩐지 억울해졌다.

“진작 알았으면 좋았잖아……. 그랬으면, 쓸데없이 기도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텐데.”

오드리의 어머니, 밀리나는 눈을 좋아했다. 내리는 눈을 보면 그리운 풍경이 떠오른다며, 기침을 하면서도 창문의 커튼조차 닫지 못하게 했었다. 만탈락에는 눈이 내리지 않으니 그녀의 그리움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영향을 받은 오드리도 눈을 좋아했다.

‘먼저 간 헨젤 백작 부인을 많이 닮았구료.’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설마하니 왕비 전하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라서, 무척 놀랐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꼭 닮도록 신경 써서 태운 피부색을 생각하면 들을 만도 했던 말이었다.

‘곧은 나무 같은 사람이었소.’

깊이 묻어두었던 그리움이 치밀어올랐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참아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눈앞이 급격히 흐려졌다. 오드리는 다급히 눈물을 닦을 만한 것을 찾았다. 하나 어깨를 드러내고 코르셋을 조인 드레스는 손수건 따위를 가지고 다닐 만한 옷이 아니었다.

닦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끝내 막지 못한 눈물이 흘러넘쳤다. 오드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속눈썹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거뒀다. 눈물로 번진 화장만큼 꼴 보기 싫은 것도 드물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고개를 들었다. 희게 흩날리는 꽃잎은 여전히 눈발 같았다.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꽃잎이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뭔가 오기가 치밀었다. 오드리는 몇 번이고 꽃잎 사이로 헛손질을 반복했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해서야 언제까지고 잡을 수 없을 겁니다.”

“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란 오드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는 바로 돌아보는 대신 빠르게 얼굴과 차림을 점검했다. 다행히 화장도 드레스도 무사했다. 오늘은 데뷔탕트 무도회가 있는 날이고, 이곳은 왕궁의 정원이다. 상대가 누구든 허술한 꼴을 보여서 좋을 게 없다.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목을 가다듬었다.

“누구신지…….”

“꽃잎 같은 걸 왜 잡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선 오드리는 그만 말을 잊었다. 눈처럼 하얀 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선 은발의 마법사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재회였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겨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셰비언?”

“손을 내밀어보시죠.”

얼결에 손을 내밀었다. 셰비언이 얇은 얼음 같은 눈동자에 미소를 띤 채 손짓했다. 그의 손놀림을 따라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허공을 춤추다 오드리의 손바닥으로 빨려들 듯 내려앉았다.

오드리는 놀람을 감추지 않고 웃었다. 기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빛을 다루는 재주를 선보이더니, 이번엔 손짓으로 바람을 조종한다.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재주였다.

“이건 또 무슨 잔재주지?”

“아가씨를 기쁘게 하는 잔재주죠. 기분은 조금 풀리셨습니까?”

“이런 잔재주에는 관심 없어, 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질 않는다. 오드리는 두 손 가득 쌓인 꽃잎을 향해 후, 바람을 불었다. 얇은 꽃잎들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아까부터 목덜미를 간질이던 밤바람이 떨어지는 꽃잎을 낚아채 정원 안쪽으로 꽁무니를 뺐다. 도무지 바람의 궤적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나타나서 놀랐어. 왕궁마법사가 됐나? 내가 준 명함은 끝내 사용하지 않은 건가?”

“그건 아닙니다. 아가씨 덕분에 귀찮은 심사를 다 생략할 수 있었죠.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어. 그대처럼 유능한 마법사를 얻었으니, 다음 시즌 로렐라이의 신제품은 기대할 만하겠는데.”

“이런, 추천해 주신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군요.”

셰비언이 잔잔하게 웃었다. 마치 얼음 위에 비친 풍경처럼 차고 흐릿한 미소였다. 길게 길러 늘어뜨린 은발 덕분에, 그는 마치 초록의 정원에 나타난 얼음요정처럼 보였다. 온통 하얗게 차려입은 옷이 그런 인상을 더욱 부추겼다.

오드리는 의지에 상관없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눌렀다. 그가 로렐라이 상단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이디케를 통해 보고받은 지 이미 오래였다. 그저, 헨젤 백작 영애 오드리 헨젤로서 아는 체 할 수 없는 노릇이라 형식상 물어본 것에 불과했다. 부러 턱을 치켜들고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망가진 부채가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대의 노력 또한 기대해 보지. 그나저나, 오늘은 데뷔탕트 무도회가 있는 날이야. 어느 집안의 영애와 동행한 거지?”

“어……. 무도회요? 어쩐지, 사람이 많더라니…….”

셰비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황당해하는 오드리를 앞에 두고도 정말 몰랐다는 듯이 애꿎은 입술을 매만지며 혀를 찬다. 얼음요정이 인간이 된 듯, 그를 감싸고 있던 신비가 일거에 사라졌다. 오드리는 순수한 의문으로 물었다.

“그럼 왕궁마법사도 아니면서 무슨 수로 왕궁에 들어온 거지? 이곳에 온 이유는 또 뭐고? 당당한 사내인 그대가 데뷔탕트를 치를 것도 아니지 않나.”

“음…….”

셰비언이 드물게 곤란한 표정을 했다. 그는 말을 고르는 것처럼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미소 비슷한 걸 지었다.

“한 번쯤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슬쩍 들어왔습니다. 물론 마법을 썼죠. 제가 이곳에 들어온 건 아무도 모릅니다. 아, 아가씨는 빼고 말이죠.”

“이런, 그대는 정말로 거짓말에 재주가 없군. 왕궁이 어디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고 덜렁 들어올 수 있을 법한 곳인가? 셰비언, 그만한 마법 실력이면 귀족인 내게 존대를 들어도 마땅할 것을, 왜 굳이 가짜 이름을 대서 경멸받기를 자처하지?”

“하하하…….”

오드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셰비언을 노려보았다. 셰비언은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는 것만 같아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평범한 인간인 그녀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뒤가 켕겼다. 초록빛 시선이 집요하게 그의 얼굴에 따라붙었다.

“그렇게 거짓말을 못 하면서 가짜 이름을 대는 것엔 주저가 없다니, 거 참 모순적인 사내야.”

“몇 번이나 말씀드렸다시피, 진짜 이름입니다.”

“그런 걸로 하지. 그래, 왕궁엔 왜 온 건가? 무슨 수를 써서 왔지? 대답을 잘 해야 할 거야.”

셰비언은 몹시 억울해졌다. 자신은 분명 진짜 이름을 댔는데, 저 예쁜 아가씨는 조금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오드리에게로 다가가 한 걸음 차이로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오드리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슬쩍 몸을 굽히고 눈을 맞췄다.

지지 않고 똑바로 부딪쳐 오는 초록빛 눈동자는 마치 한여름의 짙은 녹음 같았다. 셰비언은 깊은 숲, 넓게 팔을 펼친 거대한 나무들 가운데에 덜렁 서 있는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벙긋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름을 사랑했다. 그저 예감에 끌려 멈춘 걸음이 아쉽지 않았다.

“본래는…… 가져가야 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한데,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져서요.”

“무슨 말이지?”

“추위에 떠는 아가씨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는 말이죠.”

셰비언은 제가 두르고 있던 흰 망토를 벗어 오드리에게 씌웠다. 그에게는 한쪽 어깨에 걸쳐 배지와 사슬로 고정하게 되어 있는 짧고 좁은 장식용 망토였지만, 오드리의 가느다란 몸은 장식용 망토에 완전히 푹 감싸이고 말았다.

“이게 무슨…….”

당황한 오드리는 망토를 벗으려 했지만, 망토를 붙든 셰비언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조금도 벗겨지질 않았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오드리의 귀를 파고들었다.

“춥잖아요, 아가씨. 그렇게 어깨를 떨면서 이런 밤에 겉옷도 없이 다니다간 감기 들어요.”

“이런 무례한 자 같으니……! 놔!”

“놓기야 하겠지만, 망토는 벗지 마세요. 아가씨께 드리는 선물이니까, 돌려주려고 하지도 말고요. 선물을 돌려주는 건 예의도 없는 데다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못된 짓이라고 하셨죠?”

명함을 주며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은 오드리가 입술을 콱 깨물었다. 셰비언은 그녀가 망토를 벗지 않을 걸 확신하고 손을 뗐다. 암녹색 드레스에 하얀 망토를 걸친 그녀가 마치 숲의 요정 같아 웃음이 났다.

“그럼 아가씨,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그는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 희극적으로 인사했다. 무대 위의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이라, 오드리는 미간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지금 뭐 하는 장난질…… 윽!”

또,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깔려 있던 꽃잎들이 죄다 솟구쳐 사방에 휘날릴 만큼 강한 바람이었다. 오드리는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바람은 갑작스레 불어 닥친 것만큼이나 금세 멈췄다. 망토를 내린 오드리는 눈앞에 있던 셰비언이 없어진 걸 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정말 잠깐이었는데, 그새 자취를 감추다니. 그가 있던 자리는 풀 한 포기 꺾인 것 없이 싱그럽기만 했다. 걸치고 있는 망토가 아니었다면 선 채로 잠들어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 이것 참……. 장난꾸러기 요정에 홀린 기분인걸.”

오드리는 조금 흘러내린 망토를 고쳐 썼다. 셰비언이 주고 간 망토는 담요처럼 따뜻하고 깃털처럼 가벼웠으며, 새끼양의 가죽처럼 보드라웠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본인도 미처 모르고 있던 추위가 망토 안에서 부스스 녹아 사라졌다.

헨젤 백작과 오드리가 왕궁에 가느라 집을 비운 밤, 하델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낮 내내 재미도 흥미도 없는 수업에 시달린 탓에 물먹은 솜처럼 몸이 피곤한데, 어째 눈은 점점 말똥말똥해지기만 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간절기라 제법 도톰한 이불을 끌어안고 침대 끝에서 끝까지 구르기를 몇 번.

“아, 안 되겠다.”

결국, 하델은 벌떡 일어났다. 소년은 침대 아래 서랍에 넣어두었던 담요와 기름을 넣은 작은 램프를 챙겨 방을 나섰다.

안 그래도 손이 모자란 저택인지라, 야밤의 복도는 그저 조용했다. 하델은 흘끗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둥그렇게 부푼 달이 한창 밤하늘을 내달리고 있었다. 다들 잠자리에 들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소년의 걸음걸이는 좀 더 대담해졌다.

동관 2층의 복도를 다다다 달려 빠져나와, 중앙 본관으로 이어진 구름다리를 건넜다. 한데 쥐죽은 듯 조용한 동관과 달리 본관에서는 하녀들이 깨어서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하델은 갈팡질팡하다 길게 늘어진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자꾸 눈을 비비는 하녀 둘이 찰싹 붙어 속닥거리며 하델이 숨은 커튼 앞을 지났다. 하델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쿵쾅거리고 뛰는 심장을 달래려 노력했다. 여기서 들켰다가는 남몰래 하는 밤산책은 그대로 끝장이 날 게 틀림없었다.

“……언제쯤 오시는 거야? 졸려 죽을 거 같아…….”

“나도 졸려 죽겠어. 아까 벨라한테 물어봤는데, 보통 사교계 모임에 나간 아가씨들은 자정이 훌쩍 지나야 들어오신대. 한낮까지 자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더라.”

“세상에……. 그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깨어 있어야 하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아가씨 하녀들만 깨어 있음 되는 거래. 오늘이야 주인님도 같이 가셨으니 우리도 기다리는 거지만.”

“으, 하루라 다행이지 매일 이러는 거라고 했으면 나 그만둘 뻔했어. 돈도 좋지만 나부터 좀 살고 봐야지. 여기 일이 좀 많아? 사람 좀 더 뽑지. 세탁이라도 맡겨서 망정이지…….”

“그러니까 말이야. 요즘 사람 구하는 데가 얼마나 많은데, 알신다 님은 만날 옛날얘기만 한다니까! 아직도 옛날처럼 하녀 일 아니면 돈 벌 곳이 없는 줄 아나 봐.”

하녀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하델은 조심스레 커튼 뒤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저택 안을 돌아다니는 고용인들을 피해 중앙 계단을 향해 다가갔다. 들킬까 위험한 순간은 계속 이어졌지만,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

저택 본관을 관통하는 중앙 계단은 가문의 위상을 대변하듯 대단히 크고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왁스가 잘 발린 나무 계단은 달빛만으로도 반짝반짝 빛을 냈다. 하델은 여기까지 와서 들킬세라 긴장하며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미끄러질 걸 대비하느라 신발까지 벗은 통에 발은 맨발이었다.

2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지하로. 작은 램프의 불빛이라곤 겨우 앞을 조금 구분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건만, 미로처럼 복잡한 길을 나아가는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긴 복도엔 수없이 많은 문이 있었는데, 하델은 그중에서도 복도의 끝에 있는 문에 손을 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어린 소년의 힘으로도 매끄럽게 열렸다.

방은 지하답게 달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하델은 연약한 램프 불빛에 의지하고서도 능숙하게 마법등을 덮은 뚜껑을 열었다. 묵직한 철제 뚜껑 속에 갇혀 있던 창백한 빛이 주변을 물들였다.

길쭉한 회랑과 같은 구조의 방이었다. 가구라곤 마법등을 올려놓는 작은 탁자들이 주르르 늘어선 게 전부인 방은, 빈 바닥이 아쉽다는 듯 벽 가득히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가문의 시초가 된 초대 헨젤 백작과 그 부인부터 그 다음, 다음…….

하델은 가장 끄트머리에 걸린 초상화에 다가가 그 근처에 놓인 마법등의 뚜껑을 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갈색 머리칼을 틀어 올린 여자의 초상화가 창백한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팔 년 전 사망한 헨젤 백작부인, 밀리나 랄리우스 헨젤이었다.

하델은 익숙하게 초상화 앞에 담요를 깔고 앉아 멍하니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오드리와 닮아 있었다. 다른 것은 오로지 눈동자와 머리칼의 색깔뿐이었다.

“어머니…….”

그리움이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밀리나가 죽을 때 하델의 나이는 고작 네 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머리를 쓸던 손길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과 자신을 보고 지어주던 희미한 미소도.

이전에는 초상화를 보면 그저 그리움만 쏟아졌는데, 어째 오늘은 다른 사람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언제나 다정한 답장을 보내주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냉랭한 누나의 얼굴.

그리워하던 어머니와 꼭 닮은 얼굴이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볼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델은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얹고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누나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아요. 내가 수업을 못 따라가는 게 그렇게 미움받을 일인가요? 난 외국어도, 역사도 정말 질색이란 말이에요…….”

하델은 돈이나 서류보다 검이 좋았다. 언젠가 왕국 최고의 기사가 되어서 산트렘 기사단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다. 가장 용맹하고, 가장 명예로운 기사들의 집단에 들어가 포도송이와 넝쿨이 새겨진 망토를 두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 일단 하델은 헨젤 백작가의 후계자였고, 산트렘 기사단은 실력뿐만 아니라 출신지까지 따지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산트렘 지역 출신이 아닌 하델이 산트렘 기사단에 들어가려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델은 굳은살 박인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뭐……. 난 아직 어리니까, 좀 더 하면 분명 실력이 늘어날 거야. 그러면 누나도 날 좋아…… 좋아해 주시겠지……?”

창백한 빛이 깜박거렸다. 마치 하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그만 픽, 꺼지고 말았다. 마법등에 걸려 있던 마법이 수명을 다한 모양이었다. 우스울 정도의 우연이었다.

하델은 그만 일어섰다. 마법등의 뚜껑을 도로 덮고, 작은 램프 불빛에 의지했다. 긴 방을 타박타박 걸어 방문을 열었다가 흠칫 몸을 굳혔다. 텅 빈 복도를 기대했건만, 문 앞엔 사람이 서 있었다.

깡마른 몸, 잔머리 하나 없이 깔끔하니 넘긴 머리칼, 단정하게 차려입은 치마를 덮은 긴 앞치마.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깜짝 놀라 굳었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하델은 입을 불퉁하니 내민 채로 문을 닫았다. 쾅! 불만에 밀린 문이 큰 소리를 냈다.

“뭐야, 알신다였잖아. 여긴 왜 지키고 서 있어?”

“도련님이야말로 이런 밤에 주무시지 않고요. 또 여기 오신 걸 주인님께서 아시면 불호령을 내리실 겁니다.”

“그래서, 이를 거야?”

“……이만 올라가시죠.”

대답을 피한 알신다가 몸을 돌렸다. 가녀린 마른 등이 넓기도 하다. 하델은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저택 안을 돌아다니던 고용인들은 알신다 뒤의 하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둘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델의 방에 도착했다. 알신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하델의 잠자리를 정돈했다.

“도련님, 자꾸 밤에 깨어 계시면 키가 안 커요. 제발 그 방은 잊어버리시고…….”

“왜 하녀들을 내버려 두는 거지?”

“하녀들이라뇨?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도련님, 이만 주무세요.”

“누나를 두고 입을 나불대는 것들을 두고 말하는 거야. 알신다, 넌 하녀장이잖아.”

이불을 덮어주던 손이 흠칫 멎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지만, 하델은 아까처럼 넘어가 주지 않았다. 커다란 초록색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주인님의 허락이…….”

“알신다, 은퇴하고 싶어? 그만두고 싶으면 일을 대충 하지 말고 사표를 내.”

“…….”

“이만 나가.”

하델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웅크렸다. 알신다는 누에고치 같은 이불 뭉치를 멍하니 바라보다 발소리를 죽여 방을 나갔다. 길쭉한 창문을 통해 달빛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복도는 무저갱처럼 깊고 깜깜하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아무리 헨젤 백작이 집안 내부의 일에 무관심하고, 그웬 백작부인이 알신다를 신뢰한다 한들, 그것만으로 이 저택에서 알신다가 부리는 위세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하델 헨젤.

지금은 열두 살에 불과하지만, 다음 대 헨젤 백작이 될 것이 확실시되는 후계자의 지지가 알신다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오드리의 유모이자 하델의 유모이기도 했던 락시 부인이 만탈락으로 쫓겨나는 오드리를 따라 브란젤을 떠난 이후, 덩그러니 홀로 남은 하델은 알신다에게 정서적으로 상당한 의지를 하고 있었으니까. 헨젤 백작은 고작해야 다섯 살이었던 하델에게 새 유모를 붙여주지 않았다.

‘알신다, 은퇴하고 싶어?’

그래서 하델의 발언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지면 울며 알신다를 찾던 하델에게서, 언제든 손을 놓아버릴 수 있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압력을 받을 줄이야! 배신감, 분노, 후회…….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알신다를 채웠다. 그녀는 둥실 떠오른 달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방에 가는 걸 막았어야 했어.’

오죽 어머니가 그리웠으면 초상화를 닳도록 쳐다볼까 하여 동정심을 갖는 게 아니었다. 그런 그림 따위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들었어야 했다. 이런 멍청이, 할 거면 확실히 했었어야지. 알신다는 자신의 알량한 동정심을 비웃었다.

‘그만두고 싶으면 일을 대충 하지 말고 사표를 내.’

헨젤 백작이 돌아보지도 않는 오드리를 무시하는 것과, 다음 대 후계자인 하델을 무시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알신다는 소문의 근원지 역할을 한 하녀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죄다 이번에 새로 고용한 하녀들이었다. 가느다랗게 잡혀 있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빌어먹을 소개소, 진짜 불을 질러 버리든가 해야지…….”

그녀는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미적대며 건드리지 않고 있던 일을 해치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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