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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001화
리그너스 대륙전기는 뛰어난 기술력으로 가상현실게임을 제작하고 있는 대한민국 굴지의 게임 업체인 Korea사의 최신작이었다.
벌써 8번째 작품까지 발매되어 많은 게이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대표작 대항해시대 시리즈와 고정적인 팬덤을 바탕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연희삼국지 시리즈에 이어 불과 삼 개월 전에 발매한 가상현실 최초의 온라인 게임인 대항해시대 온라인까지.
Korea사는 자신들만이 구축할 수 있는 뛰어난 가상현실 시스템과 게임성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의 인생을 사들였다.
그리고 이런 Korea사의 만행에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이번에 발매된 최신작 리그너스 대륙전기였다.
한화 53만 4,300원. 가상현실게임치고는 저렴한 가격 또한 Korea사의 추종자들을 늘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른 게임회사에서 발매된 가상현실게임의 가격이 60만 원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눈에 띌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었다. 하물며 게임성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 돌풍!
-Korea사의 야심 찬 신작 리그너스 대륙전기. 다시 한번 수많은 게이머를 가상현실로 향하게 만들다.
-화제의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 그 모든 것을 파헤치다.
그리고 리그너스 대륙전기는 발매된 지 한 달 만에 대한민국에서만 무려 220 만장이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윤호 역시 그렇게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구입한 게이머 중의 하나로 Korea사에 인생을 바친 충실한 노예였다.
* * *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피하다니?! 지금 이 상황에서 어디로 간단 말이냐!”
머리 양쪽으로 뿔이 난 여인이 이를 으드득 깨물며 말했다. 그녀의 주위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화려한 마법들이 지면을 두드리고 있었고, 사방에서는 거대한 마법 갑주를 걸친 거인들이 압박해 오고 있었다.
라그나로크. 신들의 전쟁이라고 불리던 전설적인 전쟁이 바로 이러했던가?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법들은 고위급 마족을 단숨에 재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력했고, 거대한 마법 갑주를 걸친 거인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여인의 병사들을 핏덩이로 만들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자리를 지켜라!
마족의 지휘관들이 연신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만마가 머무르는 마왕성이 있는 영지 블라디션은 인간을 주축으로 한 통일 제국, 호 제국군의 공격에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데스 사이더 편대가 모조리 전멸했습니다! 저…… 적군이 너무 강력합니다!”
“폐하! 폐하께서라도 부디 옥체를 보전…….”
“크윽! 네 이놈 호!!!”
마왕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 전황을 뒤바꿀 수 있다면 역사는 수백 번이나 달라졌을 터였다.
연이은 패배로 인해 벼랑 끝에서 펼쳐진 전투였다. 하지만 그 전투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전장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교전에서 아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대륙의 모든 종족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마족의 역사가 여기서 끝이 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호전적인 성격을 지닌 마족의 전투력은 인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상대는 더욱더 강력했다.
강력한 전투 병기인 1등급 마장기에 탑승한 호 제국 영웅의 수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제국의 이름 아래 뭉친 종족들의 고 랭크 병사들은 마족의 최정예 병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전황은 너무나도 크게 기울어져 있었고, 마족은 그것을 뒤집을 만한 여력이 없었다.
“대륙을 통일하겠다는 우리 종족의 꿈이……!”
언제부터 인간들이 이렇게나 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을까?
SSS급의 영웅이자 마왕 쉐르난비체의 머릿속에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마왕성이 함락되면 모든 게 끝이었다. 호 제국의 깃발 아래에 뭉친 다른 종족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쉐르난비체는 마족의 신기 카시아움이자 그녀의 애검 카시아움을 들고 붉은색의 마장기에 탑승했다.
그러고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전투에 몸을 던졌다.
-마왕님이 앞으로 나섰다!
-마왕님을 지켜라! 마족의 긍지를 보여! 인간들 따위 한입도 안 된다고!
-마왕님께 한 치의 오물도 닿지 못하도록 해! 이 새끼들아! 고귀하신 분이 전장에 나섰다!
만마의 지배자인 마왕 세르난비체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무자비한 공격에 속절없이 죽어나가고만 있던 마족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에 비해 뛰어난 힘과 체력, 그리고 전투 기술을 지닌 마족들은 충분히 전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평범했을 때의 일이었다. 호 제국은 마족을 제외한 대륙의 여섯 종족을 지배하에 둔 거대한 제국이었다.
제국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발전된 영지에서 훈련한 고 랭크의 병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역전의 용사들은 아무리 마왕 쉐르난비체라 하더라도 쉽게 여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역시 SSS급 영웅다운 등장이네.”
마족들의 함성과 함께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핏빛처럼 붉은 마장기의 등장에 한 남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이름은 윤호. 호 제국의 황제이자 이 전투를 끝으로 리그너스 대륙을 정복하고 이 세계의 패자가 될 사내였다.
“궁지 몰린 맹수의 마지막 발악에 불과해요.”
“리네, 쉐르난비체는 뛰어난 영웅이자 마족을 지배하는 마왕이다.”
마족을 지배하는 마왕답게 쉐르난비체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최고 등급인 SSS등급의 영웅이었다.
거기에 마족의 신기와 전용 마장기까지 보유한 그녀였기에 호는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황제 폐하. 제 정령들이 맹수를 물리치고 폐하께 이 대륙을 선물할 테니까요.”
“맞아요. 아무리 그녀가 뛰어나다고 해도 폐하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을걸요?”
정령들의 여왕이자 SSS등급의 영웅인 아르넨 리네에 이어 엘프족의 여왕인 엘 유스타시아가 입술을 샐쭉 내밀며 말했다.
쉐르난비체를 향한 찬사에 그녀가 질투라도 하는 듯 토라진 모습을 보이자 호는 가볍게 유스타시아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마장기라 불리는 거대한 마갑 거인들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마족의 지배자이자 SSS등급의 영웅답게 그녀는 1등급 마장기 편대를 상대하면서도 어김없이 자신의 무용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제압당하는 쪽이 어디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녀는 혼자였지만 호 제국의 마장기는 굉장히 많았다.
‘에디터가 없었으면 힘들었을 거야.’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최종 병기 소리를 듣는 무기가 바로 1등급 마장기였다.
그만큼 제작에 필요한 비용과 재료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호는 에디터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가볍게 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마법이 터지는 폭음, 병사들의 함성과 비명이 계속해서 그의 귀를 두드리고 있었다.
* * *
현재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에 대항해시대 온라인과 함께 가상현실게임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Korea사의 신작 리그너스 대륙전기.
일찌감치 게임 오브 더 이어, 일명 Goty라 불리는 권위 있는 게임상을 모조리 싹쓸이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리그너스 대륙전기는 ‘대륙전기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게이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싱글 플레이 가상현실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에디터라는 존재였다.
물론, 에디터를 좋아하지 않는 게이머들도 있었다. 진정으로 게임의 재미를 즐기기 위해서는 에디터를 기피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는 거고.”
게임이란 게이머들의 즐거움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 현실만 해도 엄청난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리는데 괜히 게임 속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게 에디터를 사용하는 이들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호는 에디터의 존재는 게임의 진정한 즐거움을 해한다고 여기는 진성 게이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무시무시한 난이도는 호 역시 에디터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런 에디터의 힘을 바탕으로 호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보기 전까지 단 하나의 영지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마왕성이 있는 피의 영지 블리디션이었다.
띵동.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전투 성과를 결산 중입니다. 3…2…1. 결산 완료. 이번 전투의 성과 등급은 A랭크입니다. 경험치를 144,350 획득했습니다.
-총대장으로 전투를 지휘해 승리를 거뒀습니다. 20%의 경험치를 추가적으로 획득합니다.
-SSS등급 영웅 쉐르난비체를 포로로 붙잡았습니다.
-S등급 영웅 리스티 든을 포로로 붙잡았습니다.
-S등급 영웅 사운더러스를 포로로 붙잡았습니다.
마왕이자 SSS등급의 영웅인 쉐르난비체를 상대로 한 마족들과의 마지막 전투는 호 제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마족이 아무리 전투적인 종족이고 쉐르난비체의 능력이 하늘을 찌른다 하더라도 에디터라는 만능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끝났다…….”
호! 호! 호! 호우!
블라디션을 함락하고 수도로 돌아오자 백성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대륙의 통일 군주가 된 호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 목소리는 호 제국의 수도 ‘부산’뿐 아니라 중심 도시인 서울, 대구, 청주, 뉴욕, 파리, 상하이 등에서도 외쳐지고 있었다.
“폐하! 축하드리옵니다!”
“여신의 꾐에 빠져 있던 만마의 지배자까지 제압하시다니……. 당신이 장담했던 대로 정말 이 대륙을 통일했네요.”
금실로 수가 놓인 망토를 펄럭이면서 부산의 알현실에 들어선 호가 옥좌에 앉자, 호의 뒤를 따르던 영웅들이 호를 향해 찬사를 늘어놨다.
그들 대부분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지닌 여인들이었다.
정령여왕 아르넨 리네를 비롯해 이레네 아르티아, 엘 유스타시아등.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대표하는 SSS등급의 영웅들이었다.
그들의 찬사를 끝으로 호의 눈앞에 게임의 끝을 알리는 엔딩 스크롤이 나타났다. 하지만 호의 시선은 엔딩 스크롤에 향해 있지 않았다.
‘소중한 내 영웅들…….’
환하게 웃고 있는 영웅들의 얼굴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스치듯 머릿속을 흘러갔다.
그리고 게임은 끝이 났다.
“후우…….”
가상현실에서 현실로 돌아온 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많은 것이 담긴 한숨이었다.
캡슐에서 몸을 일으켜 나온 호는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오랫동안 정신을 집중했더니 몸이 니코틴을 원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난이도…….”
장장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인가? 그것도 에디터를 사용한 플레이였다. 에디터를 사용하지 않고 플레이했던 초창기의 기억을 떠올리니 절로 이가 갈렸다.
비록 에디터의 힘을 사용해 엔딩을 봤다고는 하지만 호는 에디터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보고 싶었다.
에디터를 사용하지 않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진정으로 게임을 즐기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게이머의 자존심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실제로 처음의 플레이는 에디터를 쓰지 않고 게임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지.”
전통적으로 Korea사의 게임들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더럽다는 표현이 돌 정도로 극악한 난이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런 난관을 우습게 이겨내는 재능 있는 플레이어들 역시 적지 않았다.
어쨌든 호 역시 나름 잔뼈가 굵은 플레이어였다. 에디터를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에 도달할 자신이 있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게임 막바지에 이르러 엔딩 루트를 잘못 타면서 도저히 극복해 낼 수 없는 상황이 오자 결국 금단의 비술을 쓸 수밖에 없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엔딩은 봤다. 하지만 똥을 싸고 뒤를 안 닦은 기분이 이러할까?
에디터의 힘을 이용해 게임을 클리어하기는 했지만 찝찝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게다가 엔딩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급하게 게임을 클리어하느라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많은 이벤트들을 뛰어넘기기도 했다.
진정한 게이머라면 그런 소소한 것들까지 모두 즐겨야 하는 법인데 말이다.
“후…….”
그런 생각을 하며 흡연의 시간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온 호는 물끄러미 가상현실캡슐을 바라보다가 자리에 누웠다. 게임을 너무 오랫동안 즐겼기 때문일까? 지금은 일단 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