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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43) (243/268)

243.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 (11)

“오랜만이에요, 할머니!”

“하빈 양!”

하빈은 오랜만에 컨티뉴의 코니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코니는 하빈의 정체를 알고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피데스의 동생인 것도 놀라웠는데, 단신으로 관리자를 쓰러뜨리고, 킬스크린 연합군까지 데려와서 인류의 승리를 이끌다니.

“하빈 양이 대단한 인재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로 몰랐군요. 그것도 모르고 겨우 컨티뉴의 후계자로 앉히려 했다니…….”

고래를 어항에 가두려던 행위나 다름없지 않은가. 뒤늦게 멋쩍어하는 코니의 반응을 보며 하빈이 의아한 낯을 했다.

“엥? 저는 후계자 자리 좋았는데요?”

지분 준다고 해서 설렜는데!

“……정말인가요?”

코니는 바로 반색해서 일어서려다, 겨우 진정한 듯 다시 찻잔에 손을 올렸다.

“흠흠, 그래도 이렇게 인기 많은 하빈 양을 우리가 멋대로 데려갈 순 없겠지요. 그래도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저야말로 항상 도움 주셔서 감사해요.”

하빈이 감사의 인사를 하며 접시에 놓인 쿠키를 집어들었다.

사실 관리자를 처치하고 나서 하빈은 어딜 가나 사람들이 따라붙었는데, 솔라리스와 SPES, 컨티뉴에서 보내준 경호원 인력 덕분에 큰 불편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렇죠? VIP를 위한 경호 서비스는 언제든 하빈 양을 위해 준비되어 있답니다.”

그 말에 하빈은 눈을 굴렸다.

‘……알아보니 VIP한테도 원래 안 해주시던 거라던데.’

아무리 컨티뉴라 해도 VIP에게 그렇게까지 대우하지 않는다. 그동안 코니의 개인 경호 인력을 활용해 도움을 주었던 모양. 그 친절에 보답할 방법은 모르겠지만.

“……할머니,”

하빈은 일단 찾아온 본론을 말하기로 했다.

“만약에 말이에요, 혹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시겠어요?”

“…….”

하빈의 물음에 코니가 찻잔을 들던 손을 멈추었다. 그 물음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하던 코니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만약’에 대해 묻는 건가요? 아니면 할 수 있는 걸 실행할지 물어보는 건가요.”

예리한 지적이었다. 하빈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코니는 웃으며 덧붙였다.

“이 나이 되면 떠보는 것과 진심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답니다.”

“으음, 저는 그 나이 되어도 못할 것 같은데요.”

“하빈 양은, 원래 그런 ‘만약’을 입에 담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해요. 할 수 있는 일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거라면…….”

코니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빈 양이 선택하는 대로 하는 게 맞다 생각합니다. 과거 중 반드시 고치고 싶은 일이 있는 거겠지요?”

“네. 그걸 실행하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코니는 명실상부 제작계의 큰손. 시간을 돌리는 아이템을 만드는 일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비밀 유지 측면에서도 믿음직한 인물.

하빈은 이참에 게이트 사태 전까지 되돌리려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게이트 사태를 사라지게 할 경우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어 버리니까, 그 부분을 보정하려고 하거든요.”

“오, 그런 부분까지 생각했다니. 보통 영화에서 시간을 되돌릴 때는 본인 일 외의 다른 나비효과는 생각하지 않던데. 흥미로운 접근이군요.”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니까요.”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죠?”

코니의 물음에, 하빈은 그동안 지세와 논의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러브라인은 안 바뀌게 두자는 주의에요. 기억이 없더라도 지금 연인이 된 사람들은 시간을 되돌린 후에도 운명처럼 만나는 순간들이 있도록. 그래서 지금 게이트 사태 이후로 태어난 아이들은 그대로 태어나는 방향으로…….”

“전생에도 현생에도 이루어질 운명 같은 사랑이 되겠군요. 은근히 낭만적인 구석이 있네요.”

“그리고 게이트 사태로 성공한 사람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지금 세계에서 성공한 만큼의 ‘운’을 보장해 주려고요.”

게이트 사태 이후 각성해서 승승장구했던 사람이라면, 평범한 세계로 바뀐 후에도 그 정도 성공을 할 만큼의 운이 연달아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는 개인의 몫이겠지만요.”

“그 정도는 개인의 몫으로 남겨둔다는 거군요. 나쁘지 않아요.”

어차피 게이트 사태 이후와 완전히 똑같게 흘러갈 수는 없다. 그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삶에서 이루었던 성취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그만큼의 가능성을 열어 둘 뿐.

“저라고 해서 완벽한 세상을 만드는 건 무리라는 걸 알아요. 그럴 자격도 없고. 그냥 최선을 다한 거죠.”

“그 정도면 ‘게이트 사태’로 벌어진 불행만 걷어낸 채, 좋은 일들만 잘 남겨둔 것 같은데요. 그래도 굳이 내가 첨언하자면…….”

그 외의 다른 세부적인 부분들이나 문제가 될 부분에 대해서 코니는 즉석에서도 좋은 조언들을 많이 해주었다. 하빈은 그걸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감사해요! 이거면 더 빨리 완성할 수 있겠어요.”

“이 정도 계획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해 보면 좋은 결과가 생길 것 같군요.”

“역시 할머니에게 상담하길 잘했네요. 아무래도 아이템을 제작하는 거다 보니 이쪽 분야의 혜안이 필요했거든요.”

“제작 과정에서도 궁금한 점이 있거나 추가 재료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돕도록 하지요.”

흔쾌히 대답하는 코니를 보며 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코니 할머니는 과거로 같이 가실 생각이 없으신 건가요?”

그랬다. 코니는 하빈의 계획에 신이 나 동참하면서도, 정작 본인을 회귀 명단에 끼워 달라 말하지 않았다.

하빈의 물음에 코니는 고개를 저었다.

“오래 살다 보면, 그만큼 미련도 많이 덜어내게 된답니다. 나는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게이트 사태가 없는 세상을, 아무것도 모른 채 편안하게 살아보는 일도 나쁘지 않을 테니.”

“정말 반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컨티뉴를 일구신 게 사라질 수도 있는데.”

코니 역시 게이트 사태의 수혜자다. 게이트 사태가 사라지면, 제작계 아이템을 만들던 컨티뉴라는 회사도, 없는 일이 될 거다.

“그래도 똑같은 운을 보장해 준다 했으니, 다시 살아도 컨티뉴 못지않은 좋은 사업을 하지 않을까요? 난 내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코니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가진 걸 잃을까 봐 겁먹어서 눈앞의 좋은 길을 마다하는 건, 사업가로서도 어리석은 짓이죠. 게이트 사태를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있는데 겨우 컨티뉴의 주인 자리 지키겠다고 그걸 훼방 놓을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게이트 사태가 없다면, 던전이 안 생긴다면 내 제자도 죽지 않으려나요. 던전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은 제자가 있는데.”

“……아마 그분의 죽음도 없던 일이 될 거예요.”

던전과 관련되어 죽었던 사람들은 그 죽음이 없던 일이 될 것이니까. 아마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지만.

“그거면 충분하군요.”

코니는 정말 미련 없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시간을 되돌리는 일에 무엇이든 돕도록 하죠.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시간을 되돌린 후에도 우리가 친하게 지낼 수 있겠죠? 내 욕심이긴 하지만…… 내가 기억을 못 한다고 해서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면 섭섭할 것 같은데.”

장난스럽게 묻는 코니의 말에 하빈은 냉큼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때도 코니 할머니와 친해질 수 있게 제가 먼저 다가가도록 할게요.”

하빈의 대답에 코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완벽하군요.”

* * *

그렇게 시간 돌리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하빈은 보고 싶었던 드라마도 보고, 여행도 다니며 리스트를 하나하나 채워 나갔다.

“버킷 리스트는 꽤 채웠지.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는 빠듯해서 못 했지만.”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잔하는 건?”

“모히또 생각보다 입맛에 안 맞아서 이번에도 복숭아 주스 먹었어!”

[그럼 결국 버킷 리스트는 언제 채우는 거냐?]

“돌아가고 난 뒤에도 마저 채우면 되지, 뭐!”

하빈은 그 옆에 있는 <같이 회귀할 사람 손~!> 리스트를 흘끔 보았다.

성좌들과 킬스크린 인원들, 그리고 채남매와 현시우는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게에에옹(나도!)

“그래그래. 까망이 너도 같이 가자.”

게이트 사태가 없던 일이 되어도, 리베와 까망이는 기억을 가진 채 함께 데리고 갈 예정이었다.

“시간을 되돌리면 거기에는 강태서도 있겠지.”

-게에옹?(그럼 나도 그 인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거냐?)

“음…….”

게이트 사태가 일어나기 전의 강태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상태의, 관리자나 마이너 패치와 엮이기 전의 강태서.

그간 겪었을 마음고생이나 트라우마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그 일들을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는 게 그 애한테는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까망이 널 기억 못 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어?”

-……게오옹, 게에엥.(……나는 원래 인간이 멍청해도 항상 봐줬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음, 뭐라고 하는 거지? 알아들은 게 맞으려나?”

-께에오! 께에오! 께에, 께오오오!(역시 너도 멍청한 인간! 못 알아들으면서 왜 물어보냐? 내가 이렇게 참으면서 산다!)

흠, 성질내는 거 보니 알아들은 것 같기도?

고양이치고 꽤 진지한 표정으로 하빈을 바라보는 까망이. 그 모습을 기특하게 쳐다보던 하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까망아, 우린 평화로운 시대로 갈 거기 때문에 거기서는 함부로 능력을 쓰거나 변신하고 그러면 위험해.”

잘못하면 동물농장이나 세상에 요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당함은 물론, SNS를 타고 스타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 각종 국가기관과 실험실의 러브콜을 받을지 모른다.

“고양이인 척 잘 할 수 있겠어?”

하빈의 말에 까망이는 재깍 고개를 끄덕였다.

-게에옹, 게옹!(물론이다!)

까망이는 고양이답게 꼬리를 살랑, 흔들어 보이며 애옹애옹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똑똑해 보이긴 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태서가 이런 애를 출연료 받겠다고 ‘세상에 요런 일이’에 제보할 녀석은 아니니까.

하빈은 까망이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한창 서류를 보던 채지세가 끼어들었다.

“이제 거의 완성인데. 마음의 준비는 됐어?”

“엥? 벌써?”

“물론이지, 빨리 끝내고 싶어서 시우랑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아니, 언니 언제부터 현시우를 현시우라고 부르고 그래?”

“알고 보니 동갑이더라고. 친구 먹으면 좋지 않아?”

“으음.”

“알고 보니 게이트 사태 전에 다니던 대학교도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더라고. 돌아가면 같이 등교하기로 했어.”

“뭐어? 둘이서 등교한다고? 나 빼고 둘이 등교라니!”

하빈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지세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에이, 당연히 하빈이랑도 같이 등교해야지! 그만큼 너희 집에 자주 갈 거라는 뜻이야. 넷이서 자주 같이 등교하자.”

“……넷?”

“지석이가 말 안 했어? 걔 합격했던 학교가 너희 집이랑 가깝잖아.”

마포구에 거주하고 있는 하빈. 그러고 보니 채지석의 학교가 연희대라고 했었나. 합격하자마자 게이트 터져서 입학도 터졌던…….

그 사실을 곱씹던 하빈이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뭐야! 다 대학생이고 나만 고딩이야! 이럴 수는 없어! 나 공부 다 까먹었다고!”

돌아가면 다 대학 가는데, 현하빈 혼자 수험생활을 시작하게 생겼다!

“드디어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탈출하나 했는데 슼하이캐슬 세계관이 기다리고 있다니! 내 인생 왜 이래!”

그게 안쓰러웠는지 조용히 있던 채지석이 응원의 말을 던졌다.

“공부하다 모르는 문제 있으면 도와줄게. 나 아직 공부 안 까먹었거든.”

“흥, 됐어! 본인은 대학 합격 따 놓은 당상이라 이거지?! 이 기만자들!”

“간 김에 신촌 맛집 많이 알아보고 데려갈게.”

“그건 꽤 솔깃…… 아아니, 말 돌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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