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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42) (242/268)

242.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 (10)

“게이트 사태 직전으로 시간을 돌릴 거라고?”

채지세, 현시우, 하빈의 회의 결과는 바로 이것이었다.

관리자가 없는 상태로 세계의 시간만 뒤로 돌려 게이트 사태 직전으로 간다. 그렇게 게이트 사태 자체를 없던 일로 한다.

그럼 애초에 게이트 사태 따위는 안 일어난 채로 세상의 역사는 다시 쓰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물론 하빈은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지인들에게만 이 계획을 공유했다. 마계의 사람들이라거나, 리베, 까망이, 레몬, 성좌들과 현시우, 채남매.

마침 지금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채지석이었다.

“그게 가능해?”

“시스템을 쓰면 가능하지.”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정 건드리고 뭐 복잡한 게 있긴 한데, 현시우가 좀 안다고 하더라고.”

1회차 때 회귀 아이템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과정을 옆에서 열심히 지켜봤던 게 현시우였다. 하빈도 제작에 참여하긴 했지만 채지세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지금 하라고 하면 못 할 거다.

‘그래도 현시우가 잘 기억해 놨으니 지세 언니랑 다시 만들면 되겠지!’

1회차 때 만든 회귀 아이템은 정석으로 시스템에 접근한 게 아니었고, 관리자의 견제까지 있어서 제대로 시간을 돌리지 못했다.

게이트 사태 직후로 돌리는 게 그 당시의 한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전으로 돌려서, 게이트 사태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단 말씀!”

“……와.”

그 말에 채지석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로 된다면 대박인데? 사실 우리, 게이트 사태로 잃은 것들이 정말 많잖아.”

비록 헌터의 시대가 도래하고 각 국가들이 극적으로 회복했다지만 게이트 사태는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전의 수많은 추억과 일상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테니.

“그런데 그걸 돌릴 수 있으면…….”

말을 잇던 채지석이 무언가 떠올린 듯 잠깐 얼굴을 굳혔다.

[? 왜? 무언가 문제라도 있느냐?]

‘그게 아냐, 잘잘.’

하빈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채남매는 게이트 사태로 부모님을 잃었다. 현하빈처럼.

“…….”

“뭐, 나도 처음엔 그것 때문에 시작한 계획이었어. 부모님을 앗아간 게이트 사태를, 아예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거든.”

하빈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 제일 필요한 건 랭킹 1위니 마이너스 1위니 하는, 기자들이 쫓아다니는 귀찮은 자리 따위가 아니라, 그냥…….”

그냥 이전처럼 그녀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던 삶. 그걸 무척 그리워했었다. 그래서 1회차 때 눈 딱 감고 굴렀던 거다. 그걸 되돌릴 희망 하나만 보고서.

“그게 아니고서야 뭐 하러 이렇게 귀찮게 나서? 안 그래?”

“……나도 그 목표에 대해서는 동의하긴 해.”

침묵하던 채지석이 말을 받았다. 비록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채지석 역시 부모님의 빈자리를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긴 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어떤가? 방법이 보이면 실행하고 싶을 수밖에.

생각지도 못한 희망에 채지석은 더 적극적인 태도로 물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회귀하는 거야? 설마 현하빈 너 혼자 시간을 거슬러 갈 셈이야?”

시스템을 양도받은 현하빈이니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관리자를 되살리지 않은 채 세계의 시간만 뒤로 돌릴 수 있었다. 게이트 사태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은 물론이다.

하빈은 즉답했다.

“엥 나 혼자 돌아간다고? 절대 안 되지!”

[보통 웹소에서는 주인공이 혼자 회귀하는 게 국룰 아닌가?]

“뭔 소리야! 혼자만 회귀하면 얼마나 외롭겠어? 어? 내가 주변에 그렇게 겪어본 사람 아는데, 외로웠다고 하더라고!”

물론 여기서 ‘주변에 겪어본 사람’은 현시우를 말하는 거다. 현시우는 회귀 사실을 오픈하자마자 하빈에게 한참 하소연을 했었다.

‘나 혼자 회귀해서 구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거기다 이걸 누구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지. 이게 얼마나 고생이었는데.’

‘너 진짜 나 한 번만 더 혼자 회귀시키면 가만 안 둔다!’

그래서 절대 현시우 혼자 회귀시키는 일은 다신 없을 거라고 특별히 약속까지 해주고 왔다.

채지석 역시 그 부분을 강조했다.

“맞아 현하빈, 혹시라도 너 혼자 회귀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마. 그럼 우리도 섭섭하다고.”

현하빈이 혼자 회귀한다면, 지금 이런 기억과 관계가 다 없어지는 거 아닌가. 마치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데, 이 중에 누구 한 명만 회귀하면 나머지는 겨우 친해진 거 다 까먹을 거 아냐.”

“그래! 그러니 안 된다고. 혼자 회귀하는 건 절대 안 되지!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데!”

그럼그럼. 하빈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어? 웹소에서도 주인공 혼자 회귀 안 해. 동반회귀가 대세라니까?”

“그럼 누구랑 회귀해?”

채지석이 재깍 물었다. 상당히 기대감을 품고 있는 걸 보니,

“채씨도 회귀하고 싶어?”

“당연하지! 아까도 말했잖아, 우리 관계나 기억 잃는 건 안 된다니까.”

“좋아좋아, 그럼 일단 채씨랑 언니는 같이 가는 거고…… 흐음, 능력도 그대로 가져가는 게 좋겠지?”

“그것도 돼?!”

“당연하지.”

근데 평화로운 세상에서 각성자 능력 가지고 있으면 생태계 교란 아닌가?

‘뭐, 어지간히 잘 하지 않겠어?’

여기, 시스템 능력 갖고 있는 -1위도 그대로 갈 생각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하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충 넘겼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본인도 데려가야 한다며 열심히 손을 듭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성좌 계약도 그대로 두면 안 되겠냐고 물어봅니다!]

“그래그래, 반짝이도 추가하도록 할게!”

하빈이 수첩에 슥슥 이름을 적었다. 채지석이 수첩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어? 그거 원래 버킷 리스트 적던 수첩 아니야?”

“웅. 근데 여백이 남길래. 옆에 회귀할 사람 명단도 적고 있어.”

이번 리스트 제목은 <같이 회귀할 사람 손~!>이었다.

“까망이도 데려갈 거고 리베도 데려갈 거고…… 흐으음.”

하빈이 리스트를 점검할 때였다. 채지석이 떠올랐다는 듯 끼어들었다.

“잠깐, 그런데 마계 인원이랑 킬스크린은 어떻게 해?”

게이트 사태를 아예 없던 걸로 수정해 버리면, 킬스크린도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러기에 마계나 97층과 쌓은 추억도 있고, 다른 층 사람들도 그들을 도와 열심히 싸웠는데.

“아하, 그 점은 걱정 마.”

하빈이 마침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킬스크린은 ‘지구’랑 좀 많이 다른 세계잖아? 다른 차원이나 다른 우주로 여겨질 만큼.”

지구 사람들의 견해는 그랬다. 킬스크린의 도움을 받은 지금도 사람들은 ‘킬스크린’을 여전히 다른 세계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세계관마저 다른 주민들.

“정확히 말하면, 관리자가 억지로 탑 안에 우겨 넣은 과거의 데이터들에 가까워. 예전에 멸망했던 세계들의 파편을 이리저리 끼워 맞춰 탑에 가둬 놨던 거라 해야 하나.”

그리고 적당히 플레이어들과 싸우는 ‘던전’으로 기능하도록 재활용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아예 지구랑 분리시키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지구는 지구대로 평화롭게 살고, 킬스크린은 따로 떼서 차원을 할당해 주는 거지.”

“킬스크린과 지구를 분리한다는 거지?”

서로 간섭 없이 각자의 차원에서 잘 살게 두면 된다.

그럼 시간을 되돌린 후의 지구인들은 킬스크린이나 마계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것이다.

“그리고 마계를 비롯한 킬스크린 주민들은 시간 안 되돌리고 그대로 두는 거지. 둘을 분리하고 지구의 시간만 되돌리는 거야.”

설명이 어렵나?

“어쨌든 지구는 이전처럼 평화롭게 가는 거고, 킬스크린은 킬스크린대로 지금의 이 기억과 역사를 가진 채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이 되는 거고.”

킬스크린은 시간을 돌리지 않을 테니 하빈이 종종 마계를 방문하거나 하면, 이프시네도 크릭샤도 글리치도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지낼 수 있을 거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의견을 나눠 봐야겠지만 말이야. 저번에 적당히 이야기를 꺼냈을 땐 다들 만족하더라고.”

특히 글리치가 만족했었다.

‘킬스크린과 지구를 분리시킨다는 거지? 좋은 생각이야. 이왕이면 같은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끼리 사는 게 더 편한 법이지.’

‘대신 마계의 환경을 좀 더 풍족하게 조정해 줘. 시스템도 얻었는데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열악하고 척박한 땅이었던 마계를 더 살기 좋게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하빈은 회귀 아이템을 만드는 동시에 그 작업에도 착수하기로 약속했다.

‘이프시네의 소원이기도 하고, 마계에 정도 들었으니까.’

종종 마계에서 호캉스를 즐기려던 하빈의 계획은 여전히 유효했다. 이왕 가는 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면 볼 것도 즐길 거리도 더 많고, 편하게 쉬다 올 수 있겠지.

“맞아. 어차피 킬스크린이랑 지구를 차원 분리해도, 난 언제든 오갈 수 있으니까 시간을 돌린 후에도 종종 마계에 놀러 갈 수 있다구.”

심심할 때마다 방문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심심하면 자기네 차원에도 놀러 오라며 언질을 줍니다.]

“뭐야, 반짝이가 사는 곳도 따로 있어? 그건 몰랐네.”

하빈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지석이 질문했다.

“그럼, 계획은 언제부터 실행할 예정이야?”

“음……. 일단 아이템을 만드는 게 우선이긴 한데.”

하빈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아이템 자체를 만드는 건 쉽거든? 사실 아이템 안 만들어도, 내가 멋대로 ‘시스템 설정’을 조작해서 시간을 돌려도 가능해.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할 거야. 하지만…….”

하빈이 끄응,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당장 우리끼리 회귀해 버리면,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지세 언니가 그러더라고.”

“어떤 문제?”

“내가 지정한 사람들, 그러니까, 이 진상을 모두 아는 우리야 기억이랑 힘을 가지고 회귀하니 상관없지만, 그 외의 사람들의 인생은 엄청나게 바뀔 거 아냐?”

당장 게이트 사태로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다. 그건 수많은 나비효과를 불러올 거다. 게다가 헌터로 승승장구했던 사람들은 회귀 후에 평범해질 것이다. 열심히 쌓아 왔던 모든 성취와 업적이 없던 일이 된다.

“러브라인이 바뀌어서 원래 태어나야 했었던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게 되는 일도 생기겠지.”

“…….”

“그걸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 그 부분이 걸리는 거야.”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는 건 양날의 검인 것이다.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다시 보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은 사라지겠지만,

그로 인해 사라질 또 다른 소소한 업적들과 인연들.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들.

“누군가에겐, 어쩌면 게이트 사태가 없는 것보다 게이트 사태가 있었던 게 더 나은 삶일 수도 있으니까?”

게이트 사태를 계기로 각성자가 되어 인생역전을 했다거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진정한 사랑을 만나 가족을 꾸렸거나.

그런 사람들도 있는 법.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원래 세상은 그런 법이라며, 모든 경우의 수와 다른 사람들의 변수까지 신경 쓰는 건 무리라고 중얼거립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그걸 이유로 꿈을 포기하는 건 아깝지 않냐고 소심하게 덧붙입니다.]

“그렇지. 그래도 둘 다 챙길 수 있으면 좋잖아?”

하빈은 씩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 부분들을 검토하는 것 때문에 당장 되돌리는 건 못하고,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최소 한 달?”

“한 달 만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내 실력이 아니라 지세 언니의 머리를 좀 믿어볼까 싶어. 언니는 워낙 천재니까,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하빈은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뭐…… 그리고 완성까지 좀 오래 걸려도 괜찮지 않나? 오래 걸리면, 드라마 새 시즌도 보고 갈 수 있잖아?”

[사실 그게 본 목적인 거 아니냐?]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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