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Our chance (6)
“멸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빈은 현시우에게 ‘지금 뜬 이 메시지는 관리자가 세계 멸망을 예고한 거다’라는 설명을 듣고, 에라타의 선전포고 영상과, 각국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는 시커먼 구멍에 대해 듣자 그만 폭발해 버렸다.
“내가 지금 버킷 리스트도 안 채웠는데 멸망은 무슨 개뿔이 멸망이야? 김잘잘 너! 너도 뭐라 말 좀 해봐! 25년은 걸릴 거라며!”
[그, 그게…… 그, 관리자가 마음을 바꿔먹은 모양이다!]
“어휴, 관리자 족쳐야겠네!”
“…….”
그걸 듣던 현시우는 홀로 생각했다.
‘정답인데?’
관리자가 마음 바꿔먹어서 앞당겨진 것도, 관리자를 족쳐야 하는 것도 정답!
그 와중 하빈은 여전히 열이 받은 채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며어얼망? 나 아직 사과나무 꽃 피는 것도 못 봤는데! 엊그제 채씨가 추천해 준 네풀릭스 명작들도 아직 안 봤어! 맞다, 명 감독님이 이번 드라마 다음 시즌 제작한다고 했는데! 그거 못 보면 안 된다고!”
[내가 보고 있던 웹소도 아직 완결이 안 났다!]
“나는 일상물 좋아하는데 누가 멋대로 내 인생 장르를 아포칼립스로 바꾸래? 아오! 그런 건 웹소에서나 하라고! 아포칼립스 노노!”
버킷 리스트를 꺼내든 하빈이 화가 나 소리쳤다.
“나 아직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 잔 못했어!”
“제주에서 한 달 살기도 한다며?”
“맞아! 그것도 해야 돼!”
“…….”
“하빈이 제주도에서 한 달 살 생각도 했었어? 진작 알았으면 우리 호텔 회원권 선물로 줄 걸 그랬나? 거기 제주도에도 체인 있는데.”
지세가 떠올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잡담을 하는 와중에도 놀라운 멀티태스킹 능력으로 ‘별의 서’를 해독 중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현시우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속도가 빠르시네요. 저 없는 동안 나머지 해독 작업은 지세 씨한테 맡겨도 될까요?”
처음 해독 작업이야 현시우가 회귀 지식을 알고 있었기에 현시우가 주도해서 했지만, 뒤로 갈수록 채지세의 해독 속도가 훨씬 빨랐기에 지금은 채지세의 속도를 믿고 맡기는 게 효율적이었다.
지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어차피 대부분 해독된 거라 이 정도면 저 혼자서도 빠르게 해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저 하고 바로 합류하도록 하죠.”
기본적인 해독 원리가 다 밝혀지고, 앞뒤 내용들도 다 해독된 상태에서 몇 장 더 해석하는 건 껌이었다.
지세의 흔쾌한 대답에 현시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오겠습니다.”
세계의 멸망이 실행될 거라는 이야기를 꺼내러 가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는지 현시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회귀 전엔 이 기자회견, 현하빈이 했었던 건데.’
[그땐 어떻게 했는데?]
네아이바의 물음에 현시우는 곰곰이 하빈의 기자회견을 떠올렸다.
‘여러분, 관리자 새X가 세계 멸망시킬 거라네요?’
‘근데 그거 헛소리에요. 사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멸망 안 하거든요.’
‘……그전에 제가 막을 테니까.’
수틀리면 시간까지 돌려버리던 게 현하빈이다. 그런 말을 한 것에는 나름의 자신이 있었던 거겠지.
어쩌면 이 상황까지 예상했거나.
‘흠…….’
현시우는 문을 나서기 전 동생에게 한 번 더 물었다.
“현하빈, 여전히 생각 똑같지?”
“뭐가?”
“멸망 따위 헛소리라는 거.”
“……아, 당연하지! 내가 아까까지 말한 거 못 들었어?! 멸망은 무슨 개뿔이! 난 절대 용납 못 해! 관리자 X끼든 뭐든…….”
“그래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현시우가 마저 방을 나갔다. 하빈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힐끔 창밖을 보는 하빈.
아헤자르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아니! 그러고 보니 방금도 네아이바에게 말을 못 걸었다! 방금 나간 자가 네아이바의 계약자였지!? 다시 찾아가서 몇 마디 더 할 수 없겠느냐?]
현시우가 네아이바를 들고 나가는 바람에 이번에도 대화를 못 한 게 아쉬웠던 모양. 하빈이 지적했다.
“김잘잘, 지금 그게 문제야? 지금 저쪽은 세계 멸망 기자회견 하러 가느라 바쁘다고. 잘잘이는 친구랑 오랜만에 수다 떠는 게 중요해, 내 몰디브가 날아간 게 더 중요해?”
[그야 당연히 친구 오랜만에 만나는 거…….]
“쓰읍! 지금 세계 멸망이 코앞인데 그런 소릴 할 거야!? 성좌잖아! 좀 더 대의명분을 생각해!”
[그러는 너도 개인적인 사유인 ‘몰디브’를 이유로 화낸 거 아니냐?]
“어… 어허! 말이 헛나온 거야! 내 말은, 아름다운 몰디브까지도 파괴하는 관리자의 행보를 영웅답게 막아내야만 한다. 뭐, 그런 이야기를 줄이다 보니 몰디브만 남은 거지!”
[…….]
“그러니 저 기자회견도 잘하고 오게 응원해야 해! 근데 그러지 못할망정! 네아이바 보겠다고 붙잡으면 쓰나? 솔직히 둘이 만나도 별로 할 이야기는 없다며?”
[그건…… 그렇다만.]
아헤자르가 입을 다무는 사이 하빈은 성큼성큼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 현시우와 채지세가 ‘별의 서’를 해독한 노트가 책상 위에 널려 있었다. 채지석이 그걸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누나. 이건 뭐야?”
죄다 알아볼 수 없는 기호들로 가득한 노트.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이게 해독본이 맞냐며, 본인도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다고 고개를 절레 젓습니다.]
“아, 그건 저번에도 말했듯 일반적인 언어가 아닌 코딩 언어 같은 종류라 그래요.”
지세가 끼어들어 설명했다.
“진짜로 코딩 언어 계열이었어?”
“응. 우리가 쓰던 자바나 파이썬이랑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더라. 그래서 임의로 조합해서 끼워 넣어 봤는데…… 음, 그래도 비전공자가 보기엔 역시 어렵겠지. 전공자가 봐도 아리송한 내용이긴 해. 어떤 부분은 32비트 체제였다가 또 어떤 부분은 64비트 같고…… 누가 보면 엉터리에 조잡함 그 자체라고도 하겠지만.”
애초에 인간의 법칙과 동떨어진 걸 어떻게든 인간의 법칙에 끼워 맞추어 해석한 번역본이니. 어깨를 으쓱한 지세가 마저 번역 작업을 계속했다.
하빈이 물었다.
“그럼 이건 정확히 뭘 말하는 건데? 정말 우리가 처음 예상한 대로 시스템을 구성하는 코드야? 세계를 구성하는 코드?”
지세는 어깨를 으쓱했다.
“현시우 씨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는데? 근데 내가 보기에도 맞는 것 같아. 해독하면 할수록 확실해지더라. 이게 바로 세계를 구성하는 코드인가 봐.”
“정말?!”
“오…….”
놀라는 채지석과 생각에 잠긴 표정인 하빈. 잠깐 침묵하던 하빈이 입을 열었다.
“언니 그러면 이거…… 언니 실력으로는 해킹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접속하는지는 미지수지만, 접속만 되면 할 만할 것 같은데?”
“흐음.”
“……이걸 해킹할 수 있다고?”
지석이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분명 이게 세계를 구성하는 코드라 했잖아? 그럼 그걸 해킹하면…….”
세계 구성 자체를 해킹할 수 있다는 건가?
그 사실에 지석의 눈이 커졌다.
하빈은 씩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음, 그럼 말야, 언니…….”
“……!”
“혹시 이것도 할 수 있어?”
이어지는 하빈의 말에 지세의 눈이 커졌다.
* * *
한편. 기자회견장에 도착한 현시우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아내고 있었다.
“에라타의 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세상이 멸망하나요?”
“혹시 기만의 수호자 때문인가요?”
“지금 세계 각지에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구멍들은 무엇입니까?”
“…….”
몇 가지 질문은 대답할 필요 없는 것이었다.
현시우는 오랜 경험으로 대답해서 좋을 게 없는 질문들을 알았다. 가령, ‘기만의 수호자 때문인가요?’ 같은 부차적인 질문은 이 상황에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다만 지금 당장 언급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실은…….
“대답해 주세요! 지금 나타난 구멍들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재차 던져진 질문에 현시우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당장 옆 창문 너머로도 일렁이는 검은 구멍이 도심 위에 생겨나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게이트와 비슷하지만 진입이 불가능한, 그 속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더 불길한 검은 구멍. 인류가 최초로 게이트 사태를 마주한 날, 그때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불길한 광경이었다.
회견장에 오는 길에 확인해 보니 게이트 사태 당시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던 수보다 더 많은 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귀 전에 봤던 거랑은 비슷하네.’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으라면 현시우가 회귀 전에 겪었던 것과 별반 차이 없는 광경이란 거다. 1회차 때도 관리자는 멸망 직전에 똑같은 수법을 썼었다.
아무래도 솔직하게 알려주는 게 낫겠지. 생각을 마친 현시우가 입을 열었다.
“저 구멍은,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게이트와 비슷합니다.”
“게이트와 비슷하다니요?”
“언제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곧 저곳에서 몬스터들이 나올 겁니다.”
“네……?”
잠깐 당황했던 사람들은 이내 곧 그 의견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들 역시 게이트와 비슷하게 생긴 외관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게이트가 아닐까?’하고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마 상상하는 것보다 더 무지막지할 겁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가 한번에 쏟아져 나올 테니.”
1회차 때는 저기서 몬스터가 나오기까지 하루의 유예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관리자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상태니 섣불리 시간을 특정하긴 어려웠다.
현시우의 말에 기자들이 반문했다.
“……그, 그럼?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각국의 모든 헌터들이 협력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일단 SPES 측에서도 최대한의 인원을 파견하겠습니다. 각국에서도 만일을 대비해 최대한 방비를 해 주세요.”
“자, 잠깐만요!”
맨 앞에 있던 기자가 까치발을 들고 외쳤다.
“그럼 결국에는 멸망과 다름없는 상황이잖아요! 무지막지하게 몬스터가 쏟아진다니?! 각국의 모든 헌터가 협력해야 한다니!”
“오 세상에…….”
“지금 생긴 구멍의 수만 해도 아찔한데 거기서 무더기로 몬스터들이 나온다고요?”
“멸망이 도래하는 겁니까…….”
본분을 잊고 혼란에 빠져 웅성거리는 기자들. 그들 역시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겠지’라는 가정은 하고 기자회견을 하러 온 것은 맞았지만, 적어도 일말의 희망은 품고 있었다.
‘그래도 피데스라면 희망적인 말을 해 주지 않을까?’
‘피데스의 의견을 들어보기 전까진 모르는 일이야!’
‘별일 아닐지도 몰라.’
이런 류의 희망적인 생각들을.
그러나 막상 현시우가 단호하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야기하는 걸 듣자 절망에 빠진 것이다.
피데스마저 인정한 재앙이라니!
“……멸망이요?”
그들의 반응에 현시우는 마이크를 잡았다. 회견장까지 걸어오는 내내 그 역시 되새겼던 말이 있었다. 이전 회차의 누군가가 했던 말을 그라도 전달하고 싶었다.
생각을 마친 현시우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멸망 안 하거든요.”
언젠가 들었던 누군가의 연설이 다시 떠올랐다.
‘……그전에 제가 막을 테니까.’
서툴지만 그렇게 말하고 자기 할 일 하러 가던 이전 세계의 최강자. 그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
“네. 그전에 막으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회귀자인 현시우는 지난 세계의 상황을 기억했다. 멸망을 코앞에 두고도,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싸웠던 각국의 수많은 헌터들, 그리고 헌터가 아니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일들을 했던 사람들까지.
그 모습들을 현시우는 기억하고 있었다.
“저희는 막아낼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요.”
안 되면 시간 또 돌리지, 뭐.
사실 한 번 죽다 살아난 회귀자는 거리낄 게 없었다. 그는 할 테면 해보라는 듯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혹시라도 이번에 또 시간 돌리게 되면, 이번 회귀 아이템은 현하빈 줘야지.’
[…….]
이 짓을 또 하라니 좀 아득하긴 하다.
현시우는 태연한 낯으로 속으로만 흠흠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