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Our chance (1)
단델리온 공작은 꽤나 쉽게 ‘신비의 서’를 넘겨주었다. 픽셔 제국에서 신비의 서는 대대로 단델리온 공작가가 발견하고 관리하던 상황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영구적으로 가져가는 게 아닌, 연구를 위해 빌리는 것. 그러니 다시 반환한다는 계약 조건이 달린 거래서를 작성하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작은 그것에 더해, 마계가 회담에 참석할 수 있도록 의견을 보태 보겠다는 각서까지 마련했다.
“실은 저도 마계가 회담에 참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주의였습니다. 원래 적은 가까이 둘수록 더 마음이 편한 법이니까요. 그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지요.”
각서를 써 내려가던 공작은 마지막 서명란을 쓰기 전 잠시 멈추었다.
“다만, 서명은 제 딸이 어디 있는지 듣고 나서 마저 하겠습니다. 물론 용신의 일행분들께서 거짓을 말하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그래도 너무 쉽게 성사되는 거래가 찜찜했던 모양. 단델리온 공작은 하빈을 향해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먼저, 제 딸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살아는……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서 깊은 슬픔과 고뇌가 느껴졌다. 하빈은 각서를 향해 있던 시선을 공작에게로 돌렸다.
‘역시 어머니에게 딸 가지고 협상하는 건 좀 몹쓸 짓이긴 해.’
이 정도는 미리 말해줘도 될 것이다. 어차피 본 목적인 별의 서를 잘 챙겼고, 마계가 회담에 참석 못 한다 해도 하빈에겐 남은 방법이 몇 있으니.
마음의 결정을 내린 하빈이 흔쾌히 입을 열었다.
“그야 물론 살아있습니다. 건강하게, 아주 잘!”
“허억!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흠흠, 용신님께도 감사하십시오.”
하빈은 ‘용신교 사제’의 설정을 살리기 위해 엄숙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공작은 어색하게 용신에게도 기도했다.
“……요, 용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리베가 이걸 들으면 좋아했을 텐데, 아쉽네.’
나름 용신 역할 놀이를 하면서 사람들이 기도하고 절할 때마다 뿌듯하고 우쭐해하는 거 귀여웠는데.
한편 공작은 하빈에게 재차 물었다.
“정말로 건강히, 잘 살아 있는 거 맞죠? 우리 릴리…….”
“네, 물론입니다. 다친 데 없이 건강하고 밝게 지내고 있어요.”
‘왜냐면 걔가 황길때 주인공이거든!’
공작의 진짜 딸이 신분을 잃고 홀로 대륙을 모험하며 살아남다가, 마지막에 잃어버린 어머니도 찾고, 남주와의 사랑도 이루는 화제의 로맨스판타지 소설!
그게 바로 ‘황. 길. 때’의 내용이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이야기였지…….]
‘어허, 김잘잘. 지금 회상하고 있을 때가 아냐.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하빈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공작님의 진짜 따님, ‘진짜 릴리’의 행방을 아는 자가 공작님 주변에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요?”
“여기 회담에 같이 따라온 사용인 중, ‘찰리’라는 이가 있지 않던가요?”
“그랬는데…….”
“지금 당장 그분을 불러주세요.”
“…….”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설렁줄을 당기는 공작. 잠시 뒤 나타난 시녀에게 공작은 찰리를 데려와 달라고 말했다.
“찰리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비서 중 한 명인데, 그 애를 용신님의 일행이 어떻게 아시는지……?”
의아하단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공작. 그러나 머지않아 ‘찰리’가 도착했다.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그들 앞에 선 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남자였다. 공작이 새로 들인 비서라는 말에 걸맞게 똑 부러진 눈빛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일 처리 아주 잘 할 상!
그 모습을 본 하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분은 여자입니다.”
“예?”
“네?”
갑자기 던져진 하빈의 발언에 찰리와 공작의 눈이 놀라 커졌다. 하빈은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진짜 마음 같아선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고 싶은데 저도 아주 바쁜 몸이라서요. 죄송합니다. 근데 찰리는 여자 맞아요! 정확히 말하면 여자인데 남장하고 들어온 애거든요? 저 갈색 머리도 가발이에요!”
“그, 그만하시죠!”
당황한 찰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많이 놀랐는지 고개를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귀 끝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던 공작이 멈칫했다.
“잠깐, 그럼 원래는 금발에 푸른 눈이라고? 거기다 여자였다면……!”
설마.
“네, 맞습니다.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잡죠!”
하빈은 짠, 하고 찰리를 가리키며 상냥한 말투로 덧붙였다.
“이분이 바로 공작님의 따님, 잃어버린 단델리온 공녀, 실바릴리 단델리온이랍니다!”
“……!”
“저? 제가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찰리, 아니 릴리가 다시 이쪽으로 멀뚱멀뚱 고개를 돌렸다. 하빈은 경쾌한 목소리로 산뜻하게 설명을 이었다.
“네에! 자세한 건 나중에 고국 돌아가서 친자 검사를 한 번 더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찰리 씨, 아니, 릴리 씨. 당신이 찾고 계시던 부모님이 바로 눈앞에 있는 단델리온 공작님이셔요!”
“그, 그런…….”
사실 주인공도 작품 내내 잃어버린 부모를 찾으러 다니던 게 원작 내용. 그걸 이렇게 갑자기 찾게 되니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믿기지가 않는 모양.
‘나도 처음에 듣고 이게 뭔 전개인가 했지.’
어떻게 코앞에 있는데도 못 알아보고 지나쳤는지, 어머니의 비서로 일했는데도 모른 채 지나쳤던 시간들이 안타깝던데.
하빈이 절레 고개를 저으며 황길때를 회상하고 있을 때였다.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이왕 들킨 김에 가발도 벗어 달라고 한 번만 해보면 안 되겠느냐? 주인공 릴리가 내 눈앞에 있다니! 이참에 남장한 버전 말고 진짜 얼굴 보고 싶다! 싸인……은 안 되겠지?]
‘어허, 김잘잘, 여기 팬 사인회 아니라니까? 과몰입 금지!’
그러는 와중에도 공작과 릴리는 하빈 일행이 안중에도 없는 듯 서로의 상황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 자네 그동안 부모를 찾고 있었댔지? 나는 당연히 남자인 줄 알고 우리 릴리일 가능성은 생각도 못 했는데…… 언제 어떻게 부모를 잃어버렸다고?”
“그게…… 제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냐면요.”
어색한 목소리도 더듬더듬 있었던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하는 릴리. 감동적인 모녀 상봉에 하빈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저 정도 해놨으면 둘이서 알아서 잘 풀겠지? 이제 우리도 나가자!’
[난 좀 더 보고 싶은데! 이게 결말부 내용이란 말이다!]
읽던 소설의 하이라이트를 눈앞에서 보려니 너무 흥미진진한 모양.
‘그건 소설이고 지금은 이분들 사생활이라서 안 돼. 그래도 혹시 알아? 오해 풀리면 다음에 릴리가 남장 풀고 나타날지? 그럼 그때 실컷 또 봐. 그때 사인 받던가.’
사인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럼 다음에 꼭…….]
아헤자르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들은 마침내 살금살금 공작의 방을 벗어났다.
* * *
그렇게 하빈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는데,
창문으로 나오던 하빈이 채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채씨. 돌아가기 전에 잠깐 나 좀 보자. 옥상으로 따라와.”
“……?”
‘보는 건 좋은데 왜 하필 옥상이냐.’
……싸우자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옛날 생각나네.
별로 옛날도 아니긴 하지만, 처음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다짜고짜 현하빈이 도망치는 바람에 옥상에서 몰래 만나야 했었다.
“읏차, 여기 앉아, 채씨!”
마침 건물 지붕에 떡하니 앉아 탁탁, 하고 옆자리를 두드리는 하빈.
지붕에서 내려다보니 옹기종기 모인 건물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건물들의 행렬과 밤이 되어 노란 등불을 밝힌 모습에 정말로 외국에 온 기분이 물씬 났다.
해가 진 남색 하늘에는 빼곡하게 별이 떠 있었다. 동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딱 야식으로 도시락 까먹기 좋은 광경이야. 그렇지 않아? 마지막 염단 돈가스를 여기서 까자! 방에 가서 먹으면 애들 다 한 입씩 줘야 해.”
마족들에게 아이스크림은 양보해도, 좋아하는 돈가스 양보는 조금 어려웠던 모양.
“에휴……. 우리 애들 입이 몇 개람. 가뜩이나 김릭샤랑 꼰대 선배는 먹성도 좋다고. 선배는 첫 만남 때부터 컵라면을 탐냈다니까?”
물론 글리치가 들었다면 억울했을 발언이지만, 하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대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의 느낌. 하빈이 고개를 절레 젓는 동안 지석은 돈가스 포장을 뜯어 젓가락을 건넸다.
“이 시간에 먹으면 잠은 언제 자?”
“밤새서 네풀릭스 볼 건데?”
“또 볼만한 거 추천해줘?”
“추천은 언제든 환영이지!”
신이 나 웃음을 지은 하빈이 돈가스를 집어 올렸다. 바삭한 튀김옷을 노려보던 하빈이 말했다.
“이제 이렇게 돈가스 아껴 먹는 것도 내일부로 끝이야, 끝. 내일 내가 회담장을 뒤집어 버릴 테니까!”
“테이블을 엎을 거야, 아니면 지진 스킬을 쓸 거야?”
“아, 그런 거 안 쓴다고! 머리로! 머리로 뒤집을 테니 기대하시라구. 다들 천재 명탐정 아이큐 187의 하난을 뭘로 보는 거야?”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 설정은 언제부터 잡았어? 진짜 명탐정 할 생각도 있나? 원래…… 법조계 쪽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며.”
“크흠, 내 진로는 알면 다쳐! 잔말 말고 채씨도 먹기나 해.”
말을 돌리려는 듯 돈가스를 집어 지석의 입에 갖다 대는 하빈. 별수 없이 돈가스를 입에 무느라 지석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잠깐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시원한 밤바람이 한차례 지나갔다. 하빈이 도시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요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뭔데?’
입이 막혀 있어서 눈빛으로 반문하는 채지석. 그러나 하빈은 곧바로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생각에 잠긴 듯 건너편 건물을 바라보는 하빈.
‘무슨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물어볼 셈인가?’
오래 이어지는 침묵에 채지석이 조금 긴장을 푸는 순간이었다. 곧바로 하빈의 말이 날아왔다.
“나한테 말 안 한 스킬 있지?”
“……!”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자다가 놀라서 달려옵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지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가 그동안 숨겨 둔 스킬이 있긴 했으니까.
‘찬란의 답습’, 누군가의 스킬을 카피할 수 있는 스킬.
그걸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매번 숨기기만 급급했던 과거가 있다 보니 미처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채지석은 일단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현하빈 너도 나한테 스킬 말 안 한 거 많잖아. 너 스킬 몇 개였더라? 몇 개인지는 알아?”
“젠장. 몇 개인지 안 세어 봤는데.”
“그럴 줄 알았다.”
“다음에 정리해서 말해주면 되나? 아 근데 너무 많아서 어려울 듯……?”
곤란한 표정을 짓는 하빈. 생각해 보니 그녀도 스킬이 많아서 뭐 있는지 몰랐다. 뭐 있는지 모르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말 안 한 스킬이 많다.
“앗! 그럼 설마 채씨도 나처럼 스킬 뭐 있는지 까먹고 다니는 편이야?”
“그럴 리가 있겠냐?”
“뭐야, 그럼 바로 대답해 줄 수 있겠네.”
생긋 웃음을 지은 하빈이 한 마디 덧붙였다.
“채씨, 혹시 다른 사람 스킬 카피하는 기술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