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217) (217/268)

217. 이래서 사람(?)이 책(?)을 읽고 살아야 합니다 (7)

“하빈 님…… 잘 하고 계실까요?”

“그건 먹고 말해라.”

-삐.

하빈과 지석이 나가고 남겨진 마계 일행과 리베. 이프시네는 하빈이 준 아이스크림을 든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크릭샤와 글리치가 옆에서 한마디씩 더 보탰다.

“맞아. 그거 빨리 안 먹으면 녹는다.”

“흥미로운 음식이지. 감히 음식 주제에 시간제한이 있다니.”

글리치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저번에 봤던, 불기 전에 먹어야 하는 ‘라면’인가 뭔가보다 더 까다로워.”

크릭샤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 일단 먹고 이야기해.”

“그치만…….”

이프시네는 하빈이 남기고 간 아이스크림을 보며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하빈은 ‘이프시네 많이 먹어!’라는 말과 함께 종류별로 아이스크림을 남겨놓고 갔다. 구슬 아이스크림, 붸라 아이스크림, 솔빙 같은 빙수류와 아이스바까지!

지켜보고 있으려니 감질났는지, 크릭샤가 슬쩍 손을 뻗었다.

“안 먹으면 내가 먹는다? 이거 맛있는데……?”

“헉?! 릭샤릭샤 씨! 너무하시네요! 하빈 님이 주신 걸 억지로 뺏는 게 어딨어요?!”

진짜로 뺏길까 겁났는지 다급하게 아이스크림 통을 끌어안는 이프시네. 그러나 그녀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끄응, 하는 얼굴로 다시 통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역시 저 혼자 먹기엔 많긴 하네요. 다 같이 먹어요.”

-삐!

이프시네의 말에 리베가 반색한 얼굴로 아장아장 걸어왔다. 옆에서 보다 보니 꽤 먹어보고 싶었던 모양.

글리치와 크릭샤도 언제 챙겼는지 아이스크림에 동봉된 핑크 플라스틱 숟가락을 들고 사샤삭 모여들었다.

“뭐예요? 다들 그 말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같이 먹자고 하자마자 바로 모여들다니!

말도 안 되는 속도에 이프시네가 당황하자, 글리치와 크릭샤가 헛기침을 했다.

“큼, 이건 정말로 빨리 먹지 않으면 큰일 나는 음식이라 그렇다.”

“떠들 시간에 빨리 먹기나 해.”

-삐아아!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와앙 벌리는 리베. 그걸 발견한 글리치가 냉정한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너는 아직 아기잖아.”

-삐이?!

“또 줬다간 후배님이 얼마나 난리를 치겠어?”

이미 욥떡 먹였다는 이유로 한 차례 갈굼당한 전적이 있는 글리치. 그는 지난번의 수모를 잊지 않고 신중한 목소리로 리베를 제지했다.

-삐아, 삐아아!

그 말에 억울한 표정으로 퐁퐁 눈물을 흘리는 리베. 울고 있는 용의 모습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지, 이프시네가 스윽 붸라 뚜껑에 아이스크림을 덜어 건넸다.

“이 정도는 먹여도 되지 않을까요?”

“흐음.”

글리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난 모르는 일이다.”

난 분명 말렸어.

이렇게 해 두면 나중에 현하빈이 추궁해도 빠져나갈 명분이 생기겠지!

결론을 내린 마신은 모르쇠를 했다. 그사이 리베는 슬금슬금 다가와 아이스크림을 와앙 베어 물었다.

냠냠, 냠냠냠.

욥떡과 달리, 이번엔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나서 아이스크림을 녹여 먹는 리베. 그 모습을 슬그머니 훔쳐보던 마신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번엔 뭐 안 뿜나?”

지난번엔 욥떡 먹고 불 뿜었으니 이번엔 아이스크림 먹고 아이스 브레스라도 뿜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쉽군……. 먹는 것마다 다 생성해 내는 건 아닌가?”

-삐익?

“아니면 더 차가운 얼음이라도 먹여야 하나? 혹은…….”

그때, 글리치는 구석에 굴러다니던 드라이아이스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붸라 아이스크림을 보관하기 위해 동봉된 드라이아이스!

하빈의 집에 갔을 때 이게 뭔지 설명도 들었고 직접 만져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글리치도 드라이아이스가 어떤지 알았다.

‘마도구 제작에 쓰이는 강화얼음 같은 재료였지.’

“……이걸 먹이면 그래도 반응이 있지 않을까?”

-삑?!

순간 꿍꿍이가 있는 표정을 짓는 마신을 보고 리베가 뒷걸음질 쳤다. 글리치는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어차피 용인데 잘 안 죽을 테니, 심심할 때 맹독 한번 먹여 보는 것도 좋은 실험이 되겠는데…….”

-삐아……?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리베. 그 상황을 말린 건 곁에 있던 이프시네였다.

“아니 리치 씨!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우리 하빈 님의 소환수에게 함부로 맹독을 먹이다뇨!?”

“그래. 역시 목격자가 있어서 안 되겠군.”

“목격자 없어도 하면 안 되는 일이거든요?”

“그래그래. 들키면 후배님에게 죽을 테니 아쉽군.”

이프시네의 지적에 글리치는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였다.

용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글리치와, 글리치를 수상하게 바라보는 이프시네.

그 둘 사이에서 제일 이득 본 건 단연 크릭샤였다.

‘후후, 다들 안 먹으면 이거 내가 먹어야지!’

굴러다니던 초코바를 슬쩍 집은 크릭샤가 신난 표정으로 포장지를 뜯었다. 원래 먹는 건 먼저 집는 사람이 임자인 법이었다!

* * *

한편 그 시각.

딸을 찾고 있냐는 하빈의 질문과, 찾고 싶으면 요구 사항을 들어달란 협박(?)을 들은 공작.

하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공작은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내가 딸을 찾고 있단 걸 알았지?’

사실 단델리온 공작은 17년 전에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딸을 잃어버렸다. 얼마나 오래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물론 지금 사람들은 내가 딸을 잃어버렸단 사실조차 잊어버렸지.’

왜냐하면 지금은, 단델리온 공녀가 버젓이 집에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갑자기 나타난 공녀.

실바릴리 단델리온.

‘제가 릴리에요, 어머니!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잃어버린 딸, 릴리와 꼭 닮은 환한 금발에 푸른 눈. 사랑스러운 미소까지. 딸이 자랐다면 분명 이렇게 컸을 것 같은,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가신들과 지인들도 입을 모아 그녀가 사라진 단델리온 공녀가 맞다 인정했다. 술술 읊어대는 공작가의 비밀과 어렸을 때의 기억, 공작 부부를 닮은 외모까지.

무엇보다 친자 검사까지도 당당히 통과했기에 다들 그녀가 진짜 딸이라 의심치 않았다. 세간에서는 단델리온 공작가에 드디어 공녀가 돌아왔다며 이 드라마틱한 재회를 연극으로 각색해 공연하는 게 유행처럼 여겨졌다 할 정도니.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단델리온 공작만큼은 이상한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딸이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절묘한 시점에 등장한 릴리,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을 때 답이 두루뭉술한 데다, 정적인 밀레이오 백작가와 내통하는 것 같은 움직임까지.

‘진짜 릴리가 돌아온 게 맞을까?’

사실 릴리인 척을 하는 가짜 딸이면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릴리’의 모습을 보면 의심했던 것마저 미안해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도 릴리를 찾는 걸 멈추지 않았지.’

정말 혹시나 모르는 일이니까. 지금 있는 릴리에게 너무 미안하지만 이상한 직감 때문에 릴리를 찾는 일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굳어있는 그녀에게 때마침 하빈이 상큼하게 덧붙였다.

“네. 그 의심은 맞았습니다! 지금 댁에 있는 릴리는 사기꾼이죠!”

“……!”

단도직입적으로 던진 말에 공작은 낯을 굳혔다. 하빈은 술술 다음 말을 이었다.

“그거 밀레이오 백작가에서 만든 가짜 딸이에요! 친자 검사도 어찌어찌 조작한 거라 다시 하면 안 똑같게 나올걸요? 황길때 후반부 스토리 보니까 그러던데.”

“대체 어떻게 그걸 알았죠? 무슨 근거로……?”

자신의 머릿속을 읽은 듯 정확하게 의심 들던 구석만 콕콕 찔러낸 하빈. 굉장히 혹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공작은 손을 꼭 그러쥐었다.

‘쉽사리 넘어가서는 안 된다.’

자신이 릴리를 찾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의심에 불을 붙이려는 수작일지도.

“대체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물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것쯤이야 솔직하게 알려줄 수 있지. 하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작가에게 군만두를 주면서 협박…… 아아니, 권유를 하며 뒷이야기를 알려 달라고 했는데.”

“대, 대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현하빈! 그렇게 말하면 공작님이 당황하잖아!’

그랬다. 사실 릴리와 단델리온 공작의 이야기는 ‘황길때’의 메인 스토리라서 현하빈이 정보를 술술 꿰고 있었던 것이다.

‘에효. 역시 책 속 인물에게 책빙의 설명하는 건 정말 어렵다니까?’

하빈이 곤란하단 얼굴로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아헤자르도 덧붙였다.

[아니! 그리고 릴리가 가짜 딸인 건 결말 직전에 밝혀져야 하는 내용 아니냐?! 황길때 스포를 지금 하면 어떡하느냐?]

‘어허, 잘잘이 쉿. 우리 원래 이러려고 온 거든? 원작 망치는 건 책빙의자의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그들이 아웅다웅 떠들고 있을 때였다. 공작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제대로 말해줄 수는 없지만 관련자에게 협박을 해서 알아냈다는 건가?’

‘군만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훌륭한 고문 도구인 모양.

‘어느 쪽이든 저쪽이 정보를 갖고 있는 건 확실하다.’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하빈과 채지석을 쳐다보았다. 소리 없이 침실에 잠입한 실력과 상대를 당황시키는 도입, 무엇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쥐고 흔드는 재주까지.

‘체칼라다임이 이번에 용신의 가호를 받았다는 말이 돌던데,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실제로 용을 보고서도 긴가민가했는데. 황금용과 황금 머리의 사제뿐만이 아닌, 저 검은 머리의 ‘왼팔’ 사제가 진정한 다크호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마친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 딸에 대한 정보와 교환하고 싶은 건 무엇이죠? 아무리 내가 픽셔 제국의 대표로 왔다지만, 권한을 위임받았을 뿐 저는 공작입니다. 과한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러면 어떻게 나오려나?’

용신의 일행이 원하는 건 무엇일까? 돈? 지위? 혹은 체칼라다임의 부흥?

돈이라면 공작의 선에서 해결될 수 있지만 체칼라다임의 부흥을 바란다면 곤란하다.

긴장 속에서 공작이 하빈의 대답을 기다릴 때였다. 마침내 하빈이 입을 열었다.

“저희가 원하는 건 ‘신비의 서’를 연구할 수 있게 빌려달라는 것과, 이번 회담에 마계를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저, 정말 그것뿐입니까?”

차분하고도 또박또박한 목소리에 공작은 주춤했다. 시작부터 ‘순순히 들어줘야 딸을 찾을 수 있을 거야!’라며 기상천외한 곳에서 허를 찌르길래 엄청난 요구를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토록 정중하고 합리적인 요구라니?

‘오, 먹히나 본데?’

하빈은 공작의 반응을 보며 이번 요구가 쉽사리 먹히겠다는 걸 직감했다.

‘원래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라니까? 거래를 할 때도 첫 가격 제시가 임팩트 있어야 한다구.’

예를 들어 엄마한테 용돈을 달라고 할 때도 시작부터 ‘엄마, 나 만 원만’ 하는 것보다.

‘엄마 나 오만 원만’ 한 다음, ‘안 돼.’라고 거절당한 뒤 ‘그럼 엄마, 나 만 원만이라도 주면 안 돼?’라고 재차 요구하는 게 용돈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같은 금액이라도, 한번 기준을 과하게 높여 두면 상대적으로 뒤에 오는 금액이 적어 보이는 것.

지금 ‘신비의 서’를 빌려달라는 요구도, 사실 국가 대 국가적인 공식 자리에서 아무 준비 없이 그냥 요구했다가는 거절당할 확률이 높은 제안이었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괜찮은 조건으로 보인 것일 뿐.

‘그래서 시작부터 세게 나간 거야?’

채지석이 감탄을 흘리며 물었다. 하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응? 그것도 있긴 한데…….’

‘있긴 한데?’

‘사실 그냥 본인 앞에서 스포 때리고 싶었어!’

‘…….’

“저, 용신님의…… 왼팔님?”

마침 공작은 결단을 내렸는지 하빈을 불렀다. 하빈은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말씀하시죠.”

“말씀하신 조건이라면 제 선에서도 충분히 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메테오를 쓸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예?”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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