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89) (89/268)

089. 교장 선생님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1)

꿀꺽.

여서윤은 기숙사 문 앞에 서서 가슴을 졸였다.

‘여, 역시 같은 방을 해야겠지?’

아무것도 모를 때. 입학식에서 하빈 언니(알고 보니 현하빈은 그녀보다 몇 살이나 위였다)에게 같은 방 쓰자고 패기 넘치게 말해 버렸는데.

‘진짜 그래도 되나? 언니 입장에선 싫은데 귀찮아서 대답한 건 아니었을까?’

“뭐 해? 같은 방 쓰자며.”

마침 그때,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서윤은 흠칫 놀랐다.

“네? 네! 그렇죠.”

“응? 갑자기 웬 존댓말이야? 편하게 해, 편하게.”

“네! 아니…… 응!”

끄덕끄덕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서윤이 기숙사 등록대에 이름을 올렸다.

“아 언니는 학생증…….”

“안 받았는데?”

“그, 그럼 일단 내 걸로 문 열게!”

“오. 땡큐!”

하빈은 나름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얘가 보면 볼수록 알아서 다 챙겨주는 걸 보니.

‘빠릿빠릿하고 착한 애네.’

이토록 편할 수가 없었다. 마침 눈치를 살피던 서윤이 말을 이었다.

“혹시 지금 배고프면 등록하고 바로 점심 먹으러 갈……래?”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으, 응!”

울림국제고의 기숙사 방 배정은 랜덤으로 정해지지만, 입학식 당일 룸메이트를 변경해서 재배정을 받을 수 있었다. 사감실에 본인들이 와서 직접 기숙사 등록대에 등록을 할 때 딱 한 번 룸메이트 조정이 가능했다.

“원래 학생증이 방 키 역할을 하는데 언니는 아직 학생증이 없으니까 나한테 언제든 부탁해!”

서윤이 맡겨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렇게 도착한 식당.

“헉, 이거 뭐야?”

“……?”

급식의 첫 스푼을 떠먹고 눈이 커진 현하빈. 맞은편에 앉아서 식사를 하던 서윤도 덩달아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뭐라도…… 잘못됐어?”

“너무 맛있어!”

“…….”

상기된 목소리의 하빈이 신이 나서 포크로 감자튀김을 콕 찍었다.

“아, 연수원이랑 비교가 안 되네, 진짜. 오늘부터 울림국제고가 합정 맛집이다!”

크으으, 하는 표정으로 앞에 놓인 고기를 써는 현하빈의 모습에, 서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중학교 때도…… 여기가 급식 맛있다고 유명했어. 헌터고 중에서도 뷔페식으로 나오는 곳은 드물대.”

오늘 메뉴는 수제 햄버그스테이크/로제떡볶이/연어샐러드/된장보리밥이었다. 피클이나 감자튀김, 치즈, 김치, 나물 등, 사이드 메뉴와 밑반찬도 물론 포함. 원하는 만큼 마음껏 가져갈 수 있는 방식이었는데 맛도 보통이 아니었다. 하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급식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자퇴를 좀 더 미뤄주겠어!”

집에서 자취할 때 요리해 먹기도 귀찮았고 배달 시키는 데도 한계가 있었는데.

이렇게 제대로 된 맛있는 음식이 매일 꼬박꼬박 차려진단 말이지?

‘하, 좀 더 여기 살아볼까?’

“저기…….”

신이 나서 탄산음료를 마시는 하빈을 향해 누군가 말을 건넸다.

“저, 그러니까.”

‘헉, 쟤네는……!’

덩달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서윤이 그들을 알아보고 얼굴이 굳었다.

아까 하빈과 서윤에게 시비를 걸었던 B반과 C반 학생들이었다. 그 선두에 송제희가 새빨개진 얼굴로 서 있었다. 하빈이 반갑다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앗! 네발제희 안녕?”

“네발제희 아니야!”

발끈해서 대답한 제희가 뒤늦게 큼 헛기침을 했다.

“그…… 늦었지만 뭐, 잘 모르고 말한 거 사과할게요. 듣자 하니 나이도…….”

나이도 저보다 몇 살 더 많으시던데. 하던 말은 혹시나 싶어 흐렸다. 현하빈이 A급 헌터 출신인 건 비밀로 하랬으니 말이다. 제희는 고개를 돌려 서윤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여서윤, 너한테도 미안……. 다시 생각해 보니 말이 심했다. 내가 생각이 많이 짧았어.”

“…….”

[오, 꽤 진심이 느껴지는 사과로군?]

‘그러게 말이야?’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로 송제희는 진지하게 사과하는 표정이었다. 새빨개진 얼굴을 보아하니 나름 커다란 결심을 하고 온 모양. 그 모습을 본 하빈이 탄산음료 컵을 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좋아! 빠른 사과는 좋은 일이야. 내가 아는 애가 있는데 걔는 뒤늦게 갱생을 하려고 하니까 엄청 힘들다고 하더라고. 벌써 기절을 두 번이나 했어.”

“……?”

그 발언에 몰려온 학생들은 잠깐 웅성거렸다.

‘개, 갱생? 기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나도 몰라…….’

“아무튼.”

하빈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희가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얼굴로 하빈에게 물었다.

“그럼 혹시 네발로 기는 건…….”

“그건 서윤이 말까지 들어보고.”

“나는! 난 괜찮아.”

서윤이 재빨리 대답했다. 애초에 사과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원래 이런 일을 마음에 잘 담아두는 성격도 아니었던지라 이미 서윤의 마음은 풀린 지 오래였다. 그 대답에 제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 어. 고마워…….”

“…….”

제희가 눈치를 보며 하빈을 슬금 바라보았다.

“그, 그럼 저…… 네발로 안 기어도…….”

“제희는 아까부터 네발에 집착하는구나! 혹시 본심은 네발로 기어보고 싶었던 거니?”

“아, 아뇨! 그럴 리가요!”

“그래? 그럼 됐어.”

“매점 사는 건…….”

“그것도 괜춘. 안 사도 되니까 앞으로는…….”

“아, 앞으로는?”

“……서로 조심하자?”

“넵!”

조심할게요! 조심하겠습니다!

제희가 후다닥 대답했다.

‘음, 배고프니 그냥 이대로 보내줄 수도 있지만.’

하빈은 인상을 찡그렸다. 어쩐지 입이 근질근질한 게…….

“그리고 네발제희…… 아니, 제희야?”

“넵?”

“F급은 절대 B급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했잖아?”

“그건…….”

지금 제희가 하빈에게 진 건 단지 하빈이 그가 예상하지 못한 A급이었기 때문이다.

곁에 있는 서윤의 등급은 여전히 F급이다.

“그걸 꼭 단정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따라잡을 수도 있잖아?”

“…….”

“원래 이 세상은 방심도 단정도 금물이라고.”

“네…….”

제희가 찔린 얼굴로 대답했다. 방심도 단정도 금물이란 건 어차피 이번 사건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따라잡지 못하면 또 어때? 헌터를 으스대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꼭 급으로 서로 면박을 줘야겠어? 너희 그러려고 헌터 해?”

진지하게 설교를 늘어놓던 하빈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핫, 이렇게 말하니까 좀 꼰대 같나?’

애를 앞에 세워놓고 줄줄 ‘내 생각은 말이야’ 어쩌구 하고 잔소리하는 꼰대 선배 느낌?

‘에엥. 안 되지. 난 꼰대가 아니란 말씀!’

하빈이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 어쨌든 알았다니 안녕하자. 안녕!”

“네, 네! 점심 맛있게 드세요!”

황급히 인사하고 도망가듯 사라지는 학생들.

‘역시 잔소리 듣는 건 쟤네한테 고역이었나 보네.’

괜히 꼰대 짓을 해버렸다!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식사를 계속했다.

“아앗, 식기 전에 먹었어야 했는데. 감자랑 브로콜리 튀김. 이거 치즈 소스에 찍어 먹으면 맛있다구.”

[웬일로 쉽게 넘어가느냐? 평소라면…….]

‘평소라면?’

[평소의 너는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존재가 있으면 때리거나 묶거나 기절시키거나 삥을 뜯…… 크흠, 아니다.]

아무래도 그동안 크릭샤와 황마로, 민수에게 했던 일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던 모양이었다. 하빈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어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런 무서운 짓을 했다고 그래?’

[…….]

‘그리고 말이야, 자라나는 학생에게는 그렇게 심한 일 하는 거 아니야! 난 애초부터 쟤를 네발로 기게 할 생각 없었다고.’

[정말이냐?]

‘뭐, 본인은 계속 언급하는 걸 보니 미련이 남은 모양이긴 하지만…… 난 그냥 겁만 준 거라니까. 애초에 고등학생한테 그런 거 시킨 나쁜 어른은…… 그 뭐더라 아동학대? 학생인권조례?로 걸리기도 하고 말이지.’

무엇보다 제희는 서윤에게 사과를 빠르게 했다.

“……애가 생각보다 순하네. 난 요즘 뉴스에서 오토바이 몰고 다니는 고등학생들 이야기 듣고 괜히 걱정했는데.”

[오, 오토바이?]

“오토……바이?”

“맞아. 오토바이는 무척 위험하지. 그건 잘못하면 바닥에 머리부터 박는다고. 탈 거면 무릎보호대랑 헬멧 다 쓰고 타야 돼. 이렇게 말해도 안전벨트랑 에어백 있는 자동차가 제일 최고지만.”

말을 하던 하빈이 무언가 생각난 듯 뚝 그 자리에 멎었다.

“앗, 그러고 보니, 차를 샀어야 했는데!”

‘돈을 벌고 나서도 차를 생각 못 하다니! 내가 어리석었어!’

다음에 여유가 되면 꼭 차를 살 것이다.

하빈이 비장한 얼굴로 뒤늦게 자차 구매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맞은편에 앉은 서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언니.”

“응?”

“오, 오토바이 타 봤어요?”

“어. 수준급이지.”

하빈이 즉답했다.

‘이래 봬도 배달 알바까지 뛰었단 말씀!’

짐꾼 노릇하는 동시에 급하게 재료 납품하는 퀵서비스 배달대행까지 했던 그 시절. 덕분에 하빈은 오토바이를 모는 법을 배웠다.

살기 위해서.

“운전도…… 해요?”

“응? 운전면허 있어.”

“……!”

서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어느 포인트에 놀란 거지?’

“왜?”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너는 웬만하면 타지 마라. 혹시라도 탈 거면 보호장비 꼭 하고 정말 조심해서 타야 해!”

“네…….”

어째서인지 전보다 더 눈치를 보는 서윤을 보며 하빈은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점심 식사가 너무 맛있어서 다시 먹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점심 먹자마자 하빈이 한 일은 수업을 듣는 것도, 학교를 둘러보는 것도 아니었다.

“와, 기숙사 개꿀!”

기숙사 구석에 놓인 침대에 철푸덕 드러누운 하빈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여기, 수업 땡땡이치고 낮잠 자기에 정말 좋은 곳이야!”

하빈이 고개를 들어 기숙사 내부를 휙휙 둘러보았다. 그녀의 방은 층고가 꽤 높아서 아치형으로 멋들어지게 장식된 창문을 갖고 있었다. 천장 근처의 벽은 사선으로 기울어져 다락방을 연상시키는 아늑함을 주었고.

“저쪽은 뭐지?”

하빈이 방 한쪽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조그마한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개인 거실? 대박인데.”

거실 한쪽에는 무려 벽난로가 있었다.

[아이템 - 고요한 온기]

화속성 마법이 부여되어 있으니 주의. 대량 생산으로 제작된 물건이지만 효과는 확실한 인테리어용 물품이다.

방 안의 온도가 일정 미만으로 떨어지지 않는 효과를 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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