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69) (69/268)

069. I can't die, I'm all-in! (2)

“그럼 계산하겠습니다.”

“여기 한국 돈도 받아요?”

”물론이죠.“

”그럼 이걸로 해주세요.“

야시장 한 구석의 카지노.

하빈은 점원이 복권을 계산해 주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번쩍번쩍 현혹하는 것처럼 빛나는 룰렛판, 옹기종기 모여 카드를 치는 사람들.

“묻고 더블로 가!”

“밑장빼기냐?”

“증거 있어? 시나리오 쓰고 앉았네 X친 X끼가!”

우당탕탕!

“사쿠라였잖어…… 말도 안 돼.”

돈을 버는 사람, 잃는 사람, 그리고 멱살잡이를 하는 아름다운 광경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쯔쯔. 역시 착한 어른은 저런 걸 하면 안 되는 법이라구.”

하빈은 처음부터 도박판에 참여할 의향이 없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애초에 그 도박장엔 헌터가 난입할 수 없게 통제되고 있었다.

[헌터 출입 금지!]

[각성자 출입 금지!]

문 앞에 커다랗게 쓰여진 표지판. 그 옆에는 출입 신원을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다. 각성자로 등록된 사람인지 각국의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해 신원을 조회해 입증해야 출입이 가능한 시스템.

“저렇게 해놔도, 가끔은 미등록 각성자가 들어와서 난리가 난 적이 있긴 하죠.”

복권을 세던 점원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헌터들을 안 받으면 운영이 어렵지 않나요?”

킬스크린 섬에 오는 인원의 절반 이상이 헌터들인데. 그럼 도박장 입장에서는 중요한 고객들을 다 놓치는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습니다. 헌터님들은 스킬을 쓸 수 있으시니까요.”

점원이 대답했다.

“투시 스킬이나 아이템을 쓰면 상대방의 카드가 뭔지 단숨에 알아맞혀 버릴 것 아니에요?”

“아…….”

하긴 그럴 만했다. 감정 스킬과 투시 스킬은 물론, 그런 아이템을 가진 헌터들도 꽤 있었다. 그걸 사용하면 카드 정도야 꿰뚫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헌터님들은 시력도 좋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잖아요? 뛰어난 동체시력이랑 컨트롤도 게임을 하기에 지나치게 유리하죠. 아무리 빨리 카드를 섞어도 다 보일걸요?”

한숨을 내쉰 점원이 손을 뻗었다. 그 손가락 끝에는 룰렛과 다트판이 있었다. 룰렛을 돌려 숫자를 맞추는 게임, 다트를 던지는 미니게임.

“저런 것도 껌이겠죠. 룰렛쯤이야 뭐 걸릴지 보는 것도 쉬울 테고, 다트판은 웬만한 스탯치로도 정중앙만 맞힐 테니. 그런 헌터님들까지 참여시키면 저희 다 거덜 나요. 그래서 일반인들 상대로만 영업하고 있고요. 헌터들은 올림픽이랑 월드컵 참여 못 하는 거랑 비슷한 이치라고 보심 됩니다.”

“요즘도 올림픽을 해요?”

하빈이 의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게이트 사태 이후로 다 중지된 거 아니었어요?”

“내년부터 한다는 이야기는 나오는데, 각성자는 다 빼고 일반인 한정으로 한다는 쪽으로 결정 나서, 반응이 꽤 시들해요.”

“저런.”

하빈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 세계의 스포츠 문화는 게이트 사태 이후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일단 게이트 사태 초창기에는 ‘지금 괴물이 문제인데 올림픽을 왜 여느냐’, ‘올림픽 열었다가 거기 게이트라도 갑자기 터지면 대참사다’ 같은 의견들이 나와서 올림픽을 포함한 대규모의 스포츠 경기는 무기한 연기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다시 개최하려고 보니 새로운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경기에서 각성자는 빼야 한다.’

그 주장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게이트 사태 이전에도 약물로 능력을 비정상적으로 상승시킨 사람들은 경기에서 배제하듯이, 각성자도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

‘게다가 각성자와 비각성자는 애초에 싸움이 안 됩니다! 한 손으로 트럭을 들 수 있는 각성자와 평범한 일반인이 스포츠 경기를 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사실은 이쪽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먹혔다. 각성자와 비각성자 사이에 너무나도 큰 능력의 격차가 있기에, 경기를 하는 의미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비각성자끼리 경기를 하려니,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헌터들에게 쏠린 뒤라 반응이 시들했다.

‘그동안 헌터들이 몬스터 써는 거 보다가 인간들끼리의 펜싱 경기 보니까 예전의 그 긴장감이 덜하네.’

‘스킬 써서 활 난사하는 거 보다가 양궁 경기 보니까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가 싶다.’

헌터들의 전투도 SNS와 뮤튜브를 타고 속속 퍼져 있어서, 요즘은 누구나 손쉽게 헌터들의 전투 명장면들을 안방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전문적으로 유명 헌터를 따라가서 촬영하고, 편집해 업로드하는 ‘헌터 카메라맨’이 생겼을 정도니까.

안전상의 이유로 다들 던전 내에서의 촬영은 자제하라고 피데스가 매번 방송에 나와서 신신당부했지만, 한 번 폭발적인 조회수와 관심을 경험한 헌터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촬영과 업로드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을 비각성자끼리 해도 되냐는 이야기가 또 돌고 있더라고요. 아니면 헌터 전용 종목도 같이 신설하자는 의견도 나오던데요? 능력을 가진 헌터들이 서로 싸우면 그것도 볼만하겠다고.”

각성자들의 능력 배틀.

현재로서 각성자들끼리 능력을 사용해 싸우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불법이었다. 당연히 안전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 헌터들이 서로 싸울 때마다 스킬 날리면 주변 건물들이 망가질 것이고…….

“그렇게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어디까지 가는 건데요?”

“흠, 그래서 피데스 님이 그쪽 규제를 상당히 신경 썼구나.”

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데스가 정한 SPES표준규약에 따르면 각성자들은 인명을 지켜야 하는 위급한 순간이나 훈련 같은 상황을 제외하고서는 사람을 향해 공격 스킬을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걸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경기가 나오면 그것도 재미있겠죠? 인력 낭비이기는 하지만.”

몬스터와 싸울 소중한 전력을 겨우 오락거리로 삼는 느낌일 것이다.

“뭐, 꼭 배틀이 아니어도 새로운 종목이 신설되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매직 피겨스케이팅? 마법사 클래스의 헌터가 화려한 얼음 마법을 쓰면서 피겨를 한다면?”

“크으으. 예술일 듯! 윈터 왕국의 엘X가 따로없네!”

“두유 워너 빌 더 스노맨, 레릿꼬가 현실이 되겠죠!”

“헌터 올림픽 꼭 해야겠네!”

하빈이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뿌듯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복권 판매원은 탁탁, 마침내 계산된 복권 뭉치를 하빈에게 건넸다.

“남은 용지는 36장이 전부네요. 각 용지마다 1부터 20까지 숫자 7개를 적어서 맞춘 개수만큼 등수가 정해집니다. 7개 1등, 6개 2등…… 이런 식이죠.”

“로또네, 로또.”

“대신 지금 바로 숫자를 알려드린다는 점이 달라요. 숫자를 적으시면, 제가 이 버튼을 누르는데, 그럼 이 전광판에 랜덤으로 7개 숫자가 표시됩니다. 그거랑 용지에 있는 숫자를 대조해 보면 돼요. 아, 물론 용지에 있는 숫자를 뒤늦게 바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지 못하도록 특수 효과로 처리한 용지라서 기록이 다 남아요. 위변조를 가려낼 나름의 방법들도 있고요.”

“오.”

“이런 방법이라면 아무리 특별한 능력을 가진 헌터라 해도 능력을 써서 당첨되기 쉽지 않겠죠. 몇 초 후에 나올 숫자를 어떻게 맞추겠어요? 예지 능력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점원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 카지노는 킬스크린 지점 말고도 여러 곳에 분점을 두고 있는데요, 승률이 다 엇비슷하게 나오는 걸 보면 제아무리 헌터들이라고 해도 복권은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버튼에 손을 올린 점원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의 운도 시험해 보시죠!”

* * *

그러고 나서 30분 뒤.

“세상에…….”

점원이 탄식을 흘렸다. 그가 하빈이 그동안 찍었던 복권들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늘 운이 안 좋으신가 봐요.”

“…….”

꽝.

정말 놀랍게도 하빈의 복권 결과는 3분의 2가 꽝이었다. 나머지 3분의 1은 5등만 주구장창 해서 복권값을 어느 정도 돌려받은 게 전부. 하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말도 안 돼!”

행운 스탯이 21억인데? 그런데 꽝이라고?

지금 이 지구상에서 행운 스탯으로는 원탑을 찍을 텐데? 뭐, 당첨을 노리고 한 건 아니지만.

“흐음……?”

하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행운 스탯은 정확히 어떤 쪽으로 쓰이는 거지?’

극한의 허무를 극복했을 때 ‘행운 스탯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럼 전투를 할 때의 운인가? 스킬 적용과 관련되는 운?’

“에휴, 아쉬워. 그럼 저건 못 가져가겠네.”

하빈이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방금 보았던 ‘별의 조각’에 시선을 주었다. 4등부터 받을 수 있는 상품이었다.

“저게 딱 마음에 들었는데.”

“비슷한 유리 조각이나 보석도 많지 않아? 아무 효과가 없는 아이템인 걸 보니 그냥 장식품으로서의 가치밖에 없는데.”

“뭐? 채씨가 뭘 모르네. 원래 저런 예쁜 쓰레기가 제일 탐나는 법이라고. 선물하기도 좋고.”

하빈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삐딱하게 턱을 괴었다. 이제 남은 복권은 벌써 마지막 한 장.

“이거 정말 더 없어요?”

“남은 용지는 이게 전부입니다.”

“어차피 숫자로 맞추는 게임인데, 돈 더 낼 테니 아무 종이에다가 숫자 적어서 복권으로 쓰면 안 되나요?”

“저희 카지노 원칙상 안 됩니다.”

강경한 점원의 태도. 하빈이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지막 용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좋아, 이 마지막 복권에 모든 걸 걸겠어!”

[이게 뭐라고 그렇게 비장한 것이냐?]

“뭐 하나라도 건져가야지!”

그녀가 집중하려고 인상을 잔뜩 찌푸릴 때였다.

채지석을 향해 성좌 메시지가 날아왔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혹시 도와줄까 물어봅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채지석을 쿡 찌릅니다!]

“…….”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현하빈의 모습을 지켜보던 채지석. 그는 별수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역시 한 번만 도와줄까요?’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럼, 현하빈한테 다음 숫자는 5, 17, 12, 10, 9, 20, 7로 찍어보라고 전해주세요.’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결과가 기대된다며 콧노래를 부릅니다!]

신이 난 성좌가 현하빈에게 메시지로 속닥속닥 숫자들을 알려주었다. 그걸 들은 하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헐, 역시 예언자 개꿀이잖아? 그게 로또에도 통해?’

‘정확한 건 아닐 수도 있어. 그냥 감 오는 숫자 부른 거니까.’

‘개꿀!’

하빈은 눈을 빛내며 슥슥 번호를 적었다.

‘살다가 한 번쯤은 꿈에 나온 로또나 조상님이 불러준 로또를 찍어보고 싶었단 말이지!’

그런 꿈을 한 번도 못 꿔봐서 실패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찐 예언 스킬 능력자가 로또를 찍어준다?

이만한 대박이 또 없었다.

하빈이 싱글거리며 마지막 복권 용지의 작성을 마쳤다.

“이걸로 가죠!”

“네, 그럼 추첨하겠습니다!”

도르르륵 숫자들이 돌아가는 전광판. 마침내 그것이 딱 멈추고 숫자를 드러냈다. 전광판에는 이렇게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5, 18, 4, 2, 17, 9, 20

‘어디 보자, 내가 찍은 게 뭐였더라……?’

5, 17, 12, 10, 9, 20, 7

4등이었다.

“…….”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말도 안 되는 결과라며, 밑장빼기가 확실하다고 들고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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