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뒤늦게 찾아보니 캡사이신은 한국에서 법적으로 위험물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원재료명은 여기 적힌 대로 불러줄게. 궁금하면 알아서 받아 적자.”
“여봐라! 당장 펜을 가져와라!”
다른 마족이 건네주는 필기구를 황급히 빼앗은 크릭샤와, 핵맵닭볶음면 소스를 뒤집어 원재료명을 흘깃 보는 현하빈.
[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쯧쯧. 이 녀석 대체 이게 뭔 줄 알고 궁금해하는 것이냐?]
아헤자르가 중얼거렸지만, 하빈은 흘려들으며 글자를 읽었다.
“자자, 그래서 원재료명이 뭐냐면…… 정제수, 간장, 정백당…… 정백당이 왜 벌써 나와? 여기 설탕 생각보다 많네?”
매운 맛에 가려져서 모를 뻔!
그때, 크릭샤가 물었다.
“저, 외람되지만 정백당이 무엇인지요?”
“설탕.”
“설탕은 뭡니까?”
“뭐어?”
현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여긴 설탕 없어?”
어떤 요리든 들어가면 환상적인 맛으로 탈바꿈하는 마법의 재료!
빵과 케이크, 아이스크림에도 절대 빠질 수 없는 인생의 필수품!
그 맛있는 게 없단 말이야?
“그럼, 아까 음식에서 먹었던 단맛은 뭘로 낸 거지?”
하빈의 의문에, 마침 연회장에 나와 있던 셰프가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와 대답했다.
“츠츠두라는 마물이 집에 수집한 꽃꿀, 그리고 파흐쟈의 열매를 갈아 굳힌 덩어리를 쓴답니다.”
말을 마친 셰프가 한껏 흥분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외람되지만,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간장’은 뭐죠?”
“어…….”
인상을 찡그린 채 굳어 있는 현하빈.
“그러니까…….”
옆에 있던 채지석이 대신 대답하려다가, 답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설탕도 없는 세계인데 콩을 소금에 발효시키고 어쩌구 하는 간장의 제조법을 읊어봤자…….
“흐음, 그래. 뭔 말인지 알겠어.”
하빈이 생긋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자, 그냥 때려 치자!”
마계에서 핵맵닭볶음면 제조하는 건 불가능이다. 불가능!
‘판타지 소설 보면 다들 이계에 떨어져서 요리로 성공하던데, 여긴 답이 없네. 당장 식재료부터 다 다를 텐데 어떻게 배합했담? 굉장히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야. 나라면 진작 때려 쳤다!’
“허어…….”
크릭샤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원재료들이 너무 구하기 힘든 것들이라 안 된다는 의미시군요. 역시 전설 속 재료들이 필요한 것입죠?”
정백당, 정제수, 간장. 그게 크릭샤에겐 모두 생소하고 엄청난 신비를 가진 이름처럼 들렸다. 하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대충 그래. 설탕과 간장은 아주 전설적이지. 달달한 간장 소스는 전설이야. 그걸로 찜닭만 만들어도 감탄이 나오니까.”
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탈탈 털었다.
“에이 복잡해. 그냥 사줄게, 사주는 게 더 빠르겠다. 다음에 올 때 생각나면 핵맵닭볶음면을 챙겨올 테니 그리 알아.”
“헉, 정말 그리 해주시는 겁니까?”
“모짜렐라 치즈도 챙겨와서 제대로 만들어 먹어봐야지. 아, 팝콘도 챙겨와야겠다. 아까 영화 볼 때 팝콘 안 가져온 게 엄청 후회되더라. 나도 참, 어떻게 영화만 챙기고 팝콘을 안 챙겨 올 수가 있지? 반성해야겠어!”
“……?”
본격적인 미식 계획 수립에, 채지석이 의아한 얼굴로 하빈을 돌아보았다.
“너 여기 다시 올 거야? 아까는 당장 집에 돌아갈 거라고 이를 갈더니? 여기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야?”
“아냐. 여기는 마음에 든다구. 특히 이프시네가 빌려준 방에서 즐겼던 호캉스라든가, 고급진 음식이라든가. 귀찮게 하는 사람만 없으면 여러모로 놀기 참 좋은 곳인데.”
마계 관광 패키지를 만들어 영업하는 것도 꽤 괜찮을지도?
하빈이 끄응, 하고 고개를 저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내가 이곳의 책임을 떠맡는 건 곤란하다는 거지. 상주할 것도 아니고, 마계 출신도 아닌데 마계를 맡는 게 말이나 돼?”
이쪽 문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외계인을 데려와서 우리나라 대통령 시킨다고 하면 얼마나 어이가 없어?
[의외로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뭐어? 날 뭘로 보고? 난 이래 봬도 아아주 양심적인 사람이야. 물론 무엇보다 굉장히 귀찮고, 또 귀찮고, 번거롭고, 부담스러워서 때려 치고 싶은 게 더 크지만.”
하빈은 아직도 그들의 주위를 커다랗게 원을 그린 채 ‘와아 마신님’ 하는 눈빛으로 빙 둘러싼 수많은 마족들을 보며 한숨을 탁 쉬었다. 몇몇 마족들은 그새 플래카드까지 만들어서 흔들고 있었다.
‘마신님이 마계를 뒤집어 놓으셨다!’
“젠장. 누가 저거 좀 그만 흔들라고 해줘!”
“네! 제가 당장 저놈의 목을 쳐서……!”
재빠르게 일어난 크릭샤 때문에 하빈은 한숨을 더 쉬었다.
“아, 죽이지 말라고!”
“그럼 고문을!”
“고문도 하지 말고!”
“넵넵!”
신나게 대답하는 크릭샤.
사실 크릭샤는 지금 최고조로 신이 난 상태였다.
‘이 마신이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방금 하빈이 집에 간다는 소리를 듣고 크릭샤는 만면에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 여자만 집에 가면 내가 마계의 일인자가 된다!’
크릭샤는 후후 웃으며 연회장 한쪽에 널브러진 다른 마왕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지금 마왕들은 크릭샤를 빼고 다 죽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했던가?
다른 마왕들이 글리치에게 겁 없이 덤볐다가 싹쓸이를 당하고 있을 때, 크릭샤는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기절하고 다친 다른 마왕들을 하나씩 처리해 버렸다.
‘후후후. 다른 마왕들이 없어진 지금, 저 마신만 돌아가면 내가 마계의 일인자다! 드디어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이 마계에 크릭샤를 견제할 강자는 저 마신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저 마신만 집에 돌아가면, 크릭샤는 곧바로 실권을 잡고 모두를 통치할 것이다. 그런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을 보고 있던 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크릭샤는 안 되겠어.”
“뭐, 뭐가요?”
“딱 보니까 내가 떠나면…….”
“떠나면?”
“뒤통수칠 것 같이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잖아.”
“……!”
‘이 인간, 별생각 없는 척하면서 사실 다 알고 있는 거 아냐?’
가끔 보면 어디까지 알고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까.
흠칫한 크릭샤가 다시 모른 척 웃으며 손을 비볐다.
“에헤이이! 아닙니다! 저의 충성심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이 크릭샤를! 그동안 제가 얼마나 잘했습니까?”
“잘하긴 했어. 엄청 친절했지.”
“그렇죠! 그죠!”
크릭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으면 얌전히 집에나 가라고!’
크릭샤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꾹 참으며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하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애들 살살 다루랬는데 크릭샤는 언제나 죽일 생각이랑 고문할 생각부터 하고 있잖아?”
이러다 마족 다 잡겠네.
그녀의 말에 크릭샤가 다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에에이, 아닙니다! 그거 다 웃자고 한 소리죠. 웃자고. 헤헤. 그치?”
그가 근처의 순진한 마족 한 명에게 어깨동무를 걸치며 세상 착한 표정으로 웃었다. 물론 마족의 귀에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 같이 웃어. 웃으라고.’
“흐이이…….”
크릭샤의 손에 붙잡혀 벌벌 떠는 마족.
‘친한 척 안 하면 당장 네 목을!’
“무, 물론입니다! 크릭샤 님은! 굉장히 친절하시고! 성군이 되실 재목이시죠! 하하! 하하하! 목을 친다는 건 농담으로 하신 겁니다. 그런 농담 자주 하십니다!”
“헤헤, 들으셨죠? 농담입니다, 그런 건.”
“하하하! 농담이죠!”
“……그으래?”
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농담이든 아니든, 하빈이 알 바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우왕좌왕 모여 있는 마족들로 시선을 돌렸다.
내색하지 않아도 크릭샤의 모습에 잔뜩 겁먹은 표정이 다 보였다.
그리고 당연히, 그걸 느낀 건 현하빈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마왕의 말을 믿는 것이냐?! 저 녀석이 아무리 착한 척을 해도 사악한 마왕의 본질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되느니라! 저 녀석한테 마계를 맡겼다간…….]
이처럼, 아헤자르의 잔소리도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고.
하빈은 마왕성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턱을 괴었다.
“흐음, 크릭샤가 참 편하긴 한데. 눈치도 빠르고, 태세 전환도 빨라서 내가 참 아껴.”
“그렇습죠! 저만 믿고 맡겨주시면!”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하빈이 고개를 돌렸다. 마침 아까부터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는 한 마족의 시선이 느껴졌다.
엄청난 사건의 연속에도 흔들리지 않고, 섣불리 도망가지도 않으며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봤던 분홍 머리의 마족.
이프시네였다.
“이프시네는 어떻게 생각해?”
“네? 저요?!”
가만히 있던 이프시네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왜 이 이야기에 끼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가주가 되고 싶다며?”
“그랬죠?”
“이왕 우두머리 맡는 김에, 마왕 한번 해보자!”
“네에에?!”
“네에엑?”
이프시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빡거렸고, 크릭샤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왜…….”
“왜냐니? 마왕이 크릭샤 빼고 다 죽었잖아. 여섯 자리 공석이야. 이프시네가 하나쯤 차지해도 별문제는 없지 않아?”
“그, 그래도 이런 파격적인 인사는 안 됩니다! 반발이 있을 거라고요!”
“어떤 반발?”
“그게…….”
끄으으.
크릭샤가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 다른 마왕들을 다 처리하고 자신이 일인자가 되나 싶었는데! 새롭게 마왕을 한 명 더 추가한다니!
이러면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진다.
그가 부들거리는 주먹을 감추며 필사적으로 반박할 거리를 찾아내었다.
“야, 약육강식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프시네보다 강한 마족들이 반대할 겁니다!”
“오, 반대하는 놈 있으면 알려 줘. 내가 가만 안 둘게.”
“…….”
애석하게도, 그 ‘반대하는 놈’이 크릭샤였다.
‘내가 반대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하빈이 말을 이었다.
“약육강식이라며. 그건 강한 사람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거 아니야?”
“그, 그렇죠.”
“그럼 내가 제일 강하잖아?”
“그……렇죠.”
“그럼 내 말대로 이프시네가 마왕 하자!”
“그……건!”
안 되는데…….
크릭샤의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자, 하빈이 쐐기를 꽂아 주었다.
“흐음, 크릭샤가 꽤 생각이 깊구나. 이렇게 걱정도 다 해주고. 하지만 걱정 마. 이프시네 건드리는 놈 있는지 주기적으로 와서 내가 확인할게! 그럼 되지?”
‘아, 안 돼! 뭘 주기적으로 온다는 거냐!’
크릭샤는 입술을 뜯으며 이프시네를 돌아보았다.
‘제발 거절해라! 거절해!’
아무리 이 여자가 밀어붙인다 해도, 저 녀석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별수 없을 테지.
‘딱 보니 부담스러워서 거절할 것 같은데?’
크릭샤가 보기에 이프시네는 겁 많고 여려 보이는 이미지였다. 잘하면 ‘제가 어떻게 그런 걸 맡나요?’ 하면서 손사래를 칠지도 모른다.
‘그럼 그때 내가 나서서 본인이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건 부당하다고 거들어야지. 흐흐.’
하지만 그다음 순간, 이프시네의 대답이 이어졌다.
“마신님께서 명하신다면 당연히!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죠! 이 한 몸 다 바쳐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파이팅 넘치는 눈빛으로 비장하게 대답하는 이프시네.
‘왜, 왜! 넌 뭘 믿고 그렇게 확신에 차서 받아들이는 거야!’
마지막 희망까지 꺾여 버린 크릭샤는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