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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61) (61/268)

061. 멀쩡한 학연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4)

현시우의 등장.

물론 겉으로는 마족으로 위장한 피데스의 모습이었기에, 지석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니, 아무것도……. 그냥 마신님을…….”

“그쪽은 나름 심복인데, 마신님이 어디 갔는지 모릅니까?”

“워낙 신출귀몰하신 분이라서.”

“흠. 그럴 만은 하죠.”

‘확실히, 현하빈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긴 해.’

현시우가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지석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그쪽은 마신님을 찾고 계신 거죠?”

“그건…… 음…….”

‘뭐라고 둘러대지?’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현시우와 채지석은 그들끼리 이리저리 둘러대고 있었다.

‘같은 인간끼리 둘 다 뭐 하는 거야?’

그 광경을 본 채지세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때였다.

끼이익-

갑자기 연회장을 채우는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자.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마왕성 전체에 방송처럼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채남매와 현시우를 비롯한 모든 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연회장의 가장 앞쪽, 툭 돌출된 무대 같은 곳에서, 한 마족이 가만히 서 있었다.

조용히 말하는 것 같은데 모두를 향해 들리는 목소리. 다른 마족들의 이목이 머지않아 그에게 집중되었다.

은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한 마족.

분명 흔하게 보이는 시종 차림이었다. 지금 이 연회에 그와 똑같은 복장을 한 시종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일반적인 마족들과는 전혀 다르다.’

현시우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네아이바를 꽈악 움켜쥐었다. 풍기는 기운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저 은발 마족은, 절대로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시종 차림의 마족이, 이쯤이면 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들 연회를 즐기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곧 ‘마신의 반지’ 경매가 벌어질 예정이라서요.

‘마신의 반지?’

현시우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이번 50층 공략 아이템이다.

그 말에 반응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은발의 마족을 바라보았다.

마족들은 물론, 물론 숨어 있던 다른 헌터들, 다른 마왕들까지도. 전부 고개를 들고 은발의 마족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잠깐의 침묵이 그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그러고 보니 원래 경매를 참관하던 마족이 따로 있었을 텐데? 왜 저 녀석이 저러고 있지?”

의아하다는 목소리.

“그, 그러게?”

“무슨 일이지?”

그것을 기점으로 수군수군 당혹과 놀람이 섞인 목소리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저놈은 뭐야? 차림을 보니 그냥 시종 아냐?”

“누가 저 녀석에게 저러라고 시켰어?”

“경매 관리자들은 다 어디 가고?”

“그리고 경매를 왜 벌써 시작하지?”

웅성거림이 잦아지자, 은발의 마족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웃었다. 그가 느린 동작으로 손뼉을 짝, 하고 쳤다.

크헉-

그와 동시에 무도회장 전체에 무거운 위압감이 내려앉았다.

‘허억……!’

방심하던 마족들이 놀라서 서로 눈짓했다.

‘이 정도의 기운은 최소 마왕 이상인데……!’

‘이게 무슨……!’

소리 없는 경악이 그들 사이로 터져 나왔다.

-제가, 주목을 해달라고 말했는데요.

다들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은발의 마족이 느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고 있다는 듯, 꾹꾹 눌러 담은 어투 같기도 하고, 굉장히 귀찮다는 말투 같기도 했다.

-마왕성에 보관되어 있던 반지는 제가 슬쩍 했습니다. 여기. 됐습니까?

그가 손을 들자, 붉은 광채가 도는 검은 반지가 그곳에 나타났다.

“……!”

모두들 경악하여 반지를 바라보았다.

마신의 반지.

“지, 진품이야?”

“빨리 확인해!”

마왕들의 명령에, 다른 시종들이 황급히 반지가 보관되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혼비백산한 얼굴로 돌아왔다.

“지, 진짜인 것 같습니다!”

“원래 있던 반지가 사라졌어요!”

“뭐?!”

그 소식을 들은 마족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마신의 반지.

다들 바보라서 그걸 진작 훔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마왕들이 어떤 작자들인데.

사악한 마왕들이라면 경매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진작 반지를 훔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것은 반지가 전설 속 마신의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마법이 곧 풀리기 때문에, 그것에 맞추어 경매 날짜를 잡았다. 그전까지는 그동안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 물건.

마신이 아니고서야 누구도 손댈 수 없을 물건이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빼낸 거지?’

현시우 또한 심각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가 굳이 ‘반지’를 경매일에 노리러 온 이유는, 세계 최강의 마법사였던 그조차도 ‘마신의 마법’에는 손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어떻게 저리 쉽게 반지를 얻었단 말인가?

그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은발의 마족은 털썩 근처의 난간 장식에 걸터앉았다.

장난스럽게 반지를 던졌다 받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대들의 노고가 너무 갸륵해서, 저는 예정대로 경매를 열어줄까 합니다.

“흠흠, 그럼 마왕인 우리들이-”

그 말에 분노, 나태 등의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은발의 마족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앉아 계십시오. 왜냐하면 제가 방금 아주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는데.

“뭐지?”

-방금 ‘색욕’의 마왕 자리가 사라졌다고들 하던데요.

“…….”

그가 웃음을 지으며 저 멀리 눈길을 주었다. 그곳에는 이미 시체가 되어 쓰러진 색욕의 마왕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여기 있는 모든 마족이, 마왕 후보라고 간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뭐, 뭐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마왕 중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원래는 마왕들만이 경매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이 원칙을 세워놨는데, 저 은발의 마족이 모든 것을 망치고 있었다.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으니 다시 설명하죠. 자, 이제 여러분이 모두 자격을 갖추었으니, 여러분 모두를 대상으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엄청난 소리에 마족들이 놀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미 참가 자격을 가지고 있었던 마왕들은 화가 난 듯 씩씩대며 외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감히 마왕이 아닌 놈들이 참가를 한다고? 다들 참가하기만 해봐라, 갈기갈기 찢어주마!”

“인정할 수 없다! 우리가 왜 네놈의 말을 따라야 하지?”

한 마왕은 아예 대놓고 은발의 마족을 향해 뛰어들었다.

‘탐욕’의 마왕이었던가.

펑-

그리고 그 공격은, 은발 마족의 손동작 한 번으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에 저 멀리 튕겨 나갔던 탐욕의 마왕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발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십시오. 내 말 안 끝났습니다.

귀찮다는 표정의 은발 마족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합니다. 경매 참가 가능 대상은 이곳에 있는 존재 전부.

그리고 낙찰 조건은…….

-저를 이기고, 반지를 빼앗으면 됩니다.

그 말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우르르, 쾅쾅쾅-

“죽어! 죽어라!”

“당장 그걸 내놓지 못할까!”

난장판이 된 연회장.

잠깐의 침묵 후, 상황을 파악한 마왕들은 돌아가며 은발 마족을 향해 공격했다.

대부분 몇 방 만에 나가떨어졌지만, 아직 지치지 않고 공격하는 마왕들의 공세에 연회장의 벽은 반파된 상태였다.

“피데스 님!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피데스 님!”

“…….”

‘대체 이게 무슨…….’

당황한 헌터들이 현시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현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은색 마족이 경매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도회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은발 마족을 공격하다 못해 이제는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마왕들, 쏟아지는 마법들.

마계대전이 벌어졌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최후의 난장판.

그 와중에도 유유자적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불가사의한 은발의 마족.

놀랍게도, 그동안 그에게 쏟아지는 어떤 공격도 제대로 먹히는 법이 없었다. 은발의 마족은 오히려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부추겼다.

“너희가 다 덤벼도 겨우 이 정도가 끝이라니, 마계도 끝물이네. 역시 후배님 영입 안 하면 힘들겠어.”

“이이익! 이게 우리를 놀려!”

쾅.

그를 향해 쏟아지는 공격이 신기루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마족을 보며, 현시우는 고개를 기울였다.

“네아이바.”

[그래.]

“설마 저 마족이…… 진짜로 전설 속 ‘허무의 마신’일 리는 없겠죠.”

뚝.

그가 ‘허무의 마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이었다.

현시우는 멀리 있는 은발의 마족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눈이 마주쳤다.

“…….”

어쩐지 목덜미에 소름이 끼쳤다. 단지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느껴지는 무거운 위압감.

‘저자는 대체…….’

마왕과 비교도 안 되게 강력하다. 인간과 마족의 경지와는 갖다 댈 수조차 없는 경지.

‘마계에 나타날 존재 중 이 정도의 강자가 있었나?’

전설 속 마신이라면 모를까.

현시우는 고개를 돌렸다. 저 은발의 마족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회귀 전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았던 변수야. 확실해.’

‘마신’은 회귀 전에 마주친 적 없었다.

그때는 심지어 저 녀석이 들고 있는 ‘마신의 반지’ 아이템도 존재감이 대단하지 않았다.

회귀 전, 마신의 반지를 얻었던 현하빈이 했던 말을 현시우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신의 반지? 겉모습만 휘황찬란하고 아무 능력이 없는 아이템이야. 뭔가 조건이 맞으면 능력이 발현되는 것 같긴 한데, 그 조건이 뭔지도 모르겠고.’

‘에이, 잡템이네.’ 하면서 인벤토리에 던져 넣던 현하빈. 그래서 단지 50층 클리어 조건으로만 넘겼던 아이템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난이도로, 말도 안 되는 변수를 데리고 나타났다.

‘……만일 저게 진짜 마신이라면.’

이건 현시우가 감당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거지?’

현하빈이 마신을 사칭했을 때부터?

아니면 그가 색욕의 마왕을 너무 일찍 죽여서?

‘그만 철수하고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하나?’

게다가 현하빈은 지금 또 어디로 사라진 걸까, 괜찮은 건가.

그가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뒤로, 테라스를 막고 있었던 덧문이 열렸다.

뚜벅, 뚜벅.

현시우는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뜻 평범한 걸음걸이었지만 보통 기운이 아니었다.

가히, 새로운 마신, 아니 그 이상이 나타났다고 해도 믿을 만큼의 위압감.

……이런 존재감이 또 나타났다고?

현시우가 꿀꺽 침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하……. 선배 좋아하시네. 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아서 계속 이런 일이 터지는지.”

“……?”

“나이 많이 드신 건 맞아서 깍듯이 대우해 드렸는데, 정도를 모르시네?”

그 인물이 꺼낸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현시우는 천천히 상대를 살펴보았다.

특유의 커다란 장검을 한쪽 손에 쥐고, 이를 갈며 은발의 마족을 노려보는 여자.

“내가 소중한 컵라면까지 줬는데 이러기야? 이건 상도덕이 아니지!”

어쩐지 울분에 찬 것 같은 짜증 난 목소리와 말투.

“…….”

저건 누가 봐도-

‘현하빈?’

방금까지 찾던 그의 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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