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멀쩡한 학연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3)
하빈은 곧바로 대답했다.
“뭔데요?”
정말로 모른다는 표정.
심지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정말 관심 없는 얼굴로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반지 아니었음?”
“……진짜 모르는 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글리치는 별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걸 얻으면 마계의 주인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진짜 몰랐단 말이야? 난 네가 그걸 노리고 나를 사칭한 줄 알았는데.”
말을 맺은 글리치가 하빈을 돌아보았다.
‘이 말을 들으면 이 녀석은 어떻게 반응할까?’
마계를 손안에 쥘 수 있는 아이템. ‘마신의 반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 후배는,
정말 몰랐다며 눈을 크게 뜰까? 아니면 본색을 드러낼 것인가. 글리치가 집요하게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을 때.
마침내 하빈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엥……. 마계의 주인이 된다니? 무슨 그런 해괴망측한 소문이.”
“……해괴망측?”
“그런 거면 손끝 하나 건드리면 안 되겠다!”
하빈이 식겁했다는 표정으로 손을 짤짤 털었다.
‘마계의 주인? 정말, 듣기만 해도 굉장히 귀찮고 곤란한 이름이잖아!’
마왕이니 마신이니, 잠깐 사칭만 하는 지금도 주변에서 하도 달려들어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진짜 마계의 왕이 된다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우두머리로 살아야 한다고?
“절대 그럴 수 없지!”
결의를 다지는 현하빈. 그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글리치에게 말했다.
“저는 집에 가서 볼 드라마도 있고 버킷 리스트도 채워야 하고, 아무튼 너무 바빠서 그런 자리는 절대 못 앉거든요. 아마 저보다 훠어어얼씬 적임자가 있겠죠? 그죠? 안 되면 선배님이 도로 가져가도록 합시다.”
“…….”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그런 위험한 반지가 있으면 스스로 가져가기. 콜?”
“위험한 반지……?”
글리치가 입을 다물었다.
이 인간의 반응은 시종일관 이상했다.
보통은 뭔가를 가질 수 있다고 하면, 욕심이 나야 하는 거 아닌가? 야망을 가지거나.
다른 것도 아닌 ‘마계’를 가질 수 있다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건가?’
마계에 숨겨진 모든 보물들, 마왕군과 마수들을 비롯한 ‘마계’와 관련된 모든 권력을 통칭하는 것이다.
글리치는 찬찬히 현하빈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어째서인지 저 심드렁한 표정은 아무리 봐도 진심이었다. 이 인간은 정말로 욕심이 없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
글리치가 미련이 남은 듯 질문했다.
“진짜 반지를 원한 게 아니었나?”
“아, 진짜로 아니라고요.”
“그럼 여긴 왜 온 거지?”
“음…….”
하빈은 팔짱을 꼈다. 그녀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여기 따라온 이유는 당연히 채씨가 지세 언니 걱정된다고 와보자고 해서 그런 거다.
어차피 하빈도 지세 언니가 일찍 돌아오면 커다란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여기 온 가장 큰 이유라면, 이거지!’
하빈이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언니랑 늦지 않게 딸기 뷔페에 가야 해서!”
“딸기…… 뷔페?”
“에휴, 그거 생각하면 빨리 반지 찾고 50층 공략 완료시켜 버리는 게 제일 편하긴 한데.”
“……고작 딸기 뷔페 때문에 여길 왔다고?”
글리치도 딸기가 뭔지 알았다. 마계에도 비슷한 베리류의 과일들은 있었으니까.
‘그런 한심한 이유로 이 인간이 여기 왔단 말이지? 이걸 기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군.’
현하빈은 모르겠지만, 글리치 입장에서 그녀는 개고생하면서 찾던 후계자감이었다. 물론 처음엔 의심됐지만, 그녀가 품은 가치만큼은 확실해 보였으니까.
어쩌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그와 비슷한 ‘오류’ 속성을 가진 강자.
‘살아 있는 오류.’
마신 글리치 또한 그녀와 비슷하게 오류로 취급받던 존재였다. 마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언제나 시스템에게 무시와 적대를 당하고, 편입되지 못해서 꽤나 고생을 한 입장.
‘아마 이 녀석도 비슷한 고생을 했겠지.’
오류로 살아가는 건 필연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다. 시스템이 줄 수 있는 모든 편의를 제공받을 수 없고, 들키면 관리자의 척결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온 강자가 되었다. 그 말은, 그만큼의 목적과 능력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글리치가 그랬던 것처럼.
보통의 독기와 재능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버텨오기는커녕, 관리자에게 진작 죽었을 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글리치는 그동안 하빈이 마왕성에서 했던 행동들을 모두 지켜보았다.
‘히익, 미친 인간!’
언제 구워삶았는지 마왕 크릭샤를 제 수족처럼 부리질 않나.
‘나는 이프시네 편인데?’
득 될 것 없는 약소 마족의 편을 들고.
‘색욕의 마왕은 이제 끝났다!’
마계의 골칫덩어리었던 헤르밋을 단 일격에 처단해 버렸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처사였지.’
글리치는 회상에 잠겼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글리치는 마계를 다스릴 지도자감을 찾았지만, 좀처럼 나오지 않았었다.
마계를 지키고 지배할 만한 다른 강자들, ‘일곱 마왕’은 이기적이고 심보가 비틀려 있었다.
간혹 성품이 좋은 이가 나타난다 해도 다른 마왕들을 통제하고 외부의 위협까지 맞설 만큼 강하지 못했다.
모두를 꺾을 만큼 강하면서, 동시에 작고 소중한 것을 지켜낼 수 있는 자?
그런 자는 이상향에 불과할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글리치가 직접 마계에 간섭하는 건 어려웠다.
미등록 성좌로서의 제약.
성좌라는 지위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만큼 강하지만, 그만큼 함부로 영향을 끼칠 수 없다.
한 발만 삐끗하면 그토록 끔찍이 싫어하는 관리자에게 약점을 잡힐 테니.
그동안 그는 일곱 마왕이라는 차악의 선택지를 내버려 두며 마계를 지켜봤다.
‘그런데 이렇게 완벽한 후계자감이 나타날 줄이야.’
성좌가 아닌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무시 못 할 정도로 강력한 힘, 주변을 끌어들이는 리더십과 더불어 약자를 지켜주는 군주로의 면모까지.
“그걸 모두 다 갖추고 있으면서 정작 권력욕은 없다니.”
그 점마저도 소름 끼치게 완벽했다. 글리치가 웃는 얼굴로 하빈에게 마지막 제안을 했다.
“너, 정말로 마계를 가질 생각이 없나? 네가 예상한 것보다 얻는 게 훨씬 많을 거라고 장담하지.”
“바람직한 선배는, 본인 과제를 후배에게 떠넘기지 않죠.”
“아까워 죽을 지경인걸.”
“조별과제는 사양이라고.”
“…….”
강경한 하빈의 태도.
글리치는 심드렁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 안에 박힌 가시를 읽어냈다.
저건 농담인 것처럼 굴어도 진심이다. 그는 그걸 모를 정도의 눈치 없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 인간의 말은 가벼운 듯해도 은근히 뼈가 있었다. 음식을 건네주고, 되도 않는 선후배 소꿉놀이를 하면서 농담처럼 굴어도.
절대 글리치의 말에 넘어온 적이 없다. 휘둘리거나 흔들린 적도 없었다.
‘이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상대는 정말 오랜만이야.’
수많은 세월을 거쳐오며 셀 수 없는 존재를 만났고, 셀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이제 웬만한 이들의 의도는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고 자만했던 모양이다.
‘선배님.’
‘라면이 불어요.’
‘그런 거면, 절대 가지지 말아야지.’
‘딸기 뷔페를 가야 해서.’
이 인간의 대답은 단 한 번도 그의 예상을 맞힌 적이 없었다. 이렇게 연속으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건 정말로 처음에 가까웠다.
글리치는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이 상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만족스럽다는 듯 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좋아. 후배님이 정 마계에 관심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그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깝지만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겠어.”
“오, 뭐야. 의외로 후배 의견을 존중해 주는 깨어 있는 선배셨잖아?”
하빈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꼰대 선배, 귀찮은 일을 후배에게 떠맡기는 선배만 아니면 이런 선배는 참아 줄 수 있었다.
하빈이 착착 컵라면 쓰레기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제 대화 끝났으니 서로 깔끔하게 헤어지고, 50층 원정대 헌터들이 다치지 않게 지켜본 뒤 조용히 튀면 된다.
그러나 글리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미련이 남았는지, 구슬리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여기서 더 강해지는 법을 알고 싶지는 않나? 너처럼 ‘오류’로 살았던 존재로서 내가 아는 특별한 팁이 있는데.”
“엥.”
“이왕 한 번 살아본 선배가 팁 정도는 줄 수 있어.”
“노놉!”
하빈이 곧장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충분히 강해서 필요 없는데요!”
“…….”
하빈이 인상을 썼다.
‘스탯이 21억을 찍는데 여기서 더 강해지라고?’
안 그래도 힘을 숨기고 싶은데 너무 강한 바람에 측정기도 폭파, 연수원 연습 인형들도 다 폭파시켜서 곤란하던 현하빈이었다.
‘여기서 더 강해지면 개미 눈물의 소금 결정, 그것보다 더 적게 힘을 써야 하는 건가? 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지?’
아마 주변에서 영입하려고 꼬시는 것도 하빈이 강해서 그렇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A급이 되어 국가의 부름을 강제로 받게 된 것도 강해서고.
이 강함 때문에 시스템의 견제를 받는 것일 테다.
하빈이 팍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글리치의 발언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꿋꿋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나? 이 세상을 ‘오류’의 지위로 시작하는 건, 처음에는 아주 끔찍하더라도 계속하면 할수록 비교도 못 할 장점이 되지.”
글리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원래 마신도 성좌도 아니었던 내가, 마신의 자리에 오른 것도 그 덕이었고.”
“…….”
“이건 시스템과 완전하게 상극인 길처럼 보이지만-”
역으로 말하면 시스템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루트.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혼잣말을 뱉은 글리치가 하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넌 성좌도 아닌데 벌써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나로서는 당연히 기대가 될 수밖에.”
“멋대로 기대하지 마시죠. 전 조용히 살 거니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을걸.”
스륵.
[현하빈! 조심……!]
“……!”
그건 정말 찰나의 방심이었다.
글리치가 하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척 조용하고 무해한 움직임이라 맞설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움직임.
그러나.
[경고! 극한의 허무를 마주했습니다!]
[경고! 시스템이 붕괴합니다! 경고!! 당
당 ㅏ자 D DLR이!을 @!!!!!원ㄹㅇㄷㄹ; ! eroero!01001000 1 0 1 1 1 1 1101]
시야에 가득 담기는 경고창의 무의미한 숫자들과, 아득해지는 눈앞, 기묘하게 울리는 경고 알림.
“미안 후배님. 난 역시 꼰대인가 봐. 가능성이 있는 후배가 썩고 있는 건 절대 두고 볼 수가 없어서.”
희미하게 들리는 글리치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
그것이 시야가 완전히 흐려지기 전에 하빈이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 * *
한편, 연회장.
‘뭐야…… 현하빈 어디 갔어?’
-삐이익?
리베와 이프시네를 챙긴 지석과 지세, 크릭샤는 하빈을 찾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잠깐 쉰다더니 너무 오래 사라졌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채 남매는 진심으로 걱정된 마음에 현하빈을 찾고 있었다.
반면, 크릭샤는 찾는 척만 하고 속으로는 딴생각을 품는 중이었다.
‘미친 인간님, 아니 미친 마신님! 제발 나타나지 마시고 저를 가만두십쇼!’
‘음, 분명 이쯤으로 사라진 것 같은데…….’
지세가 기웃, 테라스 쪽을 바라볼 때였다.
“뭘 찾습니까?”
그들의 앞에 현시우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