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근데 타지에서 갑자기 만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혈육이면 반갑기보다 당황스러울 듯?
한편, 하빈과 헤르밋이 만나기 조금 전.
“쟤 저기서 뭐 하냐?”
현시우.
그는 크릭샤와 하빈이 툭탁대는 광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롱 타임 노 씨!’
‘히익!’
가면 아래 하빈의 얼굴을 보며 깜짝 놀라는 크릭샤의 반응.
게다가 그들의 대화도 심상치가 않았다.
‘하, 하하.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무척 반갑습죠! 이 몸은, 당연히 마신님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만났다라.
현시우가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는 말은, 현하빈 역시 크릭샤를 예전에 본 적이 있다는 거지?”
[그러게? 대체 언제 둘이 만난 거냐?]
“하, 빤하죠.”
……26층에서 만났겠지.
현시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 현하빈이 킬스크린에서 폰만 했다고? 꾀병이나 부려?’
정보원은 분명 그렇게 현시우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저 꼴을 봐. 전혀 아니잖아?!’
때마침 하빈의 옆에서 굽실거리는 크릭샤의 모습이 보였다.
‘헤헤, 연회는 마음에 드십니까?’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손을 비비적거리는 크릭샤.
‘저 정도면 마왕을 꼬봉 삼아서 놀다 온 것 같은데?’
[와, 교만의 마왕이 어떻게 저런 꼴을 하지?]
네아이바도 덩달아 감탄을 흘렸다. 현시우는 기가 차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교만의 크릭샤. 그는 인류가 겪었던 최악의 보스답게 무척 강력했고, 성격도 더럽게 오만했다. 인간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일은 상상도 못 할 광경.
‘역시 현하빈이라는 건가.’
도대체 26층에서 무슨 짓을 했길래 무려 마왕 크릭샤를 제 편으로 만든 건지.
‘하, 이번에도 정보원 바꿔야 하나. 뭐 어떻게 된 게 제대로 정보가 들어오는 법이 없어?’
현하빈이 킬스크린에서 조용히 있었다던 정보원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뒤에서 깽판을 치고 있었을 줄이야!
‘하아…….’
속이 타는 듯 한숨을 내쉰 현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네아이바가 침착하게 그를 뜯어말렸다.
[야야, 진정해. 어차피 현하빈 쟤를 이길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맘먹고 숨기면 아무도 쟤 행적 못 알아내.]
‘그건 그렇지만…….’
현시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시하며 일단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50층 공략.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마왕 하나는 처치해서 경험치를 얻어가면 좋은데.’
지금 레벨로는 간당간당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마왕 하나가 주는 경험치와 보상은 상상 그 이상이었고, 그걸 해낸다면 적어도 현시우의 목적 하나는 달성하는 것이다.
‘괜찮아. 여기서 또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아직 내 계획이 완전히 일그러진 건 아니야.’
현하빈의 등장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건 그의 동생이라면 그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내 일이나 생각하자.’
복잡한 표정으로 현하빈을 보던 현시우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 * *
‘……여기서 뭐 하냐?’
‘그러는 누나는?’
‘내가 먼저 물었다. 저기 저 마신은 하빈이지?’
한편, 현하빈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채지석.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채지세가 지석에세 슬쩍 접근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이 상황을 굉장히 흥미로워합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저기 저 마신이 현하빈 맞냐며, 어떻게 50층에 왔는지 그 사실을 굉장히 궁금해합니다!]
띠링띠링.
쉴 새 없이 뜨는 성좌 알림 메시지까지.
‘아. 둘 다 갑자기 이렇기야?’
채지석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한쪽엔 누나. 한쪽엔 성좌.
둘이서 붙잡고 추궁하는 상황.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삐이이!
어깨에 매달린 리베는 물론, 현하빈이 남기고 간 다른 마족들까지.
채지석은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오! 마신님의 심복이시죠! 제가 드린 선물을 마신님께 전해주세요!”
멍하니 서 있는 채지석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마족들.
다들 채지석을 마신의 심복이라 믿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말이라도 붙여 보려 안달이었다.
“이거, 이것부터 받아주시죠! 제가 마신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 저희 가문에서 가장 아끼던 보물입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내민 아이템. 태도를 보니 꽤나 소중하게 아꼈던 것인가 보다.
‘이런 걸 어떻게 받아?’
진짜 마신도 아닌데 상관없는 마족들의 소중한 물건까지 받기엔 마음에 걸렸다. 완전히 악한 존재라는 게 확실하면 모르겠지만, 이프시네를 보니 꼭 나쁜 마족만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어떻게 거절할까?’
하빈이었다면 어떻게 했으려나.
아이템을 확인하고 잠깐 인상을 썼던 채지석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피식 웃었다. 그가 아이템을 마족에게 돌려주었다.
“그분, 김영란법 준수해서 이런 거 안 받습니다.”
“예? 그게 뭐죠?”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이런 거 없어도 마음 다 아실 테니 돌아가 주시고. 다음!”
“오오, 마신님의 심복님!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면…….”
“이쪽은 일단 번호표 줄 테니 줄부터 서고!”
-삐이이!
리베가 번호표 삼아 마족에게 그을린 냅킨을 하나 팔랑팔랑 건네주었다. 마족은 경건한 얼굴로 냅킨을 받아들고 쫄래쫄래 뒤로 가서 섰다.
돌려보내도 끝이 없는 마족들의 행렬.
‘아, 현하빈! 날 이렇게 남겨두고 가면 어쩌냐고!’
채지석이 푹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준휘 비서님이 일 떠맡을 때마다 욕을 그렇게 해대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빨리 대답 안 하고 뭐 하냐고 추궁합니다!]
아참. 이쪽도 있었지.
채지석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재빠르게 대답했다.
‘저 채지석 맞습니다! 그리고 저기 저 마신은 현하빈 맞고요! 어떻게 50층까지 올 수 있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현하빈 스킬 쓰니까 휙 도착했어요. 바쁘니까 대화는 나중에 해주시고……!’
줄줄 속사포처럼 랩 하듯 읊는 상황설명.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바쁘니까 사람이 인색해졌다고, 자신은 애를 이렇게 키운 적이 없다며 눈물짓습니다!]
“…….”
너무하네. 지금 이 모습을 보시죠. 제가 침착하게 대답을 할 상황입니까!
채지석이 성좌 메시지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데, 지세가 끼어들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난 수단 말고, 이유가 궁금해. 혹시 솔라리스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50층까지 지석과 하빈이 따라온 이유.
그 질문을 받은 지석이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봤으니까.’
‘뭘?’
‘누나 유서.’
‘…….’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던 듯 지세의 표정이 굳었다. 이내 그녀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거 보고 둘이서 달려온 거야? 정말 감동이잖아! 이 귀여운 것들!’
당장 포옹이라도 할 기세로 다가오는 채지세를, 지석이 주춤 피했다.
‘아, 좀 떨어져 봐! 지금 보는 눈 많거든? 다른 마족들이 오해해!’
‘내가 동생들 하난 잘 뒀다니까!’
‘뭐래! 애초에 그런 심각한 상황이면 가지 말았어야지! 왜 유서까지 남기고 가서 사람을 걱정시켜?’
‘너라고 해도 갔을 거잖아.’
‘내가 누난 줄 알아? 난 내가 죽을 것 같은 상황이면 절대 안 갈 거거든!’
‘그렇게 말해놓고 본인도 그동안 수도 없이 목숨 걸었으면서.’
‘그거랑 이건 다르지!’
성좌를 통해 무언으로 전달하는 그들의 대화. 끝도 나지 않는 남매의 말싸움이 무르익을 때쯤이었다.
“-상관이 있지! 내가 당신을 인정 못 하니까, 당신 말 따윈 안 들을 거라고!”
연회장 한쪽, 어두운 기둥 뒤편에서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웅성웅성.
뒤이어 이어지는 두려움 섞인 웅성거림.
“……?”
지석과 지세 남매는 그쪽으로 바로 고개를 돌렸다.
* * *
“야, 네가 울렸냐?”
“마, 마신님. 그게…….”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있는 이프시네.
반면 색욕의 마왕 헤르밋은 방해받은 것에 상당히 기분이 나빴는지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 이게 누구야. 그 대단하신 마신님이시잖아?”
그가 하빈을 돌아보며 비웃는 투로 대답했다. 헤르밋은 건들건들 하빈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천 년 만에 나타났다고 해서 긴장했는데 실제로 뵈니까 별 볼 일 없으시잖아? 선대 마왕한테는 그렇게나 대단하다고 전해 들었는데.”
그가 현하빈의 키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이 꼴은 또 뭘까?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분이라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조그만 여자애 꼴을 하시다니. 고약한 취미신가? 아니면.”
가까이 다가오자 쌉싸름한 술의 향이 훅 끼쳐왔다. 그는 살짝 취한 듯 건들거리며 얄밉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날카로운 말투로 한마디를 더 박았다.
“아니면, 마신이 아닌데 사칭하고 있는 거 아냐? 난 이 별 볼 일 없는 꼬마가 마신님이라는 것에 인정 못 하겠는데?”
“…….”
그 말을 듣던 하빈의 반응은-.
‘흠? 이 자식. 생각보다 예리한데?’
여기 있는 전부가 현하빈이 마신일 거라는 것에 큰 의심을 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처음으로 의심의 말을 던진 인물.
그냥 도발하거나 찍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정답에 근접했다. 하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받아쳤다.
“어쩌라고. 네가 인정하든 말든. 그게 뭔 상관?”
“상관이 있지. 내가 당신을 인정 못 하니까, 당신 말 따윈 안 들을 거라고!”
“그래?”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팽팽한 대치.
그 모습을 보며 속이 터지는 인물은 따로 있었다.
‘미, 미친놈!’
하빈이 갑자기 대화 중에 어딘가로 달려가길래, 궁금해서 따라온 크릭샤. 그는 헤르밋의 태도를 보며 기함했다
‘미친 자식! 이분이 누군 줄 알고! 그러다 세상에서 소멸당하고 싶냐!’
하빈의 실력을 아는 크릭샤만 식겁해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신인지 뭔지와 별개로 저 여자, 나를 압도적인 격차로 이긴 실력이었어! 상대조차 되지 않았단 말이다! 네깟 게 뭐라고 감히 이분한테 덤비고 있냐!’
일곱 마왕들의 실력은 서로 비슷하다. 그래서 이토록 성격이 더러운데도 불구하고 아슬아슬 균형이 맞추어져 있으니까.
‘뭐, 물론 내가 다른 놈들보다 조금 더 세지만!’
크릭샤가 자화자찬을 하며 머리를 굴렸다.
어쨌든 본인이 가장 강력한데도 불구하고 졌다. 그럼 다른 마왕들은 저 마신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저 멍청한 녀석! 자살을 하려면 곱게 할 것이지! 잘못해서 나한테까지 불똥 튀면 어쩌려고!’
그러니 헤르밋의 객기는 크릭샤가 보기에 자살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 자식 저러다 죽겠는데?’
이걸 말려, 말아?
“…….”
아니, 가만…… 생각해 보자.
핑핑 돌아가던 크릭샤의 머릿속이 딱 멈췄다.
‘이건 기회일 수도?’
평소에 거슬리던 색욕의 마왕을 이참에 마신의 손을 빌려 처리해 버리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예전부터 다른 마왕들을 다 죽여 버리고 마왕의 실세가 되고 싶었던 크릭샤다.
‘좋아. 좋은 생각이야! 저대로 저 녀석이 죽게 냅두자고!’
마신님! 믿습니다! 저 녀석을 세상에서 없애 주세요!
결단을 내린 그가 음흉한 얼굴로 주춤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쿠구궁.
“……!”
갑자기 건물이 흔들렸다.
불길한 검은 기운이 그들 사이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