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원래 타지에서 아는 사람 보면 괜히 반갑고 기쁜 거다. (2)
“……마신님을 뵙습니다.”
크릭샤는 별 수 없다는 듯 인사를 했다.
방금까지 이곳의 마왕들과 마신을 죽이고 본인이 마신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며 오만하게 중얼거렸던 그지만, 대놓고 마신과 척을 질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두고 봐, 언젠가 내가 마신보다 더 위대해질 테니까!’
겉과 속이 다른 크릭샤. 그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하빈이 물었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고? 우리 본 지 한 달쯤 됐나?”
“예?”
크릭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마신을 한 달 전에 만났다고?
‘그런 적 없는데?’
크릭샤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난 한 달 전에도 26층에 있었단 말이다. 그때 어떻게 마신을 만나?’
유유자적 26층 집무실에만 짱박혀 있던 크릭샤다. 그가 곁에 있는 머리 셋 달린 개를 발로 건드렸다.
“넌 기억하냐?”
-크르륵?
개의 머리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가 셋인 만큼 갸우뚱도 세 개.
역시 이 녀석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빈이 실망이라는 투로 물었다.
“뭐야, 진짜 몰라? 우리 그때 약속도 했잖아.”
“죄송하지만 무슨 약조 말씀이신지…….”
끝까지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크릭샤. 그 모습을 본 하빈이 힌트를 더 던져주었다.
“데이터 준다며.”
“데이터……?!”
후두둑.
크릭샤가 흠칫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단어. 저번 26층의 끔찍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말.
크릭샤는 고장 난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뭔가 이상했다. 마신의 목소리가 무척 익숙했다. 살랑거리는 긴 생머리도, 심드렁한 말투도.
26층에서 만났던 그 인간을 연상케 했다.
‘설마!’
아니야. 설마, 제발, 진짜 아니겠지?
크릭샤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삐걱삐걱 저었다. 그러나 하빈은 그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롱 타임 노 씨.”
인사와 동시에, 크릭샤에게만 보이게 가면을 슬쩍 밀어내리는 하빈.
“히익! 미친 인간!”
그 얼굴을 본 크릭샤는 경기를 일으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응? 뭐라고?”
“미, 미인이시라고 했습니다.”
미인.
‘미친 인간’의 줄임말. 그래도 어쨌든 변명으로 적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크릭샤가 황급히 얼버무렸다.
“하, 하하.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무척 반갑습죠! 이 몸은, 당연히 마신님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전까지와는 달리, 오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 당장이라도 납작 엎드릴 듯 비굴한 표정까지.
‘이 인간의 정체가 마신이었나?’
크릭샤는 그 와중에도 머리를 굴렸다. 현하빈이 마신이라면, 그 모든 굉장한 힘이 설명이 된다.
크릭샤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그, 그런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제가 그 데이터라는 것을 구하지를 못해서…….”
다음번에는 데이터라는 것도 꼭 구비해놓겠다며 호언장담했던 크릭샤.
하지만 그것은 다시 볼 일 없다고 생각해서 막 던진 말이었다. 크릭샤는 데이터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데이터가 이 마신한테 아주 중요한 의미였던 것 같은데.’
무척 걱정이 된 크릭샤는 제 발을 저렸다.
“대, 대신 다른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 주십죠.”
“응? 그래? 역시 크릭샤는 꽤 친절하구나?”
‘친절은 개뿔이 친절!’
살면서 친절하다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크릭샤. 그는 걱정이 되었다. 저번에도 현하빈은 크릭샤에게 ‘너 보기보다 착하구나?’ 따위의 말을 하며 다음에 또 보자고 했는데.
‘앞으로도 계속 친절하다며 찾아오면 어떡하냐고!’
크릭샤가 그러는 사이, 하빈은 그들의 곁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에게도 인사를 했다.
“아, 저번에 봤던 강아지도 안녕!”
-끼잉, 끼잉…….
저번에 칼등으로 얻어맞은 게 기억났는지 재빨리 꼬리를 말아버리는 개. 하빈이 반갑다며 툭툭 머리를 쓰다듬자, 겁을 먹은 듯 바들바들 떨었다.
“오, 저번에는 잘 몰랐는데 이런 장소에서 보니까 얘도 꽤 귀엽다?”
-끼, 끼잉.
슬금슬금 눈을 피하는 머리 셋 달린 개. 오른쪽 머리는 오른쪽으로 피하고, 왼쪽 머리는 왼쪽으로 피하고.
가운데 머리는 피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 쓰다듬을 받으며 떨고 있었다.
‘쯧, 마왕군의 정예 마수가 저런 겁먹은 개 꼴이라니!’
크릭샤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지만, 정작 본인도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착실하게 허리를 굽혔다.
“헤헤, 연회는 마음에 드십니까?”
“다들 우르르 몰려오는 바람에 배고파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
“뭐요? 어떻게 그런 일이!”
크릭샤는 마치 제 일인 듯 화를 내며 아까 불렀던 마족에게 손짓했다.
“너! 지금 당장 음료랑 같이 먹을 것 좀 가져와라! 빨리!”
“…….”
이번에도 그 대상은, 마족으로 위장한 강태서.
강태서가 까닥 고개를 숙이자 크릭샤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했다.
“저 녀석은 감히 마신님 앞에서 표정이 왜 저래? 확 그냥 없애버릴…….”
“뭘 없애? 그런 걸로 애 함부로 없애지 마.”
하빈은 인상을 찡그렸다. 마왕들이 다 이 모양이어서 그동안 다른 마족들이 말 한마디에도 겁을 먹고 숨넘어가는 반응을 보였던 모양이다.
“살살해. 살살!”
“넵! 물론입니다. 저 이래 봬도 아랫것들한테 관대한 마왕입죠. 그냥 해본 말입니다. 헤헤.”
사람 좋은 얼굴로 재빨리 표정을 바꾼 크릭샤가 다시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 * *
한편, 그 사이 마족들의 연회장에서는 뜻밖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연회장 구석 기둥과 커튼으로 가려진 어두운 곳. 그곳에 두 남녀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하, 지금 누구 말에 토를 달아?”
“그게……!”
“마신님이 누굴 데려왔나 했더니, 이렇게 얼굴 반반하고 괜찮은 몽마였을 줄이야. 보는 눈이 있으시군그래. 딱 내 비밀 별장에 장식품으로 진열하기 좋은 외모인걸?”
남자 쪽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여자 쪽에 더 가까이 붙었다. 그는 소년처럼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탐욕으로 반짝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놓지 않으시면 저도 가만 안 있어요!”
“어쩔 건데? 어디 한 번 도움이라도 청해보려고? 마신님께?”
그의 정체는 마왕 ‘헤르밋’.
“……색욕의 마왕께서 제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는데.”
일곱 마왕 중 색욕을 담당하는 마왕. 평소에도 행실이 안 좋기로 유명해서 마족들은 그를 슬슬 피해 다니고는 했다. 헤르밋이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워낙 화려한 데뷔잖아. 무려 오천 년 만에 허무의 마왕이 데려온 아이라니, 어떤 녀석인지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나.”
“…….”
여자 쪽은 이프시네였다.
아침부터 공들여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조심스레 고른 머리 장식이 한순간에 흐트러졌다. 몸싸움 끝에 떨어진 드레스의 흑진주 장식들이 바닥으로 또르르 굴러간다.
“저는 놓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프시네가 형형한 눈빛으로 헤르밋을 노려보았다. 잔뜩 겁을 먹어 낯빛은 창백했지만, 기세만큼은 살벌했다.
헤르밋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이게 미쳤나? 제 분수를 모르고! 지금 나와 말이라도 섞어 보려 줄 선 마족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무리 소리 질러도 소용없어. 감히 마왕의 힘을 네깟 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
“마신님도 한낱 미천한 몽마인 네 편을 들지는 않을걸?”
“그건!”
한껏 소리치던 이프시네의 말문이 막혔다. 그걸 확인한 헤르밋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마신님? 그분은 워-낙 대단한 분이셔서 아랫것들한테는 관심 없어. 내가 아까도 봤는데 다른 마족들의 부탁에 ‘기억 안 나서 잘 모르겠다’며 귀찮은 표정 짓고 있더라.”
‘기억이 안 나서, 미안.’
‘1만 년 전의 일을 기억할 거라 생각하나?’
그런 말로 둘러대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렸던 현하빈의 모습.
그것을 떠올린 헤르밋은 비웃음이 담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너를 아낀다고 말은 했지만, 과연 진짜 아끼는 게 맞을까? 귀찮아서 둘러댄 건 아닐까?”
“……그건.”
“그분은 원래 그 누구에게도 정을 안 줘. 정을 줬으면 애초에 마계를 이 꼴로 방치하고 사라지진 않았겠지.”
헤르밋이 이프시네의 분홍빛 머리채를 잡았다.
“게다가, 더 중요한 사실을 알려줄까?”
“……!”
갑자기 잡힌 머리채에 깜짝 놀라 바동거리는 이프시네를 무시하며, 헤르밋은 그녀의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
“애초에 너 같은 건 사라져 봤자 아무도 몰라. 마신님도 어쩌다 마족 하나가 사라졌구나, 하고 곧 잊어버리실 거야.”
“…….”
이프시네가 쓸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저 말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럴지도요.”
이프시네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신님은, 보잘것없는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와주신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운 분이셨다.
제대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선뜻 마왕성까지 함께해 주시고. 이 자리에서 아끼는 아이라고 공표까지 해주시고.
그 두 가지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참석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무도회를 참석했다. 그리고 이프시네의 일들에 함께해줄 마족들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프시네가 헤르밋의 흥미를 끌지만 않았어도 순조롭게 계획이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역전극처럼 꿈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신님을 만난 건 그저 수많은 행운의 행운이 겹쳐 나타난 찰나의 기적일 뿐.
이 정도로도 차고 넘치게 과분했다.
그 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
“……마왕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여기까지인가 보다.’
이프시네가 못내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부모님을 잃고 어떻게든 영지를 지켜내던 것도, 무정한 친척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도.
여기까지밖에 못 올 운명이었나 보다.
이프시네는 고개를 떨구었다.
‘마신님. 그렇게 도와주셨는데, 저는 보답도 제대로 못 해드렸네요.’
이프시네는 자신이 소중한 것을 지켜내지 못할 만큼 약하다는 것을 슬퍼했다. 그리고 마신에게 도움도 못 되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착잡해졌다.
하지만 그 순간.
“아니.”
그들 사이로 날 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해? 나 이프시네 편인데?”
“……?”
이프시네는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목소리었다. 어제부터 계속 그녀에게 이래라저래라 툴툴거리던. 차갑지만 다정한 목소리.
저벅저벅.
뒤이어 들리는 발소리에 이프시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 마신님?”
다가오는 하빈을 보며 이프시네가 입을 틀어막았다.
어느새 하빈을 따라온 몇몇 마족들이 그들을 둘러보고 웅성대고 있었다.
“뭐야? 저게 무슨 상황이야?”
“어! 저 여자는 아까 마신님이 아끼신다던 아이!”
“어디 가셨나 했는데 헤르밋 님께서 또 못된 수작을 부리고 있었나 보군!”
“쉿, 말조심해!”
“…….”
하빈은 이프시네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가까이 다가온 하빈이 헤르밋을 돌아보며 살벌하게 물었다.
“야, 네가 울렸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