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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 (1/268)

001. 세상 사람들 다 시스템 있는데, 나만 없어. 나만 상태창 없어!

“자, 오늘 일거리는 이게 마지막이군요. 이제 퇴근합시다!”

“수고했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게이트 입구. 몬스터 사체를 운반하던 짐꾼 무리들이 하나둘 가쁜 숨을 내쉬었다.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그들 중 한 명이 흘깃 한쪽을 눈짓했다.

무리 중에서도 유난히 앳된 얼굴을 한 하빈에게.

“아이구,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아무리 젊어서 체력이 넘쳐도 그렇지. 아직 어려 보이는데 왜 이런 험한 일만 도맡아 한대?”

“돈 필요해서요.”

“딸이 이런 일 하는데 부모님은 뭐라 말 안 하셔?”

“…….”

툭.

마지막으로 운반한 몬스터 사체를 옆에 던져놓으며 하빈이 씩 웃었다. 이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부모님은 게이트 사건으로 모두 돌아가셨어요.’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하빈을 딱하다는 눈빛으로 보았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불쌍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 사양이었다.

“그냥 제 선택이에요.”

“하이구, 참.”

하빈은 방금 그들이 사체를 운반해 나왔던 게이트를 다시 돌아보았다.

게이트 사태.

5년 전 갑자기 수많은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던 사건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 소위 ‘각성자’로 불리는 굉장한 능력자들이 나타나 맞섰고…….

‘하지만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중요한 건 빠른 퇴근과 알맞은 월급일 뿐이다!

하빈은 이어지려는 생각을 멈추고 오늘의 일당을 빠르게 챙겼다.

‘각성자’ 시스템이 있으면 뭐 하나.

선택되거나 타고난 사람만이 각성자가 될 수 있었다.

그들만이 승승장구하는 ‘헌터’로 활약했다.

각성을 못 한 하빈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게이트의 부산물을 옮기는 짐꾼 일을 하거나, 포션 제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을 뿐.

참고로 하빈은 그 모든 아르바이트를 다 하고 있었다.

아직은 돈이 많이 필요했으니까.

“저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그래. 또 일 있으면 부를게.”

“아 그리고 혹시 제가 말씀드린 사람 혹시라도 발견하면…….”

“에궁, 쯧쯔. 네가 찾는다는 오빠 말이지?”

“네.”

하빈이 돈을 모으는 이유는 간단했다.

엄마, 아빠, 오빠까지. 5년 전 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사라졌다.

부모님은 사망, 오빠는 실종. 그래도 실종자는 운 좋게 살아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만 듣고 일단 찾는 중이었다.

사건 당시, 겨우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하빈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무작정 일을 하러 뛰어들어야 했다.

생계가 해결되고 남은 돈으로는 오빠를 찾는 데에 모두 투자했다.

‘현시우라고, 이렇게 생긴 사람인데요. 혹시 게이트든 어디든 보시는 일이 있으면 꼭 좀 알려주세요.’

‘미안한데 난 바빠. 뭐, 돈이라도 주면 모를까.’

휴. 하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드릴게요. 얼마죠?’

헌터들에게 의뢰하는 비용은 가뜩이나 많이 들었다.

지금껏 모은 돈의 대부분을 쏟아부었지만 아직까지 아무 소득이 없다.

“그런데 하빈이 너, 아까 뜬 메시지는 못 받은 거야?”

“아, 바빠서 대충 넘겼나 보네요. 중요한 일이었나요?”

막 작업장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그녀를 붙잡았다. 하빈이 찔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걸 묻는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시스템의 메시지.

가끔 게이트 내에서 경고 알림이 뜨곤 했다. 기본적인 경고 알림은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도 볼 수 있는 영역이었다.

<지금부터 지구-#10420의 게임화가 진행됩니다>

<지금부터 지구-#10420의 모든 거주민은 강제로 플레이어의 의무를 집니다.>

게이트 사태 때 맨 처음 전 인류에게 발송되었던 이 메시지를 필두로, 모두에게 제공되는 ‘시스템’의 알림들.

수십, 수백 대의 레벨을 돌파하며 인간을 초월한 각성자와는 달리, 일반인-비각성자들은 레벨이 없다.

시스템상 ‘플레이어’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레벨업이나 직업, 스킬, 퀘스트 기능 일체가 모두 제공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본적인 던전 알림이나 게이트 발생 알림, 경고 알림 등등 자질구레한 창들은 비각성자에게도 제공되고 있었다.

“어…… 그냥 곧 게이트 닫히니까 나가는 게 좋겠다는 알람이었는데 넌 못 봤나 해서”

못 봤다.

그리고 그 점만큼은, 하빈이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었다.

하빈에겐 기본적인 상태창, 시스템 창, 알림 등등이 모두 보이지 않았다.

게이트 사태 이전처럼,

평범했던 시절의 사람들처럼.

“……지금 보니 있네요.”

이럴 때마다 하빈이 하는 행동은 ‘보이는 척’하는 것이다.

하빈은 일부러 시스템 창을 보는 척, 허공에 헛손질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괜히 자신의 특성을 알렸다간 별일 아닌 일로 연구 대상이 되거나 이상한 취급받을 게 빤했으니. 가급적 비밀로 하며 살아왔다.

‘알려져서 좋을 것 하나 없는데, 뭐.’

각성 능력도 없는데 시스템 창까지 못 보는 사람이라니! 게이트 관련 알바 구하기에도 무척 불리한 조건이다.

하빈은 그럼그럼,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계가 달린 문제는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 * *

퇴근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누가 뭐래도 집이 최고다.

하빈은 현관문을 열기 전부터 벌써 그런 생각을 했다.

이십 년 넘게 봐온 똑같은 현관문.

열기도 전에 느껴지는 그리운 냄새.

금방이라도 문을 열면 예전처럼 가족들이 아무렇지 않게 반겨줄 것 같다.

‘우리 딸, 왜 이제 들어와? 밥은 먹었어?’

‘학교에서 별일은 없었고?’

‘현하빈, 참고로 냉장고에 남은 피자는 내가 다 먹었음. 아, 그니까 누가 남기래?’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 집이었다.

진작 집을 팔아 작은 원룸으로 이사를 갔다면, 하빈이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일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여기 딸린 대출만 생각해도 허리가 휘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놓지 않는 이유는…….

그저 혹시나 사라진 가족 중 누군가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희망.

그게 아니라도 가족들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이 집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 미련한 짓을 그만두는 날이 올까.

‘진짜 올해만 지나가면 그냥 다 팔아 버릴까 보다.’

5년이면 정말 많이 참은 거지.

하빈은 질렸다는 얼굴로 찰칵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 현하빈! 이제 왔네. 참고로 기다리다 배고파서 냉장고에 남은 피자는 내가 다 먹었음.”

“뭐……야?”

그날도 평범한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던 지친 퇴근길에.

거짓말처럼.

하빈은 소파에 떡하니 앉아 있는 오빠를 마주쳤다.

* * *

기세 좋게 현관으로 들어서던 하빈의 발걸음이 그대로 우뚝 멎었다.

현관문 앞에서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

소파에 벌러덩 누워서 리모콘을 돌리는 익숙한 자세,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말투.

“……현시우?”

하빈과 꼭 닮은 얼굴의-물론 하빈은 이 말을 들으면 질색했다-오빠가, 방금까지만 해도 이리저리 사람들을 붙잡고 찾아달라 부탁했던 그 사람이!

‘왜 여기에……?’

멍하니 있던 하빈은 곧 정신을 차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멱살을 붙들었다.

“어, 어떻게 네가!”

이거, 진짜 현시우 맞아? 당황해서 던진 질문에 현시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오, 역시 온 보람이 있어. 격하게 반겨주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안 나왔는데? 여기 가만히 있었는데.”

“……헛소릴 하는 거 보니 진짜 현시우가 맞는데.”

하빈이 중얼거렸다.

이런 상상을 몇 번이고 했었지만 진짜로 눈앞에서 일어나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실종됐던 오빠가 돌아왔다.’

꿈이거나 환상은 아니었다. 비교도 안 되게 생생한 현실.

일단 살아 있으니 다행이고, 무사해 보이니 더 다행이지만.

‘대체 그동안 연락도 없이 어디서 뭐 하다가……!’

저렇게 태평하게 구는 것도 오랜만에 만나 어색한 걸 나름 돌려보려고 쓰는 수법일 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우는 금세 어색함을 떨쳐낸 듯 하빈을 향해 잔소리를 덧붙였다.

“근데 넌 그동안 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집이 이 모양이냐? 처음 왔다가 우리 집 아닌 줄 알고 도로 나갈 뻔.”

“……바빴으니까.”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이게 사람 사는 곳이냐? 치우느라 두 시간이나…….”

“……야, 잠깐.”

하빈은 끼어들 틈도 없이 구시렁거리던 시우를 탁 하고 멈춰 세웠다.

그녀가 뭔가를 발견한 듯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뭐야?”

시우가 걸치고 있는 옷.

하빈은 비로소 혈육에게 느껴지던 어렴풋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으응? 뭐가?”

일단 현시우는 그녀가 알던 ‘오빠’가 맞았다.

하지만 어딘가 다르다.

겉모습은 5년 전과 같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입은 옷도 완전히 다르다.

“…….”

비록 말단 짐꾼이지만 5년 내내 산전수전 다 겪으며 던전에서 굴렀던 하빈이다.

헌터들도 많이 만났다. 아이템을 사용할 권한이 없어도, 상태창을 못 봐도.

아니, 오히려 못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철저하게 공부하고 관찰했다.

핫한 아이템들의 종류, 헌터들의 특징, 고가의 장비.

이젠 대충 눈대중으로 어떤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비싼 건지 싸구려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게 다 그동안의 짬이라는 거지.’

그리고 지금, 현시우가 걸친 옷은.

‘최소 A급 이상.’

하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우의 옷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후드티와 청바지. 일부러 평상복 같은 걸 골라 입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하빈의 눈은 못 속였다.

‘SS급 제작계 헌터, 엘레메스의 스페셜 캐주얼 컬렉션!’

맞다. 확실했다. 이건 하빈이 며칠 전 인터넷으로 찾아봤던 아이템 중 하나였기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핏! 이 디테일!

살짝 숨겨진 블랙 라벨까지!

‘빼도 박도 못할 엘레메스의 신상이다!’

최상위급 헌터들이 평소에 ‘일코’랍시고 입는 옷들. 뛰어난 방어력은 물론 상태 이상과 독에 내성을 가진 스페셜 아이템.

하빈은 이게 가짜가 아닌 진품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이쯤부터 하빈의 말투에 서서히 분노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현시우. 너, 각성자였어?”

“……어?”

“각성자였냐고. 그동안 헌터로 활동 중이었어?”

그것도 이 정도 아이템을 사용하는 헌터라면 아무리 못해도 A급 이상이다.

죽일 듯한 기세로 노려보는 하빈의 얼굴에 시우가 당황한 듯 조금 물러섰다.

“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난 네가 실종된 줄 알았는데?”

“맞다. 그 실종 신고, 내가 진작에 취소시켰는데.”

“근데 왜 그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나고…….”

“…….”

“내가, 내가 진짜, 그동안 얼마나……!”

“마, 많이 걱정했어?”

시우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누가 보면 남매의 감동적인 가족 상봉 모습이었겠지만…….

“걱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감동은 개뿔. 분노에 찬 미소를 지은 하빈이 예고 없이 시우의 명치에 죽빵을 날렸다.

뻐억!

“컥!”

“내가 그동안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하빈이 그간의 한을 쏟아내듯 소리쳤다.

이걸 숨겼단 말이지?

내가 우리 집 빚 갚는 동안, 혼자 잘 먹고 잘살면서. 그동안 연락도 한 번 안 했단 말이지?

하빈은 그 모든 울분을 가감 없이 몰아치듯 내뱉었다.

“너 찾느라 들어간 돈이 얼마인 줄 알아? 살아 있으면 연락이라도 했어야 할 거 아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너 찾느라 난 학교도 자퇴하고, 우리 집 빚 갚고 생계 유지하느라 밤낮없이 일하고 있었는데!”

“우, 우리 집 빚 있었어? 몰랐…… 커헉!”

“그럼 대체 아는 게 뭐야? 내가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이라도 있었어?”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고! 그리고 진짜 몰랐어!”

“사정? 사정은 개뿔.”

“있어 봐. 자, 잠깐만!”

현시우가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정신없이 두드렸다. 그래,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빈이 방어적인 태도로 팔짱을 꼈다.

‘뭘 보여주려는 건진 모르지만, 어떤 개소릴 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을 테다.’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으니까. 이건 정말 두 눈에 흙이 들어와도 용서해줄 수 없는……!

그때, 하빈의 폰에 낯선 알람이 울렸다.

띠링!

[SPES페이 송금 ─ 현시우 님이 10,000,000,000원을 송금하셨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

“어, 일단 이 정도면 급한 건 해결이 될까?”

“…….”

정적.

뒤따라오는 시우의 말조차 듣지 못한 채, 하빈은 떨리는 손으로 숫자를 몇 번이나 다시 세었다.

‘이, 일, 십, 백천…… 억…….’

배, 백 억?

“…….”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짜 100억이었다. 그것도 현금으로.

타탁!

손이 빛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받기’를 누른 하빈은 삐걱삐걱 고개를 들었다.

견고했던 팔짱은 어느새 활짝 풀린 채였다.

“크, 크흠.”

“…….”

목에 사레라도 걸린 듯 헛기침을 하던 하빈이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눈동자는 이미 갈등으로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 흐흠, 그래, 하긴 사람이 살다 보면…… 그, 그럴 수도 있지.”

분노해서 쏘아붙일 때와는 판이한, 누그러진 말투.

“하, 하긴, 생각해 보니 건강하게 돌아온 게 어디야. 에휴, 그거면 됐지. 그렇지…….”

“……?”

“그동안 진짜…… 엄청난 사정이 있었나 보네! 우리 오빠, 고생 많았다, 정말!”

마침내 하빈이 시우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야말로 우디르가 울고 갈 급의 태세전환.

기겁해서 파드득 돋아난 닭살을 문지르는 시우의 반응을 무시하며, 하빈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빠르게 덧붙였다.

“아참, 이거 세금이나 다른 문제는 없고? 깨끗한 돈 맞지? 이미 받아버렸긴 했는데. 어쨌든. 응?”

“……깨끗한 돈이긴 한데, 세금 떼이면 추가 입금해줌. 근데…….”

“오, 좋지 그럼. 자, 오랜만에 귀가했으니 편하게 쉬시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 아까 화났던 거……?”

“응? 화는 무슨? 괜춘괜춘.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님!”

“…….”

“냉장고에 피자도 두 조각밖에 없었을 텐데. 배는 안 고프고? 더 시켜줄까?”

“…….”

그냥 처음부터 돈부터 쏴줄 걸 그랬나?

예상치 못한 격렬한 반응에 현시우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언제 까발려질지 모를 비밀이지만, 당장 이 정도로 넘길 수 있다면. 시우는 몇 번이고 더 송금할 마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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