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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일상(1권) (2/53)

1부. 일상

냉동실에 몇 개나 있는지 모를 아이스팩을 꺼내 볼에 댔다. 아직 세수도 하지 않아 거의 감겨 있던 눈이 찬 기운에 번쩍 뜨였다.

간만에 얼굴을 맞았더니 아직도 골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툭하면 술 처먹고서 물건 깨부수고 사람이나 쳐 패고 다니는 주제에 신고당하는 건 무서운지 얼굴은 잘 건드리지 않았는데 어제는 술에 쩔어 들어와서는 엄마가 없는 걸 보곤 제 화를 못 이기고 내 얼굴에 손을 댔다. 한 대 때리고 나서야 신고 생각이 났는지 씩씩거리다 거울을 깨부수며 나한테 온갖 욕을 퍼부은 뒤 방으로 사라졌다.

꼴랑 한 대였지만 유도 국대 출신인 아빠 새끼한테 맞는 한 대는 결코 한 대라고 할 수 없는 위력이라 앞으로 한 주는 밥 먹기 힘들 것이다.

어젯밤 미리 불려놓은 미역을 냄비에 넣으며 찬장에서 간장을 꺼냈다.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고 했던가. 인간말종이어도 꼴에 운동선수 출신이라고 아침밥은 곧 죽어도 갓 지은 밥에 뜨거운 국과 먹어야 한다는 아빠 새끼에게 나는 꽤 열심히 삼시 세끼를 챙겨주는 편이었다.

예뻐서 해주는 건 아니고 서하림을 위한 연습이라고 해두겠다. 곱게 자라 입맛이 까다로워 느끼한 거, 맵고 시고 짜고 달고 향이 강하거나 식감이 이상한 건 좋아하지 않는 서하림과 붙어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리가 늘었다. 서하림은 주로 정갈하고 깔끔한 한식을 먹었기 때문에 나도 어지간한 한식은 다 할 줄 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팔자에도 없던 제빵도 시작했다. 엄마는 덩치가 산만 한 아들내미가 손톱만 한 계량스푼을 쥐고 있는 걸 보고 안 어울린다고 타박했다가 만들어준 몇 가지 디저트를 먹더니 곰 같아서 귀엽다고 말을 바꿨다.

단어만 바꿨을 뿐 안 어울린다는 말이 아닌가 싶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만든 디저트들은 하루 24시간을 바쁘게 지내는 서하림에게 착실히 전달되었고 서하림이 그것들을 맛있다며 잘 먹었으니 내가 곰이면 어떻고 토끼면 어떻겠는가.

아빠 새끼는 고기가 들어간 진한 미역국을 좋아하지만 입안이 다 터진 게 짜증 나서 맑은 미역국을 하기로 했다. 서하림이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 서하림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며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사실 아빠한테 처맞는 건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다. 왜냐면 아빠가 술 처먹고 집에 온 날이면 꼭 서하림이 날 찾아와 줬으니까.

어제도 좆같았던 깨진 거울 치우기를 마치고 나니 서하림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맞은 걸 알든 모르든 이런 날엔 귀신같이 연락이 먼저 오거나 길거리에서 만나거나 했다.

[이번 A 문제집 진짜 어려움... 얼마나 풀었어?〉

A 문제집은 대형 입시 학원에서 시중에 나오는 모든 문제집 중에 오답률이 높은 극악의 문제들만 골라 편집한 것이었는데 시중에 판매되는 건 아니고 청담동인지 강남인지 어디 엄마들이 모여 공동 구매 형식으로 만든 거였다. 가격이 비싼 건 물론이고 나 같은 평범한 학생은 보통 그 존재도 모를 테지만 서하림 이모님은 늘 내 몫의 문제집까지 챙기곤 했다.

평범하고 가진 건 쥐뿔도 없는 내가 서하림과 어울려도 그 유난스런 이모님이 별다른 말이 없는 건 내가 서하림과 비슷한 성적을 유지해서였다. 비슷하다뿐인가. 서하림 성적의 페이스메이커 수준에 몸이 좋지 않은 자신을 대신해 밥이나 디저트까지 손수 해다 바치며 서하림을 챙겨주는 나를 이제는 좀 인정해 주는 눈치였다.

극악의 A 문제집을 받아든 날, 서하림은 누가 먼저 문제집을 다 푸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다. 물론 틀려먹기만 한 채로 다 풀면 끝인 게 아니라 누가 먼저 정답을 모두 알아내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꽤 자주 이런 내기를 했다. 지면 상대방이 정해준 벌칙을 꼭 이행해야 한다.

나는 서하림이 싫어하는 시고 쓰고 향이 강하고 식감이 이상한 것들을 먹는 걸 걸었고 가끔은 엄청 매운 음식 세 입 먹기, 아주 단 음식 다 먹기 또는 러닝머신 달리기 30분, 줄넘기 30분처럼 대부분 서하림의 건강을 생각한 것들을 벌칙으로 내세웠다.

서하림은 친구 하나 없고 주목받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아주 싫어하는 노래 부르기, 춤추기, 다른 반에 있는 자기 친구에게 대신 뭐 빌려오기 같은 것들을 걸었다.

내기에서 좀 더 많이 이기는 건 서하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서하림 부모님은 의사였고 중학생 때부터 전교 1등에서 비켜나 본 적이 없는, 인생의 유일한 흠이라곤 몸이 아파 특목고에 진학하지 않은 게 전부인 애였고 나는 그런 서하림의 옆에 붙어 있기 위해 코피 흘리며 죽어라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수학 문제 푸는 일인 애가 어렵다고 투정을 부리는 게 너무 귀여워서 나는 그만 하림이의 메시지를 읽자마자 발기하고 말았다. 입안에 가득 고이는 피를 뱉어낼 생각도, 터진 상처에 약을 바를 생각도 못 하고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 하얗고 핏줄 하나 올라오지 않은 고운 손으로, 손가락으로 반듯하게 샤프를 잡고 공책 한가득 문제를 풀다가 막히기 시작하면 입술도 한 번 깨물었다가 고개도 살짝 기우뚱거렸다가 그래도 안 풀리면 한숨도 쉬고 앞머리를 만졌다 뒷머리도 만졌다 하며 공책을 넘기고 다시 문제에 집중했겠지. 그러다가 또 막히고 막혀서 이번 벌칙인 ‘매운 라면 먹기’를 떠올리고는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혹시라도 매운 라면을 먹게 될까 봐 그 예쁜 얼굴이 살짝 구겨졌을 걸 생각하면 없는 것도 벌떡 설 지경이었다.

휴지에 한가득 정액을 싸질러놓고 나서 답장을 보냈다.

〈나 한 1/4? 진짜 어렵더라]

사분의 일을 푼 게 아니라 그만큼 남았지만 거짓말을 좀 섞었다. 최근 내 승률은 매우 좋지 않았고 거기다 저번 내기에서 진 나는 1학년 건물로 건너가 리코더로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를 연주하고 와야 했다. 무섭게 생긴 덩치 큰 선배가 쉬는 시간에 갑자기 들어와 리코더를 불어대는 것을 바라보던 1학년의 흔들리던 눈동자를 기억한다.

요 며칠 다른 모든 과목 공부를 미루고 오로지 A 문제집만 팔 정도로 이번 벌칙인 ‘등교하면서 교가 부르기’만은 피하고 싶었다.

[오 나도 그 정도〉

[자야지 내일 봐〉

어쩜 이렇게 순진하고 말도 예쁘게 하는지. 잠에 드는 순간까지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서도 나는 하림이의 문자를 보면서 실실 쪼갰다. 좆같은 아빠 새끼한테 아침밥을 만들어주는 내내 신이 났다. 밥도 아주 술술 들어갔다.

가방을 메고 깜빡 잊은 마지막 등교 준비를 위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빠 몫으로 남겨놓은 미역국에 침을 뱉은 뒤 국자로 휘휘 젓고 집을 나섰다. 평범하고 소심하고 겁 많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비참하게도 이 정도가 다였다.

멀끔했던 어제와는 다르게 얼굴에 손바닥만 한 거즈를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이 없다. 아파트 사람들은 원래 다른 집에 관심이 없고 그마저도 엘리베이터에서 날 마주치는 사람들은 잊을 만하면 얼굴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니는 나를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 학생이라고 잠시 생각할 것이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학교 옆에 나란히 붙어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선생님들은 내게 별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가 본다면 중학교고 고등학교고 좋은 학군에 위치한 유명한 사립학교라 잘 사는 애들이 많으니 나 같은 학생에겐 관심이 없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중학교 2학년 때였나, 맞고 쓰러져서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담임선생님이 찾아와 가정 폭력으로 신고하겠다며 진지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선생님에게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나중에 다 알아서 할 테니 모른 척해달라고. 증거도 열심히 모으고 있다고. 이미 나를 찾아와 준 하림이 덕분에 기분은 좋았고 머리가 아픈 건 다행히도 가벼운 뇌진탕 정도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 이후로 선생님들은 내가 멍을 달고 오든 밴드를 붙이고 오든 신경을 껐다. 오히려 내게 뭐라도 하고 싶은 낌새가 느껴지면 내가 괜찮다며 무시했다. 아프고 불행한 나를 신경 쓰는 건 단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너 볼…….”

나보다 먼저 와 앉아 있던 서하림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흐렸다. 나는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찢어지거나 피가 난 게 아니라 거즈까진 안 해도 되는데 부은 볼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서하림은 적나라하게 보이는 폭력의 흔적을 괴로워했다. 온실 속에서 태어나 예쁜 것만 보고 자랐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냥 좀 부은 게 다야.”

“얼음찜질은?”

가방에 넣어온 얼음팩을 거즈 위에 댔다.

“열심히 하는 중.”

날 걱정하고 동정하며 불쌍해하는 네가 좋아.

불안한 눈동자와 흔들리는 시선을 잠시 바라보다 앉았다. 서하림에게도 나중에 대학교 붙으면 알아서 다 할 거니까 우리 집 일은 내게 맡겨달라고 했다. 착한 서하림은 알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 뒤로 우리 집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단지 맞고 다니는 나를 물기 어른 눈동자로 바라볼 뿐이었다.

간단한 조례가 끝나고 곧이어 1교시가 시작됐다.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큰 나는 맨 뒷줄이었고 내 앞엔 서하림이 앉았다. 자리는 자율이지만 나는 늘 서하림의 바로 뒤나 대각선 방향의 뒷자리를 선호했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서하림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강도 높은 내용의 수업이 하루 종일 3년간 이어지는 터라 고액 과외를 하는 애들도 수업을 따라가는 게 좀 힘든 모양이지만 나는 꽤 여유로워 수업 시간 중 상당히 많은 시간을 서하림에게 할애하곤 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서하림 뒷목만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수업도 열심히 듣고 필기도 열심히 하고.

과외도 하나 받지 않는 내가 꼬박꼬박 서하림과 비슷한 성적이 나오는 걸 보고 신기해하던 애들이 도대체 어떻게 공부하냐고 묻곤 한다. 나는 연예인에게도 관심이 없고 게임도 하지 않고 각종 인터넷 방송도 보지 않아 남는 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그 남는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공부에 투자했고 나머지는 서하림 생각하거나, 생각하며 자위하거나.

애초에 취미 생활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운동은 공부를 위한 체력 관리의 일환이고 이따금 글을 쓰긴 하는데 취미라고 할 것까진 없고.

굳이 찾아보자면 요리? 하지만 쉬는 날이나 여가 시간에 요리를 하진 않는다. 레시피 좀 찾아보는 게 다고 만드는 건 연습한다고 아빠 새끼나 엄마한테 해줄 때나 하지 요리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기엔 너무 아까웠다. 특별히 시간을 내서 요리를 하는 건 서하림에게 해줄 때만. 운동도 하긴 하는데 공부를 위한 체력을 위해서지 다른 이유는 없다.

꿈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야 서하림 발끝을 겨우 따라갈 수 있는데 어떻게 놀고 뭔 취미 생활을 영위하겠는가.

그래도 덕분에 내겐 수업이 좀 널널했다. 평범한 나도 이런데,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인 서하림은 다 알아도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내가 자길 가지고 온갖 음탕한 상상을 하며 더러운 시선으로 제 뒷목을 핥아대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하얀 교복 셔츠 안에 티셔츠를 받쳐 입고 있으면서도 서하림은 셔츠 단추 하나 푸는 법이 없다. 더위를 많이 타는 데다가 답답한 걸 싫어해 날씨가 조금만 따뜻해져도 셔츠 단추 다 풀고 다니는 나와는 정반대로 조끼에 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넥타이를 한 탓에 셔츠 칼라가 흐트러지지 않고 흰 목을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휘저으면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매끈한 머리카락, 풍성한 머리숱과 동그란 머리통, 그 아래의 하얀 목덜미와 그런 목덜미를 깔끔하게 둘러싼 셔츠는 끔찍하게도 서하림의 목선과 잘 어울렸다.

셔츠 칼라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지는 곳에 진하게 키스 마크를 남기는 상상을 한다. 길쭉하고 하늘하늘한 몸을 뒤에서 안은 다음 목 바로 아래부터 잠겨 있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푸는 거다. 하림이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지만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다. 내 쪽으로 살짝 기댄 것도 같다.

셔츠를 세 개쯤 풀었다가 깜짝 놀랐다. 셔츠 안에 받쳐 입는 티셔츠가 없었다. 어쩐지, 안았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아서 그랬던 거다.

‘왜?’

순식간에 하림이의 분홍색 젖꼭지까지 떠올려 굳었더니 작은 목소리로 하림이가 물어왔다. 어서 풀어달라는 걸 이렇게 얘기하다니. 대놓고 풀어달라고 앙앙대는 것보다 훨씬 내 취향이었다.

‘좋아서.’

네 번째 단추를 풀 때부턴 일부러 손을 바짝 붙여 하림이의 속살이 닿게 했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살이 손끝에 닿자 너무 좋아 소름이 돋았다.

‘으음…….’

찬 몸에 뜨거운 손가락이 닿자 하림이에게서 작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하림이의 셔츠를 잡고 뜯어버렸다. 단추가 튕겨 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칼라 뒷목 부분을 잡고 죽 내리니 예쁜 날개뼈와 척추가 보였다.

‘잠깐!’

놀랐는지 하림이가 일어서려고 했지만 나는 매끈한 배를 꽉 안아 다시 하림이를 내 허벅지 위에 앉혔다. 괜히 한 번 일어난 바람에 다시 앉은 하림이에게 잔뜩 선 내 것이 느껴졌을 것이다. 엉덩이 사이로 느껴지는 이물감에 하림이는 앉아서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하림이가 너무 귀여워 나는 하림이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어깨 위로 내 웃음이 프스스 흩어졌다.

‘하지 마…….’

‘싫어.’

나는 계속 웃음을 흘리며 하림이의 하얀 목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하림이가 간지러워 몸을 뒤틀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하림이 역시 웃음소리가 한가득이었다. 한참 하림이의 목덜미에 키스를 하기도, 혀로 핥기도 하다가 반쯤 벗겨진 셔츠를 다시 올려주었다. 하림이가 뒤를 돌아 눈동자로 갑자기 뭐냐고 물었다.

‘앞에 봐. 할 거 있어.’

내 말에 순순히 앞을 바라본 하림이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뭘 기대하는 건지.

나는 셔츠를 제대로 입었을 때 칼라가 목의 어디까지를 가리는지 대보았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 입술을 대고 강하게 빨아올렸다. 순간 하림이가 팔딱거리는 게 느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쾌락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아파 우는 소리가 될 때까지, 빨갛기만 할 키스 마크가 검붉은 색이 될 때까지.

‘아파…….’

미안하다는 말 대신 하림이의 눈물을 핥아주었다. 착한 하림이는 내 사과를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분홍빛으로 물든 코끝이 귀엽다. 많이 아팠는지 자꾸만 흐르는 눈물이 사랑스럽다.

열심히 하던 필기를 마치고 선생님이 하는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하림이 너무 멋있고 좋았다. 까만 흑진주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선생님의 모든 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얼굴이겠지. 누군가 의도적으로 뒷목 칼라를 당겨보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을 위치에 남긴 키스 마크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나는 총알처럼 튀어나와 장애인 화장실로 뛰어갔다. 조금 발기한 성기가 편해질 수 있도록 교복 바지를 내리고 속옷도 벗었다.

뒷목 말고도 하얀 교복 셔츠로 가려진 모든 곳에 나는 키스 마크를 남겼다. 셔츠를 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흔적들을. 고고한 서하림 혼자서는 결코 타인에게 보여주지 못할 그런 흔적들을.

“…….”

손바닥에 사정하고 나자 문득 하림이에게 미안해졌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을 때 불편할 테니까. 그걸 생각 못 했다. 그럼 다음엔 살짝만 키스 마크를 남겨봐야겠다. 하림이가 잘 볼 수 있는 티셔츠 넥라운드 바로 아래쯤에. 티셔츠는 셔츠보단 덜 꽉 끼니까 그만큼 잘 보일 테지만 벌레 물린 자국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을 거다. 하림이에게 내 흔적을 남기는 게 중요하지 하림이에게 난감한 일이 생기는 건 나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재단이 좋아서인지 학교가 돈이 많아서인지 쓰는 사람이 없는 장애인 화장실은 오늘도 깨끗했다. 여기 말고도 복도 구석구석조차 먼지를 찾을 수가 없는 걸 보면 학교를 청소하는 사람은 꽤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나는 청소나 정리는 귀찮아서 잘 하지 않는데.

교실에 들어가기 전 혹시 몰라 양손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다섯 번은 넘게 손 세정제로 거품을 한가득 내 씻었지만 혹시 모르니까. 서하림이 내 손에서 정액 냄새가 난다고 날 싫어하게 되면 큰일이다. 다행히 청량한 레몬 냄새뿐이었다.

중간고사가 코앞이라 그런지 아직 쉬는 시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반 애들 대부분이 교실에 붙어 있다. 복도도 한적했다.

서하림은 친구들과 뭔 얘기 중이었다. 나는 딱히 서하림 친구들과 친하지도, 말을 하는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 다음 시간 책을 꺼냈다.

“왜?”

“아니야. 선생님 오겠다.”

“이따 마저 얘기해 줄게.”

서하림 친구들은 나를 굉장히 불편해한다. 같은 반이라 인사 정도는 나누지만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등장하면 꼭 말을 돌렸다. 대놓고 싫다고 하는 건 아닌데 시선이나 느낌이. 나는 지들을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데 걔들은 되게 날 신경 썼다.

이 학교는 바로 옆에 같은 이름을 가진 중학교가 있고 그 중학교 졸업생 대부분이 여기로 진학하기 때문에 큰일이 없다면 6년간 똑같은 얼굴들을 보며 학창 생활을 보낸다. 친한 친구 무리도 중학생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하림 친구들이 중학생 때도 날 불편해했다는 얘기다.

이해가 안 가진 않는다. 자기들에 비하면 한참 못 살지, 평범하지, 공부 좀 하는 거 말곤 잘난 것도 없는데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애가 서하림 근처에서 늘 얼쩡거리는 게 맘에 안 들 것이다. 차라리 자기들이랑도 친하게 지내면 모르는데 그것도 아니니까.

초등학교부터 따지면 이제 나와 얼굴 본 지 벌써 십 년이 다 돼가는데 새삼스럽게 다들 또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내가 등장하기 무섭게 멋쩍게 웃더니 몸을 돌렸다. 웃긴 새끼들이다 하여튼. 서하림은 어딜 가나 인기 있었고 지들도 서하림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자리도 죄다 서하림 앞, 옆을 차지한 주제에.

“아 존나…….”

짜증 난다. 아빠 새끼한테 얻어맞은 볼도 갑자기 시큰거리며 아파오는 것 같다.

“서하림.”

종이 치고 선생님이 들어와서 그런지 “왜” 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진 않는다. 서하림의 귀여운 뒤통수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이다가 나는 다시 서하림을 불렀다.

“하림아.”

애탄 내 목소리에 서하림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서하림의 얼굴을 말가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많이 아프면 보건실 갈래?”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조용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좋았다. 조심스럽게 내 뺨을 가리키는 우아한 손가락도.

“아니. 그 정돈 아니고.”

서하림이 뭔가 얘기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는데 선생님이 떠들지 말라며 한소리 했다. 서하림이 놀라 다급하게 앞으로 몸을 돌렸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곤 책에 들어갈 기세였다. 서하림 얼굴을 보고 나니 더 이상 볼이 아프지 않았지만 다 녹아 미지근해져 가는 아이스팩을 볼 위에 얹었다.

[오늘 점심에 너가 좋아하는 명태국 나온다]

공책을 찢어 적은 뒤 서하림에게 넘겼다. 쪽지를 열어 확인한 서하림이 바로 답장을 썼다.

[맑은 거면 좋겠는데]

서하림은 글씨체도 반듯하니 예뻤다. 악필인 나랑은 다르게.

[나도. 만약에 안 그런 거면 먹지마. 저녁으로 해줄게]

[ㄴㄴ됐어 차라리 쿠키 만들어줘 초코칩 많이 넣진 말고]

[ㅇㅇ 나도 그거 먹고 싶었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서하림은 쪽지를 두 번 접어 책상 끄트머리에 올려두었다. 어차피 버릴 거라 구겨 놓을 법도 한데 저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마저 도련님 같고 왕자님 같았다.

지가 돈 내는 것도 아니면서 오븐 쓰면 전기세 많이 나간다고 아빠가 존나 뭐라고 하기 때문에(그래놓고 막상 만든 건 잘 처먹는다) 아빠가 집에 늦게 들어오길 바라며 몇 개를 만들어야 할지, 무슨 모양으로 만들지를 고민했다. 집에 밀가루가 얼마나 남아 있더라? 저번에 쿠키를 해먹어서 얼마 안 남았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학교 끝나고 마트를 가보는 게 좋을 듯했다.

“상장.”

단상 위로 보이는 교장 선생님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발판 위에 서 있음에도 나보다 작았다.

“고등부 차상. 세문고등학교 2학년 김동규.”

교장 선생님은 내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그 소름 돋는 윙크를 반사적으로 피했다. 짙은 갈색의 단상에는 이제는 하도 봐서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우리 학교 교표가 붙어 있었다.

작년에 S대 백일장 장원을 받았다가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의 일장연설을 들었다. 과학 중점 학교인 우리 학교에서 어떻게 이렇게 감성적인 학생이 나왔냐는 게 주요 내용이었고 알고 싶진 않았지만 교장 선생님이 대학생 때 시인이 되고 싶어 신춘문예에 몇 번 도전했단 것까지 알게 되었다. 내가 전국을 돌며 백일장에서 상을 타 올 때마다 교장 선생님은 감동이라느니 자랑스럽다느니 하는 말을 꼭 했다.

“위 학생은 제15회 서울시 공공도서관 이용수기공모전에서 위와 같이 입상하였기에 이 상장과 부상을 수여합니다. 서울시장 대독.”

교장 선생님이 건네는 상장과 상패를 잡아 접어 왼쪽 팔과 옆구리 사이에 껴놓고 고개를 꾸벅했다. 3반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이 짧게 박수를 쳐주었다. 3반 선생님이 바로 다음 상장을 펼쳐 들었다.

“상장. 운문 부분 대상. 세문고등학교 2학년 김동규. 위 학생은…….”

교실마다 빔프로젝터는 다 켜져 있을 테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시상 장면이 나가고 있겠지만 집중해서 보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서하림을 빼면 내가 상 받는 걸 축하해 줄 만큼 친한 애는 하나도 없고 선생님들도 처음에야 몇 번 이런 재주가 있나며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워낙 자주 상을 받다 보니 이젠 별말도 없었다.

“……통일부장관 대독.”

상장과 상금을 받아들고 교장 선생님과 악수를 했다. 내가 상 받는 것에 감흥이 없어진 다른 선생님들처럼 이분도 그래 주시면 좋겠는데 그런 내 맘을 모르는 교장 선생님은 다른 한 손으로 내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카메라 화면 밖으로 나와 시청각실을 빠져나왔다.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상금 봉투를 열어 70만 원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작년에 뭔 백일장 갔다가 예고 애들이 상금을 제대로 확인 안 했다가 좆 된 경우가 있다고 한 걸 지나가며 들은 이후로는 매번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학교 밖 대회에서 수상을 하면 시상식에서 받은 상장과 부상을 그대로 학교로 가져와 제출해야 한다. 종종 알아서 학교로 보내주는 경우도 있는데 수상자인 내게 오기까지 과정이 더 길어지기 때문에 중간에 상금이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 있어서 나는 되도록 내가 직접 학교로 제출했다.

장관상의 상금을 교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금액이 금액인지라 왼쪽 가슴이 살짝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근데 조금 아쉽다. 통일부 거는 3등인 차하까진 상금이 있지만 서울시는 1등인 장원만 상금이 있어서 서울시 거를 더 열심히 썼는데 고작 상패에서 그치다니. 내 예상은 둘 다 1등을 받아서 깔끔하게 100만 원을 만드는 것이었으니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지만 나는 백일장을 다니느라 꽤 열심히 전국을 싸돌아다녔다. 정확히는 백일장 상금을 목표로. 상만 잘 받는다면 용돈 벌이도 되고 저축도 할 수 있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충분했다.

시작은 초등학교 5학년. 저학년도 아니고 좀 있으면 졸업인 학년인데도 그때의 담임선생님은 일기를 매일 쓰게 했다. 내용은 웬만하면 안 볼 테니까 한 줄만 써도 좋으니 매일 매일 써보라고. 서하림이나 몇몇 애는 성실하게 반에서 한쪽 정도 쓰는 정도였고 대부분이 길어야 세 줄 남짓 쓰는 게 다였지만 나는 최소 한쪽 이상을 꽉꽉 채워 내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열두 살의 나는 아빠의 출소일을 세면서 엄마와 불안에 떠는 동시에 2학년 때 처음 만난 서하림과 2년 만에 같은 반이 되면서 약간 폭주 상태였다. 서하림에게 향하는 온갖 감정은 물론이고 아빠에 대한 두려움까지 매순간 느껴지는 모든 것을 기억해 집에 오기 무섭게 일기장에 빼곡히 적었다. 서하림이 말이라도 걸어 준 날이면 서너 장도 거뜬했고 아빠가 나오는 악몽을 꾼 날이면 새벽에 일어나서도 연필을 들었다.

서하림이 방과 후에 학원과 영재원에 다닌다는 걸 알고 나서는 영재원이라도 함께 다니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고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일기장에 스트레스를 풀어댔다.

어차피 선생님은 읽지 않는다고 해서 부담감이 적었다. 아니, 사실 읽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선생님은 초반에 정말로 약속을 지키듯 내 일기를 읽지 않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선생님이 동규 일기장 읽어봐도 될까?’ 하고 물어왔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긍정의 침묵이었다.

토해내듯 적던 일기에 독자가 생겼지만 부끄럽긴커녕 더 불이 붙었다. 길을 가던 중에도 서하림이 생각나면 바닥에 주저앉아 가방을 열어 공책을 꺼냈고, 수업 중에 쓰기도 여러 번이었다. 감사하게도 담임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딴짓하는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가끔 선생님의 코멘트가 달리기도 했다.

♧선생님 생각엔 동규가 사춘기인 것 같아. 어린이를 졸업하게 되는 사춘기 때엔 모든 감정이 파도처럼 흘러넘치거든.

♧키가 벌써 어른인 선생님보다 커졌는데 진짜 어른이 되려면 한참 남았네. 그때까지 엄마의 힘이 되어줘.

♧하림이가 동규에게 이렇게나 특별한 친구인데 생각보다 동규는 하림이랑 잘 안 노는 것 같네~ 부끄러운 것도 있겠지만 하림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는 걸 선생님은 알아. 동규는 신중하니까.

사춘기 따위로 설명될 수 없는 내 감정은 일기의 형태로 쓰여진 러브레터였으나 그 당시 나는 수십 장의 일기를 정확히 뭐라고 규정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내 거친 감정들로 휘몰아치는 일기들을 좋아했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 몇 개를 뽑아 공문으로 내려왔던 일기 대회에 제출했다. 초등학교 남자애치고 잘 쓴 것들이라 선생님 혼자 보기 아까웠다는 내 일기들은 구(區) 예선을 통과하고 시(市) 예선도 통과해 전국 본선까지 오르더니 교육부 장관상과 15만 원의 문화상품권을 안겨주었다.

내게 글 쓰는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은 담임선생님은 그 이후로도 백일장이나 공모전 등을 소개해 주었고 돈이 필요했던 나는 공부 시간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참여했다.

예외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초6, 중3, 고3처럼 높은 학년이 큰 상을 차지했고, 초등부는 상금이 적거나 없었다. 조금 아쉽긴 해도 상장을 받으면 서하림에게 한마디라도 말을 붙일 이야깃거리가 생겨 좋았다.

‘와 또 상 받았어? 대단하다!’

커다란 눈이 한껏 접힐 만큼 예쁘게 축하해 주는 것도.

복도와 교실엔 아무 소리 없이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뿐이어서 나도 유령처럼 들어와 앉았다.

서하림은 눈에 불을 켜고 A 문제집을 푸는 중이었다. 얼핏 봐도 나보다 많은 양이다. 나는 몇 장 남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내 승리였다.

“이번 주 토요일?”

“응.”

남은 초콜릿 푸딩을 한 번에 먹어서 그런지 발음이 귀엽게 뭉개졌다. 푸딩을 삼키느라 꼴깍이며 움직이는 목젖이 시선을 이끌었다. 무슨 영화인지 소설인지 뱀파이어가 어느 인간의 목덜미에 난 목젖을 날카로운 이빨로 무는 그런 장면이 있었던 것 같던데. 뭐였더라.

“시험 일주일 전이야, 오늘.”

“……응 알아. 더 먹을래?”

서하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토요일이면 시험 4일 전이잖아.”

대답 없이 일어나 방 한쪽에 있는 냉장고에서 푸딩을 꺼냈다. 미리 많이 만들어두길 잘했다.

“하루 쉰다고 안 망해.”

“그건 그렇지. 근데 중간고사 직전인데 애들이 글 쓰러 와?”

“거기 오는 애들 대부분이 예대 준비하는 애들이라 공부 안 하는 애들 수두룩이야. 내가 제일 잘할걸.”

서하림이 걱정하는 대로 중간고사를 4일 앞에 둔 이번 주 토요일, 나는 백일장 때문에 인천 문학경기장까지 갈 예정이었다. 문제집 푸느라 바빠서 미리 얘기한다는 걸 잊었다. 따라서 결국 토요일은 서하림 혼자 공부하게 됐다.

우리는 보통 서하림의 집에서 일주일 중 이틀 정도를 같이 공부한다. 요즘처럼 시험 기간 전 보름은 거의 매일. 대신 서하림이 과외 하는 시간에는 나 혼자 서하림을 기다리며 공부하고 있고.

혼자서도 잘하는 애지만 옆에서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능률이 좀 더 오르는 듯했다. 서로 모르는 걸 물어볼 때 알려주면서 나오는 시너지도 좋고, 바로 옆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걸 보고 있으면 자극이 되기도 하니까.

“하긴. 고작 하루 그렇게 쉰다고 망할 머리는 아니지 너도.”

머리가 좋은 건 너지 내가 아니다. 나는 취미도 쉬는 것도 다 공부를 해야 겨우 널 따라가는 수준이란 말이 쑥 올라왔지만 서하림이 초코 푸딩을 다 먹어버리겠단 얼굴로 티스푼을 움직이는 걸 보고 관뒀다.

“이왕 인천까지 가는 거 또 대상 받아와.”

“응. 그럴게.”

서하림은 시계를 확인하더니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샤프를 들었다.

이번에도 아쉬운 쪽은 나였다. 토요일은 학교를 안 가니까 내가 서하림에게 밥도 해주고 디저트를 만들어주는 날이기도 한데 저 예쁘고 작은 입에 내가 만들어준 것을 먹이지 못한다는 게 이럴 때면 참 아쉬웠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던가. 서하림과 관련된 모든 건 아쉬움 투성이였다.

문제에 열중하는 서하림과 달리 나는 손에 턱을 괸 채 서하림의 매끈한 콧날을 훑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높은 콧대가 반듯하게 뻗어 있는 것이 잘 보였다.

서하림이 문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문제집 위에서 놀고 있던 왼손을 천천히 움직여 입에 물고 있던 티스푼을 잡았다. 그리고 푸딩이 있을 곳으로 티스푼을 움직였다. 눈은 여전히 문제집. 스푼이 컵에 닿긴 닿았는데 보지 못하니 뜨는 모양새가 영 서툴렀다. 나는 서하림의 하얀 손등을 붙잡아 푸딩을 한껏 떠주었다.

“……근데 거기 장원 받으면 대학교 1년 치 장학금 줘.”

대답 대신 샤프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장학금?”

“응.”

“엄청 큰 대횐가 보다.”

“전국 대회라서. 아 근데 3학년 아니라서 안 줄지도 몰라.”

“전부터 느낀 건데 예술의 세계에선 작품만 좋으면 장땡인 걸 왜 대상은 다 3학년만 주는 거냐고.”

“특기자로 대학 가야 하니까. 그리고 나 작년 가을에 1학년인데도 S대 백일장 장원 받았잖아. 예술 좀 했지.”

“헐 너 문학 특기자로 갈 거야?”

갑자기 고개가 들리더니 깜짝 놀란 토끼 같은 얼굴로 물어왔다. 내가 예대라도 가버릴까 봐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그럴 일은 없는데, 귀엽게.

“아니. 문특은 문창과밖에 못 가. 가끔 국문과? 근데 나 죽어도 공대 간다니까.”

“아 맞다.”

서하림은 다시 푸딩을 입에 넣고 티스푼을 입에 문 채 공부에 집중했다.

이젠 나도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얼마나 문제가 틀렸는지 확인해 봐야겠지만 주말 동안 열심히 달리면 문제집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천을 오가는 길에도 문제집을 들고 있어야겠지만. 이번에는 진짜 벌칙을 받기 싫었다. 게다가 내 벌칙보다는 서하림이 받는 걸 보고 싶었다.

이번에 내가 건 매운 라면 벌칙은 깨나 볼만할 것이다. 우선 매운 것을 질색하는 서하림이 먹기 싫은 걸 꾹 참고 먹어야 한다는 것에 얼굴이 한껏 구겨져 있을 거다. 평소에 화날 일이나 짜증 날 일 자체가 없다 보니 늘 해사하게 방실방실 잘 웃어 간만에 보는 표정일 거고. 또, 한 가닥 잡고 입에 넣어 먹기 시작하면 금세 올라오는 매운맛에 코가 빨개지고 귀도 빨개지고 얼굴도 붉은빛으로 가득하겠지.

땀이 흘러 머리끝이 살짝 젖을 거고 곧 눈물도 고일 거다. 강렬하게 매운맛 덕분에 서하림은 신음 비슷한 소리를 흘릴 테고 붉은 얼굴은 그 소리와 딱 들어맞을 것이다.

먹기 싫어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날 바라보던 하림이가 더 먹기 싫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근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듣기에도 퍽 멋들어지고 강압적인 목소리였다.

‘다 먹어.’

하지만 나는 하림이에게 한없이 약하고 젠틀한 사람이기 때문에 라면은 많이 먹여봐야 반 정도만 먹일 생각이다. 그리고 우유와 쿨피스, 녹차도 준비했다. 어차피 빨개진 얼굴로 우는 하림이가 보고 싶은 거였지 매운 걸 다 먹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속 버릴까 봐 걱정도 되고.

‘못 먹겠어 동규야…….’

젖은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젤리 같은 혀를 내밀었다. 말랑한 혀끝에는 달콤한 침이 고여 뚝뚝 떨어졌다.

말끝을 늘이다니 요망한 게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작은 뺨을 감싸 하림이의 눈물이 고인 눈가를 닦아주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고이는 하림이의 눈물은 핥아 마시고 싶을 만큼 투명했다.

‘……원래는 다 먹어야 하는데.’

‘제발…… 후으, 죽을 것 같아…….’

‘그럼 동규 형 그만 먹을래요, 해봐.’

나는 손가락 사이에 고인 하림이의 눈물을 게걸스럽게 할짝거리며 말했다. 긍정적인 내 대답에 하림이는 환하게 웃었다. 눈물과 땀 때문에 안 그래도 좋은 피부가 반질거렸다.

‘동규 형, 그만 먹을래요. 매운 거 그만 먹게 해주세요.’

서하림의 이모님은 어릴 때부터 김치나 온갖 빨간 매운 것들은 무조건 씻어서 먹였다. 지금도 생양파가 들어가는 음식이나 김치가 조금만 매워도 잘 먹지 못하고 떡볶이도 급식으로 나오면 아예 안 먹거나 씻어 먹는다. 그래도 간장떡볶이나 궁중떡볶이는 좋아하는 편이라 내가 곧잘 만들어주곤 했다.

사실 급식 반찬에 떡이 들어간 게 나오면 반 정도는 남긴다. 갓 만들어진 요리는 떡이 말랑말랑한 상태지만 급식에 나온 반찬은 아무리 보온을 잘 해도 서하림이 좋아하지 않는 식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예민한 서하림이 내가 만든 요리들은 불평 없이 받아먹는 걸 보는 게 좋다. 내가 만든 것에만 길들어 다른 사람들의 요리는 아예 먹지도 못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서하림의 혀가, 미각 세포까지도 내 것이 되는 느낌이겠지. 서하림 신체의 일부가 내게 길들여진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나 화장실.”

앞을 가리며 일어나느라 엉거주춤한 자세였는데 다행히 서하림의 샤프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뛸 순 없어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문 닫을 새도 없이, 휴지조차 뜯지 못하고 두루마리를 통으로 빼 성기 끝에 댔다. 휴지 심 반대편을 손으로 막기 무섭게 정액이 터져 나왔다.

“아 존나 큰일 났네.”

내 예상은 귀두 정 가운데를 휴지 심에 맞추고 심 반대편을 손으로 막아 휴지 심 안쪽에만 정액이 고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심 안으로 내 것이 들어가지 못하는 데다가 너무 다급하게 두루마리를 가져다 댔더니 요도 구멍이 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아직 한참 남은 두루마리의 휴지에도 심 안쪽에도 그리고 내 손에도 체온처럼 따끈한 정액이 흥건했다. 더 심각하게 큰일 난 건 한 번 뺐는데도 가라앉지가 않았다는 거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2층엔 나와 서하림뿐이라는 거고 서하림의 방 외에도 손님방 두 개와 서하림의 창고로 쓰는 방이 하나 더 있었다.

한 번 더 빼고 창고 방 구석에다 휴지를 내려놓은 다음에 1층으로 내려가 주방에서 비닐봉지 같은 걸 찾아서 거기다 담아놔야지. 그리고 이따 집에 가려고 현관까지 나왔을 때 뭐 까먹었다며 다시 올라와서 가방에 넣어 가져가야겠다.

생각이 정리되자 평온이 찾아오며 아랫도리에 열이 확 쏠리는 게 느껴졌다. 정액이 묻지 않은 면이 바닥에 가도록 내려놓고 손부터 씻었다. 닫지 못했던 화장실 문을 잠가야 하니까.

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체육대회 준비가 시작됐다. 3월부터 선수 선발을 했고 시험 친 뒤엔 점심시간과 체육 시간을 이용해 연습 경기가 진행됐는데 남학생들은 농구와 축구, 여학생들은 피구였다. 이 종목들은 당일 청팀과 백팀의 결승 경기로 승자와 패자가 갈릴 예정이다.

날쌘 서하림은 축구팀 에이스 스트라이커. 서하림은 체육대회 축구팀 말고도 세성전 축구팀이기도 하다.

세성전이란 우리 학교와 S대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사이에서 매년 가을마다 열리는 친선 축구 경기를 말한다. 두 학교 다 축구부가 없기 때문에 축구 동아리나 각 학년에서 선수를 뽑아 일시적으로 결성되는 팀으로 진행되지만 그래도 아마추어 경기치고 정식적인 심판진을 갖추고 하는 경기라 인기가 제법 좋다.

매년 번갈아 가며 서로의 학교에서 경기를 하고 3학년을 제외한 1, 2학년은 대부분 빠짐없이 응원 원정을 갈 정도였다. 나름 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세성전이 생기기 전엔 체육대회가 세정전 하는 날에 했다던데 세성전이 열린 후론 바뀌었다. 5월로 체육대회가 옮겨진 뒤, 3학년도 체육대회에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지만 거의 계단에 앉아 응원만 하고 개인전과 이어달리기 외엔 참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해도 무방했다.

작년 세성전에선 후반전을 뛰는 2학년이 경기를 말아먹긴 했으나 전반전 1학년 경기에서 터진 네 골 덕분에 승리는 우리 학교였다. 그 네 골 중 두 골이 서하림의 것이었으니 서하림이 승리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작년 세성전 이후로 학교의 영웅으로 부상한 서하림은 다치거나 하지 않는다면 올해도 세성전에 나갈 것이다.

그리고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또 오르겠지. 서하림은 이미 중학생 때부터 이 근방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다. 엄청나게 잘생긴 애가 공부도 잘한다고. SNS가 있긴 한데 열심히 하진 않고 영재원 그룹이나 올림피아드 그룹에 가입해서 공지를 확인하거나 연락하는 용도로 쓴다. 가끔 사진 올리고.

지금은 프로필 사진이 없지만 인터넷에는 서하림의 사진이 꽤 돌아다니고 있었다. 서하림과 함께 사진을 찍은 친구들이 자신의 SNS에 사진을 올린 탓이었다. 사진 속에 서하림이 등장하면 좋아요 숫자가 평소의 몇 배로 뛰고 공유되는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우리 학교 치면 자동 검색어에 서하림이 뜨고 연관 검색어에도 서하림이 있을까.

작년 체육대회 때는 연예인 좋아한다는 어떤 여자애가 DSLR 카메라를 가져와서 서하림의 사진을 고화질로 찍어댔다. 인터넷에 우리 학교 이름을 치면 그 애가 찍은 열일곱 살 서하림의 체육대회 사진들이 바로 나온다. 물론 나도 그 사진을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나는 운동에 큰 흥미가 없고 몸이 무거워 서하림처럼 날쌔지도 않은 데다가 우승이고 뭐고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나는 키가 백팔십이 넘는다는 이유로 절망적이게도 작년에 이어 농구팀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뿐인가. 힘 좋단 이유로 팔씨름에, 덩치가 산만 하단 이유로는 줄다리기까지 하게 됐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곳에 나서기 진짜 싫은데 서하림이 저런 이유로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바람에 진짜 할 거냐고 몇 번씩 묻는 반장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이름을 농구 칸에 적자 누군가가 ‘일단 농구는 이겼고 축구가 빅매치다’라며 웃었다.

작년에 짝수 반으로 이루어진 백팀 농구부의 승리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멤버 모두가 제 몫을 잘했다. 내 경우는 팀에서 제일 키가 커 포지션이 센터였지만 연습도 대충 적당히, 결승 1쿼터도 욕먹지는 않을 정도로만 하다가 목이 터져라 백팀 이겨라를 외치는 서하림을 위해 다음 쿼터에서부턴 마음을 고쳐먹었다.

날아오는 농구공들을 다 쳐냈고 리바운드도 거의 전부 잡아냈으며 청팀에서 3점 슛이 터지면 사기를 꺾기 위해 덩크슛을 넣었다. 나 말고도 같은 팀 애들도 잘 했고, 결과는 28:71로 더블스코어를 훨씬 넘겨 이겼다. 1쿼터 이후로 청팀은 거의 골을 넣지도 못했다.

하지만 올해는 진짜 귀찮아서 하기 싫었다.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다. 가만히 앉아 운동장을 열심히 뛰어다니는 서하림을 구경하면서 점심시간을 행복하고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수업 시간 동안 얌전히 내 앞에 있는 까만 머리카락과 하얀 뒷목을 보는 것도 좋지만 체육대회 내내 뒤에 앉아서 응원하느라 바쁜 귀여운 머리통을 몇 시간씩 보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른다.

티셔츠와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하얀 팔다리를 맘껏 볼 수 있는 것도 좋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청량하게 웃는 것도 좋고 멋 낸다고 헤어밴드를 한 덕분에 평소엔 가리고 다니는 동그란 이마가 드러나는 것도 좋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들이 이마에 달라붙는…….

“야, 김동규. 뭐 하냐? 잘 좀 막아봐.”

멍하게 서서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서하림을 생각하고 있는데 타박하는 한마디가 훅 들어왔다.

“……재미없어.”

“내일모레면 결승인데 이렇게 대충하면 어쩌자고?”

“모레 아니고 3일 뒨데.”

“그건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그럼.”

농구 골대는 운동장과 체육관 두 곳에 있다. 어디서 할지 두 주장이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진 우리가 체육관이었다. 서하림은 운동장에 있는데 말이다. 운동장에서 연습을 할 수 있는데도 못 하게 된 게 중요하지 그럼 뭐가 중요하단 것인가.

“결승은 저 밖에 운동장에서 하는데 실내에서만 연습하게 만든 게 누군데.”

“…….”

꼴에 주장이라고 팔뚝에 파란색 주장 밴드를 차고 있는 황우민은 뭐라 더 얘기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 말은 제대로 해야지. 잘 좀 막아보고 싶어도 공을 제대로 던지지도 못하는데 막긴 왜 막냐? 딱 봐도 링에 맞고 튕겨 나갈 게 뻔한데.”

“그……래도 우리 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너만 대충하.”

“야.”

“어?”

“…….”

아 진짜 귀찮아 죽겠다. 작년에 같은 팀이던 애들은 이번에 죄다 상대 팀인 백팀에 들어가 연습이고 뭐고 할 맛이 안 났다. 그래도 작년에는 좀 하는 애들이 모였는데 올해는 키부터가 죄다 좆만 했다. 청팀 농구팀 중에 180이 넘는 건 나 하나뿐이다.

실력은 뭐……. 선수 선발 끝내고 4월에 한창 연습할 때 주장이란 새끼가 농구는 김동규 하나만 믿고 간다거나 이번에는 농구를 버리고 축구에 응원 올인이란 얘기를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지 딴에는 우스갯소리로 했을지 몰라도 눈치가 없는 건지 황우민의 저 말에 같은 팀 애들 전투력이 하락한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나마 서로 으쌰으쌰 하며 다시 열심히 하게 된 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뭔데.”

“여기서 내가 열심히 해봤자 뭐 하냐?”

“뭐?”

팀원 수는 스타팅멤버 다섯 명을 포함해 열 명. 날 제외한 아홉 명이 순식간에 내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한 말인데 여기서 내가 열심히 하면 실점 하나도 안 나올 거 같아.”

그래도 나름 우리끼리 팀 나눠서 하는 연습 경기인데 50점 내기 연습에서 0:50을 만들면 안 되지 않나. 실제로 지금 스코어도 30:49였다. 귀찮아서 골대 근방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딴 생각하면서 대충대충 했지만 우리 팀이 50점까지 1점 남긴 상황이었다.

“체육대회 날 열심히 할게. 대충도 안 해. 축구팀에서 키 큰 애 하나 데려와서 너네끼리 연습해라. 나는 여기서 연습을 하는 의미가 없어 보여.”

“야! 김동규! 어디 가!”

코트를 벗어나는 나를 다급하게 따라온 황우민은 꽤 화나 보였다.

“진짜 가게? 미쳤냐 지금?”

“금요일에 안 나오겠지. 내가 진짜 미친 새끼면.”

“뭐라고?”

“안 미쳤다고.”

“야, 야!”

어깨를 붙잡은 손을 세게 쳐냈다. 황우민이 씩씩거리며 날 째려봤지만 시선을 먼저 내렸다. 다른 애들은 우리 둘을 힐끔거리거나 못 본 척했다. 하여튼 전부 얼간이 새끼들이다.

저런 새끼들이 책임질 대한민국의 미래를 조금 걱정하며 체육관을 나왔다. 내 발길은 교실이 아닌 운동장으로 곧장 향했다. 막 도착했을 때 서하림이 슛을 날려 골이 들어갔다. 양손의 검지를 세워 하늘로 올리는 멋진 세레머니가 나오기도 전부터 여학생들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댔다. 하여간, 세상 멋있는 건 다 한다. 그게 어울리기는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고작 고등학교 체육대회 개회식에 왜 구청장에 국회의원에 어디 어디 협회장까지 오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그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는 바람에 개회식이 아주 길게 늘어졌다. 그래도 그 사람들과 더불어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까마득한 선배들이 기증해 준 선물들은 꽤 빵빵해서 체육대회의 열기를 더했다.

청팀과 백팀으로 갈라져 운동장 계단에 앉았다. 응원단과 함께 제일 앞에 앉아 있는 서하림과는 반대로 나는 제일 뒤에 자리를 잡았다. 비싼 학교라 그런지 천막을 잘 설치해 줘서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게 좋았다.

공굴리기나 박 터트리기, 줄다리기, 팔씨름, 단체 줄넘기, 50m 달리기, 2인 3각 달리기 기타 등등 자잘한 경기들은 오전에 진행되고 밥을 먹은 뒤에는 농구, 피구, 축구의 결승전과 번외 경기인 선생님들 경기가 있다. 그 뒤엔 피날레인 이어달리기. 뭔 놈의 체육대회가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여덟 시간이나 진행되는 건지 모르겠다.

키 크단 이유로 농구팀에 차출된 것도 싫어 죽겠는데 아침부터 힘쓸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진짜 서하림이 아니고 다른 새끼가 날 온갖 종목에 추천했다면 오늘 말도 없이 결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나. 귀엽게 손 번쩍 들고 내 이름을 불러주며 애교를 피워대는데. 교내에 요리대회가 있다고 해도 서하림이 나가라면 나갔을 거다.

2인 3각 달리기와 함께 팔씨름이 진행된다며 참가 학생들의 이름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2학년 1반까지만 얘기했는데도 와아 하며 소리를 지르느라 그 뒤에 나온 내 이름은 들리지도 않았다. 미리 챙겨온 모자를 쓰고 일어났다. 하…… 진짜 다들 그냥 나한테 신경 좀 꺼줬으면.

“이기고 와!”

“응.”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는 서하림을 뒤로하고 운동장 한쪽에 마련된 팔씨름 경기대에 섰다. 여학생부가 왼쪽, 남학생부가 오른쪽이었다. 토너먼트로 진행됐고 남학생부는 빠르게 끝났지만 의외로 여학생부가 박빙이었다.

경기를 끝낸 남학생들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경기대를 빙 둘러쌌다. 그 무리에 나도 껴 있었다. 남자 새끼들은 상대방이 자기보다 힘이 훨씬 세면 아등바등 버티다 자존심이 상하는지 그냥 죽고 마는데 여자애들은 근성 있게 끝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다른 애들처럼 소리 내서 이름을 외치진 못해도 한 판 한 판이 끝날 때마다 박수 정도는 크게 쳐주었다.

드디어 여학생부 승자가 결정됐고 그 애는 아쉽게도 백팀이었다. 그 애랑 팔씨름 한 2등도 백팀이었고. 기껏 내가 100점 따온 게 여학생부에서 백팀이 150점을 가져가면서 무용지물이 됐다. 내게 진 남학생부 2등도 백팀이라 결국 백팀은 팔씨름에서만 200점을 가져갔다.

나름 2인 3각에선 우리가 100점을 따왔는데도 팔씨름의 결과가 자극이 된 건지 응원단이고 선수들이고 불에 타오를 지경이었다. 그다음 경기였던 줄다리기에서 우리가 200점을 가져왔고 그다음 경기인 단체 줄넘기에선 자극받은 백팀이 200점을 가져가면서 체육대회 1부는 무르익어갔다.

1부의 단체전들이 모두 끝나고 제기차기나 50m 달리기 같은 개인전도 거의 다 끝이 보였다. 50m 달리기의 경우 모든 학생이 다섯 명씩 서서 총소리에 맞춰 달리면 1, 2, 3등에게 깜찍한 도장을 찍어줬다. 달리기 완전 잘하는 서하림은 1등이었고 나는 꼴찌였다. 4등과 꼴찌인 5등은 그냥 확인용 도장만 찍어줬다.

달리기까지 끝낸 남학생들이 하나둘 급식실로 뛰어가는 게 보였다. 어차피 빨리 가봤자 여자애들에게 양보를 해줘야 해서 나는 뛰지 않고 느적느적 걸어갔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도착하는 대로 급식을 먹을 수 있지만 체육대회 때는 여학생이 우선이었다. 남학생들 땀 냄새가 너무 엄청나서 여학생들에게 피해를 준단 이유였다. 꽤 옛날부터 그랬다는데 납득 가는 이유라 아무도 반발하는 사람이 없었다.

점심시간은 1시 반까지. 여학생들이 점심을 먼저 먹을 수 있도록 개인전 역시 여자애들이 먼저 진행되고 남학생들은 그다음에 하게 되는데, 제기차기나 투호 던지기, 3D 과녁 맞추기, 멀리뛰기 등등의 개인전들을 알아서 세 개씩 완수하고 도장을 받아 급식실로 가면 된다. 근데 사실 말이 세 개지 50m 달리기는 무조건 마지막에 필수로 해야 하기 때문에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종목은 두 개가 전부다.

마지막 50m 달리기를 끝내면 급식실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여자애들은 11시 30분 정도부터 점심을 먹었다. 부지런히 먹고 나와 주는 덕에 남학생들도 빠르면 12시쯤이면 급식을 먹을 수 있었다.

재밌는 건 여자애들이 늘 서하림이랑 같이 밥 먹겠다고 기다려 주기 때문에 사방팔방 남학생들 천지여도 서하림 주변은 아니었다. 그 외에 남자 친구랑 같이 먹겠다고 늦게 먹는 애들도 간혹 있고. 아무튼 이런 체육대회 점심시간 현상은 같은 재단이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세문중학교 때부터 그랬다.

오늘도 저 멀리서 시끌벅적하게 서하림을 데려가는 여자애들을 보고 있으려니 이곳저곳에서 서하림을 향해 웅성거리는 남자 새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학교 아이돌은 좋겠네 부럽네 어쩌네.

아이돌이란 별명은 여자애들에겐 아주 긍정적인 의미로만 쓰였지만 남자애들 사이에선 아니었다. 서하림이랑 붙어 다니며 친하게 지내는 애들마저도.

앞에서는 제대로 하지도 못할 말들을 지껄이는 꼴이 짜증 나서 서하림을 안 좋게 얘기하는 말이 들릴 때마다 고개를 돌려 어떤 새낀지 면상을 확인했다. 지들도 찔리는지 나랑 눈이 마주치면 입을 다물고 눈을 피했다.

그냥 교실에 남자 새끼들만 모아 놔도 냄새 나는 걸 음식 냄새에 땀 냄새까지 섞이니 정말 딱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올해면 이것도 끝이다. 3학년은 급식실이 따로 있으니까. 저 멀리 보이는 서하림 얼굴을 보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애들도 인정한 거지만 서하림은 땀 냄새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덜 나고 애초에 땀 자체를 잘 흘리지 않는다. 더위도 잘 안 탄다.

대신 반대로 추위를 굉장히 많이 타고 수족냉증을 1년 내내 달고 살았다. 그 탓에 손끝과 발끝이 늘 분홍색이었다. 마치 한겨울에 손발과 귀, 코 따위가 찬바람에 붉어지는 것처럼. 겨울이면 이따금 차가운 손을 내 뒷목이나 등 같은 곳에 넣어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내가 한겨울에도 몸이 따끈따끈 하단 걸 알고 주먹 쥔 손을 내민 적도 많았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두 손을 잡고 있노라면 심장이 흐물흐물해졌다.

짧으면 몇 초, 길면 1분이 좀 넘을까. 그 시간 동안 서하림은 아무 말 없이 우리의 손을 바라보기도 했고 아니면 쫑알쫑알 친구들 이야기, 학원 이야기를 얘기해 주었다. 손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면 고맙다며 뛰어가는 서하림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집으로 곧장 뛰어가 자위를 했고. 찬바람에 붉어진 손가락은 서하림의 분홍색 손가락이라 상상하기 좋았다.

지금보다 훨씬 작고 젖살이 빵빵했던 초등학생 서하림을 떠올리자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왔다. 밥 먹으며 말도 없이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까 봐 입을 살짝 가려보기도 했지만 한 번 떠오른 기억은 접기가 힘들었다.

서하림과 여자애들이 급식실을 나가고 거의 마지막으로 들어온 애들이 다 먹어 갈 때쯤이 되어서야 내 행복한 식사는 막을 내렸다. 꽤 많은 양을 먹었으나 속이 전혀 더부룩하지 않았다.

2부의 시작은 농구였다. 황우민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홱 돌리며 대놓고 날 무시했다. 어차피 나도 같이 무시하면 되니 별 상관은 없었다.

경기 시작 직전, 주장인 황우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두 둥글게 모였다.

“모두들 알겠지만 우리가 실력은 쟤네보다 좀 딸려. 근데 우리는 일단…….”

“…….”

“……김동규가 있고, 끝날 때까진 끝난 거 아니다. 알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왕이면 이기도록, 지더라도 폼 나게. 가자!”

나를 뺀 아홉 명이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친 뒤 스타팅멤버 다섯이 코트 위로 올라왔다.

“왜.”

황우민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시합 시작까지 코앞이라 참다못한 내가 먼저 물었다.

“아니 그냥, 열심히 하라고. 우리 다 열심히 연습했고 이기면 좋잖아. 너 때문에 지면 좀…… 짜증 날 거 같고…….”

“안 들려. 크게 말해.”

“아 씨, 잘 부탁한다고!”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양 팀 인사를 하자 심판이 공을 던졌다. 나는 힘껏 뛰어올라 우리 팀에게 공을 패스했다. 함성이 크게 들려왔다.

사실 조금 전 황우민이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한 말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었다. 병신 같은 게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 여기서 지면 그건 내 탓이 아니라 황우민과 나머지 떨거지들 탓이지. 말로 백 번 얘기해 봤자 못 알아들을 새끼였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얼쩡대던 나는 단숨에 뛰어 드리블을 하고 있던 우리 팀 박진우의 뒤로 다가갔다.

“야, 씨발 뭐야!”

느려 터진 드리블이라 스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스틸로 공을 뺏어 든 내게로 박진우와 황우민이 다가왔다. 곧바로 내게 수비가 붙었다. 나는 드리블을 하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지금 서 있는 곳은 3점 슛 라인이었다. 아 좀 먼데.

“야 김동규! 공 넘겨!”

코트 바로 아래에서 손을 흔드는 황우민을 보아하니 죽어도 공 넘기기가 싫어져 나는 드리블 하던 농구공을 두 손으로 잡고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그리고 순간 다리 근육에 힘을 줘 크게 뛰어올랐다.

-청팀 1번 김동규 학생! 3점 슛을 할 수 있는 학생이었나요? 체육 선생님이 주신 프로필엔 슈터는 아니라고 되어 있는데요!

스피커로 MC를 맡은 이름 모를 개그맨의 목소리가 빠르게 흘러나왔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을 확인하고 나는 바로 골대 앞으로 달려갔다. 내 3점 슛 성공률이 바닥을 긴다는 걸 알고 있는 백팀 세 명이 골대 아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실패하면 리바운드 잡아 바로 우리 팀 골대로 날릴 모양인데.

“시발 너 미쳤어? 처음부터 왜 삽질이야!”

누가 봐도 골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공이었다. 그리고 나는 1쿼터 처음부터 세 명을 상대로 리바운드 싸움하긴 귀찮았고.

자꾸만 욕을 해대는 황우민 때문에 심판인 체육 선생님이 휘슬을 몇 번이나 불어댔다. 공이 골대 근처까지 날아왔다. 나는 다시 한번 도약을 하기 위해 몸을 낮췄다. 3점 슛 날릴 때보다 더 높이, 조금 무리했다 싶을 만큼 뛰어오르기 위해.

“야 리바운드! 김동규 너도 이 미친 새…….”

-더엉크으! 덩크네요! 처음부터 덩크슛이 터졌습니다!

“…….”

-세문고에 농구부가 있었던가요? 없다면 교장 선생님! 빨리 농구부를 만드셔야겠습니다!

농구공이 골대 망을 빠져나가고 골대 아래에 있던 백팀이 공을 가져가 우리 쪽 골대 근처로 뛰어왔다. 나는 그 뒤를 바짝 쫓아와 패스를 받은 백팀 12번이 슛을 날리기 무섭게 쳐내고 다시 공을 가져왔다.

“야 장준한테 패스해!”

황우민이 우리 팀 슈터인 장준을 가리켰지만 콧방귀만 껴주었다. 내게 붙은 수비들을 간단하게 뚫고 나는 한 번 더 공을 던졌다. 공은 백보드 라인 안쪽에 맞고 깔끔하게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연달아 골을 성공시키자 백팀에서 타임아웃을 불렀다. 경기가 시작된 지 2분이 막 지난 시간이었다.

백팀의 타임아웃 때도 쉬는 시간에도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우리 팀 감독을 맡은 수학 선생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해도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1쿼터에만 나 혼자 득점을 18점이나 올려서인지 황우민은 날 쳐다보지도 못했고 2쿼터까지도 나는 우리 팀이든 백팀이든 내게 공이 없으면 공을 스틸해 점수 내기에 아주 열심히, 매우 열중했다.

안 그래도 평소에 잘 뛰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데 무리해서 점프를 하고 코트를 누비고 다녔더니 좀 피곤해져서 후반부는 그냥 골대에만 붙어 있었다. 황우민은 뭐라고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황우민 말대로 열심히 공을 막아 실점을 거의 내지 않았다. 백팀의 점수는 내가 계속 쳐내서 나오질 않고 청팀의 점수는 선수들이 병신 같아 나오질 않으니 경기가 끝나 갈수록 게임의 질이 떨어져만 갔다. 마찬가지로 관중들의 재미도 함께.

이긴 건 우리 팀인 청팀이었다. 이긴 건 좋은 거니 농구팀은 폭발적인 박수를 받으며 돌아왔으나 한 명의 표정이 독보적으로 구렸다. 황우민은 그렇게 누누이 말하던 것처럼 폼 나게 지지도 않았고 기분 좋게 이기지도 못했다. 그래놓고 씩씩대며 날 째려보는 게 고작이었다.

여자애들의 피구는 백팀의 승리였다. 들어보니 백팀 여자애들이 피구 이기려고 아침에도 일찍 나와 연습을 했단다. 피구 우승 상품으로 걸린 프리미엄 샐러드바 이용권을 차지하려고. 피구 하는 거 보니 과연 그들의 승리를 향한 열망이 느껴졌다. 샐러드바의 위력으로 피구는 순식간에 끝나 버려 이번 체육대회 가장 빅매치인 축구 경기가 바로 진행됐다.

작년과 다른 게 하나 있었는데 선수 입장을 한 명씩 했고 심지어 등장 곡도 나왔다. 야구도 아닌데 등장 곡이 있는 게 웃겼지만 작년에 학생회 부회장으로 뽑힌 10반 애가 어마어마한 축덕인 데다가 작년 세성전에서 감동을 먹었다나 뭐라나.

그래서 작년 세성전의 신화였던 1학년들이 2학년이 된 올해 기념비적인 경기를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등장 곡 타임을 만들었단다. 원래 알던 건 아니고 방금 주워들었다. 백팀 에이스도 서하림만큼 잘한다는 얘기도 같이. 내 생각엔 다음 달에 있을 학생회장 선거에서 이번 등장 곡 타임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자기가 미리 지정해 둔 등장 곡을 빽으로 삼아 한 명씩 등장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우리 팀부터 한 명씩 번갈아 나왔는데 신기하게 양 팀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새끼들이 다 관종이라 아주 온갖 오버란 오버는 다 떨어대며 운동장 중앙까지 걸어갔다.

-청팀 11번.

바로 이전에 나온 우리 팀과 백팀의 선수들이 여자 아이돌 노래를 들고 와 한껏 분위기를 올려놨는데 우리 팀 마지막 선수인 서하림은 무슨 곡을 들고 왔을지 궁금해졌다. 클래식? 은 좀 깨는 거 같은데 그렇게 센스 없는 애는 아니고. 아이돌 노래? 힙합? 근데 그건 또 앞에서 많이 나와서 조금 식상하다. 뭐, 프로야구에서 실제로 쓰이는 질풍가도나 애니메이션 오프닝 정도 되려나.

-2학년 1반 서하림.

“대박. 제대로 골라왔네.”

살짝 걱정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서하림이 들고나온 곡은 ‘Lazenca, Save Us’였다. 심지어 웅장하기로는 두말 아프다는 원곡 버전. 시작한 지 1초도 되지 않아 들리는 드럼 소리는 아주 다 죽여 버리겠다는 서하림의 강력한 의지가 엿보였다.

안 그래도 어마어마했던 환호성은 간이 천막을 벗어난 서하림이 검지로 하늘을 찌르며 등장하자 데시벨이 더 올라갔다. 잊고 있었는데 그래, 평소엔 얌전하면서도 이런 건 또 빼지 않고 잘하는 애였다. 너무 나대지도 그렇다고 사리지도 않으니 누군들 서하림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렇게 멋지고 센스 있고 사랑스러운데.

서하림은 웅장한 등장 곡에 맞춰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갔다. 별다른 퍼포먼스 없이 그저 손 하나 하늘로 찌른 채 걸어간 게 단데 그게 또 멋지긴 너무 멋있고 등장 곡은 너무 잘 어울리고, 나 말고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함성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고작 2분. 그 짧은 시간에 분위기가 완전히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백팀 5번. 2학년 10반 주유빈.

청팀 에이스의 선곡은 영화 OST인 ‘He's a Pirate’이었다. 뚱뚜둥두둥 하는 전주가 나오자마자 백팀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꽤 그럴싸한 선곡이었지만 이미 라젠카로 흐름을 탄 우리 팀에서는 ‘우우!’ 하는 야유로 거칠게 대항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멀끔하게 생긴 주유빈도 한 관종 하는지 백팀 쪽을 바라보고 큰절을 한 뒤 경례까지 해 보였다. 이긴 것도 아니고 고작 등장 하나 해 놓고, 진짜 웃긴 새끼들이었다.

“야 우리 등장부터 이겼다.”

“경기 종료해도 돼. 지금 10대 0으로 우리가 이긴 경기임 이거.”

애들 말처럼 등장부터 기 싸움에서 진 청팀은 경기도 3대 2로 지고 말았다. 그래도 다들 마지막 1분까지 열심히 뛰어다녀 준 덕분에 경기는 엄청 재밌어서 선생님들도 명경기라며 박수를 칠 정도였다. 서하림은 우리 팀 두 번째 골의 주인공이었고, 한 시간 경기 중 20분은 벤치였으나 어시를 귀신같이 해주면서 김현우가 마지막 역전 골을 넣을 수 있게 만들었다.

축구로 불탄 열기를 꺼뜨릴 수 없다며 MC가 바로 진행하겠다고 이어달리기 선수들의 이름을 빠르게 불렀다. 팀마다 학년 별로 여, 남 선수 두 명씩 뽑아 반 바퀴 씩 달리고 마지막 두 바퀴는 그중에서 제일 빠른 여학생과 남학생이 한 번 더 달린다. 청팀 마지막 주자는 11반 강서희와 우리 반 서하림이었고.

정확히 말하면 아예 확정은 아니다. 전에 서하림은 축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2학년 대표 주자로는 나가더라도 마지막은 못 뛰겠다고 사양을 했었다. 괜히 축구 뛰고 체력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어달리기에서 두 번을 뛰었다가 지게 되면 욕먹는 거 아니냐면서. 하지만 어차피 이어달리기 참여할 거 한 번 더 뛴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고 축구 풀로 뛰지 않고 체력 아껴놓음 되지 않냐며 반장이 열심히 꼬드겼다. 그래도 서하림이 영 탐탁지 않아 하자 그럼 일단 마지막 주자에 다른 애가 뛰기로 하고 만약 3학년들까지 다 뛰었는데 백팀이랑 차이가 많이 나고 그걸 우리 팀 강서희가 역전을 못 하면 구원투수로 뛰기로 했다.

서하림은 자기가 한 번 더 뛰지 않을 상황을 원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멋있는 거, 주목받는 거, 주인공 같은 건 다 서하림이 했으면 좋겠다.

동요를 개사한 응원곡을 각 팀이 소리 높여 불러댔다. 1학년 대표 주자부터 빠르게 줄이 세워지고 서하림은 파란색 헤어밴드에 남색 띠를 덧대어 묶었다.

오늘 같은 날은 체육복 대신 색을 맞춘 단체복을 입었다. 등에는 이름이나 별명 같은 것이 프린트되어 있었고 대부분이 별명이나 친구와 짝을 맞춘 것들이었는데 서하림은 그냥 이름 세 글자가 전부다. 우리 반에서 별명을 쓰지 않은 건 나와 서하림이 유일했다.

우리는 청팀이라 단체복이 쨍하고 정직한 파란색이었다. 그게 서하림과 아주 잘 어울렸다. 맑은 햇살과 청명한 하늘, 그리고 새파란 티셔츠에 흰 반바지를 입은 서하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내 쪽을 보고 웃을 때면 심장이 발아래로 굴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울렁거리고 지끈거리는 건 덤이었다.

줄이 정리되자 체육 선생님이 출발선에 서 스타트 건을 높이 들었다. 응원 소리도 잠잠해졌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이어달리기가 시작됐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선두가 수시로 바뀌고 그때마다 모두 소리를 질렀다.

1학년의 순서가 끝나고 2학년의 순서가 시작됐다. 내내 백팀 바로 앞에서 달리던 우리 팀 선수가 바톤 넘기기 몇 초 전 역전을 당하며 서하림에게 바톤을 건네주었다.

파란색 바톤을 잡자마자 서하림은 총알처럼 뛰어나갔다. 서하림이 달리자마자 순식간에 다시 역전되고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축구할 때 끝에서 끝으로 뛰어다니고도 저렇게 달릴 체력이 있는 게 대단하고 자랑스러웠다. 어깨뼈까지 내려오는 남색 띠를 나풀거리며 뛴 서하림은 백팀보다 훨씬 앞서 바톤을 넘겼다.

서하림이 벌려준 격차는 2학년이 끝날 즈음 한 번 따라잡혔다가 다시 벌어져 승리가 보이는 듯했다. 청팀 남 선배가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치명적인 실수가 터져 또다시 백팀이 역전을 했다. 다음 순서였던 우리 팀 여자 선배가 조금 전 우리 팀 남자 선배가 넘어지기도 전에 눈치채고 뒤로 달려가 바톤을 가져가지 않았으면 진짜 좆 될 뻔했다. 역전은 당했지만 다시 뒤집기가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었다.

백팀이 더 앞으로 치고 나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차이가 줄어들지 않은 채 청팀과 백팀의 마지막 여학생 주자들이 뛰기 시작했다. 서하림은 다급하게 마지막 시작점에 가 섰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허리도 양쪽으로 한 번씩 돌렸다.

키가 커서 다리도 길쭉한 강서희가 처음으로 격차를 줄이기 시작하길 몇 초, 서하림이 바톤을 잡았다. 우리 팀 응원석에서 서하림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백팀 마지막 주자인 구시현은 야구부였고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야구부 애들은 혹시 다칠까 봐 몸 사린다고 체육대회에 나서는 경우가 잘 없고 참여해도 양심적인 이유로 2부 경기는 안 나오던데 저 새끼는 왜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야구 선수라고 다 빠른 게 아니듯 체육 특기생이 아니어도 발 빠른 서하림은 반 바퀴를 기점으로 구시현을 따라잡았다. 서하림이 어디까지 왔나 확인하려고 구시현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저와는 다르게 아까 축구도 했겠다, 따라잡을 거라곤 생각을 못 한 듯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방심한 게 구시현의 결정적인 착오였다. MC도 소리를 지른 탓에 스피커가 터지는 줄 알았다.

서하림이 옆에 바짝 붙어 달리는 게 부담이 됐는지 구시현은 고개를 뒤로 꺾어 막판 스퍼트를 냈다. 골인 지점까지 1/4도 남지 않았을 때 서하림은 몸의 무게중심을 앞으로 모아 넘어질 것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성공하면 진짜 대박이고 실패하면 망하는, 정말 골인까지 얼마 안 남았을 때 걸어볼 도박이었다.

타앙-!

첫 시작처럼 스타트 건의 발포 소리가 들리며 체육대회의 모든 경기가 마무리됐다. 하얀 결승선을 먼저 통과한 건 역시나 당연하게도 늘 그렇듯이, 서하림이었다. 구시현은 숨을 헉헉대며 시원한 음료수를 순식간에 두 캔이나 비웠다.

영화 같은 역전승의 주인공인 서하림은 결승선을 끊음과 동시에 넘어졌지만 아픈 소리 하나 없이 하늘을 보고 누워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검지가 하늘로 향해 솟아 있었다.

나는 서하림의 몸이 땅으로 기우는 걸 보자마자 계단을 뛰어 내려가 서하림에게 달려갔다. 서하림은 입을 벌린 채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고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멋지게 이겨서 좋긴 한데 매끈한 흰 다리에 상처가 난 게 속상했다.

“잡아.”

“아, 나, 잠시, 잠시만……. 하, 좀, 아 일, 일 분, 일 분만. 후우, 아니, 십 초.”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들고 온 손수건에 얼음물을 뿌려 꽉 짰다. 세레머니를 했던 팔이 눈을 가리고 있어서 팔을 내려주고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코와 눈을 덮어주었다.

“아, 진짜 좋다…….”

“하림아 진짜 잘했다, 잘했어!”

곧바로 구급상자를 들고 온 보건 선생님이 서하림의 무릎에 식염수를 통째로 부었다. 그제야 서하림에게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보건 선생님은 상처를 소독하며 멋지고 잘해서 좋은데 몸은 소중히 하라고 타박했다.

“아, 알겠어요. 선생님 살살, 아 살살요!”

소독을 한 뒤 딱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폼을 커다랗게 잘라 붙여준 선생님은 병원에 꼭 데리고 가라며 또 얼음물을 짜고 있는 내게 신신당부했다.

그야말로 금의환향 한 서하림은 청팀 애들에게 둘러싸여 압사당할 뻔하다가 겨우 구해져 헹가래를 받았다.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는 서하림을 보고 있으니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계단에 앉아 소리 없이 웃었다.

시끌벅적한 게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시상식이 진행됐다. 이긴 우리 팀에 우승 선물로 고급 샤프와 만년필 세트가 주어졌고 종목별 상품이 수여됐다. MVP도 뽑았는데 남자는 서하림, 여자는 팔씨름 우승자 서하늘이 선정됐다. 서하림은 MVP 상품을 받아 들고 검지 세레머니를 한 번 더 해 보였다.

아직 100년도 안 사신 교장 선생님이 100년 세문 역사상 제일 재밌는 체육대회였다며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좋은 성적 받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몸을 쓰면서 청춘이 어쩌고 협동심이 저쩌고 시험도 끝났으니 이번 주말은 푹 쉬라는 좋은 훈화 말씀을 마치며 체육대회가 끝이 났다.

“운동장에 앉아 있어. 가방 가지고 내려올게.”

“헐 걸어가기 불편했는데 완전 고맙.”

종례도 얼른 집 가서 쉬라는 게 전부였다. 체육대회라 별거 없는 짐들을 가방에 넣고 다시 운동장으로 내려왔을 땐 서하림은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친구들에게 열심히 인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방에 필통만 들고 온 거 맞지?”

“맞아 맞아. 아니, 이럴 거면 오늘 같은 날은 어차피 교복도 안 입어, 짐도 없는데 가방 없이 등교하게 해주지 그건 또 보기 안 좋아서 안 된다는 게 어이가 없을 뿐이다.”

“…….”

“근데 이런 상처는 어디 병원 가야 돼. 외관가? 근데 부러진 건 아닌데.”

“피부……과?”

“피부과?”

“아니면 음, 소아과?”

“오 그게 제일 신빙성 있게 들려. 아기들 맨날 뛰다 넘어져서 병원 갈 거 아냐.”

“소아과에…… 가겠다고?”

“응.”

이 덩치에 이 나이 먹고 소아과에 가기 쪽팔렸지만 서하림은 정말로 소아과에 갈 생각인지 지도를 켜서 가까운 소아과를 검색했다.

“야 바로 근처다.”

“아기들이 나 보고 울면 어떡해.”

“미안하다고 하고 쿠키 줘. 만들어 온 거 남았잖아.”

내 가방으로 뻗은 손을 피했다. 서하림이 뭐냐고 물었다.

“그건 너 주려고 만든 거지 애들 주려고 만든 거 아니거든.”

“나 줬으면 그다음 주인인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간호사 선생님이랑 의사 선생님 보기 쪽팔려.”

“네가 치료받는 것도 아닌데 쪽팔릴 게 뭐 있어. 걸어서 10분 걸린대.”

“진짜 가?”

“그럼 가짜로 가겠냐?”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앞장선 서하림을 따라 걸었다. 쩔뚝이는 다리가 안쓰러워 업어 줄까 물어봤는데 거절당했다. 부축이라도 해주겠다는데 조금 까진 걸로 유난 떨지 말란다.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조금 늦춰 서하림의 속도에 맞췄다.

운 좋게도 소아과엔 아기들이 별로 없었다. 서하림이 왜 이렇게 한산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진찰실에 들어가자 의사 선생님은 서하림 보고 잘 찾아왔다고 칭찬해 주며 사탕을 손에 쥐여주었다. 하루에 깨진 무릎만 삼십 번은 보는 것 같다면서 이런 찰과상은 눈 감고 발로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학교에서 소독을 잘 해줘서 내가 할 게 없을 정도네. 샤워할 때 물 안 들어가게 조심해서 샤워하고 혹시 물 들어가도 폼 다시 붙이면 돼요. 안에 상처 쪽이 하얀색이 되면 갈아주고, 딱지 생기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간지럽거나 이상한 느낌 든다고 떼지 말고요. 3일 뒤에 봅시다.”

약국에서 폼을 산 서하림은 택시를 잡았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됐어. 너도 빨리 집 가서 쉬어.”

“밤도 샐 수 있는데.”

“아 됐다고요. 다리 안 부러졌다?”

서하림은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폼이 무릎을 거의 다 덮다시피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그럼 택시 타는 거 보고 갈게.”

“그래라.”

택시에 서하림을 태워 보내며 택시 번호를 카메라로 찍어 놨다. 누가 보면 대낮에 남고생을 납치하는 게 가능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지금 서하림은 다쳤고 그만큼 약했고 서하림 같은 애는 24시간이 위험하다. 돈 많은 집 애라 납치범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인질이고 생긴 것도 훌륭하니 누가 나쁜 맘 먹고 데려갈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진짜로 서하림은 어렸을 때 한 번 나쁜 아저씨 따라갔다가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다.

문득 그때 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대로 혼자 보내도 정말 괜찮았던 걸까? 택시가 현관문 너머까지 들어가진 않는데. 아니, 저 택시 기사는 좋은 사람일까? 범죄 경력이 없고 재정 상태도 괜찮으며 동료 기사들과 원활한 인간관계를 맺고 안락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라 토끼 같은 마누라와 자식들로 가정을 꾸리고 거기서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한 사람이라서 아침 첫 손님이 아무리 진상을 부리고 새벽 손님이 좆같아도 웃으며 털어 넘길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일까? 서하림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이겠지?

도착하면 연락하겠다는 서하림의 메시지가 올 때까지 나는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뜯을 손톱이 없어 살을 뜯어가고 있을 때야 서하림에게 연락이 왔다.

[도착〉

〈왜 이렇게 늦어 택시로 5분 거리잖아]

[옛날 과외쌤 만났어〉

〈그게 왜?]

[선생님 새 과외 구했대 우리집 근처 중학생〉

[무릎 다친 거 설명해주다가 늦음〉

〈알았어 오늘은 빨리 자]

[너도〉

긴장이 풀리자 맥도 함께 풀렸다. 오늘은 나도 택시를 타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상금 받은 게 많이 남아 있어서 오늘 같은 날 이 정도 사치는 부려도 괜찮았다. 택시에서 내리는 것만 아빠한테 들키지 않으면. 택시 탈 돈 있으면 지한테 달라고 하는 또라이 새끼라 나는 내 돈 주고 택시를 타도 혹시 몰라 집에서 좀 떨어진 은행에서 내려야 했다.

은행 위치를 설명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서하림의 상처가 눈앞에 선연하게 그려졌다. 아까 보건 선생님이 소독할 때랑 좀 전에 의사 선생님이 소독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빨간 피가 맺힌 무릎을 핥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누르느라 힘들었다. 민간요법 하나도 안 믿지만 상처에 침 묻히면 빨리 낫는다는 건 좀 과학적인 근거로 맞았으면 좋겠다. 왜 인간은 세균 덩어리여서 상처에 침을 바르면 안 되는 건지.

아빠 새끼가 밥 처먹은 흔적만이 날 반겨주었지만 평소처럼 설거지가 급한 게 아니었다. 나는 곧장 방으로 향해 문을 닫고 가방에 넣어둔 서하림의 파란색 티셔츠를 꺼내 코에 박았다. 땀도 잘 안 흘리는 게 땀에 젖는 거 싫다고 단체복 주문할 때 두 개 시켜서 점심시간에 갈아입은 것이었다. 다급하게 꺼내느라 티셔츠와 함께 끌려 나온 쿠키들이 발에 채였다.

서하림의 향과 땀 냄새가 섞여 굉장히 흥분됐다. 평소의 깨끗한 향도 좋지만 이렇게 땀 냄새가 섞이면 꼭…… 서하림과 섹스한다면 이런 묘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게 아닐까 하고 상상하기 딱 좋았다. 뽀송한 평소의 향은 사랑스러웠고 땀 냄새는 섹시했다.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얇은 손수건을 꺼내 성기를 감쌌다. 하림이의 얼굴과 목에 닿았던 거라 그런지 내 것에 닿아 따끈해지니 타인의 체온처럼 느껴졌다. 손수건을 접어 발기한 귀두 쪽을 약간 조이도록 감싸 꽉 묶었다. 반 정도밖에 감싸지지 않았지만 그게 더 좋았다. 입이 작은 하림이에게 박아 넣으면 딱 이 정도 들어갈 것 같아서 상상하는 데에는 아주 적당했다.

나는 땀으로 살짝 축축한 하림이의 티셔츠를 내내 핥고 싶었던 흰 무릎이라 상상하며 혀로 핥고 입안 가득 넣어 쭉쭉 빨아댔다.

혀끝을 세워 상처를 집요하게 파고들면 하림이는 아픈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간지러워 점점 자신이 고통과 함께 쾌락을 느끼는 것에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하림이의 피는 달았다. 피조차도. 비린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설탕을 탄 것처럼 달기만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어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들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이런 피라면, 이런 게 피라면, 이런 달콤한 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면 나 같아도 미쳐 돌아 목부터 물어뜯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빨간 눈의 뱀파이어라도 된 것처럼 하림이의 무릎을, 피를 볼이 패도록 빨아댔다. 혀로 뭉근하게 간질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픔뿐이던 신음에 점점 비음이 섞이기 시작할 때 나는 손을 뻗어 살짝 발기한 하림이의 것을 가볍게 쥐었다. 하림인 내 손목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기분 좋게 해줄게.’

‘시, 싫어.’

‘그럼 그냥 참으려고?’

‘아니이…… 내가 할게.’

울 것처럼 코끝이 빨개져서 믿지도 못할 말을 했다.

‘자위하는 법은 알아?’

‘저번에 동규 네가…… 해준 것처럼…….’

‘혼자 해본 적 없지.’

‘으응…….’

부끄러워서, 하고 작게 속삭이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하림인 성적으로 둔하고 느려서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됐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하림이의 성기를 찬찬히 흔들었다. 바로 신음이 쏟아졌다.

‘아, 자, 잠시만! 이거 말고, 차, 차라리…….’

‘차라리?’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아 있는 내 양 볼을 잡는다. 그리고 하림이는 토마토처럼 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붙여왔다. 닿자마자 떨어졌지만 나는 하림이의 뒷머리를 잡아채 강하게 당겼다. 놀랐는지 잔뜩 굳은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자 수줍게 입을 벌려주었다. 그 안에 숨겨진 젤리 같은 혀를 빨아올리자 입에 남아 있던 피 덕분인지 황홀경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먼저 입을 맞춰주는 깜찍한 짓을 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봐줘야지. 나는 굉장히 신사적이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중간고사 꼬리표가 나왔고 내 백일장 상장도 나왔다. 담임선생님들이 각 반에서 순서대로 꼬리표를 나눠주고 학생들이 분주하게 성적을 확인하는 동안 나는 시청각실에서 교장 선생님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얼른 가서 성적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살짝 숙이고 짝다리까지 했지만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상장과 장학증서를 받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시청각실을 나왔다. 교실 문을 열자 아무도 조례는 신경 쓰지도 않고 저마다 성적이나 등수 확인을 하느라 시끄러웠다.

“김동규, 꼬리표 받아가라. 기말 땐 좀 더 힘내야겠어.”

“네?”

작고 길쭉한 꼬리표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확인도 하기 전에 몇 번 꼬리표를 찢어 먹은 적이 있어 퍽 세심한 손길로 긴 종이를 잡아야 했다.

서하림은 친구들 반응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역시나인 것 같고. 그에 비해 나는 조금 미끄러져 꼬리표 제일 오른쪽 칸에 ‘9’가 적혀 있었다. 문제 풀 때 딱히 어렵거나 망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전교 등수가 한 손을 벗어난 게 오랜만이라 조금 충격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두 자리 수 될 뻔했다.

고작 하루 쉰다고 망할 일 없다고 한 게 무색했다. 분명 시험 난이도는 평소랑 같았고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떨어진 건 내 밑에 있던 애들이 올라갔다는 얘긴데…….

1교시가 시작됐다. 서하림 근방의 서하림 친구들과 같은 반 애들을 쭉 훑어보았다. 내가 알기론 전교생 중 서울시나 나라에서 등록금을 전액 지원해 주는 학비 지원 대상자가 열일곱 명이다. 그 말은 전교생 1250명 중 17명을 제외한 애들은 다 강남에서 그럭저럭 살거나 아주 잘 사는 집 애들이란 얘기였다. 그런 애들은 소수나 일대일로 진행되는 고액 과외를 받았고 그중에선 좆도 없는데 서하림 바로 아래에 바짝 붙어 있는 내가 아니꼬운 애들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돈을 부어도 나 하나 못 이길 머리면 효율성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자기가 돌대가리라고 받아들이면 될 걸 잘 사는 집 애들이라 그런지 같잖게 유치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유치하고 치졸한 애들과는 다르게 서하림은 생각하는 것도 늘 상냥했고 친절했으며 마치 귀족처럼 품위를 잃지도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데 차별이나 편견이 없어 봉사 활동할 때마다 담당자가 침이 닳도록 칭찬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싹싹해서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그렇게 서하림을 예뻐하기도 했고.

작년에는 서하림이 친구들이랑 어느 성당 안에 있는 보육원으로 봉사 활동을 갔는데 거기 아기들이 서하림이 떠날 때 울었다는 얘기도 있다.

잘나고 못나고, 나이가 많고 적고, 몸이 성하든 아니든 자신보다 못난 모든 이 앞에 서하림은 성스럽게 강림하는 존재였다.

펼쳐 둔 교과서 위로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일정한 소리가 났다. 종이 위로 툭툭 부딪히면서 나는 아주 작은 소리였다. 결국 또 그놈의 돈이다. 아빠 새끼가 그렇게 살지만 않는다면 나도 교실에 앉아 있는 다른 애들보단 못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고 케어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종종 적선하듯 비싼 학원의 문제집 같은 걸 가져다주는 서하림의 이모님에게 감사하다고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가끔 보는 서하림 부모님한테도.

왜인지 요 며칠 술을 처먹지 않아 얌전히 지내는 아빠를 떠올리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리고 얌전해진 아빠에게 고스란히 또 돈을 갖다 준 엄마를 생각하니 입안이 썼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수천 번은 얘기했다. 엄마 탓하긴 싫지만 언젠가는 아빠가 정신 차리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절실한 모양이었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렸을 적에 혹은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 새끼는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유명했던 선수였다. 나는 대체 엄마가 왜 아빠한테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납득이 안 갔다. 굳이 이해할 것을 찾아본다면 둘이 소꿉친구라 어릴 때부터 아빠의 선수 생활을 다 봐왔다는 거? 때론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하며 성장의 끝에 금메달을 차지 한 모든 순간을 함께해 와서?

그렇다고 해도 인간쓰레기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빨리 술 먹고 또 누구 쳐 패다가 죽여 버려서 합의 없이 감옥이나 갔으면 좋겠다. 이번에 가면 두 번째니까 평생 썩을 수 있을 것이다.

오전 수업 시간 내내 아빠 새끼를 저주하며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 선생님들이 기말고사에서 잘 보면 되지 않냐고 한마디씩 했다. 그걸 보고 서하림 친구들은 또 뭐라고 지들끼리 웅성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괜히 나 때문에 대화가 끊기면 안 되니까, 서둘러 일어나 교실을 빠져나왔다. 오늘 급식 뭐였지.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가 났기 때문에 급식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 학교는 휴대폰을 걷진 않는데 수업 시간에는 전원을 확실하게 꺼야 한다. 나는 귀찮아서 교문 지날 때 전원 꺼두고 점심시간에 잠깐 쓰고 끈 다음에 종례 끝나면 켜는 편이지만 다른 애들은 쉬는 시간마다 꼬박꼬박 전원을 켜고 수업 시간엔 껐다.

무음으로 해놔도 되겠지만 2년 전에 중간고사 보던 한 선배가 무음인 줄 알았다가 스팸 번호로 온 전화에 진동 울려서 좆 된 경우가 있어 한창 반항심 많을 고등학생들은 학교의 규칙을 착실히 따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도. 서하림 따라가느라 1점이 아까운 내 입장에선 알람이든 스팸이든 뭐든지 간에 시험 보는 중에 내 휴대폰이 울린단 상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전원을 켜자 환하게 웃으며 브이 하는 서하림이 날 반겨주었다. 이번 체육대회에 어떤 여자애가 찍은 거라는데 마침 딱 바람도 적당히 불어 흩날리는 머리가 파란 티셔츠와 함께 청량감을 상당히 더했다. 이런 사진들이라면 떼로 찍혔으면 좋겠단 마음이 들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이돌 기획사에서 서하림을 컨택 한 지 몇 년 됐다. 연예인도 아니고 일개 직원 주제에 유명하다는 대형 소속사 캐스팅 매니저가 작년 체육대회에 왔을 땐 여자애들 사이에서 소란이 났을 정도였다.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는 게 원칙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매니저는 우리 학교 졸업생이었다. 교장 선생님이랑도 잘 아는지 개회식부터 폐회식까지 하루 종일 있다 갔다.

그리고 결정타는 축제 때. 평일이지만 축제에 외부인이 들어올 수 있다 보니 유명인이라는 그 캐스팅 매니저가 서하림을 찾았다는 얘기가 돌면서 그걸 봤다는 중학생들끼리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한동안 서하림이 S인지 J인지 어디 연습생이 됐단 얘기가 돌았다. 바로 아니라며 서하림은 정정했지만 학교 밖에선 아직도 믿는 애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정은 목요일이 세성전, 금요일이 축제. 동아리가 워낙 많아서 크게 할 거라 생각은 했는데 생각보다 커서 놀랐고, 거기다 바로 전날 우리 학교가 S대부고 상대로 세성전을 이긴 상태라(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원정을 갔으니 성세전이지만) 서하림이 소속된 동아리 부스는 인산인해였다. 서하림은 정규 동아리로 기악부, 자율 동아리는 축구부에 속해 있다.

축구부에선 작년에 제3세계 어린이 축구 어쩌고에 기부를 하겠다며 프리허그 부스를 세웠는데 축구부 그 미친놈들이 말이 축구부 프리허그지 부스 안에는 서하림 경기 사진만 잔뜩 뽑아 붙여 놔서 사실상 서하림 프리허그 부스였다. 이날 서하림은 온갖 동물 귀가 붙은 머리띠를 써가며 프리허그로도 모자라 셀카도 삼백 장은 찍혔을 것이다.

나는 가위바위보를 져서 독서부 부스에 상주해 있어야 했지만 한 번씩 부스 밖으로 나가봐도 서하림 머리카락 하나 볼 수 없었다. 남자 새끼들이고 여자애들이고 할 거 없이 작은 축구부 부스를 터트릴 것처럼 채운 탓에 대기 줄까지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토끼 머리띠나 고양이 머리띠, 왕 리본 같은 걸 머리에 대롱대롱 단 서하림을 사진으로만 봐야 했다.

이따 예술제에서 기악부 오케스트라 공연도 해야 하는데 혼이란 혼은 다 팔린 서하림은 여자애들이 머리를 만져주는 내내 멍했다. 꽤 많이 피곤해 보이는 서하림을 뒤로하고 나는 그대로 택시를 타고 날아가 전날 미리 만들어둔 크레이프 케이크를 가져왔다. 생크림이 많은 걸 좋아하지만 너무 달지 않게, 서하림 입맛에 딱 맞게 만든 것이었다. 공연 끝나고 저녁 약속이 있다면서도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주면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려 잘만 받아먹었다.

‘리허설 시간 전에 기운 차려서 다행이다.’

‘단 거 먹으니까 힘 난다 진짜. 배불러 배불러. 세 조각 순삭이네.’

‘한 판 만들어 놨으니까 이따 저녁에 약속 끝나면 갖다 줄게. 원래 오늘 공연 끝날 때 주려고 만든 거야.’

축구부 부스에선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공연복인 교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가볍게 만져 이마가 보이는 서하림은 정말이지, 너무 잘생기고 멋있었다. 분명 전교생과 같은, 천삼백 명이 똑같이 입는 교복인데 서하림이 입었다고 캐주얼 정장 느낌이 나는 건 서하림이 특별하고 잘나서라고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대강당에서 진행된 예술제 세문의 밤은 처음으로 그 큰 강당이 미어터질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체육대회 이후로 퍼진 서하림이 연습생이 됐다는 소문이 제대로 한몫을 했다. 게다가 캐스팅 매니저라는 사람은 동아리 축제를 봤음 됐지 예술제까지 관람할 심산인지 바이올린 제일 앞자리에 서서 오케스트라 부원들 음을 맞춰주는 서하림을 사진으로 찍기까지 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랑 바이올린, 수채화, 도예, 태권도, 펜싱, 승마까지 온갖 것을 다 배운 서하림은 다 잘하지만 특히 바이올린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아니, 사실 피아노 실력도. 둘 중에 더 자주 연주하는 건 피아노. 그래서 오케스트라 입단할 때 왜 피아노가 아니고 바이올린을 했냐고 물어보니까 피아노는 너무 뒤나 구석에 있어서 싫다고 했다. 사실 이건 장난으로 한 말일 거다. 피아노는 한 자리밖에 없으니 착한 서하림은 저 대신 하고 싶어 하는 선배나 친구에게 기꺼이 양보할 애니까.

예쁜 서하림 사진 하나로 작년까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기분이 아주 롤러코스터를 탔다. 이래서 잘난 애를 좋아하면 문제다. 그것도 나보다 한참 잘난 애를. 나는 별 볼 것도 없는데 그 애는 언제나 빛이 나고 따뜻하며 모두에게 주목을 받고 사랑받으니까. 내가 뒤에서 음침한 어둠에 좀 먹히고 좀 먹히는 동안 서하림은 어쩌면 손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서하림 없이 살 수 있을까? 보지도 못하고?

가끔 진짜 병신 같은 거 알지만 나는 아주 강렬한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등굣길에 갑자기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서하림을 치고 가는 거다. 아니면 하림이가 택시를 타고 있는 중에 교통사고가 난다거나. 팔이나 다리 하나가 마비 또는 자르지 않고서는 큰일 나는 그런 병신 같은 생각. 신체에 장애가 생겨도 예쁘겠지만 지금처럼 이런 활동 저런 활동하기 힘들 테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전보단 힘들어지겠지.

머리가 부딪쳐서 백치가 돼도 좋다. 하림인 잘생겼고 예쁘니까 그야말로 백치미가 넘쳐 귀여울 것이다. 운동 잘하고 똑똑한 서하림도 너무 좋고 사랑하지만 내가 챙겨줘야만 하는 어딘가 결핍이 있는 하림이는 그 나름대로 꼴리는 구석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림이가 하반신 마비가 와서 나보고 평생 똥 기저귀 갈아주며 살라고 해도 나는 냉큼 그러마 하고 기꺼이 하림이의 바지를 벗길 것이다. 그러면 나는 존나 변태처럼 그 애의 대소변 냄새를 맡으며 발기하고 수치스러워하는 하림이를 달래며 사정하겠지.

잠에 들면 어차피 신경이 죽어 감각조차 느낄 수 없는 서하림의 것을 밤새 물고 빨 것이다. 허벅지를 모아 잡고 그 사이에 비비는 것도 좋겠다. 아니, 아예 뒤에 박아 넣으면 어떻게 될까? 신경이 죽어서 풀어져 있겠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만큼 깰 걱정 없이 맘 놓고 하림이의 아랫도리를 가지고 놀 수 있어 나는 행복해 뒤질지도 모른다.

병신 같지만 행복한 생각에 잠겨 기계적으로 숟가락질을 하는 도중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안 봐도 엄마였다. 연락하는 몇 안 되는 사람 모두 어플을 사용한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엄마만 유일하게 문자메시지를 이용해서 일부러 문자만 진동을 설정해 뒀다.

[엄마 주말에 쉬는 거 확정]

아빠한테 돈 준 거 때문에 뭐라고 했더니 무리하게 시간을 뺐나 보다. 새벽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면서.

[뭐 먹고 싶어?]

[없어]

[오늘부터 생각해서 골라]

아빠 새끼 합의금 때문에 빌린 돈이나 줘야 할 돈이 억 소리 나게 많을 뿐이지 빚 갚으라는 독촉에 허덕이는 건 아닌데도 엄마는 굳이 몸 힘든 일을 했다. 최대한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을 줄이고 집에 와서는 진짜 딱 잠자는 시간 외엔 할애하기가 싫은 것이다. 아예 일하는 곳에서 자고 오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아빠도 술집이나 아마도 노름판 같은 곳에서 술 처먹다가 거기서 자고 일어나 아침부터 술 먹고 낮술 먹고 저녁으로 또 술 먹고 거기서 자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주일에 한 삼 일 오면 집에 많이 들어오는 거다.

아침에 밥에다 국 없으면 지랄해대는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어서 엄마한테 아빠가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은 누가 아빠에게 아침밥을 차려주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럴 땐 아침에 해장국집 가서 해장국에 해장술을 사먹어’라고 했다. 해장술이라는 굉장히 모순적이고 해괴한 단어를 잘못 들은 줄 알았지만 인터넷에 쳐보니 정말로 국어사전에 있는 단어였다. 세상이 말세였다 진짜.

[갈비찜 해줘 소고기로]

일하는지 답장은 저녁을 먹고 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요리는 안 돼 아들이 나보다 훨씬 잘ㄹ 해서 무조건 외식]

아니라고 하기엔 궁중요리에 한번 도전해 볼까 하는 중이라 [ㅇㅇ]하고 답장했다.

“…….”

메시지를 입력하세요, 라고 적힌 빈칸에 ‘엄마 나 이번에 시험 좀 망’까지 썼다가 지웠다. 객관적으로 보면 9등이면 상위 2%라 망한 건 아니니까. 그냥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망했다고 느끼는 거지.

내세울 거라곤 평균보다 키 큰 거랑 그나마 강남 8학군에서 최상위권인 내신 성적과 요리 깨작대는 거 말곤 없어서. 알곤 있지만 새삼 내가 또 한심해졌다.

키야 내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난 거고.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학교 성적 하나인 건데 이러다 문득 수시 다 떨어지고 정시 준비하는 최악의 모습이 상상됐다. 문학 특기자로 갈 것도 아니라 상 받은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동아리 활동한 거 말곤 학생부도 텅텅 빈 나는 수능 최저 등급만 맞추는 데 아등바등했다.

아예 연관도 없고 다른 건 아니지만 나는 모의고사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신만큼 안 나와서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서하림은 대체 어떻게 둘 다 괴물같이 잘 보는지. 같이 공부를 하고 있지만 매번 믿기 힘들었다. 아무리 똑똑한 유전자 받아 태어났다고 해도 저 성적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평소처럼 본 나는 등수가 떨어졌으나 서하림은 1등에서 고정이니 현타가 오면서도 경외심이 들었다.

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열심히 처해야 한다는 것인가. 내 개인 시간도 여유도 접어두고, 평일과 주말이 다른 거라곤 학교에 가지 않는 것뿐인, 시험 끝난 날도 쉬긴커녕 교과서 펼쳐 놓고 다음 시험 준비하기 바쁘고 공휴일은 평소보다 고작 두 시간 더 자는 게 사치인데. 3년은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라 생각했다. 아니, 했었다.

처음으로 서하림과 같은 학교에 온 것이 후회됐다.

가끔 서하림은 해리포터에 나오는 헤르미온느를 떠올리게 만든다. 공부도 공분데 학교에서 하는 온갖 대회란 대회는 대부분 참여하는 데다가 동아리 활동도 무척 열심히라 옆에서 보는 내가 턱턱 숨이 막혔다. 그뿐인가. 올림피아드도 나간다. 유일하게 서하림이 하지 않는 걸 꼽으면 반장이나 학생회장? 근데 막상 또 기악부 현악부장은 하고 있다. 기악부 총괄 부장은 아니긴 한데.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를 40시간 정도로 사용하는 건 분명했다. 오늘도 토론 대회 결승이라 점심시간에도 한 손으로는 숟가락을, 다른 한 손으로는 A4용지 여러 장을 들고 밥을 먹었다. 저런 걸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서하림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라고는 하는데 내가 보기엔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다. 괜히 학생부 많이 본다고 대학들이 입을 털어 대서 몸 약한 애만 고생시키는 꼴이 아닌가. 하지만 걱정되고 안쓰러우면서도 누가 시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다 서하림이 자기 능력치 안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잘 할 거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잘하기도 하고.

얼른 돈 많이 벌어서 서하림 수학 연구소 하나 세워준 다음에 그 안에 꽁꽁 숨겨두고 서하림이 제일 좋아하는 것만 평생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매일 아침 내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점심엔 혼자 밥을 먹으면서 내게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해주고 저녁에는 또 내가 해준 근사한 저녁이나 종종 외식을 하면서 오늘은 무슨 수식을 연구했고 새로운 공식을 찾았고 하며 쫑알거리는 하림이 얘기를 들어주는 거다. 하림이가 대학 다니면서 눈여겨본 능력 있는 후배들을 스카우트해 오고 같이 팀을 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게 크게 성공해서 국제적으로 서하림 세 글자가 인정받고 또……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연구원들이 하림이에게 괜히 눈독 들이지 않도록 나는 매일 하얀 목덜미에 흔적을 남겨놔야겠지. 가끔은 밤새 괴롭혀서 울게 만든 다음 퉁퉁 부운 눈으로 출근하게 만들 거다. 못생겨졌다고 투덜대며 삐죽 나온 입술을 가볍게 빨아 키스하면서 그래도 예쁘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뭐, 내 상상 속 이야기다. 연구소 차려주는 건 가능성 있는 얘기지만 그 외에는 아니니까.

토론 대회 시작이 두 시라 두 교시 정도는 서하림이 자리를 비웠다. 서하림 하나 없다고 서른 명이 앉아 있는 교실이 텅 빈 것만 같다. 의자를 책상 안으로 밀어 넣어 정리해놓은 깔끔한 서하림의 자리를 보고 있자니 수업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애꿎은 형광펜을 돌려댔다. 필통도 괜히 한 번 뒤집어서 안에 든 걸 다 꺼냈다가 다시 넣고 교과서 ㅇ과 ㅁ을 샤프로 색칠하면서 빨리 수업이 끝나길 바랐다. 쉬는 시간에 강당 가면 서하림을 볼 수 있으니까.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던 시간이 지나고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강당으로 뛰어갔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기도 전이었다. 강당에선 토론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선생님 몇 명이 놀러 왔는지 문 옆에 서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조심스럽게 섰다. 방해가 되면 안 되기 때문에 학생들의 목소리 말곤 들리지 않았다.

전 학년이 골고루 섞인 서하림 팀의 1학년 애가 일어나 열심히 자기 의견을 말하는 중 상대 팀 3학년의 반론이 들어왔다. 1학년 애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종이를 뒤적거리며 대답할 내용을 찾았으나 잘 보이지 않는지 당황해하는 게 보였다. 그때 서하림이 일어나 1학년 애가 찾던 자료에 대해 술술 말하면서 3학년의 반론을 뒤집었다. 서하림의 책상은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종이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파일철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또 한 번 반한다. 서하림이 긴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눈을 깜빡거리기만 해도,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기만 해도 내 맘을 흔들어 놓기 충분한데 이렇게,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귓가에선 종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수업 종이 치자 나와 함께 토론을 보고 있던 선생님들이 얼른 교실로 돌아가라고 눈치를 줬다. 하는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강당을 나왔다. 심장이 너무 뛰어 아파왔다.

오늘처럼 수업 집중은 하나도 안 되고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 때문에 손에 잡히는 게 하나 없을 땐 의외로 제빵이 머리 환기시키는 데 좋다. 내가 서하림 하나 주기 위해 소량을 만들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솜털 무게인 1g의 단위까지 칼같이 재고 오븐에서 꺼낼 때 예쁘게 완성되는 걸 보면 아깝긴 하지만 시간도 금방 가고 뇌가 한 번 리프레쉬 되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 어제 초코 수플레 반죽을 오늘 먹을 것까지 만들어놨으니 수플레 먹으면서 다쿠아즈나 만드는 게 좋겠다. 생크림 대신 두부 크림으로 다쿠아즈를 만든 포스팅을 보고 괜찮겠다 싶어서. 인위적인 단맛, 혀가 녹아내릴 것 같이 강하게 단맛을 싫어하는 서하림이라 생크림 대신 고소한 맛이 나는 두부 크림은 어떻게 먹을지 궁금해졌다. 호불호가 좀 갈린다는데 코코넛 들어간 걸 잘 먹는 편이니 나쁘진 않을 거다.

디저트를 많이 달지 않게 만든다는 것부터가 굉장히 아이러니하지만 어쩌겠나. 젤리같이 예쁜 서하림 혀가 그렇다는데.

꾸덕하게 녹은 초콜릿을 품은 수플레를 혀 위에 올려놓는 상상을 했다. 너무 달고, 달아서 좋았다. 오늘처럼 심장이 뛰는 날 딱 걸맞은 디저트였다.

“왔냐? 밥 좀 차려라.”

하늘을 날던 기분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내가 항상 말했지. 밥통에 밥 비우지 말고 밑반찬 세 가지 이상이랑 국은 냉장고에 꼭 채워 넣으라고.”

쌀값이라도 주고 뭐라고 하든가 밥만 존나 축내는 주제에 뚫린 것도 입이라고 지껄이는 게 존나 없던 정도 떨어졌다.

“……냉장고 꾸진 거라 오래 넣어두면 상해.”

“너네 엄마 보고 좀 새로 사라 그래.”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은 없을 거다. 엄마 돈이 누구 때문에 줄줄 새는지 진짜 모르는 건가? 수플레는 고사하고 서하림 줄 것도 만들기는 글렀다. 쓰레기 새끼인 거 아니까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데 방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냉장고 가전제품 중에서도 존나 비싸.”

“존나?”

라면이라도 끓여달라고 할 생각이었는지 찬장 문을 세게 닫은 손엔 라면 봉지가 들려 있었다. 저렇게 세게 닫았다가 고장 나면 지가 고쳐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세게 닫은 건지.

“지금 아빠한테 존나라 했냐?”

아, 거기에 빡이 친 거구만. 정확히는 지한테 존나라 한 게 아니라 냉장고를 가리키며 말한 거지만 멍청한 새끼가 그걸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아니. 잘못 들었나 보지.”

“뭐야? 너 이 새끼 이리 와봐. 내가 뭐? 잘못 들어?”

나보고 오래놓고 지가 쿵쿵거리며 오는 꼴이 웃겼다. 씩씩거리며 손에 든 라면 봉지로 내 머리를 쳤다. 재떨이에 비하면 라면은 아주 말랑한 정도였다. 이 인간이 힘이 존나 세서 아프긴 아팠지만 이 정도는 견딜 만했다. 나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몸을 돌려 냉장고를 잡았다.

“재료 별로 없어. 대충 밥해 줄 테니까 밥 먹으려면 먹고 말 거면 말든가.”

“아빠가 간만에 집에 오셨으면 진수성찬을 차려줘도 모자란데 이 씨발 새끼가 어디서 싸가지없게 말하고 지랄이야 어?”

“싫음 안 하고.”

입만 털고 가만히 있으니 아빠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나는 아빠를 무서워하거나 쫄아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아빠가 행패를 부리고 지랄을 떨어대면 댈수록 하림이한테 보여 줄 상처가 많아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하림이가 날 보듬어주니까 이러고 있는 거다. 타고난 장골이라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사람이지만 해가 갈수록 말라가는 건 사실이었고 이젠 나보다 키도 작고 몸도 작았다.

올 초였나, 술에 꽐라 돼서 들어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로 밥 내놓으라고 하길래 자던 엄마에게 택시비를 쥐어 내보내고 처음으로 아빠한테 대들었다. 아니, 대들었다기보다는 음…… 아빠가 제정신이어도 겁낼 필요가 없겠구나 싶은 거? 아무리 술에 취해 있다고 해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건 아니었고 손 한 번에 넘어지고 쓰러질 사람이 아닌데 힘 싸움에 밀려 성질내는 걸 보니 웃겼다. 다음 날 아침 왜 자기 얼굴이 멍투성인지 기억을 못 하는 꼴도 웃겼다.

냉장고 안을 뒤적거리는 내 뒷목을 잡아채 끌어내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것 봐. 옛날 같았음 나 하나 땅에 던졌다고 헉헉댈 것도 없는데 숨을 크게 들이쉰다.

“요즘 안 맞았더니 아주 기어오르지 네가? 씨발 새끼, 진짜 넌 내가 진작에 죽일 수 있는 거 기껏 핏줄이라고 살려뒀는데 뭐가 잘났다고 아빠한테 어?”

내 위로 올라탄 아빠는 내 정수리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꽉 쥐어 잡았다. 그리고는 머리통째로 손을 올렸다가 세게 내리쳤다. 바닥에 정통으로 닿는 뒷머리가 존나 아팠다. 미친 새끼, 진짜 죽일 생각인가? 밥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주기적으로 밥 때문에 돌아버리는 게 이젠 애잔할 지경이었다.

“……알았어.”

“좆만아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씨발, 너 같은 건!”

술 냄새가 나지 않아 술은 안 마신 줄 알았는데 술 먹고 빡이 쳤다 싶으면 튀어나오는 자기가 옛날에 잘나가던 사람이었다는 레퍼토리가 나오는 걸 보아 마시긴 마셨나 보다. 뒷머리가 너무 아프고 골이 울리는 거 같아 나는 내 위에서 바락바락 성질을 내고 있던 아빠를 밀어냈다. 너무 손쉽게 밀려나서 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뭐야, 어?”

“밥 해다 바치겠다고요. 팔첩반상 하면 될 거 아냐.”

부은 건지 얼얼한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냉장고를 다시 연 내 뒤에서 당황한 아빠가 씩씩거리는 게 들렸다. 아. 실수했다. 아직은 아빠가 겁먹으면 안 되는데.

“죄송해요. 중간고사 망쳐서 좀 예민해서 말 나쁘게 했어요.”

연기에는 자신이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자의로 아빠랑 인연을 끊어도 될 때까진 날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이 사람이 필요하니까. 한없이 불행해야만, 불쌍한 자에게만 자비로운 구원자가 오니까. 마치 서하림처럼. 아랫니가 빠져 있어도 환하게 웃는 얼굴이 천사 같던 그 애처럼.

“…….”

바로 숙이고 들어오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씩씩대던 숨이 잦아든다.

“때리지 마. 진짜 아프고…… 아빠 힘 진짜 세서 한 대 맞아도 열 대 맞은 거 같아.”

“……알면 새끼야, 밥 제대로 해놓고 공부도 잘 좀 해. 망치긴 왜 망쳐? 돌대가리야? 그럴 거면 그 좋은 학교 왜 다녀?”

아 진짜, 뭐라 더 말할 의지가……. 바닥에 찧어서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아빠 새끼 때문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 좋은 학교 전액 장학금에 유일하게 용돈까지 받아가며 다닌다는 말을 너무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고 빨리 뭐라도 입에 물려 닥치게 하고 싶었다. 배부르면 기분이 좋아져 날 건들지 않으니 빨리 음식 해다 바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빨리 알콜의 힘을 빌려 사람 하나 처죽이고 감옥으로 꺼져줬으면.

[우리팀 3등함〉

〈잘했네 ㅊㅋㅊㅋ]

가스렌지에 밥 올려두고 서하림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새로 온 것도 없는데 그냥, 서하림이 필요해서. 잠금 화면, 배경 화면도 그렇지만 서하림과의 대화창 화면도 서하림의 사진이었다.

〈저녁 뭐 먹어]

〈나 지금 저녁 하는중]

뉴스 채널을 틀어놓은 아빠는 어디에 전화를 걸어 뭐라 뭐라 떠드느라 바빴다.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내 밑반찬들을 만들었다. 계란이랑 햄이랑 베이컨을 쓰니 여덟 가지가 금방 나왔다. 대충 겹쳐도 여덟 개만 채우면 되는 거 아닌가. 아빠 새끼 저녁 차려주고 아까 내 머리로 부순 라면을 주웠다. 기껏 차려놓고 왜 안 먹냐고 아빠가 물었지만 얼굴 마주 보고 먹기 싫어서란 대답 대신 어깨만 씰룩했다. 라면용 노란 냄비에 다 바스러진 라면을 끓이고 계란과 썰어 놓은 김치, 밥을 넣었다.

[그냥 밥〉

텀을 두고 온 답장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모티콘 하나 없는 세 글자가 이렇게 다정할 일인가. 서하림의 답장을 따라 말해보며 라면 죽을 먹었다. 뒷머리를 울리던 아픔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려 동영상 강의를 틀었다. 작은 방에 강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던가. 아니다. 5월은 백일장의 여왕이다. 문학이 봄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 온갖 백일장들이 셀 수 없이 열렸다. 나름 백일장 수상 이력이 화려한 나는 그중에서도 상금이 20만 원 이상이 되는 것들을 선별해 참가했다.

빅 이벤트들은 아무래도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특기자 인정 대회들 특히 대학교 백일장이나 통일부, 환경부, 국방부 뭐 이런 정부에서 여는 것들도 상금이 셌다. 당일 백일장이 아닌 경우에도 예선이 5월에 있으면 본선이 6월에 몰려 있었다. 주말은 한 달에 잘 해야 네다섯 번, 백일장은 그에 비해 몇 배나 되기 때문에 나는 굉장히 신중하게 상금을 노려 참가했다.

중학생 때야 상금이 고등학생부보다 반토막이니 많이 참여할수록 상금도 그만큼 많아지는 거라 진짜 열심히 참여했고 작년에도 별생각 없이 공부에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 상금만 있음 참여했다가 상을 쓸어가는 바람에 예고 학생들의 텃세와 눈총을 오지게 받았다.

당일 백일장이든 본선 백일장이든 많이 다녀보면 같이 다니는 무리들이 있는데, 우선 예고 문창과 애들. 문창과 있는 예고가 신설 포함 이제 한 손을 막 넘을 정도다 보니 학교 부심에 서로 견제가 장난이 아니다. 주말인데도 굳이 교복을 입고 온 몇십 명이 우루루 몰려와 열심히 떠들면서 글 쓰고, 집에 가는 길에도 지들끼리 누가 받을 거 같다느니 이번엔 어디 학교 누가 안 왔다느니 하기에 바빴다. 결과가 당일 발표되는 대회인 경우에 만약 자기 학교 애 중에 누가 수상을 했다 그러면 자존심 싸움하듯 이름 부르고 박수 치고 환호성이 엄청났다.

두 번째로는 창작 학원 애들 무리가 있다. 보통 인문계 다니는 애들이고 학원이 전국에 엄청나게 많아서 예고 애가 아닌데 세 명 이상이 뭉쳐 다닌다 하면 거의 학원 애들이 맞았다. 학원 애 중에서도 장원 받고 대상 받고 하는 경우가 많아 규모가 큰 곳은 예고와 견제 할 정도라고 들었다. 학원 애 중에서도 내 얼굴을 아는 애들은 좀 나를 신경 쓰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순수한 예술의 정신은 사라지고 대학 입시의 판이 되어버린 이 바닥에선 나처럼 외로운 도토리처럼 혼자 다니는 애들은 진짜 극소수라 눈에 띄기 좋았다. 혼자 다녀서 안 그래도 눈에 띄는데 등치도 산만 하고 거기다 자랑은 아닌데 상도 넙죽넙죽 받아가니까.

H대 정문 들어서자마자 지들끼리 얘기하던 예고 애들이 순간 조용해지며 나를 바라봤다. 예선으로 걸러진 건데도 꽤 많이 왔다. 아무래도 오늘도 텃세와 눈총을 오지게 받을 모양이었다. 하긴 나는 지난달 대학교 백일장에서만 지방 대학교를 포함해 장원 두 개 차상 한 개를 가져갔다. 상금 벌이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지난주 M대학교 백일장 본선에서도 차하였고 오늘도 본선 출전에 다음 주 D대학교도 본선 출전이다.

나는 몰랐는데 인터넷에 내 이름 치면 몇 개의 포스팅이 나온다고 담임선생님이 말해주었다. 문특 준비하느라 백일장 다니는 애 중에 몇몇이 블로그를 하고 있고 무슨 무슨 백일장 후기 글을 쓰면서 내 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욕 써 있어요?’

‘아니. 좋은 학교 다니는데 공부나 하지 왜 인류애 떨어지게 상 가져가냐, 분명 세문에서도 바닥 깔아줘서 대학 갈라고 백일장 다닐 거라는 글이 제일 기억에 남아.’

‘……그래요?’

‘우리 동규 전교 등수 알면 까무러칠 것 같아서 우리 아들 아이디로 댓글 달아 놨다.’

‘헐 왜 그런 짓을 해요?’

‘그 글 쓴 애야말로 학교에서 바닥 깔아주고 있는 거 같더라. 중학생 때부터 쓴 일기 보면 뭐, 수학 23점 나왔다고 좋아하던데.’

선생님은 포스팅에 댓글로 [얘 세문 전교 2등임]하고 댓글을 달았고 블로그 주인이 열등감에 답글을 아주아주 길게 달았다는 것까지 얘기해 주었다.

오늘은 외로운 도토리가 진짜로 나 하나뿐인가? 예고 애들 빼도 두 명씩, 세 명씩 다니는 게 죄다 학원 애들인 건지 혼자 돌아다니는 건 나뿐이었다. 2시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기도 했고 할 일도 없어 백일장이 진행되는 203호에서 나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어?”

“…….”

“너도?”

“……어.”

건물 뒤엔 교복을 입은 예고 애들 몇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흡연 구역 가서 당당하게 피우는 건데. 아니, 그냥 참을걸. 사복 입은 나를 학생이라 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징크스나 특별한 의식 같은 건 아닌데 백일장에 가면 백일장 열리는 곳에서 시작 전이든 후든 담배를 피우는 게 좋았다.

입시에 치이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상상해서 쓸 수 있는 경험이란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 학교 얘기에 많이 국한되어 있고, 심사 위원들은 비슷비슷한 이야기 중에서도 약간의 교훈성과 독보적으로 가슴 시린 감정에 절은 작품들을 좋아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화관 가서 국뽕 채우거나 눈물 흘리고 나오면 명작이라고 한다는 것과 비슷한 듯한데, 심사 위원들이 좋아할 만한 스토리는 완전 내 전공이었다. 매일 술에 취해 잠드는 아빠, 해가 뜨기도 전에 일하러 나가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잠드는 나, 알콜에 의지해야 하는 아빠를 동정하는 나 같은 걸 이리저리 다른 버전으로 쓰면 딱이었다.

“안녕.”

“어.”

“와, 너 담배 피우는 줄 몰랐다.”

입고 있는 교복은 디자인이 다른 걸로 네 개. 그중에 둘은 대표적인 라이벌 학교라 안 친한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별로 대답해 주기가 싫어 말없이 불을 붙였다. 화장실처럼 막힌 곳도 아니고 교복을 입고 필 생각을 하다니 약간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 같았다. 나처럼 장학금 탈락될까 봐 벌점 1점에도 벌벌 떠는 나약한 학생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나 너랑 얘기해 보고 싶었어.”

“나랑?”

“맨날 너는 혼자 다니고 근처만 가도 사람 팰 것처럼 보잖아.”

“아닌데.”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나도!”

“너 진짜 전교 2등이야?”

“세문고 존나 좋은 학교라며?”

“우리 큰아빠 너 선배야.”

“너네 학교 서하림 알아? 친해?”

“공부도 잘하는데 왜 백일장 다녀?”

“…….”

“야, 말 좀 해봐.”

대답 안 했다간 보내줄 것 같지가 않은 눈빛들이었다. 견제도 견제인데 궁금한 게 더 커보였다. 그래. 어차피 올해만 다니고 내년엔 안 다닐 거니까. 서하림 얘기만 피해서 대답을 하면 될 것 같다.

“작년 내내 전교 2등 하다가 이번에 망쳐서 떨어졌어. 9등.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학교에서 스카이랑 의대 존나 많이 가.”

“그럼 너는? 어디 가고 싶은데? 문특이면 C대나 D대 갈 거야?”

“아니 S대 공대 갈 건데.”

“대박.”

“그럼 왜 글 써?”

글 쓰는 거 아니고 너네처럼 예술 하려는 것도 아니고 상금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속물적인 것 같아 제일 있어 보이는 말을 하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얘네랑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굉장히 난감했다.

“박완서도 S대잖아.”

“어…… 그건 그렇지.”

“야, 아니야! 박완서는 국문과임!”

이 새끼들 그냥 순순히 넘어갈 생각이 진짜 없나 보다.

“음…… 광장 쓴 최인훈은 법학과야. 박완서랑 같은 학교. 성석제는 Y대 법학과, 김영하도 Y대 경영이고.”

“됐어 됐어. 알겠다. 니 존나 잘났다 됐지?”

내년엔 공부만 한다는 얘기는 굳이 안 해도 되겠지. 방학에 캠프까지 가는 제일 큰 대회에서 대상 못 받으면 내년에 그것만 다시 나갈 거니까.

“또 뭐 나가냐?”

“다음 주에 D대 본선이랑 다음 달 S예대랑 P대 백일장 신청했고 아, K대랑 C예대하고 D그룹 문학상 예선 낼 거 쓰는 중이야. N대 예선 낼 건 다 썼어.”

“와 너 진짜 천잰가 보다.”

“우리도 그렇게는 다 참가 못 해.”

“근데 나도 내가 쓰기만 하면 상 존나 받는데 나 같아도 다 참여할 듯.”

“그 전에 예선작품 쓰다가 말라 죽을걸.”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면 못 할 것도 없다. 예선 있는 것들은 죄다 시로 참여하고 당일치기 백일장들은 시보다 자신 있는 산문으로 참여하면 효율도 좋았다. 천재는 아니지만 적당한 재능이 있는데 썩히는 것도 아깝고. 어느덧 부러움의 눈빛으로 변한 예고 애들이 좀 부담스러웠다. 담배를 비벼 끈 뒤 휴지통에 꽁초를 버렸다.

“먼저 간다.”

이따 보자며 손들을 흔드는 걸 보니 앞으로도 아는 척을 하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들었다. 평소에 사람 팰 것 같은 표정 짓고 다닌 적은 없는데 신경 써서 그런 표정을 짓고 다녀야겠다. 서하림 얘기를 더 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 중 하나가 남에게서 서하림 이야기 듣는 거였다. 서하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뭐 하나라도 캐내려고 하는 것도 싫고 나도 아까워서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는 걸 지들이 뭐라고 가십거리처럼 입에 올리는 것도 싫다.

연예인이고 아이돌이고 데뷔도 안 했는데도 이 정도인데 진짜로 데뷔했다간 열 받아 뒤질지도 모른다. 진짜 천만다행으로 서하림이 그런 거에 관심도 없고 서하림 부모님도 반대하는 입장이라 망정이지 서하림 성격에 그 얼굴에 만약 관심 있었으면 진작에 데뷔해서 천만 영화를 찍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시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휴대폰 잠금 버튼을 눌러 해맑게 웃는 서하림의 사진 위로 입을 맞췄다. 그 덕분인지 일주일 뒤 학교와 내게 연락이 왔다.

[-H대학교 백일장 수상 안내- 세문고등학교 김동규 학생의 운문부 장원 수상을 축하합니다! 시상식 안내 : X월 X일 X시 과기대 1동 소강당 (*수상자는 본교 문예창작과에 입학 시 소정의 장학금이 지급됩니다. 그 외 자세한 사항은 공문을 참고하세요)]

“다섯 개씩 가져오라니까.”

“그러고 싶었는데요 솔직히 5월 백일장 너무 많았어요. 6월도요.”

“그래도 이건 뭐, 상장으로 책도 만들겠네. 상금도 봐라. 어휴, 우리 아들도 당장 글 쓰라고 해야겠다. 근데 백일장에 이렇게 많이 참여하는 게 가능한 일이니?”

“직접 간 건 대학교 백일장밖에 없고 나머지는 온라인으로 보내는 공모전이에요.”

“아니 그래도 이야…….”

받아야 할 상장이 너무 많아도 탈이다. 다섯 개 쌓이면 한 번에 가져와서 며칠 뒤 교장 선생님이 학교에 있을 때 다섯 개를 한꺼번에 받는 식인데 이번엔 하도 받으니까 귀찮아서 두 달 치를 모아 가져왔다. 공부한다고 시상식에 참가 못 해서 학교로 받은 것들도 있었다.

“너 진짜 공대 간다고?”

“네.”

“우리나라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인재를 잃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대한민국 공학사에 길이 남을 인재가 될 생각인데요.”

“그래 뭐, 학과가 뭔 소용이냐. 요즘은 개나 소나 다 글 쓰고 책도 내더만.”

“…….”

“알겠다, 가 봐. 수고했다. 기말고사 준비 잘 하고.”

나름대로 준비 잘 하고 있긴 한데 이번 학기는 포기했다. 2등은 좀 힘들 것 같고 4% 수성이 목표다. 어차피 2학기 땐 나갈 백일장도 없다. 9월에 있는 U예대 백일장은 예선은 통과했지만 두 달간 상금을 생각보다 많이 모아서 차라리 거기 갈 시간에 공부하는 게 나은 거 같고 10월에 S대 백일장도 있긴 한데 거긴 작년에 이미 장원 받아서 당일 날 문학의 신이 빙의를 한다고 해도 상을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솔직하게 두 자리 등수는 좀 자존심 상하는데 4%면 15등까지니까 나름 데드라인도 정했다. 15등. 서하림에게도 15등 넘어가면 소원 세 개나 들어주기로 했다. 근데 아무리 망해도 10등 밖으로는 안 밀려날 자신이 있었다. 내 위로 올라간 일곱 명이 나보다 월등히 잘해서 올라간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최상위권은 1점짜리 문제 하나로 등수가 바뀌는 곳이라 실수만 줄여도 중간고사보단 나을 것이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과외 늦는 거 아니야?”

“아니, 몇 분 기다리지도 않았어.”

방과 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서하림의 시간을 매일 함께할 수 있는 시험 전 3주. 시험 기간 유일한 낙을 꼽으라면 잠옷 세트를 입은 서하림과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걸 꼽을 수 있다.

단정하고 정갈한 교복이 제 몸처럼 잘 어울리는 서하림이지만 교복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인지 서하림이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옷부터 갈아입는 것이었다. 다 벗고 팬티만 입고 자는 나완 다르게 더위를 잘 타지 않고 방도 덥지 않아 긴팔 긴바지의 잠옷을 입는다. 이모님이 다양한 디자인과 여러 가지 색깔의 잠옷을 사둔 것 같은데 제일 자주 입는 건 깔끔한 디자인과 남색이었다.

거기다 잘 땐 귀엽게 수면 모자도 쓰고 안대도 낀다. 모자는 태어날 때부터 해왔기 때문에 쓰고 자야 안정감이 느껴져서 깊게 잘 수 있고 안대는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잠을 못 자기 때문이란다. 수면 모자에 안대까지 끼고 누워 있는 서하림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북유럽에 있다는 어디 왕족의 왕자님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서 집에 오면 잠옷 입는 건 알았는데 수면 모자에 안대 세트까지 있다는 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동규야 근데 나 졸린데.’

서하림이 전날 공부 끝나고 친구랑 늦게까지 메시지 주고받다가 늦잠을 잔 바람에 학교에서부터 많이 피곤해하던 작년의 어느 날이었다. 서하림은 피곤함이 지나치면 일시적으로 시력이 떨어져 그때마다 안경을 쓴다. 평소 잠을 많이 자는 편이라 안경을 쓰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이날은 아침부터 종일 안경을 끼고 있던 날이기도 했다.

‘응, 먼저 자. 자리 옮길게.’

‘아니 안 그래도 돼. 공부하다가 집에 갈 때 불만 꺼줘.’

‘응. 그럴게.’

자기 집, 자기 방이라 그냥 자면 될 텐데 서하림은 문제집과 노트들, 안경까지 다 정리하고도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어, 나 잘 때 음, 웃지 마.’

‘코 골아?’

‘아니.’

‘그럼 이 갈아?’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럼…… 막 혼잣말? 좀 무서운데.’

‘죽을래?’

‘뭔데.’

‘그냥…… 나 모자 쓰고 자.’

‘모자?’

베개 옆에서 가져온 세모 모양의 모자를 보고 솔직히 함박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안대는 뭐 그렇다 치겠는데 방울까지 달린 모자가.

‘아니 이게 어린이만 쓰는 거 아니고 연예인들도 헤어스타일 망칠까 봐 쓰고 잔대. 그리고 어른들 중에서도 요즘에 추우니까, 머리로 체온 많이 빠져나가는 거 알지?’

‘지금 여름인데.’

‘그러니까 여름이라 다들 에어컨 틀고 춥게 자잖아. 우리나라 여름마다 전력 소모 엄청나다고 뉴스도 많이 나오잖아.’

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진짜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를 꽉 깨물고 뭐라고 더 얘기하는지 끝까지 들어주었다. 결론은 아기 때부터 쓴 거라 평온함을 느낀단 거였고.

‘써. 난 그럼 공부한다.’

‘어어, 그래 그럼.’

전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놀림을 당한 적이 있는지 한참을 설명해 주던 서하림은 싱거운 내 반응에 머쓱해했다. 문제를 푼다고 푸는데 바스락거리며 모자와 안대를 쓰는 소리가 들려 문제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빨리 고개를 들어 수면 모자를 쓴 서하림이 보고 싶었다. 서하림은 머리만 닿으면 잠에 드니까 한 5분만 기다리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던 때였다.

‘김동규.’

‘어, 어?’

‘나 잔다.’

마스크처럼 안대를 턱에 걸쳐 놓고 수면 모자를 쓴 서하림은 시각적인 충격이 올 정도로 귀여웠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위아래로 가려져 있으니 더 작아 보였는데 저렇게 예쁘고 귀여운 걸 어떤 새끼가 놀린 건지, 찾아내서 조져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먼저 자서 미안.’

‘……아니야.’

‘진짜 잔다. 내일 봐.’

친구는 공부하게 두고 혼자 자는 게 많이 미안했는지 인사를 해놓고도 서하림은 열댓 번은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곧바로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터진 코피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건 만화에서나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가능한 일이라는 걸 몸소 깨달았다.

그 와중에 잠든 서하림 옆으로 기어가 딸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귀가 어두워 깨진 않았지만 혹시라도 서하림이 깰지도 모른다는 스릴감에, 서하림 향이 가득한 서하림의 방에서 잠자는 서하림 얼굴을 아래에 두고 자위를 할 수 있다는 게 엄청나게 흥분돼서 네 번이나 쌌다.

특히 안대 때문에 눈이 안 보여서 그런지 아니면 입이 도드라져 보여서 그런지 서하림 입에 내 걸 물려놓은 상상에선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가 깜짝 놀랐다. 쿠키 반죽에 수면제를 넣으면 열에 효과가 날아갈 것 같아 푸딩이나 생크림에 넣어야 하는 건가 따위를 생각하다가 비린 거 진짜 못 먹는 서하림이 착하게도 꾸역꾸역 내 걸 물고 결국엔 정액까지 삼켜주는 상상으로까지 넘어가자 나도 모르게 변태 같은 소리가 나가 버렸다.

그때 풀던 문제집에 코피 한 방울이 떨어졌는데 아직도 버리지 않고 소장 중이다. 기념이라고나 할까. 죽을 때 같이 묻어 달라 할 여러 가지 물품 중에 그 문제집도 포함이었다.

그날 이후로 서하림은 아예 그냥 잠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수면 모자랑 안대도 그냥 같이 장착했다. 보는 나야 눈이 즐거우니 공부하는 데 최고의 낙이 아닐 수 없었다. 서하림이 좋다고 따라다니는 수많은 여자애 중에 이런 서하림의 모습을 아는 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존나 좋았다. 나중에 대학교 가서 술 먹게 되면 서하림 잔뜩 먹여놓고 대체 누가 너의 이 귀여운 잠옷 세트를 보고 웃은 건지 캐낼 생각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머리를 깨놓든지 해야지.

시험 기간이면 잠자는 시간을 있는 대로 줄이며 잔뜩 예민해지는 나완 달리 서하림은 잠도 평소대로 푹 자고, 시험지를 받아도 불안해하지 않고 무난히 시험을 쳤다. 서하림에게 무난하다는 건 만점에 가깝다는 뜻이었기에 매일 시험 끝나고 반장이 교무실에서 정답 종이 가져와 정답을 불러줘도 다른 애들처럼 채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서하림은 많이 틀려봐야 전 과목 토탈 다섯 개를 넘지 않으니까 동그라미 치기도 귀찮다는 게 이유였다.

서하림과는 반대로 동그라미를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고 싶은 나는 반장이 부르는 숫자를 따라 열심히 채점했다. 동그라미 밭에서 직선 칠 일 생길까 봐 마음 졸이던 게 무색하도록 이번 시험은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본 모든 시험 중에 제일 결과가 좋았다. 생각도 못 했는데 객관식에서 틀린 문제가 하나도 없을 줄이야. 단답형 주관식도 다 맞았다. 어제까진 어라 싶었지만 마지막 날까지 이러니까 이러다 다시 2위를 탈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채점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가방을 챙겼다. 문이과 통합이긴 해도 학교가 이과 중심 학교인가 그래서 늘 시험 막판에 과학과 수학이 들어가 있는데 이번엔 과학, 수학에서 1점도 밀리기 싫어서 잠에 드는 시간이 자꾸만 늦어졌다.

심지어 제일 공들인 수학 때문에 어제는 새벽 세 시 넘어서 잤다. 아 12시 넘었으니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구나. 아무튼 오늘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잠이 너무 절실했다. 오답 노트가 닳을 정도로 보고 또 본 걸로도 모자라서 배게 아래에 깔아놓고 누웠는데, 불안해서 다시 펴서 보고 눈 감았다가 또다시 펴서 보느라 바빴다. 아침 해를 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아무튼 존나 피곤해서 귀신처럼 교실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꿀 같은 잠에 들길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또 뭐가 깨지고 욕하는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떠야 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밖은 아직 밝았다.

또 뭔 지랄을 하길래 이렇게 요란스러운지 방문을 열었다가 나도 모르게 뛰어가 아빠에게 주먹을 날렸다.

“아들이 집에 있었어?”

“엄마, 엄마 괜찮아?”

바닥을 구른 아빠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나는 아빠가 들고 있던 식칼을 뺏어 창밖으로 던졌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길 바랐지만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맨손으로 잡지 않고 교복 셔츠로 손잡이를 둘렀으니 아빠 지문만 나올 테니까. 엄마는 다행히 의식을 잃은 건 아니었으나 이미 아빠에게 얻어맞은 곳이 많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집에 온 게 오전 10시 반이었고 오자마자 잠들었으니 못해도 11시나 그즈음엔 집에 나 혼자였다. 잠결에 여러 남자의 소리를 들었고 굴러다니는 술병 수를 세어보니 아빠가 친구들을 데려와 술을 먹은 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된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 아빠나 친구들이나 다 제정신은 아닌 것처럼 취해 보이는데 그렇다는 건 어디서 먹고 이미 취한 상태로 집에 왔다는 게 된다.

“이 씨발 새끼, 내가 오늘 너 죽인다.”

“미친 거 아니야? 진짜로 사람 죽이게? 와…….”

“너 이 새끼 아빠한테 미친놈이라고, 씨발 너 이리와! 너 죽고 나 죽자.”

“김 형, 이제 그만 해.”

내 멱살을 잡은 아빠를 친구들이 말렸으나 전부 아빠보다 마른 아저씨들이라 아빠의 행패를 말리질 못했다. 나는 힘을 줘 아빠의 손을 쳐낸 뒤 휴지를 가져와 엄마의 피를 닦아주고 상처를 지혈했다.

“취했으면 술이나 곱게 처마시지 엄마는 왜 때려.”

“뭐야? 이 애미 없는 새끼가 어디서 아빠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말은 바로 해야지. 애미 없는 새끼가 아니라 애비 없는 새낀데.”

“뭐, 뭐?”

“됐어. 학교에서 애들이 나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서 뭐 하게. 엄마, 일어나 봐. 일어날 수 있겠어?”

“이, 이 호로 새끼가!”

씩씩거리던 아빠는 굴러다니던 술병을 들어 내게 휘둘렀다. 힘은 센데 속도가 느려서 피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으나 머리 대신 팔을 맞았다. 아프긴 한데 소리 내긴 싫어서 입술을 깨물었더니 엄마의 비명이 집안에 울렸다.

“하지 마! 동규는 때리지 말라고 그랬잖아!”

“저 새끼 말하는 거 듣고도 참으라고? 애새끼는 맞아야 말을 듣지!”

“알았어! 이혼해! 해주면 되잖아!”

두 팔로 다시 머리를 감싸기 무섭게 터져 나온 엄마의 말에 아빠도 나도 얼어붙었다. 이혼? 둘 사이에 이혼 얘기가 돌았었는지 아빠는 들고 있던 소주병을 내려놓으며 변태처럼 웃었다.

“집 계약서랑 통장도.”

“……지금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

“뭐야, 집에 있었어? 아무리 뒤져도 없었는데.”

엄마는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내 방에 어디 숨길 곳이 있던가? 갑자기 두 사람의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기도 힘들고 팔은 욱신거려왔다. 아빠 새끼와 엄마 말고도 여기 있는 아저씨들도 다 알고 있던 이야기인 건지 나 혼자 병신이 된 것 같았다.

“뭘 꼬라보냐.”

꼬라본 게 아니라 궁금해서 뭐라도 말해보란 거였는데 괜히 한 대 맞았다. 아빠 친구들은 지들끼리 웅성거리며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방에서 나온 엄마는 달달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면서 누런 봉투와 통장을 집어던졌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

아빠 새끼에게 던져준 통장 잔고가 꽤 컸는지 친구들이 더 난리를 치며 좋아했다. 나도 방에 들어가 지갑을 챙겨 나왔다. 비틀거리는 엄마를 부축하고 택시를 잡았다. 근처 응급실 있는 큰 병원에 가 달라는 내 말에 택시 기사가 엄마를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우리 둘 다 무시했다.

“이혼은 뭔 얘기야.”

“새 사랑을 찾으셨단다. 몰라 나도. 그 답 없는 인간. 나는 너 성인 때까지는 버틸 생각이었고 최근에 몇 달이나 술도 안 먹고…… 정신 차린 줄 알았지.”

“아 잠깐만. 아저씨 설마 S병원가요?”

“네.”

“저 S병원 말고 다른 병원으로 가주세요.”

“바로 앞인데요?”

“딴 데 없을까요.”

“그럼 C병원 갑니다. 10분쯤 걸려요.”

“네 감사합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병원엔 서하림네 아저씨가 일하고 있기 때문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벌써 퇴근하고 집에 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통장은 또 뭔데?”

“몰라. 대학 등록금은 아니니까 걱정 마.”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등록금은 내가 장학금 받았고, 받는다고 했지.”

“도착하면 깨워.”

엄마는 기껏해야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뭘 자보겠다고 눈을 감아버렸다. 작은 두 손이 잘게 떨리고 있어 나도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나도 졸업부터 하면 엄마한테 이혼 얘기 꺼내봐야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기에 굉장히 당황한 상태였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아빠한테 드디어 손을 터는 건 기뻤다. 그러면 아직 한참 남은 온갖 합의금이나 아빠 뒤처리하느라 빌린 돈들도 엄마가 아닌 아빠가 갚는 거겠지. 감방 가기 싫으면.

“환자분, 옆에 분이 보호자 맞아요?”

“네. 아들이에요.”

“아들분은 몇 살이에요.”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그냥 어디 부러진 것도 없으니까 치료만 해주시면.”

“고2면 열여덟 살인가요? 만19세 안 됐으면 보호자가 될 수 없거든요.”

눈이 부어 한쪽은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엄마의 상태를 보고 의사가 경찰을 부른다고 했으나 엄마가 그를 뜯어말렸다.

“이거 아무리 봐도 아빠 짓인 것 같은데 진짜 괜찮겠어요?”

엄마를 치료한 뒤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내게 시선을 돌린 의사가 물었다. 나는 대학교 합격하면 아빠를 신고하려고 증거들을 다 모아놨다고 몇 번째인지 모를 설득을 해야만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아무런 말도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는 부러진 곳은 없지만 수액 다 맞고 안정을 좀 취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고, 나는 뼈에 금이 가서 붕대를 둘러야 했다. 이왕 병원 온 김에 나도 수액 좀 처방해 달라고 했다. 시험공부하느라 너무 힘들었다니까 의사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무과에서 수납을 하고 오니 엄마는 아직도 잠에 들지 않고 누군가와 전화를 하다 막 끊은 참이었다.

“자. 잠을 자야 세포들이 재생되지.”

“엄마야 아빠야.”

“뭐?”

“엄마랑 살지 아빠랑 살지 골라야 하잖아.”

“…….”

엄마라고 얘기해야 하는 타이밍인가? 하지만 아빠는 아직 버릴 수 없는 카드고 우리 집은 서하림 집까지 걸어서 한 시간도 안 걸리고 학교도 바로 가는 버스를 타면 30분이면 갈 수 있다. 잘은 모르지만 집도 서하림 이모님의 아는 분이 싸게 팔아주셨다고 들었고 또 가고 싶은 학교에 합격하면 집에서 지하철로 한 번에도 갈 수 있고 또…….

뭐가 뭔지 머리가 혼란스럽다. 왜 갑자기 이렇게 안 좋은 일들이 한꺼번에 순식간에 떠밀려 들이닥치는 걸까.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를 해봐도 자꾸만 타임라인이 뒤섞였다. 천재까진 못 돼도 돌대가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서하림이 보고 싶다. 보고 싶어.

왜 사람은 때가 되면 음식물을 섭취해야 하고 먹지 못하면 배가 고픈 것이며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몇 시간을 있어도 소변이 마려운 걸까.

그냥 쥐 죽은 듯 침대에 누워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시간을 보낼 순 없나? 기면증이나 식물인간 상태가 아니라면 왜 아무리 자도 스무 시간이나 서른 시간 남짓밖에 잘 수 없는 거지?

돈을 많이 벌어서, 존나 많이 떼돈을 벌어서 사람의 내장을 기계화시킬 수 있는 사업에 투자를 할 거다. 내가 죽기 전에 임상 실험도 다 끝날 수 있게 연구자들을 쪼고 쪼아서 성공적으로 연구가 끝나면 내 몸에 이식을 하고.

근데 그러면 나는 사이보그인가? 반쪽짜리 인간이라고 해야 맞는 걸까 아니면 반쪽짜리 사이보그가 맞는 걸까. 둘 중에 뭐가 더 철학적으로 맞는 말이고 뭐가 더 과학적으로 가까운 말이지? 인간 동력의 가장 중요한 심장이 기계면 사이보그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가도 나를 이루는 근간인 뇌는 기계가 아닐 테니까 사람이라고 해야 맞는 거겠지…….

같은 시답잖은 생각들을 하느라 하루를 통으로 날렸다. 학교엔 가지 않았다. 어제 엄마에겐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부탁했다. 아파서 내일은 학교 못 가고 아예 이번 주 내내 못 갈 수도 있다고. 내 얘길 듣고 엄마는 바로 전화를 해주었다.

병원에서 엄마랑 둘 다 수액을 모두 맞을 때까지 한 시간쯤 잠에 들었다가 헤어졌다. 어디 가냐니까 같이 일하는 아줌마 집에서 잔다고 했다.

집에 오니 아빠 새끼와 친구들은 없었고 기대도 안 했지만 난장판 된 집은 정리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아 그냥 방으로 들어가 잘 생각으로 누웠다. 어제 아빠 때문에 예상 기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깨기도 했고 난리통에 기운이 다 빠져 행복한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침대에 누우니 땀으로 축축한 티셔츠가 신경 쓰여 누운 채로 꾸물꾸물거리며 벗어 던졌다.

눈을 감고 시계 초침 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밥을 마지막으로 먹었지…… 수학 보던 날 아침이니까 오늘 아침. 두 끼나 거른 셈이라 허한 느낌이 상당했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뭐라도 시켜 먹을까 했는데 주머니에서 휴대폰 꺼내기도 귀찮았다. 잠자면 배고픈 것도 잊혀지겠지.

그렇게 자고 깨어난 건 열다섯 시간 뒤였고 일어나 뭐 먹기 귀찮다는 이유로 배고픈 걸 참아가며 위와 장을 포함한 장기들을 기계화시킨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나 했다.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베개 근처에 놔둔 보조배터리와 휴대폰을 연결했다. 방전되어있던 휴대폰에 전원이 들어왔고 담임선생님의 부재중 통화와 문자가 떴다.

[내일도 아파서 못 올 거 같으면 문자 해라. 담임쌤]

학교 끝나는 시간에 온 문자였다. 지금 시간은 어제 그 지랄 때문에 깨어난 시간과 얼추 비슷했다. 덧없고 허망하게 흘러간 스물네 시간이었다. 일분일초가 아까워 죽겠는 내 인생에 이토록 의미 없이 보낸 하루가 있었던가.

[저기... 많이 아파?〉

서하림에게서도 메시지가 와 있었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다. 깁스를 한 팔이랑 얻어맞은 볼이 좀 욱신거리긴 하는데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거짓말을 한 셈이 되어 미안했다.

‘저기!’

하얀 말풍선 속 걱정을 담은 짤막한 문장 하나는 소중히 간직해 둔 기억을 떠올리기에 아주 좋았다. 너무 자주 꺼냈다간 왜곡이 될까 봐 때가 탈까 봐 나도 잘 회상하지 않는 그 기억을.

‘저기, 잠깐만!’

아홉 살.

그날은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높고 아주 새파랬다. 어제는 아빠가 또 밥그릇을 던지고 리모컨을 던지고 벽에 걸려 있던 액자도 던졌다. 처음으로 엄마가 맞아 죽으면 어쩌나 너무 무서웠다. 온몸에 화가 난 아빠를 간신히 울며불며 달랜 엄마가 기절하듯 나와 함께 잠들었지만 엄마가 다신 못 일어날까 봐 짧은 9년 인생에 뜬 눈으로 잠을 새운 첫 번째 날이기도 했다. 계란이 멍 빼는 데 좋다는 걸 난생처음 안 날이었고 학교에선 이따 끝나고 집에 갔다가 아빠에게 진짜로 얻어맞아 우리 둘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급식도 몇 입 먹지 못했던, 그런 날이었다.

‘야! 김동규!’

청아한 그 애의 목소리로 불린 내 이름은 무척이나 낯설었고 내가 알던 이름 같지 않아서, 나는 저게 내 이름이라고 인식도 하지 못한 채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김! 동! 규!’

나는 서하림이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부르는 줄로만 알았다. 저게 내 이름이 맞나 싶어 한껏 의아해하며 걸음을 멈췄다. 몸을 돌리기도 전에 작은 머리통이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별이 박힌 커다란 눈과 처음 마주했을 때 서하림은 그야말로 온 세상 빛을 끌어안은 천사님, 아니, 그보다 더…….

동공이 강제로 확장되는 이상한 느낌과 온몸의 피가 심장으로 몰리는 생경함을 경험했던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순간의 서하림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나?’

‘그럼 김동규가 너지 다른 애야?’

같은 반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척 예쁘고 잘생겼고 하얗고 조그맣다는 것도, 그래서 우리 반 여자애들이 전부 서하림을 좋아하고 반장보다 더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까지. 나는 2학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전학을 왔기 때문에 반 친구들이랑은 서먹했다. 고작 2학년인데 키나 덩치는 6학년만큼 커서 말도 없고 땅만 보고 다니는 내게 말을 걸어주는 애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요정 같은 얼굴로 눈길을 쉽게 끄는 서하림이었지만 멀리서 가끔 지켜만 볼 뿐 나는 수업 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책상에 코를 박고 낙서를 하거나 교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읽던 반 친구 25 정도의 존재였다.

‘와 너 진짜 걸음 빠르다! 키가 커서 그런가 봐.’

‘…….’

‘나는 서하림이야. 너는 25번 김동규지?’

‘응.’

또 저 예쁜 목소리로 내 이름이 불렸다. 내 이름이 이렇게 예쁜 이름이었나? 나는 서하림의 목소리에 홀린 것처럼 그 애가 불러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재생시키고 또 재생시켰다.

‘저기, 많이 아파?’

‘……어?’

‘아니 어제도 아프다고 학교 안 나오고 지금도 얼굴이 빨개서. 혹시 열 있나?’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온 서하림에게서는 좋은 냄새도 났다. 시각, 청각도 모자라 후각까지 충격적인 자극에 절여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서하림은 손을 뻗어 내 이마까지 짚었다. 순간 서늘한 가을바람이 무색하게 이마에 열이 몰려 머리통이고 이마고 땀이 폭발하고 말았다.

‘미열……인가? 뜨겁진 않은데.’

서하림은 손마저도 말랑했다. 그리고 약간 차가웠다. 나머지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은 서하림은 나와 자신의 체온을 가늠하는 듯 큰 눈동자를 오른쪽 위로 고정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 눈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덜컥 공포감이 엄습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열은 아닌 거 같고 근데 따뜻해.’

‘아, 안 아파.’

‘그럼 다행이야!’

시각, 청각, 후각 그리고 촉각까지 정복한 서하림 앞에서 나는 한없이 무력했다. 같이 집에 가자며 어디 사냐고 물었을 때 나는 집 주소와 도어락 비밀번호까지 말해주었고 왜 학교에서 인사를 잘 안 해주냐는 말에는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하기 바빴다. 당시 우리 집은 아빠가 운동하며 번 돈을 다 투자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산 아파트였는데 서하림이 사는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은 가야 했다.

‘너, 너네 집 저기라며.’

‘오늘 친해진 날이니까 내가 데려다줄게.’

‘아니야. 안 그래도 돼. 빨리 집에 가.’

‘그래도 돼.’

한 걸음 만큼 떨어져 있었는데 ‘친해진 날’이란 소리를 듣고 심장이 너무 무섭게 뛰어서 한 걸음 더 떨어졌다. 이러다 심장이 터질까 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시원한 바람도 내 땀을 식혀주지 못했다.

‘학원, 학원 안 가?’

‘오늘은 저녁 먹고 선생님이 와. 너는 학원 뭐 뭐 다녀? 나 이따 바이올린이랑 피아노 한다?’

반 친구들 거의 대부분이 방과 후에 태권도, 수영, 테니스, 피아노, 한문, 줄넘기 등등 다양한 학원을 다닌다는 건 알고 있지만 별로 다니고 싶지도 않고 엄마도 아빠 눈치 보느라 학원의 히읗 자도 꺼내지 못하고 있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안 다닌다고 하긴 싫어서.

‘……줄넘기.’

그나마 거짓말을 해도 충분히 때울 수 있을 만한 걸 골라 말했다. 바로 지금 줄넘기를 해도 잘할 자신이 있었다.

‘헐 진짜? 그래서 키가 이렇게 큰가?’

‘몰라.’

나보다 한참 작아 걸음도 느린 서하림의 속도에 맞춰 걸으니 걷는 게 걷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걸었는데도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래도 쫑알거리는 서하림과 나름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거의 다 서하림이 얘기하고 나는 대답하고 사과하고의 반복이었지만.

‘다 왔네. 너네집 102동. 402호 맞지?’

‘응.’

‘비밀번호는 까먹을 거니까 걱정 마.’

‘안 까먹어도 돼.’

‘내일부터는 인사해 주는 거다?’

‘…….’

‘야아, 하는 거다아?’

‘……알았어.’

‘그리구.’

‘왜?’

‘팔 벌려 봐.’

‘이렇……게?’

어떻게 해야 팔을 잘 벌릴 수 있는지 고민하며 엉거주춤 팔을 벌리자 서하림이 내 품속으로 쏙 들어왔다. 시간이 멈추고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서하림 때문에 시끄러운 마음이 한껏 부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이모님이 그랬는데 안아주면 행복한 마음을 나눠주는 거래. 그래서 힘들거나 슬픈 사람은 꼭 안아줘야 한다고 그랬어. 힘들고 슬픈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

너도 빨리 날 안아달라는 듯 품 안에서 통통 튀는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나와는 달리 얇고, 작은 허리가 신기하면서도 무서우면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집에 혼자 있는 강아지들이 그래서 집에 돌아온 주인들 보고 안아달라고 애교를 많이 피우는 거란 서하림의 말이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얘가 뭐라고…… 날이 갈수록 괴팍해지는 아빠와 살얼음판 같은 집으로부터 엄마를 지켜주지도 못하는 한심한 나를 위로해 주는 거지? 내가 아빠한테 맞고 온 얼굴을 계란으로 굴리고 있어도, 엄마를 구해주지 못하고 도망치더라도 날 이렇게 안아줄 거야? 두려움과 죄책감이 섞인 고민 때문에 잠도 자지 못하는 한심한 나를?

‘윽, 잠깐만, 나 숨 막혀…….’

사랑스러워.

‘김……동규!’

내 이름을 달콤하게 부르는 서하림을 품에 놔주어도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 힘이 세!’

‘미안.’

사랑스러워…….

‘그럼 갈게. 내일 봐!’

멀어져 가는 동그란 뒤통수가 정문 밖으로 나가 사라졌지만 나는 해가 지고 깜깜해진 뒤에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날 찾으러 나온 엄마가 집을 나섰다가 102동 앞에서 날 발견하고 끌고 가기 전까지.

[지금 집이야?〉

[나 지금 과외 끝나서 너네집 가는 중〉

[아줌마 집에 계셔?〉

[안 계시면 죽 사가게〉

[왜 봤는데 답장이 없어〉

[야 김동규〉

[말 좀 해〉

서하림은 힘들고 슬픈 일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지만 서하림에게 좋은 얘기만 들려주고 싶었던 나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절대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때마다 이렇게…… 서하림은 힘들고 슬픈 순간마다 나를 찾아와 마치 영화처럼, 절망에 잠식당한 나를 구해내고 위로했다. 늘, 항상, 매번, 언제나, 꼭.

딩동, 방문 너머로 들리는 벨 소리를 듣자 밖이 얼마나 난장판인지 떠올랐다. 진작 정리할걸. 아수라장을 보여주긴 싫어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지만 서하림은 당장 문 열라며 현관문을 세게 두들겼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급히 굴러다니는 술병들을 베란다 너머로 던진 뒤 신문지를 그 위에 덮었다. 너무 튀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야 문 열라고! 설마 안에 아저씨 있어? 그래서 못 여는 거야?

“아니야.”

다급하게 숨을 고르며 문을 열자 서하림은 심각해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날 걱정했단 게 여실히 보였다.

“……집이 너무 지저분해서.”

신발도 꼭 저처럼 정갈하게 벗어 나갈 때 신기 좋은 방향으로 정리한다. 내 운동화는 아무렇게나 벗어놔 비교가 심하게 됐다.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두 개 꺼냈다. 서하림 거 하나, 내 거 하나. 평소엔 집에서 신지도 않지만 서하림이 올 때마다 꺼내 신는 것이었다. 옅은 회색 실내화 속으로 서하림의 발이 쏙 들어갔다.

“공부하느라 바쁜 애한테 청소까지 시키고 아주 좋은 아빠 납셨다.”

아빠 일은 맡겨달란 내 말에 직접적으로 신고하라거나 하진 않지만 착한 서하림은 이렇게 한 번씩 아빠 새끼를 비꼬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런 서하림에게 다친 팔을 보여주기가 싫어 뒤로 숨긴 왼팔을 더 등에 바짝 붙였다. 어차피 들킬 게 뻔했지만 조금이라도 걱정을 줄여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었다.

“얼굴은 또 왜…… 됐다. 많이 아파?”

“아니.”

“그럼 죽 먹어. 전복 제일 많이 든 거로 사왔어.”

“응.”

아빠가 TV 볼 때 엉덩이 배긴다고 지 거만 사 온 1인용 소파에 서하림을 앉혔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 서하림의 시선이 베란다를 향해 있었다. 술병을 가려놨던 신문지는 바람에 날아간 지 오래였다. 좋은 것도 아닌데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게 민망해 “죽 먹자” 하고 서하림의 관심을 돌렸다.

주방에서 덜어먹을 접시 두 개와 앞접시, 숟가락 두 개 그리고 작은 국자를 꺼내 물로 한 번 씻었다. 양파장아찌도 잊지 않고 꺼냈다. 맵지 않은 햇양파로 만든 거라 서하림이 잘 먹는 반찬 중 하나였다.

쟁반에 식기들을 놓긴 했는데 한 팔은 등 뒤로 하고 한 손으로만 쟁반을 들고 있는 모양새가 너무 이상해 그냥 깁스 한 팔을 자연스럽게 내렸다.

“팔 뭐야.”

“맞았지 뭐.”

주방에 있던 식탁은 누가 부셔서 버린 지 오래였기에 한쪽에 밀려나 있던 밥상을 끌어왔다. 밥상보단 누구의 술상으로 쓰이는 일이 더 많긴 하지만. TV 위에 올려놓은 물티슈로 상 위를 닦으려니까 서하림이 물티슈를 낚아채 가더니 신경질적으로 밥상을 닦았다.

“내가 해도 되는데.”

“됐어.”

“더러워.”

밥상이 얼추 닦이자 나는 서하림 손에서 더러워진 물티슈를 뺏어 던졌다.

“더러운 거 만졌으니까 손 씻고 와.”

원래 손을 씻으려고 했는지 서하림은 별말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물티슈를 네 개나 뽑아 상을 박박 닦았다. 서하림도 같이 먹을 거니까 서하림이 앉을 쪽은 밥상이 뚫어지도록 닦아댔다.

천 원에 백오십 매 들은 싼 물티슈들이 발에 채이도록 많지만 나는 무방부제에 무균 어쩌구 하는 제품을 썼다. 몰랐는데 아기 엄마들 사이에서 아기들이 물티슈를 빨아 먹어도 안전하기 때문에 비싼 값을 한다고 유명한 거였다. 나야 뭐, 날 위해 쓰는 건 아니고 서하림 때문에. 서하림은 내가 맨날 가방 속에 넣어 다니는 이 물티슈가 한 장에 100원이 다 된다는 걸 꿈에도 모를 것이다. 필요하면 편하게 꺼내 쓰란 내 말에 학교에서 매번 물티슈를 뭉탱이로 꺼내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안다고 해도 물티슈는 원래 그 정도 가격인 줄 알 거고 도련님이라 그게 물티슈치고 비싼지도 모를 테고.

깨끗해진 서하림 쪽 밥상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릇에 죽을 덜어 담았다. 다친 손에 힘을 주면 안 돼서 죽 뚜껑 따는 게 좀 힘들었지만 뚜껑이 열리며 나는 고소한 냄새는 침샘이 아플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서하림이 작은 목소리로 “맛있겠네”라며 혼잣말을 했다.

“많이 먹어.”

“너도. 고마워,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쌀알이 다 불어터진 데다가 씹는 맛도 잘 느껴지지 않고 소화도 빨리 되는 죽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서하림은 무척 좋아했다. 먹는 양이 적고 특이한 식감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가 넣는 재료에 따라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죽은 아무거나 끓여줘도 잘 먹었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죽을 떠먹고 있는데 서하림은 안 먹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아, 방석이 없었나? 그건 아니었다. 아직도 따끈한 죽을 먹어서인지 땀이 흘렀다. 그래, 에어컨을 켜는 걸 깜빡했다. 나는 입안 가득 죽을 쑤셔 넣고 벌떡 일어나 에어컨 전원을 켰다.

“그만하고 앉아서 밥 먹어.”

내 쪽으로 자신의 그릇을 내민다. 그렇게 배가 고파 보였나?

“너는?”

“너 그냥 다 먹어.”

“과외 끝나자마자 왔다며. 저녁 안 먹었을 텐데 네 건 네가 먹어.”

“내가 너 주려고 사왔는데 왜 내 거야?”

“네 돈으로 사왔으니 네 거지.”

“……알았어. 그럼 반 가져가.”

서하림의 그릇에서 아주 조금만 덜어 가져가는 내 손에서 국자를 뺏어간 서하림이 조막만 한 국자가 꽉 찰 만큼 담아 두 번이나 내 접시에 옮겼다. 서하림의 그릇엔 죽이 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 왜.”

“선생님이 샌드위치 사와서 좀 먹었어. 됐지?”

“응.”

“하여튼 이 똥고집 진짜.”

그제야 서하림은 숟가락을 들고 전복죽을 먹었다. 양파 장아찌를 집는 젓가락질은 교과서에 실려도 될 정도로 정확했고 우아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손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접시로 코를 박았다. 대충 씹어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 흐물흐물거리는 음식이 서하림은 대체 뭐가 좋은 건지 모르겠다. 내일은 저녁에 스테이크나 구워 먹어야겠다. 500g짜리로 사와야지.

“과외 쌤이랑 성적 분석했는데.”

“시험 어제 끝났는데 하여튼 너나 선생님이나 성실왕이야 진짜.”

서하림의 말을 고대로 따라 했지만 서하림은 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의대 쓸 거냐고 물어보더라고.”

“응.”

“되게 당연하다는 듯이 ‘의대 쓸 거지?’ 하는데.”

“응.”

“음…….”

빠른 속도로 죽을 깨끗하게 비워낸 나랑은 다르게 서하림의 그릇엔 두 숟갈 정도의 죽이 남아 있었다. 서하림은 괜히 젓가락으로 남은 죽을 쿡쿡 찔러댔다.

“그, 영재원 친구들도 그렇고 학교 친구들도 그렇고…… 다 내가 의대 가는 거로 알더라.”

“부모님 때문인가 보지.”

“그렇지.”

“너네 부모님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친척들도 다 뭐, 그런 집이니까.”

이모, 이모부 기타 등등 다른 가족들 얘기까지 굳이 하진 않았다. 꼭 수술실에 들어가는 게 아니래도 병원을 경영하거나 자기 병원이 있거나 제약회사에 있거나 간호사거나 기타 등등. 심지어 그들의 딸과 아들들까지 군의관, 수의사, 한의사, 병리학자, 약대생에 하다못해 사무직이어도 복지부 산하 공공 의료 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어 죄다 비슷비슷했다.

옛날에 아빠가 보길래 오며 가며 본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 아빠, 할아버지, 외삼촌들 다 변호사고 남자 주인공도 법대 합격하자마자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내용이 있던데 원래 이 동네는 가족들이 단체로 비슷한 직업군을 갖는 듯했다.

“아 근데, 아 진짜, 아니 근데 나는.”

“응.”

“그…… 유학 갈 수 있음 가고 싶어.”

“유학? 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바로 보내주실걸.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게 아니고…… 모르겠다. 너니까 솔직하게 말한다.”

무슨 얘길 하려는지 감이 오긴 했지만 일단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나 사실 작년에 국제고 편입 알아봤었어.”

“알아.”

“헐 안다고? 어떻게?”

“작년 1학기 중간고사 때 너네집 가서 네 거 데스크탑 빌려서 기출문제 뽑으려고 했을 때 다운로드 폴더에 국제고 편입학 안내 파일 있길래.”

“아…….”

“근데 왜 안 갔어? 네 성적에, 학교 경시대회 실적 따짐 합격하고도 남았을 거 같은데. 올림피아드 금상도 있잖아.”

“아 그냥…….”

할 말을 고르는지 죽을 헤집는 게 집요했다. 이미 다 식은 죽은 살짝 굳어 젓가락으로 갈라진 길이 어느 정도 형태를 유지하는 모양새였다.

“나 영재원 선배 중에 초등학생 때부터 되게 친한…… 과학고 나오고 IMO 가서 금메달 딴 누나 있어서 작년에 편입 준비하면서 얘기 엄청 많이 했었는데 누나가 그러더라구. 과고가 편입 안 받으니까 그 대신으로 국제고 가는 거면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힘들 거라 그래서. 아 근데 포기가 안 돼서 유학 생각하고 가는 거라고 했더니 지금 학교도 좋은데 왜 굳이 가냐는 거야. 우리 학교도 좋은 거 나도 알긴 아는데…….”

“의대 가기 싫어서?”

“어?”

놀랐는지 두 배는 커진 눈이 귀여웠다.

“어 맞아…… 너 어떻게 알아?”

“그냥.”

“…….”

“알아.”

네가 좋아하니까. 내 인생의 목표는 서하림 수학 연구소 세워서 그 안에 널 평생 가둬두는 거고.

하루를 48시간으로 사용하며 공부 말고도 운동과 음악까지 두루 섭렵하는 서하림이 제일 눈을 반짝이는 때가 수학 문제 풀 때인데 누구라도 조금만 서하림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면 알 것이다.

노트북엔 국내외 수학 및 이공계 관련 다큐멘터리들이 저 나름대로의 분류에 따라 파일별로 나뉘어져 있고 책장엔 고대 수학 어쩌고부터 정수론이니 양자물리니 하는 대학교 전공 책일 법한 것들과 ‘아직 풀리지 못한 수학 문제들’이란 제목의 책도 꽂혀 있으니까.

서하림이 부모님을 따라 당연히 의대에 갈 거라고 단정 짓는 사람들은 서하림의 진정한 모습을 지켜보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예쁘고 반짝이는 겉모습만 보고 좋아하니 속 알맹이를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없고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럼 뭐, 음. 수교과 갈 생각이야?”

“야 사대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농담이었어.”

“원서 클릭도 하기 전에 할아버지한테 맞아 죽을걸.”

“생각이 아예 없단 건 아니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싫어. 굳이 따지자면 대학에서?”

“아, 교수?”

“몰라. 그냥 굳이 누굴 가르치면 그렇단 얘기야.”

“걍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버려. 평생 말 잘 듣고 살았는데 의대 안 간다고 어른들이 뭐라고 하면 서울 말고 대전으로 내려가 버리는 것도 추천.”

“그럴까?”

사뭇 진지했던 얼굴이 대전 얘기에 화사해졌다.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며 웃는 서하림이 좋았다.

나는 작게 따라 웃으며 서하림을 내내 보고 있던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베란다엔 초록색 술병들이 굴러다녔다. 대충 수를 안 세도 열 병은 쉽게 넘어 보였다.

천재적인 머리로 높은 성적을 받고, 의대를 갈지 자연대를 갈지 고민하는 게 인생의 최대 고민인 서하림이 조금은 부러운 것도 같다. 좋은 집안과 부모님 아래 온실 속 화초처럼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서하림이 하는 고민이라고는 대개 다 이런 수준이었다. 오늘따라 손가락이 안 풀려 피아노가 잘 안 쳐진다거나 간만에 붓을 꺼냈더니 물감이 굳어 있었다거나 비가 와서 축구를 하지 못한다거나 서술형에서 1점이 깎여 아쉽게 100점을 받지 못했다거나. 그에 비하면 나는…….

“……우리 부모님 이혼한대.”

“헐 진짜? 대박. 잘…… 된 일인가? 축하해 줘야 하는 거야?”

‘아들. 아빠랑 살아.’

“반응 보니 아닌가 본데. 이게 이혼을 해도 그, 가족이 아닌 건데 나중에 가정 폭력으로 신고를 할 수 있대? 설마 못 해? 어, 음, 일반적인 폭행죄에도 공소시효가 있을 테니까 그런 쪽으로 하면 증거가 있으니까 상관은 없나…….”

엄마랑 살지 아빠랑 살지 골라보라며 정해진 답을 함께 제시한 엄마가 미운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엄밀히 말하면 정해진 답은 아니고 내가 선택을 안 할 수도 있는 거지만 엄마를 선택하기엔 엄마가 가진 패가 너무 별로라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엄마 베트남 간대.”

“베트남? 왜 갑자기?”

“옛날에 엄마랑 같이 일한 아줌마가 이번에 방통대에 입학을 했는데 거기서 친해진 베트남 사람이 베트남 대사관에서 알바 하다가 좋은 일자리 정보를 들었나 봐. 무슨 베트남 국가사업으로 큰 공장이 지어지는데 거기로 일하러 갈 한국 사람들을 알음알음 모집 중이래. 자기랑 살 거면 베트남 따라오래.”

“대박…… 너 갈 거야?”

“한국 사람은 베트남 이민 되게 쉽대. 또 엄마는 대사관 연줄이라 신원도 확실하고. 가서 새 남자 만나서 새 인생 살 거래.”

“…….”

“그럼 내가 따라가 봤자 엄마 인생에 방해되는 거 아냐?”

“야, 방해 안 돼…….”

“나 베트남어 한 글자도 몰라. 아시아인 것만 알지 어디 붙어 있는 나란지, 수도는 뭔지 그런 거 하나도 몰라.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삽질? 엄마가 나보고 아빠랑 살았으면 좋겠대. 그게 나한테 더 좋을 거래. 말이, 아빠 새끼를 엄마가 몰라? 어쩐지, 어제 아빠 새끼가 그 지랄 떨었을 때 미련 없이 통장 던져준다 싶었어.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씨발 새끼한테 버리고 자기 혼자 도망갈 수가 있어?”

“야…… 버, 도망이라니…….”

“어쩐지 요즘 아빠가 술을 안 처먹는다 했어. 그리고 엄마도 좀 뭔가 이상했어. 그래. 말은 나 성인 될 때까지 이혼 안 하고 참는다고 했는데 베트남 가는 자리가 내년까지 남아 있을 거 같아? 이혼해 주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거겠지. 어릴 때부터 힘든 거 다 봐오고 수발 다 들었는데, 돈도 다 내줘 합의금도 물어줘 아니 이건 지금도 갚고 있긴 한데 시발 뭔 소용이야. 도망을 갈 거면 쓰레기 같은 게 지 성질 못 이기고 제자들 패서 감방 갔을 때 도망을 갔어야지. 지가 미친 새끼 정신 차릴 수 있을 거라고 옆에 붙어 있었으면서, 엄마 내가 그랬잖아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짐승만도 못한 새끼가 사람 되려면 이번 생은 글렀으니까 돈 주지 말라고 했잖아! 그 돈 있으면 엄마한테 쓰든 나한테 쓰든 그러라고 했잖아! 왜 그랬어? 내 말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

“왜 내 말 안 들었어? 왜 자꾸 돈 갖다 바쳤냐고. 어차피 버릴 거면 아빠한테 맞을 때 왜 감쌌어. 왜 나 대신 맞았냐고. 내가 맞아 죽든 말든 그냥 보고만 있었어야지! 그 새끼한테 맞아서 피가 터지고 정신을 잃는 걸 보고 도망쳤어야지!”

쨍그랑-!

“…….”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흰 붕대를 두른 팔이 아파왔다. 서하림은 깨진 그릇을 보고 겁을 먹은 상태였고 내 두 손은 주먹을 쥔 채 밥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상에 닿은 손날도 아팠다.

“……아파.”

정적을 가르는 내 목소리에 바닥만 보고 있던 서하림의 눈동자가 찬찬히 올라왔다. 마주친 눈에는 아주 작게 내가 비쳤다. 성스러운 의식처럼 거행됐던 지난 모든 구원의 나날들이 그랬듯 하림이의 눈동자는 동정으로 물들어 내 슬픔과 고통을 대신 감내하고 있었다.

“아파, 하림아…….”

침을 삼켰는지 작게 움직이는 목젖이 예쁘다. 볼 위로 눈물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슬픈가? 슬펐나? 분노는? 난 왜 화가 났지?

나는 늘 엄마의 행복을 바랐고 아빠를 버리길 희망했고 그리고, 그리고 엄마를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과 도망치고 싶단 죄책감에 싸웠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 한심하게 맞기만 하면서 어떻게 아빠를 엿 먹일지 완벽한 계획을 짜고 아이러니하게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게 보일 모든 것을 갈망하고…….

“울지 마.”

바다보다 더 깊은 품속에 빠지면서 아기의 요람보다 더 절대적인 평온이 찾아왔다. 그러자 목이 타오를 것처럼 뜨거운 갈증이 일었다. 나는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최초의 생명이 되어 탄생한 것처럼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다. 찾아야만 했다. 타오르는 갈증을 해소할 만한 것을.

맑은 눈동자 속 흔들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 몸을 붙였다. 저곳만이 내게 영원한 안식을 줄 것이다. 혀를 내밀어 촉촉한 입술을 가르고, 생명수를 만난 망자처럼 서하림의 타액을 빨아 마셨다.

날 밀어내기엔 한없이 부족한 힘을 느끼며 평화로웠던 우리의 일상이, 내가 지켜왔던 선의의 노력과 배려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어리석은 나는 뒷일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상상이 아닌 현실의 서하림을 핥아대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굴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았다. 황홀한 죽음일 것이다.

1부 일상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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