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이제는 제 방처럼 들어와 자는 하진을 떼어 놓고 오는 데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잠깐 물 좀 마시고 오겠다는 말로 나와 욕실로 직행했는데, 씻고 나와 보니 하진이 무서운 표정으로 욕실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어디 가냐고 묻는 눈이 잡아먹을 것처럼 사나워서, 결국 빼도 박도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찬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전에 미리 연락을 해놨으니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선물이고 뭐고 집밖에 나가지도 못한 채 추궁의 소리를 들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핑계야 많았지만, 서련은 일단은 이찬과 약속이 있다는 말로 상황을 재빨리 무마했다. 잔뜩 의심하던 하진은 이찬과 서련이 통화하는 걸 보고서야 마지못한 모습으로 의심을 지워 없앴다.
물론 처음엔 같이 가겠다고 난리를 피워댔지만, 하루에 푸딩 두 개까지만 먹는 조건으로 겨우 막아설 수 있었다.
덕분에 이찬은 주말 오전부터 차를 몰고 서련이 사는 오피스텔로 찾아와야 했다. 하진이 이찬과 같이 출발하는 걸 보겠다고 성화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형….”
“미안하긴. 형도 근처에 볼일 있었어. 따로 볼일 봤다가 도중에 만나자. 혹여나 혼자 갈 생각은 마라. 형 독수리한테 쪼이기 싫다?”
“그러면 저야 고마운데… 제가 다음에 밥 사드릴게요.”
“어허, 형 승진한 거 잊었냐? 형이 살 테니까 걱정 말고 편~히 다녀와라.”
주말 오전이면 한창 잘 시간일 텐데, 이렇게 나온 게 억울하지도 않은지 이찬은 시종일관 씩 웃으며 괜찮다고 서련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빈말로도 핀잔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찬은 서련을 백화점 앞에 내려주고 40분 뒤에나 보자며 하품을 하며 사라졌다. 그 모습이 미안해 서련은 이찬의 선물도 따로 준비하기로 했다.
주말 오전인데도 백화점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백화점 명품관을 빙빙 돌며 서련이 찾아간 곳은 시계 브랜드 매장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서련은 해줄 생각만 했지, ‘같이’하고 다닐 생각은 못 했다. 그러나 매장 안에 예쁘게 진열된 시계를 본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짝이 지어진 듯 정갈하게 놓인 시계를 보고 있자니, 문득 같은 걸 함께 착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생각하신 디자인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선물하려고 하는데, 혹시 커플 디자인으로 분위기나 색상 정도만 다른 모델이 있을까요?”
“선물하실 분의 나이대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이대를 타지 않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하고 싶은데….”
서련의 말에 직원은 사근사근한 미소를 보이며 서련은 매장의 안쪽으로 안내했다. 메탈 형식의 화려한 시계들이 조명에 반사되어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맞는 가격대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서련은 일단 직원에게 생각하고 있던 가격대를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시된 시계 중 몇 개를 꺼내 서련의 앞에 놓아주었다.
“착용해 보셔도 됩니다.”
호의 가득한 미소에 서련은 머뭇거리다 이것저것을 손목에 대 보았다. 그 중, 가장 심플하고 가볍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메탈 시계를 골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하진에게 어울릴까, 백 번을 생각하며 고민하다 보니 너무 성급한 선택인 것 같아 다른 매장의 것들도 보고 오기로 했다.
서련은 그 길로 매장을 나와 다른 시계 브랜드 매장도 찾아가 몇 개의 모델을 더 비교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가장 처음 찾았던 시계가 잊히지 않아 결국엔 돌고 돌아 다시 방문해야 했다.
“이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이즈는 바로 조절 가능할까요?”
“예, 사이즈에 맞게 줄이는 동안 제품 설명 도와드리겠습니다.”
다행히 하진이 자고 있을 때 손목 둘레를 재 놓은 게 있어 바로 하진의 사이즈로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지출이 되어 버렸다. 원래 하나만 사려고 했던 걸 두 개나 사버렸으니 그렇기야 하겠다만, 마음에 드는 시계가 보여준 모델 중 가장 비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부터 틈틈이 모아 놓았던 용돈이 확 줄어 버렸다. 사실 하진이 쓰라며 넘겨준 카드로 긁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선물을 해주는 의미가 없을뿐더러 제 돈으로 산 게 아니니 감흥도 줄 것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제가 이제껏 모아왔던 돈으로 결제했다. 나중에 하진에게 좋은 걸 해주려고 모아놓았던 돈이니,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잘 포장된 시계가 든 쇼핑백을 들고 서련은 다음으로 이찬의 선물을 샀다. 직장인이라 정장을 매번 입는 이찬을 고려해 세련된 넥타이를 사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목도리로 장시간 얼굴을 가리고 있었더니, 제법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목도리를 풀까 싶던 그때, 저 멀리서 이찬의 차가 경적을 울리며 서련을 불렀다. 서련이 다가가 잽싸게 타자 차는 바로 출발했다.
“이찬 형, 선물이요.”
“야, 야! 나 독수리 보기 싫다니까?! 아니, 학생이 돈이 어디 있다고 브랜드 로고를 내밀어! 빨리 넣어라, 서련아.”
“이미 형 주려고 산 거라 못 넣어요.”
“…그럼 독수리 몰래다?”
솔깃한 표정으로 말하는 이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독수리가 된 하진에겐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하고, 서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물을 내밀었다.
“우리 서련이, 형 넥타이 두 개로 돌려쓰는 건 또 어떻게 알아서… 어흑, 너밖에 없다.”
“음… 그럼 혼날 짓 한 것도 말해도 되나….”
“뭐야, 너 무슨 사고 쳤어?!”
앞을 보랴, 서련을 힐끗 훔쳐보랴, 이찬은 바쁘게 눈동자를 굴려댔다. 그러다 신호대기가 걸리자마자 도끼눈으로 서련을 홱 돌아보는데, 감추기도 뭐해서 서련은 일단 사실대로 고했다. 어차피 말해야 할 일이었다.
“…그 사람 찾아왔었어요.”
이찬의 표정이 순식간에 멍해졌다. 그러나 곧 입을 꾹 다물고는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는 힘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만났냐?”
“…네. 그날 하진이가 본가 간 날이기도 했고… 하필 혼자 있을 때 만났던 거라서, 일 커지게 하고 싶지도 않고 할 말도 있어서 카페에 잠깐 갔었어요.”
“서련아.”
“무슨 걱정 하는지 아는데…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 아는데…!”
“형.”
어느 때보다 힘 있게 부르는 소리에 이찬이 결국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찬을 보며 서련은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어요. 그 사람하고 저 끝난 거 맞아요. 다시 볼 일 절대 없어요. 그리고 어… 하진이가….”
“또 때렸냐? 왜. 이번엔 깽값하라고 시계까지 던져주든? 그리고 너는 고 어린놈의 자식 시계 사러 핑계까지 대면서 혼자 나온 거고?”
“눈치 진짜 빠르네….”
“네가 이유 없이 핑계까지 대며 이런 거 사다 줄 놈이냐? 하아, 서련아…. 그래, 오늘 나 잘 불렀어. 앞으로 당분간 혼자 다니지 말고… 네가 그렇게 말했다니까 믿어는 주는데…. 너 다시 그 자식한테 간다는 소리 하면 나도 이번엔 독수리 편들 거니까 그렇게 알아.”
“음… 형, 그건 좀….”
“뭐가 그건 좀이야?! 아주 묶어 놓고 살라고 내가 도시락까지 넣어줄 거야! 어? 아주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알았어요, 알았어. 그럴 일 없다니까.”
“독수리 나오라고 해. 너 데려가는 거 보고 갈 거니까.”
서련은 일단 하진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것까지 말했다간 이찬이 정말 화병으로 드러누울지도 몰랐다. 좀 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 좋은 자리를 빌려 말해주기로 했다.
옆에서 빨리 연락하라고 이찬이 다시 으름장을 놓았다. 서련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하진에게 톡을 보냈다. 보낸 건 톡인데, 돌아온 건 전화였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던 사이 전화는 뚝 끊이고 이번엔 이찬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마치 같이 있는 걸 확인하려는 행동 같았다.
“와, 이 독수리 새끼는 속이질 못하겠다. 받아봐라, 서련아.”
“죄송해요 형….”
이찬이 내미는 핸드폰을 받아든 서련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서련이 받을 줄 알았는지, 목소리는 생각보다 평이했다.
<어딘데.>
“곧 도착해. 신호 두 번만 받으면 되니까 좀 더 이따 나와.”
<어차피 밖이야.>
“야, 이 독수리 같은 놈아! 시계가 뭐냐, 시계가! 돈을 줘야지! 시계 그거 팔면 몇 푼이나 한다고! 돈 다발을 뿌려야 안 오지!”
옆에서 난데없이 이찬이 끼어든 것도 그때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덕분에 서련만 난처해졌다.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곧 비웃는 듯한 헛웃음이 나오고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바꿔.>
“…하진아, 그러지 말….”
<바꾸라고.>
결국 서련은 한숨과 함께 이찬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이찬은 대뜸 갓길에 차를 대더니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일단 눈앞에 독수리가 없으니 덤빌만 한가보다.
“와, 이놈 목소리 까는 거 봐라? 내가 네 길마다! 그래, 얼만데 그렇게 목소리가 빳빳한지나 좀 들어보자. 시계가 거기서 거기….”
이찬의 시선이 순간 서련의 품에 안긴 쇼핑백으로 향했다. 그리곤 침을 꼴깍 삼키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어, 얼마라고?”
사실 서련도 하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시계가 그렇게까지 비싼 줄 모르고 살아왔다. 돌려 말하자면, 이찬의 저 표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찬의 저 표정은 비싼 시계가 있는 줄 몰랐다는 게 아닌, 하진이 차고 다니던 시계가 그렇게 비쌌는지 몰랐다는 표정에 더 가까웠다.
“…이야! 우리 독수리가 역시… 아니, 독수리가 아니라… 알겠다, 알겠어. 바꿔주면 될 거 아니야.”
이찬의 핸드폰은 다시 서련에게 넘어왔다. 서련이 전화를 받자 하진은 정문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냈다. 서련은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이찬에게 내밀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서련아, 쟤 평소에도 저런 거 차고 다니냐? 잘 사는 건 알았는데 저건 뭐 그냥….”
“그날은 본가가는 날이라 더 그런 거고, 평소엔 저것보단 음….”
“…그래, 됐다. 형 지금도 상당히 충격받았어.”
이찬은 갓길에 정차했던 차를 다시 움직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이찬이 아주 미안하다 못해 슬픈 눈으로 서련을 힐끗 보며 말했다.
“…서련아, 형이 시계보다 못한 차에 태워서 미안하다.”
“아니, 형. 그러지 마세요.”
“그놈이 와인을 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지, 대결권 만 장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그러면서 서련의 품에 안긴 쇼핑백을 다시 보는데, 그게 마치 이거 가지고 되겠냐는 눈빛이었다. 안 그래도 걱정이었는데, 저 시선을 받고 보니 더 자신이 없어졌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서련이가 주면 종이도 차고 다녀야지. 혹시라도 뭐 싸구려라 못 찬다 그딴 소리 지껄이면, 형 남는 방 있으니까 우리집 오자. 알겠지?”
“생각해 볼게요.”
서련은 애써 그렇게 말했다. 하진이 허락해 줄 리는 적어도 절대 없을 테니까. 그렇게 하진에 대한 온갖 말을 듣고자 있자니, 어느덧 오피스텔 정문 앞에 도착했다. 정문 앞 주차장 입구에 서 있던 하진이 차를 발견하곤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서 들어가라. 감기 걸리지 말고.”
“고마워요, 형. 형도 조심히 들어가고 나중에 게임에서 봐요.”
“오냐.”
손을 흔들어주고 차에서 내리자, 하진의 시선이 서련의 품에 안긴 쇼핑백으로 향했다. 설핏 일그러지는 인상과 함께 이찬에게 분노어린 시선이 닿았다. 그러나 막 열리던 입은 서련의 손에 턱 다물어졌다.
“형, 어서 가세요.”
하진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서련이 하하 웃으며 이찬에게 말했다. 할 말 많아 보이는 이찬의 시선이 하진에게 닿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정차되어 있던 차가 출발하고 서련도 하진의 팔을 잡아끌고 집으로 향했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춥다.”
뭐라 말하려던 하진은 춥다는 말에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밝은 곳에 있으니 아랫입술에 깨물린 자국이 선명히 보였다. 피가 날 정도로 문 기억은 없는데, 이렇게 보니 꽤 세게 문 듯했다.
뭐랄까, 미안한데 또 잘 어울려서 계속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꽤 야한 것 같기도 하고.
“뭘 그렇게 봐. 또 깨물려고?”
“많이 아팠어?”
“어, 꽤.”
눈썹을 찡그리는 걸 보니 정말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크게 흠칫거렸었나.
“왜, 보기 좋은데.”
“그러다 나중에 울면서 매달리지. 적당히 해, 되레 물리기 전에.”
그래도 저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서련은 한참 뒤에야 아쉬운 표정으로 하진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신발도 벗기 전에 하진은 서련의 손안에 있던 쇼핑백을 낚아채 눈앞에 흔들어댔다. 표정을 보니 서련이 사 왔다고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하진이 준 카드는 쓸 때마다 사용내역 문자가 거의 고자질 수준으로 하진에게 전달되었다. 사용내역이 오질 않았으니, 당연히 서련이 샀다고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 고등학교 때 용돈을 아껴가며 적금해두는 건 상상도 못 할 테고.
“그래서, 그 새끼가 왜 이걸 사줬는데.”
“그거 내가 산 거야, 하진아.”
그 말에 하진의 시선이 곧장 쇼핑백으로 향했다. 달랑달랑 흔들던 손길도 멈췄다. 설명을 바라는 눈길이 곧이어 서련에게 쏟아졌다. 서련은 신발을 벗고 하진을 지나쳐 거실 소파로 향했다.
갑갑했던 목도리를 풀고 겉옷을 느슨하게 벗으며 소파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하진이 마지못한 모습으로 다가와 앉았다. 말 잘 듣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칭찬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거 줘 봐.”
“그 새끼한테 얼마 줘야 되는데.”
“뭘? 아…. 빌린 것도 아닌데.”
오묘한 표정을 짓는 하진의 손에서 쇼핑백을 뺏은 서련이 안에 든 시계 케이스를 밖으로 꺼내 들었다. 흰색 케이스에 검은 리본이 묶인 상자였다. 리본을 푼 서련은 상자를 열어 예쁘게 놓인 시계를 꺼냈다.
“손 줘봐.”
하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시계를 보는 모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시선은 차츰 올라가 서련에게 닿았다. 이채 어린 눈빛이 서련을 옭아매듯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한데 어딘지 격정적인 것 같은 느낌.
서련은 꿈쩍도 하지 않는 하진의 손목을 대신 끌고 와 시계를 채워 주었다. 신기하게도 손대중으로 사이즈를 쟀는데도 시계는 잘 맞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렸다. 굵은 팔목 위에 정갈하게 채워진 시계가 마치 잘 빠진 맹수 같았다. 어딘지 유려하고, 예쁘고 섹시한 느낌.
“내가 처음 미역국 해준 날 있었잖아. 그때 뭘 사야 할지 몰라서 케이크 샀었거든. 근데 하진아, 나는 그때 너랑 친하질 않아서 네가 단 걸 싫어하는 줄 몰랐었어. 근데도 너 그 자리에서 케이크 다 먹었었잖아.”
하진의 시선이 제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향했다. 조금도 미동도 없이 하진은 그렇게 시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음 해에는 꽤 고민했었거든. 그래서 적당한 걸 떠올리다 마침 너 핸드폰 바꿨다는 말도 듣고 해서 핸드폰 케이스를 해줬는데… 그때는 하고 다니는 걸 못 봤었어.”
그 다음 해는 돈을 더 모아 처음으로 백화점을 가서 메이커 장갑을 사서 주었었다. 꽤 비쌌는데, 그마저도 하진은 착용하고 다니질 않았었다.
“장갑도 그랬고… 넥타이도 모임 있을 때마다 기대했는데, 하는 걸 못 봤어. 그게 나는… 내가 해준 것들이 너무 작고 초라해서… 그래서 안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중에는 좋은 걸 해주고 싶었고.”
좋다는 기준이 지금에 와서는 많이 모호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다. 좀 더 좋은 거. 좀 더 비싼 거. 그때는 그런 게 좋은 줄로만 알았었다.
“나 그때 용돈이 한 달에 20만 원이었어. 워낙 없이 살아서 나는 그것도 정말 많게 느껴졌거든. 그래서 매달 10만 원씩 꼬박 적금했었어. 어쩌다 들어오는 용돈도 전부 적금했었고. 나중에 보태서 네 생일날 좋은 거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
서련은 하진이 내려다보고 있는 시계 찬 손을 끌어다 제 뺨을 덮게 했다. 비스듬히 기울여 기대자 온기가 느껴졌다. 움찔거리는 손끝이 피부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도… 좀 그래...? 많이 모자라…?”
자신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 있는 서련의 모습에 하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어딘지 멍했던 얼굴 위로 표정이 생겨난 순간 서련의 반대쪽 뺨에도 큰 손이 닿았다. 다정한 손길과 달리 고개를 기울이며 덤벼오는 키스는 무서울 정도로 성급했고, 집요했다. 일견 집착하는 것도 같았다.
성급한 입맞춤에 채 맞춰주지도 못한 채 끌려다니다 겨우 풀려났을 때, 거친 숨소리 사이로 하진의 낮은 목소리가 번져들었다.
“모자란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눈물이 고인 서련의 눈가를 훑어 닦으며 하진이 서련의 귓불을 이로 살살 씹었다. 귓불을 지분거리던 입술은 유연하게 뻗어 내려간 목선을 타고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서련의 어깨 위로 하진이 툭 얼굴을 묻었다.
의미 모를 답이었지만, 서련은 그냥 그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
“음, 그리고 하진아. 이거 커플이야.”
그 말에 하진이 고개를 번쩍 들고 다시 서련을 바라보았다. 놀란 듯, 바라보는 시선에 서련은 그냥 웃어줬을 뿐이었다. 하진의 시선이 곧장 쇼핑백으로 향했다. 집어 들고 꺼내는 모습이 그렇게 전투적일 수가 없었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해줄 걸 그랬나 싶을 정도였다. 거의 뜯듯이 케이스를 열고 제 시계와 비교를 하는데, 똑같은 모델에 색상이 약간 다른 게 퍽 마음에 들었는지 비교를 마친 후에는 꺼내서 서련의 손목에 냉큼 채워 주었다.
“하진아, 이리 와봐.”
“왜 또, 물려고.”
“그것도 그런데….”
해본 적 없는 시계의 감촉이 조금 낯설어서인지, 피부에 닿는 느낌이 조금 오싹했다. 손목을 쓰다듬으며 서련은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다른 게 아니라, 하려던 말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참이나 머뭇거리자 하진이 손을 뻗어와 서련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려는 말을 눈치챈 것도 같았다.
“하진아, 같이….”
“어.”
한 번 겪어서인지 더 말이 안 나왔다. 그럼에도 하진은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겨우 머릿속을 정리하자, 전달하기 힘든 말이 떠올랐다. 쓴웃음을 끝으로 서련은 어렵게 입이 열렸다.
“치료받으러… 가려고. 아직 혼자는 못 가겠고… 같이… 가 줄 거지?”
“걱정 마. 싫다고 해도 쫓아갈 거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겨우 마음이 안정되었다. 시술하는 곳까지는 함께 들어가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다를 것이다. 혼자였던 그때와는 달랐다.
그것만. 지금은 딱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거 없이, 나아가기로 한 지금의 이 순간만 생각하기로 했다.
등을 타고 오르는 체온이 불안을 집어삼킨 날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은 날이었다.
***
모를 거라 생각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로운과 원호는 서련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눈치가 빠른 듯했다. 물론 누군들 하진의 입술에 난 잇자국을 보면 곁에 있는 서련을 의심하겠다만, 그게 서련이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의외라는 감정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정도로 하진과의 관계가 남이 보기에 모호해 보였다는 소리인데, 나름 벽을 치고 살았다고 자부했던 서련은 이 부분에 대해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진의 입술을 대놓고 쳐다보던 시선은 종래엔 서련에게 옮겨졌다. 니들은 봐라, 나는 할 일 하겠다, 라는 모습으로 심드렁히 앉아 있던 하진이 으르렁거린 것도 그때였다.
“뭘 봐, 씨발.”
“날짐승 또 난리 나셨고만.”
“내가 내 눈 가지고 보고 싶은 곳 좀 보겠다는데, 네가 뭔 상관이세요. 이 개새끼야.”
말릴까 하다가, 서련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진의 잇자국에 대해 물어본다면 대답해줄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다른 쪽으로만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했다.
예를 들면-
“잠깐만, 잠깐만…! 서련 형, 혹시 다친 곳 있는 거 아니죠…? 봐 봐요, 손가락 발가락 다 멀쩡한지! 헉! 왼쪽 검지가 안쪽으로 약간 휜 거 같은데?!”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가…! 형, 괜찮으니까 저희한테는 다 말해도 돼요. 둘이 덤비면 그래도 죽일 순 있으니까.”
“시발, 가만 보니 이 새끼는 뭘 잘했다고 이 꼴로 여기 나타난 건데! 당장 무릎 꿇어, 새꺄!”
하진은 그냥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억울하겠지. 자기는 한 것도 없는데, 멀쩡히 있다가 물렸으니.
서련은 제 앞에 와서 아예 무릎까지 꿇어앉은 로운과 원호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뺨을 긁적거리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냥… 어…. 한 거야….”
서련의 말에 로운의 원호의 눈이 끔뻑거렸다. 조금 그렇긴 해도, 오해는 풀어야 하니 서련은 거기에 한 마디 더 보태었다.
“…영화 보다가.”
여기까지 말하면 알아듣지 않을까. 그 말에도 로운과 원호는 별일 없었냐는 소리를 세 번이나 더 묻고서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애초 로운과 원호도 하진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을 것이다. 특히나 서련에 관해서는. 이건 그냥 일종의 확인인 셈이었다.
옆을 보자 하진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이고, 억울해라. 오늘 집에 가면 좀 잘해줘야겠네.
그런 생각으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 서련의 시야에 언제 모여들었는지 모를 길드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주말이라 다들 한낮인데도 한 명도 빠짐없이 접속해서는 서련의 주위를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징검다리 출석이 꽤 잦았었는데, 요새 들어 재밌는지 다들 기세 좋게 일일 출근도장을 찍고 있었다. 물론 서련이야 늘 일일출석을 찍고 있어 예전이나 지금이나 딱히 별 차이는 없었지만.
[길드/건블리아: 키키야? 형 메인퀘 도와줄 사람 너밖에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길드/키키아: 그럼 도와줘야죠]
[길드/휴리사: 어 그거 아닌가ㅋㅋ 제물퀘ㅋㅋ]
[길드/묵요: 아 그거 저도 귀찮아서 아직 안 깼는데ㅎ]
[길드/베르르: 헉 나도요!!]
[길드/순한양: 휴ㅋㅋㅋㅋㅋㅋ 예전에 키키형 꼽사리 껴서 깨두길 잘했군ㅋㅋㅋㅋㅋㅋ]
[길드/키키아: 또 안 깬사람 있어요?]
[길드/야생닭: 뭐야;; 나도 안 깼었네?;; 아 다른 캐로 깼었나 보다ㅠㅠ]
[길드/호백조: 전 깼는데 그냥 도와주러 가죠 뭐ㅋㅋ]
[길드/킬레아: 아 귀찮게 그걸 왜 안깨고 있어]
[길드/키키아: 그럼 오늘은 그거 깨러 갈까요?ㅎ]
[길드/건블리아: 고맙다 키키야ㅠㅠ 형이 오늘 보조 잘 하마ㅋㅋㅋㅋ]
[길드/휴리사: 포탈먼저! ㄱㄱ!]
서련은 미션 퀘스트 창을 열어 ‘로울카의 제물’이라는 퀘스트를 찾아 들어갔다. 이미 클리어한 터라 순서까진 다 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는 표기되어 있었다. 퀘스트의 대부분이 신성제국에서 진행되는, 일명 잠입 퀘스트였다.
내용은 신성제국 땅에 있는 ‘로울카의 제단’에 제물을 바쳐 영물을 강림시키고, 그 영물을 죽인 후 신비한 힘이 담긴 이빨을 가져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냥 내용만 보면 별거 없는 것 같았지만, 파티 혹은 포스로 연계해서 가야할 정도로 깨기 힘든 퀘스트였다.
제단 근처에 정예몹들이 많은 건 물론, 주변에 신성제국 마을을 3개나 낀 지형이라 신성족 유저들의 출몰이 잦은 탓이었다.
그리고 그 ‘제물’. 영물을 강림시키기 위해 필요한 제물이 바로 유저여서 무조건 상대 쪽 유저 한 명을 잡아가 제물로 삼아야 했는데, 이 경우 제물로 잡힌 유저가 온갖 제보를 다 하고 길드까지 불러들여 기습을 때리는지라 쉽게 끝나는 게 요행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보통은 다들 포스를 연계해 다 같이 해결하는 걸로 퀘스트를 클리어하곤 했다.
[길드/건블리아: 키키야 제물퀘 구하는 유저들 있긴 한데 어쩌냐;]
[길드/묵요: 개개길드네요]
[길드/베르르: 노놉 걔들이랑 엮어서 좋을 거 없음요]
[길드/야생닭: 잘 말하면 되지 않을까... 잘...]
서련의 시선이 채널쪽으로 옮겨졌다. 파티를 구하는 외침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는 걸로 봐서는 저들도 급한 모양인데, 하필이면 앙숙관계인 개개길드였다. 안 그래도 그 신성족 쪽의 R개개길드E에게 당한 게 있어 더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길드/키키아: 그래도 일단은 데려갈게요. 뒤통수 칠 거 같으면 저희가 먼저 유인하고요]
[길드/휴리사: 괜찮겠어?]
[길드/키키아: 네 안되면 매익화한테]
[길드/호백조: 아 강마 간대요]
[길드/키키아: 그렇다네요]
[길드/묵요: 키키형 말대로 일단 개개길드랑 같은 레일 타다가 안 되면 버리고 오죠 뭐]
[길드/건블리아: 알겠다. 일단 내가 연락하마]
건블리아가 총대를 메고 연락할 동안, 서련은 맵을 켜고 포탈의 위치와 시간을 확인했다. 포탈이 열려 있긴 했지만,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가려면 지금 바로 이동해야 했다.
[길드/키키아: 포탈 20분뒤에 닫힌다니까 저희 먼저 가 있어요]
[길드/호백조: 강마쪽은 벌써 포탈 탔다니까 저희만 가면 될거 같은데요]
[길드/건블리아: 아오 **들 어차피 갈거면서 오만 ㅈㄹ다 떨고 있네ㅡㅡ]
[길드/야생닭: 왜요? 뭐래요?]
[길드/건블리아: 가주시겠단다ㅋㅋㅋㅋㅋ 참낰ㅋㅋㅋㅋ]
[길드/키키아: 그럼 건블형 개개길드한테 제단에서 만나자고 해주세요]
얘기가 끝나자 모두는 곧바로 포탈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 얼마 만에 타는 포탈인지 그립다 못해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간 얼마나 타고 싶었던지, 마음 같아선 새벽에 몰래 컴퓨터를 켜고 에르덴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실제로도 실행에 옮겼었지만, 아니. 실행까지만 옮겼을 뿐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기도 전에 하진에게 도로 붙잡혀 침대로 끌려들어간 까닭이었다. 결국 그날 이후, 서련은 밤중에 게임하는 걸 아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길드/호백조: 아 포탈 앞에 닭 있대요. 은신이... 없구나. 와 이상하게 우리 길드는 어쌔신이 한명도 없네?ㅋㅋㅋㅋㅋ]
[길드/건블리아: 형이 갈아탈까?ㅋㅋㅋ 킬레아도 거너니 직업도 겹치잖아]
[길드/묵요: 에이 길마형만큼 보조 잘하는 사람 못봤는데 그래도 되겠어요?ㅎㅎ]
[길드/건블리아: 크흠 그럼 뭐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베르르: 어휴 어르신 그걸 또 믿어여?!]
[길드/호백조: 별수 없네. 한 팟 있다는데 걍 박치기로 가져]
[길드/휴리사: 그래~! 우리는 막 은신 이런거 필요 없어ㅋㅋㅋ]
결국 꼼수 없이 포탈 앞을 돌파하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포탈 앞에는 보통 한 파티 정도가 감시자로 대기하고 있었다. 무방비하게 넘어오는 적대종족의 공적을 수월하게 얻을 수 있거니와, 적대종족이 넘어와 꼬장부리는 걸 동료애적으로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건 보통 유저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고, 서련이 떴다 하면 일단 승리는 보장되기에 두 파티 이상이 아니면 되레 포탈 앞을 지키는 감시자들이 죽어나가는 처지였다. 게다가 이번엔 비글들도 껴있으니, 보자마자 안 도망가면 다행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서련이 포탈을 타고 넘어갔을 때, 포탈 앞을 지키던 신성족은 이미 하진과 로운에 의해 빛삭이 된 후였다. 드러누워 있는 신성족 머리 위로 떠 있는 말은 전부 ‘ㅡㅡ’였다. 어이없으니 빨리 가라는 소리였다.
[길드/묵요: 갈게요]
파티는 2개의 파티로 나눠 포스로 연계되었다. 서련은 도와주는 처지로 온 거라 머릿수가 적은 2팀의 보조파티 쪽으로 편입되었다.
하필 포탈이 열린 곳이 제단과 거리가 좀 되는 곳이라서, 모두는 지도를 반 바퀴 돌아 유저들의 눈을 피해 제단 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 목적이 아니면 보이는 대로 족족 잡아 죽였을 텐데, 일단 목적이 있으니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킬리 콧구멍에 바람 좀 넣어줘야 하는데.
얌전히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을 킬리를 떠올리자니, 근처에 보이는 유저들이 더 눈에 밟혔다. 빨리 퀘스트를 끝내고 킬리랑 산책이라도 하든가 해야지, 이대로는 억울해서라도 절대 그냥은 못 돌아간다.
[신마제국/강마: 우~리~키~키~형]
[신마제국/킬레아: ㅈ까ㅅㅂ넘아]
[신마제국/강마: 저 양아치 샛끼는 메에 거려야지 왜 컹컹 짖고 ㅈㄹ임?]
[신마제국/키키아: 강마야 안녕]
서련네가 제단에 도착하자, 먼저 와서 몸을 숨기고 있던 강마가 불쑥 튀어나와 서련 쪽으로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뒤에서 블러더 길드원들이 미쳤냐고 소리쳤지만, 강마에겐 귓등으로도 통하지 않았다.
[신마제국/베르르: 들키고 싶어 난리가 나셨나벼]
[신마제국/강마: 컨이라곤 ㅈ도 없는 절미들은 뒤로 짜지자^^ㅗ]
[신마제국/순한양: 님 몇짤?ㅎㅎㅎㅎ 어떻게 나보다 철이 없을수가? 와ㅎㅎㅎㅎㅎ]
[신마제국/강마: 강마살]
[신마제국/베르르: 아 그런살이 어딨어!! 아오!]
[신마제국/묵요: 잘들논다]
[신마제국/강마: 키키형 아니 제물퀘를 안 했음 말을 하시져ㅋㅋㅋㅋ 어떻게 매익화라도 잡아다 해드려요?ㅋㅋㅋㅋ]
[신마제국/키키아: 아니야 괜찮아]
[신마제국/호백조: 강마야 나대지 말자 엉?]
[신마제국/건블리아: 개개 넘들도 다 왔다는데 어째 영 보이질 않냐?]
[신마제국/야생닭: 일단 좀 숨어요. 이러다 들키겠다;]
그래도 아직까진 제법 주변이 조용한 편이긴 했다. 제단은 신성족 내에서도 서브퀘로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 유동인구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많은 편이다.
서련이 캐릭 앞에는 3층 석탑 구조로 높게 쌓인 제단이 있었다. 주변에는 거리마다 움직이는 로머(일정한 지역을 반복해서 돌아다니는 몹)와 정예몹들이 득실거렸고, 제단을 올라가는 계단과 돌탑에는 요사스럽게 타오르는 횃불이 가득 지펴져 있었다.
제물을 바쳐야 하는 곳은 석탑의 가장 높은 곳이었다. 석탑 꼭대기는 평평한 지형으로, 지형의 중앙에는 작은 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길게 뻗어 올라간 네 개의 수정 아티팩트가 있었다.
강림은 제물을 제단에 놓고 아티팩트를 발동하면, 제물이 죽으면서 그 자리에 영물이 소환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제물을 산 채로 그 원형진 안에 잡아놔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4번째 아티팩트를 발동하기 직전 넉백을 먹이거나 스턴을 먹인 채 방치하고 아티팩트를 발동함으로써 영물을 강림시켰다.
물론 역으로 당할 수도 있다. 신성족이 제물일 땐 호랑이가 나오지만, 신마족이 제물일 땐 곰이 튀어나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 퀘스트에는 신성족이 제물로 올라가야 했다. 만약 일이 틀어져 곰이 나오면 제단이 리셋될 동안 다시 숨어서 기다려야 했다.
[신마제국/강마: 뭐야 웬 개개길드?]
[신마제국/건블리아: 자자, 포스로 연계할 거니까 다들 싸우지 말고 응? 알겠지?]
[신마제국/강마: 헐 지금 개개넘들이랑 손잡고 하자는 건 아니져?]
[신마제국/키키아: 그렇게 됐어. 일단 같이 해보고 아니면 뭐...]
[신마제국/강마: 걱정 마시져 키키형ㅋㅋㅋㅋㅋ 저만 믿으시면 세상의 중심인 킬리도 안꺼내게 해드리겠습니다ㅋㅋㅋㅋㅋ]
아니, 킬리는 바람 좀 쐬어야 되는데.
차마 말은 못 하고 서련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개개길드 쪽을 바라보았다. 첫 느낌은 그냥 참 많이도 데려왔구나, 하는 정도였다. 한데, 점점 가까워질수록 뭔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이라든가, 얼핏 비치는 붉은 색이라든가, 여러모로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비단 서련 뿐만이 아닌지, 가만히 서 있던 주변 캐릭들도 뭔가 주춤주춤 움직여댔다. 그리고 그게 신성족들한테 쫓기고 있는 개개길드라는 걸 깨닫고 난 뒤에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전부 뒤로 뛰기 시작했다.
[신마제국/순한양: 악!! 미쳤냐고!!]
[신마제국/야생닭: 절로가!]
[신마제국/강마: 개개길드랑 뭘 하자고요?ㅎㅎㅎㅎㅎ]
[신마제국/건블리아: 니들 미쳤냐?! 왜 닭들을 끌고 오고 그랴!]
[신마제국/개솔: 누군 끌고오고 싶어서 끌고왔나]
[신마제국/종마: 걍 닭치고 달리면 되지 말이 많아]
[신마제국/묵요: 아 양심을 말아 처먹었나]
“아, 새끼들… 열 뻗치게 만드네.”
“찢어지자. 서련 형은 일단 제단 뒤로 숨으세요.”
“신호 보내면 바로 달려드는 걸로.”
“야, 강시울한테도 말해.”
저 중 실제 개개길드는 열 명도 채 안 되었다. 고작해야 여덟 명 정도가 다였다. 그 뒤로 쫓아오는 신성족은 머릿수만 보면 일단 포스 단위는 넘는 듯했다. 게다가 머리 위에 떠 있는 길드 문구. 하필 같은 출신인 R개개길드E였다.
그걸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저렇게 악착같이 쫓아오나 했더니, 눈 부릅뜨고 올 만했네. 보나 마나 이번 일로 개개길드에 대한 이름값에 대한 우열을 가리려는 것 같은데, 덕분에 서련네만 물 먹은 꼴이 되었다.
“지금.”
원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서운 속도로 도망치던 파티원들이 제각기 따로 찢어지기 시작했다. 하진과 로운, 블러더는 개개길드 쪽으로, 원호는 나머지 파티원들을 데리고 제단의 옆길로 빠졌다.
맞다이로 달려드는 하진의 모습에 기세가 산 건지, 쫓기던 개개길드도 무기를 빼들고 R개개길드E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반격이 먹혀들기야 하겠지만, 생각보다 더 상대측의 머릿수가 많았다.
당장이야 버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전으로 몰릴 경우, 백퍼 서련 쪽이 손해였다. 물론 서련도 여기서는 갓길로 빠지지 않고 킬리를 소환해 R개개길드E에게 달려들었다.
킬리를 최대한 방어형으로 돌려 어글 대용 몸빵을 맡게 한 뒤, 서련만 뒤로 빠져 공격하는 방식으로 거리를 좁혀오는 유저들을 최대한 피해 다녔다.
그래도 R개개길드E가 악명만 높은 게 아니었는지, 싸우는 수준들이 다들 상상 이상이었다. 괜히 예전에 라히섭 3대 길드로 불렸던 게 아닌 듯했다. 힐러가 없는 게 좀 흠이었지만, 그걸 보완하기 위함인지 되레 탱커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딜량이 상당히 나오는 하진과 블러더의 맹공에도 R개개길드E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역시 탱커가 한 파티만 되도 상대하기 성가셔진다.
문제는, 노린 듯이 황소처럼 달려드는 탱커들의 러쉬에 갇힌 서련이 R개개길드E에게 보기 좋게 포획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포획에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중이었고.
하필 킬리도 방어모드라 그냥 서련의 뒤를 졸졸 따라오기만 할 뿐이었다. 맞으면 반격이야 하겠지만, 그것도 크리티컬이 들어왔을 때에나 가능했기에 지금은 그냥 앞발만 구부린 채였다.
음… 우리 킬리 울겠네.
비단 킬리뿐 아니라, 다들 한 걸음씩 물러나 끌려가는 서련을 황망히 바라보고만 있는 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같잖은 인질극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악악귀: 덤비지 마라 샛끼들아ㅋㅋㅋ 니들이 아주 끔찍하게 아끼는 메기 죽이기 싫음ㅋㅋㅋㅋ]
[아블스: 하, 새끼 졸라 찰져서 잡기도 힘드네]
[독화살: 뭐 메기 잠옷?ㅋㅋㅋㅋㅋ ㅈ같은 소리들 하시넼ㅋㅋㅋㅋㅋㅋ]
[뱀신: 오지 말라고]
철방패가 순식간에 서련의 캐릭터 위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피가 훅 깎이자마자, 채팅창은 온갖 욕설로 도배되었다. 서련의 옆쪽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아오, 이 좆 같은 새끼들!”
“개 같은 놈들이 하여간 존나 나대지.”
“짜증나 죽겠는데 어떻게 안 되겠냐?”
그냥 콱 죽을까 하다가, 제단 안쪽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 절미들을 발견하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서련을 구하겠다고 난리인 걸 야생닭이 말리고 있었다.
여기서 죽으면 다들 따라 죽겠다고 소란을 피울 것 같아서, 서련은 그냥 얌전히 끌려가주기로 했다. 게다가 가는 쪽을 보니 마침 딱 제단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알아서 척척 정예몹들 정리까지 해주고 있었다.
[악악귀: 메기야 고맙지 않냐?ㅋㅋ 형들이 어? 몹까지 정리해주잖아]
[독화살: 그러니까 나대지 말고 짜져있어 ㅅ꺄]
[뱀신: 공개제물 콜?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키키아: 왜 개개길드 냅두고 저한테 그러세요]
[악악귀: 아옠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
[독화살: 난 사람이라 메기말 모르는뎈ㅋㅋㅋㅋ]
[아블스: 제보ㄱㄱㄱㄱㄱ]
어차피 제물로 쓰려면 살려놔야 되니 당장에 죽이지야 않겠지만, 질질 끄는 꼴을 보니 제보를 보고 유저들이 몰리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악악귀: 뒤로 빠져ㅅㅂ ㅊ맞고 싶나]
[독화살: 샛끼들 쫄기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블스: 저 시뱀들 보솤ㅋㅋㅋㅋ 신파찍넼ㅋㅋㅋㅋㅋㅋㅋ]
제단 아래를 보자, 아블스의 말대로 신파를 찍고 있는 강마와 절미들의 모습이 보였다. 울고불고 난리 난 모습 뒤로 건블리아와 야생닭이 포기했다는 듯 물러나 있는 게 보였다.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지금 여기 난리 났는데^^ 가도 되나?}
{귓속말/매익화님께: ㄲㅈ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너무해서 가야겠네}
파리가 한 마리 더 꼬였다. 서련은 한숨을 내쉬며 제 캐릭을 제단 원형진 안으로 던져놓고 아티팩트를 부수는 R개개길드E를 바라보았다. R개개길드E는 아티팩트를 딱 3개까지만 부숴놓고 껄렁하게 앉아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악악귀: 아 구경꾼들 늦으시네]
[아블스: 메기가 오늘은 탈피를 안하시넼ㅋㅋㅋㅋㅋㅋㅋ]
[뱀신: ㅈㄹㅋㅋㅋㅋㅋ 아니 그래, 메기야 자게에 떠도는 트롤얘기는 대체 뭐냐?ㅋㅋㅋ]
[독화살: 트롤ㅋㅋㅋㅋㅋㅋ ㅅㅂ 넌 그말을 믿냨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 실컷 웃어라. 서련은 귀찮은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앞에 놓인 바나나 우유를 쪽 빨아 마셨다. 그렇게 한 통을 딱 비우고 나자, 지도 끄트머리서부터 붉은 점이 바글바글 차오르기 시작했다.
“도와줘?”
“됐어.”
“에이, 형. 저희만 믿으세요.”
“싹 발라다 회 떠 드리겠습니다.”
여유와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가 없던 걱정까지 싹 다 날려주는 기분이었다. 애초 컨으로는 적수가 없는 녀석들이니, 서련이 걱정할 입장은 아니었다. 강마와 절미들은 음… 알아서 하겠지.
구경꾼들이 바글바글 모여들기 시작하자, 앉아 노닥거리고 있던 R개개길드E도 그제야 하나둘 몸을 일으키며 손가락을 풀듯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서련이 한 일은 그냥 얌전히 앉아 주위를 훑어본 것밖에 없었다.
서련을 끌고 제단 위로 올라온 유저들은 악악귀와 아블스, 독화살과 뱀신 이렇게 넷이었다. 나머지는 R개개길드E의 길드원들은 리젠되는 몹들을 처리하기 위해 제단의 아래쪽을 서성이며 킬레아 쪽을 견제하고 있었다.
[맹신족: 메기얔ㅋㅋㅋㅋㅋㅋㅋㅋ 너 거기서 뭐하는뎈ㅋㅋㅋㅋㅋㅋ]
[계수나무: 웬 인질놀이?ㅋㅋㅋㅋㅋ 메기야 장난인거 다 안다. 올라가기전에 내려온나]
[광딜힐딜: 야이앀ㅋㅋㅋㅋㅋ 저 정도면 놀아주는 거잖앜ㅋㅋㅋㅋ]
[복복어: 메기야 잠옷 수가 너무 모자란 거 아니냐?! 나도 좀 사입자!!]
[신마제국/키키아: 저 지금 탈피중이라 힘든데 다음에요]
[빌스키: 키키야?ㅋㅋㅋㅋㅋㅋ 너 내가 우리 땅 오지 말라고 악세까지 던져줬는데 꼭 여기서 탈피해야겠냐?ㅋㅋㅋㅋㅋㅋ 왓?ㅋㅋㅋㅋㅋㅋ 아니 대체 왜 우리땅에서 힘들게 탈피하는 거? 내가 우리땅에서 네 잠옷소식까지 들어야 되겠냐고 아오 저 메기샛끼가]
[맹신족: 힘든거 좋아하넼ㅋㅋㅋㅋㅋㅋ 지롤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구경하러 온 게 목적이었는지, 몰려온 신성족들은 구경꾼을 자처하며 제단 근처에 둥지를 틀고 앉았다. 팝콘까지 꺼내 씹을 기세를 보니 어째 그냥 갈 것 같진 않았다.
그 옆으로는 R개개길드E한테 발린 원조 개개길드가 사망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입도 뻥긋 안 하는 걸 보니 심히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서련 쪽은 아직 죽은 사람 하나 없으니.
[악악귀: 메기샛끼 인기 많은 거 보소?ㅋㅋㅋㅋㅋ]
[뱀신: 놀아주긴 ㅅㅂ 우리가 놀아주는 거고만 눈깔들 삐었나]
[독화살: ㅈ까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블스: 시밸들아 구경이나 잘해ㅋㅋㅋㅋ]
[신마제국/키키아: 저좀 구해주실 분?]
그냥 한 번 해본 말인데, 구경하고 있던 신성족들이 죄다 컹컹 짖으며 본인들이 죽여주겠다고 개 난리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지금이야 앉아서 박수까지 치며 구경하고 있는 것 같아도, 제단 아래로 내려가면 무기부터 뽑아 들고 달려들 게 뻔했다.
손만 빨고 지켜보던 서련의 포스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무슨 신호를 주고받은 건지, 제단 옆의 갓길로 피신해 있던 서련의 길드원은 물론 주춤주춤 물러나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블러더들도 죄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순식간에 제단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악악귀: 줫같은 넘들봐라. 할짓없어 나대네]
[아블스: 왜뭐ㅅㅂ]
[독화살: 메기 한대 더 맞을까?ㅋ]
채팅이 떠오르기 무섭게 서련의 캐릭터 쪽으로 방패가 훅 뻗어 나와 후려치고 지나갔다. 피가 일부 깎이기 무섭게 포스원들이 다시 삿대질을 시작했다.
[신마제국/강마: 야이ㅅㅂ샛끼들아니들이디지고싶어서환장한모양인데ㅅㅂ내가가면니들절대가만안둔다]
[신마제국/베르르: 이 ㅅ밸 닭같은 샛끼들아아아악!! 아 광견형들 뭐하는데!!]
[신마제국/건블리아: 아니 그래도 띄어쓰기는 좀 하고 말해라; 저건 대체 뭔 말이여;]
[신마제국/순한양: 니들 ^^ㅣ발 지금 때렸냐? 거기 딱 있어라. 내가 이따 가서 조져줄테니까 목닦고 기댕기고 있어 이^^ㅣ발럼들아]
[신마제국/휴리사: 키키야 기다려. 저것들 다 **고 누나가 꼭 구해줄게]
[신마제국/묵요: 우리 길드가 너무 열일해서 할말이 없네]
[신마제국/킬레아: ㅈ같은 샛끼들이 ㅅㅂ피터지게 맞고 싶어 환장했나]
[독화살: 어쩔ㅋㅋㅋㅋㅋㅋ 꼬우면 덤비시든가ㅋㅋ]
[아블스: ㅋㅋㅋㅋ 메기족들 말본새보소ㅋㅋㅋㅋ]
[뱀신: 메기족들ㅋㅋㅋㅋㅋㅋㅋ 이얔ㅋㅋㅋㅋ 개같이 나대는 메기족들ㅋㅋㅋㅋ니들은 저기 저 심해가서 사람 좀 되고 와랔ㅋ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키키아: 아 그래요?]
서련의 입술 끝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서련의 말에 R개개길드E가 웃다 말고 서련 쪽을 돌아보았다. 아직 아티팩트는 세 개까지만 깨진 상태였다. 남은 아티팩트의 위치를 확인한 서련은 제 캐릭 위로 방패가 날아든 순간 상태이상 제거 물약을 먹고 포획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잽싸게 킬리의 스킬패턴을 공격모드로 전환시키고 쉴드를 펼쳤다. 불과 2초도 안 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신마제국/키키아: 일단 좀 맞을까요?ㅎ]
그러고는 상큼한 말과 함께 멍해 있는 R개개길드E에게 킬리를 보냈다. 불꽃을 휘감은 킬리의 주먹이 땅을 쾅 내리친 순간, 땅이 갈라지는 이펙트와 함께 그게 시발점이라도 된 듯 제단을 둘러싸고 있던 포스원들도 다른 R개개길드E의 길드원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실 원래는 좀 더 유유자적 놀면서 매익화까지 왔을 때 한 번에 터뜨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얌전히 잡혀 제단까지 끌려왔던 건데, 제 길드원들과 블러더를 싸잡아 욕하는 저 개 같은 행동을 보니 매익화고 뭐고 이건 그냥 참고 있는 게 호구였다. 그래서 안 참기로 했다.
[악악귀: 뭔 근자감이여]
[뱀신: 메기 기억력 3초?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블스: ㅅㅂ 순간 ㅈㄴ 쫄았네ㅋㅋㅋㅋㅋㅋㅋ]
독화살이야 아처라 회피기로 피했다고 쳐도, 다른 이들은 방어력이 상당한 직업이라 그런지 킬리의 광역기를 맞고도 큰 타격이 없었다. 물론 광역딜은 한방 딜과 달리 공격력이 많이 낮아 맞아도 즉사시키지는 못했다. 사실 이건 그냥 일종의 어그로 더하기 방심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꼼수일 뿐이었다.
[신마제국/키키아: 제물하고 싶으신 분?]
[독화살: 뭐ㅅㅂ]
[악악귀: 먼 개솔?ㅋㅋㅋㅋㅋㅋㅋㅋㅋ]
4:1인 상황. 보통이면 질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서련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필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공적 아이템으로 도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서련이 지금 현재 가장 믿고 있는 스탯이었다. 바로 ‘적중 스탯’.
-‘망령의 저주’를 사용해 주변 적들에게 변이 저주를 걸었습니다. 변이 마법 남은 시간 25초.
낄낄거리고 있던 네 명의 유저가 저항할 틈도 없이 전부 기이한 망령으로 변해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 중 탱커를 킬리에게 맡겨 놓고, 서련은 손목과 목을 살짝살짝 꺾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풀자마자 키보드를 타닥 두드렸다.
[신마제국/키키아: 제가 그냥 정할게요. 이 개**들아]
그 말을 끝으로 서련은 독화살을 남겨둔 채 변이된 악악귀와 아블스에게 폭딜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번갈아가며 넣다가, 변이가 풀릴 때 즈음 다른 변이 스킬로 다시 굴리고 가지고 노는 척 깔짝대다가 다시 신나게 폭딜을 찔러 넣었다.
그렇게 둘을 딱 바르고 나자, 킬리도 뱀신을 죽였는지 타이밍 좋게 고개를 번쩍 들고 서련 쪽을 돌아보았다. 서련은 독화살에게 가려는 킬리를 재빨리 방어모드로 전환하고 여유만만한 모습으로 독화살에게 다가갔다.
[신마제국/키키아: 음 저항 좀 키우셔야 할 것 같은데]
[신마제국/키키아: 아 그 전에 컨부터 좀 키우고요. 응? 알겠지]
[독화살: 꺼져 **]
[악악귀: 이얔ㅋㅋㅋㅋㅋ 컨이란닼ㅋㅋㅋㅋ 장비믿고 개깝치는 메기 샛끼가]
서련은 아직 변이 중인 독화살을 보주로 퍽 후려쳤다. 곧이어 ‘ㅡㅡ’라는 글자가 올라오고 죽어 뻗은 악악귀 외 나머지 놈들이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내로남불 쩌는 그 모습에도 서련은 가볍게 웃는 모션을 취해주곤 독화살에게 다시 변이 스킬을 걸었다.
[신마제국/키키아: 우리 야생형 어디있을까요?]
[신마제국/야생닭: 나? 나?! 키키야! 형은 싫다!]
[신마제국/키키아: 저 아직 암말도 안했어요 형]
저 아래 혼자 경기를 일으키듯 푸드득거리는 캐릭이 눈에 들어왔다. 서련이 네 명을 제압하는 사이 서련의 일행들도 다른 R개개길드E 길드원을 바르고 착실히 교통정리까지 마친 후였다. 남아 있는 신성족은 팝콘을 뜯겠다고 제단 밖에 앉아 있던 신성족들과 제물로 쓰일 독화살뿐이었다.
아까와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구경꾼을 자처하던 신성족이 지금은 무기를 꺼내 들고 으르렁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바로 앞에 정예몹이 리젠되어 섣불리 다가오진 않고 있었다. 그들이 정예몹들 뚫고 오거나 공격하는 순간 서련 쪽에 선공권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신마제국/키키아: 야생형 잠깐 오실래요. 퀘 깨셔야죠]
[신마제국/야생닭: 아니 왜 나냐고ㅠㅠ]
형이 필요해서요. 그 말을 꿀떡 삼킨 채 서련은 야생닭은 어르고 달래 위로 끌어올렸다. 야생닭이 주뼛주뼛 다가오기 무섭게 서련은 킬리에게 1개 남은 아티팩트의 파괴를 지시했다.
-아티팩트가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독화살을 원형진 안에 남겨두고 계단 쪽으로 슬쩍 나온 서련은 아티팩트가 파괴되자마자 즉사하는 독화살을 딱하게 보며 전투준비에 나섰다. 독화살이 즉사한 자리 위로 화려한 빛을 흩뿌리는 무언가가 점차 형태를 잡아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 희미한 형태는 독화살의 캐릭이 신마제국으로 자동 귀환된 것과 동시에 선명해졌다. 곧이어 거대한 이빨을 가진 백호가 포효를 터뜨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제단에 신비한 영물이 강림하였습니다.
[신마제국/키키아: 야생형 이제 죽여주세요. 저는 보조만 할게요]
[신마제국/야생닭: 이것만 죽이면 되는 거지?]
서련은 발을 묶는 디버프 스킬을 영물에게 걸고 뒤로 쭉 빠져주었다. 야생닭은 금세 스킬을 돌리며 영물에게 극딜 마법을 날려 넣기 시작했다. 불안한지 이것만 하면 되는 거냐고 계속 물어왔지만, 설련은 일단 침묵으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신마제국의 ‘야생닭’이 신비한 영물의 ‘이빨’을 획득하였습니다.
[신마제국/야생닭: 퀘 다 됐어? 길마형도 됐어요?]
[신마제국/건블리아: 됐드아!ㅋㅋㅋㅋ 수고했다 야생앜ㅋㅋㅋㅋ 아니 키키야ㅋㅋㅋㅋㅋ]
[신마제국/베르르: 저도 됐어옄ㅋㅋㅋㅋㅋ 울 키키형 찐ㅋㅋㅋㅋㅋㅋ]
[신마제국/묵요: 아 저도 됐네요]
여기저기서 퀘스트 완료 소식이 떠올랐다. 다행히 전부 사정거리 안에 있어 퀘스트 완료가 함께 공유된 듯했다. 좋다고 펄쩍펄쩍 뛰는 야생닭을 잠시 눈여겨본 서련은 뺨을 긁적거리며 어떻게 해야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나름 고심했다.
{귓속말/야생닭님께: 음 야생형 저희 그때 했던 필살기 있죠?}
{귓속말/야생닭님으로부터: 응 절대 안해ㅋㅋㅋㅋㅋ}
야생닭은 서련이 뭘 말하기도 전에 하하 웃으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나 서련도 꿋꿋하긴 마찬가지였다.
{귓속말/야생닭님께: 그거 다시 한번 갈게요. 아, 착지먼저 해야겠네}
{귓속말/야생닭님으로부터: 그거 캐스팅 시간도 많이 걸리고 착지까지 하려면... 형 저기 보내려는 거 아니지? 응? 키키야?}
{귓속말/야생닭님께: 그냥 필살기 한 번 쓰고 닭장갈게요. 제가 보조할 테니까 저만 믿으면 돼요}
{귓속말/야생닭님으로부터: 형 그냥 집에 가면 안될까?ㅠㅠ 나 분명 죽을 거야... 죽을거라고ㅠㅠ}
{귓속말/야생닭님께: 알았어요, 알았어. 킬리 붙여 줄게요}
{귓속말/야생닭님으로부터: 알았어... 하면되잖아...ㅠㅠ 형 진짜 꼭 살려야된다?}
{귓속말/야생닭님께: 저도 같이 갈테니까 걱정마세요ㅋ}
어느 정도 어르자, 뒤늦게야 하겠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서련은 제단 밖에 무더기로 모여있는 신성족을 보며 눈을 빛냈다. 타이밍은 매익화가 나타났을 때다.
다들 말도 안 해줬는데, 어떻게 알아챈 건지 눈치껏 정예몹을 사이에 대고 신성족들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깨작거리며 도발을 하는가 하면, 공격할 것처럼 페이크를 넣기도 했다.
{귓속말/야생닭님께: 형 갈게요. 준비하세요}
{귓속말/야생닭님으로부터: 그래... 형 꼭 살려야 된다?}
네, 꼭 살려드릴게요. 매익화만 잘 죽으면요. 서련은 애써 그 말을 삼켜 먹으며, 점차 붉어지기 시작한 지도를 예의주시했다.
“뭐야, 웬 매익화?”
“서련 형, 형이 부른 거 아니죠?”
“응, 아니야.”
“뭐야, 그럼. 아, 또 꼬장 부리려고 왔나….”
서련의 입가에 의미 불명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선은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매익화 길드에 꽂혀 있었다. 다른 매익화 길드원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게 다 길마를 잘못 만난 덕분이니 앞으로 말려달라는 의미로 가볍게 경고해주기로 했다.
{귓속말/야생닭님께: 킬리랑 최대한 버텨볼게요. 필살기 쓰고 바로 건블형 있는 곳으로 달려가면 되요}
{귓속말/야생닭님으로부터: 그래ㅠㅠ}
다리를 덜덜 떨고 있을 야생닭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도, 세상에 공적만큼 좋은 게 어디 있으랴. 이참에 야생닭도 공적템 좀 맞추면 쟁이 좀 더 수월해져 덜덜 떠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신마제국/키키아: 아 매익화님은 왜 자꾸 오세요]
[매익화: 우리 애들 공적이 모자라서 그러는데 왜 그쪽이 불만인지 모르겠네ㅋ]
[신마제국/키키아: 그래요 그럼]
서련은 매익화 길드가 으르렁거리는 신성족들과 만나길 기다렸다가 3미터 정도 남았을 때, 날개를 활짝 펴고 뛰어내렸다. 방향은 무더기로 모여있는 신성족들 쪽이었다.
{귓속말/야생닭님께: 지금 뛰세요, 형}
서련의 말에 우왕좌왕하던 야생닭이 뒤이어 날개를 펴고 폴짝 뛰어내렸다. 서련의 등장에 신성족들은 저들이 먼저 때리겠다고 앞다투어 한곳을 향해 엉겨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지점에 먼저 착지한 건 서련이 아닌 킬리였다.
-신마제국의 ‘키키아-킬리’가 폭쇄의 혈격을 사용해 주변 적들에게 광역기 데미지를 주었습니다.
킬리를 보자마자 식겁해 뒤로 물러난 유저들은 살아남았지만, 미처 도망가지 못해 광역기 데미지에 넉백을 먹고 넘어진 유저들은 잇따른 킬리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명을 달리해야 했다.
덕분에 순식간에 킬리 주변은 금세 깨끗해졌다. 몹들을 등진 채라, 위치도 그럭저럭 포위되지 않는 선에서 잘 잡았다.
쉴 새 없이 공격하는 킬리를 피해 뒤로 물러나던 유저들은 착지하는 서련을 보고 다시 뛰듯이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소환사의 전매특허인 망령의 저주를 걸어주자 다시 뒤로 멀찍이 멀어졌다.
[신마제국/키키아: 좀 덤벼봐요. 특히 거기 매익화씨]
[매익화: 메기는 좀 잡을 수 있는데. 아 회쳐줄까?]
[신마제국/키키아: 아예]
“하진아.”
“어.”
서련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하진을 낮게 불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과 함께 하진을 선두로 블러더와 길드원들이 일제히 정예몹을 죽이고 서련이 있는 곳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때문에 신성족들은 서련의 뒤로 착지하는 야생닭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사실 보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이미 캐스팅에 들어갔으니까.
[신마제국/키키아: 갑니다]
첫 방은 역시나 킬리의 광역기로 시작되었다. 광역기가 훑고 간 대지 위로 유저들이 미친 듯이 엉겨 붙기 시작했다. 서련은 그 틈에 킬리를 야생닭 옆에 붙여 놓고 뒤로 살금살금 빠지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된 곳을 빠져나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옆을 힐끗 보자, 하진이고 로운이고 원호고 전부 모니터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모르고 있었다. 사납게 치뜬 눈들이 당분간은 괜찮다고 서련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살금살금 뒤로 빠지던 서련이 달리기 시작한 건, 야생닭의 필살기인 지옥의 겁화가 전장을 휩쓸며 사망 소식을 무더기로 알렸을 때였다.
필살기를 쓰자마자 뒤로 쏜살같이 빠지는 야생닭을 확인한 서련은 킬리를 소환해제하고 제단을 지나 옆에 있는 숲속으로 재빠르게 빠졌다.
화면을 돌려 뒤를 보자 다들 희희낙락 날뛰고 있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쫓아올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사위가 고요해진 숲속을 내달리며 서련은 숲 끝에 다다라서야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직까지 길드 내에서도 별말이 없는 걸 보면 서련이 사라진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접속해 있겠지. 주말은 대개 항상 들어와 있었으니, 오늘도 분명 들어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찾아볼까 했지만, 서련은 일단 자리부터 피하기로 했다.
높은 절벽을 타고 활강을 하며 제단과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에야 서련의 부재에 대한 길드원들의 통곡 어린 말들이 떠올랐다. 첫 시작은 강마의 귓속말로 시작되었다.
{귓속말/강마님으로부터: 우~리~메~기~형~이~어~디~있~을~까~?}
“형, 또 어디 갔어요.”
“와, 서련 형 진짜 잽싸네. 어떻게 그 사이를 못 참고 또 도망을 가지?”
“그래서 어딘데.”
그다음은 눈을 흘겨 뜨고 있는 비글들이었다. 서련은 어색하게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해야 했다.
[길드/건블리아: 뭐야 우리 키키 어디갔어. 아니 이 메기가]
[길드/키키아: 형 저 10분만 다른거 하다 갈게요]
[길드/베르르: 아 혀엉! 위치 빨랑 불어요 추적하기 전에]
[길드/순한양: 난 이미 추적중ㅎㅎㅎㅎㅎㅎ 어라라라라ㅎㅎ 여긴 베르딕 산기슭?ㅎㅎㅎㅎ]
[길드/키키아: 진짜 형 몬스터 한 마리만 잡고 갈게. 이거 못하면 안돼]
[길드/야생닭: 형은 누가 뭐래도 우리 키키 믿는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휴리사: 하이고ㅋㅋㅋ 살았다고 아주ㅋㅋㅋㅋ]
[길드/건블리아: 그래 퀘도 깨줬는데ㅋㅋㅋㅋ 나는 진짜 우리 키키없음 살 수가 없다 어흑흑]
[길드/베르르: 아재형들 왜 단체로 뒷북이신지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그래봤자 키키형은 형들이랑 안 놀거거든여]
[길드/건블리아: ...묵요야 얘네좀 어떻게 안 되겠냐?]
[길드/묵요: 절미들 또 개기는 거야?^^]
[길드/호백조: 쩔미들 형들이랑 산책ㄱ?]
[길드/베르르: 아 왜요! 아 진짜 나는 뭔 말도 못하나아악!!!!! 아악 서서러워어어어!!!]
[길드/순한양: 쩔미들 산책 시킬꼬야?]
[길드/킬레아: 아주 쇼를 해라]
[길드/베르르: 됐어여ㅠㅠ 이씨... 난 키키형만 있음 돼... 아냐 우리 생닭형도 조금은... 울 누님도... 광견들은 빼고]
[휴리사: 어휴 알겠다 알겠어ㅋㅋㅋ 아이고 서러워요ㅋㅋ 뚝ㅋㅋㅋ]
서련은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산기슭 아래에 선 채 길드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친근함이 지금은 또렷하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도 물론 다정하고 친근했던 사람들이다. 다만, 서련이 다가갈 용기가 없어서 보지 못 했던 것뿐.
그게 하진과 로운, 원호가 들어오면서 이제야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래, 이제야 보이고 느껴졌다. 미안할 만큼 말이다.
[길드/키키아: 저 곧 갈게요. 저는 저희 길드밖에 없어요]
[길드/건블리아: 캬ㅋㅋㅋㅋㅋ 당연한 말을 우리 메기가 뻐끔거리면서 하네ㅋㅋㅋ]
[길드/야생닭: 아니 형;; 그러지 마요. 왜 뻐끔이야;; 키키 운다니까]
[길드/휴리사: 누나도 메기 잠옷 하나 살까?ㅋㅋㅋㅋ]
[길드/베르르: 크으ㅋㅋㅋㅋㅋㅋ 우리 누님이 글쎄 뭘 좀 아시넼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누나누나! 다음 현모때 가지고 갈게욬ㅋㅋㅋㅋㅋㅋㅋ]
[길드/킬레아: 니들 지금 뭐라고 했냐?]
[길드/묵요: 절미들 이실직고 하자^^ 잠옷이 뭐가 어떻다고?]
[길드/베르르: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다 주면 되잖아! 거 같고 싶다고 말은 못하고 되게 돌려가면서 말하네 어휴]
[길드/순한양: 내 용돈이... 내 돈... ㅠㅠ]
[길드/휴리사: 막둥이들 걱정마라!ㅋㅋㅋ 돈 다 걷어서 줄 테니까ㅋㅋㅋㅋ]
[길드/호백조: 쩔미들 형들한테 검사부터 맡자?ㅎ 또 괴상한 거 그려놓고 그러면 응? 아주 죽빵 맞아야지?ㅎ]
도란도란 올라오는 얘기를 보던 서련이 뒤늦게야 피식 웃으며 다시 캐릭을 움직였다. 약속한 대로 10분 뒤에는 정말 길드원들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꼼수를 쓰기로 했다.
이를테면, 협박이라든가.
[신마제국/키키아: 킬리한테 죽을래요, 맴돌님 소환하실래요?]
[강화사: 아니;; 키키야? 너 탈피중이라고 소문 다 났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신마제국/키키아: 죽여 달라고요?]
서련은 길 가다 높은 언덕을 오르는 신성제국 소환사를 발견하곤 곧바로 그쪽 언덕으로 넘어가 붙잡아 놓고 협박하는 중이었다. 킬리를 꺼내놓자 협박은 더 잘 먹혔다.
서련이 이 같은 행동은 하는 이유는, ‘소환’이 같은 종족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강화사: 저기 메기야? 맴댕이 소환하면 랙블이 나만 쫓아다니거든?]
[신마제국/키키아: 3초 줄게요]
[강화사: 야이 깡패샛꺄!]
[강화사: 하면 되잖아요ㅎㅎㅎㅎㅎ전 죽이지 마시고요ㅎㅎㅎㅎㅎ]
서련은 혹시나 도망이라도 칠까 올무 스킬로 다리를 묶어놓았다. 일단 다리가 묶인다고 해도 스킬은 쓸 수 있으니 소환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서련의 작태에도 강화사는 시종일관 웃으며, 부르고 있다고, 걱정 말라고 장사치처럼 손바닥을 비벼댔다.
그리고 잠시 후, 서련의 눈앞에 화려한 빛과 함께 맴돌돌이 소환되었다. 어리둥절한지 주뼛거리던 맴돌돌은 서련을 보자마자 서련 쪽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맴돌돌: 어 키키님]
[신마제국/키키아: 안녕하세요 맴돌님ㅎ]
[신마제국/키키아: 혹시 형들한테 허락받고 오셨어요?]
[맴돌돌: 그게요... 저도 모르게 클릭한 거라서요...]
결론은 눈앞에 뜬 소환창을 본능적으로 눌렀다는 소리였다. 허락이고 뭐고 지금쯤 블랙블 쪽은 난리가 났을 게 뻔했다.
서련은 잠시 신성제국 채널 쪽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아주 난리가 나 있었다.
[비연님의 외침: 이 깽깽이 색갸! 그걸 클릭하면 어떡해! ㅅㅂ 너 이샛끼 누군지 잡히기만 해봐라 아주 사지를 **해서 주겨줄테니까]
[칼트럼님의 외침: 우리 맴댕님 데려간 넘 누구?ㅎㅎㅎㅎ 내 동기 다치면 형들 출동하니까 허튼생각 맙시다ㅎㅎㅎㅎㅎㅎ]
[블라라님의 외침: 어느 겁대가리를 상실한 생키냐?ㅋㅋㅋㅋㅋㅋㅋ 하ㅅㅂ 디지고 싶으면 말로 하지 ㅅ벌넘이 어디서 잣같은 짓거리를ㅋㅋㅋㅋㅋ 쳐도랐냐?]
[건드레님의 외침: 어떤 메친 소환사 넘이냐? 지금 뉘집 깽깽이 데려가서 ㅈㄹ인지 모르겠는데 10초 세기 전에 다시 데려다 놔라]
[랙블님의 외침: 개같이 나가기 전에 좋은 말로 할 때 자진신고하고 데려다 놔. 아니면 이쪽도 개 같이 나가고]
[건담필승님의 외침: 니들 뭔일 생겼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필만세님의 외침: 블랙블 갑자기 단체로 왜 다 ㅈㄹ들이냨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제보좀 해봐랔ㅋㅋㅋㅋㅋㅋㅋ]
[개나무님의 외침: 이얔ㅋㅋㅋㅋㅋ 방목했더니 별별 ㅈㄹ같은 일들 막 생기네ㅋㅋㅋㅋㅋㅋ 니들이 ㅅㅂ 우리가 방목하는데 보태준거 있냐고 이 개같은 넘들아ㅋㅋㅋ 한번만 더 이딴짓 하면]
[금퇼님의 외침: 우리 막깽이 보신분 제보 좀 해주시죠?]
서련의 그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맴돌돌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옆에서는 올무 스킬을 푼 강화사가 눈썹을 휘날리며 도망가고 있었다.
[신마제국/키키아: 길드형들이 걱정 많이 하겠네요]
[신마제국/키키아: 형들한테 여기 베르딕 산기슭이라고 전해주세요ㅎ]
[맴돌돌: 네! 잠시만요]
[신마제국/키키아: 제가 돌보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오라고 해주세요]
이 정도면 거의 빌런 수준이었다.
맴돌돌은 소환한 당사자가 서련인 줄은 꿈에도 모를 테니 그런대로 써먹기 좋은 핑계였다. 실제로 서련은 열심히 찾아가기만 했지, 이번 같은 일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니 부정하면 믿어주긴 할 것이다.
[신마제국/키키아: 올 때까지 저랑 얘기하고 있을까요?]
[맴돌돌: 네. 저 키키님 저번에는 잘 들어가셨어요?]
[신마제국/키키아: 아 그 타협 갔을 때요? 네, 저는 늘 잘 들어갑니다ㅋ]
5분 남았다. 사실 더 눌러앉아 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냥 일찍 돌아갈 생각이었다. 블랙블도 5분 이내로는 올 것 같고.
서련은 잠시 고민하다 마음을 굳혔다.
[신마제국/키키아: 맴돌님]
[맴돌돌: 네]
[신마제국/키키아: 저도 다음에 현모하러 가요]
[맴돌돌: 진짜요?]
[신마제국/키키아: 네, 만나보려고요. 만나보고 얘기해보려고요]
누가 알까. 이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걸. 그냥 말해주고 싶었다. 무척이나 힘들게 한 결정이라서, 털어놓듯 말해주고 싶었다. 이젠 아무렇지 않다고,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서 괜찮다고, 스스로와 누군가에게 애써 말을 해주고 싶었다.
[신마제국/키키아: 그 이현님께도 전해주세요. 다음에 만나면 같이 얘기하고 싶어요]
[맴돌돌: 네! 이현님께 꼭 말씀해드릴게요! 키키님, 진짜 잘 다녀오세요!]
[신마제국/키키아: 네, 음... 그리고 좀 가볍게 입고가려고 생각중이에요]
[맴돌돌: 추워요. 꽁꽁입고 가세요ㅠㅠ]
[신마제국/키키아: 그럼 목도리만 풀고 갈까봐요ㅎ]
[맴돌돌: 어... 하고가서 풀면 안돼요?]
서련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그걸 생각 못 했네. 그러겠노라 대답하자 맴돌돌은 기쁘다는 듯 씩씩하게 대답하며 서련의 마음을 작게 다독여주었다.
맴돌돌 같은 밝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서련을 가리킬 때, 늘 조용하고 우울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상처 많은 척, 혼자만 힘든 척, 그렇게 웅숭그리고 살아간다고.
부정하지 않았었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했고. 거울을 잘 보지 않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될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쩌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거울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를 아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맴돌돌: 갔다와서 꼭 말해주세요. 진짜 듣고 싶어요!]
[신마제국/키키아: 네 꼭 말해줄게요. 그리고... 음, 형님들 다 온 것 같네요]
[멤돌돌: 오늘은 그냥 가세요?]
[신마제국/키키아: 네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오늘은 저도 길드원들이 불러서요]
[맴돌돌: 네! 키키님. 안녕히가세요]
[신마제국/키키아: 네 다음에 뵈어요]
지도에 붉은 점이 뜨자마자 서련은 미련 없이 캐릭을 돌려 왔던 길로 활강했다. 막깽이를 납치해 길드원들에게 오라 가라 한 건 좀 많이 미안했지만, 막깽이 간수 잘하라는 의미로 그냥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사실 랙블이 좀 무섭기도 했고.
서련은 잠시 멈추었다가 맴돌돌이 랙블과 조우하는 걸 멀리서 확인한 후에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불과 1분 남짓. 사실 지나도 상관없었지만, 조용한 길드 창을 보면 분명 1분이 지나자마자 무더기로 서련에게 달려들 게 뻔했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길드/키키아: 음 있잖아요]
[길드/건블리아: 됐고 메기야? 20초 남았다]
[길드/키키아: 길마형. 저기 토순이네는 하고 싶은거 있으면 콜로세움가서 토너먼트 한다는데...]
[길드/건블리아: 어째 영 불안하다...?]
[길드/키키아: 저희도 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이기는 사람은]
[길드/베르르: 원하는거 들어주기! 콜!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콜]
[길드/휴리사: 나도 콜!]
[길드/묵요: 콜]
[길드/호백조: 콜]
[길드/키키아: 그 정돈 괜찮잖아요]
[길드/건블리아: 어차피 니가 이길거잖아]
[길드/키키아: 킬레아가 이길 수도 있죠. 묵요나 백조 아니면 누나도요]
[길드/건블리아: 나는?]
[길드/베르르: 거 어르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맙시다]
[길드/건블리아: 그래... 내가 그렇지 뭐ㅠㅠ 니들 좋을대로 해라 이눔들아]
“왜, 뭐 하려고.”
“나중에 알려줄게, 나중에.”
서련이 생글 웃으며 말했다. 하진은 잠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빤히 보다가 뒤늦게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로운과 원호도 빠질 수 없다는 듯, 슬금슬금 끼어들었다.
“서련 형, 사진 다시 찍는 것도 소원으로 돼요?”
“아니면, 저희랑 또 데이트하시죠? 이번에도 개하진 빼고요.”
“끌려나가고 싶으면 더 해라.”
“와… 서련 형, 개하진 이놈이 지금 얼마나 내숭 떨고 있는 거냐면요.”
“형 없었으면 저희 벌써 병원행입니다. 지금쯤 갈비뼈 4대씩 나갔을걸요.”
“하, 이 개 같은 새끼. 얌전한 척 개쩔지. 뭘 봐, 새꺄! 뒤에 서련 형 있거든?!”
요란하게 떠돌던 말은 하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조용해졌다. 대신 끌고 나갈 것처럼 난리를 피워대는데, 저 멀리서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피시방 사장님이 보일 정도였다.
서련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모니터 쪽으로 다시 돌아앉았다. 왜 셋 다 철이 안 드는지 모르겠다.
[길드/건블리아: 이 메기얏! 너 어디냐! 지금 시간 지났다]
[길드/키키아: 네 갑니다. 가고 있어요]
비글들 보느라 늦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서련은 조금 억울한 심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길드원들을 만난 건, 숲속 중간 즈음이었다. 참지 못하고 달려온 길드원들의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옆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는 비글들과 함께 시야에 어지럽게 박혀 들었다.
다행히 벽 쪽 라인인데도 사람들이 없는 구석자리였으니 망정이지, 있었으면 아주 온갖 민폐소리 다 들으며 쫓겨났을지도 몰랐다.
말리느라 고생인 사장에게 서련은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며 서련은 두 개째 바나나 우유를 쪽 빨아 마셨다. 물론 말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지금 끼어들면 새우등만 터지는 꼴이었다.
결국 그날, 소동이 진정된 건 서련과 길드원들이 신마제국으로 귀환하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하진이 두 비글을 끌고 나가는 데 실패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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