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장. (21/28)

12장.

피가 번져있던 바지. 죄지은 듯 웅크린 어깨.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뺨 위에 자리했던 손찌검 자국.

자신을 함부로 한 대가는 어머니에게 맞은 따귀만큼이나 아프게 서련에게 돌아왔다. 집 앞에 서서 몇 번이나 손찌검을 받아야 했다. 그 추운 날, 뺨이 벌겋게 틀 정도로 맞았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원망과 비난의 말을 들어야 했다.

얼마나 그렇게 모진 말을 듣고 있었는지, 손끝을 움직이기 힘들 만큼 몸이 얼어붙었을 때 하진이 나타났었다. 싸늘했던 그 눈빛에 스친 욕지거리가 섬뜩했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서련이 아닌 서련의 어머니로 향했다.

“걱정이 먼저 아닌가? 이렇게 추운 날 패딩도 없이 교복 달랑 입고 있는 사람 밖에 세워두고 몰아세울 만큼 아줌마 위신이 그렇게 대단해? 아파서 절뚝거리는 모습 안 보여? 피가 저렇게 나는데, 생각하는 게 고작 그런 것뿐이냐고.”

그 말이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프게 다가왔다. 그 말은 양날의 검이 되어 서련에게 돌아왔다. 그런데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시선을 옮겨 다니는 어머니를 옹호해주지 못했다.

“아줌마. 나 아줌마 인정 안 해. 아버지가 데려온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있는 건데, 나한테 엄마 노릇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뭐, 지금 보니 딱히 엄마 노릇 할 만한 사람으로도 안 보이네.”

그러지 말라고, 다 제 잘못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열리지 않았었다. 단지 하진이 벗어 걸쳐주는 롱패딩만 생명줄인 양 붙잡은 채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하진에게 손목이 잡힌 채 절뚝거리며 그곳을 벗어났다.

하진의 손에 붙들려 간 곳은 집하고 먼 오피스텔이었다. 가는 동안에도 서련은 하진이 준 패딩만 붙잡은 채 덜덜 떨고 있어야 했다. 무서워서 고개도 들지 못했었다.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하진은 서련을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게 했다. 덜덜 떨리던 몸이 안정되자, 찾아온 건 무서움이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잘못 하나에도 버려질 것 같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모든 게 무서웠었다.

하필 눈에 들어왔던 것도 바닥에 버려진 듯 내팽개쳐진 교복이었다. 인지하지도 못했던 피가 묻은 바지였다.

“…합의였어?”

나직하게 묻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질타도 없었다. 그 말에 서련을 힘겹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울어. 왜… 이 꼴이냐고. 왜 죄지은 것처럼 울면서 그러고 있어, 왜.”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이 맞아 벌겋게 부은 상처를 쓰리게 해서인지, 더 무서웠었나 보다. 그렇게 울었던 걸 보면.

“몰랐어…. 이렇게 아픈지 몰랐어. 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서 피가… 피가 이렇게 나는지 몰랐어.”

“그 새끼는. 그 새끼는 어쩌고. 그 새끼가 데려다준 거 아니야?”

서련은 그저 하진의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진은 눈을 감고 욕설을 내뱉었다.

“하, 씨발….”

“사람들이 다 봤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고 이러고 왔어…. 버스타고… 길거리 다니면서… 흑….”

“울지 마. 네 잘못 아니야.”

“전부… 전부 내 탓 같아…. 그냥 모든 게 다 내 잘못 같아…. 전부 다. 흐윽….”

“…네 잘못 아니야.”

아팠던 그 행위가 정상이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몸을 함부로 한 대가는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상처와 함께 돌아왔다. 그런데도 내내 스스로만 탓했었다. 바보처럼.

푸딩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 일 때문이었다. 배앓이를 하며 비몽사몽 자던 사이 하진이 나가 먹을 걸 사 왔었는데, 속이 좋지 않아 아무것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먹으라고 등을 떠미는 터라 그나마 먹을 수 있어 보이는 게 푸딩뿐이라 먹은 건데, 깨끗이 비우고도 모자라 입맛까지 다셔야 했다.

하진이 집에 푸딩을 사 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간식이라고는 모르고 살던 애가 집에 푸딩을 그렇게 사다 놓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처음엔 손도 대지 않았는데, 줄기는커녕 많아지는 걸 보고서야 하나씩 꺼내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푸딩을 먹고 배탈이 난 후부터는 수량이 확 줄어 한동안은 간에 겨우 기별이 갈 정도밖에 먹지 못하는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녀석이었다, 하진은. 말보다 행동을 보이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고 감싸주고 유일하게 서련을 옹호해주는, 그런 녀석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올리자, 어렴풋한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번, 두 번 깜빡이자 시야는 곧 선명해졌다.

환한 햇빛이 침대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서련은 한참이나 몽롱한 눈으로 햇빛을 좇다가 목을 지분거리는 느낌을 깨닫고는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꽉 죄어들고, 이번엔 어깨선 위로 깨무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프다기보다는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성하진, 너 이게 아침부터 뭐 하는 짓이야.”

“뭐. 내가 이 꼴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서련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진은 이번엔 서련의 목덜미를 깨물거렸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딱히 이 꼴이래 봤자, 선정적인 모습이나 느낌은 아니었다. 옷도 제대로 입고 있는 상태였고. 그냥 살을 살짝 깨물깨물 하는 정도일 뿐이었다.

“하진아, 숨 막히니까 좀 놔 봐.”

도통 놔줄 생각을 안 하는 게, 이러다 날 샐 기세였다. 푸딩도 먹어야 하고, 또 푸딩도 먹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얼마나 이러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철없는 저 때문에 고생한 것만 해도 한둘이 아니라서, 조금 맞춰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반대로 봐주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이쯤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하진아.”

“왜.”

“계란말이 해줄게.”

하진의 행동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딱히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갈 곳 잃은 것처럼 흔들리고 있을 눈동자를. 엄청난 고민을 하는지, 하진에게서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곧 서련의 허리를 단단히 안고 있던 팔이 스르륵 풀렸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뒤를 돌아보자 못마땅한 표정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하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콧등을 살짝살짝 찡그리는 게 금방이라도 다시 달려들 것 같았다. 서련은 발톱을 보였다 숨겼다 하는 하진을 보다가 그의 뺨을 양손으로 잡아 쥐었다. 날카롭게 떠진 눈이 서련을 지그시 응시했다. 무서울 정도로 새까만 눈이었다.

사실 아직 확신이 서질 않았다. 이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혹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잘해나갈 수 있을지. 하진과 가족이었던 사실에 대한 주의의 시선 역시 무서웠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을 뒤로하고서라도 함께 살고 싶었다. 곁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다가가기로 했다. 이제껏 너무 피하기만 해서 다가가는 게 어색했지만, 천천히라도 나아가 보기로 했다.

허리 뒤로 두터운 팔이 감겨드는 게 느껴졌다. 등을 쓸고 올라가는 간지러운 손끝이 날개 뼈를 건드린 순간 서련도 고개를 기울여 하진의 입술 위로 짧은 숨을 부딪쳤다.

짧게 닿았던 키스는 하진이 입을 벌려 고개를 기울인 순간 깊어졌다. 뜨거운 숨이 비벼지고, 서련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렇게나 뜨거울 수 있다는 걸, 이제껏 모르고 살아왔다. 온몸으로 저를 원하는 하진의 기세가 사뭇 사나운데도 서련은 먹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숨이 막힐 때까지 내몰리다 보면 자꾸만 깨닫게 된다.

그 사람에게 자신은 액세서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어리고 풋내 나는, 아직 사회의 때가 묻지 않아 독특해 보이는 그런 액세서리. 그걸 하진과 함께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감당해 보기로 했다. 시선도, 하진도, 앞으로의 일도.

지금은 그냥 이 숨 막히는 집착에 잠시 취해있고 싶었다. 모든 걸 잊고 하진에게 데이고 싶었다.

***

서련과 하진이 피시방을 찾은 건, 정오가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웬일로 늦게 왔냐며 묻는 로운과 원호는 서련을 보자마자 영화를 봤던 그 날의 일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서련 형, 바로 집에 안 갔죠?! 어디 갔었어요!”

“아니, 개하진이 글쎄 저희를 얼마나 잡아먹으려고 했는지 아세요? 저거 진짜 완전 내숭이라니까요?! 와, 지금도 혼자 자빠져서 모른 척 쩌네!”

“아니, 저기 얘들아….”

“그래서 형 어디 갔었어요? 안 되겠다, 다음엔 문 앞까지 바래다줘야겠네. 다음엔 저희 먼저 보내기 없기?”

“그날 잘 들어가긴 했죠? 아니, 우린 진짜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식겁했잖아요. 전화해도 안 받고….”

이 난리 속에 하진은 웬일로 말리는 기색 없이 자기 자리에 앉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아마 다신 이런 일 없도록 대비해 놓는다고 내버려 두는 것 같은데, 덕분에 두 비글에 치여 서련만 넝마가 되어야 했다.

“다음이고 뭐고, 다신 없어.”

서련이 자리에 앉자마자 하진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것도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말하는데, 그 모습을 보던 로운이 희한한 걸 봤다는 듯 슬쩍 물어왔다.

“서련 형, 개하진 뭐 잘못 먹었어요?”

“그러고 보니 물을 왜 저리 벌컥벌컥 마시지?”

“그게….”

“신경 꺼라.”

서련은 조금 망설이다 뺨을 긁적거리며 기어들어가듯 말했다.

“…내가 소금 통을 엎은 바람에….”

“네? 소금 통? 웬 소금 통이요?”

“계란말이 해주다가 소금 통을 엎었거든.”

그 말에 로운과 원호는 잠시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갑자기 벌떡 일어나 하진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아침에 서련 형이 손수 직접 정성스레 만든 계란말이가 있는데, 정성을 넣는다고 소금이 통째로 들어갔는데, 어쨌든 개하진이 지금 그걸 처먹고 왔다는 소리잖아요.”

“와, 시발…. 지만 처먹고 존나 좋겠다? 서련 형, 소금통이 뭐예요. 간장이랑 설탕을 들이부어도 다 처먹어야죠. 그깟 소금통쯤이야 영광이죠. 누가 해준 건데. 시발, 야! 맛있었냐? 맛있었냐고!”

“그래놓고 시발, 지금 먹고 왔다고 티 내냐?! 물도 마시지 마, 새꺄! 물을 왜 마셔, 소금까지 다 소화시켜! 누가 해준 건데, 새끼가 어디서 꼼수를 부리고 있어!”

신기하게도 하진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만 팍 쓴 채 제게 달라붙는 팔을 쳐낼 뿐이었다. 로운과 원호의 말을 듣고 있는 서련이 다 민망해질 정도였다.

아니,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아침에 계란말이를 해주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만들던 중, 소금을 치다가 소금통 뚜껑이 그대로 열려 소금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놀라 멍해진 서련이 굳어있는 사이 그걸 보고 있던 하진이 뒷수습을 했는데, 덕분에 계란말이는 짜다 못해 사람이 못 먹을 음식까지 되어버렸다. 버리겠다는 걸 하진이 먹겠다고 하는 바람에 실랑이까지 벌이다가, 결국 져서 고스란히 하진의 몫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지금은 그 염분을 희석한다고 물을 저렇게 들이켜는 중이고.

이러다 다음부터는 아예 안 먹는 거 아닌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계란말이라면 치를 떨지도 몰랐다.

안 되는데….

이제는 하진을 무슨 수로 낚아야 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하진은 그 짠 걸 혼자 다 먹고 나오기까지 했다. 같이 먹어주겠다고 젓가락을 뻗어봤지만, 으르렁거리는 탓에 손도 못 댄 채 물러나야 했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집을 나오기도 전부터 물을 그렇게 찾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로운과 원호에게 물통 째로 빼앗겼지만.

이따 몰래 물을 사 오기로 다짐하며, 서련은 난리를 피우는 비글들을 뒤로하고 에르덴에 접속했다. 이틀이나 접속을 못 했으니 절미들 원성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접속시간 PM. 03:30 / 남은 시간은 434시간입니다.

-신성의 축복을 그대에게! 에르덴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모든 던전의 입장 시간이 리셋되었습니다.

-일일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길드/베르르: 키키형ㅋㅋㅋㅋㅋ 아이고 오랜만이셔욬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저희를 아주 잊어버리신듯ㅎㅎㅎㅎㅎ 어떻게 저희 기억은 나시려나?ㅎㅎㅎㅎ]

[길드/키키아: 절미들 안녕. 형은 절미들 많이 보고 싶었는데]

[길드/베르르: 뻥치지마요! 이제 안속아요!]

[길드/순한양: ㅎ혛ㅎㅎㅎㅎㅎㅎ]

[길드/순한양: 그럼 다음 현모때 어떻겧ㅎㅎㅎㅎㅎㅎ]

-‘킬레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킬레아: 쌉소리 지껄이지말고 짜져라]

[길드/베르르: 아 키키형 진짜 맨날 광견형들하고만 놀고! 아아아아악!]

[길드/묵요: 아이고 쪽팔려라]

[길드/호백조: 야야 바닥 더러워. 깨끗이 닦아라]

[길드/순한양: 현모! 현모! 우리 곧 현모 할거라던데]

[길드/킬레아: ㅈ까 ㅅㅂ]

[길드/순한양: 머머리형은 오지 말져?ㅎㅎ 아니 누가 오라고 했나ㅎㅎ 난 키키형만 있음 되는덱?ㅎㅎㅎㅎ]

[길드/묵요: 이야 우리 절미들 또 기어오르네?^^]

서련은 절미들을 보며 시선을 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고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아니다. 역시 현모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물론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 과거가 아직도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길드/키키아: 절미들 오늘 뭐하고 놀래. 형이 놀아줄게]

[길드/베르르: 진짜요?ㅋㅋㅋㅋㅋㅋ 그럼]

[길드/묵요: 아 키키형 선약있는데]

[길드/베르르: 3인 던전]

[길드/베르르: ㅡㅡ]

[길드/순한양: ㅡㅡ]

[길드/호백조: 우리 쩔미들도 같이 갈까그럼?]

[길드/베르르: 나 진짜 울거야...]

[길드/순한양: 쟤네 진짜 졸라 싫어...ㅠㅠ]

[길드/묵요: 알겠다 알겠어ㅎ 절미들 같이 타협ㄱ?]

[길드/베르르: 타협? 그 타협길드 말하는 거?? 그 무법지대라고 불리는?]

[길드/호백조: 우리 쩔미들 잘 아네ㅋㅋ 우리 오늘 타협가서 놀다 올까?]

[길드/순한양: 거길 아 왜가요! 걔네 진짜 ㅈㄴ 세단 말이에요!]

[길드/베르르: 도셨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원들의 말을 보고 있던 서련의 시선이 자연스레 하진쪽으로 옮겨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선약이 있다는 소리도 처음 듣거니와 타협길드로 가자는 말은 더더욱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애당초 얌전히 있는 사자소굴에 왜 들어가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로운이 말한 길드는 현재 라히브라 서버 내에 길드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는 ‘타협은 없다’라는 신마제국 길드였다. 길드 랭킹 1위에게 내려지는 길드 부지도 가지고 있는 네임드 길드로, 서련이 알기로 거기 있는 길마는 현재 전섭 랭킹 4위를 달리고 있는 신컨 유저였다.

서련도 아직 제대로 덤벼본 적은 없지만, 자유 게시판에 올라온 무빙 영상이나 먼발치에서 본 쟁을 보면 도저히 덤벼볼 엄두가 안 나는 유저라는 것만은 확실히 기억했다. 같은 종족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한데 그런 길드로 지금 제 발로 찾아가겠다고…?

“얘들아, 거긴 왜…?”

“아, 그게 좀 사정이 복잡한데요. 블랙블 있죠? 그놈들이 제안한답시고 한다는 소리가 타협 좀 같이 밀자네요?”

“그때 그 비행시합에서 쌰바친 게 있는데, 그것 때문에 발목 잡혀서요. 아, 근데 별거 없고, 그냥 놀면 돼요. 걱정 마세요, 형. 형한테 전혀 피해 없어요.”

“에이, 저희가 있는데.”

“블랙블도 곧 올 거니까 그냥 구경 정도만 해도 뭐….”

아니, 거기 그 비연이라는 놈 있는데.

서련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인 놈이 블랙블에 있다는 건 이미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보자마자 화살 먼저 날려댈 텐데, 구경이고 뭐고 이건 그냥 안 가는 게 답이었다.

“형은 그냥….”

“아! 비연이 형 안 때린대요.”

“갈게.”

서련은 즉각 대답했다. 가만있다 뒤통수라도 한 대 때리고 올 생각이었다. 블랙블이면 토순이도 올 테고. 가만 보니 포탈도 안 타도 되고, 토순이도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나 다름없었다.

[길드/키키아: 절미들 형이랑 같이 뒤통수 때리러 갈까?]

[길드/베르르: 뒤통수요? 형이 가자면 뭐... 흠흠]

[길드/순한양: 쩔미들 델꼬 갈꼬야?]

[길드/호백조: 너 그 쩔미들 드립좀 안 하면 안되겠냐?]

[길드/순한양: 쩔미가 쩔미한다는데 쩔미도 못치게 하면 쩔미들 진짜 쩔미하라는 소린가ㅎㅎ]

[길드/묵요: 절미들 보면 볼수록 전투력 상당하네]

[길드/순한양: 에잏ㅎㅎㅎㅎㅎ 이거 가지곻ㅎㅎㅎㅎㅎㅎ]

[길드/킬레아: 또 나댄다]

[길드/키키아: 그럼 절미들 가는 걸로 하고, 블블네는 언제 온대?]

[길드/묵요: 3시간 뒤에 길마까지 와서 뭉친다는데]

3시간 뒤면, 얼추 직장인들 퇴근 시간이었다. 그럼 그때까지는 시간이 남으니 이참에 절미들 다독이고 시간도 때울 겸 함께 던전이나 돌기로 했다. 서련의 말에 절미들은 세상 다 가진 거 같은 모습으로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진작 해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래는 절미들 요구에 맞춰 3인 던전을 돌 생각이었지만, 보란 듯이 끼어드는 비글들까지 포함해 결국엔 6인 던전을 돌아야 했다. 절미들 원성이 하늘을 찌르긴 했지만,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비글들이 한 수 위였다.

몇 번 갈구자 찍소리도 못하고 모셔가는 모습이 이거, 실제로 만나면 더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눈 한 번 부릅뜨면 큰일이겠는데 하는 생각.

“어, 귓 왔다.”

6인 던전은 3번 정도 돌았을 때였나, 로운이 반가운 목소리로 누군가의 소식을 알렸다. 드디어 블랙블이 전부 접속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에 맞춰 서련네 길드원들이 하나둘 접속하기 시작했다.

-‘휴리사’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건블리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들어와 있는 야생닭까지 포함해서 오랜만에 길드원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길드창은 곧 북적해졌다.

[길드/건블리아: 다들 새해 잘 보냈냐ㅋㅋ]

[길드/휴리사: 우리 남둥이들 앞으로도 여기 꼼짝말고 있고ㅋㅋ 어디 가면 안된다ㅋㅋ]

[길드/야생닭: 막내들 형한테 제발 생닭이라고 고만 하면 안되겠냐? 새해에는 그만 듣고 싶은데...]

[길드/베르르: 에잌ㅋㅋㅋㅋㅋ 우리 생닭형 닭장 제가 이쁜걸로 하나 사다 놓을게요ㅋㅋㅋ]

[길드/순한양: 제가 우리 생닭형 때문에 치킨을 먹을 때마다 웁니닿ㅎㅎㅎㅎㅎ]

[길드/야생닭: 그거 맛있어서 그러는거 아니냐고;]

[길드/묵요: 길마형ㅋㅋ 저희 타협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ㅎ]

[길드/호백조: 블러더도 온다던데 같이 가시죠?ㅋㅋㅋ 리사누님도 한명 잡고 쟁 또 뜨셔야죠?ㅋㅋ]

[길드/휴리사: 콜ㅋㅋㅋㅋㅋ 난 무조건 콜!!]

[길드/건블리아: 저기 얘들아? 거기 무서운 곳 아니냐...?]

[길드/묵요: 무섭긴요ㅋㅋ 블블넘들도 간다는데 함께 ㄱ 하시죠?]

[길드/키키아: 그냥 구경해도 된다니까 야생형하고 옆에 있어도 돼요. 저도 구경만 할 거라]

일단은 구경. 서련은 웃는 낯으로 그렇게 적어 내려갔다. 토순이 보러 가는데 굳이 싸울 이유도 없고, 마음 가볍게 갈 생각이었다.

[길드/묵요: 그럼 다들 갈까요ㅎ 블블들 포탈 넘어왔다네요ㅎ]

[길드/호백조: 타협 치러 가시죠]

건블리아와 야생닭은 불안한지 제일 끝에서 따라 달렸지만, 휴리사는 신난 듯 선두를 내달리며 1위 길드에게 주어지는 길드 부지인 페리온스 지역으로 향했다.

서련도 페리온스는 직접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굳이 가서 싸움을 걸 구실도 없거니와 그곳이 포탈과는 꽤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해서 갈 필요성을 못 찾기도 했던 탓이었다.

블랙블이 타협과 친하다는 소리는 들었었는데, 설마 뒤통수를 칠 정도로 친할 줄은 미처 몰랐다.

-‘페리온스’ 지역을 발견하였습니다.

-‘타협은 없다’ 길드의 부지로 들어왔습니다. 길드 분쟁 지역이므로 전종족 PK가 가능합니다.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묵요를 따라 달리던 모두는 곧 페리온스 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일명 마의 타협 부지. 요새 잠잠하다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는데, 자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보면 그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역시 하진이 대단하다는 그 길마랑 싸우는 건 꼭 한번 보고 싶긴 했다.

“하진아.”

“어.”

“이기면… 음, 앞으로 소금….”

“이기면 되잖아, 이기면.”

뭔 말을 하기도 전에 하진이 먼저 선수 치듯 입을 열었다. 소금 충격이 아무래도 심각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안광이 형형한 게 다른 때보다 더 악착같은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가서 물이나 사 올까.

[길드/묵요: 여기서 대기할게요. 블블 오면 합류해서 들어갈 건데 키키형 혹시 모르니 쉴드치고 계세요]

[길드/베르르: 비연 그 넘이 때리면 저희가 발라줄게요 형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걱정마셔욯ㅎㅎㅎㅎㅎ]

[길드/호백조: 어휴 니들이나 발리지 마라]

타협이 이 사실을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몰라도 타협 정도면 금세 정비하고 달려들어 그리 큰 피해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타협이 부지에 박혀 있어야 말이지.

[길드/건블리아: 얘들아? 몰래 기습하는 건 아니지?]

[길드/묵요: 선전포고 했다던데요. 음, 날짜는 안 말해주고 시간만 말해줬대요]

[길드/휴리사: 이야ㅋㅋㅋㅋㅋ 머리 좋네 블블들ㅋㅋㅋㅋ]

[길드/베르르: 어허 생닭형. 거 너무 떠시네. 이리와요 닭장 들어가 있읍시다]

[길드/야생닭: 나 필살기만 날리고 빠지면 안될까?;;]

[길드/키키아: 네ㅎ 그냥 구경만 하시면 괜찮아요. 제가 안전해보이는 곳 있음 알려드릴게요 형]

[길드/야생닭: 역시 키키밖에 없구나ㅠㅠ]

야생닭은 안 그래 보여도 겁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할 때 보면 컨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쟁을 참 무서워했다. 그러니 절미들이 닭장 드립을 치며 놀리는 거지만, 사실상 1:1로 절미들이랑 뜨면 야생닭이 이길 정도로 단기전에서는 상당한 실력을 발휘했다.

물론 마도사는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해 무조건 단기전으로 결판을 내야 했다. 이러나저러나 야생닭 스타일이 마도사에 딱 적합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걸 야생닭 혼자만 모를 뿐.

서련은 언제 한 번 날 잡아 알려주기로 마음먹고, 야생닭 앞을 막아섰다. 저 멀리서 머리에 붉은 글씨와 흰 글씨를 단 상당수의 유저들이 바글바글 모여오고 있는 게 보였다. 반은 블랙블 길드였고, 반은 블러더 길드였다.

그들이 페리온스 지역으로 발을 들이자, 블러더 길드원들 머리 위에 있는 닉네임도 곧장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타협 길드 부지. 이곳은 전종족 PVP가 가능한 구역이었다. 길드전도 가능했고, 무엇보다 부지를 두고 도전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다고 진짜 길드 부지를 뺏을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대신 이기면 어마어마한 공적 포인트를 지급했다.

물론 쉽게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길드 부지의 중심에 세워진 성채를 중심으로 타협이 공성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규칙도 까다롭고 대결에 거는 아티팩트도 비싸 실상 그렇게까지 하면서 도전장을 내미는 길드는 없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길드 부지 이벤트가 섞인 패치로 인해 페리온스에 들어온 유저들에게는 종족보다 길드명이 표시되어 구분되었다.

[블러더/강마: 키키형ㅋㅋㅋㅋㅋ 새해 잘 보내셨어요ㅋㅋㅋㅋㅋ 근데 저 빼고 영화보셨다면서욬ㅋㅋㅋㅋㅋㅋ 아니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ㅋㅋㅋㅋㅋㅋ]

[블랙블/랙블: 다 모인 것 같은데 가죠]

[건블/묵요: 미리 말하지만 저희 그냥 거들기만 할 테니 나머지는 그쪽에서 알아서 하시죠?]

[블랙블/비연: 메기샛끼 어디갔냐]

[건블/키키아: 눈이 삐었나 아처 한다는 사람이 이것도 안 보여서 화살은 어떻게 날리시나]

[블랙블/비연: 이야ㅋㅋㅋㅋㅋ 한대 맞고 싶나본데 이 돼지가]

[건블/키키아: 저 메긴데요?]

서련의 말에 빵 터진 건 블랙블 길드원들이었다. 죄다 ‘ㅋㅋㅋㅋ’를 남발하며 비연을 위로하는데, 한 방 먹었다는 말을 한마디씩 꺼내며 비연의 약을 바짝 올렸다.

물론 여기는 여기 나름대로 욕을 잔뜩 먹는 중이다.

“그놈의 메기 소리는 좀 적당히 하지?”

“서련 형이 메기를 너무 사랑하시네. 하하, 왜요. 아주 메기 인형도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시지. 하나 사줘요?”

“아, 형. 메기라뇨...! 자게에 지금 트롤 소리까지 나오는데. 아, 개하진은 외계인이고요. 제가 예쁜 메기 인형 사다 줄 테니까 그걸로 좀 참읍시다, 네?”

메기 소리 한 번 더 꺼냈다간 땅에 묻을 판이었다. 비단 비글들 뿐 아니라, 서련의 옆에 모여있는 강마와 절미들도 난리 치긴 마찬가지였다.

[블러더/강마: 아니 형? 키키형님? 어느 띱샛끼가 우리형보고 메기래요? 미쳤낰ㅋㅋㅋㅋㅋㅋㅋ]

[건블/베르르: 아 형! 왜 형이 메긴데여!]

[건블/순한양: 이 무슨 메기같은 소리! 하지 마여. 절대 하지마여!]

그 소리에 서련이 웃음을 흘렸다. 아니, 벌써 메기 같다고 써놓고는 하지 말란다. 게다가 이제 부정하기에는 며칠 전에 로운과 원호랑 함께 찍은 메기 같은 사진도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메기가 됐는데.

[블랙블/랙블: 일단 좀 가죠]

[블러더/강마: 아 그래 일단 ㄱㄱ]

[건블/묵요: 길마형 저희도 가요]

서련의 시선이 블랙블 뒤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맴돌돌에게 향했다. 토순이가 없는 걸 보니 길드원들이 또 어그로를 끈다고 못 꺼내게 한 모양이었다. 뒤에서 졸졸졸 따라오는 모습이 형들 따라 나들이 나온 동생 같았다.

서련은 킬리를 소환하고 뒤쪽으로 슬금슬금 빠졌다. 경계심이 극도로 높은 블랙블이 한차례 막아서긴 했지만, 맴돌돌이 튀어나오자, 어느 정도 비켜서 주긴 했다.

[건블/키키아: 안녕하세요 맴돌님]

[블랙블/맴돌돌: 안녕하세요 키키님. 킬리 목도리 진짜 예쁜거 같아요]

[건블/키키아: 네 감사합니다ㅎ 토순이는 어쩌고 왔어요]

[블랙블/맴돌돌: 그... 이따가 이현님 만나면 꺼내도 된다고 해서요]

[건블/키키아: 음 길드원들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블랙블/비연: 메기가 뭔상관? 절로 가지 메기야?]

[건블/키키아: 그거 같은데]

[건블/키키아: 디지고 싶어서 발광하는]

[블랙블/비연: 메기라던 그 친구 어디갔는지 모르겠네?]

서련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맴돌돌 옆에 딱 붙어 걷는 비연을 피해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서련이 돌아오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흩어져 있던 길드원들이 또 다닥다닥 붙기 시작했다. 그 중엔 남의 길드원인 강마도 있었다.

[블랙블/랙블: 준비]

[블러더/강마: 우리 블러더 준비됐는가!]

[건블/건블리아: 우린 대기!]

성채가 있는 중심 부지에 가까워지자, 모두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성채만 보면 주인 없는 집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도를 보면 성채 뒤편으로 붉은 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게 보였다. 이 경우, 미리 알고 잠복해 있다는 소리다.

서련은 주변을 쭉 훑으며 올라갈 수 있을 만한 지형이 있는지 살뜰히 살폈다. 다행히 성채 주위의 부서진 건물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딱 보니, 때리기 좋고 숨기에 제격인 장소였다. 부디 올라가기 힘든 곳이길 빌며, 서련은 가만히 서서 전투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눈치싸움처럼 진행되던 전투는 랙블이 검을 쥐고 튀어 나간 순간 총성이 터진 것처럼 시작되었다. 세 개의 길드가 전력을 향해 성채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성채에서도 눈을 시뻘겋게 뜬 타협 길드원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튀어 나왔다.

서련은 그 틈을 타 눈여겨보던 부서진 건물쪽으로 빠져 산타기 달인의 기질을 발휘했다. 다행히 쉽지 않은 곳인지, 태생 산타기의 달인인 서련도 몇 번이나 미끄러져 내려와야 했다. 그래도 천천히 벽을 비비적거리며 오르니, 원하는 장소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길드/키키아: 우리 야생형 어디 계실까요]

[건블/야생닭: 여기! 여기ㅠㅠ]

야생닭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서련은 제가 서 있는 곳으로 야생닭을 소환했다. 여기서 야생닭은 히든캐였다. 누구보다 서련에게 큰 보탬이 될 위인이었고, 마도사의 필살기로 불리는 ‘지옥의 겁화’는 가장 큰 폭딜로서 탱커도 맞으면 반피나 깎이는 딜량을 가지고 있었다.

[길드/키키아: 저희는 여기서 가만히 구경이나 해요ㅎ]

이미 절미들이고 비글들이고 강마고 눈에 뵈는 것 없이 달려드는 중이었다. 서련은 전쟁터 사이에서 유난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두 유저를 바라보았다. ‘이현’이라는 유저와 함께 뛰놀고 있는 맴돌돌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다른 세상 분위기를 풍기는 둘은 전쟁 한복판에서도 태평한 모습이었다. 모든 공격이 두 유저를 놀랍도록 비껴가고 있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서련은 한번 가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내려가자마자 여기저기서 달려들 게 뻔했으니까. 저 둘과 달리 키키아는 적이 너무 많았다.

-신마제국의 ‘베르르’가 사망하였습니다.

-신마제국의 ‘순한양’이 사망하였습니다.

곧이어 절미들의 사망 소식이 시스템창 위로 올라왔다. 그 글을 본 야생닭은 아예 쪼그려 앉아 달달 떨고 있었다.

[건블/야생닭: 니들 너무 무서운거 아니냐?;; 건블형 살아 있긴 해요?]

[길드/건블리아: 말걸지 마라. 형 지금 숨어 있으니까]

[건블/베르르: 아놕!!!!!! 왜 나만 공격하는덱!!!!!!!!!]

[건블/순한양: 우리가 만만하다 이거지?! 응? 니들 우리 방명록 갔다왔지!!!!]

[타협은 없다/잭콕: 어휴 여기도 비연같은 넘들 계시는구먼]

[타협은 없다/베리베리: 아닛 그 킬리 가지신 분 어디???? 왜 안 보이는 거???? 내 포도 강화하는 거 배워야 하는데?????]

[건블/베르르: ㄲㅈ 우리 메기형 너같이 포도같이 생긴넘 싫어하거든]

[타협은 없다/꼬마천재: 와ㅋㅋㅋㅋㅋㅋ 애들 한성깔 하네]

[건블/순한양: ㅋㅋㅋㅋㅋㅋㅋ너 나만 팼던 넘이지? 이 샛꺄 너 드루와]

[블랙블/칼트럼: ㅎㅎㅎ 막 한눈팔고 그럼 됩니까?ㅎㅎㅎㅎㅎㅎ]

[블랙블/금퇼: 너나 잘해 ㅅㄲ 어디다 포획질이여]

[블랙블/건드레: 막내들 이번에 지면 기합 가즈아!]

[블러더/강마: 에이ㅋㅋㅋㅋㅋ 지들끼리 놀면 쓰나ㅋㅋㅋㅋ 나도 콜?]

[건블/휴리사: 왘ㅋㅋㅋㅋ 여기 매익화까지 나타나면 볼만하겠다ㅋㅋㅋㅋ]

[블러더/강마: 헉! 그러지 말라고요. 진짜 나타나면 개발라버려야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블/호백조: 와 여긴 다 좀비들이네]

[블랙블/블라라: 이까이거ㅋㅋㅋㅋㅋ]

[타협은 없다/신이내린캐: 어휴 좋댄다]

채팅창이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서련은 잠시 고민하다 원대한 꿈을 위해 건블리아도 부르기로 했다. 일단 둘 다 장거리 딜러이니 이 장소엔 제격인 직업들이었다.

[길드/키키아: 건블형 저 있는 쪽으로 오실래요. 솬 해드릴게요]

[길드/건블리아: 오냐ㅋㅋㅋㅋㅋ]

건블리아는 좋다고 바로 전쟁터를 가르고 튀어나왔다. 무슨 수를 썼는지, 쏜살같은 속도였다. 일단 서련은 시야에 건블리아가 들어오자마자 재빨리 제가 서 있는 곳으로 소환했다. 야생닭 근처에 쪼그려 앉은 건블리아는 그제야 살았다는 듯 한시름 놓은 듯한 어조로 서련에게 말을 걸었다.

[길드/건블리아: 감사하다 키키야ㅋㅋㅋㅋ 근데 넌 안 내려가냐? 너 좋아하는 공적들 널렸고만]

[길드/키키아: 음 오늘은 좀 쉬려고요ㅎ]

쉬긴. 서련은 건블리아를 등진 채 부지의 산등선 너머를 쭉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어째 낌새가 없다. 좀 더 기다려볼까 하다가, 서련은 이대로 있기도 심심해서 모두를 잠깐 골려주기로 했다.

[건블/키키아: 네? 아아]

[건블/키키아: 제가 메기인 건 또 어떻게 아시고ㅎ]

[건블/키키아: 하하 괜찮습니다 마초님. 그럴 수도 있죠. 뭐 메기가 어디 가겠어요ㅎ]

[건블/키키아: 하하 아이고 서러워라. 죽을때까지 메기소리 듣게 생겼네]

[타협은 없다/마초: 왓? 뭐뭐뭐 뭔 소리?;]

[타협은 없다/마초: 잠깐;; 아니 진심 나 아님;;]

그냥 딱 그 정도로만 말했을 뿐이었다. 갑자기 하진이고 로운이고 강마고 할 것 없이 타협 멤버인 마초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베르르와 순한양도 그새 부활해 동참하는데, 덕분에 한 번에 순삭할 수 있었다. 물론 어이없다는 듯한 타협과 블랙블의 태도도 덤으로 따라왔다.

[타협은 없다/확실한놈: 이거 뭔가 쎄한데]

[타협은 없다/백전승: 그러니까]

[타협은 없다/개나무: 아니겠지 설마]

[타협은 없다/마초: 난 아닐세 정말 아닐세... 나야말로 억울하네]

[건블/키키아: 네? 음... 마초님이 아니셨구나. 지금보니]

[블랙블/건드레: 아오 저거 그거아녀!]

[블랙블/칼트럼: 왛ㅎㅎㅎㅎ 아니 이걸 이렇게 써드시넿ㅎㅎㅎㅎㅎㅎㅎ]

[타협은 없다/잘살아보세: 와ㅋㅋㅋㅋㅋ 와ㅋㅋㅋ아니 이걸ㅋㅋㅋㅋㅋㅋ]

[건블/키키아: 마초님 죄송해요. 지금보니 다른 사람이었는데 제가 잘못 말했네요]

[타협은 없다/마초: 빨리 다들 도망가라. 왜 최종메기인지 알겄다]

[건블/베르르: 됐고 누군데요 키키형]

[건블/순한양: 누가 우리형 메기랬음?ㅎㅎㅎㅎㅎ도르신?ㅎㅎㅎㅎㅎㅎ]

[블러더/강마: 블러더는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한다. 메기를 부르짖는 넘들은 적폐세력이니 반드시 죽이도록]

[건블/키키아: 아니야 메기인 내가 죽어야지]

[건블/키키아: 메기처럼 생긴 게 죄지. 회피의 신인지 나발인지 나를 이렇게 구박하는데]

[건블/키키아: 아 서러워서]

다음 타자는 비연이었다. 말이 떠오르기 무섭게 이번에도 영락없이 비연을 향해 수십 명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비연도 이번엔 꽤 놀랐는지, 식겁해서 뒤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의 회피 실력을 보이던 비연은 얼마 안 가 로운에게 포획되어 모두에게 신랄하게 얻어터져야 했다. 역시 다굴에는 장사도 없지.

[블랙블/비연: 아니 저 메기샛끼가]

[블랙블/비연: 아오 야이 돼지샛꺄! 너 진짜]

[건블/키키아: 제가 더 서러운데]

[블랙블/한겨울: 아닠ㅋㅋㅋㅋ 잠깐ㅋㅋㅋㅋㅋ]

[타협은 없다/기토피아: ㅋㅋㅋㅋㅋㅋㅋ 저게뭐얔ㅋㅋㅋㅋㅋㅋㅋ]

[타협은 없다/잘살아보세: 애들을 아주 지능적으로 보내냌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야생닭: 키키야?;; 키키야?! 너 뭐하니?!]

[길드/건블리아: 키키야! 너 미쳤냐?;; 흐지말자! 흐지마]

덕분에 서련과 같이 있는 건블리아와 야생닭만 아주 난리가 났다. 서로 껴안을 기세로 붙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조마조마하는데, 일이야 이미 생겨났다. 저 멀리 언덕의 능선 너머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무리를 보자면 말이다.

자, 이제 광범위한 2페이즈의 시작이다.

사실 서련은 이미 블랙블과 만나기 전, 매익화로부터 귓속말을 먼저 받은 후였다. 연락의 목적은 매익화의 길드에 있는 소환사의 두 번째 교습에 대한 호출이었다. 그러나 서련은 거기에 대해 그냥 딱 한 마디만 보냈을 뿐이었다. ‘타협’ 이렇게.

원래 교육은 실전이 중요한 법이니.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서련은 매익화가 어련히 잘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저기 저 언덕 위에서 달려 내려오고 있는 새빨간 이름의 유저들이었다.

약간 문제가 있다면, 매익화 길드 뒤로 비행 시합 때 서련을 그렇게 방해했던 R개개길드E가 함께 달려오고 있다는 점이랄까. 어쩔까 하다가, 서련은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건블/키키아: 아 저기 뭔가 오는거 같은데]

서련의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성채의 입구 너머로 옮겨졌다. 가늠하듯 한참이나 보던 모두는 지도 안에 붉은 점이 들어오는 걸 보고서야 죄다 무기를 고쳐 쥐고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재정비를 하는 모습을 보니 각 잡고 덤빌 생각인 듯했다.

그래도 매익화네가 전멸당하면 좀 그러니까, 서련은 기회를 봐서라도 좀 도와주기로 했다. 일단은 양 세력이 맞붙었을 때.

{귓속말/매익화님께: 일단 소환신님부터 제쪽으로 보내세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죽이진 말고요^^}

{귓속말/매익화님께: 님 하는 거 봐서요}

서로를 향해 떼 지어 달려드는 광경이 마치 들소들이 뿔을 세우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맞닥뜨린 건, 매익화와 강마였다. 매익화의 활이 강마의 방패를 긁고 지나간 것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한 명씩 잡고 싸우기 시작했다.

[매익화/소환신: 키키님!ㅠㅠ]

[건블/키키아: 올라올 수 있겠어요?]

서련의 말에 소 떼를 피해 열심히 달려오던 소환신이 한 번 해보겠다며 근처에 무너져 있는 건물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번 오르다 미끄러지고 나서는 서련 쪽으로 쪼르르 달려와 훌쩍였다.

[건블/키키아: 솬할게요]

[매익화/소환신: 죄송합니다ㅠㅠ 소환사가 돼서 등산을 못하다니ㅠㅠ]

[건블/키키아: 나중에 제가 요령 알려드릴게요]

소환사는 방어력이 약하다보니 생존을 중요시해서, 안전한 장소 확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때문에 상대가 쉽게 공격하지 못하는 위치에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생존력이 높아졌는데, 그렇다보니 소환사는 등산의 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았다. 물론 그렇지 못한 유저도 있기는 마련.

소환신까지 소환하고 나니 이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 이상 소환하는 건 피해야 할 듯했다.

[매익화/소환신: 키키님 제 라쿠니 강화 맥스까지 시켰어요ㅋㅋㅋㅋㅋ 10강입니다ㅋㅋㅋㅋㅋㅋ 진짜 커졌어요ㅋㅋㅋ]

자랑하고 싶었는지, 소환신은 재빨리 제 라쿤 외형의 사역마를 소환해 서련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주먹만 하던 소환신의 사역마는 어느덧 킬리랑 같은 수준의 덩치가 되어있었다. 아마도 소환신이 만렙을 찍어 스킬 레벨이 올라 커진 모양이었다.

[건블/키키아: 귀엽네요ㅎ 말 잘 듣죠? 호감도 많이 키워야 사역스킬 잘 들어요]

[매익화/소환신: 넵ㅋㅋㅋㅋㅋㅋ 열심히 호감작 하고 있습니다ㅋㅋㅋㅋㅋ 저 모션도 엄청 샀어요ㅋㅋㅋㅋ 전부 키키님 덕분이에요ㅠㅠ 감사합니다]

[건블/키키아: 아 근데 개개길드는 왜 같이 오셨어요?]

[매익화/소환신: 같이 온 게 아니라;; 포탈타고 오는데 키키님한테 가냐면서 칼들고 쫓아오더라고요... 죄송합니다ㅠㅠ 저희 길마님이 너무 좋아하셔가지고ㅠㅠ미쳤나봐요]

[건블/키키아: 누구먼저 잡을까 고민이었는데 잘됐네요]

[건블/건블리아: 저기 얘들님? 지금 밑이 전쟁턴데 너무 한가한 거 아니니?]

아, 잠시 잊고 있었다. 전쟁터가 된 뜰을 내려다보니 매익화 길드가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당하고 있었다. 서련은 재빨리 주변을 탐색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원하는 걸 찾을 수 있었다. 이현과 맴돌돌. 그리고 그들 곁에 있는 두 길마.

사실 높은 곳에 있으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루스라는 유저가 이현을 유독 방어하는 모습이라든가, 랙블이 맴돌돌을 유독 보호한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거리가 되려나.’

서련은 루스를 클릭하고 거리를 가늠했다. 딱 20M. 아슬아슬하지만, 스킬이 닿는 거리였다. 거기다 일단 탱커이니 웬만한 공격은 기별도 안 갈 것이다. 서련은 루스를 타겟팅한 그대로 한 방 먹일 만한 폭딜을 캐스팅했다.

그리고 소환신을 향해 상큼한 어조로 말했다.

[건블/키키아: 소환신님 잘 봐두세요. 앞으로 하게 될 소환사 잡기 중 하나입니다ㅎ]

일명 어그로라고, 쉽게 말하면 전체 도발스킬이었다. 고대하던 스킬 바가 차오르고 스킬이 시전된 순간 불길과 함께 쏘아진 딜이 루스의 갑옷을 쾅 하고 터뜨렸다. 방어력 상승 패시브를 두르고 있던 탓에 데미지가 그리 크게 들어가진 않았지만, 주변의 시선을 끄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드릉드릉거리며 적에게 달려들던 타협 길드원들이 찬물을 맞은 듯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그 살벌한 기류 사이에서 서련은 저를 붙들고 그만하라며 난리를 피우는 건블리아와 야생닭을 무시한 채 어그로를 남발했다.

[건블/키키아: 아 개개길드인 줄 알았는데]

[타협은 없다/루스: 흠 어그로?]

[건블/키키아: 아뇨. 죄송합니다. 개개길드 아니면 뭐... 컨들이 ㅈ같은 개개길드인줄 알았어요]

[건블/키키아: 그렇죠 개개님들]

그 말에 R개개길드E가 한 명도 빠짐없이 전쟁터에서 삐져나와 서련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는 전부 욕지거리가 떠올라 있었다. 그 사이에는 이 틈에 끼어 함께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달려드는 다른 유저들도 있긴 했다. 아까 억울하게 죽은 마초라든가, 비연이라든가.

어쨌든 어그로는 성공적이었다. 그 광경이 흥미로웠는지, 다른 길드원들은 잠시 뒤로 빠져 사태를 구경했다.

덕분에 건블리아와 야생닭, 소환신만 아주 난리가 났다.

[건블/건블리아: 키키야?! 키키야! 너 뭐하니! 메기얏!]

[건블/야생닭: 키키야! 형 좀 내려가자! 아니 형 내려가고 하자!]

[매익화/소환신: 키키님?! 저 죽어요! 아니 우리 라쿠니! 아악!! 오지마 이 **들아!]

[건블/키키아: 좀 적은데...]

개개길드라고 해봤자, 뭉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길드 인원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고작해야 스무 명? 아니, 그것도 안 되어 보였다. 게다가 쭉 훑어보니 훈장도 없는 게, 죽인다고 공적이 딱히 쑥쑥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았다. 입맛을 다시던 서련은 일단 다른 길드도 끌어들여 보기로 했다.

[건블/키키아: 아 저희 게임하나 할까요]

[블랙블/비연: 내려오고 얘기해라 이 돼지샛꺄! 너 오늘 함 죽어보자]

[건블/키키아: 저 잡으시는 분은]

“뭐가 좋을까….”

서련은 채팅을 치다 말고 하진쪽을 돌아보았다. 다들 한참 전부터 이미 서련을 보고 있었는지, 고개를 돌리자마자 세 쌍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놀라 흠칫한 서련의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운과 원호는 기다렸다는 듯 제 의견을 쏟아냈다.

“서련 형 하루 이용권 어때요?”

“소원권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니면 포탈 금지권이나 도망 금지권 어때요!”

“어그로 끌 거면 팍 나가도 좋고요. 왜, 개처럼….”

“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적당히 나대자. 니들 목숨 하난 거 잊었냐?”

“내 목숨 열두 개라 상관없는데? 어디 죽여 봐라, 새꺄!”

개… 개처럼이라. 잠시 고민하던 서련은 옆에서 죽자 살자 싸우는 하진을 내버려두고 게임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어련히 잘 상상하겠지.

[건블/키키아: 개처럼... 뭐, 뒤는 상상에 맡기고]

그 말에 여기저기서 미친놈들이 튀어나왔다. 제일 먼저 뛰어오는 건 강마였다. 그 뒤로 매익화와 베르르, 순한양이 따라붙었다. 미친 듯이 달려오는데,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되레 무서울 지경이었다. 한술 더 떠 근처에 있던 몇몇이 움찔거리며 어설프게 따라붙는 게 보였다. 아마 본능적으로 따라붙은 것이리라.

“서련 형, 조금만 기다리세요.”

“개처럼 뒤에 다 허용되는 거 맞죠? 콜?”

“손만 대봐라, 장총행이다.”

가만 보니 적들보다 어째 같은 편들이 더 많았다. 특히, 강마. 쟤를 어쩌면 좋지.

[블러더/강마: 우~리~키~키~형~이~어~디~있~더~라?]

[건블/베르르: 어휴 그거 칠 시간에 나같음 달리겠다]

[건블/순한양: 다 껒져!!! 비켱!!]

[매익화/매익화: 키키님 좀 개같이 굴려봐야겠네]

[건블/건블리아: 야이 미칫넘들아! 니들이 오면 어떡해! 아오 이 넘들이 메기에 눈이 멀어가지고]

[건블/야생닭: 건블형 걍 뒤에 있어여... 그러다 맞아요ㅠㅠ]

[매익화/소환신: 아니 전 왜 여기 있는 거죠ㅠㅠ 우리 라쿠니 죽으면 호감도 떨어지는데에ㅠㅠ]

[건블/키키아: 자 우리 형들하고 소환신님 준비좀 하실까요]

[건블/키키아: 일단 야생형 이리 오시고요]

[건블/야생닭: 나? 나?! 잠깐 키키야? 이거 죽는 거 아니지?]

[건블/키키아: 안죽어요ㅎ 걱정마세요]

서련의 말에 야생닭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서련이 지정한 곳에 착실히 가서 섰다. 아래에는 좀비처럼 달려드는 유저들이 바글바글했고, 다들 어떻게든 올라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마도사가 대단한 이유. 그건 한방딜이 무척이나 강하거니와 광역딜이 다른 직업에 비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캐스팅 시간이 4초대라 평소엔 쓰기 전에 순삭당하지만, 일단 파티원들이 보호하고 보조해주면 상대측에 들어가는 딜량은 어마어마해졌다. 그러니까-

{귓속말/야생닭님께: 형, 필살기 한 방 부탁드려요ㅎ}

그리고 닭장가면 안전하겠지. 서련의 말에 머뭇거리던 야생닭은 홱 날아와 쉴드에 박히는 화살을 보고는 바로 캐스팅을 시전 했다. 4초대 캐스팅이 시전 되고 야생닭 주변으로 검푸른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검푸른 기운이 보랏빛으로 물들 때 즈음, 캐릭터가 두 팔을 유연하게 뻗은 것과 동시에 야생닭을 중심으로 한 20m 거리의 지면 안으로 거대한 운석이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쾅쾅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소리 뒤에 떠오른 건, 시스템 창을 가득 채우는 사망 소식들이었다.

[건블/야생닭: 헉! 아니 왜 이렇게 많이 죽었대;;]

[건블/키키아: 자 이제 건블형하고 소환신님 가시죠?]

[매익화/소환신: 저요? 저는 뭘ㅠㅠ]

[건블/건블리아: 광역딜 쏘면 되는 거지?]

[건블/키키아: 네. 둘다 광역딜 쏴주시고, 스킬 쓸 때만 앞으로 나와요. 딱 여기까지만 나오고 그 뒤에는 뒤로 가 있으면 가려져서 스킬 안 들어오니까. 아, 우리 야생형은 쿨 되는대로 필살기 계속 쏴주시면 공적이 알아서 들어올 겁니다. 화이팅]

[건블/건블리아: 어휴 얼어죽을 화이팅은]

뭉쳐있던 개개길드가 죽자 가만히 서서 구경하던 다른 유저들이 기웃기웃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호기심이랄까. 저길 못 올라간다고? 라는 호기심과 함께 도전정신이 스멀스멀 모두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비연과 마초만 봐도 그랬다.

[블랙블/비연: 야이 메기샛꺄! 숨어서 노닥거리지 말고 나와라 당장]

[건블/키키아: 아예]

[타협은 없다/마초: 키키님?ㅋㅋㅋㅋㅋㅋㅋ 같이 좀 노시져?ㅋㅋ 개처럼은 덤이고]

[건블/베르르: 다들 짜지셈ㅋㅋㅋㅋㅋ 개처럼 나랑 놀아주실 분이시니ㅋㅋㅋㅋㅋㅋ]

[매익화/매익화: 아 딜이 안 닿네]

[블랙블/칼트럼: 아닣ㅎㅎㅎㅎㅎ 다들 지금 뭐하심?ㅎㅎㅎㅎㅎ 그러면 나도 하고 싶잖아옇ㅎㅎㅎㅎㅎ 키키님 개처럼 콜?]

[타협은 없다/백전승: 와... 어느집 메기인지 어그로가 장난이 아니네]

[타협은 없다/베리베리: 키키니임ㅋㅋㅋㅋㅋ 킬리 강화 어케 하셨음?ㅋㅋ 저도 좀 알려주심? 아님 개처럼 컹?ㅋㅋㅋㅋ]

[블랙블/건드레: 아니 저길 못 올라 간다고? 막내들 뭐허냐! 올라가러 가즈아!]

[블랙블/금퇼: 아 안될건데. 키키님도 아까 계속 미끄러지던데요]

[건블/야생닭: 오지 맛! 오지마라 제발! 필살기 날린다?!]

[매익화/소환신: 아 우리 길드 오지 말라고! 다 왜 오는데! 난 죽어도 모른다]

여기저기서 무너진 건물을 오르려고 용을 쓰기 시작했다. 서련이 인정할 만큼 산을 잘 타던 로운과 원호도 미끄러져 내려가긴 마찬가지였다. 서련도 몇 번이나 미끄러진 곳이니 올라오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던 타협길드의 길마 루스가 나서기 시작하면서 판도가 약간 달라졌다. 그는 무너진 건물의 반까지 올라와서 포획을 날려 그대로 서련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뭘 하기도 전에 서련은 좌르륵 끌려갔다.

아까 도발한 것 때문에 이러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하진과 로운, 원호가 달려들기 시작하면서 포획은 도중 탁 풀려버렸다. 하진이 장총을 쏘고 로운이 포획으로 잡고 내리면서 원호가 침묵 디버프를 걸어 스킬을 차단한 것이었다. 역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애들이 아니다.

덕분에 서련은 아래로 끌려 내려가기 전에 포획이 끊겨 건물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모양새가 되었다. 서련이 뒤로 훌쩍 물러난 것과 동시에 세력은 두 편으로 갈렸다.

블랙블과 타협이 한 편, 서련의 건블길드와 매익화, 블러더가 한 편 이렇게. 개개길드는 아직도 누워 계시는 중이라 탈락이고.

거기에 이제까지 무서워 달달 떨고 있던 건블리아와 야생닭, 소환신까지 아래로 뛰어들면서 싸울 만한 모든 이들이 다 뭉쳤다.

[건블/건블리아: 내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 키키 죽는 꼴은 못 보지]

[건블/야생닭: 나는 그냥 필살기만 날리고 닭장가려고...]

[매익화/소환신: 키키님 저 개같이 가르치셔야 되는데 선수 뺏지 맙시다 타협님들?ㅋㅋㅋ]

[타협은 없다/기토피아: 잡는 사람이 임자 아니었냐?ㅋㅋ]

[블랙블/블라라: 됐고 덤벼. 그까이거ㅋㅋ]

[매익화/매익화: 아 간만에 막 신나네]

[블러더/강마: 키키형 거기 가만히 있어요. 내가 요넘들 한방씩 때리고 갈테니까]

[블랙블/개나무: 야야 이미 결판났어. 못 봤냐? 제대로 포획했는데?ㅋ]

[건블/순한양: 나는 못 봤는데에?]

[건블/베르르: 떽! 남의 떡에 손대는 거 아니거든?!]

[타협은 없다/꼬마천재: 떽은 니들이고 어휴]

[타협은 없다/마초: 내 오늘 억울함은 꼭 풀고 간다ㅎㅎ]

“야, 나 길드쪽 복귀한다. 둘이 잘해라.”

“하진아, 네가 오른쪽 맡아라. 같은 탱커라 안 먹혀.”

“딜 안 튀게 잘해. 튀면 나도 얄짤없다.”

이미 한쪽에서는 2:2로 로운과 하진, 루스와 랙블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하진의 상대는 탱커인 루스였고, 로운의 상대는 어쌔신인 랙블이었다.

상대편 둘 다 컨이 좋기로 유명한 길마였다. 생각 같아선 영상이라도 찍고 싶었지만, 거리도 멀거니와 저 많은 인파를 헤치고 가서 찍을 자신도 없었다. 서련은 혼자 덩그러니 건물 위에 앉아 그저 얌전히 이 전시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귓속말/맴돌돌님으로부터: 키키님 아래쪽 봐주세요!}

그때, 화면 위로 불현듯 귓속말이 들어왔다. 아래를 힐끗 보자 이현과 맴돌돌이 폴짝거리며 서련을 부르고 있었다. 귓속말을 보낸 것으로 봐서는 몰래 한다고 그러는 듯했다.

서련은 주변 눈치를 보다가 건물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그 둘을 따라 성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멀어지고 바깥쪽 유저들에게 채팅이 안 닿을 정도가 되자, 이현과 맴돌돌이 그제야 말을 걸어왔다.

둘 다 친근하게 말을 거는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뭐랄까.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느낌이랄까.

[블랙블/맴돌돌: 키키님]

[타협은 없다/이현: 안녕하세요. 저는 처음 뵙습니다!]

[건블/키키아: 안녕하세요]

[타협은 없다/이현: 저희 안 때리실 거죠? 때리기 없기?]

[건블/키키아: 네 저 무고한 사람들은 안 때려요ㅎ]

[타협은 없다/이현: 그쵸?ㅋㅋ]

[블랙블/맴돌돌: 키키님 좋은 분이세요]

[타협은 없다/이현: 그러면 뭐ㅋㅋㅋㅋ 키키님! 저도 킬리 목도리 보고 싶어요! 맴돌님이 그렇게 예쁘다고ㅠㅠ]

밝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닮은 사람이었다. 서련이 이현이라는 유저와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접전이 없었다. 물론 서련은 늘 포탈을 타기 바빠 신마제국 땅에는 잘 붙어있지 않았기에 딱히 마주칠 만한 접전이 없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서련은 이현의 부탁대로 아까 전 소환해제를 해두었던 킬리를 재소환했다. 풍성한 불꽃 갈기와 함께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며 킬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봐도 멋있고 예쁜 모습이었다. 곁에 가서 목덜미를 만져주자 이현과 맴돌돌도 다가왔다.

[타협은 없다/이현: 진짜 예쁘다...와!]

[블랙블/맴돌돌: 토순이랑도 잘 놀아요. 어... 근데 토순이가 지는 것 같아요]

그건 조금 컨 문제가 섞여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능력치만 따지고 보면 일단 토순이나 킬리는 동일한 스탯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약간 더 킬리의 악세가 좋을 뿐이다.

[타협은 없다/이현: 이런거 진짜 있었으면 좋겠어요ㅠㅠ 막 현모할때도 만나고]

[블랙블/맴돌돌: 그... 토순이는 너무 커서요]

그 말에 서련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킬리도 크다. 아니, 킬리가 토순이보다 서 있을 땐 더 컸다. 여기저기 둘러보듯 돌아보던 이현과 맴돌돌은 나중에는 토순이도 소환해서 같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여러 얘기가 오갔지만, 그 중 서련의 마음을 찔렀던 건 현모에 대한 얘기였다.

[타협은 없다/이현: 그럼 맴돌님은 엊그제 했었어요? 와ㅋㅋ 진짜 많이 보네요ㅋㅋ 저흰 한 3달에 한 번 정도 보는 거 같아요]

[블랙블/맴돌돌: 그게요. 칼이랑 퇼이랑은 친구라서 밖에서 자주 보는데 형들한테 들키면 혼나서요. 그래서 다들 자주 보고 싶어 해요]

[타협은 없다/이현: 역시ㅋㅋㅋ 그쪽 형님들은 그럴줄 알았어요ㅋㅋ 방목은 무슨ㅋㅋ]

[타협은 없다/이현: 키키님도 현모 하시져?! 묵요님이랑 킬레아님 들어온지 얼마 안되셔서 아직인가ㅠㅠ]

[건블/키키아: 음 저는]

거기까지 딱 치자 할 말이 없어졌다. 이현과 맴돌돌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다름’이었다. 그들의 말에서는 행복하고 평안한, 그리고 좋은 기억, 그런 게 느껴졌다. 아직 서련에게는 없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지 문득, 저 또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평범하고 편안하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의 추억을.

서련이 말이 없자,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이현과 맴돌돌은 안절부절못하며 서련에게 괜찮냐고 물어왔다. 그 말에 서련이 막 괜찮다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참이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파란 채찍 같은 게 뻗어 나와 서련의 캐릭을 옭아맸다.

-신마제국의 ‘강마’가 사용한 포획에 구속상태가 되었습니다.

[블러더/강마: 하하 괜히 발버둥치지 맙시다 키키형ㅋㅋㅋㅋㅋ 내가 잡았음ㅋㅋㅋㅋ]

[건블/키키아: 강마야 루스님이 먼저 잡았어]

[블러더/강마: 몰랐어요? 그건 무효처리 됐는뎈ㅋㅋㅋㅋㅋ 여기저기서 ㅈㄹ들을 해대가지곸ㅋㅋㅋㅋㅋㅋㅋ컹컹 왈왈]

그런가 보다. 납득이 안 되지만, 또 어딘가 납득되는 순간이었다. 또 무슨 궁리로 빠져나가야 되나, 어설픈 구실을 궁리하며 서련은 그 상태로 질질 끌려갔다.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있는 이현과 맴돌돌이 보였지만,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자 서련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기 시작했다.

[블러더/강마: 자 정리 됐으니까 우리 키키형도 고만 나와서 구경 좀 합시다ㅋㅋㅋㅋ]

[블러더/강마: 개처럼 그거 제안 잊으시면 안되고욯ㅎㅎㅎㅎㅎ]

[건블/키키아: 강마야 킬리가 놔달라고 울잖아]

[블러더/강마: 아이고 우리 메기형 눈에만 그렇게 보이나보다]

아니, 진짠데. 앞발을 구부린 채 구슬픈 눈으로 쫓아오는 킬리를 보던 서련은 성채 밖으로 나와서야 화면을 돌려 주변을 훑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난장판이던 전쟁판이 지금은 아주 잠잠해져 있었다.

다들 한 데 뒤엉켜 앉아 어딘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는데, 하는 말들이 죄다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는 어투였다.

[타협은 없다/묘냥이: 좀비들 납시셨다. 박수나 치자]

[블랙블/칼트럼: 와ㅎㅎㅎㅎㅎ 괜히 1퍼들이 아니구낳ㅎㅎㅎㅎㅎ]

[블랙블/비연: 그저 ㅈㄹ들을 해대네]

[건블/건블리아: 어떻게 한 수를 안지려고 저러냐]

[건블/휴리사: 젊다 젊어. 와, 아직 싸울 힘들이 있구나]

[타협은 없다/확실한놈: 저건 그냥 그거 같은데. 맛들이 좀 가신?]

[타협은 없다/꼬마천재: 영혼까지 끌어모을 기세네]

[매익화/매익화: 흠 날 샐거 같은데]

[블랙블/금퇼: 그냥 노 물약 데스매치로 가라고 하져? 자꾸 물약쓰니까 저러죠]

[건블/베르르: 아 광견형들 저것도 못이겨!]

모든 이의 시선이 가 있는 곳에는 아직도 결판을 내지 못한 네 명의 유저들이 있었다. 바로 서련의 옆에서 이를 갈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하진과 로운 말이다. 어지간히 잘하는지 루스도 그렇고 랙블도 도저히 죽을 낌새가 안 보였다.

1:1로 싸우다 나중에는 아예 2:2로 싸우는데, 그런데도 답이 없는 걸 보아 그냥 두면 날이라도 샐 기세였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말릴 생각은 않고 앉아서 시시덕거리며 구경 중이었다.

꼼짝없이 잡힌 서련이야 별수 없이 구경했지만, 여러모로 대단해 보이는 결투임은 틀림이 없었다. 상위 1%들의 실력을 다시 한번 눈에 새길 수 있는 날이었다.

결국 그날, 싸움의 승패는 도중 끼어든 다른 길드원들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나면서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왜 끼어들었냐며 난리인 하진과 로운의 외침이 피시방을 맴돌았지만, 서련이 보기엔 총대 메고 끼어든 그 길드원이 누구보다 위인처럼 보였다.

진정되던 상황은 다시 서련을 붙잡은 강마에게 시선이 쏠리면서 데스매치가 이어지고, 거기에 비연까지 서련을 잡겠다고 합세를 하면서 다시 개판이 되어 버렸다. 종래엔 각 길드에서 평화를 위해 대결을 막아서는 지경까지 가게 되면서 막장까지 가던 상황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고래고래 내지르는 비연의 말과 강마의 억울한 비명이 길드 부지를 가득 울렸지만, 승패를 못 낸 하진과 로운만큼 억울하진 않을 듯싶었다.

정신없긴 했지만, 어쨌든 나름 재밌고 유쾌하던 하루였다. 결국 그 ‘개처럼’의 내기 주제도 짖는 사람들이 많아 없던 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진부터가 쉴 새 없이 으르렁거리는 터라.

“서련 형! 근처에서 밥이나 먹고 가시죠?”

“고기 먹으러 가요, 고기! 저희가 쏠게요.”

“오늘은 내가 내면 안 될까, 얘들아.”

“개하진 설득하면 콜이요.”

“지금 저 새끼들 밥 먹여 주겠다고? 하, 소금 한 통씩 쳐주면 허락하고.”

저를 향해 못을 박는 하진을 보니 오늘도 계산하기는 그른 듯했다. 더욱이 그놈의 소금. 아침에 저지른 게 있어 말은 못 하고, 서련은 결국 마지못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계란에는 소금을 안 넣는 걸로.

다들 옷을 챙겨 들고 벌떡 일어나는 게, 신나 죽겠다는 모습들이었다. 서련도 옷을 꼼꼼히 챙겨 입고 몸을 일으켰다.

이현과 맴돌돌에게 못 해준 아까의 말. 나중에 그 말을 이어 해줄 생각이었다.

***

서련이 기억하기로, 하진은 서련이 합가했을 때 아침을 거르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합가한 서련이 불편해서 그랬다기엔 가정부 아주머니가 굳이 붙잡지 않는 걸로 보아 서련이 들어오기 전부터 늘 그랬던 듯했다.

처음에는 속이 안 받아 그러려니 했는데, 합가한 후 1년이 지나 같은 고등학교로 들어왔을 때 학교 매점 앞에서 친구들과 앉아 아침부터 빵을 몇 개씩이나 뜯어먹고 있는 걸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 당시에도 상당히 컸던 하진이 그때는 왜 그렇게 어린애처럼 보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날의 일을 목격해서였는지, 그도 아니면 가정부 아주머니께 흘러가듯 생일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하진의 생일날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부엌을 차지하고 미역국을 끓었었다.

사실 그 집에서 아침을 먹는 사람은 늘 서련 혼자였었다. 새아버지는 잦은 출장과 대중없는 출근 시간 탓에 밤이 아니면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서련의 어머니는 아침잠이 많아 늘 점심 즈음에나 끼니를 챙겨 드셨었다.

가정부 아주머니는 부엌을 침범한 서련을 말렸었지만, 서련이 워낙 완고하게 나오니 별수 없다는 듯 나중에는 나 몰라라 도망을 가셨다.

부엌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서련이 준비한 거라곤 미역국과 계란말이, 작은 케이크가 다였다. 겨우 그렇게 상을 차리고 하진을 불렀을 때. 상을 보던 그때의 그 표정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놀란 듯, 당황한 듯 시시각각 변하던 그 표정. 입을 다문 채 미역국과 계란말이를 번갈아 보던 그 눈동자가 처음으로 무섭지 않다고 느꼈던 때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케이크는 좀 싫어했던 것도 같다. 케이크로 향했을 때 눈썹이 꿈틀 흔들렸던 걸 보면.

그때는 하진의 식성도 몰랐거니와, 하진이 단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알았다면, 케이크 대신 떡 같은 거라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음식을 보던 하진의 얼굴에 싫은 내색은 없었다는 거였다. 아니, 오히려 미역국과 계란말이는 물론, 케이크까지 다 비워낸 후 등교했었다.

맞은편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게 된 이후로, 하진은 그다음 날부터 식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련의 아침을 준비해주던 가정부 아주머니가 놀라 입을 가릴 정도였다. 서련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을 뿐이지만.

돌이켜보면 서련이 해준 것이라곤 하진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겨준 것밖에 없었다. 그것도 하진과 달리 어머니의 관리하에 용돈을 받았던 탓에 용돈이 그리 넉넉하지도 않아 좋은 걸 해주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핸드폰 케이스나 장갑, 넥타이 같은 것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물론 단 한 번도 하진이 선물한 걸 가지고 다니거나 착용한 걸 보지는 못했다. 그냥 싸구려라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나중에 사회인이 되어 돈을 벌게 되면 그때는 좋은 걸 해주자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물론 그 기준은 당연히 하진에게 한참이나 못 미칠 정도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니까 지금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 현재 하진의 저 빈 손목이 지나치게 신경 쓰이기 때문이었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 그게 선물이면 더 좋겠지만, 과연 서련이 해주는 게 하진의 성에 차긴 할까 하는 생각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선뜻 마음이 안 서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번에 선물을 하게 되면 조금, 아니. 많이 비싸더라도 좋은 걸 해주고 싶었다.

서련의 시선이 다시 힐끗 하진의 빈 손목으로 향했다. 이번엔 제대로 들켰는지 곧이어 하진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영화 안 보지? 왜 자꾸 남의 팔뚝을 힐끔거려. 아니면, 뭐 안아줘?”

서련은 하진의 말에 괜히 음료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영화나 봐.”

로운과 원호와 밥을 먹고 헤어지는 길, 문득 로맨스 영화가 보고 싶어 다음에 보러 가자고 말했을 뿐인데 그대로 잡혀 영화관으로 온 참이었다. 마침 끝물인 해외 로맨스 영화가 하나 있어 그걸로 표를 끊고 되는대로 들어온 건데, 심야라 그런지 영화관은 텅 비어 있었다.

앞쪽에 앉은 한 커플을 끝으로 관객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서련을 포함해 관객은 고작 넷이 다였다. 서련과 하진이 앉은 뒷좌석 쪽도 전부 공석자리였다.

심지어 좌석도 리클라이너라 자리도 큼지막했다.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서련은 신선한 충격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역시 시간이 많이 늦어서 그런 건지, 그도 아니면 로맨스 영화가 지루해 그러는지, 하진의 눈이 차츰차츰 감기고 있었다.

안 자려고 눈살을 찌푸리며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돌아보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로맨스를 좋아하는 서련이 보기엔 애절하고 재밌어 보이는데, 하진에겐 꽤나 안 맞는지 키스신이 나올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재밌어 서련은 안 자겠다고 버티는 하진에게 몸을 기울였다. 마침 영화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하진의 얼굴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

하진을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서로를 몰랐던 그 시절에도 하진은 이성보다 운동 쪽에 더 관심이 많던 이였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했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 실은 착각이 아닐까하는. 애정이 있지만, 외동이라 형제애 같은 게 그립기 때문에 이런 집착을 보이는 건 아닌지.

게다가 지금 보이는 저 모습. 손잡는 장면에도 인상 쓰는 모습이 많은 생각을 하게끔 했다.

“…하진아.”

곧장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서련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진이 생각하는 연애. 그게 자신이 생각하는 연애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망설여졌다. 게다가 서련이 알기로 하진은 노멀이었다. 애초 서로 생각하는 연애의 정도가 다를 수 있었다.

“왜.”

“…아니야.”

빛이 반사된 하진의 까만 눈을 보자 어쩐지 말할 용기가 없어져서, 서련은 고개를 젓고 다시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좀 더 서로를 알아간 후에 얘기해도 늦지 않는다.

그런 생각으로 영화의 장면을 쫓는데, 별안간 고개가 돌려지고 시선이 다시금 옮겨졌다. 뺨을 쓰는 손길과 함께 시선이 마주쳤다.

“뭔데, 말해 봐.”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말 할 때까지 안 놔준다고 하는 것 같았다. 서련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가 끝내 기어들어가듯이 말했다. 귀 끝이 달아오른 느낌이었다.

“그냥…. 나랑… 할 수 있겠나 해서….”

하진의 놀란 듯한 눈동자가 서련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하진의 눈매가 이윽고 유려하게 휘어지는가 싶더니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의 의미를 가리기도 전에 서련의 뺨을 스쳐 지나간 손이 뒷목을 끌어 잡고 당겨왔다. 놀랄 틈도 없이 그대로 입술이 부딪치고 굵직한 혀가 입술을 가르고 침범해왔다. 본능적으로 밀어내던 손은 그대로 잡혀 하진의 목 뒤로 둘러졌다.

“하진… 읏….”

혀를 빨던 살덩이가 오싹할 정도로 강하게 혀를 긁고 밀어 올렸다. 읏, 하고 흘러나온 신음이 만족스러웠는지, 하진은 파르르 떠는 혀를 살살 비비며 서련의 꾹 감긴 눈가를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흠칫 움츠러드는 어깨가 예뻤다.

“하아, 성하진 너….”

“적당히 살살할 생각 없는데… 그건 별로 걱정 안 되나 봐?”

나른하게 내리뜬 서련의 눈꼬리를 지그시 눌러 문지르며 하진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꾹 감긴 눈이 파르르 떨리다 다시 떠졌다. 이대로 덤벼들고 싶을 만큼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아니, 사실 그냥 다 예뻤다. 이렇게 도발 같지 않은 도발을 하는 모습이며, 위태롭게 저를 보는 모습이며, 하진의 눈에는 그냥 전부 다. 예뻐 보였다.

애초 봐줄 생각도 없고, 적당히 할 생각도 없다. 그게 하진의 대답이었다.

“서련아, 너랑 내 체격 차를 생각해.”

그럼 답 나와.

하진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서련이 고개를 푹 숙이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진이 귓가를 쓸며 왜, 하고 나른하게 묻자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좋아서.”

좋아서.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애초 기대조차 하지 않아서인지,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려운 것 같으면서도 떨리는 기분. 그냥, 거부감 없이 다가와 준 그 마음이 좋고 설렜다.

물론 겁도 났다. 그런데도 아팠던 기억을 등한시할 만큼 지금은 그저 하진이 좋았다.

서련의 귓가를 맴돌던 손길은 잠시 멈칫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서련의 뒷목을 부드럽게 쓸고 내려가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아직 고개를 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서련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제법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나 괴롭히는 거 잘하는데… 좀 괴롭혀 줘?”

“…영화나 봐.”

“어차피 이제는 들어오지도 않아.”

그건 서련도 마찬가지였다.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지금 나오는 장면이 뭘 위한 복선인지, 무엇하나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기억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이제는 혼자 흐느끼며 봤던 그 시절에서 벗어났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그때의 그 시절이 조금은 아릿한 추억이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내용 따위 아무래도 괜찮아졌다. 반대로 하진에게는 꽤 좋은 경험을 심어줄 생각이었다.

“하진아.”

“왜, 영화나 보라며.”

서련은 저를 향해 돌아보는 하진의 불만 많은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가볍게 겹쳤다. 그리고 그대로 아랫입술을 짓눌러 콱 깨물었다. 하진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오르고, 곧이어 서련의 뺨과 귀 위로 큰 손이 덮였다. 그러나 서련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상체를 뒤로 쑥 물렸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영화 끝나고 주요 내용 확인할 거니까 제대로 봐.”

“하, 뭐 감상문이라도 들으려고?”

“음, 그럴까.”

웃는 모습 그대로 서련이 하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뭐라 말하려던 하진은 이내 세상 온갖 불만을 다 품은 표정으로 영화의 스크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디 집에 가서 보자.”

이를 악문 채 하진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확인한다는 말이 그렇게나 무서웠는지, 하진은 그 이후로 스크린만 주구장창 노려보았다. 반대로 서련은 옆에서 턱까지 괸 채 여유롭게 그 모습을 감상했다.

하진의 빈 손목. 이왕이면 좋은 걸로 해줄 생각이었다. 물론 하진이 착용하고 다녔던 것만큼 좋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서 더 부담스럽지 않게 하고 다닐 수 있는.

서련은 하진 몰래 선물을 계획하며,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시간을 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았다. 옆에서 이를 갈며 영화를 보는 하진을 모습이 마음을 차지해서, 이제는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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