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서련 형,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세요.”
“키키 형님? 이것도 좀 드셔 보시죠? 아니면 밥 시켜 드릴까요? 아, 밥이 있던가. 야, 여기 있던 메뉴판 어쨌냐?! 메뉴판!!”
서련은 해맑다 싶을 정도로 웃으며 얘기하다 갑자기 사자 같은 포효를 내지르는 눈앞의 사내를 난감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서련의 앞으로는 온갖 술안주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놓여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 있는 걸 다 쓸어다 놓은 광경에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함이 다 들 정도였다.
서련의 왼쪽으로는 서련을 챙긴다고 정신없는 로운과 원호가 술도 잊은 모습으로 여기저기로 손을 뻗고 있었고, 서련의 오른쪽으로는 오만가지 인상을 쓴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하진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메뉴판을 찾아다니는 강마까지.
그뿐이랴, 주변 이들의 작태 때문인지 모든 시선이 전부 서련의 얼굴로 쏠려 있었다. 서련은 메뉴판을 건네받고 좋아하는 강마대신 사람들에게 어색하게 웃어주어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사실 그 ‘내기’의 영향이 컸다. 그러니까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그 내기 말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내기는 게임을 끝내고 집에 갈 때 즈음에야 효력을 발휘했다. 그것도 저들이 이긴 스크린 샷을 찍어놓고 소원 운운하는 로운과 원호 덕분에.
내기는 당연히 서련의 패배였다. 때문에 서련은 미리부터 벼르고 있었다는 듯 ‘3바퀴 1주 소맥’ 술자리에 가자는 로운과 원호의 태도에 거절은커녕 뭐라 말도 못 해보고 등 떠밀리듯 나와야 했다.
당연히 거절하려 했다.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사람을 만나는 서련에게, 준비도 없는 만남은 부담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거절하지 못했던 건, 벅차게 느껴질 정도로 들뜬 로운과 원호의 미소 때문이었다.
씩 웃으며 괜찮다고, 같이 놀자고 하는 말에 결국은 지고 말았다. 그냥 그 순간, 왠지 괜찮을 것만 같았다. 두 사람과 어울렸던 시간 때문인지, 불편함보다는 함께한다는 익숙함이 더 크게 들었다.
그래서 미소에 이끌려 함께 걸음을 옮겼고,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중 서련을 보고 가장 많이 좋아한 건 강마였다.
술을 마시다 뿜는 건 물론이요, 뿜고 나서는 소주 세례에 난리가 난 사람들을 뒤로하고 날래게 튀어나와 두 팔을 뻗어 올리며 서련을 맞이했다.
이렇게 반겨줄 줄은 몰랐던 터라, 서련도 쑥스럽게 웃으며 강마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에르덴에서 매일 놀다시피 해서인지, 놀랄 만큼 낯설지가 않았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거북함이 없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나서서 먼저 정겹게 인사하거나 적극적으로 말을 붙이거나 그러진 못했다. 그래도 저를 보는 시선들에 익숙해지려 애썼고, 건네지는 말에 웃으며 맞인사를 해주었다.
길게까진 아니더라도, 몇몇과는 얘기까지 나누었다. 어렵게 생각했던 자리는 막상 겪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물론 서련을 향한 관심이 많아질수록 하진의 기분은 땅을 기었다. 서련이 눈치 빠르게 이를 깨닫고 말 수를 줄였을 때에야 서련을 향했던 뜨거운 관심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보다는 다들 하진의 서슬 퍼런 시선을 받고 피한 것이지만 말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서련은 관심 대신 여기저기서 보내주는 안주를 떠먹는 신세가 되었다. 서련의 옆에 앉은 하진은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소맥을 들이켜고 있었다. 평소라면 손 한 번 잡는 걸로 풀었을 텐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었다.
“…화났어?”
“어.”
기어들어 갈 듯 물어보는 서련의 답변에 하진은 뜸도 없이 즉답했다. 그럴 만도 했다. 어쨌든 술자리를 허락한 건 서련이었으니까. 서련은 금방이라도 으르렁거릴 것 같은 하진의 옆모습을 보다가 남들 몰래 손을 뻗어 하진의 손을 꼭 잡았다. 움찔대던 손이 이내 서련의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들어와 깍지를 끼고 꽉 맞잡았다. 어쩐지 끌어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조용히 있을 거니까 걱정 마.”
“누가 그딴 거 걱정한대.”
안다. 하진이 걱정하는 점은 그런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서련은 하진의 빈 잔을 보며 손 안의 온기를 좇았다. 주변을 보자 낄낄거리며 노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광경이, 아니. 이런 광경 속에 있다는 자체가 뭐랄까.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따금 들었던 생각이 또다시 불쑥 튀어나왔다. 사랑보다 우정을 택했다면 이런 광경이 흔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그래도… 하진아, 네가 안 왔으면 나도 안 왔어.”
하진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콧등에 자리했던 주름이 조금은 사라졌다.
사실 3바퀴 1주 소맥 파티가 시작된 지는 며칠 되었다. 그 기간 동안 하진은 꿀단지를 숨겨놓은 곰처럼 밤 10시 이전에 꼬박꼬박 집에 들어왔다. 술을 아예 안 마신 건 아니었지만, 나름 절제를 해서인지 혀가 꼬일 만큼 취해서 들어온 적은 아직 없었다.
“이 새끼들아, 그만 가져가!”
“좋은 말로 할 때 내놔라. 앞에 있는 술이나 처먹어, 새꺄.”
“누가 강시울 좀 어떻게 해 봐라. 이 새끼가 소맥 만들다 미쳤나.”
서련의 시선이 안주 하나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두 사내에게 향했다. 잘 보니 치킨 하나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한 명은 강마였고, 다른 한 명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였다. 일순 그 사내와 서련의 눈이 마주쳤다. 이 미친 새끼 좀 어떻게 해달라는 간절함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강마야.”
“걱정 마세요, 키키 형. 곧 닭 들고 갈 테니까.”
“…아니, 나 그거 싫어해.”
그 순간 그게 무슨 소리냐는 시선이 전부 서련을 향해 몰려들었다. 쳐다보는 게 다들 어떻게 치킨이 싫지? 라는 표정들이었다.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일 때를 떠올리게 하는 시선들이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메, 메기라며?’하는 소리에 ‘등신아, 내가 아니랬잖아.’하고 속닥이던 말까지. 하진이 개지랄을 한 덕에 그 소리는 금방 들어갔었지만, 시선은 한동안 끈질길 정도로 서련을 쫓아다녔었다.
심지어 그중의 반은 서련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말도 붙이기 전에 허리부터 꾸벅 숙이며 서련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작 서련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 니들이나 존나 처먹어라!”
강마는 의외로 빨리 물러났다. 대신 웬 공깃밥을 들고 오더니 서련의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고는 씩 웃으며 수저를 내밀었다.
“키키 형, 드세요. 아니, 치킨을 싫어해서 이렇게 말랐나? 개하진 너 형 밥 잘 먹이는 거 맞냐?”
“씨발, 왜 다 참견질이야.”
“찔리나 본데?”
“야, 걱정 마라. 우리가 며칠 다녀봤는데, 그래도 잘 먹이긴 하더라. 다만, 형이 새 모이만큼 먹어.”
“새 모이? 닭 같은 새 말하는 거냐?”
“비둘기는 열외. 걔네는 볼 때마다 뭐 처먹는 거 보면 형보다 많이 먹을 거다.”
“저 정도면 체질 같은데.”
술자리는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그 사이에서 서련은 세 명, 아니 네 명의 등쌀 어린 시선에 말없이 밥을 떠야 했다. 밥 넘어가는 게 무슨 돌 같았다.
“개하진은 뭐 먹고 저렇게 멀대 같이 큰 거냐?”
“고딩 때 같은 거 먹어놓고 한다는 소리 봐라.”
“아니야. 개하진 저놈 밥 존나 많이 먹었어. 기억 안 나냐? 우리 급식배틀 뜬다고 제일 마지막에 가서 엄청 받아다 먹었던 거? 그때 성하진 미쳤었잖아. 산처럼 쌓아놓고서 그거 이기겠다고 물도 안 마시고 밥만 처먹고. 아, 씨발 생각하니 웃기네.”
“야 사돈 남 말 하지 마라. 넌 그때 질로 승부하겠다고 고기만 퍼왔잖아. 이모님들한테 등짝 스매싱 맞고.”
“아, 그때 재밌긴 했지? 이모님들이 개하진만 예뻐한 거 빼면.”
“야, 야. 이모님들은 나만 예뻐했거든?”
“까지 말자, 로운아.”
“이로운 가만 보면 자뻑이 쩔으셔? 새끼가 똘끼만 충만해 가지고.”
“똘끼 하면 개하진이지. 오죽하면 앞에 개가 붙었겠냐?”
“꺼져라.”
추억을 얘기하는 모습들이 정겨워 보였다. 같은 장소지만, 전혀 다른 추억.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반된 추억이었다. 서련이 기억하는 추억은 그랬다. 정겹지도 않았고, 즐겁지도 않았고, 애틋하지도 않았다.
좋은 날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만 해도 꽤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도 있었고, 사랑받고 사랑하던 시기였다.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한 건, 2학년을 올라간 이후부터였다. 악의적인 추문과 따돌림.
받아들이려 했다. 조심하지 못한 제 탓을 하며, 참아내고 받아들이려 애썼다. 이 악물고 버티려 했던 시기가 길어질수록, 추문은 점점 부풀려졌다. 그리고 그 추문은 결국 괴롭힘을 끌고 왔다.
남같이 지내던 하진에게 그 사실을 들킨 건, 괴롭힘이 딱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몰랐으면 했던 사실은 하진의 손에 마무리가 되었다. 학생 둘이 피떡이 된 다음 날부터 서련을 향한 괴롭힘은 사라졌다. 그러나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도 은근하게 떠도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교내 폭력 사건 이후, 하진과 서련이 친해졌다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집에서는 덜 했지만, 학교에서는 서로 말조차 주고받지 않았고, 마주쳐도 모른 척 남처럼 지나쳤다.
하진과 온전히 말을 트게 된 건, 3학년으로 올라가던 겨울날이었다. 1월 말 즈음. 물론 그 역시 그다지 좋은 일로 말을 트게 된 건 아니었다.
“…….”
생각하니 입안이 씁쓸해졌다. 서련은 쥐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웃으며 추억을 얘기하던 시선들이 일제히 서련에게 향했다. 서련은 애써 웃으며 외투를 집어 들었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아, 그럼 같이….”
“아냐, 혼자 갔다 올게. 그 정도도 못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선을 긋는 말에 로운의 입이 텁 다물렸다. 서련은 제 손끝을 잡으려는 하진의 손을 애써 모른 척 지나치곤 룸을 나섰다. 혹여 따라오진 않을까 싶었는데, 화장실까지는 쫓아올 생각이 없는지 룸 밖으로 나오는 이는 없었다.
서련은 화장실 방향이 아닌 술집의 출입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외투를 챙겨 입고 후드를 눌러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입만 겨우 보일 듯 말 듯 한 차림새로 밖을 향하자 찬바람이 입술을 훑듯 지나쳐갔다.
서련은 어깨를 부르르 떠는 것으로 겨우 추위를 떨쳐내고, 가게 앞의 대기벤치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찬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셨다. 찬 공기가 가득 들어오자 그제야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자.”
눈이 안 온 지 꽤 됐던가. 이번 겨울엔 눈이 참 안 온다 싶었다. 서련은 발끝을 내려다보며 긴 회상에 잠겼다. 시간과 계절이 왔다 갔다 하고, 여러 장면이 떠오르다 나중에는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결국 서련은 한숨을 끝으로 생각을 중지하고 고개를 들어야 했다.
한참이 흘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만 들어가야지, 하는 생각은 드는데 정작 몸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래도 하진이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서련의 옆에 털썩 앉았다. 시야에 들어온 건 낯설지 않은 흰색 운동화였다. 고개를 드는 서련의 귓가에 신발과 달리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추워 보이는데, 손잡아 드릴까요? 아, 서비스니까 걱정 마세요.”
정적인 것 같으면서 유쾌한 목소리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자기 전에 늘 ‘좋은 꿈 꾸세요’라는 톡을 보내고, 답장을 하면 고맙다는 듯이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는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내는 녀석. 바로 로운이었다.
서련은 일어나려던 것도 잠시, 의자에 도로 앉았다. 물론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거부하며.
“친구끼리 그런 건 안 하잖아.”
“안 하는 거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로운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갑갑함이 가시는 듯한 환한 미소에 자유롭고 여유로운 표정까지. 뭐가 이렇게 쉬운지, 이제껏 어렵게만 살아온 서련에게 로운은 참 정의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갑갑해서 나온 거 맞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조금.”
서련의 시선은 다시 바닥으로 고정되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사실 하진 만큼이나 서련도 대화에 소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눈을 마주한 채 상대의 마음을 읽어야 할 때면 더더욱 불편했다.
그런 생각으로 눈을 깜빡이는데, 별안간 손이 뻗어와 서련의 외투에 달린 후드를 뒤로 넘겼다. 환하게 드러난 시야가 거북했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딘지 씁쓸하게 웃고 있는 로운이 서련의 눈을 응시한 채 앉아 있었다.
“갑갑한 게 좀 가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무도 없기도 하고… 많이 그래요?”
“…괜찮아. 추워서 그랬던 거야.”
서련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후드를 넘긴 손은 서련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고 떨어져 나갔다. 후드를 벗자 어쩐지 공기가 더 스산하게 느껴졌다. 추위에 어깨를 움츠린 서련의 옆으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온 것도 그때였다.
“제가 서련 형 처음 봤을 때가… 입학식 때였거든요.”
“아….”
“새학기 봄에요. 봄이라고 하기보단 겨울이겠네. 바람은 쌀쌀하게 스치는데, 햇볕은 따뜻하고 마음은 덥고, 그런 거 있잖아요.”
무슨 감성을 말하겠다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서련은 그다지 맞장구를 쳐주지 못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다고 해주세요.”
“…그래, 좋았겠네.”
“엄청 설레고, 엄청 좋았어요. 형을 거기서 봤거든요.”
서련의 어깨가 일순 움칫 굳어졌다. 옆을 돌아보자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로운의 옆모습이 보였다. 단정한 외모에 매력적인 미소. 어딘지 풋풋하고 지극히 추억어린, 그런 미소가 그곳에 있었다.
“진짜 예쁘다고 생각해서…. 아, 외모 이런 거 말고 그 분위기 같은 거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랑 얘기하고 있었는데, 장난친 건지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환하게 웃는데…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53
그때까지는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서련은 로운이 생각하는 그런 따뜻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때만큼 웃지 못했고, 그때만큼 사랑스럽지 못했다. 때문에 못 볼 꼴도 많이 보였다. 하진과 더불어 로운과 원호에게도.
로운과 원호는 서련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못 볼 꼴을 보여준 가장 최악의 형태가 알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니까 제가 다시 그렇게 만들어 드릴게요.”
“…로운아, 나는….”
“알아요. 형이 무슨 걱정하는지. 그래도 친구는 괜찮잖아요, 네?”
고개를 기울인 채 시선을 맞춰오는 로운의 모습이 마치 꼬리를 휙휙 흔드는 큰 강아지 같았다. 이를테면 레트리버라든가.
손만 안 잡았다 뿐이지, 거의 애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릎 꿇을 기세로 몸을 낮추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덕분에 서련은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다.
“로운아, 잠깐 일어나 봐.”
“형, 진짜 제가 웃게 해드릴게요. 형은 진짜 웃을 때가 따뜻하단 말이에요. 지금은 진짜 겁나 차가워요. 아니, 이게 싫다는 게 아니고 보호본능을 자극해서… 뭐래!”
“일단 좀 일어나 봐. 바닥 차가워. 아니, 일단 들어가자. 형 추워.”
“추워요? 제 옷 줘요?”
“아니, 들어가자. 하진이 걱정하겠다.”
“하진이 아까부터 형 찾아다닌다고 룸마다 뒤지고 다니던데. 그놈이야 알아서 잘 돌아오겠죠, 뭐.”
“…….”
위험한 거 아닌가. 아니, 전화를 하지 왜…. 서련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찾아 꺼냈다. 홀딩을 풀고 액정을 켜자 아니나 다를까 부재중 전화가 10통이나 와 있는 게 보였다. 피시방에서 스팸 연락 때문에 거슬린다고 무음으로 해 놨던 걸, 지금에서야 기억해 냈다.
때마침 하진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서련은 그걸 받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로운아.”
“네.”
서련은 핸드폰의 액정을 느릿하게 쓸어 만졌다. 액정에 뜬 이름. 하진의 이름을 보자 기시감을 느꼈다.
로운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만큼 로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손을 먼저 내밀고 다가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런데 그 안에 드리워진 호의가 단지 ‘친구’라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될 정도라서, 서련은 그저 회피하려고만 했다. 버겁게 느껴져서.
그러나 하진의 이름을 보고,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고, 생각이 달라졌다.
“형은… 친구가 좋아.”
딱 거기까지. 서련의 대답은 명백한 선이 그어진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친구인 관계. 선을 넘어올 수 있는 건, 하진만으로 족했다. 지금도 앞으로도, 하진만으로 충분했다.
로운의 까만 눈이 흔들림 없는 서련의 눈동자를 쫓았다. 그러나 잠시 후 로운은 환하게 웃었다. 그늘 없이 웃는 모습은 코끝이 찡할 만큼 밝았다.
“네, 그거면 돼요.”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에 서련은 미안한 마음보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그런가 보다. 미안한 마음보다 고마운 마음이 드는 관계.
그거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서련도 마주 웃을 수가 있었다.
부재중 전화는 하나 더 늘어 11통이 되었다. 서련은 홀드를 풀고 제가 먼저 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 번을 가기도 전에, 하진은 전화를 받았다. 대뜸 소리부터 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이 가는 소리와 함께 어디냐는 낮은 말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지만.
“지금 들어갈 거야. 잠깐 밖에 앉아 있었어.”
<기다려.>
“아니야, 하진아. 들어….”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서련의 시선이 로운에게 향했다.
“하진이 온대요?”
“응. 로운아 너는 그만 들어가 봐. 하진이랑 얘기하고 들어갈게.”
“아마 바로 갈 거 같은데…. 뭐, 형 밥도 먹었으니까. 내일은 업뎃날이고, 모레에나 보겠네요. 아! 연락은 드릴게요, 형.”
로운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보다가 서련도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로운의 뒤로 하진이 성큼 나타났다. 표정을 보아하니, 적잖게 화가 난 듯했다.
“뭔데 이 새끼랑 같이 있는데.”
“꺼져줄 테니까 걱정 마라.”
로운은 웃는 낯으로 하진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술집 안으로 냉큼 들어갔다. 하진의 콧등이 금세 짐승처럼 찡그려졌다. 저걸 죽여, 살려 하는 눈초리로 로운을 보는데, 보다 못한 서련이 하진의 팔을 잡아끌고서야 그 시선은 거두어졌다.
“왜 나왔어. 들어간다니까.”
“뭘 들어가. 바로 집으로 갈 거야.”
“아니, 그래도 인사는 좀….”
“됐어. 내가 하고 왔어.”
전혀 믿음은 안 갔지만, 서련은 일단 그 말을 믿기로 했다. 물론 그 뒤로 날아든 호통에 바로 움츠러들어야 했지만.
“전화 제대로 안 받지? 뭐 화장실을 가?”
“…무음으로 돼 있었어. 지금은 다시 풀었고.”
서련은 패딩에 달린 후드를 다시 뒤집어 쓰며 기어들어 가듯이 말했다. 일단 잘못한 게 있으니 목소리는 작게. 하진은 말 대신 짧게 쯧, 혀를 차고는 서련의 손을 잡아 제 외투 주머니로 끌고 왔다.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나는 걸 보아 자신이 없는 동안 꽤 마신 모양이었다. 서련은 굳이 묻지 않고, 하진과 발을 맞췄다. 평소보다 느린 걸음, 그리고 짧은 보폭. 문득 아까 친구들과 하던 얘기 떠올랐다.
“하진아.”
“왜.”
“너 키 몇이야.”
“고 3때 재고 안 재봤어.”
“그때 몇이었는데?”
“188쯤.”
큰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큰 줄은 몰랐다. 서련이 신검 받을 때 178cm가 나왔으니, 제법 차이가 나는 편이었다. 고등학교 때 복싱이며 권투며 재미 들려서 다닌다는 소리를 듣긴 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키도 키지만 일단 체격이 남달랐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네. 서련은 후드를 슬쩍 끌어올려 부러움이 섞인 시선으로 하진을 올려다보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에야 다시 후드를 쓰고 시선을 내려 앞을 보았다. 후드 때문에 대부분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거리가 한산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눈 감고도 다니는 집 근처 동네. 물론 학교 갈 때가 아니면 잘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긴 했다. 이렇게 하진과 함께가 아니면 지금 같은 시간대에 나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보폭을 맞춰 하염없이 걷다 보니 집에는 금세 도착했다. 밖에 있을 때야 바람이 불고 지나쳐 술 냄새가 희석됐었는데, 확실히 밀폐된 집안에 들어오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술 냄새가 확 끼쳐왔다.
그 잠깐 사이 얼마나 마신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겉모습은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게, 일부러 괜찮은 척을 하는 건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진아, 씻고 나오면 깨워줄 테니까 좀 자고 있어.”
하진은 어, 하는 짧은 대답만 남긴 채 외투를 벗으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비틀거리지도 않는데, 어째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서련은 되는대로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어놓고 잠옷을 챙겨 든 채 욕실로 향했다.
술 좀 깨게 생강차라도 끓여 먹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재빨리 씻고 나와 끓인 생강차를 들고 하진의 방으로 들어간 건데, 의외로 멀쩡한 모습으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노트북을 하고 있는 하진의 모습을 마주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둑한 방안은 노트북에서 나온 빛으로 겨우 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련이 다가가자 하진은 협탁 위에 노트북을 옮겨놓고 서련의 손목을 잡아 바짝 끌어당겼다. 컵 안에 든 액체가 출렁 흔들렸지만, 재빨리 받쳐든 손길에 다행히 엎질러지진 않았다.
대신이랄까, 중심을 잡지 못한 서련이 침대 위로 넘어졌다. 아니, 그건 고의로 일어난 행동이었다.
“…하진아.”
서련은 제 손에서 컵을 낚아채 협탁 위에 올려놓는 하진을 보며 위험함을 느꼈다. 어딘지 다른 느낌. 볼 순 없지만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공기.
“…아직 내 건 안 들어줬잖아.”
서련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하진의 내리뜬 눈이 어두워서인지 거뭇하게 보였다. 단단한 손가락이 서련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파고들어, 여기저기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 간지러운 손길은 서련이 하진의 손목을 잡았을 때, 끊어진 것처럼 멈추었다.
대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감아.”
강압적인 말투가 서련에게는 애원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서련의 시선이 점차 내려앉았다. 무언가 말해야 되는데, 입술이 달싹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귓가에 같은 말이 떨어졌다. 서련의 머리칼을 헤집던 손은 뺨과 귀를 가득 덮듯 쓰다듬다 뒷목을 눌러 잡았다. 뜨거운 숨결이 입술 위로 스치듯이 닿았다. 가까운 거리. 입을 열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하진이 있었다.
“어서, 형.”
감아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벗어나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근데 그러질 못했다. 입술 위로 떨어지는 한숨이 심장이 멎을 만큼 뜨거워서, 뒷목을 눌러 잡는 큰 손이 데일 듯이 뜨거워서, 그러질 못했다.남은 한 손이 서련의 뺨을 가득 덮었다. 귀가 다 가려질 만큼 큰 손에서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사이로 다시금 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리게 깜빡이던 서련의 눈이 꾹 감긴 건, 하진의 손끝이 서련의 눈가를 한 번 쓸고 지나갔을 때였다.
그리고 서련이 눈을 감은 순간, 뜨거운 숨결은 짐승처럼 저돌적으로 덤벼들었다.
아슬아슬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곧 팽팽히 당겨져 끊어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음에도 서련은 그것을 묵시했고, 방관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끊어진 실과 함께 서련을 삼켰다.
“읏….”
달달 떨리는 손길로 하진의 어깨를 밀어봤지만 소용없었다. 혀를 빨고 당기는 행위가 집요하기까지 했다. 어깨를 움츠리면 여지없이 뒷목이 눌렸고, 그대로 고개가 들렸다. 목 안이 지끈 눌리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마다 머릿속이 혼탁해지길 반복했다.
겨우 고개를 틀고 빠져나와도 숨 한 번 들이켜는 게 고작이었다. 금세 다시 잡혀 고개가 고정되었고, 타액과 함께 미끄러지듯 들어온 혀에 아릿하게 비벼지며 빨려야 했다. 마치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굶주림에 허겁지겁 삼키는 짐승 같았고, 절제를 몰라 씹히듯 아파해야 했다.
“흑...!”
목 안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입천장을 긁고 지나간 혀가 목 안을 깊숙이 찔러왔다. 쓰릴 정도로 비벼진 아랫입술은 이미 잇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손끝을 세워 하진의 어깨를 긁어 봤지만, 되레 잡힌 채 혀만 깨물려야 했다.
서련이 움찔 떨 때마다 하진은 달래듯이 서련의 뺨과 귀를 쓰다듬으며 혀끝을 살살 비벼왔다. 그러나 서련의 목안에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오면 다시 고개를 기울이고 잡아먹을 듯이 덤벼들었다.
“하아….”
더운 숨이 허공 위로 잔뜩 쏟아졌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은 몇 번의 아찔한 현기증을 맞이한 후에야 끝이 났다. 뺨을 지분거리는 숨결은 아직 남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열기를 가득 품은 혀가 미끄러지듯 목선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그만… 하진아….”
잔뜩 갈라진 말이 겨우 내뱉어졌다.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것 같은 혼미함이 시야를 흐리게 했다. 느껴지는 건 목을 지분거리는 뜨거운 숨결뿐이었다. 느리게 깜박이던 서련의 눈이 크게 뜨인 건, 뜨거운 숨이 닿던 목 위로 살을 파고드는 통증이 퍼졌을 때였다. 툭 건들면 터질 것처럼 붉어진 피부 위로는 잇자국이 생겨났다.
하진이 입안에 번져드는 피맛을 깨닫고 흠칫 놀라 물러난 것과, 고통에 움찔 굳어졌던 서련이 까무룩 쓰러진 건 거의 동시였다.
어둑한 방안, 서로의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그 사이에서 하진은 우두커니 앉아 서련만 바라볼 뿐이었다. 서련의 뺨을 가득 덮은 손끝이 이내 꽉 말렸다. 단단하게 말린 손끝은 얼마 가지 않아 풀렸다. 하진은 서련의 곤하게 감긴 눈가를 지분거리다가, 목덜미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절전모드로 전환된 노트북의 화면이 꺼지자, 방안은 순식간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진은 그 어둠 속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약상자를 찾아다녔다. 처절할 정도로 긴 한숨이 집 안 구석구석에 머무르는 밤이었다.
서련이 눈을 뜬 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삭막할 정도로 고요한 한밤중. 눈을 뜨자마자 지끈 닥쳐오는 통증에 서련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조여든 건 그 직후였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을 보니 하진 역시 깨어 있는 듯했다.
아마,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서련은 힘줄이 툭 불거진 하진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움찔 굳어지는 걸 보니 잘못한 걸 알긴 하는 모양이었다.
“숨 막혀, 하진아….”
“…또 사라지려고?”
“…아니. 갈 데도 없고….”
사실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안심한 듯 허리를 꽉 감고 있던 팔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제야 겨우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서련은 팔을 올려 상처 부위를 더듬더듬 찾았다. 손끝에 덕지덕지 붙인 반창고가 만져졌다. 슬쩍 매만지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하진은 말없이 그 손을 잡아내려 다시 꼭 끌어안았다.
풀 죽은 모습이 보지 않아도 그려졌다. 말 한마디 없이 숨만 쉬는데도 갑갑함이 전해질 정도였다.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
짐승처럼 물어놓고 한다는 소리가 저거다. 서련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불안해서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아파할 줄 몰랐고, 상처 입을 줄 몰랐을 만큼 많이… 불안했던 거다. 그리고 알았을 것이다. 겨우 이 정도에도 서련은 상처 입는 다는 사실을.
“…하진아.”
나직한 음성에 하진이 서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무언가를 눈치 챘는지, 하진은 서련이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선수 치듯 먼저 입을 열었다.
“받아달라고 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오늘 일은… 실수야.”
실수. 그 말에 서련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덮어도 가려지지 않는 일이라는 건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이 서로의 관계를 얼마나 모호하게 하는지, 하진은 모르고 있었다. 하진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이렇게라도 해서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니까.
서련과 마찬가지로 하진 역시 아직 2년 전의 그 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였다. 하진의 마음에 버거움을 느낀 서련이 말없이 사라졌던 그 날.
하진이 어떤 고백을 하거나 말로 언급했던 건 아니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서로의 관계. 서련은 그 관계를 ‘도피’로 정리했었다.
모르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있었을 뿐.
“…그만 자.”
혹여 달아날까 꽉 쥔 손이 서련의 눈에 아프게 들어왔다. 서련은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코끝이 찡했지만, 모른척했다. 그저, 등 뒤의 온기만 하염없이 좇을 뿐이었다.
***
서련이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희미한 담배향이 퍼지는 걸 보아, 일어나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방을 나간 모양이었다. 몽롱함을 애써 밀어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야야….”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도 물린 목이 잔뜩 쑤셔왔다. 그렇게 세게 물린 것 같지도 않은데, 따라오는 고통은 생각하고는 또 달랐다. 진짜 짐승한테 물렸나 싶을 정도였다. 살짝 건드려보자 욱씬 아픈 게, 멍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간밤의 일을 상기하다 보니 한숨이 폭 내쉬어졌다. 서련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협탁 위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그대로 입을 벌린 채 열려 있었다. 손을 뻗어 터치패드를 톡 두드리자 화면 보호기가 드러났다. 남은 배터리가 고작해야 6%였다.
방전이라도 날까, 서련은 충전 어댑터가 있는 책상 쪽으로 노트북을 가져갔다. 충전 잭을 연결하자 노트북 화면이 밝아졌다. 그대로 닫을까 하다가 서련은 어제 하진이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던 게 생각나, 망설이다가 화면보호기를 클릭해 제거했다.
화면에는 재생 중지된 동영상이 하나 떠 있었다. 서련의 손끝이 멈칫 굳어졌다. 서련은 그 이상 보지 않고, 바로 노트북을 닫았다.
영상에는 한 인물이 떠 있었다. 흰색 외투를 입고 신기한 듯 어딘가를 보고 있는 모습은 편집 하나 되어 있지 않은 채였다. 그래서인지 더 또렷했고, 그래서인지 더 못나게 느껴졌다.
그 영상의 사람은 서련 본인이었다.
달칵-
“뭐해.”
문을 열고 들려온 소리에 서련이 뒤를 돌아보았다. 막 씻고 나온 듯, 머리에 수건을 얹고 있는 하진이 웃통을 벗어 던진 채 서련을 보고 있었다. 서련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아, 노트북. 방전될까 봐 충전해놨어.”
“…밥해놨으니까 나와서 먹어.”
하진은 노트북을 힐끗 보다가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뒷목을 쓸며 말했다. 잠을 설친 안색이었다. 하진은 하품을 쩍 하다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서 나가라고 서련에게 눈짓을 하는데, 별수 없이 쫓겨나듯 나와야 했다.
물론 나가기 전에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옷 제대로 입고 나와.”
서련이 방을 나오자마자 간 곳은 화장실이었다. 욱신거리는 상처를 보기 위해서였다. 거울 앞에 서서 옷을 슬쩍 내리자, 반창고 근처로 번진 멍이 한눈에 들어왔다. 원래도 멍이 잘 들긴 하지만, 이 정도로 들어본 적은 오랜만이었다. 반창고는 또 어찌나 덕지덕지 붙였는지, 한 통을 다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한 세 대만 때릴까.”
방에 골프채 있던데.
서련은 엉망으로 붙여놓은 반창고를 하나하나 떼어낸 후, 대충 세수만 하고 나왔다. 나오자, 식탁 앞에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는 하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련의 자리에 밥과 함께 예쁘게 놓여 있는 푸딩도.
“이걸로 때우려고?”
하진의 시선은 피멍이 든 서련의 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라고 뜯어낸 게 맞긴 했다. 거추장스럽기도 했고.
서련은 푸딩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짐작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찌푸려졌다가 펴졌다가 인상이 시시각각 변했다.
서련에게 하진은 맹수였다. 함께 있어도 어느 순간 상처 입었고, 공격을 받았다. 어제처럼. 그러니 여기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냥 넘어가면 다음엔 물리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서련이 살기 위해 하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하진아.”
서련은 하진의 눈을 피하지 않고 그를 나직이 불렀다. 써늘한 눈빛이 서련을 한동안 무섭도록 직시했다. 그러나 곧 서련의 목을 보고는 눈을 감았다.
“…잘못했어.”
건조한 말이었다. 반성조차 희미한 말이었지만, 서련은 그 말에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두 팔을 살짝 벌려 뻗었다. 하진이 곧장 서련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서련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하진의 등 뒤로도 서련의 팔이 둘러졌다.
“그리고 음… 세 대만 맞자, 하진아.”
“뭘로.”
“네 방에 골프채 있던데. 아니면 저기 보이는 야구배트는 어때. 닷트도 괜찮고.”
“…….”
이번만큼은 하진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니, 진지하게 고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서련은 농담이라는 듯 픽 웃어주며 하진의 덜 마른 머리칼을 매만져 주었다. 하진은 서련의 품에 가만히 기댄 채 눈을 감고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늦은 아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어젯밤 일이 깨끗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서련은 물론 하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련은 잠시만 더 방관하기로 했다. 가능한, 된다면 함께 있고 싶었다.
이제는… 아프다는 이유로 하진에게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이 길어지자 다시 게임이 그리워졌다. 쓸데없는 잡념을 없애기에 제격인 에르덴은 오늘 하필 대규모 업데이트로 접속이 불가한 상태였다. 그나마 하루인 게 어디인가 싶기도 해서, 서련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랜만에 집에 얌전히 붙어 있기로 했다.
하진도 오늘은 딱히 나갈 생각이 없는지, 편한 복장 그대로 마루에 앉아 TV를 시청했다. 방에만 들어가려고 하면 제 옆으로 오라고 으르렁거리는 터라, 서련도 별수 없이 그 옆에 앉아 함께 TV를 시청해야 했다.
그러다 잠깐 존 것 같은데, 일어났을 때 목에는 다시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다. 서련이 슬쩍 손을 가져다 대자 눈살을 확 찌푸리는 모습이, 마치 떼면 가만 안 둔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보였다. 제 딴에는 이게 치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서련은 그날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채 생활해야 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하진의 어깨에 기대 자는 것으로 소모되었다. 보다 못한 하진이 이불까지 끌고 와서야 둘은 좁은 소파에 붙어 누워 밥도 잊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겨울잠을 자듯 잠을 청했다.
영화라도 보고 올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들긴 했지만, 잘 자고 있는 하진을 보니 그런 생각도 곧 자취를 감추었다. 서련이야 그렇다 쳐도, 하진은 확실히 하루하루를 피곤하게 살고 있었다.
서련과 어울려주랴, 술자리에 어울려주랴, 밥 차리랴, 간혹 아침에 운동도 다녀오는 것 같은데 하루쯤은 푹 쉬게 해주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서련은 3바퀴 1주 소맥 술자리가 끝나면 기회를 봐서 꼬드겨 보는 것으로 잠시 생각을 미루었다.
그렇게 하진에게 휴가 같던 하루가 지나고, 서련과 비글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늘 가는 피시방의 늘 앉는 자리로.
이제는 친숙함마저 들 정도였다. 어느 정도 안면까지 튼 사장님의 모습도 친근해질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형, 업데이트 상황 보셨어요? 개쩝니다. 포탈 따위랑 비교가 안 돼요.”
“재밌는 거 개 많이 열렸던데. 이제 서련 형 포탈 안 타도 되겠던데요?”
서련은 포탈을 타지 말라고 회유하듯 말하는 로운과 원호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포탈이랑 비교해본들 서련에게 그보다 우위는 없었지만, 일단 내기에서 진 것도 있고 해서 대충 고개만 주억거려 주었다.
“따뜻한 거, 차가운 거.”
옆에서는 하진이 뭐 마실 거냐고 벌써부터 서련을 닦달해대고 있었다. 바로 앞에 놓인 바나나 우유 두 개를 눈짓하자, 하진의 표정이 또 설핏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굳이 따뜻한 걸 사오겠다고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련 형, 그날은 잘 들어갔어요?”
“아… 미안해, 로운아. 답장 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서.”
“아니에요, 그런 거 같았어요. 저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형도 마음 쓰지 마세요. 그것보다! 캐쉬 아이템 새로 들어온 것 중에 대박 외형 있는데 보셨어요?”
사실 잠든 건 아니었지만, 사정을 말할 수 없으니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로운은 됐다며 손사래를 치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 뜨더니 캐쉬 아이템 좀 보라며 서련을 설득했다.
“한 번 봐보세요.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제가 사드….”
“꺼져, 씨발. 이것들은 왜 맨날 여기 붙어서 지랄들이야. 안 떨어져?!”
“넌 사람 좀 되고 와라. 저기 옆 산에 동굴 하나 파줄 테니까 쑥만 먹고 백일 뒤에 좀 보자.”
“나한테 맡겨라. 내가 왕년에 시골에서 삽 하나 들고 동네를 정복했었다.”
“좆까.”
어수선한 걸 듣자마자 든 생각은 반가움이었다. 저 투닥거림이 정겹게 느껴진다는 것도 신기했고, 금방이라도 멱살 잡고 싸울 것 같은데도 친근해 보인다는 게 참 기이했다. 예전에는 조금의 소음도 거북했는데, 요즘은 그런 게 없었다. 오히려 지켜보고 있으면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할 때 마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부팅하는 서련의 앞으로 따뜻한 두유가 탁 놓였다. 서련이 들고 냉큼 따자 하진이 서련의 목 티를 끌어올려 귀밑까지 당겨 덮어 주었다. 스치듯이 내려간 손은 반창고가 붙여진 상처 위를 더듬더듬 매만졌다.
어제도 이렇게 만지더니, 밤에 붓기 시작한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서련이 어깨를 움츠리자, 곧장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이따 같이 병원 가.”
“됐어, 약 바르면 금방 나아.”
게다가 주말이라 열지도 않았을 테고. 서련이 눈도 안 마주치고 얘기하자, 하진은 몇 번 더 회유하다 심란한 표정으로 돌아앉았다. 그래도 포기는 안 했는지, 수시로 서련에게 집요한 시선을 보냈다.
-접속시간 PM. 03:38 / 남은 시간은 134시간입니다.
-신성의 축복을 그대에게! 에르덴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모든 던전의 입장 시간이 리셋되었습니다.
-일일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새로운 튜도리얼이 있습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길드/건블리아: 왔냐 키키야]
[길드/휴리사: 하이하이ㅋㅋㅋㅋㅋㅋ 왤케 오랜만이니ㅋㅋㅋㅋㅋ]
[길드/베르르: 우리 탈피형 오셨어욤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형형, 탈피요 하이! 아니 혹시 업뎃 봤어요?]
[길드/야생닭: 키키 왔니ㅎ 저 철딱서니 없는 애들은 신경쓰지 마라ㅎ]
[길드/건블리아: 어휴 하루이틀이어야 말이지]
[길드/휴리사: 킬레아 오기 전까지만 즐겨라 절미들아ㅋㅋㅋ]
[길드/키키아: 안녕하세요, 안녕 절미들]
-‘킬레아’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킬레아: ㅎㅇ]
[길드/킬레아: 니들 ㅅㅂ 뭐라고 했냐?]
[길드/베르르: 아 왜요! 나는 우리집 잉어도 못 예뻐하나. 울집에 잉어 한 마리 있단 말이에요]
[길드/순한양: 쩔미들 때릴꼬야?]
[길드/건블리아: 절미들아 니들 킬레아한테 웬만하면 덤비지 마라... 쟤 독수리 키우는 넘이여;;]
화면에 뜨는 수많은 이벤트 팝업창과 새로운 튜토리얼 팝업창을 밀어내자 수두룩하게 뜬 길드 채팅글이 보였다. 서련은 먼저 인사를 하고 차근차근 업데이트 튜토리얼을 살펴보았다. 기대했던 던전과 일부 콘텐츠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었다.
[길드/건블리아: 다들 오늘 뭐 할거냐? 업뎃 됐는데 따로 놀건 아니지? 그치이? 캬캬]
[길드/휴리사: 건블형 니들 오기 전부터 저러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엌ㅋㅋㅋㅋ]
[길드/베르르: 어휴 하여간 건블형은 말투도 아재야]
[길드/야생닭: 업뎃된 거 보니까 비행시합 같은 이벤트도 있고, 베히아에 던전도 새로 생겼던데]
[길드/묵요: 음 키키형 이제 포탈탈일 없겠네요ㅎ]
[길드/호백조: 어이쿠 저희가 기꺼이 가 드려야죠ㅋㅋㅋㅋ 저희만 믿으심 됩니다ㅎ]
업데이트 목록에서 흥미로운 몇 가지 콘텐츠를 추린 서련은 뒤늦게야 길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가고 싶던 곳도 있고 인원도 적당하겠다, 오늘은 거기에 갈 생각이었다. 지금 있는 인원과 딱 맞으면 더할 나위 없기도 하고.
서련은 혹여 다른 곳에 가자고 할까, 재빨리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 엔터를 치려던 그때, 화면 위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하나 올라왔다.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이제야 들어오시네^^}
그 닉네임을 보자마자 서련은 반사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1회성 소환권과 3회에 한한 면대면 지도를.
{귓속말/매익화님께: 용건부터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워, 차갑네. 1회성 소환권하고 면대면 지도 첫 번째 오늘 하고 싶은데. 어때요}
어떠긴 뭘 어때. 안 간다고 하면 또 쫓아와 꼬장부터 부릴 게 뻔했다. 서련은 새 던전에 갈 생각에 축제 분위기인 길드원들을 보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타자를 두드렸다.
{귓속말/매익화님께: 어디로 갈까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베히아요}
-‘특급소포’가 도착하였습니다.
-‘특급소포’가 도착하였습니다.
-‘특급소포’가 도착하였습니다.
-‘특급소포’가 도착하였습니다.
-‘특급소포’가 도착하였습니다.
-‘특급소포’가 도착하였습니다.
“…아.”
서련은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알림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옆을 힐끗 보자 하진이 에르덴의 캐쉬 마켓에서 이것저것을 클릭해 장바구니에 쓸어 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건 즉시결제와 함께 포장되어 서련의 캐릭에게 넘겨졌다.
할 말이 잃게 만드는 소비력이었다. 서련이 정신을 차렸을 땐, 엄청난 소비를 자랑한 하진이 캐쉬 마켓을 끄고 게임화면으로 이미 돌아온 후였다. 그사이 온 ‘특급소포’만 무려 30개가 넘었다.
“성하진, 너…!”
“킬리 것도 있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치는 서련에게 하진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말했다. 덕분에 서련의 표정이 다시 멍해졌다.
“…킬리 거?”
“어.”
하진은 다시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해 주었다. 서련의 시선이 슬금슬금 제 모니터 화면으로 향했다. 문제는 소포를 풀지 않은 한 내용물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찾으려면 다 까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소포를 클릭했더니, 그 아래 ‘반품불가’라는 말이 떠 있었다. 반품을 생각하고 있던 서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결국 서련은 소포를 하나하나 깔 수밖에 없었다. 킬리 거라도 건져 위안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예상한 대로 하진이 보낸 소포의 대부분은 캐릭의 외형 템이었다. 30개가 넘는 소포 중에 킬리의 외형 템은 고작 3개뿐이었다. 서련을 낚으려고 넣은 게 틀림없었다.
서련은 매익화에게 답변하는 것도 잊고 킬리를 소환해 가장 마음에 드는 외형 템을 착용시켰다. 불길이 오르던 킬리의 목덜미 부분에 예쁘게 묶인 붉은 스카프가 하나 생겨났다. 공격태세를 취하자 붉은 스카프는 빛가루처럼 번져, 타오르는 불길과 합쳐져 눈이 흩날리는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 눈이 흩날리는 주변은 반짝반짝했다.
킬리가 고맙다는 듯 서련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걸 보던 서련은 참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헐, 서련 형 울어요?!”
“왜요? 뭐야, 누군데요?!”
놀라 날아드는 말에 서련은 상기된 얼굴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고개를 잔뜩 숙인 채 기어들어가듯이 말했다.
“킬리가… 예뻐서….”
서련의 말에 로운과 원호가 재빨리 다가와 서련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킬리를 본 두 사람이 하진을 돌아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내지었다.
“아오… 저거 내가 해주려고 했던 건데.”
“하여간 이런 것만 겁나 빠르지.”
하진은 꼬우면 나가 죽으라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며 거들먹거렸다. 로운과 원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 갔다. 결국 그들은 짜증스레 투덜대며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형.”
흘러내린 서련의 목 티를 다시 잡아 끌어올려 주며 하진이 서련을 조용히 불렀다. 서련은 숙인 고개를 들고 상기된 얼굴로 하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좋은가 싶을 정도로 발갛게 익은 얼굴. 그걸 본 하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좋아?”
“…당연히 좋지.”
“그럼 저거 가지 마.”
서련의 시선이 하진의 손끝으로 옮겨졌다. 정확히는 그가 가리키는 있는 무언가로. 그걸 보자마자 서련은 다시 피곤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잊고 있던 게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하진의 손끝에는 매익화가 보낸 마지막 말이 떠 있었다. 그것도 유독 살갑게 느껴지는 ‘베히아요^^’라고 적힌 글이.
“…이미 간다고 해서 안 돼.”
서련은 하진의 심드렁한 눈동자를 피하며 얘기했다. 이 와중에 킬리의 외형 템이 조금 걱정이었지만, 설마 주고 뺏을 리가.
“저번처럼은 안 끝날 텐데.”
“금방 끝나고 갈 테니까…. 막고 있어 봐, 하진아.”
하진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시간이야 많으니, 재빨리 해결해주고 올 생각이었다. 그래서 말 안 하고 다녀오려고 했던 건데, 옆에 비글 세 마리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일단 서련은 의도치 않게 끊겨버린 귓속말을 켜고 매익화에게 곧 가겠다고 답장했다. 문제는 길드인데.
[길드/키키아: 저 2시간 정도만 다른 일 좀 하고 와도 될까요?]
[길드/키키아: 딱 2시간만요]
[길드/베르르: 아니 이건 대체 먼솔?]
[길드/건블리아: 키키야? 아니 메기야? 너 이러기 있기 없기냐?]
[길드/야생닭: 아니 길마형;; 왜 그래요;; 갔다가 온다잖아요]
[길드/휴리사: 길마오빠 뭐얔ㅋㅋㅋㅋㅋㅋㅋ 안되니까 메기랰ㅋㅋㅋㅋㅋㅋㅋ]
[길드/순한양: 흠 메모나 세상에 이 무슨 메기메 같은 일이]
[길드/킬레아: ㅅㅂ 그놈의 메기소리 ㅈㄴ 처해대네]
[길드/베르르: 아닌 내가 얼만야더ᅟᅵᆯ 기다려대]
[길드/묵요: 절미들 똑바로 말하자?ㅎ]
[길드/순한양: 아니 내가 얼마나 이 날만을 기다렸는데 직역]
[길드/키키아: 진짜 딱 2시간만요. 다른데 안 가요. 잠깐 베히아만 갔다 올게요]
“형, 그래서 어디 가는데요?”
“저희도 같이 가줄게요.”
“괜찮아. 형 혼자 잠깐 갔다 올게.”
서련의 말에 무표정을 짓고 바라보던 로운과 원호가 뒤늦게 활짝 웃으며 흔쾌히 승낙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드러낸 웃음이 어째서인지 오싹하게 느껴졌다. 서련은 착각이라며 마음을 다독이고 길드원들을 달래며 즉시 전 종족 학살 지역인 ‘베히아’로 향했다.
베히아는 학살의 대전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양 종족 PVP가 가능한 곳이었다. 고로 종족 구분 없이 서로를 학살할 수 있었다. 매익화가 서련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유를 짐작하자면, 이번에 업데이트된 ‘로크아의 던전’ 때문이리라.
로크아의 던전은 이미 테스트 서버에서 먼저 오픈됐었던 던전으로, 시범을 거쳐 이번에 전 서버에 신규 던전으로 생겨난 콘텐츠였다. 테스트 서버에서 이미 공략을 해 놓았기에 공략집은 물론 그에 대한 공략 사례가 스크린 샷과 함께 떠돌고 있어 그다지 신규라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일단 주어지는 보상이 상당해 정식 오픈 전부터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있던 던전이기도 했다.
물론 공략집이 있다고 해서 공략하기가 쉬운 건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테스트 서버에서 막보는 살아서 잡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난이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로크아의 던전 마지막 보스를 잡기 위해선 수십 번은 죽었다 살아나야 하는 ‘좀비 모드’로 공략을 해야 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밝혀진 건 없지만, 이 던전에서 필수 직업으로 추천하는 게 바로 ‘소환사’였다. 소환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말이 많았지만, 테스트 서버에서는 아직까지 소환사의 필요성을 찾아내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도 던전 공략 시 필요 직업 추천에는 제발 좀 찾아달라는 듯이 소환사가 버젓이 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전 서버에 오픈되면서 소환사의 공략 필요성이 밝혀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나저러나 소환사들이 두 팔을 들고 환호할 던전이긴 했다. 딜이 애매하다는 평이 많은 소환사가 던전 공략 파티 모집 시 후순위로 밀려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서럽다는 징징글이 늘 게시판을 도배할 정도였다. 보통은 소환사보다는 마도사를 데려가는 게 암묵적으로 정해진 룰이었다.
{귓속말/매익화님께: 로크아로 가면 되나요}
{귓속말/매익화님으로부터: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
-‘매익화-신성제국’님이 [로크아의 던전] 공략 파티에 초대하였습니다.
-파티에 참여하였습니다.
[파티/매익화-신성제국: 키키님 오시면 바로 들어갈거니까 준비]
[파티/성냔개비-신성제국: 키키님 저번에는 죽여서 죄송합니다ㅎㅎ;; 아니 저희 도른 길마 지시라서요;;]
[파티/실키르-신성제국: 하이욬ㅋㅋㅋ]
[파티/신강-신성제국: 안냐세요]
[파티/딜러리-신성제국: 엌ㅋㅋㅋ 진짜 오셨넼ㅋㅋㅋㅋ 안녕하세요 키키님ㅋㅋㅋㅋ]
[파티/소환신-신성제국: 키키님ㅠㅠ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ㅠㅠ]
[파티/키룩키룩-신성제국: 저희 길드에 오신걸 환영합니다ㅎㅎ]
[파티/댕청이-신성제국: 이얔ㅋㅋㅋㅋㅋㅋㅋㅋ 키키님이닼ㅋㅋㅋㅋㅋㅋ 저희 킬리보는 건가욬ㅋㅋㅋ]
[파티/키키아-신마제국: 안녕하세요. 음 후딱 끝내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로크아는 공략법이 까다로운 9인 던전이었다. 게다가 베히아의 특성을 나름 살리겠다고 설정한 건지 입장을 위해 종족 구분 없이 파티를 짜는 게 가능했다. 물론 이건 던전 입장을 신청했을 때만 가능했기에, 평소에는 파티를 맺지 못했다.
열심히 날개를 펴고 이동했더니, 별안간 유저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부유 섬이 서련의 시야에 들어왔다. 부유섬의 주위는 둥근 피막에 휩싸여 있었는데, 던전의 파티만큼은 편하게 짜라는 르덴의 깊은 마음이 담긴 중립 안전지대였다.
-로크아의 부유섬을 발견하였습니다.
새로 생긴 부유섬이라 그런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선했고, 신기했다. 주변 조형물을 쭉 둘러본 서련은 거대하게 솟은 던전의 철문이 있는 곳으로 캐릭을 움직였다. 그 앞을 바글바글 채우고 있는 유저들은 신성족과 신마족이었다. 어느 쪽이 우세하게 많다, 라는 느낌 없이 여기저기 뒤섞여 있었다.
[파티/매익화-신성제국: 키키님 여기로]
화면 끄트머리에 뜬 말풍선을 확인한 서련은 그쪽으로 잽싸게 달려갔다. 던전의 철문 바로 앞에는 늘어지게 앉아있는 매익화 길드가 있었다. 서련이 도착하자 그 중 ‘소환신’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저가 튕기듯 튀어나와 서련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다름 아닌, 오늘 서련에게 지도를 받을 소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