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2. 청혼】
5월의 첫 번째 토요일. 14년지기 서른한 살 동갑내기 친구들이 모여 있는 메시지창이 며칠 내내 소란스러웠다.
다음 주가 채훈의 생일이었다. 생일이니까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남태호였다. 아이를 낳고 2개월이 지났으니까 이제 만날 수 있지 않냐는 남태호의 주장을 신유진과 서주명이 거들었다. 당연히 당사자인 채훈도 적극 찬성했다.
날짜와 시간, 장소도 모두 며칠 전에 정해졌다. 메뉴는 5월에 끝물로 즐길 수 있는 주꾸미였다. 그런데 어제 하필이면 약속 장소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장소를 바꿔야 했다. 서로 친구와 지인을 동원해 괜찮다는 주꾸미 가게를 모두 알아내고 접근성이 좋은 곳을 골랐다.
[내일 7시. 불타는 주꾸미. 확인해.]
신유진이 최종 결정된 시간과 장소를 알렸다. 꼼꼼한 성격답게 불타는 주꾸미 지도 주소까지 첨부했다.
[채훈아. 너 술 마실 수 있어?]
[물어봤어?]
[의사 샘이 된대?]
[못 마셔?]
[우리만 마시는 거야?]
[주꾸미에는 소주인데.]
장소가 결정되자 갑자기 채훈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남태호가 처음에 모이자고 했을 때도 친구들은 같은 걸 물어봤었다. 술자리인데, 술을 마실 수 있냐고 말이다. 그때 채훈은 단번에 마실 수 있다고 하지 못했다. 아이도 낳았고 아픈 곳도 없었다. 그러나 과다출혈 쇼크와 부정 각인 때문에 아직도 먹어야 하는 약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며칠 전에 정기 검진을 받으면서 의사에게 물어봤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는 과음만 하지 않으면 문제없다고 했다. 오히려 승건에게서 한소리 들었다. 몸도 안 좋은데 백해무익한 걸 마시려고 한다고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채훈은 술자리에서 손가락만 빨 생각은 없었다.
[마실 수 있어.]
채훈은 당당하게 메시지를 썼다. 의사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자 다들 축하해 주었다.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남긴 채훈은 메시지창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벌써 6시였다.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채훈은 미리 준비한 옷으로 재빨리 갈아입기 시작했다.
출산 후, 3주의 입원 기간 동안에는 매주 토요일에 있었던 페로몬 접촉을 하지 않았다. 의식 불명 상태일 때는 어쩔 수 없었고, 정신을 차리고는 승건이 극구 거절을 했기 때문에 병실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퇴원하고 나서는 접촉이 재개되었지만, 전처럼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일은 없었다. 바로 객실로 향해서 페로몬을 풀어놓고 돌아오기만 했다. 그러기를 6주째. 드디어 오늘에서야 근사한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스테이크에는 무조건 와인이었다. 와인은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지만 10개월째 금주를 하다 보니 어떤 술이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방을 나선 채훈은 1층에 있는 거실로 내려왔다. 평범하던 거실에는 이제 아이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실 한쪽을 차지한 아기 침대였다.
채훈의 침실은 2층에, 그리고 아이의 방은 1층에 있었다.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 방에서 보냈지만, 그래도 낮 동안에는 거실에 자주 나와 있었다. 아이를 돌봐주는 김혜진의 활동 반경이 거실과 부엌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김혜진이 부엌에서 분유를 타고 있었다.
채훈은 아기 침대로 다가갔다. 눈을 또랑또랑 뜨고 모빌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웃으며 채훈을 반겼다.
“정우야.”
채훈 역시 웃으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최정우. 아이의 이름은 승건의 외할아버지가 지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정우는 2주일 넘게 인큐베이터 신세를 졌다. 몸집이 작고 왜소하게 태어났지만 그래도 아픈 곳 없이 건강했다. 잔병치레도 거의 없었다.
채훈은 정우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잠들어 있던 아이는 생후 8일째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담당 간호사 역시 이렇게 예쁜 아이는 처음 봤다고 했을 정도였다.
정우는 여전히 또래들보다 작았지만 예쁜 건 압도적이었다. 특히 웃으면 더 그랬다. 채훈이 아빠라서 그런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였다.
사랑스러운 외모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조건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세상살이란 너무 예쁘고 잘생겨도 고달픈 법이었다. 게다가 아이는 알파였다. 주변에 사람이 꼬일 가능성이 너무나도 농후했다. 채훈은 예쁜 아들을 볼 때마다 정말 잘 키워야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 아들. 아빠는 나갔다 올게. 늦게 와도 기다리지 말고.”
정우가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채훈은 그래도 외출할 때면 꼬박꼬박 말을 걸었다.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는 아이에게 말을 거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이제 한참 옹알이를 하기 시작한 정우가 웃으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자신의 아이와, 그것도 갓난아이와 함께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채훈은 초보 아빠였기 때문에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서 허둥지둥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아이의 미소를 보면 모든 게 다 좋아졌다.
채훈은 정우의 매끄러운 뺨을 손끝으로 두드리고는 허리를 폈다. 그 때 마침 김혜진이 분유병을 들고 다가왔다.
“이제 나가시게요?”
“네.”
“데이트 잘하고 오세요.”
채훈이 주말 저녁에 마음 놓고 승건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것은 모두 김혜진 덕분이었다. 가족이 한 명 더 늘면서 하우스 키퍼도 한 명 더 늘었다. 김혜진과 박미선이 번갈아 가며 정우를 돌봐주는 덕분에 채훈은 보통의 초보 아빠보다 편하게 아이를 돌볼 수 있었다.
오늘은 승건이 데리러 오지 않아 콜택시를 부른 채훈은 김혜진에게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채훈은 예언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두 번째 데이트 역시 첫 번째 데이트와 마찬가지로 뜻하지 않게 끝날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
“왜 그걸 네 마음대로 말해.”
“수능 친 후라면 괜찮잖아.”
“내 말은, 그걸 왜 네 마음대로 정하냐고. 결혼한다고 한 것도 아닌데.”
“결혼 안 할 거야?”
승건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물론 채훈 역시 주눅 들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커플이 싸우는 이유는 세상에 존재하는 커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했다. 그리고 싸우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다채로웠다. 서로 얼굴을 붉힌 채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한쪽만 열을 낼 때도 있고, 혹은 미지근하게, 또는 냉정히 노려보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채훈은 몇 번의 경험으로 승건과의 싸움이 자존심 대결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능하면 날 선 대립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의 일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만 굴러가지는 않는 법이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일이 생겼다.
때는 토요일 저녁 시간, 장소는 R호텔 레스토랑의 별실이었다. 싸움의 발단은 별거 아니었다. 오해에서 비롯한 작은 의견 차이였다.
오랜만에 외식은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채훈이 와인을 시키자 승건이 적당히 마시라고 한소리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코스 요리를 해치워나가던 중에 승건이 이수진의 말을 전했다. 그녀가 정우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이수진에게 정우는 외증손자였다. 그녀는 정우가 태어나기 전부터 승건의 손에 각종 선물을 들려 보내는 등의 정성을 보였다. 채훈에게는 따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이수진의 접촉은 예비 시어른의 귀감이라고 할 만했다.
채훈은 승건만 아이를 데리고 이수진을 만날 거라는 말에 별다른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증조할머니가 증손자를 보자고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 직후에 승건이 싸움의 발단이 되는 말을 던졌다. 승건이 어른들에게 채훈이 수능을 치고 나면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어른들도 승낙을 했다는 말에 채훈은 당연히 화를 냈다.
결혼할 생각은 있었다. 자신의 부정 각인만 풀리면 말이다. 그래서 더욱 승건이 자신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어른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에 난감했고, 분노했다.
“지금 말고, 나중에 할 거야.”
“나중에?”
목소리에 힘을 주며 물어보는 승건을 똑바로 바라본 채훈 역시 딱딱하게 대답했다.
“응. 나중에.”
“강채훈.”
“내 이름이 강채훈인 거 알아. 이름만 부르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고.”
이름을 부르며 경고하는 방식이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채훈은 말꼬투리를 잡았다. 사실 채훈은 기분이 꽤 상한 상태였다. 승건에게는 나쁜 버릇이 몇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 혼자서 결정을 내리고 자신에게 따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몇 번 다퉜는데도 말이다.
결혼 같은 민감한 문제를 상대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제멋대로 정해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승건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나중에라고 하는 채훈의 말에 더 집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채훈은 차분히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비조의 말이 튀어나왔다.
승건이 한 번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안 하겠다는 거야?”
“안 한다고는 하지 않았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같은 말이잖아.”
“뭐가 같아. 다르지. 결혼은 때가 되면 할 거야. 그것보다 왜 내가 화를 내고 있는지 몰라? 전에도 말했잖아. 네 마음대로 정하지 말라고.”
채훈은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전했다. 승건이 노려봐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지금 잘못한 건 분명 승건이었다.
“확실하게 말해. 결혼할 생각은 있어?”
“있어. 몇 번째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네 마음대로 정한 날은 아니야.”
“도대체 얼마나……. 하아. 아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안 되겠어.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있을 테니까. 이건 그냥 가져.”
싸우다 말고 승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품속에서 꺼낸 가죽케이스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는 별실을 나가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채훈은 어리둥절했다. 뒤늦게 승건을 따라가야 하나 싶어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힘을 뺐다. 왠지 쫓아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아, 진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식으로 싸운 것은 또 처음이었다. 승건이 싸움을 피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채훈은 검은 가죽으로 된 작은 케이스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아무래도 반지 케이스 같았다.
반지라면 뻔했다. 청혼이었다.
사실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기는 했다. 그건 채훈도 인정했다. 정우의 출생 신고는 이미 끝난 상태였고, 채훈의 몸도 예전의 컨디션을 되찾았다. 슬슬 미래 계획을 세워야 하는 건 맞았다.
승건이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처음에는 하와이의 병원에서, 두 번째는 제주도 공항에서 결혼을 하자고 했다.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다. 그래도 그건 승건의 진심이었다. 그는 사귀는 것보다 결혼이 더 먼저라는 것처럼 굴었다.
서로 사귄다고도, 결혼을 할 거라고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반년 가까이 서로 사귀는 것처럼, 결혼할 사이인 것처럼 굴었다. 거기까지는 서로 무언의 합의를 한 것이다. 이제 천천히 대화를 할 차례였다.
그런데 승건이 제멋대로 진도를 나가버렸다. 거기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나중에라는 단어에만 꽂혀서 화를 냈다.
채훈은 세 번째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
자신이라도 발끈하지 않았다면 적당한 선에서 수습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어른들에게 승낙을 받았다는 소리에 울컥하고 말았다.
채훈이 결혼에 대한 확답을 하지 않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심각했다. 그런데 승건은 결혼을 하기 싫어서 회피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는 들어야 할 것 아니야.”
채훈은 비어 있는 의자를 보며 꿍얼거렸다. 승건이라면 이유를 듣고 더 화를 낼지도 몰랐다. 그래도 말을 해야 방법을 찾든 말든 할 수 있었다.
사실 채훈은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애정, 책임감, 동반자, 가족의 확장. 결혼을 하려면 마음가짐부터 달라져야 했다. 마음가짐도 마음가짐이지만 그것 말고도 걸리는 게 많았다.
지금껏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승건은 재벌 3세였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태화 그룹의 정규완 회장이었다. 정규완은 결혼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정우의 이름도 직접 지어주었다. 외할머니인 이수진 역시 승건을 통해 몇 번이고 선물을 보내왔다. 하지만 사람이 좋다고 그를 둘러싼 배경 역시 좋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건 채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가족들이 모두 해외에 나가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결혼은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시끄러운 잡음은 나기 마련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부터 완벽할 수는 없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문제점이 없을 수 없으니 현명하게 대처하는 게 최선이었다. 결혼하고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거였다. 그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부정 각인은 달랐다.
채훈은 초조한 마음에 얼굴을 문질렀다. 자신의 부정 각인이 풀리지 않는 이상에야 어떤 미래도 없었다.
출산 후에 부정 각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몇 번 있었다. 여태 부정 각인이 풀린 사례는 없었다. 그래도 52쌍 중에 어느 누구도 자신들처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필사적인 노력 때문인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상황에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5주 전, 퇴원 기념으로 승건과 키스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혀를 섞으려다가 소름이 돋으면서 헛구역질이 나는 바람에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승건은 괜찮다고 했지만 채훈은 실망하다 못해 좌절했다. 그 후로 만날 때마다 키스를 시도했지만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키스도 못 하는데 무슨 결혼이야.”
채훈이 생각하는 결혼은 삶의 무게를 나누어 함께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럴 각오는 이미 했다. 서로 사랑하고, 교감하고, 의지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하는 동반자로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려면 키스도 섹스도 할 수 있어야 했다. 승건은 상관없다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혼에서는 물론이고 사람 인생에서도 섹스의 비중은 높았다. 특히 형질자에게는 더 그랬다.
지금이야 각인을 한 승건이 먼저 매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각인이 풀리고 나면 섹스를 못 한다는 것은 애정으로만 커버할 수 없는 문제였다. 섹스 거부는 이혼 사유가 되기도 했다. 사정을 다 알고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승건이 다른 사람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물론 그걸 승건에게 구구절절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당장 결혼하는 대신에 이것저것 시도해 보자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면 살을 맞대지 않아도 섹스를 할 수 있었다. 고화질로 화상통화까지 되는 휴대폰이 그렇게 만들어줬다. 그런데 채 말도 꺼내기 전에 승건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중이 언제냐고 물어보기라도 하지.”
답답한 마음에 와인을 들이켜는데 심정민이 문을 열고 별실에 나타났다. 출산을 한 이후, 채훈은 승건과 단둘이 밀실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심정민이 늘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채훈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심정민에게 승건의 상태를 물었다.
“승건이는요?”
“지금 만나기 힘들다고 전해달라 하십니다. 페로몬 조절이 힘드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주중에 러트가 있었습니다. 약을 먹고 미리 앞당긴 거라서 무리하셨을 겁니다.”
심정민의 설명에 채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승건의 러트는 2개월에 한 번씩 있었다. 제주도에서 만날 때도 러트 시기를 조절하느라 약을 먹었다. 억제제도 동시에 섭취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몸에 무리가 있었다. 채훈은 미안함과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도련님은 내일 아침 일찍부터 스케줄이 있다는 거 알고 계시죠? 내일은 쉬셔도 됩니다.”
“네.”
주말이면 채훈은 늘 승건을 만났다. 토요일 저녁을 함께 먹고, 객실에 페로몬을 풀어두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에 다시 객실을 찾았다. 가끔은 승건의 사정에 따라 일정이 변경되기도 했다.
내일은 승건이 일본에 있는 국제 행사 때문에 아침부터 움직여야 했다. 이미 승건에게서 스케줄에 대해 전해 들었던 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챙기시고, 이제 저와 함께 객실로 가실까요?”
심정민이 식탁 위에 올라가 있는 반지 케이스를 채훈에게 내밀었다. 가죽으로 된 케이스를 받아 든 채훈은 당장에 일어나는 대신에 뚜껑을 열어보았다. 불빛에 반짝이는 반지는 여성용 웨딩링이었다. 그것도 화려했다.
채훈은 승건의 취향에 쓴웃음을 삼켰다. 생일 선물이라고 여성용 예물 팔찌를 주던 녀석이니 어지간하다 싶었다.
“이 반지는 여성용 맞죠?”
“도련님께서 직접 고르셨습니다.”
“진짜 취향은……. 이건 승건이에게 돌려주세요. 반지 또 사지 말고 이거 쓰라고요.”
채훈은 심정민을 향해 반지 케이스를 내밀었다. 승건이 반지는 그냥 가지라고 했지만 청혼 반지를 덥썩 받기는 애매했다. 게다가 승건이라면 다시 청혼한다고 반지를 하나 더 살 것 같았다.
“그건 제가 아니라 채훈 씨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돌려드리면 안 좋아하실 거예요.”
“아……. 제가 돌려주는 게 맞겠네요.”
심정민이 손까지 내저으며 거절했기 때문에 채훈은 결국 반지를 거두어들였다. 반지를 다른 사람 손을 빌려 돌려주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채훈은 반지 케이스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마침 심정민이 말을 걸었다.
“실례되는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도련님과 결혼하실 겁니까?”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심정민은 승건의 개인 비서답게 유능했고 일처리가 빨랐다. 그리고 사생활에 대한 질문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심정민이 결혼할 의향을 물어보는 것은 그만큼 승건이 유난을 떨었든가, 혹은 결혼하려는 사이처럼 안 보인다는 의미였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결혼은 할 건데……. 지금 말고요. 승건이한테는 제가 잘 말할게요. 대화 도중에 녀석이 뛰쳐나가 버려서 조금 꼬였어요.”
“주관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도련님은 외조부님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외조모님의 성정도 닮으셨지요. 분명 좋은 배우자가 되실 겁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오랫동안 승건의 개인 비서로 일해 온 심정민이 승건의 편인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매서운 심정민의 평은 믿어보고 싶었다. 좋은 배우자가 될 거라는 말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채훈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믿어볼게요.”
* * *
채훈은 살짝 긴장한 상태로 가게 출입구 쪽을 확인했다. 일요일 저녁이었다. 맛있다고 소문난 가게라서 그런지 손님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채훈은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어 남태호와 신유진의 얼굴을 찾았다.
거의 1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었다. 오메가로 발현하자마자 임신을 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제주도까지 날아온 서주명은 한 번 만났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연락만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본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기분이었다.
채훈은 작년 이맘때에 자신이 뭘 했는지 떠올렸다. 그리고 1년 동안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1년 전에는 자신이 오메가가 되어 아이를 낳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었다.
자신의 인생은 승건을 만난 이후로 급변했다. 말 그대로 인생이 거의 뿌리째 뽑혀 뒤바뀌었다.
줄기줄기 이어가던 생각의 흐름이 승건에게 닿았다. 채훈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썼다. 안 되겠다면서 자리를 떠버린 녀석에게서는 지금껏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제대로 화가 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채훈은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 잠금 화면을 버릇처럼 툭툭 두드렸다. 안 읽은 메시지 표시가 액정 화면에 떠 있었다. 설마 싶은 마음에 후다닥 휴대폰 잠금을 풀고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게 아니라 광고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쉬움과 실망감에 채훈은 인상을 쓰고는 승건의 메시지창을 눌렀다. 어제 그렇게 싸운 이후로 채훈은 승건에게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냈다. 잘 자라부터, 일본에 잘 도착했냐, 한국에 언제 돌아오느냐 등의 답장이 필요한 질문이었다. 분명 승건은 메시지를 읽었다. 그런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읽씹을 하다니.
채훈은 여기에 없는 승건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싸우고 읽씹을 하는 게 얼마나 매너 없는 짓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이번에는 심하게 싸운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퇴원하기 전에 승건의 페로몬 접촉을 돕겠다고 할 때 더 격렬하게 다퉜다. 그때 승건은 아픈 사람이 무리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리고 자신은 무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맞섰다. 입원 중에 호텔에 가서 페로몬을 풀고 돌아오는 게 번거롭긴 했지만 힘들 건 없었다. 병원과 가까운 호텔이라 왕복하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승건을 설득하다가 나중에는 왜 그렇게 고집이 세냐고 하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서로를 걱정하느라 고집을 부린 것이었다. 그래서 크게 싸우고도 금방 뒤끝 없이 화해했다.
하지만 어제는 달랐다. 채훈은 자신의 잘못을 알았다. 일부러 시비를 걸고 틱틱거릴 게 아니라 승건에게 제대로 설명했어야 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먼저 메시지를 보내면서 화해의 신호를 보냈다. 조금만 반응을 보여준다면 화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필요한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할 준비도 마쳤다. 그런데 승건은 메시지를 확인하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래서야 미안한 마음이 알코올처럼 공중에 휘발되어 사라지려고 했다.
“에이. 몰라.”
채훈은 미간을 구긴 채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읽씹도 한두 번이지, 일곱 번이나 되면 자신도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너, 연락 올 데 있어?”
막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던 서주명이 슬쩍 떠보는 질문을 던져 왔다. 제일 먼저 가게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녀석이 서주명이었다.
채훈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승건이?”
“어.”
“싸웠어?”
“……?”
대충 대답을 하던 채훈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주명을 보았다. 서주명이 어떻게 그걸 알았나 싶었다. 눈빛의 의미를 알아보았는지 녀석이 피식 웃었다.
“안절부절못하면서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하면 뻔하지. 메시지 확인하다가 한숨 쉬면 백퍼고.”
서주명이 연애박사처럼 말했다. 채훈은 자신이 그렇게 유난스럽게 굴었나 의아스러웠다.
“티 나?”
“많이 나. 무슨 일로 싸운 거야? 네가 잘못한 거지? 뭘 놀래? 잘못 안 했으면 휴대폰 붙잡는 게 아니라 꺼두고 있을 거잖아.”
채훈은 서주명을 다시 봤다. 작은 행동 하나로 인과 관계를 유추하는 걸 보면 돗자리를 깔고 점을 봐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잘못한 것 같기는 한데…… 좀 복잡해.”
채훈은 대충 사정을 얼버무렸다. 친구들 중에서 채훈의 복잡한 연애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서주명이긴 했다. 그래도 자신과 승건 사이의 일을 자세히 말하기는 힘들었다. 다행히 서주명은 다 그러고 산다면서 자세한 건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를 하는 사이에 남태호와 신유진이 도착했다. 거의 1년 만에 보는 친구들은 웃는 얼굴로 채훈을 반겨주었다. 채훈은 메시지를 읽고 씹어버린 승건을 잊고 재회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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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이야기가 넘쳐났다.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특별했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답하면서 술과 안주를 마시고 먹었다. 화제의 중심은 당연히 채훈이었다. 오메가로 발현한 것도,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출산 중에 과다출혈로 일주일 동안 의식 불명이었다는 것을 말하자 다들 걱정해 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한마디씩 하는 와중에 서주명이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느냐고 채훈의 등짝을 때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여전했다. 채훈은 승건을 까맣게 잊고 흥겨움에 빠져들었다. 그간의 개인사가 대충 마무리되자 화제는 금방 바뀌었다. 술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뻔했다.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의 이슈를 언급하면서 빠르게 술이 사라졌다.
채훈의 친구들은 모두 주당이었다. 분위기도 좋고 안주도 맛있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빈 소주병이 테이블 위에 쌓였다. 채훈은 적당히 마셨다. 승건과 약속한 것은 소주 한 병이었다. 양은 딱 맞춘 것 같은데, 더 마시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메시지를 읽고 씹어버린 녀석과의 약속 따위는 깨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여기서 일을 더 키우지 말아야 한다고 이성이 말렸다.
“우리 2차는 어디 갈까?”
주꾸미 샤브샤브에서 시작해 주꾸미 볶음으로 이어진 식사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때마침 남태호가 2차를 외쳤다.
“치맥이 좋아. 치맥.”
“나는 잠시만.”
신유진이 치맥을 제안하자 다들 좋다고 했다. 그사이에 서주명이 잠시 나갔다 오겠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어이쿠, 술이 남았네. 자자, 잔 받아.”
남태호가 남은 소주를 모두의 잔에 골고루 나누어 담았다. 채훈의 빈 잔이 결국 가득 차고 말았다. 그래도 채훈은 단숨에 마시지 않고 입술만 살짝 대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좀 민감한 질문이긴 한데. 너 결혼은 안 해? 아이 이름은 애 아빠 성을 따랐다며?”
조금 전까지 다들 피하고 있던 질문을 남태호가 했다. 술을 털어 마시던 신유진도 궁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긴 할 것 같은데, 조금 더 있다가.”
“그……. 애 아빠는 결혼할 마음은 있는 거지? 너도 그렇고?”
“응.”
“그럼 됐어. 둘 다 마음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더라. 우리 형이 드라마 한 편 찍은 거 알지? 장인어른 찾아가서 막 무릎 꿇고 그랬대. 그것 때문에 형수가 완전 감동 먹어가지고, 아직도 이야기한다니까.”
남태호의 형이 결혼하기 전에 장인 장모의 반대가 심해서 마음고생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친구들 중에 유일한 유부남인 신유진 역시 결혼하기 전에 온갖 일들이 일어난다면서 마음 굳게 먹으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응원과 덕담에 채훈은 역시 좋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승건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의 메시지를 제대로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화를 낸 건 미안하지 않았지만 중간에 빈정거린 건 잘못한 게 맞았다.
승건의 일정은 이미 심정민에게서 전해 들었다. 9시였다. 이미 한국에 돌아와 집에서 쉬고 있을 시간이었다.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그의 집 대문 앞에서 드러누워 버릴까 싶기도 했다.
“짠. 내가 누구를 데려왔는지 봐.”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서주명이 갑자기 주목을 끌었다. 막 휴대폰을 집어 들던 채훈은 서주명 뒤에서 나타난 사람의 그림자에 굳어버렸다.
승건이었다.
채훈은 그가 왜 여기에 있나 잠시 생각했다. 자신과 친구들 사이에 약속이 있다는 건 승건도 알고 있었다. 술을 한 병 이상 마시지 말라고 한 것도 그였다. 그렇지만 그가 여기에 나타날 이유는 없었다.
“와, 승건이 아니야?”
“진짜 오랜만이다.”
채훈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 남태호와 신유진이 웃으며 승건을 반겼다. 채훈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승건과 악수를 했다. 안녕이라고 하면서 눈이 마주쳤는데도 승건은 예의상 인사만 할 뿐이었다.
웃기게도 승건의 냉랭한 눈빛에 배신감에 가까운 분노와 아픔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호의 어린 옅은 미소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앉아. 앉아. 잔도 챙겨 오고.”
환영 인사를 한 남태호가 의자를 끌고 와서는 승건을 옆에 앉혔다. 덕분에 채훈은 승건을 마주 보게 되었다.
“어떻게 된 거야? 둘이 어떻게 알고? 지난번에 동창회에 왔다가 금방 사라지더니. 아, 그래. 너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라며? 맞아? 뉴스에 떡하니 얼굴이 나오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뭐가 그렇게 급해. 천천히 물어봐.”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인 남태호가 질문부터 쏟아냈다. 그러자 잔을 챙겨 온 서주명이 얼른 중간에 끼어들어서 중재했다.
“내가 마음이 급해서 말이야. 자, 잔부터 채우고. 그래도 궁금한 건 물어봐야지. 진짜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가 맞아? 응?”
남태호가 승건의 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주면서 눈을 빛냈다. 그건 신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채훈은 복잡한 기분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승건이 입술도 대지 않은 잔을 내려놓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맞아.”
“오. 그럴 줄 알았어. 너처럼 생긴 녀석이 또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안 흔한 이름도 똑같았고. 그런데 지난번에 동창회에 왔다가 왜 그냥 간 거야? 알은척도 안 했잖아.”
“내가 수능 얼마 안 남아서 사고를 당한 건 알지? 그때 사고 때문에 기억을 잃었어. 고등학교 때 기억 전부. 얼마 전까지 너희들 이름도 잘 몰랐어.”
승건이 담담하게 설명을 이었다. 최근에 기억을 되찾았고 우연찮게 서주명과 인연이 닿아서 잠시 만나러 왔다고 했다. 드라마 같다고 호들갑을 떤 것은 남태호였다. 기억을 되찾아서 다행이라고 한 것은 신유진이었다.
그리고 채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짝 긴장했다. 승건이 왜 이곳에 왔는지 왠지 알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끄러미 승건을 보았다. 친구들과 만날 거라도 해도 심드렁히 굴던 그였다. 과음하지 말라고만 했던 승건이 여기서 둘의 관계를 밝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것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선명한 눈동자에는 어떤 불순함 없이 깨끗하기만 해서 채훈은 더욱 불길함을 느꼈다.
그 와중에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여전히 남태호였다.
“나는 요즘 미장일을 하고 있어. 신정 전자 다니다가, 적성에 안 맞아서 때려치웠거든. 유진이는 서울시 공무원이고, 3년 전에 결혼해서 우리 중에 유일하게 유부남이지. 주명이는 이미 알 거고. 채훈이는 태화 병원에서 일하다가 최근에 그만두고 쉬고 있어.”
친구들의 근황을 대신 말하던 남태호가 채훈의 눈치를 봤다. 오메가로 발현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해도 되냐고 눈으로 물었다.
“채훈이는 알아.”
채훈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승건이 먼저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도 반응한 것은 남태호였다.
“안다고? 어떻게?”
“채훈이랑 사귀거든.”
결국 승건이 느긋하게 폭탄을 던졌다. 아주 단순한 문장은 이해하기 어려울 게 조금도 없었는데 남태호와 신유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채훈은 승건을 노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진짜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메시지는 읽씹하더니, 사람 난감하게 뭐 하는 짓이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너랑 채훈이랑?”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신유진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승건과 채훈을 가리키자 그제야 남태호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네가 아이 아빠구나. 너 알파잖아. 그렇지?”
“응.”
승건이 가볍게 긍정했다. 곧이어 남채호와 신유진의 시선이 채훈에게 향했다. 채훈은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친구들을 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판을 벌인 사람은 승건이니까 수습도 그가 해야 했다.
“나 보지 마. 쟤가 다 설명할 거야.”
채훈은 살벌하게 눈을 빛내며 발을 뺐다. 괜히 속에서 열이 치솟아서 소주도 한 잔 들이켰다. 빈 잔을 스스로 채우려는데 승건이 말렸다.
“적당히 마셔.”
“너는 애들한테 설명이나 해.”
승건과 실랑이를 하자 친구들의 시선이 묘해졌지만 채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러자 얼른 신유진이 나섰다.
“둘이 언제 사귄 거야? 최근까지 기억이 없었다며? 채훈이가 3월에 아이를 낳았으니까, 적어도 1년은 더 사귄 거잖아.”
“채훈이는 기억하고 있었어.”
채훈은 언젠가 승건이 서주명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때 서주명이 그랬던 것처럼 남태호와 신유진도 둘이서 가장 친해서 그런 것 같다며 한마디씩 했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오갈 법한 허물없는 대화가 조심스럽게 오가는 광경을 지켜보던 채훈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섯 명이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10여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지금껏 승건은 고등학교 친구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채훈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일부러 찾아와서는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의 세계에 승건이 당연한 것처럼 찾아들었다. 좋다 못해 감동적인 일이었다. 미리 얘기해 주었다면 당황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가벼운 근황 이야기가 오가고 난 다음에 남태호가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우리 이제 2차 갈 건데. 너도 갈 거지? 치킨 어때?”
“미안한데, 오늘은 채훈이 데리러 왔어. 해야 할 이야기가 있거든. 나중에 제대로 한번 보자. 7월에 유진이 생일이니까 그때 봐도 좋고.”
“둘이 싸웠구나. 그래. 그럼 붙잡을 수 없지.”
승건의 의미심장한 말을 남태호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급작스러운 전개에 채훈은 혀를 깨물 뻔했지만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미 승건과 한통속인 서주명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신유진 역시 눈치 빠르게 분위기에 편승했다.
채훈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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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화해해.”
“더 싸우지 말고.”
“다음에 보자.”
승건과 번호를 교환한 친구들은 잘 화해하라는 덕담을 남기고는 2차를 하러 떠났다. 그리고 채훈은 승건과 함께 이동했다. 승건의 차는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있었다.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승건이 운전대를 잡았다.
일요일 밤이었다. 강남으로 넘어가는 도로는 막히지 않고 원활하게 뚫렸다. 줄줄이 이어져 달리고 있는 붉은 후미등을 바라보던 채훈은 무거운 침묵에 복잡한 심정이었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놓고는 아무 말도 없는 녀석에게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여는 것은 지는 것 같아 꾹 참았다.
아무 대화도 없는 상태에서 채훈의 집 앞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채훈은 차가 멈춰 서자마자 안전벨트를 풀었다.
“태워줘서 고마워.”
“화났어?”
당장에 내리려고 준비를 하는데 승건이 드디어 말을 걸었다. 채훈은 문을 열려다 말고 승건을 보았다. 핸들을 잡은 승건이 앞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채훈도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가능한 한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나는 화났어.”
“……?!”
“일부러 답장 안 했어. 화난 거 티 내려고.”
채훈은 너무나 솔직하게 말하는 승건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리고 말았다. 유치한 이유였다. 그런데 납득은 갔다.
계속 빤히 보고 있으려니 승건이 힐끗 시선을 주다가 시동을 껐다. 작은 울림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주택가 골목의 조용함이 그대로 차 내부에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채훈의 차례였다. 채훈은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사과부터 했다.
“어제 내가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었다는 거 알아. 일부러 속 긁는 말을 하기도 했고. 그건 미안해. 그리고 너도 네 마음대로 결혼 허락받은 거 미안하다고 해줘.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러는 거 아니야.”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했다고 하는 건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니었다. 그래도 시시비비는 제대로 가려야 했다.
“오늘은…….”
“……?”
“처음에는 널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어. 네 생일이라고 친구들이랑 만나는데 나도 어울리고 싶기도 했고. 기억도 되찾았으니까. 그래서 주명이한테 연락해서 미리 장소랑 시간도 알아냈고. 그리고 원래는 결혼 소식을 알리려고 했어.”
한참이나 뜸을 들인 대답에 채훈은 다시 승건을 쳐다봐야 했다. 그가 애매하게 웃고 있는 바람에 채훈도 속으로 따라 웃었다.
그러니까 녀석은 어제 청혼이 성공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뜻이었다. 용의주도한 성격이었다. 확실히 어제 싸우지 않고, 오늘 승건이 모임에 나타났다면 감동했을지도 몰랐다.
“반은 성공했네.”
“결혼 허락은……. 식사하는 도중에 결혼은 언제쯤 할 거냐고 물어보셔서, 네가 수능을 보고 난 다음쯤 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그러라고 하셨고. 나는 결혼하는 게 당연하니까 허락받든 말든 상관없었어. 대화하다가 그렇게 흘러간 거니까, 널 무시하려고 한 건 아니야.”
“응.”
“내가 결혼에 집착하는 건, 불안해서 그래. 넌 내 건데, 확신이 없으니까. 혹시나, 네가 다른 알파 페로몬이 더 좋다고 하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해. 네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건 몰라. 페로몬의 끌림은 의지로 통제되는 게 아니니까. 그나마 임신했을 때는 괜찮았는데. 지금 너는……. 온갖 알파들이 다 꼬일 테고.”
음절마다 힘을 주는 승건이 여기에 없는 알파들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채훈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에 승건이 계속 말을 이었다.
“최소한 결혼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어. 너는 신의를 아는 사람이니까.”
승건이 어렵게 털어놓은 속내는 채훈의 고민과 결이 비슷했다. 서로 확신이 없었다. 채훈은 쓴웃음을 삼켰다. 자신이 시간을 가지려는 이유와 승건이 당장에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같은 게 웃겼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감상을 말하는 것이 인간이었다. 그리고 서로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실을 몰랐다. 채훈은 인생의 진리를 다시 깨달았다.
“이제 네 차례야. 강채훈. 나중에가 정확하게 언제인데.”
“그걸 어제 물어봤으면 안 싸웠을 거야.”
“그래서?”
승건의 재촉에 채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언제인지는 채훈도 몰랐다. 그 이유를 설명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긴 했는데, 지금 기분으로는 잘 설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부정 각인이 풀린 사례가 없다는 건 알지?”
“그건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났잖아. 괜찮아지고 있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혹시 모르잖아. 네 각인이 먼저 풀릴 수도 있는데…….”
말을 하고도 채훈은 아차 싶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혹은 승건이 속내를 밝혀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숨기려고 했던 본심이 훅 흘러나왔다.
승건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거 걱정한 거야? 그래서 결혼을 나중에 하자고?”
“그래.”
“강채훈. 내 각인이 풀렸으면 10여 년 전에 풀렸어. 나는 너 없이 못 살아. 각인 때문만이 아니야. 널 보면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어. 그래서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승건의 고백은 그답게 어딘가 건조하면서도 달콤하게 울렸다. 채훈은 울렁이는 감정을 진정시키느라 인상을 썼다.
“나도 헤어지자는 거 아니야. 그냥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해. 적어도……. 하아. 그러니까.”
“말해 봐.”
“그러니까, 부정 각인이 안 풀리면 키스는커녕 섹스도 못 한다고. 그래도 괜찮아? 아니, 괜찮다고 하지 마. 안 괜찮은 거 아니까. 그리고 나도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승건이 휘둥그레 눈을 뜨며 물었다. 채훈은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골목의 가로등불이 얼굴의 홍조를 가려주기를 바랐다.
“1년이나 못 했잖아. 사람 사는데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아, 몰라. 이건 못 들은 걸로 해.”
“뭘 못 들어. 그래서? 나랑 못 하니까 어떻게 하려고? 미리 말하지만 나는 무슨 이유든 네가 딴 놈이랑 하는 거 두고 못 봐. 그런 커플도 있다지만, 나는 그런 거 안 해.”
“뭘 딴 놈이랑 해. 그냥 이것저것 시도해 보려고 했지. 폰섹스도 있고……. 꼭 몸을 맞대지 않아도 할 수 있으니까. 하아. 이거 입으로 말하니까 민망하다. 진짜.”
제멋대로 오해한 승건의 눈이 차가운 불똥이 튈 듯 위협스럽게 번쩍거렸다. 오해를 바로잡으려던 채훈은 또다시 불쑥 튀어나온 본심에 또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원래 한 번 해보자고 하려고 하긴 했는데 소리를 내니까 민망해졌다. 담백하게 굴고 있는 승건과 달리 자신은 섹스를 못 해서 안달이 난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원래는 각인한 쪽이 더 집착한다고 했다. 특히 알파는 더 그렇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승건은 섹스에 대해 제대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 상황이 안 좋으니까 그도 참고 있는 거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폰섹스?”
승건이 황당하다는 듯 물어오는 바람에 채훈은 진짜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정말 오랜만에 세상이 망하라고 빌었다.
폰섹스가 뭐 어때서!
그렇게 버럭 외치고 싶었다. 바로 어제까지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소리 내어 말하자 이상해졌다.
“그건 그냥 예시고. 영상 통화도 있으니까……. 됐어. 싫다면 안 해도 되니까. 이제 나 간다.”
“가기는 어딜 가. 하던 말은 마저 해야지.”
승건이 불렀지만 채훈은 얼른 차에서 빠져나왔다. 더 버텼다가는 쪽팔려 죽을지도 몰랐다. 승건이 차에서 내려 쫓아왔다.
“강채훈. 그래서 어쩌자고.”
“그냥 잊어.”
“안 괜찮다며.”
“지금 말고. 나중에……. 아니, 그러니까. 너 할 수는 있어?”
여기서 또 나중에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채훈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차 앞을 빙 둘러 온 승건이 바로 앞에 섰다. 집 앞을 밝히는 가로등 때문에 그의 얼굴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가 웃고 있음을 할 수 있었다.
“오늘 밤에 당장 할까?”
“아니, 그게. 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하는 방법도 모르고.”
얼굴이 뜨겁다 못해 불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채훈은 침착하게 사실을 전했다. 사람 사는데 섹스는 중요한 법이었다. 승건이 관심을 보이니까 의욕은 불타올랐다. 하지만 진짜 제대로 하는 방법은 몰랐고 마음의 준비도 필요했다.
“나중에 내가 전화할게. 그 전에 잘 씻고 기다리고 있어. 편한 옷 입고.”
“진짜 할 거야?”
“하자며.”
“어……. 응.”
채훈은 진지하고도 적극적인 승건의 기세에 잠시 망설이다가 응했다.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었다. 한 번 시도해 보고, 모자라거나 과하면 보완하는 것이 맞았다.
“나는 네가 날 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부정 각인을 했으니까.”
“부정 각인을 한 것과 별개로 널 싫어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좋아하지. 전에도 말했지만, 몸과 머리가 따로 놀고 있는 거라고.”
몇 번이나 같이 이야기했던 것이었다. 부정 각인을 했던 그 순간의 감정에 육신이 고정되어 있었다. 현재 느끼고 있는 안타깝고, 아쉽고, 간질거리는 마음과는 상관없었다.
각인이 페로몬 접촉을 통해, 감정 교류를 통해 더욱 단단해지는 것과 반대였다.
“나는 괜찮았어.”
“……?”
“매주 네 페로몬에 휩싸여서……, 음. 자위를 했거든. 진짜 섹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욕구불만이 심하지 않아.”
담담하게 이어지는 승건의 고백에 채훈은 당황했다. 속이 간지럽다 못해 어딘가를 긁고 싶어질 정도였다. 정제되지 않은 직설적인 대화는 낯설었지만 진심이 전해졌다. 그래서 채훈은 자신이 욕구불만인 것을 인정했다.
잘생긴 승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키스를 하고 싶어서 속이 뜨거워졌다. 헛구역질을 할 건 뻔했지만 저 입술을 물어뜯고 싶었다.
채훈은 승건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거의 몸이 맞붙다시피 했다.
“나는 욕구불만이 심해. 그러니까 키스부터 하자.”
“채훈아?”
“이번 주는 못 했잖아. 또 헛구역질하면 하는 거고. 키스하자. 하고 싶어.”
채훈은 승건의 재킷 자락을 가볍게 붙잡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키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살짝 까치발을 하면 입술이 닿았다. 승건이 가볍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다행히 피하지는 않았다.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채훈은 좀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승건의 입술을 핥은 다음에 혀를 밀어 넣었다. 몸이 거부하기 전에 혀를 빨고 깨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헛구역질 같은 것은 없었다. 더운 숨과 함께 혀가 진하게 얽혔다.
이변을 깨달은 것은 채훈뿐만이 아니었다. 다급히 입술을 뗀 승건이 물었다.
“어지럽거나 하지 않아?”
“응…….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한 번 더 해보자.”
채훈은 잽싸게 입술을 맞댔다. 승건이 잠시 멈칫거렸지만 채훈은 밀어붙였다. 조심스럽게 시작된 키스는 곧 농밀하고 깊어졌다. 제대로 된 키스는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채훈은 홀린 듯이 승건에게 달라붙었다.
키스는 상호작용이었다. 채훈이 넘어질 것을 대비해 조심스럽게 허리에 얹어놓다시피 한 승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에 채훈은 몸을 떨었다. 그냥 허리를 잡힌 것뿐인데 소름이 돋았다. 승건이 무섭거나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를 의식해서였다. 정확하게는 흥분하고 말았다. 그 증거로 저도 모르게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승건이 그걸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이번에도 그가 먼저 입술을 뗐다.
“페로몬은 안 돼. 억제제를 먹었지만, 그게 만능은 아니야. 난 널 각인했어. 네 페로몬은 최음제나 마찬가지라고. 어서 갈무리해.”
채훈은 자신의 귓가에서 울리는 승건의 낮은 목소리에 한 번 더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 승건의 경고보다 새롭게 깨달은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구역질은커녕 예전처럼 키스가 좋았다. 채훈은 얼른 고개를 들어 승건을 보았다.
“나, 아무렇지도 않아. 키스하고도 괜찮았어. 너도 페로몬을 풀어봐. 약간만.”
“억제제를 먹었다니까. 채훈아. 페로몬으로 자꾸 자극하면 안 돼. 억누르고 있는 거 한꺼번에 쏟아져.”
“하지만…….”
채훈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는 승건의 옷깃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승건을 향해 공격적으로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키스를 하고도 괜찮았다는 것은 어떤 징조였다. 승건의 타액에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 각인이 희미해졌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부정 각인이 풀린 것일 수도 있었다.
확인하는 방법은 많았다. 내일 날이 밝은 후, 병원에서 검사해 보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확실했다. 혹은 승건이 먹은 억제제가 효능을 다 하고 난 다음에 간접적으로 페로몬 접촉을 시도하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채훈은 조급했다. 키스하고 싶었다. 닿고 싶었다.
이번에도 무작정 입술을 들이밀었다. 몇 번의 키스로 살짝 부어올라 있는 승건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가 핥았다. 겹쳐진 입술의 주인이 일순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무어라 저항의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채훈은 개의치 않았다.
옷깃을 꽉 붙잡고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은 다음에 따뜻한 입 안을 야하고 질척하고 쓸고 빨아댔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승건이 천천히 반응했다. 혀가 맞물릴 때마다 젖은 소리가 울렸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키스에 채훈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더운 숨을 삼킬 때마다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모든 게 좋았다. 야외에, 집 앞이었다. 누군가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금방 사라졌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조금 더 몸을 밀착하려고 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싹함에 채훈은 멈칫거렸다. 그리고 승건이 키스를 멈추고는 세 번째로 입술을 뗐다.
“채훈아?”
입술이 떨어졌지만 서로를 반쯤 껴안고 있었기 때문에 승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맞닿은 그의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근육은 팽팽하게 당겨졌고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목소리조차 잔뜩 가라앉아 떨렸다.
“아, 괜……찮아.”
채훈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뭔가 이상한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괜찮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네가 하는 괜찮다는 말은 믿을 수 없어. 잠깐이지만 페로몬이 풀렸어. 괜찮다고 하지 말고 네 상태를 말해.”
“페로몬이 풀렸다고? 지금 이게……? 향기가……?”
승건의 품에 안겨 있던 채훈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5월의 밤바람에 섞인 약한 냄새는 향수나 화장품의 것은 아니었다. 짙은 숲의 향기와 차가운 물을 듬뿍 머금은 꽃의 향기는 승건에게서 평소에 맡았던 체향과 비슷했다.
이게 승건의 페로몬향기였다.
깨달음이 충격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와이에서처럼 얼어붙지 않았다. 두통도, 헛구역질도, 아득함도 없었다.
세 번이나 교차 검증했으니까 확실했다. 부정 각인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승건과 유치하고 심각하게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우루루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부정 각인이 풀린 줄도 모르고 삽질을 했다는 사실이 쪽팔렸지만 그건 한순간이었다. 얼떨떨한 기쁨이 차올랐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
“아니야. 안 아파. 멀쩡하게 서 있잖아. 아, 이제 향기가 안 맡아진다. 밖이라서 금방 사라지나 봐. 다시 해봐. 한 번 더 확인하게.”
“조급하게 굴지 말고. 우선은 네 페로몬부터 조절해. 더 이상은 참기 힘들어.”
“안 참아도 되잖아.”
간단하게 해결책을 제시한 채훈은 얼굴을 들어 승건을 마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잘생긴 얼굴은 북풍의 찬바람처럼 얼어 있었다. 억제제를 먹어 간신히 억눌러 놓은 페로몬이 풀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채훈은 승건에게서 떨어지는 대신에 페로몬을 잔뜩 풀어냈다.
실내였다면 페로몬향기로 가득 들어차고도 남을 정도였기에 채훈은 자신의 페로몬향을 맡을 수 있었다. 언젠가 승건이 햇살을 품은, 바삭하게 말린 빨래냄새 같다는 감상을 말했었다. 채훈에게는 낮의 꽃향기처럼 느껴졌다.
채훈은 오메가의 페로몬으로 알파를 유혹하는 것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너…….”
승건이 말을 잇지 못하고 미간을 와락 구겼지만 채훈은 웃었다. 하지만 흥겨운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달콤한 향기가 세상을 뒤덮었다. 그건 향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몸속에 스며들었다.
제정신으로 맞닥뜨리는 알파의 페로몬은 이상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채훈은 당황했다. 아무런 자극이 없었는데도 속에서 열이 홧홧하게 치솟으면서 심장이 뛰었다. 정확히는 제대로 흥분하다 못해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페로몬을 풀었어. 어때?”
“어, 그게…….”
채훈은 여전히 승건의 옷깃을 붙잡은 채 할 말을 찾았다. 아직도 허리를 살짝 붙잡고만 있는 승건의 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모든 감각과 생각이 끌려가고 있었다.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대신에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팔을 벌려 승건의 목을 끌어안고 몸을 바투 붙였다.
“채훈아?”
난처한 듯 이름을 부르는 승건이 꽉 껴안아 주지 않았기에, 채훈은 속상하면서도 감탄했다. 정말 자제력만큼은 대단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귀엽고 사랑스럽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을 붙잡아 입술을 물어뜯고, 쓰러뜨려 올라타고 싶었다. 이곳이 밖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하자.”
“뭐?”
“차는 좁으니까. 운전할 수 있겠어? 아니다. 우리 집에 가자.”
채훈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승건의 귀에다 대고 몇 가지 선택지를 읊다가 단순하게 결정을 내렸다. 바로 코앞에 집이 있는데 멀리 갈 필요 없었다. 하지만 승건이 버텼다.
“하기는 뭘 해. 검사부터 해야지.”
“다 괜찮아. 안 괜찮다고 하더라도, 섹스 한 번 한다고 안 죽어.”
“강채훈.”
“고집도 세.”
채훈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승건을 끌어안은 채 그의 목덜미를 와작와작 씹었다. 페로몬도 잔뜩 쏟아냈다. 결국 승자는 채훈이었다. 후회하지 말라는 승건의 손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채훈은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대문과 현관문을 직접 열었다. 조용한 잠입이었다. 그러나 거실에 있던 김혜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김혜진이 일찍 왔다고 반겨주었다. 그녀는 채훈의 등 뒤에 서 있는 승건을 보고는 정우는 잠들었다는 말을 하다 말았다.
“자고 갈 거예요.”
괜한 민망함이 밀려들었지만 채훈은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그러고는 김혜진이 무어라 하기 전에 승건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이 끝나고도 한참을 들어가야 채훈의 침실이 있었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채훈은 불을 켰다. 그리고 승건에게 달려들었다.
*
*
키스는 시작부터 격렬했다. 채훈은 승건을 힘껏 끌어안으며 깊이 혀를 얽었다. 야외가 아닌 밀폐된 공간이라 승건의 페로몬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키스만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못해 다리가 휘청거렸다.
채훈은 승건이 밀어붙이는 힘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다가 무너지듯 침대 위로 쓰러졌다. 다행히 승건에게 안겨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거의 없었다.
물고 빨며 서로의 옷을 잡아 뜯는 것처럼 벗겼다. 그러나 흥분으로 떨리는 채훈의 손은 헛손질을 반복했다. 재킷과 넥타이까지는 제대로 벗겼지만 셔츠 단추가 난관이었다.
“안 벗겨져. 흐윽.”
자세가 나빴다. 승건의 셔츠를 반도 벗기지 못하고 있던 채훈은 맨살을 어루만지는 승건의 손길에 몸을 틀며 신음했다. 더 이상 단추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승건의 뜨거운 입술이 뺨과 턱에,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여기, 아프지 않아?”
승건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손끝이 뱃가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곳에는 아이를 낳으면서 생긴 흉터가 있었다. 상처는 잘 아물었고 좋은 약도 꼬박꼬박 발랐기 때문에 약간의 흔적만 남은 상태였다.
채훈은 멋쩍고 안타까운 기분으로 승건을 올려다보았다. 승건의 몸은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아프다고 하면 당장에 그만둘 모양새였다. 진짜 귀엽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나도 안 아파.”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의 쾌락을 기대하고 있었다. 채훈은 팔을 뻗어 승건의 목을 감아 입술을 맞댔다. 뜨거운 숨결이 엉켰다.
채훈은 모든 게 다급했지만 승건은 침착하기만 했다. 뺨과 턱을 핥고, 목덜미와 어깨에 이를 세우며 애무를 했다. 마치 온몸에 키스를 할 기세였다. 부드러운 애무가 너무 감질나서 채훈은 미칠 것 같았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몸을 뒤틀던 채훈은 결국 울먹이며 재촉했다.
“얼른 해.”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라고 해도 채훈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승건의 혀가 배꼽 주위를 핥을 때 한계에 다다랐다. 이미 잔뜩 발기한 성기가 바지 너머로 승건의 팔에 비벼졌다. 채훈은 절정을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해방은 없었다. 오히려 열이 훅하고 치솟았다. 특히 아까부터 움찔거리던 뒤가 징징 울렸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이 아래가 제멋대로 수축하고 이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채훈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연했다. 이렇게 자신이 오메가임을 절실히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평소에도 문득 자신이 오메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긴 했다. 정우가 발길질을 하며 태동을 하거나, 혹은 다른 형질자의 페로몬향기를 맡을 때마다 새삼스러웠다.
그래도 지금만큼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승건의 페로몬에 자신의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승건과 섹스를 한 것은 여러 번이었다. 그가 주는 쾌락에 허덕이는 것은 익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까도 그의 페로몬에 흥분했지만 지금은 질이 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막히고 손이 덜덜 떨렸다.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강한 자극이었다. 어서 안을 가득 채우고 정신없이 흔들리고 싶었다.
“승건아…….”
채훈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목소리로 승건을 불렀다. 아직 셔츠를 입고 있는 승건의 어깨도 긁어댔다. 이변을 알아차린 듯 옆구리를 깨물던 승건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제, 이제 진짜 못 참겠어. 제발…….”
절로 애원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채훈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는 승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절박한 기대감에 손을 뻗자 그가 순순히 안겨 왔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뺨을 쓸어주었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괜찮아. 괜찮다는 말 싫어한다는 거 알지만, 이제……. 읏.”
“강채훈.”
“아니다. 자세 바꿔. 내가― 흐윽. 읏. 아.”
채훈은 애원할 게 아니라 자신이 승건을 덮치는 게 더 빠르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행동이 굼뜬 탓에 승건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채훈은 승건에게 깔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난처한 듯 한숨을 삼킨 승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조차 채훈에게는 자극이었다. 승건의 손이 바지 안으로 들어와 성기를 잡고 흔들었을 때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 순간 절정에 이르러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이에 바지가 벗겨졌다. 허벅지가 들리고 엉덩이 사이로 승건의 손가락이 밀려들었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안쪽 깊숙한 곳까지 닿자 환희에 몸이 떨렸다.
“하, 응……. 으응. 승건아. 앗.”
채훈은 울음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좋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런…….”
혀 차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채훈은 어느새 눈물이 맺힌 눈을 깜빡이며 승건을 보았다. 승건의 얼굴이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그가 눈가에 입술을 대며 중얼거렸다.
“네 몸이 바뀌었어.”
“그래. 그러니까…….”
“내 거야.”
내 거라고 한 승건이 눈을 휘며 화사하게 웃는 바람에 채훈은 넋을 잃었다. 왜 여기서 소유권을 주장하느냐고 항변할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그저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상체를 일으키는 승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채훈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무릎으로 선 승건이 다급히 바지를 내렸다. 아파 보일 정도로 잔뜩 발기한 성기가 그의 손 안에 묵직이 쥐어졌다.
다급히 숨을 들이쉰 채훈이 무어라 하기 전에 승건의 손에 잡혀 다리가 들렸다. 그리고 성기의 끝이 사타구니 사이에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푹 하고 파고들었다.
“아…….”
채훈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잔뜩 젖은 탓에 아픔은 없었다. 오히려 내벽이 승건의 성기를 빨아 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압박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도망치기 위해 바르작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오른쪽 다리는 승건의 허리에 감겨 있었고, 왼쪽 다리는 커다란 손에 잡힌 상태였다. 제대로 몸을 뒤틀지도 못했다. 승건이 몇 번 허릿짓을 하자 성기가 단숨에 들이찼다.
낯설고도 익숙한 충격에 채훈은 숨을 멈추고 소리 없이 떨었다. 빈틈 따위는 없는 완벽한 결합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들끓는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다. 더한 것이 필요했다.
“할 수 있겠어?”
승건의 손이 뺨을 쓸고서야 채훈은 정신을 차렸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어느새 몸을 숙인 승건이 뺨과 턱에 입을 맞대고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면서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녀석이 좋았다.
“너, 너 진짜 귀엽다.”
“채훈아.”
“해. 여기까지 왔는데……. 뭘, 뭘 더 물어봐. 어서. 흐으. 응.”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승건이 천천히 허리를 물렸다. 깊숙이 들어와 있던 굵은 성기 역시 같은 속도로 빠져나가는 감각에 채훈은 진저리치며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민감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구멍이 수축하면서 성기를 탐욕스럽게 붙들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마다 승건이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제 움직일 거야.”
“으……응.”
성기가 끝까지 빠져나가자 승건이 무서운 예고를 했다. 채훈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하자마자 성기가 단번에 치고 들어왔다. 그것만으로 채훈의 세상이 단숨에 부서졌다.
숨 막히는 쾌감에 시야는 하얗고 까맣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입에서는 신음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왔다. 열과 땀에, 그리고 격렬한 압박에 허덕이다가 승건을 끌어안으며 울었다.
모든 게 뜨거웠다. 숨 막혔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는 쾌락에 어느 순간 의식이 사라졌다.
채훈이 눈물로 흠뻑 젖은 눈을 깜빡였을 때는 모든 게 끝난 상황이었다. 헐떡임과,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와, 뜨거운 열이 채훈이 느끼는 세상의 전부였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자 승건이 손으로 뺨을 문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울지 마.”
“어…….”
채훈은 멍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승건의 입술에 눈가에 닿았다. 눈물을 핥는 다정한 몸짓에, 아까와는 다른 것들이 느껴졌다.
승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과 묵직한 무게를 느낄 수 있었고, 그의 성기가 아직 삽입되어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승건에게서 풍기는 페로몬향기가 진하게 맡아졌다.
나른히 늘어진 세포를 깨우는 향기였다. 채훈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팔을 들어 아직도 입맞춤을 퍼붓고 있는 승건의 목을 감았다.
“하자.”
채훈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러자 승건이 흠칫거리며 몸을 굳혔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있었다. 채훈은 몸으로 대신 대답했다.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구멍을 조였다. 어설펐지만 자극은 자극이었던 듯 승건이 작게 탄성을 삼켰다. 침대를 짚고 있는 그의 팔과 어깨에 순간 힘이 들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채훈이. 너…….”
“그만하려면 삽입한 걸 뺐어야지. 흐윽……. 봐. 지금도 단번에 커져서. 흣.”
승건이 꾸욱 성기를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채훈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후회하지 말라는 승건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귀와 뺨, 이마에 연신 입맞춤을 하면서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뜨겁게 치미는 쾌락에 채훈은 승건의 허리에 감은 다리에 힘을 주며 다시금 그를 꽉 끌어안았다. 눈물을 참으며 좋은 향기가 나는 목덜미에 뺨을 문질렀다. 조금 전에 승건이 했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내 것이었다.
* * *
나른한 기분에 채훈은 천천히 잠에서 깼다. 그러나 눈이 퉁퉁 부어 있는 탓에 제대로 시야가 맑아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익숙한 방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침실을 밝히고 있었다. 창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누운 탓에 눈은 부시지 않았다.
시간을 가늠하던 채훈은 자신의 몸을 감싼 온기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자신은 알몸이었다. 그리고 맨살의 팔이 등 뒤에서 자신을 껴안고 있었다. 좋은 향기도 났다.
순간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부정 각인이 풀리고 승건과 섹스를 했다. 격렬한 섹스에 몇 번이고 절정에 이르렀다가, 어느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
오메가로서 인식한 섹스는 좋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끔찍했던 쾌감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던 채훈은 또다시 이상함을 느꼈다.
배 속에 묵직한 이물감이 가득했다. 이유는 천천히 깨달았다. 승건의 성기가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
다리 사이에 낀 게 아니라 진짜 삽입된 상태였다. 이게 뭔가 싶어 굳어버리는데 허리를 껴안고 있던 승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움직이지 마.”
잠에 취한 목소리는 낮고 섹시했지만 채훈은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승건아. 이거……?”
“응. 자꾸 자극하면 이대로 해버릴 수 있어.”
나른한 중얼거림이었지만 채훈에게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아침 섹스야 할 수는 있었다. 그래도 왠지 지금 하면 오늘 하루 내내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금이 딱 좋았다. 나른하고 욱신거리면서도 만족스러운 아침을 좀 더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채훈은 숨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승건이 소리 없이 몸을 떨며 웃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뒷목에 입술을 대며 조금 더 꽉 껴안아 왔다. 삽입되어 있던 성기도 안으로 꾸욱 밀려들었다.
모든 것이 자극이었기에 채훈은 앓듯이 신음했다.
“야…….”
“부정 각인이 풀렸으니까, 이제 결혼하자.”
승건이 등 뒤에서 껴안고 있는 자세였기 때문에, 채훈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승건이 웃고 있다는 데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이 순간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혼을 하자고 하는 배짱이 신기했다.
“너는 청혼을 이런 식으로 해?”
“결혼한다고 해. 채훈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애절하기까지 해서 채훈은 웃고 말았다. 승건의 성기에 꿰여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양새였다.
왠지 스스로를 한심해 하면서도 머리 한쪽으로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냈다. 이미 청혼 반지를 받아버렸다. 결혼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 하자.”
“응.”
짧게 대답한 승건이 소리 없이 웃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비벼댔다. 가벼운 울림이 빈틈없이 밀착된 몸을 통해 느껴졌다. 덕분에 채훈도 따라 웃었다.
확실히 알몸에, 요상한 자세인 상태에서 결혼이 정해진 게 웃겼다.
그래도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아서 좋았다. 그제와 어제 있었던 거창한 삽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곧 지워버렸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데 승건이 살짝 자세를 고치면서 팔에 힘을 주어 당겼다. 덕분에 안에 가득 들어차 있던 성기도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저릿한 자극이 채훈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면서 발가락과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아무래도 자세가 좋지 않았다. 은은하게 풍기는 승건의 페로몬도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무조건 할 수밖에 없었다.
“나 이제 씻으러 갈 거야. 흐……응. 놓아줘.”
허리를 붙잡고 있는 승건의 손을 밀치면서 몸을 빼려다가 실패했다. 오히려 더 깊게 삽입되면서 다리가 얽혔다.
“움직이지 말라니까.”
“이대로라면 할 거잖아.”
“안 할 거야.”
“궤변을. 하읏. 응. 그냥, 그냥 빼. 아니, 놓기나 해. 야. 너 진짜. 읏.”
한 명은 빠져나가려고 하고 한 명은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껴안은 실랑이가 잠시 이어졌다. 다리가 얽혔고 성기는 삽입되어 있는 상태였다. 자세가 불리한 채훈은 결국 승건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고는 숨을 골랐다. 뜻하지 않은 마찰에 자극을 받아버렸다.
“진짜 안 한다고?”
“그래.”
단언한 승건이 다리를 얽으며 팔에 힘을 주었다. 그 자세 그대로 망부석이 될 기세에 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깊숙이 삽입된 성기는 이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안 할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아무래도 먼저 해달라고 조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차라리 하자고 덤벼들었으면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누가 이기나 보자.
괜한 호승심에, 그리고 약간의 억울함과 분함에 채훈은 숨을 들이쉬고는 눈을 감았다. 팔짱을 끼고는 잠이 온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조용한 침묵 속에, 동갑내기 연인들이 자존심 게임을 시작했다.
1분여는 숨소리조차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승건의 가느다란 숨결이 채훈의 어깨에 닿는 순간에 위태로운 평화가 깨졌다. 가벼운 투덜거림이 엎치락뒤치락하며 팔다리가 얽히는 몸싸움으로 번졌다. 그리고 곧 질척이는 키스로 이어졌다.
승자 없는 싸움이 끝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