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1. 셋】
3월 초, 달력에는 봄꽃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지만 아직 바람은 겨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해가 지고 난 다음이면 겨울 그 자체였다.
두툼한 패딩과 목도리로 꽁꽁 무장한 채훈은 편의점 한쪽에 앉아 곰 모양 젤리를 하나씩 씹으며 거리 풍경을 구경했다. 사실 젤리를 먹는 데 정신이 팔려서 구경할 것도 없었다.
냉장고에는 아이스크림부터 과일까지 온갖 간식거리가 잔뜩 있었다. 하지만 캄캄한 저녁에 갑자기 먹고 싶어진 것은 편의점에서 파는 곰돌이 젤리였다. 김혜진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또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채훈은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결국 젤리에 대한 욕망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건 훌륭하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따뜻한 편의점 안에서 젤리를 하나씩 꼭꼭 씹어 삼키는 채훈은 아주 행복했다. 달달하고, 적당히 말랑하고, 가벼운 설탕냄새는 채훈이 바라는 것이었다. 한 봉지를 다 먹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채훈은 아쉬움에 빈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당뇨 수치는 아직 정상이었다. 그래도 한 번에 단 걸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다.
“참아야지.”
돌아가는 길에 한 봉지를 사 들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채훈은 쉬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바람은 여전히 강하게 불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집까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찬바람에 코끝이 얼어버리는 게 싫었다.
채훈은 도로 반대편 끝에 있는 집을 눈으로 찾았다.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2층짜리 빨간 벽돌집이었다. 담장이 높고 정원이 잘 꾸며져 있는 집은 낯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에서 서울로 이사한 것이 겨우 10일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서울로 온 이유는 여럿이었다. 승건이 매주 제주도를 오가는 게 비효율적이고, 또 위험했다. 승건의 외할아버지가 아이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안전한 곳에서 낳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도 있었다.
먼저 이사를 하지 않겠냐고 말을 꺼낸 건 승건이었고, 채훈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2일 만에 이사를 했다.
빨간색 벽돌 이층집은 승건이 꽤나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채훈이 제주도에서 가져온 것은 평소에 쓰던 물건 정도였다. 1층에는 아기 방도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임신 후에 하나씩 사 모았던 아기 물건들이 이곳에서는 덤이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작은 불만이 있다면 제주도에 비해 훨씬 춥고 공기가 나쁘다는 것, 그리고 아직 괜찮은 영어 학원을 찾지 못했다는 것 정도였다.
가로등 너머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2층 벽돌집을 보던 채훈은 생각에 빠졌다. 이사를 하면서 서울로 가져올 물건들을 챙기다가 우연히 보험 증서를 확인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실비 보험에 연금 보험, 그리고 중증 질병 보험이 전부였다.
채훈의 자산은 대부분 은행 예금이었다. 그것 말고는 보험과 약간의 주식이 전부였다. 병원을 그만둔 후에 지출이 거의 없어 예금과 퇴직금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승건에게 받은 생활비도 거의 쓰지 않아서 오히려 돈이 쌓이고 있는 중이었다.
당장에 먹고살 걱정은 없었다. 승건은 아이의 양육비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아이를 낳고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 안에만 있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수능 문제집을 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돈 많은 백수가 꿈이었는데, 임신을 하고 나니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만에 하나라도 승건과 헤어질 때를 대비해야 했다. 승건은 왜 또 헤어질 생각을 하느냐고 한소리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람 일이라는 것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이었다. 승건과 헤어지면 양육비든 위자료든 돈은 받겠지만 그건 자립과는 다른 문제였다. 또한 아이에게 열심히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요즘 채훈은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라면 냄새가 폴폴 풍기는 바람에 정신이 그쪽으로 쏠렸다. 옆을 보니까 교복을 입은 학생 두 명이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채훈은 임신한 이후로 라면은 거의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인스턴트식품도 멀리했다. 몇 개월 만에 맡는 라면 냄새에 채훈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예전이라면 라면을 먹고 뛰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채훈은 임신하고도 살이 적게 찐 편이었다. 아직 몸무게는 많이 늘지 않았다. 그래도 손발이 자주 부었다. 막달에 급격하게 살이 찔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트륨이 많은 라면은 안 먹는 게 좋았다.
채훈은 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가는 길에 젤리를 하나 더 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계산을 하고 돌아선 채훈의 눈에 입구에 진열되어 있는 사탕 바구니들이 보였다. 선반에는 화이트데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이벤트를 위해 화려하게 장식된 것들을 보고 그제야 화이트데이가 열흘 정도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채훈은 기념일을 챙기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밸런타인데이 때 승건에게 예쁜 초콜릿을 받았으니 사탕을 챙겨줘야 했다. 편의점 사탕이 아니라 예쁘고 좋은 걸로 말이다.
데이트라도 하자고 할까.
편의점에서 나오던 채훈은 어디서 사탕을 살까 고민하다가 데이트로 생각이 흘렀다.
지난 3개월 동안 승건은 주말마다 거의 꼬박꼬박 제주도를 찾았다. 눈 때문에 김포에서 비행기가 뜨지 않았던 때만 빼고 말이다. 승건은 늘 심정민과, 채훈은 가끔 김혜진과 동행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는 밤과 아침으로 호텔방에 페로몬을 풀어두고 나왔다. 그건 데이트가 아니었다.
사실 승건이 너무 바빠서 뭘 같이 할 시간이 없기는 했다. 채훈이 서울로 다시 온 이유도 승건이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였다.
지난 3개월 동안 노력해서 승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는 좋아졌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아직도 손이 닿으려고 하면 저도 모르게 놀라곤 했다.
그래도 데이트는 할 수 있었다.
데이트를 할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차가운 바람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편의점에서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단숨에 집 안으로 들어선 채훈은 패딩도 벗지 않고 휴대폰을 들었다.
“데이트.”
승건의 메시지창을 연 채훈은 데이트라는 단어를 중얼거려 보았다. 좋은 울림이었다. 같은 반지까지 꼈지만 공식적으로 애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애인이 아니더라도 둘이서 같이 재미있게 놀면 그만이었다.
[데이트 할래?]
채훈은 망설임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나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 동안 있어도 승건은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바쁜가…….”
오후 8시가 넘었지만 승건이라면 바쁠 수도 있었다. 채훈은 민망함에 뺨을 문질렀다. 괜히 혼자서 열을 낸 것 같았다. 나중에라도 연락이 오겠지 싶어 채훈은 휴대폰을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얼른 패딩을 벗어두고 욕실로 향했다. 짧은 외출이지만 밖에 나갔다 오면 손을 씻는 것은 기본이었다. 하는 김에 이빨을 닦고 세수까지 한 채훈은 수능 대비 문제집을 들고 거실에 앉았다.
집은 넓었고 사람은 없었다. 서재도 잘 꾸며져 있고 좋은 책상과 의자도 구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채훈은 저녁이면 거실 탁자에서 공부하는 걸 선호했다. TV를 틀어 백색소음을 들으며 문제집을 풀면서 시간을 보냈다.
방석과 문제집, 그리고 마실 물을 챙겨 들고 탁자 앞에 앉은 채훈은 그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혹시나 하고 확인하니 승건이었다.
짧은 답장이었다.
[하자.]
* * *
토요일 오후, 채훈은 한껏 들떠 있었다.
오랜만에 데이트였다. 정확히 따지자면, 정식으로 하는 첫 데이트였다.
채훈은 첫 데이트에 임하는 남자답게 약속 시간 훨씬 전에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고는 데이트 코스를 복기했다.
사실 코스라고 할 것도 없었다. 채훈의 운동화를 사고,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는다는 아주 간단한 스케줄이었다. 영화관이 있는 멀티플렉스 쇼핑몰과 백화점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길만 잃지 않는다면 이동 거리 자체는 아주 짧았다.
데이트 코스를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주말에도 일하는 승건의 스케줄을 알아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심정민과 몇 번이나 통화하면서 시간을 조율했다. 그러고도 어제 갑자기 승건의 스케줄이 늘어나는 바람에 점심은 같이 못 먹게 되었다.
어렵게 예약했다가 취소해야 했던 레스토랑의 하몽과 문어샐러드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데 마침 승건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착했어.
“어. 나갈게. 잠시만.”
채훈은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냉장고 정리를 하고 있던 김혜진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는 현관을 나섰다.
대문 앞에 시커먼 세단이 서 있었다. 그리고 승건도 승용차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채훈은 후다닥 뛰어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었다.
“빨리 왔네.”
“응. 추워. 어서 타.”
채훈은 승건과 함께 승용차 뒷좌석에 탔다. 문이 닫히자마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일하고 왔느냐, 밥은 먹었느냐 하는 소소한 대화가 오갔다.
그러면서 채훈은 승건을 보았다. 굳이 일하고 왔냐고 묻지 않아도 평소보다 더 각 잡히고 딱딱한 슈트와 코트를 보면 꽤나 어려운 자리에 있다가 온 걸 알 수 있었다.
어지간한 영화배우보다 잘생긴 승건은 뭘 입어도 잘 소화해 냈다. 슈트는 찰떡같이 어울렸다. 하지만 말랑한 데이트 코스를 생각하면 녀석은 너무 눈에 띄었다. 뉴스에 몇 번 영상과 사진이 풀리면서 승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과한 걱정이었지만 만에 하나의 일에 대비해야 했다.
얼굴을 가리게 마스크라도 쓰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왜?”
“음……. 옷 사러 갈까? 내 거 말고. 네 거.”
“내 옷? 갑자기 왜?”
“데이트하려면 불편할 것 같아서. 영화관이랑 백화점이랑 같이 붙어 있으니까. 그래. 옷을 사면 되겠다. 내가 사줄게.”
마스크보다는 새 옷을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승건이 주는 걸 받기만 했었다. 이제는 자신이 승건에게 뭔가 줄 수도 있었다. 승건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고를 생각을 하자 갑자기 의욕이 치솟았다.
데이트는 시작부터 징조가 좋았다.
*
*
채훈이 승건의 옷을 산다고 하자 운전을 하던 심정민이 생소한 이름의 메이커를 하나 추천해 주었다. 평소에 심정민이 승건의 옷을 사는 매장이 백화점에 있다는 것이었다. 승건이 봄에 입을 옷을 몇 벌 더 고르라는 주문에, 채훈은 가격 압박을 살짝 받았다. 그러나 승건에게 받은 신용카드가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원활한 쇼핑을 위해 심정민이 예약까지 해주었다. 구입한 옷들은 심정민의 집으로 배달하면 된다는 것까지도 알려주었다. 심정민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승건이 디자인보다는 옷의 재질과 감촉을 꼼꼼하게 따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채훈은 승건에게 엄숙히 맹세했다.
“네 취향은 존중해 줄게.”
“빨리 끝내주는 게 더 좋아.”
“쇼핑이 싫어?”
승건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아서 채훈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사실 채훈도 쇼핑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긴 했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널 꾸미는 게 더 재밌어.”
“오늘은 내가 아니라, 네 차례야.”
잘못하면 주객이 전도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채훈은 확실하게 목표를 정했다. 그렇게 농담을 하는 사이에 승용차는 금방 백화점에 도착했다.
심정민이 알려준 매장은 백화점 명품관에 위치해 있었다. 매장에 들어서서 심정민의 이름을 대며 예약을 했다고 하자 안쪽에 있는 룸으로 안내받았다. 쇼핑을 도와주는 담당 직원은 친절했다. 자리를 권하고, 마실 것을 준비해 주고 난 다음에야 심정민이 평소에 구매했던 디자인의 옷들을 보여주었다.
채훈은 쇼핑에 재주가 없었다. 특히 옷은 모델이나 마네킹이 입고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신중하게 승건의 의견을 물어보면서 옷을 골랐다.
제일 처음 선택한 것은 셔츠와 니트, 바지라는 아주 무난한 코디였다. 승건은 별말 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칼같이 각 잡힌 슈트만큼이나 여전히 전문 모델 같은 핏이었다. 그래도 따뜻한 색의 니트가 승건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채훈은 자신의 선택에 아주 만족하며 웃었다.
“잘 어울린다. 네가 왜 날 꾸미는 걸 좋아하는지 알겠어.”
“그래?”
“꾸미는 보람이 있어. 뭐든 잘 어울리겠지만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어. 와, 그 외투는 꼭 사자.”
채훈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살짝 러프한 코트까지 걸치자 날카로운 사업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난 3개월 동안 꾸준히 만난 덕분인지 승건은 조금씩 살이 붙고 있었다. 아직 정상 체중으로 돌아가려면 좀 더 걸리겠지만 그래도 한참 말랐을 때에 비하면 훨씬 보기가 좋았다.
“마음에 들어?”
“응. 너는 어때? 괜찮아? 그럼 그걸 사고. 이것도 입어봐.”
채훈은 대기하고 있는 직원이 들고 있는 옷을 권했다. 승건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사이에 봄 신상이라고 적극 추천받은 것이었다. 이것도 승건에게 잘 어울릴 거라는 말에는 상술과 진심이 섞여 있었다. 보들보들한 니트의 감촉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채훈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이참에 승건을 예쁘게 꾸며보고 싶었다.
그런데 승건은 그게 못마땅한 것 같았다. 워낙 무표정한 녀석이라서 잘 티는 나지 않았지만, 불만스러운 건 분명했다.
“이걸?”
“심 실장님이 봄에 입을 옷을 여러 벌 사라고 했잖아. 이거랑 저것까지만 입어보자. 네가 평상복 입는 거 잘 볼 수 없잖아. 맨날 각 잡힌 슈트만 입으니까.”
“알았어. 이 코트 작은 사이즈가 있죠? 한 번 보여주세요. 이 친구 사이즈로요.”
이번에는 승건이 입고 있는 코트를 가리키며 채훈의 옷을 사겠다고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알겠다며 룸을 나갔다. 일련의 과정에 활짝 웃으며 의자에 앉아 있던 채훈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 것도 사라고? 괜찮아. 요즘 외출할 일이 거의 없는걸. 코트는 관리도 힘들고.”
“편하고 가벼워. 너도 잘 어울릴 거야.”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았기 때문에 채훈은 거절할 말을 더 찾지 못했다. 승건은 두 번째 옷을 들고 다시 탈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채훈은 자신의 사이즈에 맞춰 가져온 코트를 입었다. 승건의 말대로 코트는 편하고 가벼웠다.
“잘 어울리시네요. 친구분도 그렇고, 강채훈 님도 핏이 너무 좋으세요.”
채훈을 칭찬하는 직원이 승건을 친구라고 하는 것을 들으며 채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처음에 직원이 친구 사이냐고 물었을 때 채훈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의 눈이 재빠르게 채훈과 승건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확인하는 것을 봤지만 모르는 척했다. 정식으로 사귀는 건 아니니까 친구라고 해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그 때 마침 승건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번에는 검은색 터틀넥 니트와 검은 바지였는데, 아까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멋지다며 감탄하자 승건 역시 채훈이 입고 있는 코트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돌려주었다. 그것도 사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채훈은 괜찮다는 사양의 말은 하지 않았다. 코트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여기서 실랑이를 해도 승건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쇼핑은 순조롭게 끝났다. 승건은 채훈이 권한 옷들을 모두 한 번씩 갈아입었다. 다 잘 어울렸기 때문에 채훈은 망설임 없이 모두 질렀다. 물론 거기에는 채훈의 사이즈로 된 코트도 끼어 있었다.
채훈은 드디어 승건이 준 신용카드를 써본다며 기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용카드는 지갑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심정민이 먼저 결제를 하고는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채훈은 승건을 멋지게 꾸민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
*
승건의 옷을 사고 나자 영화 상영 시간이 곧이었다. 채훈은 헤매지 않고 영화관을 찾았다. 채훈도 승건도 영화를 보면서 간식거리를 먹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조용하고 얌전하게 영화를 관람했다.
채훈이 고르고 고른 영화는 고전 소설을 재해석한 추리물이었다. 입소문이 좋은 만큼 재미도 있어서 웃으면서 상영관을 나올 수 있었다.
저녁 시간까지는 애매하게 시간이 남은 상태였다. 채훈은 차나 커피를 마시는 대신에 승건을 끌고 지하에 있는 서점으로 향했다.
“나는 여기에 있을 테니까, 너도 책 살 거 있으면 사.”
수능 문제집 코너에 선 채훈은 승건을 풀어주었다. 외출을 하면 서점에 들러 문제집을 한두 권씩 사는 게 버릇이 되었다. 하지만 승건에게는 재미가 없을 게 뻔했다. 서점에는 볼거리도 많으니까 적당히 돌아다니라고 했는데도 승건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집에 관심을 보였다.
“이것도 오랜만이네. 이참에 구경하지 뭐.”
승건이 책장에 꽂힌 문제집을 하나 빼내고는 책장을 후루룩 넘겼다. 채훈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각종 문제집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승건의 모습은 과거의 한 장면과 닮아 있었다. 교복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은 것만 아니라면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다.
“문제집 푸는 거 재미있어?”
승건이 손에 들고 있던 문제집을 가볍게 흔들며 묻는 바람에 채훈은 정신을 차렸다.
“반반? 아직도 이걸 기억하고 있나 싶은 것도 있고, 반대로 분명히 배운 건 알겠는데 뭔지 모르겠는 것도 있고. 그거 알아? 국어가 제일 어려워. 교육과정이 바뀌어서 우리가 배운 거 거의 안 나와. 그래서 책 읽는 기분으로 문제집 풀고 있다니까.”
“모의고사는 쳐봤어?”
“아니.”
“수능은 생각 없고?”
예전에 이 문제로 한 번 싸운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승건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채훈은 솔직하게 말했다.
“한 번 쳐볼까 싶기는 한데, 아직 모르겠어. 뭔가 시작하기에는 늦은 것 같고, 어린애들 사이에 끼어서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쪽팔릴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전에도 말했지만 이제 수의사가 되고 싶지는 않아.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며.”
“그건 말 그대로 꿈이고. 아이가 생기니까 생각이 많아져. 진짜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그럭저럭 나올 것 같긴 하거든? 그래서 약대나 수의대에 들어가서 전문 직업을 가질까 싶기도 해.”
아이에게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것이나, 혹은 승건과 헤어졌을 때 자립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굳이 알리지 않았다.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승건에게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얄팍한 자존심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꼭 대학을 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수의사 되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네가 약사나 수의사가 되는 대신에, 그들을 고용할 수도 있어. 최근에 동물 복지 관련된 사업도 많으니까. 재단을 만들어 운영해도 되고. 음, 그거 괜찮네.”
수의사가 되는 대신에 수의사를 고용해 사업을 하면 된다는 발상은 채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한 것이어서 놀랍기까지 했다. 그래서 승건이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를 하는 건가 납득하고 말았다. 물론 자신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사업은 아무나 하냐? 비전이랑 철학은 둘째치고, 나는 사업 같은 거 할 생각이 없어.”
“다른 방법도 많다는 거야. 대학이든 사업이든 하고 싶은 것을 해. 건물을 준다고 하면 또 화를 내겠지만……. 음, 단어를 고르기 힘드네. 내가 지원해 줄 수 있어. 혼자 너무 고민하지 마. 천천히 생각해도 돼.”
“……나는.”
뭔가 말을 하려던 채훈은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자신 역시 할 말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승건에게서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보다, 혼자 고민하지 말라고 하는 말에 더 울컥하고 말았다.
주말마다 승건을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서로의 근황이나 이슈 등의 잡담이 대부분이었다. 채훈이 시간을 보내는 일환으로 수능 문제집을 풀고 있다는 것도 한두 번 화제가 되었다. 가벼운 분위기였고 머리가 굳었다고 농담도 했었다.
수능에 관해서도 뭔가 이야기를 한 것 같긴 했지만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아마 그때도 너무 고민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랐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하지만 별것 아닌 말이, 어느 순간에는 특별해진다.
다 호르몬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해진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승건을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입술을 깨물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뭐라고.
기분이 이상하다 못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울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며 눈에도 힘을 주었다.
“채훈아? 왜 그래? 설마, 아픈 거야?”
“아니. 괜찮아. 그냥 기분이……. 기분이 나쁘다는 건 아니고, 좀 이상해서 그래.”
채훈은 눈에 힘을 준 채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표정이 기괴할 것 같은데 별수 없었다.
“뭐, 건물이 있으면 좋긴 한데. 그래도 뭔가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돈 많은 백수가 꿈이기는 하지만 그게 내 돈은 아니니까. 아니, 이건 됐고. 수능을 칠지 모르겠지만, 아마 출산일까지는 계속 공부는 할 것 같아. 애 낳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그래도 대학을 가든 뭘 하든 혼자서만 결정하지 않을게. 아기 때문이라도 네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음, 그냥 올해 바짝 공부해서 수능을 봐야겠다. 1년이나 더 공부할 자신 없으니까. 점수 나오는 거 보고 대학을 가든지, 다른 일을 찾든지 하고. 왜 또 표정이 그래?”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생각이 정리되면서 결단이 내려졌다. 미련이 남기 전에 바짝 공부해서 수능을 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기준을 정해서 점수가 나쁘면 포기하고, 잘 나오면 그때 대학을 갈지 말지 걱정하면 그만이었다. 아직 아이가 태어나려면 2개월이 남았다. 바짝 공부할 시간은 있었다.
그런데 승건이 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을 때처럼 말이다.
“내가 뭘.”
“미간에 주름이 생길 뻔했거든.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승건이 시치미를 뗐지만 채훈은 한 번 더 물었다.
“그런 거 없어.”
“나중에 뭐라 하지 마?”
“유치한 생각이라서 그래.”
채훈은 승건이 말한 유치한 생각이 뭔지 궁금했다. 그래도 싫다는 거를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그냥 넘어가는 게 현명한 법이었다.
문제집을 고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채훈이 국어와 영어 문제집을 한 권씩 고르자 승건이 결제를 하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너는 저기서 쉬고 있어. 계산대에 사람이 많아서 오래 걸릴 것 같아.”
승건이 가리킨 곳은 잠시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채훈은 사람이 잔뜩 모여 있는 계산대와 의자와 승건을 번갈아 보다가 욕망에 졌다.
승건에게 문제집을 넘긴 채훈은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야 다리가 부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임신을 하고도 꾸준히 런닝을 하면서 체력 관리를 했는데도 팔다리가 붓는 것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다.
내 몸인데도 내 몸 같지 않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던 채훈은 코끝에 닿는 향기에 잠시 멈칫했다. 바로 앞에서 남녀 커플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지나가고 있었다. 오메가가 분명한 여성에게서 알파의 페로몬이 풍겼다.
오메가로 각성하면서 가장 신기한 것 중의 하나가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 향기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형질자는 거의 완벽하게 페로몬 향기를 감추고 다녔다. 그래도 방금 지나간 오메가처럼 알파의 페로몬에 마킹된 상태라면 어쩔 수 없었다.
마킹은 오메가를 향한 알파의 집착과 소유욕의 노골적인 증거였다. 장기간 외출을 해도 사라지지 않을 마킹은 단순한 페로몬 샤워만으로는 부족했다. 알파가 꽤나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페로몬을 묻혀야 했기 때문에 오메가의 동의와 협조도 반드시 있어야 했다.
페로몬의 흔적은 일반 베타들은 알 수 없는 특별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제 짝에게 푹 빠졌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물론 저러다 깨지는 커플이 수두룩했다. 쌍방 각인을 하고도 헤어지는 경우 또한 없지 않았다.
다정한 커플이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던 채훈은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자신은 사귀자고 했지만 승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반대로 승건의 청혼에 자신 역시 회피해 버렸다. 따라서 지금 둘이 어떤 관계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채훈은 반지를 나눠 낀 것만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의 욕심을 낼 수 없었다. 지금 자신과 승건의 관계가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각인과 관련되어 얄팍하긴 해도 꽤나 많은 것들이 알려진 편이었다. 반면에 부정 각인은 그 이름조차 생소했다.
작년에 유명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을 어렵게 구해보았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부정 각인이 풀린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표본이 52쌍뿐이긴 했다. 그러나 자신의 부정 각인이 풀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서로 각인과 부정 각인을 한 상태였다. 붙어 있을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지독한 딜레마가 평생토록 이어질 수 있었다. 혹은 각인이나 부정 각인 중에 한쪽이 먼저 풀릴 수도 있었다. 아니, 서로가 살려면 한쪽만이라도 풀려야 했다.
승건이 먼저일까, 자신이 먼저일까.
채훈은 승건의 각인이 먼저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향한 집착도, 좋아한다는 감정도 모두 각인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형질자는 페로몬의 놀음에 좌지우지되는 법이었다.
자신은 그의 페로몬을 받아주기는커녕 키스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신의 부정 각인이 풀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각인을 했다고 하더라도 키스도 섹스도 못 하고 평생 기다리는 것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러다가 각인이 풀릴 것이다. 상대가 살아 있어도 각인이 풀리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 다가올 미래에 채훈은 겁쟁이처럼 굴고 있었다. 승건을 마음껏 좋아하고 있기는 했지만, 언제든 헤어질 수 있게 마음의 준비를 했다.
승건이 헤어지자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알았다고 할 수 있도록.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줄기줄기 이어지자 갑자기 우울해졌다. 채훈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신의 뺨을 북북 문질렀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장담도 할 수 없었다. 특히 작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하면 미리 걱정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
채훈은 복잡한 생각을 멀리 내쫓고는 눈으로 승건을 찾았다. 계산대 앞의 줄은 여전히 길었다. 그 사이에 승건의 머리가 삐죽 솟아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어, 채훈이 아니야?”
갑작스럽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채훈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대학 동기 동창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남자 둘로, 그중 한 명은 전 애인인 김형인이었다.
채훈은 한국이 좁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훈이 맞네. 긴가민가했는데.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호쾌하게 인사를 건네는 조철환을 보며 채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오랜만이다.”
“저기서 너 봤는데. 형인이랑 네가 맞다 아니다 내기를 했거든. 나는 맞다고 했는데 형인이는 아니라고 해서, 그래서 와봤지. 맞잖아. 채훈이.”
조철환이 옆에 선 김형인의 허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그제야 김형인이 어색하지 않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다. 채훈아.”
“응.”
“분위기 많이 바뀌었네. 못 알아봤어.”
“그래.”
의례적인 인사에 채훈은 적당히 대답했다. 둘 다 대화의 의지는 없었다. 그 사이를 조철환이 끼어들었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
“영화 보려고.”
조철환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오지랖이 넓고 말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털털하고 활달했지만 눈치도 없었다. 채훈과 김형인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우리도 영화 보러 왔어. 우리 둘 다 은나원에 다니거든. 이번에 형인이가 은나원에 와서 말이야. 너 요즘 뭐 해? 태화 병원 다녔다가 그만뒀다면서?”
“일이 있어서, 좀 쉬고 있어.”
“단체방에서도 도통 말이 없으니, 뭘 하고 지내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 그래. 태화에서 내사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짤린 거다 아니다 말이 많았거든. 진경 선배인가? 네가 그냥 그만둔 거라고 하던데. 뭐가 맞는 거야?”
“내가 그만둔 거야. 내사는 받았지만 무혐의였고.”
채훈은 이것저것 캐묻는 조철환에게 적당히 대답했다. 학과의 특성상 동기들과 선후배들 사이에 긴밀한 정보 교류는 필수였다. 그래서 졸업을 하고도 단체 메시지창이 유지되고 있었다. 채훈은 거기에 이름만 올려두고 있는 상태였다.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대학 동기는 몇 되지 않았다. 그것도 태화 병원을 그만둔 이후로는 경조사만 겨우 챙기고 있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오메가로 발현한 것과 임신한 것을 대학 동기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었다.
여러 이유로 잠적하는 이들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조철환처럼 이것저것 캐묻기를 좋아하는 녀석도 있었다. 조철환은 입도 가벼워서 채훈은 가능하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어. 네가 그럴 녀석이 아니지. 지난 하반기에 태화 병원이 난리 났다던데, 미리 그만두길 잘했어. 그래서 그런지 신수가 훤해 보인다. 원래 잘생겼는데, 이젠 완전 배우 뺨치겠네.”
“칭찬해도 뭐 안 나와.”
“내 동기 중에 이렇게 잘난 놈이 있었나 놀라서 그렇다. 왜? 아, 그렇지. 곧 저녁 시간인데 같이 저녁 먹을래? 혼자 왔어? 형인이가 내기에 져서 밥 살 건데, 너도 껴라.”
“아, 나는 일행이 있어서.”
채훈은 얼른 거절했다. 김형인이 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런데 이제껏 조용히 있던 김형인이 나섰다.
“그럼 동행도 같이 먹지 뭐. 내가 한턱 쏠게.”
“아, 그래, 그게 좋겠다. 일행한테 물어봐. 아까 그 남자 맞지? 둘이 사귀는 거야? 아직 썸? 썸이면 같이 먹자고 하기 그런가?”
김형인이 한턱 쏜다고 하자 조철환이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채훈은 난감해졌다. 승건의 존재를 알고 지목한 걸 보면 아무래도 그냥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대학 동기의 절반은 채훈이 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굳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숨기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채훈이 김형인과 사귄 것은 대부분 몰랐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사귀기 시작해서 6개월 만에 깨진 덕분이었다. 그래서 김형인이 양다리를 걸쳤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당사자인 채훈뿐이었다.
채훈은 김형인이 왜 동행과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채훈의 상식으로는 안 좋게 헤어진 전 애인과는 멀리해야 하는 법이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잖아.”
채훈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김형인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김형인의 속셈은 알 수 없지만 결코 좋은 의도가 아닐 것이다.
김형인은 꽤나 괜찮은 애인이었다. 분위기 있는 미남에 다정하고, 목소리 울림도 우아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술도 즐겨 마셔서 채훈과 잘 어울렸다. 솔직히 진지하게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잘 맞다고 생각했다. 큰 소리를 낸 적도, 심각하게 싸운 적도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이 엉망이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것은 김형인이었다. 네가 외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다 그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것을 헤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채훈은 김형인을 상종 못 할 인간으로 분류해 두고는 없는 사람쯤으로 여겼다. 그래도 동기인 만큼 그의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들어 왔다. 유명 제약회사인 은나원으로 이직했다는 것이나, 그가 결혼 8개월 만에 이혼을 했다는 것 등과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한 귀로 듣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오늘 우연찮게 만난 김형인이 자꾸 과거의 기억을 들쑤셨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건 안 될 것 같아.”
“왜? 남자친구가 그런 거 싫어해?”
채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김형인이 포기하지 않고 보란 듯이 도발했다.
“그래. 한 번 물어보기나 해.”
조철환이 또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채훈은 슬쩍 승건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계산대에서 키가 훌쩍 큰 승건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우연인지 이쪽을 돌아보는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채훈은 모르는 척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승건이 돌아오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듯했다.
“남자친구가 아니라 내가 싫어서.”
“왜?”
이유를 물은 것은 조철환이었다. 하지만 채훈은 조철환이 아니라 김형인을 향해 난처한 듯 말했다.
“전 애인이랑 만나게 할 수는 없어서 말이야.”
“응?”
“양다리 걸친 전 애인이랑 만나게 했다가는 주먹다짐이 일어날 것 같아.”
“양다리? 누가?”
조철환의 물음에 채훈은 소리 없이 웃으면서 김형인을 보았다. 평소에 안 하려던 짓을 하려니까 왠지 얼굴 근육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김형인이 당황하는 것을 보니 고소해졌다.
“어……. 그럼 너희 둘이 사귄 거야?”
“4년? 5년 전쯤에.”
이번에는 조철환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챈 것 같았다. 채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평소였다면 적당한 이유로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김형인이 속을 긁어버렸다.
김형인의 바람기는 이미 소문 날 대로 난 상황이었다. 그는 여자와 결혼한 다음에도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 조용히 살고 있던 채훈의 메시지창이 제법 시끄러워져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이름이 끼는 것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시비를 건 김형인을 배려해 주고 싶지 않았다. 양다리를 걸쳤던 녀석을 후려갈기지 못해서 후회했었는데, 이렇게라도 되갚아 줄 수 있어서 속이 시원했다.
“어, 그럼 안 되겠네.”
조철환이 눈치를 보며 발을 뺐다. 김형인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채훈이 선수를 쳤다.
“나 이제 갈게. 나중에 또 보자.”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한 채훈은 그 자리를 빠져나와 승건에게 향했다. 때마침 승건이 계산을 하고 나와서 바로 합류할 수 있었다.
“누구야?”
아니나 다를까 승건이 조철환과 김형인의 정체를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꽤나 날카로웠다. 채훈은 무던하게 대답했다.
“대학 동기들. 우연찮게 만났어.”
“대학 동기가 널 왜 노려봐? 싸웠어?”
노려본다는 이야기에 채훈은 조철환과 김형인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승건의 말대로 김형인이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거리가 꽤 있었지만 노골적이었다.
채훈은 혀를 차며 승건을 보았다. 승건의 눈빛은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싸운 거 아니야.”
“그럼?”
“전 애인이라서 그런 거니까, 그냥 넘어가.”
“전 애인이라고?”
잘 걷던 승건이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러더니 조철환과 김형인이 있는 곳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인상을 썼다. 분위기가 제법 흉흉했다.
“왜 그래?”
“누구야? 저기, 시커먼 옷을 입은 녀석이지?”
승건이 한눈에 김형인을 알아보는 바람에 채훈은 속으로 뜨끔했다. 언젠가 승건에게 잘생긴 네 얼굴이 좋다고 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조철환에 비하면 김형인이 좀 생기긴 했다. 그러나 승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채훈은 승건을 보며 웃었다.
솔직히 김형인에게 승건을 제대로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의 평화를 위해 그런 상황은 피하는 게 현명할 것이다.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양다리를 걸쳤던 놈이야. 응. 그것 때문에 헤어졌어. 제 버릇 남 못 주고, 바람피우다가 걸려서 얼마 전에 이혼도 했고. 그러니까 그만 노려봐. 그럴 가치 없어.”
양다리를 걸쳤던 놈이라고 하자 슬쩍 채훈을 향하던 승건의 시선이 그대로 김형인을 향했다. 당장에 달려들 것 같지는 않지만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저놈이 뭐라고 했는데?”
“자꾸 캐물을 거야? 그럼 나도 네가 누구랑 사귀었는지 물어봐도 돼?”
채훈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제야 승건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이쪽을 봤지만 채훈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왜? 너는 전 애인 없어?”
“없어.”
“네가?”
“정식으로…….”
승건이 말을 하는 바람에 채훈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입술을 만들어냈다. 승건은 누군가와 대부분 단발성으로만 만났고 정식으로 애인이라고 소개한 적은 없다고 한 것을 써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성 알파에, 얼굴도 몸도 훌륭한 녀석이었다. 과거가 백지이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 저격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과거는 과거로 남겨둬야 했다.
“그러니까 과거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아.”
채훈은 세상의 진리이지 않냐고 동의를 구하는데 승건이 그저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복잡한 눈빛이었다.
“왜?”
“가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
채훈은 승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승건이 말하는 사고는 아마 고등학교 때 일어났던 납치 미수 사건을 뜻하는 것 같았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하지만, 그때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승건이 제 입으로 말했다. 먼저 고백을 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럼 저딴 자식 안 만났을 테니까.”
승건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그가 그렇지 않냐는 눈빛을 보내오는 바람에 채훈은 웃고 말았다.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게 웃겼다. 또 그게 질투인 것 같아서 왠지 속이 간지러웠다.
질투라는 말은 승건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노려보는 눈빛도, 과거를 돌이키고 싶어 하는 것도 질투와 닮았다.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기분도 괜히 좋아져서 입술 끝이 삐죽하게 위로 올라갔다.
“왜 웃어?”
승건이 어딘가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 채훈은 승건에게 질투하고 있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가끔 네가 귀엽다고 생각해.”
“……?!”
“그럴 때면 키스를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아쉽고.”
채훈은 흠칫 놀라는 승건을 보며 속마음을 말했다. 커다란 덩치인 녀석이 질투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자신의 눈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이 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때때로 귀엽다 못해 뺨을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마음은 말랑거리며 커졌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승건을 거부하고 있었다.
단 한 번,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감정이 말 그대로 각인처럼 남았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고 있는 괴리감이 답답했다.
섹스를 못 하면 승건이 떠나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하고 싶었다. 끌어안고, 키스하고, 살을 맞대고 싶은 욕망에 들끓었다.
“나중에, 아이를 낳고 나면 키스부터 시도해 보자.”
키스는 점막 접촉이라 페로몬 자극이 일어날 수 있었다. 임신 중에는 어떤 위험한 시도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조금 무리한 것도 해볼 만했다. 정 안 된다면 직접적인 접촉 없이도 섹스를 하는 방법은 많았다.
“너…….”
승건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았다. 굳은 얼굴은 당황한 게 역력했다. 무엇보다 살짝 드러난 귀끝이 빨개져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 채훈은 괜히 승건을 놀리고 싶어졌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데?”
“부끄러운 게 아니라, 좀…….”
“좀……?”
말꼬리를 잡아 놀리자 승건이 미간을 구기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런 것도 귀여워 보여서 채훈은 웃고 말았다. 자신의 눈에 두껍고 거대한 콩깍지가 낀 모양이었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곧 예약 시간……. 윽.”
쥐어짜는 듯한 갑작스러운 아픔에 채훈은 말을 하다 말고 배를 잡고는 몸을 숙였다. 아이의 발길질이 아니었다. 태동보다는 좀 더 괴로웠다.
“왜 그래?”
승건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 그게…….”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하려던 채훈은 다시 엄습하는 고통에 입을 다물었다.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주저앉지 않기 위해 승건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채훈아?”
채훈은 놀란 승건을 보며 웃으려고 노력했다. 인생은 서프라이즈의 연속이었다.
* * *
눈이 뻑뻑하다고 생각하며 채훈은 잠에서 깼다. 이상하게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이 퉁퉁 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점에서 갑작스러운 복통이 엄습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승건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가는 도중에 양수가 터졌다. 복통은 더욱 심해졌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수술이 결정되었다.
채훈은 끔찍한 고통에 신음했지만 드디어 올 게 왔다 싶었다. 임신 6개월이 지나자 의사는 조산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남성 오메가의 경우 건강과 별개로 조산이 흔한 편이었다.
돌발적인 상황을 대비해 서울로 오기 전부터 서류나 수술 동의서 등의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무엇보다 승건이 옆을 든든히 지켜주었기에 별달리 걱정하지 않았다.
수술 후에 정신이 돌아올 때면 멍하고 아플 거라는 주의를 들었다. 채훈은 손발을 꼼지락거리며 컨디션을 점검했다. 확실히 몸 상태가 별로였다. 그런데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취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락이는 괜찮을까.
채훈은 아이를 떠올렸다. 8개월을 꽉 채우기는 했지만 조산이었다. 지난주 검사에서 아이의 몸무게는 겨우 2.1㎏밖에 되지 않았다. 얼마 동안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한다고 들었다.
얼른 정신을 차려서 아이가 어떤지부터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그러자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병실이었다. 밖이 어두운 듯 병실 내부는 작은 전등 말고는 내부가 어둑어둑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창문 쪽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새벽인 것 같았다. 즉, 수술 후에 마취가 끝나고도 바로 깨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하…….”
승건이 걱정했을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제는 깼다고 알려줘야 했다. 간호사를 부르든 핸드폰을 찾든지 해야겠다 싶어 몸에 힘을 주고 일어나 앉으려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간병인인가 했지만 침대 옆에 선 커다란 그림자는 왠지 익숙했다.
승건이었다.
그를 부르려는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승건 역시 아무 말을 하지 않는 바람에 병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채훈은 시간을 가늠했다. 새벽 시간까지 녀석이 안 자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게 미안했다.
“기, 다린…… 거야? 아, 아……이는?”
메마른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알아야 했다.
“……괜찮아.”
승건이 짧게 대답했다. 그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채훈은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목소리가 꽉 막혔다.
그사이에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승건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채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잘생긴 얼굴이 완전 엉망이었다. 눈 밑이 퀭한데다가,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조명이 약해서 얼굴에 음영이 진한 걸 감안해도 심각했다. 며칠 동안 밤을 새워도 저럴 것 같지 않았다.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할 미남이 와일드하게 변하고 말았다. 거기에 딱딱하게 각진 슈트를 입고 있는 게 언밸런스했다.
슈트라고?
채훈은 승건이 입고 있는 옷이 바뀌었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너…….”
억지로 말을 하려다가 결국 목소리 끝이 기괴하게 갈라지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승건이 환자용 빨대가 꽂혀 있는 물병을 가져왔다. 채훈은 승건의 부축을 받아 물을 마셨다. 미지근한 물이었지만 정신이 맑아졌다. 앉아 있을 힘이 없어서 물만 마시고는 그대로 다시 누워야 했다.
“새벽, 새벽인 것 같은…….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거야? 락이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어? 옷, 옷은 갈아……입은 거야? 불편하지 않아?”
채훈은 궁금한 것을 하나씩 나열했다. 그러나 승건은 입을 다문 채 물병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조용히, 그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소리는 한없이 무거웠다.
“승건아?”
채훈은 승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채훈이 누운 침대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한 번 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손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채훈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야?”
“일주일 만에 깼어.”
“……?”
채훈은 여전히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는 승건의 옆모습을 보다가 눈을 깜빡거렸다. 뻑뻑하게 굳어 있던 머리가 일주일이라는 단어를 한 박자 늦게 받아들였다.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넌 그동안 과다 출혈로 의식 불명 상태였고.”
“어…….”
“계속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다가, 몇 시간 전에 의식이 돌아와서 제거했어.”
“그건 잘 기억이……. 지금 깬 줄 알았어.”
채훈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자신의 기억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마취를 하는 것까지였다. 그것도 겨우 몇 시간 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소 호흡기를 끼고는 일주일을 의식 불명 상태였단다.
아무것도 모르고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머리로는 막 무섭거나 하지 않는데 그 상황 자체가 공포스러웠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다시 잠들어서……. 그래도 그때부터 자가 호흡을 했지.”
뭔가를 억누르는 듯이 승건의 목소리는 중간중간에 끊겼다. 탁자 위에 올라간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채훈은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놀랐어?”
“그걸 말이라고……!”
울컥하며 소리를 지르려던 승건이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채훈은 그제야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엉망진창인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곧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엉망인 얼굴이 웃으니까 빛나는 것 같았다.
“깨어났으니까…… 이제 됐어.”
그건 승건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채훈은 승건이 얼마나 놀라고 초조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많은 논문과 서적에서 각인한 상대를 잃는 공포에 대해 서술했다. 아주 희귀한 경우이긴 하지만, 상대가 죽자마자 그 자리에서 쇼크사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비극의 소재로 자주 쓰였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괜찮을 것이다.
“괜찮아. 약간……. 음. 멍하기는 하지만 별로 안 아파. 그러니까 그러고 있지 말고, 내 손 좀 잡아줘.”
채훈은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손만 까딱거렸다. 그제야 자신의 팔에 수액 바늘이 꽂혀 있다는 것도 알아챘다. 수액 주머니도 한두 개가 아니었고 몸 여기저기에 선이 주렁주렁 달려 있기까지 했다.
“너는 환자야.”
“손만 잡는 건데, 뭘.”
“다 낫고 난 후에도 해.”
인상을 쓴 승건이 딱 잘라 거절했지만 채훈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승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승건은 채훈이 자신에게 부정 각인을 한 이후로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채훈과의 접촉을 기피했다. 채훈이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옷자락을 잡아줬다. 세 걸음이었던 거리는 한 걸음 안쪽으로 줄어들었지만, 제대로 손조차 잡은 적이 없었다. 나중에 심정민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만약에 대비해 승건이 제주도에 올 때마다 억제제를 먹었다고 했다.
채훈은 승건의 노력은 알았다. 하지만 이제 아이가 태어났으니까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 있었다.
“손잡는 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 내가 일주일 동안 안 씻어서 냄새가 나기라도 해? 왜 가까이 안 오려고 하는 거야?”
어느 순간에 어리광과 서운함이 섞여서 협박이 되고 말았다. 자신에게 거리를 두려는 것이 승건다운 반응이기는 한데, 그것과 별개로 진짜 서러워지려고 했다.
눈에 힘을 꽉 주고 노려보자 승건이 한숨을 삼키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깨지기 쉬운 유리세공품이라도 만지듯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만 살짝 얽었다. 승건의 손가락은 매우 찼다.
“괜찮아?”
“응.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아무렇지 않았기 때문에 채훈은 승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승건이 움찔 놀랐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승건아. 너 손이 차.”
“아……. 미안.”
“손 놓으라는 건 아니고.”
채훈은 한 번 더 움찔하는 승건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병원에 입원한 것은 모두 승건과 관련되어 있었다. 승건의 납치 미수 사건이 처음이었고, 최진수의 일로 뒷머리가 찢어진 것 때문에, 그리고 부정 각인으로 쓰러졌을 때도 모두 승건이 직간접적으로 원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승건의 탓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지금 생각이 난 건데, 너랑 있으면 계속 입원하는 것 같아.”
“……?!”
“나는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한 적이 거의 없거든. 너 만나기 전에는. 예전에 한 번 입원한 것도 고등학교 때 사고가 나서 그런 거고. 그러니까 우연이……. 아, 농담이야. 농담. 갑자기 생각나서 그랬어. 얼굴 펴.”
조금씩 안도하는 표정을 짓던 승건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지는 바람에 채훈은 얼른 농담이라고 덧붙여야 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웃어 보여도 승건의 굳은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내가 잘할게. 더.”
승건의 추상적인 약속이 흘러나왔다. 무엇을 얼마나 더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승건이 꽤나 필사적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뭘 더 잘할 수 있을지 궁금한데.”
“뭐든.”
“우선은 잠 좀 자. 얼굴이 엉망이야.”
“응.”
“내가 네 얼굴 좋다고 몇 번 말했던 것 같은데. 그거 아주 진심이야. 반짝반짝한 얼굴 좀 보자.”
채훈은 승건의 얼굴에 진심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승건이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입매를 풀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 뭐라도 먹어. 꿀물 같은 거. 집에 꿀이…… 없던가? 따뜻한 물이라도 마셔.”
“알았어.”
순순히 대답하는 승건을 보며 채훈은 또 뭔가 할 말이 없을까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길게 이야기를 했다가 다시 피곤해져서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아기는 어떠냐고 자세하게 묻고 싶었다. 이제껏 고민만 하던 아이 이름도 정해야 했다. 괜찮은 이름을 이것저것 조합해 놓았다. 그런데 승건의 외할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지을 거라고 하는 바람에 예비 명단에만 올라가 있었다. 설마 벌써 출생신고를 한 건 아닌지도 궁금했다.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은 말이 되지 않았다. 채훈은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아직 내일이 있었다. 그때는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졸려서, 자야 할 것 같아.”
“그래.”
“너도 이제 자. 집에 돌아가서, 옷도 갈아입고. 제대로.”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그만 자.”
“내일도, 얼굴이 퀭하면 한소리 할 거야.”
채훈은 반쯤 눈을 감고 말했다. 승건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더 이상 말할 기력이 없었다.
눈이 감기고 시야가 까맣게 되자 곧 의식이 흐려졌다. 잠이 드는 게 아니라 기절하는 거구나, 몸이 정말 안 좋은 거구나 싶은 순간에 승건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채훈 역시 승건에게 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다 잘될 거라고.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입술을 달싹거려 보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채훈은 잡고 있는 승건의 손에 힘을 주었다.
* * *
“내일도, 얼굴이 퀭하면…….”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거리던 채훈이 곧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승건은 미동도 없이 한참 동안 채훈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승건은 작게 중얼거렸다. 지난 일주일 동안 몇 번이고 했던 말이었다. 괜찮았다. 괜찮아야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속이면서 버텼다.
끔찍한 악몽은 예고도 없이 승건을 들이받았다. 수술은 예정보다 길어졌다. 채훈이 과다 출혈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남성 오메가의 경우 조산은 흔한 편이었다. 임신 중에 쇠약해지고 출산 중에 문제가 생기는 확률도 꽤 높았다.
채훈 본인은 자신이 건강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했다. 아이와 양수의 무게를 빼면 채훈의 몸무게는 거의 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승건은 모든 가능성을 따졌다. 심지어 출산 중에 채훈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그건 준비한다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의사는 채훈이 이대로 의식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의식 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다고도 말했다.
눈도 뜨지 못하고 있는 채훈을 보고 있자니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일주일 동안 미쳐 있었던 것 같았다. 신도 운명도 믿지 않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를 한없이 원망했다.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채훈의 곁에 서서 빌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달라고 애원했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가 닿은 것인지, 혹은 그저 운이 좋은 것인지 채훈이 기적처럼 깨어났다. 그러니까 이제 다 괜찮았다.
“채훈아.”
승건은 채훈의 이름을 불렀다. 기절하듯 잠이 든 채훈은 당연하게도 대답이 없었다.
“강채훈.”
불빛이 밝지 않기에 채훈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두드러졌다. 의식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병색은 완연했다.
어쩌면 채훈의 말대로 자신이 그의 악운일 수 있었다. 채훈이 다치고, 구르고, 깨지는 근원에는 언제나 자신이 엮여 있었다.
하지만 승건은 운명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이 손을 놓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사랑하니까 헤어져 줄 정도로 자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망가지고 부서지더라도 자신의 손에 움켜쥐고 있어야 했다. 채훈의 죽음조차 자신의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승건은 발작적으로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극단적인 소유욕은 각인의 영향이었다.
각인은 죽을 만큼 상대를 사랑하는 격렬한 감정에서 비롯했다. 단순한 페로몬 놀음이 아니었다. 각인의 순간에는 분명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훈이 괜찮냐고 물어봤을 때, 승건이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은 사고였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었다. 어설프고 여물지 못한 애정을 기반으로 했지만, 아직 발현도 하지 못한 오메가를 각인해야 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지금도 본능이 먼저 날뛰었다.
내 것, 내 오메가.
소유욕은 너무도 선명했다. 채훈이 자신을 부정 각인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알파의 본능은 페로몬을 쏟아부으라고 외쳐댔다. 다른 놈들이 넘보지 못하게 내 것이라는 표식을 남기라고 충동질했다. 채훈이 의식을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와이로 도망간 채훈을 뒤쫓던 순간부터 그랬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감정이 제멋대로 널뛰었다. 채훈을 떠올릴 때면 전전긍긍하고 초조했다. 너랑 함께 있으면 입원을 한다는 채훈의 농담 아닌 농담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대로 헤어지자고 하면 어떻게 하나 무섭기까지 했다.
종종 채훈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버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가 보낸 메시지 하나에 실없이 웃다가 머쓱해지기도 했다. 데이트하자는 소리에 들떠서 생애 처음으로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나 고민도 해보았다.
제어되지 않는 감정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에 빠진 증거였다.
채훈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속이 간지럽고 아팠다. 채훈이 깨어났으니 기뻐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치솟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안타깝고 행복했다.
웃음을 삼키던 승건은 공기 중에 떠도는 채훈의 향기에 살짝 굳었다. 채훈의 페로몬 컨트롤은 거의 완벽했다. 평상시에는 아무 향기도 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잠이 들면 무의식중에 페로몬이 풀렸다.
어두컴컴한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희미한 햇살의 향기가 공기 중에 떠돌았다.
반사적으로 향기를 좇던 승건은 쓴웃음을 삼켰다. 억제제를 먹고 있었지만 그건 충동을 가라앉힐 뿐이지 실질적인 욕망까지 제거해 주지 않았다.
이대로 채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끌어안아 버리면 다음은 키스를 하고 싶어질 것이다. 보드라운 살결을 느끼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승건은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의자에 그대로 되돌아갔다. 10여 분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채훈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그의 향기가 떠돌았다.
이제 괜찮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조금 옅어졌다. 여유가 생기자 채훈의 당부도 떠올랐다. 집에 돌아가서, 꿀물을 마시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자라고 했다. 내일도 퀭한 얼굴이면 한소리 한다고 한 것은 정말 채훈다운 말이었다.
자신의 얼굴에 진심이라니 신경을 쓰긴 써야 했다. 꾸미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그것보다 지금은 초조하고도 안온한 순간을 음미하는 것이 먼저였다.
승건은 한참 동안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