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여름밤 (8/15)

8. 여름밤

나는 정 선생에게 내 연애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구체적이고 자질구레한 이야기는 제외하고 단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것은 사랑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와 동시에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정 선생은 이야기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고 화를 냈다. 무슨 그런 사람들이 다 있느냐는 듯, 어떻게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느냐는 듯.

기분이 묘했다. 내 연애사를 알고 있는 친구들은 주로 그녀들을 비난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화제를 돌리거나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돌아와서는 그녀들을 그리워했다.

정 선생은, 그녀들을 비난한다기보다는 나를 위로하는 것에 가까웠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니 그들에게 연연해하지 말라고. 당신이 잘못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사람들이 나빴던 거라고.

그 말을 믿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실패는 내게서 기인한 것이고 나는 여전히 내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위안이 되니까.

“저는 사실 여태까지 좋아해 본 사람을 꼽으라면…… 거의 없다시피 했거든요.”

팔이 딱 붙도록 내 옆에 앉은 그가 침대 밑으로 내려온 다리를 앞뒤로 휙휙 움직였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네를 타듯 움직이는 다리를 응시하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등학생 때 잠깐……. 성인이 되고 나서는, 저 같은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려면 게이 바에 가거나 어플로, 아니면 인터넷 카페에서 만날 수밖에 없거든요. 친구에서 연인으로, 이런 일은 거의 판타지고요.”

그에게서 듣는 그의 이야기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았지만, 새로우면서도 설레기도 했다. 그에게서 듣는 이야기는 곧 그의 세계였기에.

“거기서의 만남은, 연애를 전제하고 만나는 거예요. 만났다가 아니면 바로 끝내는 거고, 맞으면 바로 몸부터 맞추는 사람들도 있고요. 관계가 좀 가벼운 경우가 많거든요. 저도 조금 호감이다 싶으면 연애는 했지만, 정말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요.”

그가 찌푸린 콧잔등을 긁적였다. 그의 연애사는 좀 생소했고 의외였다. 그라면 가벼운 만남은 절대 이어 가지 않고 시간을 들여 상대를 오래 지켜보면서 깊은 관계를 나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얼굴에서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정 선생이 머쓱한 듯 웃으며 코끝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28년 살면서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 해 본 게 안 믿기시죠. 사실 저도 그래요. 알고 보면 동성애자가 아닌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어서……. 그런 제 눈앞에 김 쌤이 짜잔, 하고 나타나신 거죠.”

눈꼬리를 휜 채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반짝거려서 계속 쳐다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시선을 내려 바닥을 보았다. 정확히는, 흰 양말을 신고 꼼지락거리는 그의 발을.

“자랑은 아니지만요. 이런 제가 김 선생님을 좋아하게 됐다는 건 김 선생님이 그럴 만한 사람이라는 거잖아요.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래야 마땅한 사람.”

말을 마치고 그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런 말 대놓고 하는 거 좀 쑥스럽긴 하네요.”

어쩌면 쑥스러워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도, 그의 귀 끝이 벌게져 있었다.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게, 그 자신의 온전한 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작아지는 흰 양말과 같이, 내 발가락도 함께 움츠러들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내게는 그가 내 앞에 갑작스레 나타나 준 건데, 그는 나와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와 있으면 내가 정말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고 있었다.

시간이 늦었다. 저녁 하늘은 어느새 밤으로 향해 가며 무르익어 있었다.

“안 피곤해요?”

정 선생은 막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원래는 조금만 있다 갈 생각이었는데 서로의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막차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자고 가라는 말을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터미널까지 그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피곤하긴요. 어차피 방학 한정 백수인데. 선생님이 더 힘드시죠.”

“학교 다닐 때랑 일정이 비슷해서 피곤한 것도 없습니다. 여긴 케어할 애들이 없어서 오히려 더 편하죠.”

“애들 귀엽고 좋지만, 확실히 학교 벗어나니 조금 편하긴 하더라고요. 애들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들을 사람도 없는데 소곤대며 말하던 그가 숨죽여 웃었다.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듯 흩트려 놓고 차창을 조금 열었다. 바람은 흘러들어 오지 않았지만 풋풋함 밤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터미널에는 큰 가방을 등에 메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정 선생이 표를 끊고 나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를 데리고 비어 있는 의자에 가 앉았다.

“기분이 이상해요.”

“왜요.”

“아니, 이상하다기보단……. 조용한 터미널에 있으니까 어디 떠나는 것 같아서요.”

“그러게요. 아쉽네요.”

그가 손에 들고 있는 표를 보았다. 승차 시간까지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밤의 터미널은 고요했다. 문을 닫은 가게의 불 꺼진 간판들 사이로 유일하게 불을 켜고 있는 김밥집 안에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 터미널 밖 네온사인이 비쳐 왔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다니는 차들도 얼핏 보였다. 누군가가 떠나거나 혹은 돌아오는 곳은 공간의 의미 때문인지 특유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 선생은 왼손으로 표를 쥐고 오른손으로는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심심해 보이는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잡았다. 그의 시선이 돌아온다. 홀로 켜진 김밥집 안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두었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따뜻했다.

* * *

저녁을 먹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정 선생의 생일이 바로 내일이었다. 일단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세웠지만 뭘 사야 하는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안전벨트를 풀고 시트에 기대 무슨 선물을 사면 좋을지 생각했다. 여 선생이 추천해 줬던 옷이나 신발이 괜찮을 것 같았다. 일단 우리 사이에 더 무거운 선물은 적절치 않을 테니까. 다만 옷이나 신발은 보통 취향을 타는 물건들인지라 조금 꺼려지기도 했다. 정 선생은 옷을 잘 입는 편이어서 더 그렇기도 했고.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는 일단 뭐라도 보는 게 낫겠지 싶어서 차에서 내렸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맞물려서인지 사람들이 좀 많았다.

의류 매장을 눈으로 훑어보며 걷는데 신발 매장에 진열된 운동화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하늘색과 흰색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청량한 색상에, 여름과 어울리는 운동화였다. 정 선생의 생일과 그리고 그의 미소 짓는 얼굴과 잘 어울리는 신발이었다.

가만히 신발을 보고 있자니 직원이 내게로 다가와 물었다.

“마음에 드시면 한번 신어 보시겠어요?”

“선물할 건데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음……. 한 이 정도.”

어젯밤 침대 밑에서 꼼지락거리던 그의 발을 생각하며 손으로 대충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직원이 내 손을 보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270 정도가 될 것 같네요. 영수증 있으면 교환되시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이걸로 주시죠.”

포장을 기다리면서 드는 것은 설렘, 단 하나였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사는 일이 얼마 만인가 싶었다가, 선물을 받고 좋아할 정 선생을 생각하니 그의 반응을 보기도 전에 기뻐졌다.

연수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정진’이라고 쓰여 있는 활자만 봐도 숨이 절로 들이쉬어지는 걸 보니 너무 일찍 중증이 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네.”

-뭐하세요?

“연수원 들어가는 중입니다.”

-밖이셨어요?

“네.”

-아, 어디 갔다 오셨어요?

조수석에 놓인 쇼핑백을 흘긋 보며 입가를 매만졌다.

“네. 잠깐 뭐 좀 사러.”

-으음. 저녁은 드셨어요?

“안 먹었습니다.”

-저녁 안 드시고 나가셨어요? 저녁때 지난 거 아니에요?

“간단히 먹죠, 뭐. 근데 정 선생도 밖입니까?”

-아. 네. 약속이 있어서요. 잠깐 바람 쐬러 나와서 전화 건 거예요.

“술 마셨습니까?”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룸 미러에 비친 내 눈썹이 흘긋 올라가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목소리가 좀.”

-와. 깜짝 놀랐어요.

“많이 마셨어요?”

-아뇨, 소주 몇 잔 정도. 아, 기분 좋다.

“술 마셔서?”

-예에? 아뇨. 후진 쌤이랑 통화해서죠.

숨죽여 웃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리는 걸 보면 조금 취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원체 그런 말을 잘하는 남자라서 오히려 멋쩍어지는 건 나였다.

“많이 마시진 마요. 정 선생 술 잘 못 마시잖습니까.”

-제가요?

“맥주 몇 캔 마시고 잠든 거 기억 안 나요?”

-아……. 저 그때 진짜 아쉬웠던 거 아세요? 김 쌤이랑 술 마시는데, 더 이야기도 하고 쌤 가시는 것도 봤어야 했는데 일어나니까 해가 떠 있는 거예요. 헛소리하지 않았나, 침 흘리지는 않았나, 추태 부리지는 않았나. 별별 생각을 다 했다니까요.

“그때 일어나자마자 문자 보낸 거 아니었어요?”

-머리 한참 쥐어뜯다가 보냈어요. 물어보고 싶은데, 괜히 긁어 부스럼인 것 같아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수화기 너머 그를 두고 나지막한 웃음을 계속해서 흘렸다. 알면 알수록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나이에 안 맞게, 그러나 그와 어울리게 귀여워서 눈앞에 있었다면 표정 관리에 실패했을 거다.

어디서 이런 사람이 나타났지, 싶을 정도로. 왜 진작 만나지 못했지, 싶을 정도로.

-너무 웃으시는 거 아니에요?

“귀여워서.”

-……그것도요. 그때 문자 그렇게 보내셔서 제가 진짜……. 핸드폰 뚝 떨어뜨려서 액정이 나갈 뻔했다고요. 그렇게 막 사람 설레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묘하게 목소리가 늘어진다. 피식피식 웃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취했어요?”

-아니요.

“솔직히 말해 봐요. 몇 잔 마셨습니까?”

-어……. 다섯 잔?

“다섯 잔?”

-아니, 한 병이요…….

목소리에 다 드러나는데 거짓말이랍시고 하는 말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가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는데, 멀리서 정 선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르네요.”

-네…….

“가 봐요. 적당히 마시고.”

-네. 들어가세요. 저녁 드시고요.

“네.”

전화를 끊고 나니 정 선생이 보고 싶어졌다. 어제 얼굴을 봤고, 바로 전에 목소리를 들었는데 말이다. 이 정도면 중증이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차에서 내렸다.

* * *

드문드문 이어지던 문자가 끊기고 막 차에 올라타 출발을 하니 6시가 좀 넘었다. 연락을 하고 갈까 싶었지만 말하는 뉘앙스를 봐서는 오늘 약속이 있는 듯싶었고, 나 때문에 시간을 따로 빼는 상황이 되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연락 없이 출발을 했다.

동네에 도착하자 9시가 다 되었다. 깜깜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간만에 오는 것 같은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정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평소와 다르게 길었다. 이만 끊을까, 할 즈음 신호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김 선생님?

“네. 밖입니까?”

멀리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큰 아쉬움은 없었다.

-네. 오늘도 술 약속이 좀 있어서……. 많이는 안 마실 거예요.

“제 발 저리는 거예요?”

-아니……. 네…….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제는 방방 뛰더니 오늘은 비 맞은 강아지 같네.”

내 말에 그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불그스름한 가로등의 빛만이 비추는 고요한 차 안에서 그의 웃음을 가까이 듣고 있자니 꼭 그가 내 옆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김 선생님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그의 솔직함은 언제나 나를 무장 해제시킨다.

“술자리 언제 끝날 것 같습니까.”

-어, 잘은 모르겠어요. 근데 다들 내일 출근하고, 저도 이틀 연속 술자리라 조금 피곤해서 빨리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만날래요?”

-네? 지금요?

“사실 가는 중인데, 한두 시간 후면 도착할 것 같아서. 그때쯤이면 자리도 어느 정도 파할 것 같은데.”

-진짜요? 와, 정말?

“정말.”

절로 풀어지는 입가를 더듬으며 룸 미러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이런 내 얼굴은 적응되지 않는다.

-아, 그러면 다 오시면 전화 주세요. 바로 나갈게요.

“예. 재밌게 놀고 있어요.”

-네.

은근히 가라앉아 있었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같이 변하는 것을 직접 귀로 듣자 웃음이 나왔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오는 길에 들러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산 아이스크림 조각 케이크를 냉동실에 넣어 놓고 환기와 함께 청소를 했다. 흐트러진 머리를 조금 손보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뒤 조금 앉아 있다 보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정 선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선생님! 오셨어요?

“네. 어딥니까?”

-저 지금 막 나왔어요. 어디 계세요?

“집 앞입니다. 정 선생 집으로 갈게요. 아님 내 집으로 와도 되고.”

-어, 저 지금 초대해 주시는 거예요? 그럼 김 쌤 집 갈래요.

“그래요, 그럼. 여기서 멉니까? 데리러 갈게요.”

-아뇨, 거의 다 왔어요.

“응. 내려갈게요.”

-네.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왔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훅 끼쳐 왔다. 이틀 전에 봤는데도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 든다. 바람이 손안에 맴돌아서 허벅지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김 선생님!”

멀리서 정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나를 향해 오며 크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뛰듯이 걸어온 그가 내 앞에 섰다. 머리가 흐트러져 있어서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빨리 왔네요.”

“네, 별로 안 멀었거든요. 안 피곤하세요?”

“별로. 정 선생은. 술 많이 마셨어요?”

“어제보단 덜 마셨어요. 술 냄새 많이 나요?”

“괜찮습니다. 올라가죠.”

정 선생을 데리고 위로 올라갔다. 이번에 살고 있는 집에 상호 말고 데려온 사람은 정 선생이 처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 선생이 탄성을 내뱉었다. 별로 볼 것도 없는 집인데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선생님 집은 되게 깔끔하네요.”

“볼 게 없죠.”

“아뇨. 후진 쌤다워서 좋은데요?”

나다운 집이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칭찬이겠거니 생각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뭐 좀 마실래요?”

“어, 저 물 좀 주실래요?”

찬물을 컵에 따라 그에게 내밀고 그의 옆에 앉았다. 그가 물을 꿀꺽꿀꺽 마시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취기가 좀 날아가는 것 같다. 근데 어떻게 갑자기 오셨어요?”

“정 선생 생일이잖아요. 축하합니다.”

“어…….”

정 선생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빠진 표정에 웃음을 흘리며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소파 밑에 둔 쇼핑백을 그에게 건넸다.

“이건 선물.”

“저 진짜 생각도 못 했어요. 와…….”

“뜯어봐요.”

그가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내 열었다. 잘 감싸인 신발을 본 그가 나를 돌아본다.

“예뻐요. 이거 사이즈가……. 어떻게 아셨어요? 딱 맞아요.”

“그냥 눈대중으로.”

“눈썰미 좋으시네, 우리 김 쌤.”

그가 신발을 신어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리걸음을 했다.

“어때요? 괜찮아요?”

“예쁘네요.”

“……감사해요. 잘 신을게요. 근데 애인한테 신발 선물하면, 아, 아직 아니지.”

그가 머쓱하지만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흘리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더니 나를 흘긋 본다.

“제 생일 어떻게 아셨어요? 전 모르실 줄 알고…….”

“수학여행 때 병원 갔잖습니까. 그때 주민등록증 보고.”

“아아……. 그때 아셨구나. 전 후진 쌤 생일 알아요. 1월 17일.”

“어떻게 알았어요?”

“애들한테 물어봤어요. 근데 생일이 지나셔서, 아쉽더라고요.”

정말 아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으쓱이는 정 선생의 손을 잡았다. 그가 잡힌 손을 꿈틀하더니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를 따라 나도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여름날에 맞잡은 손은 지나치게 따뜻했지만 놓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꺼진 텔레비전을 보며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었다. 그는 내가 연수를 받는 동안의 이야기를 궁금해했다. 크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그동안 일어났던 사소한 일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재미없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신기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반응해 주었다.

그는 그의 이야기를 했다. 생일 때문에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였고, 그 안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유쾌했고 그가 하는 이야기도 유쾌했다.

“가족들이랑은.”

“아, 안 그래도 주말에 가기로 했어요. 선생님 오시니까 제가 가네요.”

“그러게요.”

“막 장거리 같고?”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의 몸이 흔들리면서 맞잡은 손이 흔들렸다. 손안에서 돌고 도는 온기가 전혀 텁텁하지 않았다. 여름 공기를 선선하게 가라앉히는 밤바람처럼 특유의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크게 의미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신변잡기 같은 소소한 이야기였고 그 사이사이에 우리의 진심과 생각과 가치관이 드러나곤 했다.

살짝 열어 둔 발코니 창 너머로 여름밤의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그가 무릎을 세워 그 위에 나와 잡은 손을 올려 두었다. 손을 빼서 내 손을 쫙 펴더니 손바닥을 손끝으로 갉작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그의 말간 눈과 나풀거리는 속눈썹, 종알거리는 입술에 시선을 두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고요 속에서 우리 둘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울리고,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밤은 새까맣게 물들어 갔고 우리는 시간이 가는 것도, 피곤이 몰려오는 것도 모른 채 이야기를 나눴다.

새까맣던 하늘에서 점차 빛의 기미가 보일 때, 그러니까 동이 틀 즈음 정 선생의 머리가 내 어깨로 똑 떨어졌다. 색색 내쉬는 숨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마음이 안정되는 소리였다.

동이 트고 있는데, 그의 온기와 그의 숨 덕분에 머리가 맑았다. 매번 머릿속에,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고 잠이 들곤 했는데 밝아지는 하늘이 어쩐지 벅차게만 느껴졌다.

정 선생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그의 목을 받쳐 소파에 눕혔다. 침실에서 얇은 이불을 가져와 그의 위에 덮어 주었다. 잠든 얼굴을 응시하다가 눈썹 아래로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는 모습이 꼭 아기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지금 가야 제시간에 도착해 강의를 들을 수 있다. 눈 한번 못 붙이겠지만 나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내 집인 걸 알고 정 선생이 당황하겠지.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 * *

연수가 모두 끝나고 정 선생이 주말에 본가에 다녀온 뒤 교과 협의를 하느라 학교에 다니는 틈틈이 우리는 만났다. 한 주가 지난 주말, 정 선생이 백일장에 참가하는 아이들을 인솔하게 되면서 내가 그곳에 따라가기로 했다.

백일장이 열리는 장소는 공설 운동장이었다. 버스가 잘 다니지 않고 언덕에 위치한 곳이라 내 차로 아이들을 데려다주기로 했다. 전교생 중 백일장에 참여하는 아이들이 고작 셋이라는 게 아쉬운 사실이었지만 교사 입장에서는 인솔하기 편하기도 했다.

“얘들아, 주제 나오면 선생님이랑은 못 만나니까 잘 쓰고 와.”

“쌤, 사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괜찮아. 시간 많으니까 충분히 생각하고 차근차근 써. 원래 하던 대로. 알겠지?”

“네!”

다정하게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상냥하게 말해 주는 정 선생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피해 버렸다. 아이들이 나와 정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백일장이 열리는 중심으로 향했다.

“자, 저희는 어디 가 있을까요. 옆에 공원 가실래요? 날씨도 좋던데.”

“그래요.”

편의점에서 캔 음료를 하나씩 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잔디밭이 펼쳐진 완만한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중간중간 앉을 수 있게 돌바닥이 있어 잔디 물이 들지 않을 수 있었다.

“하늘 진짜 맑네요. 오늘은 미세 먼지도 별로 없다고 하고. 날 잘 잡은 것 같아요.”

“그러게요. 요 며칠은 비가 와서 날씨가 별로였는데.”

“비가 먼지를 다 쓸어 갔나 봐요. 근데 오늘 쌤 화사하시네요?”

“내가?”

“네. 하늘색 셔츠. 예쁘신데요?”

정 선생은 간혹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칭찬에 관대하다.

“평소엔 좀 칙칙합니까?”

“평소엔 보통 무채색 위주로 입고 다니시잖아요. 뭐, 우리 김 쌤은 얼굴이 화사해서 상관없지만.”

뿌듯하게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말없이 캔을 따서 음료를 들이켰다. 다소 뜨거운 여름 햇볕과 달리 찬 음료가 입안을 시원하게 했다.

“정 선생은 소화하는 스펙트럼이 넓네요.”

“저는 편하고 밝은 옷을 좋아하는데, 일하면서는 그런 옷을 입을 수가 없어서요.”

말을 마친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을 뻗어 마른 풀들을 손가락으로 간질였다. 그러던 그의 몸이 풀썩 뒤로 넘어갔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그가 누운 채로 나를 보았다.

“햇빛 받고 좋네요. 별로 세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며 내 옆을 탁탁 두드렸다. 이럴 때 보면 참 아이 같다. 소년 같다. 풋풋하고 청량하다. 여름의 풀 내음 같고 반짝거리는 바닷물 같고 저들끼리 푸들푸들 부딪치는 선명한 녹색의 나뭇잎 같다.

그를 따라 누웠다. 잔디가 아니라 그에게서 물이 들 수 있다면 체면도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맘껏 뒹굴 수 있을 것 같았다. 풍덩 빠질 수만 있다면 깊이 빠져서 온몸을 흠뻑 적시고 싶다.

“어, 지금이랑 잘 어울리는 노래 있는데. 들으실래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가방에서 핸드폰과 이어폰을 꺼냈다. 이어폰을 꽂아 연결하더니 한쪽을 내게 내밀기에 그것을 받아 들고 귀에 꽂았다.

잔잔하고 은은한 전주 뒤로 묘한 울림을 남기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정 선생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푸른 잔디가 자라는 곳에서 정 선생이 내 쪽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이었다. 분홍빛 손톱이 예쁜, 다른 손가락보다 가늘고 작은 손가락. 손가락을 말아 쥐자 그가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의 손끝이 내 손바닥을 간질였다.

그가 입을 벙긋댔다. 바람이 잔디를 스쳐 지나가면서 왠지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여자가 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들어 보라며 귓가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잔디가 자라는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아마도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쳐 지나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언젠가 들어 보았던 클래식 음악이 간주로 흘러나왔다. 잔디가 자라는 것처럼 잔잔하고 느린 속도였다. 노래의 시작부터 중간까지 정 선생과 눈을 맞췄다. 갈색빛이 도는 눈이 느릿하게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기 전 그가 설핏 웃었다. 아주 작은 소리가 났지만 그마저도 풋풋했다.

우리는 푸른 언덕 위에 누워 있다. 고개를 돌려 보면 차가 드문드문 지나가는 것이 보일 것이다. 찬란한 빛이 우리를 삼킬 듯 비춰 주고, 밤이 되면 별이 홍수가 되어 숨이 막히도록 쏟아질 것이다.

그와 있기 때문에. 아니 혹은 그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노래가 끝났지만 여전히 노래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잔디가 자라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문득 손안에 든 새끼손가락이 너무나도 작고 감질나게 느껴져서 그의 손을 잡았다. 놓치지 않을 것처럼 꽉.

그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의 속눈썹에, 콧방울에, 입술에, 머리칼에 햇빛이 닿았다. 그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조금 더 음미할 필요가 있었다.

백일장이 끝나고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나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은 뒤 차를 마시는 정석적인 데이트를 마치기 위해 카페로 왔다. 오늘은 조금 부드러운 게 마시고 싶어 카페 라테를 시켰다. 정 선생은 녹차 프라페를 시키고 그 위에 휘핑크림을 듬뿍 얹었다. 씁쓸한 녹차와 달콤한 휘핑크림을 같이 먹으면 정말 맛있다면서 그는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뾰족하게 끝이 솟은 휘핑크림을 빨대의 스푼으로 퍼먹었다. 휘핑크림이 채 다 넘어가지 못하고 입술에 묻었다. 새빨간 혀가 빼꼼 나와 새하얀 휘핑크림을 핥아 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묘해져서 눈을 돌렸다.

“영화 별로셨어요?”

“그렇게 보여요?”

“음, 좋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서.”

영화는 편지로 남녀가 사랑을 이어 가는 로맨스 영화였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이나 우연히 편지를 주고받게 되면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큰 결함이 있다. 어렸을 적 크게 다쳐 얼굴에 흉측한 흉터가 생겼는데 남자는 자신의 외모에 큰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자가 자신을 보고 실망할까 두려워했다. 남자는 가면을 쓰고 여자의 주위를 맴돈다. 여자는 가면을 쓴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가 편지를 쓴 남자와 동일 인물인 것을 모른 채 두 남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영화의 절정에서, 여자는 편지를 쓴 남자와 가면을 쓴 남자가 동일 인물이란 것을 알게 된다. 여자는 남자의 가면을 벗기고, 남자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만 이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여자에게 보인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여자가 자신을 동정한다고 생각하여 여자에게서 도망친다. 영화의 마지막, 여자가 결국 남자를 찾아 둘이 만나는 것을 암시하며 끝난다.

“글쎄요. 내가 남자였다면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남은 휘핑크림과 음료를 휘젓던 정 선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저는 음, 제가 여자라면 남자를 만나서 예쁘다 해 줄 거예요. 처음부터 얼굴을 보고 사랑한 게 아니니까. 예쁘다, 멋있다 해 주면서 내 사랑을 믿도록 해 줄 것 같은데.”

“그 말을 온전히 신뢰하기까지 오래 걸릴 겁니다. 자격지심은 뿌리 깊으니 끊임없이 여자의 사랑을 의심하고 혼자 땅굴을 파고, 그러다 결국 여자까지 지치게 만들지 않을까 싶네요.”

“으음. 그래서 슬프셨구나.”

정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빨대를 쭉 빨았다. 아래로 향한 눈이 어쩐지 축 처진 듯하다. 녹색 액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났다. 그가 이어 고개를 번쩍 들 때였다.

“저…….”

아까 주문을 받았던 직원이 다가왔다. 정 선생과 나의 고개가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조각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들고 있었는데, 내 쪽에 접시를 올려놓았다.

“안 시켰는데요.”

“그게 아니라, 서비스예요. 맛있게 드세요!”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직원이 자리를 떴다.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위에 싱싱해 보이는 딸기가 하나 얹어져 있었다. 접시 밑에는 쪽지가 있었다. 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 굳이 펴진 않았다.

정 선생을 흘긋 보았다. 케이크에 시선을 둔 채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먹을래요? 난 단거 잘 안 먹어서.”

정 선생의 시선이 케이크에서 내게로 올라왔다. 눈이 두 번 깜빡. 그러더니 입술이 비죽 나온다.

“……안 먹어요.”

비죽 나온 입술이 빨대 끝으로 향한다. 그가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노란색 투명한 빨대 안으로 녹색 음료가 주르륵 올라간다.

아.

사랑스럽다.

해가 졌다. 매미가 맴맴 울었지만 시끄럽지는 않았다. 그저 여름밤의 한 풍경으로 녹아들 뿐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녹색의 푸릇한 잎들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하천을 끼고 있는 산책로는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나 지금은 잎이 무성했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시원하게 귓가를 울렸다. 간간이 늦게까지 운동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람이 없었다.

“제가 여자라면, 지치지 않을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눈썹을 치켜세웠다가, 이내 그의 말이 조금 전 카페에서 했던 영화 이야기의 연장선이란 걸 깨닫고 정 선생을 보았다.

“정말 좋아하면요. 스스로에게 자신 없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울 것 같거든요. 물론 지칠 수야 있겠지만, 남자가 노력을 아예 안 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지칠 때야 있겠지만, 그런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정 선생은 남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나였다. 그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시원하지 않은 그늘 같은 나의 모습마저 사랑하겠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없었다.

미래는 누구나 장담할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은 알량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내 앞에 선 그가, 제 마음을 전하려고 노력하는 그가 사랑스러워서,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흘러왔다. 지금 이 시간까지 놀다 온 것인지 공부를 하다 온 것인지 여고생 두 명이 핸드폰으로 노래를 틀어 놓은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노래가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의 배경 음악으로 깔렸다.

그의 손과 내 손이 스침과 동시에 우리는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멈춰 섰다.

너에게 고백을 하고 싶다고, 참으려고 해 봤지만 참을 수 없었다고 노래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가로등 불빛 아래라 환하게 빛나는 것인지,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정 선생의 얼굴이 반짝였다. 불빛마저 그의 곁에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일까.

반짝이는 그의 얼굴에 키스를 퍼붓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이 두렵기도 했다. 내가 그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 우리가 사랑해도 되는 걸까. 또다시 사랑을 시작해도 되는 걸까.

내 사랑의 미래는 정해져 있음을 안다. 내 사랑은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서 실패 쪽으로 발을 돌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장담할 수 있는 미래 앞에서도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알량하여 한낱 바람에도 흩날리고 만다.

기어코 나는 이 사랑 앞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김 선생님.”

청량한 목소리는 갈증마저 태워 버릴 것 같다. 그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본다. 노랫말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도 없다. 그와 나뿐인 곳에서 그는 마저 입을 열었다.

“우리 연애할까요?”

여름밤의 습기가 피부에 철썩 달라붙었다. 일정하면서도 은은한 매미 소리와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알 수 없는 소음들. 여름밤 특유의 공기와 풍경이 이 공간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이날 이 순간을, 어쩌면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만 같다고.

“키스, 해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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