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명암의 격차 (7/15)

7. 명암의 격차

동그랗게 뜬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정 선생의 얼굴에서 표정이란 게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굳은 시선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그가 미약하게 숨을 내쉬었고, 내게 잡힌 팔이 움찔 떨렸다.

바람조차 불지 않아 고요했다. 재잘대는 아이들이 모두 하교해 버린 학교 안은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햇볕이 너무 쨍쨍했다. 살갗이 따끔했다. 햇빛 아래 갈색 빛깔로 투명해진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의 입술이 열리는 것이 아주 느릿한 움직임으로 보였다.

“그건 왜 물으세요?”

목소리에 가시가 뾰족 돋은 것 같았다. 나를 공격하려 한다기보다는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불안하게 떨리는 숨이 그것을 증명했다.

“제가 여전히 김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게 불쾌해서 물으시는 거라면…….”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시선이 내 눈과 맞닿았다.

“전 아니라고 말할래요.”

여지를 남기는 대답에 목이 멨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사이에서 두려움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그 해일에 잠기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그러나 잠겨 죽어도 좋았다. 내 눈 앞에 그가 있으니까.

“내가, 정 선생을 마음에 둔 것 같아서 그러는 거라면요.”

가만히 내 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그를 눈앞에 두고, 그의 팔을 잡은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팔을 놓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뜨뜻미지근한 공기가 손안에 굴러왔다가 도로 흩어졌다.

“네?”

한마디의 되물음마저 사랑스러워서, 긴장이 탁 풀렸다.

“내가 정 선생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요.”

“……네?”

“당장 연애를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 선생과 내가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유예 기간을 그의 손에 쥐여 주기로 했다. 그 기간에 그는 나를 버릴지 말지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만약 전자의 선택이 그 유예 기간에 찾아온다면 내게 들이칠 상처가 덜할지도 모른다.

“그…… 잠시만요. 선생님이 저를 좋아하신다고요? 어, 언제부터요?”

“글쎄요.”

망연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저는, 저는 뭐든 좋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안 괜찮을 것도 없죠.”

정 선생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 그러면……. 뭐하죠?”

고개를 번쩍 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하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두어 번 쓸어내리고 말했다.

“집에 가죠.”

“네.”

그가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조수석에 탄 그가 허겁지겁 안전벨트를 맸다.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것만 같았다. 어떤 충만한 감정으로 벅차오른 가슴에 모든 것이 안정된 기분을 느꼈다.

시동을 걸고 나서 라디오를 켰다. 일단 뭐라도 들어야 안정된 기분과는 반대로 드럼 치듯 뛰노는 심장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옆을 흘긋 보자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정 선생도 말이 없었다.

원래 마음을 고백하고 난 뒤가 이렇게 떨리는 순간이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웅웅 떠드는 소리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많은 소리 중에서도 귀에 들어오는 건 옆에 앉은 정 선생의 작은 숨소리뿐이었다.

“밥 먹기는 좀 이른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요.”

말을 걸자 어깨가 움칠 튀는 게 보였다. 뭘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다. 입술 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희 집 가실래요? 제가 대접할게요. 식사 준비하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은데.”

“안 귀찮겠어요?”

“전혀요. 그냥 저 먹는 거에 추가하는 건데요. 별것 없어서 오히려……. 그냥 밖에서 먹을까요?”

“난 괜찮습니다. 저번에 계란말이도 맛있었고.”

내 말에 그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바람이 흘러들어 와 마음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정 선생의 집 앞에 도착해 차를 세웠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지만, 마치 처음 와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친구 집에 처음 놀러 가 보는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관계의 변화란 이토록 사소한 것부터 사람을 달라지게 했다.

“편하게 계세요. 금방 할게요.”

그가 부엌으로 들어가 밥통에 쌀을 넣고 씻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서서 바라보다가 소파에 앉았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로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물이 흐르는 소리와 쌀알이 흔들리는 소리, 도마 위를 칼날이 통통 두드리는 소리, 뭔가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

아주 간만에 들어 보는 아늑한 소리에 온탕에 들어간 것처럼 몸이 녹아내렸다. 뒤돌아선 그의 귓가가 옅게 붉은빛을 띠었다. 아까부터 나를 흘금흘금 돌아보더니 정작 그만 보란 말은 못 하겠는 모양이다.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부엌에서 피어오르는 온기가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어서.

“다 됐어요. 오세요.”

식탁 위에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몇 가지의 소박한 반찬이 놓였다.

“정 선생은 솜씨가 좋네요.”

“아, 반찬은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집에서 보내 준 거.”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 떠서 먹었다. 생각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내 반응을 기다리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맛있네요.”

“다행이다.”

“다음엔 내가 대접하겠습니다.”

“와, 정말요? 요리해 주시는 거예요?”

“네.”

그가 계란말이를 베어 물다 말고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미묘한 웃음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김 쌤 요리 못하실 것 같은데…….”

“그렇게 보여요?”

“학기 초에 환경 미화 있었잖아요. 선생님 반 애들 원성이 자자하던데요.”

“아. 그거.”

“손재주가 없으신가 봐요.”

남아서 게시판을 꾸미려는 아이들이 없기에 내가 대충 만들어 이것저것 붙였더니 다음 날 애들이 와서 전부 떼어 버리고는 모두 남아 함께 게시판을 꾸몄던 일이다. 그럴 거면 진작 남았으면 좋지 않았냐고 했다가 많은 원성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요리는 합니다. 자취 경력이 있으니까요.”

“저 기대해도 돼요?”

“……기대까진 들고 오지 말고.”

아하하! 그가 환하게 웃었다. 가늘게 접힌 눈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웃음인데도 어쩐지 손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아, 맞다. 본가엔 언제 가세요?”

아. 그런 거짓말을 했었지.

“안 갑니다.”

“네?”

“안 가기로 했어요.”

“어, 혹시 저 때문에요?”

“정 선생 때문이 맞는데, 내 의지니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뺨을 문질렀다.

“그럼 연수는 어디서 받으세요?”

“대전에서요.”

“아, 많이는 안 머네요. 그러면, 중간에 잠깐 만날 수도 있겠죠?”

“노력해 보죠.”

그가 또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그를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가 이렇게 웃는 모습을 조금 더 일찍 보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뭐라고 그가 이렇게 웃어 주나 싶어서.

“정 선생은 방학 중에 안 내려갑니까?”

“한 번은 가야겠죠? 개학 전에 한번 가 보려고요. 기자 생활 할 때는 바빴으니 이해했는데 교사 되고 나서도 연락 없냐고 성화세요.”

콧잔등을 찡그리며 하는 말에는 부모님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 있었다. 보기만 해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타입이다. 그렇게 받아 온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평소에 연락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잘할 것처럼 보이는데.”

“아무래도 일 때문에 정신없이 살다 보니까요. 해야지, 해야지 하다가도 일주일이 지나 있고.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의 표정은 장난스럽기 그지없었다. 별것 아닌 행동이 귀여워 보여서 큰일이었다.

“김 쌤은요? 은근히 효자이실 것 같은데.”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흘리듯 말을 넘겼다. 흔하게 나오는 소재인 가정사는 내게는 무거운 주제였다.

“으흠. 다 드셨어요? 치울까요?”

그가 식탁 위를 치우는 것을 돕고 나서 “커피 드실 거죠?” 하는 말에 소파에 앉았다. 커피 향이 곧바로 거실을 채웠다. 그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한 잔을 내게 내밀었다.

“제가 믹스를 좋아해서.”

“믹스 잘 먹습니다.”

“단거 안 좋아하시지 않아요?”

“즐기진 않는데 커피는 괜찮아요.”

“전 단거 좋아해요.”

어깨를 으쓱이며 잔을 두 손에 쥐고 호호 불고 나서 한 모금 마신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커피가 조금 식기를 기다렸다가 마셨다.

커피를 반쯤 비웠을 때 문득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돌아보자 그가 나를 보며 머쓱한 기색이 서린 미소를 보였다.

“그냥 안 믿겨서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다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도 긴가민가했다. 내가 과연 잘한 걸까. 지금이라도 뒤로 내빼야 하는 게 아닐까. 그냥, 정 선생을 잡지 않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해리 포터’ 보셨어요?”

“안 봤어요.”

“알로호모라. 무슨 뜻인지도 모르시겠네요?”

“주문 아닙니까?”

그가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커피를 들이켰다. 그가 마시는 대로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잠긴 문을 열어 주는 주문이에요.”

“그래요?”

“사실 제 마음속 주문이기도 했어요. 김 선생님 마음의 문을 열고 싶다는.”

그가 어깨를 움츠리고선 미소 지은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귀 끝이 발긋했다. 그가 커피 잔에 입술을 묻었다. 나 또한 그를 따라 커피 잔에 입술을 댔다. 손끝이 저릿했다.

도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게 아닌가. 술렁이는 숨을 커피 잔 안에 동그랗게 토해 냈다.

* * *

이럴 거면 연수를 신청하지 않았을 텐데. 정 선생을 피할 구실을 만들어 보겠다고 신청한 연수가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다.

고작 5일인 데다, 정 선생이 한번 나를 보러 오기로 했지만 말이다. 아직 무슨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아쉽게 느껴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상승 곡선을 타다가 하강 곡선을 탔다. 정 선생과 서로 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 마음을 술렁이게 하면서도 과연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진 쌤.

그러나 그렇게 줏대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생각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사르르 녹아내리고 말았다.

“네.”

-출발하셨어요?

“네. 거의 다 와 갑니다.”

-아침은 드셨고요?

“아니요.”

-아, 배고프시겠다. 저녁에 언제쯤 짬이 나실까요.

“6시 이후로는 프리할 거예요.”

-으흠. 안 피곤하시면 전화할게요.

“네.”

이렇게 어딘가에 갈 때 내내 통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가슴속에서 봄바람을 만들어 냈다. 마음이 살랑이니 절로 콧노래가 나올 것 같아 운전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선생님.

“네.”

-전화 목소리랑 실제 목소리랑 좀 다른 거 아세요?

“어떻게 다른데요.”

연수원 주차장에 다다랐다. 주변에 차가 없는 곳에 차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푼 뒤 시트에 몸을 묻었다. 창문 너머로 찬란한 햇빛이 땅을 천천히 밝히고 있는 풍경이 눈에 담겼다. 주위가 조용했다.

-음, 전화가 더 낮으신 것 같아요. 더 울림이 있다고 해야 하나.

“정 선생도 전화 목소리가 조금 달라요.”

-어떻게요?

“음……. 정 선생도 조금 낮아요. 성숙해 보입니다.”

-평소엔 안 성숙하게 들렸나요?

“어린 목소리긴 했죠.”

-정말요?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사실 어리다기보다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늘 밝은 느낌이긴 했다. 정 선생이 엷은 웃음을 흘렸다. 귀가 간질간질했다.

“정 선생은 오늘 뭐해요.”

-전 오늘 집돌이예요. 아, 자전거 사고 싶어서 알아보는 중이에요. 김 쌤 자전거 탈 줄 아세요?

“알죠.”

-나중에 같이 타면 좋겠다. 저 자전거 사면, 다음 학기에 학교 갈 때 자전거 타고 가도 되지 않을까요?

“힘들지 않겠습니까? 꽤 걸릴 텐데.”

-운동 겸 괜찮을 것 같아서요.

내 차 타요, 라는 말이 목구멍 밖을 튀어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저번 카풀 때처럼 혹시 우리 사이가 틀어진다면 또 애매한 상황이 벌어질까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유예 기간이다. 유예 기간부터 들떠서 미리 곤란한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래요. 사는 김에 헬멧도 사고.”

-당연하죠.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인데요.

“잘했습니다.”

그가 칭찬받은 아이처럼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아침이 환하게 밝았다. 단잠으로 끌어당기는 그 자연의 소리와 같은 날이었다.

“아침은 먹었어요?”

-쌀이 떨어져서 이따 장 보고 아점 먹으려고요.

“그래요. 시간이…….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잘하시고, 밥 맛있게 드시고, 잘 주무시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정 선생도요.”

-네. 들어가세요.

연장자인 내 전화를 그가 먼저 끊을 리 없었다. 그의 작은 숨소리를 귀 기울여 듣다가 전화를 끊었다. 남은 5일이 너무 길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 좋게 연수를 마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혹은 아르바이트를 할 때 휴게실에서 잠깐, 취직을 한 뒤로는 지역을 전전하면서 잠자리가 자주 바뀌었기에 잠자리를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낯선 잠자리가 좋냐 하면 그건 역시 아니었다.

좁긴 했지만 방은 1인실이었다. 시설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침대 위에 털썩 앉아 핸드폰을 보았다.

연락이 올 데라곤 정 선생이나 친구 놈들밖에 없었다. 가끔 반 아이들한테 문자가 오긴 했지만 방학 때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개학할 때가 다가오면 내일이 개학이 맞느냐는 문자들이 올 것이다.

내가 보낸 문자를 마지막으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 혹시 내가 알림을 확인하지 못했나 싶어 문자함에 들어가 봤지만 역시 온 답장은 없었다.

첫사랑을 앓았을 때는, 그녀에게서 문자가 오지 않아도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먼저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한 번이라도 더 하려고 했다. 연이은 사랑을 앓으면서 알게 된 것은, 사랑이 연락의 횟수에 비례하지는 않지만 감정의 축이 더 기울어진 쪽이 매달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연락이 좀 없거나 늦어져도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연이은 사랑의 실패 속에서 나는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정 선생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이 생기고, 그 연락에 언젠가 목맬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턱 막혀 왔다.

언젠가부터 사랑을 하면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나는 또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그런 내가 우습기도 했다. 아무래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그러나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이 사랑마저 실패하게 되면 모든 것이 소멸할 거다. 또 다른 삶과 사랑을 도모하기엔 너무나도 지쳐 버렸으니까.

[헉 깜빡 잠들었어요. 밤에 잠 안 올 것 같아요....... ㅠㅠ 쌤 끝나셨어요?]

귀신같이 손안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문자를 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참 티 없이 맑은 사람이다. 그와 무언가를 해 보겠다고 나선 내가 오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격차가 느껴진다. 그와 나의 명암의 격차.

그럼에도 그가 좋다. 깨닫지 말았어야 했는데,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는 이미 깊이 발을 담근 후였다.

* * *

정해진 식사 시간을 거를 이유는 없었다. 뷔페식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 놓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양치를 한 뒤 세미나실로 향했다.

빈자리에 앉자 옆에 앉아 있던 선생이 고개를 꾸벅였다. 마주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데 옆에서 “어?” 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보았다.

“김 선생님!”

“여 선생님.”

전에 있던, 그러니까 지연이와 같이 다녔던 학교의 수학 교사인 여정연 선생이었다. 결혼 준비를 앞두고 청첩장을 돌렸고, 당연히 나와 지연이의 소식을 알고 있을 사람이었다. 입이 썼다. 이 업계는 은근히 좁아서 아는 사람과 꽤 자주 마주치곤 했다.

“선생님도 여기 오셨구나. 오랜만이에요.”

“예,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네. 김 선생님도……. 어디서 근무하세요?”

그녀의 눈에서 짧게 스쳐 지나간 감정─연민인지 난감함인지 모를─의 빛을 모른 체하며 입을 열었다.

“의천시에서 근무합니다.”

“아, 저는 아직도 혜왕시에서 근무해요. 역시 같은 도라도 거리가 있네요.”

아마 여 선생은 자세한 속사정은 모를 것이다. 지연이와 내가 결혼을 약속했고, 결혼식을 앞두고 지연이가 죽었다는 것 정도만 알겠지. 그러나 모를 일이다. 이 세계는 워낙 나도 모르게 소문이 빨리 퍼져서 또 무슨 소문이 돌고 있을지는.

다행히 강의자가 들어와서 여 선생과 대화를 더 이어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머릿속 한구석에 과거의 조각이 삐죽 나와 나를 괴롭혔다.

이렇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의 한 조각을 마주할 때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마치 끝났으나 끝나지 않는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담배를 들고 나왔다. 흡연실이 있었으나 교사들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시도할 것 같아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기대 라이터를 켜다가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고 라이터를 껐다.

담배를 끊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정 선생은 비흡연자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니코틴이 절실히 그리웠다. 머릿속을 하얀 연기가 둥그렇게 채우는 것만 같은 그 몽롱한 감각이 그리웠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라이터를 켜려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의 양감을 느끼고 라이터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곤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자위하면서.

-네, 선생님.

“뭐하고 있었습니까.”

-저 오랜만에 대청소하고 늘어져 있어요. 날씨가 좋네요.

“밥은 먹었어요?”

-아직이요. 청소하니까 귀찮아서 시켜 먹을까 생각 중이에요. 쌤은요?

“방금 먹고 나왔어요.”

-거기 밥 맛있어요?

“그냥 그렇습니다. 학교 급식 정도예요.”

-우와, 그럼 맛있는 건데. 강의는요. 듣기 괜찮으세요?

“네. 조금 졸리긴 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그의 웃는 소리를 들으니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몽롱함을 원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상념을 지워 주니까.

-그러게요. 목소리가 좀 가라앉으신 것 같은데. 많이 졸리셨나 봐요.

생각지 못한 지적에 입가를 매만졌다. 내 기분이 그대로 목소리에 드러났을 줄은, 그리고 그가 내 기분을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기분이 묘했다. 수많은 맛의 사탕 중에서 내가 가장 원하는 맛을 골라 그가 내게 쥐여 준 것처럼.

“저녁엔 뭐해요.”

-약속이 있어요. 친구랑 오랜만에 술 한잔하려고요.

“아, 그래요. 즐겁게 놀다 와요.”

-넵. 쌤은요? 저녁에.

“별다른 일정 없습니다.”

-아하. 네. 쌤 보니까 저도 열심히 해야겠어요. 시켜 먹지 말고 해 먹어야지.

“네. 밥 먹어요.”

-넵. 파이팅.

전화가 끊기고 나자 공허함이 한밤의 외로움처럼 밀려왔다. 아. 이런 건 좋지 않다.

문득 손가락에 걸려 있는 담배를 발견하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딱 한 대만 피우자. 그렇게 생각하고선 다시 입에 물었다.

하얗게, 물결처럼 피어오르는 연기가 꼭 등대라도 되는 양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피우지 말걸, 이었다. 그것 하나 참지 못해 담배를 입에 물고 끝내는 즐기지도 못하고 옅은 죄책감마저 느낀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세미나실 한쪽 벽에 걸린 달력을 응시했다. 7월 21일 화요일. 7월. 21일.

무언가 잊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을 갉작이는 무언가에 인상을 찌푸리고 계속해서 달력을 응시했다.

아. 7월. 여름. 정 선생의 생일. 언제였더라? 880723. 23일, 목요일.

정 선생의 생일이 이틀밖에 남지 않음에 당혹을 느꼈다. 목요일이긴 하지만 중간에 한 번쯤은 만나기로 했으니 내가 가면 될 것이다.

정 선생은 왜 내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나였어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자신의 생일을 먼저 이야기하는 게 멋쩍게 여겨지기도 하고 일단은 ‘애인’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선물은 뭐가 좋을까. 친구들의 생일이면 다 같이 돈을 모아 선물을 사 주고 밥과 술을 마시며 끝내는 게 보통이었다. 친구가 아닌 남자에게 선물을 해 본 기억은 없다. 아, 아버지 생신 때 선물을 하곤 했지만 일단 그는 아버지가 아니니까.

시작도 전에 장애물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그 나이 때 남자들이 뭘 좋아하지. 상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또 남자에게 선물이니 뭐니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강의를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선물에 대해 생각했다. 뭘 주면 그가 좋아할까 생각했지만 적절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틀 후에 그를 볼 거라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담배를 피우는 대신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카페인에 예민한 편이라 잠이 오지 않을 걸 알지만, 자판기 커피 한 컵 정도면 괜찮을 거다. 딱히 커피 때문이 아니어도 원래 잠은 잘 안 오는 편이었으니까.

“커피 드시게요?”

“아, 예.”

여 선생이 웃음 띤 얼굴로 내 옆에 섰다. 그녀도 커피를 마시려는 모양이었다. 커피가 나오자마자 종이컵을 빼내고 묵례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여름밤의 후덥지근한 특유의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단맛이 혀에 감돌았다. 단맛을 좋아한다던 그가 떠올랐다.

“같이 마셔도 괜찮으시죠?”

어느새 커피를 뽑아 온 여 선생이 살갑게 웃으며 내 옆에 섰다.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여름이네요. 7월 초라 아직은 괜찮지만, 좀만 지나면 열대야가 금방 오겠어요.”

“네.”

“아, 그러고 보니 여쭤볼 게 있었는데 혹시 남주 아세요?”

“남주……. 한남주요?”

“아시는구나! 남주 선생님네 반이었죠?”

“네. 맞습니다.”

“이번에 발령받은 학교에서 남주 담임을 맡았거든요. 그런데 애가 워낙 말이 없어서……. 학교생활에도 큰 의욕이 없어 보이고요.”

한남주. 가무잡잡한 얼굴에 눈이 유난히 컸던 아이가 떠올랐다. 그 눈을 굴리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면서 제 이야기를 했던 어느 날도 함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집안 형편이 좀 안 좋아서, 공부보다는 취직에 일찍 뜻을 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존심이 세서 먼저 그런 이야길 꺼내진 않을 거예요. 고등학교 입학하면 기술을 배울 거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갈색 빛깔 커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그녀를 흘긋 보았다. 여 선생이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보고 있었다. 미소 지은 입술이 열렸다.

“몇 년 전인데,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예, 뭐…….”

그때는 내 옆에 지연이가 있었고, 그녀가 내 옆에서 웃고 있었고, 그래서 내 삶이 충만하다고 느꼈으며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에 아이들 또한 사랑할 수 있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남주를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아닙니다.”

정적이 흘렀다. 여자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편도 아니고 먼저 살갑게 이것저것 말을 거는 성격도 아니다 보니 자연스레 나온 결과였다.

잠시 커피를 들이켜다가 문득 여 선생이 정 선생과 또래라는 게 떠올랐다.

“혹시…….”

“네?”

“여 선생 또래인데, 남자한테 줄 선물…… 추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음, 무슨 선물인데요? 생일 선물?”

“예.”

“넥타이는 어떠세요? 커프스나 넥타이핀도 괜찮죠, 무난하고. 지갑이나 시계는 무거운 것 같구…….”

안타깝게도 정 선생은 슈트를 즐겨 입지 않았다. 여 선생이 미간을 좁히며 종이컵의 가장자리를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 신발이나 옷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취향 안 타는 걸루다가.”

“음, 괜찮네요.”

“근데 선물 받으시는 분이 누군데 이렇게 고민을 하세요?”

“그냥……. 아는 동생입니다.”

“아아.”

그녀가 선선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컵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뜨끈했던 커피가 어느덧 미지근해져 있었다.

“앞으로 사흘 남았네요. 그동안 저희 열심히 듣고 가요.”

“네. 여 선생님도요.”

“그래도……. 김 쌤 얼굴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힘내시구요. 다음에 또 뵐 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예.”

“쉬세요, 그럼. 내일 봬요.”

여 선생이 묵례를 하고 돌아섰다. 나 또한 묵례로 맞받고 나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안에 있던 종이컵이 구겨졌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는 건 분명 좋은 말이 분명한데, 왜 이리 속이 울렁거리는지 모르겠다. 괜찮아 보이면 됐지. 그런데 내가 진짜 괜찮나?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남들이 보는 내 인생은 내 얼굴이나 행색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법이라, 모두들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 밝고 괜찮은 척 살아간다. 그러니까 별것 아니다. 당연한 일이고, 모두가 겪는 일이고…….

구겨진 종이컵이 초라한 내 모습 같아서 입이 썼다. 타인의 눈에 괜찮아 보이는 내가 우스웠다. 지연이와의 일을 알고 있을 사람에게서 듣는 말이라 더욱.

“김 선생님!”

종이컵의 주름진 가장자리에서 비켜 나가 땅거미가 진 바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불쑥 앞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 선생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미간을 좁히자 그의 미소가 사그라든다.

“어, 연락하고 올 걸 그랬나요?”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는 정 선생의 것이 맞았다. 그러자 갑자기 숨통이 탁, 트이는 듯하면서도 문득 서글퍼졌다.

“아뇨. 어떻게, 여기, 어떻게 왔어요. 약속 있다고 했잖습니까.”

“거짓말이었어요. 김 쌤 깜짝 놀라게 하려고.”

멋쩍은 듯하지만 해맑은 웃음을 흘리는 정 선생을 보자 덜컥 안고 싶은 충동이 들어 주먹을 쥐었다.

“오느라 피곤했겠네요.”

“아뇨. 사실 이 근처에 아는 선배가 있어서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그래서 조금 늦었어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내 방 올라가겠습니까?”

“좋아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가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뭡니까?” 하자 “초콜릿이요.” 하며 웃는다. 종이 가방을 받아 들고 열어 보자 잘 포장된 초콜릿이 있었다. 수제 초콜릿 가게에서 사 온 듯했다.

“당분이 들어가야 머리가 좀 돌아가잖아요. 별로 안 단 걸로 달라고 했어요. 하나씩 드세요.”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앉아요, 하며 침대를 가리키자 그가 눈을 굴리며 와서 침대에 앉았다. 나는 화장대 앞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아 화장대에 등을 기댔다.

“언제 올라가요.”

“음, 두세 시간 정도 여유 있어요.”

어깨를 으쓱이면서 눈을 깜빡거리는 그에게서 어떤 머뭇거림이 묻어났다. 종이 가방을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그를 보았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풀었다 한다.

“뭐 할 말 있어요?”

“네? 아아……. 아뇨, 그냥. 우리 김 쌤 인기 많으시구나 해서.”

우리 김 쌤, 하는 말에 뒷말을 제대로 못 들었다. “예?” 하고 되묻자 그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이마를 긁적였다.

“연수 받으러 오셔서 대시도 받으시고…….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요.”

뜬금없는 말에 이마를 찌푸리고 그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이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 선생 말하는 겁니까?”

“아는 사이세요?”

“전에 근무했던 학교 선생이에요. 오랜만에 만났죠.”

“아아. 그러시구나.”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 선생을 보니 마음 한편에 매달려 있던 고드름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녹아내린 물이 전부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 그러니까,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님.”

“예.”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물끄러미 응시해 오는 다갈색 눈에 걱정이 엿보였다. 그 눈동자의 눈부처가 되어 영원히 갇히고만 싶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

그가 손가락을 뻗어 내 미간을 문질렀다. 그 느릿한 손길을 눈을 감고 차분히 음미했다.

그의 손가락에 새겨진 지문이 내 이마에 옮겨 오길 바랐다. 바람만은 아닌 것이, 그의 손가락은 화인을 남길 것만 같이 따뜻했다. 뜨거우리만치.

문득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그에게 말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내 세계에 대해 털어놓는다 해도 내게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치유를 받는 것도 아니지만.

여 선생은 내가 참 괜찮아 보인다고 했다. 힘을 내라고.

그런데 정 선생은 내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말을 더 꺼내는 대신 내 미간을 하염없이 문질렀다. 흥건하게 녹아내린 물이 발밑으로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여 선생과 근무했던 학교는…… 전에 교제했던 사람을 만났던 곳이에요.”

미간을 문지르던 손길이 멎었다. 눈꺼풀을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오롯이 박힌 눈부처를 마주했다.

“4년간 연애했고,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였습니다.”

슬픔은 나누면 배가 된다. 슬픔을 가진 사람과 그 슬픔을 나눠 받게 된 사람 둘만 남을 뿐이다.

“작년 말에 죽었어요. 사고로.”

내 이기심이 그를 갉아먹을까 두렵다. 그는 영원히 밝은 사람으로 남아 주었으면 하는데, 내 이면은 바람에 날리는 치맛자락처럼 자꾸 제 모습을 내보이려 한다.

“그 사람은 전 애인과 동승 중이었어요. 죽기 전까지 만남을 이어 오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눈부처가 흔들렸다. 꼭 출렁이는 물결에 비치는 그림자 같았다.

울까.

그러나 그는 물끄러미 웃었다.

그가 내 미간에서 손을 내린 뒤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끌어당겼다. 힘이라곤 없는 손길이었지만 나는 모른 체 그에게로 끌려갔다. 그가 나를 품에 안고선 내 귓가에 속삭였다.

“김 선생님 잘못 아닌 거 아시죠?”

그렇습니까. 난 내 불행이 전부 내 잘못 같은데.

“좋아해요, 선생님. 저는 후진 쌤이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요.”

당신은 다릅니까?

그러니까 나를 버리지 않을 거냐고.

차마 꺼내지 못하는 물음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맴맴, 원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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