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에필로그 (14/25)

14 에필로그

먼 길을 찾아온 귀족을 위한 피로연이 준비되었고, 왕국의 사절단을 마지막으로 램파드는 애쉬를 만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혼자만 갈 생각이었는데 커틀러도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따라나섰다. 딱히 제지할 이유가 없기에 램파드는 그와 함께 애쉬가 있다는 좁은 황후 대기실을 찾아갔다.

애쉬는 좁은 방 안 의자에 앉아 있고, 차가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중이었다. 그가 쥔 물수건에는 붉은 핏자국이 엉켰다.

“너 얼굴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애쉬가 커틀러를 흘끗 바라보았다. 고자질을 할 수 없어 변명을 시도했다.

“넘어졌어. 신경 쓰지 마.”

눈가는 푸른 멍이 생겼고, 볼은 잔뜩 부어올랐다. 찢어진 입가의 모양을 보건대, 누군가에게 여러 대 얻어맞은 흔적이 분명했다. 램파드가 인상을 쓰며 다그치려 하자, 커틀러가 먼저 끼어들었다.

“폐하를 두고 애쉬와 제가 싸웠습니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

“애쉬는 입으로만 덤벼들었고, 저는… 홧김에 주먹을 사용했습니다. 얼굴 말고도 배와 가슴까지 쳤으니까 황의에게 한번 보이죠.”

뭐든 램파드에게 숨기고,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던 커틀러가 드물게 사실을 술술 불어 놓았다. 비록 애쉬를 위해 하는 말은 내키지 않아 보이지만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애쉬는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이제 램파드와 평생을 함께할 그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뭐든 제 선에서 해결한다며 숨기던 아까보단 나았다.

이제 정말 곁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 듯해 애쉬는 홀가분하게 남부 지방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며칠 후, 램파드와 커틀러가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날 애쉬 또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라이는 먼저 마차에 올라탔고, 램파드는 애쉬를 배웅했다. 이미 마음은 정했지만 애쉬는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길도 마찬가지였다.

커틀러는 미련 가득한 남자의 얼굴이 못마땅했다. 같잖음을 넘어 당장 시선을 거두라며 그의 눈을 실명시키고 싶을 정도였다.

“그 시선은 무어냐. 혹시 떠나는 기념으로 작별의 입맞춤이라도 바라고 있느냐.”

커틀러의 지적에 애쉬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오히려 램파드가 안타깝다는 듯 애쉬를 바라보았고, 중간에 낀 커틀러의 입매는 한층 더 굳었다.

램파드의 반응은 단순하다. 철저히 비밀을 숨기기 위해, 먼저 공격한 사람은 상대가 피를 볼 정도로 반격한다. 그러면서 한 번 빚지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뭐든 다 퍼다 주려고 해서 문제다.

램파드는 자신 때문에 잃은 커틀러의 팔을 보며 꾸준히 빚을 상기시킬 것이고, 아마 애쉬에게 또한, 연인을 죽였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떠올리는 중일 것이다. 채무 같은 건 질 필요 없을 텐데 어떻게든 애쉬를 돕고 싶어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애쉬에 대한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고 오롯이 한 사람을 보기로 작정했는데도 말이었다.

커틀러는 램파드를 떠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뭐, 마지막 한 번은 괜찮겠지.”

커틀러의 말에 램파드가 당황했다. 정리를 끝낸 애쉬에게 거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편히 살 수 있도록 의사와 요리사, 시종을 잔뜩 보낼 생각만을 했으니까. 커틀러가 잘못 내뱉은 말이겠지. 램파드는 정정할 기회를 주기 위해 되물었다.

“정말 해도 되는 건가?”

램파드의 의도를 모르는 커틀러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보였다. 애쉬가 불쌍하다고 한 번 입을 맞추면 다음번에는 혼자 사는 알파가 불쌍하다며 몸을 내주러 떠난다는 소릴 할 것만 같았다.

커틀러는 손을 뻗어 자신보다 한 뼘 이상이나 큰 애쉬의 멱살을 잡아 끌어 내렸다. 또다시 주먹이 날아올까 봐 애쉬는 한쪽 눈을 찌푸렸고, 램파드는 둘을 말리기 위해 다가갔지만 이내 굳었다. 주먹 대신 서로의 입술이 맞닿아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애쉬의 몸도 돌처럼 뻣뻣하게 굳었고, 뜬금없는 가벼운 입맞춤은 오래가지 않고 떨어졌다.

마차에 기댄 애쉬가 기분 나쁜 듯 입술을 벅벅 문지르며 커틀러를 노려봤다. 그는 태연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방금 램파드와 키스하고 오는 길이다. 램파드의 입술을 내주진 못하니까 그걸로 만족하고 떠나라.”

애쉬는 뭔가 욕지거리할 법한 표정이었지만 램파드 앞이라 그런가, 더는 싸우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램파드는 마차의 창문을 열어 애쉬와 시선을 맞췄다.

“성묘하러 와.”

“그러지.”

이제 출발해야 했다. 애쉬가 창문을 닫으려 했지만, 램파드가 손을 넣어 막았다.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거라.”

“이미 저택 하나를 줬잖아. 충분해.”

램파드는 애쉬와 라이가 함께 지낼 저택을 하사했다. 말이 저택이지 규모는 황궁에 있는 건물만 했다. 애쉬가 뜯어말린 덕분에 간신히 저택이라 부를 정도가 됐지 원래 램파드가 구상한 대로라면 남부 지방에 황궁을 하나 새로 만들 뻔했다.

저택은 애쉬의 요청대로 루사가 묻힌 보리수 나무 옆에 새로 짓기로 했다. 저택이 지어질 동안 황궁에 남아 줬으면 좋으련만. 애쉬는 근처 여관에서 지내겠다며 라이와 함께 떠난단다.

지금 당장 떠나는 것도 아쉽지만 애쉬에게 무언갈 더 주고 싶었다.

“그런 거로 되겠나. 영지든 작위든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줄 수 있으니까.”

램파드는 애쉬가 돌아갈 남부 지방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애쉬가 일하던 양조장의 지배인은 금화 몇 푼에 애쉬의 정보를 술술 불었다. 믿을 놈 없는 곳에 애쉬를 떠나보내는 것만 같았다.

“혹시 너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지 않나? 내가 직접 로열 가드를 끌고 가 섬멸해 줄 테니까 말만 하여라.”

“…그건 무서운걸. 부디 참아줘.”

“하지만…….”

이대로라면 램파드가 계속 애쉬를 붙잡고 있을 것이다. 애쉬는 창문에 낀 램파드의 손을 살며시 붙잡아 빼냈다.

“그렇다면 가끔 편지를 보내 줘. 일 년에 한 통 정도면 충분하니까 네가 지내는 소식을 말해 줘.”

“그러지.”

“기다릴게.”

애쉬가 웃으며 창문을 닫았고, 램파드는 마차에서 떨어졌다. 마차가 곧장 출발했고, 램파드는 본궁 앞 화원을 가로지른 마차가 문밖으로 나갈 때까지 바라보았다. 마차가 자그마한 점이 되었을 때 곁에 선 커틀러가 손수건을 꺼내더니 입술 껍질이 벗겨질 듯 마구잡이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램파드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너도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를 때가 있구나.”

“폐하와 오랫동안 지내서 옮은 것 같군요. 지금 매우 후회하고 있습니다.”

“후회할 일을 왜 저지른 거냐.”

입술을 벅벅 문지른 손수건을 미련 없이 버린 커틀러가 인상을 한껏 썼다. 닦는 것으로는 기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무언가 입가심할 거리가 필요했다. 커틀러는 램파드의 귀 뒤를 감싸며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램파드는 피하지 않고 살며시 눈을 감으며 그의 자극을 즐겼다.

산뜻할 정도로 얕게 닿은 입술이 떨어졌다.

“왜 그런 거냐. 혹시, 애쉬에게 마음이 가더냐.”

“무슨 끔찍한 소릴 하시는 겁니까. 이유는 아시잖습니까.”

“정말로 내 입술을 지킨다고 그런 거야?”

“폐하, 앞으로 그 누구도 당신의 몸을 건드리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남자는 이제 저 하나로 좁히십시오.”

램파드는 멀어져 가는 커틀러의 양어깨에 팔을 턱 올리고 무게를 실었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고, 이번에는 램파드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여자는 괜찮은 건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일러야겠군요. 숨을 쉬는 생명체는 모두 다 안 됩니다.”

“누가 할 말인데. 질투 나니까 내 입술을 지킨다며 그런 짓은 하지 마.”

“누구한테요?”

“네 입술이 닿은 애쉬가 부러웠어.”

“그래서 방금 해 드렸잖습니까.”

“입가심 아니었나?”

커틀러는 드물게 눈웃음까지 지으며 램파드의 뒷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떨어졌던 입술이 당연하다는 듯 다시 가볍게 마찰했다. 마음이 끌리는 것만큼 몸도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이대로 떨어지기 싫어 한참을 맞닿아 있었다.

***

애쉬를 태운 마차는 황제가 지내는 본궁을 빠져나와 황궁 안의 작은 건물들을 지나 성문 근처까지 달려왔다. 간단한 신분 조사를 끝마치고, 성문 밖으로 나서기 전 누군가 애쉬의 마차를 붙들었다.

“저도 함께 갈 겁니다!”

화이트 궁에서 지냈을 때 애쉬를 가르쳤던 밀러가 커다란 가방을 들고 씩씩거리며 마차로 다가왔다.

“저는 이제 황제 폐하의 약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이 따를 필요 없습니다.”

이제 황후 후보도 아니니 애쉬는 말을 올리며 공손히 답했다. 밀러는 자신의 품속에 넣어 둔 종이를 한 장 꺼내 애쉬에게 들이밀었다.

“황제 폐하께 직접 사직서도 드리고 온 길입니다. 여기서 절 거부하신다면 길가에 나앉을 수밖에 없지요.”

애쉬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제 저택에서 일하셔도 황궁에서 일하는 것만큼의 월급을 드릴 수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버리셨으니, 제 월급 정도야 황실에서 대 주겠죠.”

떠나기 전 램파드는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주저 없이 말하라고 했다. 한 사람의 시종 몸값 정도야 황실에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밀러도 함께 떠나기로 했다. 램파드가 하사한 저택은 라이와 단둘이서 살기엔 넓으니 사람은 많을수록 좋겠지. 피는 이어져 있지 않지만, 가족이 생긴 듯해 적적함이 적어졌다.

남부 지방에 도착한 애쉬는 곧바로 루사의 뼈를 뿌린 보리수나무를 찾았다. 쭈그리고 앉은 애쉬가 보리수나무 밑동 근처의 땅을 팠고, 머지않아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루사와 영원의 약속을 하며 맞춘 은반지가 들어 있었다. 애쉬는 반지 곁에 램파드에게 받은 토파즈 브로치를 넣고, 다시 땅에 파묻었다.

덮은 흙을 양손으로 단단하게 두드린 애쉬는 손바닥을 탈탈 털었다. 황궁을 떠날 때부터 몸 안쪽이 답답했고, 무거운 마음을 떨쳐 내고자 몸을 계속 움직였지만 소용없었다.

애쉬는 붉은 과일이 탐스럽게 열린 오래된 나무에 기대 낮은 한숨을 쉬고 램파드를 향한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이미 이별을 한 번 겪었으니 두 번째는 적응해도 될 법한데. 고통스러운 마음은 전과 같았다.

몸이 떨어졌으니 갈 곳 잃은 사랑의 감정이 풍화되길 바랄 뿐이었다. 첫 사람을 잃었을 때처럼 시간이 회복해 줄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