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소는 전화를 끊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내달렸다. 서점 어느 곳을 가도 주영과 해수는 보이지 않았다. 책에 코를 박은 또래의 여자아이만 보여도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확인하자 부모들이 경계하며 신경질을 냈다.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은 손님을 기민하게 알아챈 직원이 다가와 이소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세요, 고객님.”
이소의 입술이 타들어 갔다.
“혹시 키가 이 정도, 되는 여자아이랑 코트를 입은 남자분 못 보셨어요? 아이는 배낭을 메고 있고, 하얀색 원피스를 입었고요.”
점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금세 생각이 난듯 ‘아, 그 애기 아빠요.’ 하고 미소 지었다.
“애기 아빠요?”
“아이랑 같이 저쪽으로 나갔어요. 워낙 둘이 닮아서 기억이 나네요.”
점원이 말을 마치자 이소는 해수와 주영이 사라졌다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해수야! 강해수! 강해수! 공항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지만 어디서도 해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해수…!”
해수를 부르며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려던 이소의 어깨가 강한 힘으로 돌아갔다. 해준이었다. 당황한 낯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해준을 마주하자마자 이소는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손을 떨었다.
“혀, 형이…. 형이 해수를 데려갔어요. 서점에 있었는데 둘이 동시에 사라졌어요.”
약 열 명 남짓 되는 경찰과 검사들이 준경과 함께 뛰어왔다. 준경뿐만 아니라 수많은 경‧검찰이 해준과 자신을 둘러싸자 이소는 적잖이 당황했다. 해준을 올려다보자 해준의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걸어와 명함을 내밀었다.
“서울중앙지검 부부장검사 서준환입니다. 차해준 교수님은 저희 팀 자문으로 오셨고 오늘 윤주영 회장 압수수색에 도움을 주실 겁니다. 피의자 신분인 윤주영과 여태 함께 지내오셨던 점을 감안해 증인 및 납치된 강해수 양의 보호자로서 현 수사에 보호 동행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저희 경‧검찰은 피의자 검거 이전에 해수 양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확보할 것을 보장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당황한 이소 대신 해준이 말을 대신 받았다. 사기 횡령 배임 및 연쇄살인범의 단순 도주에서 아동 납치라는 혐의가 추가되자마자 보다 조심스럽고 신속하게 범인을 현장 검거하기로 의견을 모은 경‧검찰이 해수의 인상착의를 받아서 흩어졌다.
이소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20분, 20분도 안 됐어요. 제 눈 앞에 분명 해수가 있었단 말이에요. 형이…. 형이 왜요? 왜 형이 사람을 죽여요? 전 이해가 안 돼요. 분명 자살로 판명….”
해준의 옆에 서 있던 어린 형사가 빠르게 사건을 설명했다.
“사망 당시 이명희 이사의 시신의 손톱이 유난히 짧았습니다. 또한 손톱 단면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깎아 준 각도와 일치했고 그 증거 수집 도중 변기 주변에 버려진 손톱 조각 하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옥상에서 뛰어내렸을 때 복부 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몇 분 전에 질식 상태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윤치승 회장도 비슷한 시간에 사망했을 것이고. 고 대표 쪽도 아까 차 교수님께서 짧게 설명해 드렸죠? 중국인들하고 결탁해서 인신매매하는 조폭들 워낙 많아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긴 한데, 배 속에 시멘트까지 넣어서 완전히 수장시키는 건 진짜 홍콩 삼합회나 하는 짓이거든요. 범양이 데리고 있는 용역회사 중 중국과 홍콩 쪽에 연이 닿아 있는 사장들이 많아요. 개중 윤주영이 주로 ‘쓰레기통’으로 사용하는 용역이 주로 밑바닥 잡일을 담당하고 있어요. 눈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완전히 없애는 일들이요.
어린 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준이 초점이 나간 이소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그럼 여행은요, 저랑 여행은 왜 가려고….”
“여행이 아니야. 신분을 바꾸고 도망가려고 하던 중이었어.”
해준이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주영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이름과 생년월일을 가진 남자의 인적 사항이 담긴 종이였다.
“윤치승, 이명희가 사망한 이후 윤주영은 그동안의 분식회계 및 탈세 내역을 모조리 태웠고 기습 감사 들어가기 전에 투자 기업들에게 경영권을 공개 매수시켰어요. 제 손을 떠나기 전 범양을 넘겨 버린 후 이름을 바꾸고 해외로 넘어가려고 했던 거예요. 살인 혐의는 오늘 오전 중에 확실해진 거고, 이야기가 새어나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여길 뜬 거예요. 하, 우선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 줄게요. 아무튼 가지고 있던 재산도 이미 모두 해외계좌 쪽으로 옮기고 집도 정리한 지 오래예요. 여행 같은 거 갔다 와 봤자 다시 돌아올 곳이 없다고요. 처음부터 이소 씨랑 해수 모조리 데리고 튀려고 했던 거라고.”
이소는 말없이 서류를 그러쥐었다. 그래서 그렇게 저와의 미래에 집착했던 거였나. 조금만 더 빠르게 해준의 전화를 받았더라면 아마 주영이 해수를 데려가기도 전에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자신이 해수와 같이 있기라도 했다면 이런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형사를 돌아봤다.
“혼자 도망가면 되는데 왜 해수를 데려갔을까요.”
“아이를 데려오던 중에 경찰을 마주쳤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엔 인질로 쓰기 위해 그럴 수도 있죠.”
인질이라는 말에 사색이 된 이소를 해준이 끌어안았다.
“찾을 거야, 걱정하지 마. 찾을 수 있어.”
이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문득 해준의 몸에서 묘한 탄내가 났다. 단순히 담배 냄새 같은 것이 아니라 지독하게 독한 그을음 냄새였다. 이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떨어뜨렸다.
“이거 뭐예요? 왜 교수님 몸에서 이런 탄 냄새가 나요?”
“아…. 아직도 냄새가 나? 어, 그게….”
이소의 말에 해준이 답지 않게 당황했다. 자세히 보니 하얀 얼굴 군데군데에 간밤에 없던 좁쌀 같은 상처가 나 있었다. 해준이 머뭇거리자 옆에 서 있던 젊은 경위가 고개를 저었다.
“윤주영이 공항으로 떠나기 전 차 교수님 댁에 방화를 지시했습니다. 질식으로 기절해 계신 거 겨우 저 집사님이 빼 왔는데 까딱하면 죽을 뻔했어요. 그 큰 한옥이 다 타 버려가지고.”
“그만 말씀하세요.”
해준이 경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방화와 질식이라는 말에 이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이번엔 어린 형사가 끼어들었다.
“아니 진짜 윤주영 나쁜 새끼 아닙니까? 어차피 살인혐의 뒤집어썼다가 이제 막 무혐의 받아서 나온 분인데, 갑자기 또 방화피해자로 이름 딱 올라오니까 아, 이건 뭐. 뭐가 있겠다 싶어서 저희가 바로 갖다물었죠. 근데 생각보다 꼬리가 빨리 잡혔더라고요. 이게 진짜 웃긴 게, 차 교수님께서 예전에 그 동네 곳곳에 싸재 씨씨티비를 겁나게 달아놓으셔가지고 방화범 면상 딱 찍히고, 바로 잡은 거 있죠.”
해준이 그만 말하랬는데도 어린 형사가 옆에서 구시렁거리며 발을 까닥거렸다. 해준이 달았다는 CCTV의 원래 용도가 저를 지켜보기 위해서였음을 알고 있는 이소는 이를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모호해졌다. 그러나 해준이 살았으니 됐다. 이소의 낯을 살피며 해준이 연신 안심하라며 미소 지었다.
“나 괜찮아, 금방 빠져나왔어. 집사님이 잠든 나 깨우느라 조금 고생했지만.”
그렇게 말한 해준과 준경은 정말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다. 이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만 일이 제가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조바심과 초조함에 손이 떨렸다. 해준과 함께 온 경찰들은 공항경찰과 함께 협업을 하는 것으로 무전을 마치고 이동하기로 했다.
해준의 부탁으로 이소 역시 수사를 하는 데 함께 이동하기로 했다. 해준은 이소에게 방탄복을 입혔다. 혹시나 있을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평소 같으면 능숙한 솜씨를 칭찬했을 이소는 그저 팔만 들어 올린 채 멍한 눈이었다.
“침착해야 해요. 윤주영이 해수를 데리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방송까지 나간 마당에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의심을 사기 쉬우니까 어디 숨겨 놓았을 가능성도 있고, 데리고 있다고 하면 아마 무사할 거예요.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만약에…. 해수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요? 그땐 어쩌죠?”
찰칵, 마지막 버클이 채워지는 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힘없이 떨어지는 불안한 추측에 해준은 아무 말도 얹지 않았다. 이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 일 없겠지. 정말 아무 일도 없겠지. 온갖 후회와 자책이 이소를 흔들었다.
해준은 그런 이소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해준은 범양의 일에 이소가 말려들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비리 문제야 경‧검찰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고 저는 그저 부친 회사와 엮인 사건을 정리하는 정도에서 선을 그을 예정이었다. 이소는 윤주영과 사적인 관계를 제외하곤 회사 일로 엮일 일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전혀 논외의 인물이었기에 더 그랬다.
차 교수님. 윤주영 아직 공항 안에 있습니다. 차량이 이동한 흔적이 없어요. 저희 쪽으로 이동해서 함께 가시죠.
부부장검사의 무전이 울렸다. 해준은 검사를 처음 마주쳤던 날을 떠올렸다. 그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이소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함에 몸서리 치고 있었겠지.
* * *
해준에게 무혐의 처분이 내려진 날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유독 추웠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차해준 교수님, 감사팀에 교수님 사람만 세 명이던데요. 이게 무슨 일이야.’
서울중앙지검 부부장검사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해준의 앞에 걸터앉았다. 일개 대학교수가 조폭도 아니고, 요직에 ‘내 사람’을 데리고 있다는 게 참. 검사는 순수하게 신기하기만 한 것은 아닌지 퍽 비아냥대며 거들먹댔다. 구치소도 교도소행도 아닌 질이 좋은 가죽 의자에 앉은 해준은 말없이 검사의 차를 받아 들었다.
‘외상매입금 누락 178억 원, 해외법인 손실 누락 252억 원, 가짜 매출 채권 가공 122억 원. 그 외 자잘한 재단 비리. 범양은 분식회계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털 수 있어요. 어차피 그래 봤자 줄 타는 새끼들 때문에 좆같이 판결 나면 고작 징역 3년 받고 끝날 수도 있겠지만.’
해준은 검사가 준 차를 마시지도 않은 채 내려놓았다. 입이 썼다. 검사는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해 해준의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전 한 방에 가려는 겁니다. 적어도 25년에서 30년 이상의 형을 원해요.’
이미 처단할 만한 명분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상은 더러웠지만 나름 청렴한 편에 속한 눈 앞의 부부장검사는 걸레로 쓰기도 아까운 범양을 탈탈 털어 완전히 없애 버릴 모양이었다. 다만 위로 댈 만한 연줄이 없어 거대 자본과 불의에 수사가 번번이 미끄러지곤 했다.
‘거두절미하고, 윤주영을 완전히 고립시킬 만한 혐의가 필요합니다. 때문에 교수님이 가진 방대한 자료와 여러 요직에 심어진 사람들이 절실한 거고요. 범양과 결탁한 세력이 많기 때문에 현재 저희 검찰 쪽은 건드리기 어렵습니다. 다행히도 지난번 고태균 살인죄 무혐의 처분 났을 때 연이 있었던 서부서 강력계에서 지원 요청이 왔습니다. 또한 피의자를 잘 알고 있는 조력자와 함께 압수수색 집행을 진행하는 것은 규정상 어긋나지 않으니, 동의하시면 바로 범양 비리 관련 전담반이 만들어질 것이고-’
‘동의라고 하시면 제가 무슨….’
해준이 당황한 낯을 하고 눈동자를 맞춰 왔다. 그의 말마따나 일개 교수인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검사는 안광을 번득였다.
‘저희 팀에 자문으로 와 주셨으면 합니다.’
하, 어이없는 제안에 해준이 코웃음을 쳤다. 제가 원하지 않고서야 귀찮은 일은 하지 않는 게 해준의 성정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일어서려 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검사는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먹고사는 데 지장 없어서 학교를 잘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교수님께서 넘기기로 하셨던 범양 비밀 장부와 뒤에서 사람 써 가면서 모은 증언 채집본은 소장만으로도 충분히 중죄에 해당됩니다. 또한 아무리 악인이라 한들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한 폭행 사주와 일반인 감시 등은 경범죄에 해당이 되고요.’
살인죄가 무혐의 났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저도 교수님을 주시하고 있기는 하거든요. 검사가 주름진 눈을 접어 웃었다. 해준은 지친 눈으로 거절했다.
‘안 할 겁니다.’
‘애인이 있으시다고.’
부부장검사가 다리를 꼬고 몸을 기댔다. 이소를 거론하는 검사의 말에 해준의 메마른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윤주영이 데리고 있는 전 백영그룹 외자 윤이소 씨. 얼마 전 병원에서 큰 소란이 있었고 차 교수님에게 접근 금지 조치가 내려지고 두 분은 견우직녀마냥 헤어졌어요. 그 후 윤주영이 개인 별장으로 데려가 경호원 열 명을 두고 감시하고 있는 사람…. 맞죠?’
괜찮아요, 전 동성애에 편견 없습니다. 이쪽 일 하다 보면 정체성보다는 좋은 놈 나쁜 놈만 가리니까요. 검사가 손을 내저었다. 해준이 차가운 눈으로 뚫어질 듯 바라보자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윤주영이 구속되고 나면 윤이소 씨는 다시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겠군요. 정신병력 때문에 아이는 친부와 양부 모두에게 소속되지 못하고 센터로 보내지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안타깝지만 현실이 그래요. 지금 보호자로 있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은 구속 예정, 한 사람은 심신 불안정 상태라면 미성년자는 정부가 보호해야 하는 게 맞으니까요. 아마 윤이소 씨는 그 결정을 감당하기 힘들어할 테고, 그런 격양된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양육 자체가 오랜 시간 거부될 수 있습니다.’
검사는 식은 차를 수우(水盂)에 조로록 따라 버렸다. 큰일 하셔야 하는데 속 데우셔야죠. 느긋한 말투에는 묘한 확신이 차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가 가득 따라지고 스륵 테이블을 미끄러져 해준의 앞에 자리했다.
‘자, 그러니까 드리는 제안입니다. 힘든 때일수록 사랑하는 애인 곁을 다시 지키셔야죠.’
해준의 동공이 흔들렸다. 차에서 올라온 더운 김 사이로 검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떨어졌다.
‘자문, 하실 거죠?’
* * *
아주 잠깐 해수가 제 손 안에서 사라지자 이소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이런 이에게 완전히 그 애를 빼앗아 간다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았다. 아마 두 사람의 추억의 지층이 쪼개진대도 저는 결코 그 사이를 메울 수 없을 것이다.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해준은 조용히 이소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소 씨, 해수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내가 그 새끼를 반드시 죽여 줄 거야.”
해준의 품에 안긴 이소는 아무 말도 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편히 울 여유도 없었다.
윤주영이 해수를 데리고 사라진 지 40분째, 해준과 이소는 수사팀과 함께 사방을 뛰어다녔다. 지상 주차장부터 옥상 층까지 모조리 뒤지고 다녔다. 공항 경찰까지 모두 30명이 넘는 경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영의 전화를 추적했지만 이미 몇십 분 전에 쓰레기통에 버리고 도주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CCTV를 확인하러 간 검사가 상황실에서 계속해 주영의 행적을 쫓기로 했다.
무전기를 통해 1층 라운지를 돌던 젊은 경위와 형사들이 막막한 듯 읍소했다.
“아무리 봐도 아이를 데리고 있는 젊은 남자는 보이지 않는데요?”
“아이를 어디 숨겼을 수 있다고 했잖아. 차라리 따로 떨어져 있다면 인질의 안전은 확보된 거니까, 윤주영은 그다음이야. 만에 하나 윤주영이 흉기를 들고 있다면 우리 쪽 역시 정당방위로 무기를 들어도 좋다. 다시 요청한다. 용의자가 흉기를 들고 있는 경우 우리 경‧검찰은 무기를 사용해도 좋다.”
해준과 함께 뛰던 검사가 뛰면서 다급하게 고지했다.
한참을 뛰어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공항은 너무 컸다. 모든 승객들이 협조한 것은 아니기에 간간이 소란이 일었고 이를 달래느라 집중력이 깨졌다. 테러 상황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일정까지 무기한 미루기에는 승객 각자의 사정이 바빴다. 이소는 더욱 다급해졌다.
문득 CCTV를 돌려보던 팀에서 무전이 왔다.
“검사님, 윤주영이 서점에서 나오자마자 커다란 트렁크를 구매했습니다. 흰색 트렁크입니다.”
“갑자기 트렁크는 왜.”
잠시 조용한 무전은 조심스레 추측을 내보냈다.
“제 생각엔 이동할 때 너무 눈에 띄어서…‧ 아이를 그곳에 넣은 것 같습니다. 아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소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주영은 혼자 움직이고 있어?”
“10분 전까지는 카메라에 잡히는데 그 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재 사각지대만 골라서 움직이는 것 같아요.”
“복잡하게 됐군. 일단 알겠어. 아아, 수사팀은 전부 들으세요. 여행용 흰색 트렁크, 용의자가 여행용 흰색 트렁크를 가지고 있다. 트렁크만 찾아도 좋으니까 기내 수하물 넣는 곳까지 다 뒤져. 흰색 트렁크를 가진 승객들 모조리 검문한다.”
그렇게 20분의 시간이 더 흘렀다. 망할 흰색 트렁크 때문에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드라마처럼 뚝딱 하고 찾아지지도 않을 뿐더러 시민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여 주지도 않았다. 꼭꼭 숨어 버린 주영은 머리카락 한 올도 나오지 않았다. 사방의 문을 전부 막았고 감시하고 있었지만 영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이미 배 탄 거 아니냐.”
형사의 구시렁거림에 이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형사가 이소에게 물을 건넸다.
“드세요. 당장 조급하신 거 이해하지만 이렇게 저희 따라다니면서 직접 찾지 않으셔도 돼요. 몸도 안 좋으시다면서요.”
해준이 이소 대신 물을 받아 들었다. 해준이 물을 따라 이소의 입가에 대 주었지만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해수 생각에 무엇 하나 넘어가질 않았다. 주영에 대한 원망 같은 건 차치하고 당장 딸의 안위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뒤늦게 공항 주차장을 또각또각 걸어오던 여자들이 기분 나쁜 듯 신경질을 내며 수사팀 앞을 지나갔다. 묘하게 익숙한 담배 냄새가 코끝에서 희미하게 흩어졌다.
“아, 길빵 하는 새끼들 진짜 다 죽었으면…. 진짜 저 담배는 진짜 토할 거 같아.”
“냅 둬. 테러범 때문에 짐도 못 맡겨서 빡쳤나 보지. 나 같아도 그런 큰 트렁크 질질 끌고 다니는데 못 들어가게 하면 열 받을 거야. 여행 가는 거 같던-. 꺄악!”
이소가 떠들던 여자의 팔을 덥썩 잡았다. 해준은 여자의 손목을 움켜잡은 이소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소가 여자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서 보셨어요, 그 사람.”
“뭐, 뭐예요?”
여자가 놀라서 팔을 빼려 하자 뒤에서 서 있던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경찰입니다! 수사에 협조해 주세요!”
여자가 이소에게 잡힌 손목을 팩 하고 쳐냈다. 아야야, 너무 아파. 손목을 주무르던 여자들은 신분증을 내민 형사들을 가볍게 훑어보곤 이소에게 되물었다.
“누구요?”
“담배 피우던 사람이요. 혹시 가지고 있던 게 하얀색 트렁크예요?”
“그랬나? …‧어, 네. 맞아요. 왜요?”
경찰들이 다급하게 신분증을 넣고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어디서 보셨어요? 언제요?”
“방금 계단 내려오다가 만났으니까…. 그 사람은 서문 E주차장 쪽으로 갔어요. 근데 거기 아직 공사 중이던데….”
여자의 증언을 듣던 경위가 검사에게 바짝 다가붙었다.
“E주차장에서 가까운 선착장이 200m 이내에 있습니다. 차량이 있다면 바로 이동할 겁니다. 5층 연결 통로로 가시죠.”
이소는 감사합니다, 하며 손을 뿌리치고 서문 쪽 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해준과 형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왠지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주영이 있는 곳까지 잘도 찾아갔던 어린 이소는 주영을 만나기 전이 되면 가슴이 뛰었다. 주영의 방 발코니라든지 골목 근처에서 담배를 태우던 주영은 이소를 마주치면 숨기지도 않은 채 ‘아, 또 이소한테 들켰네.’ 하며 웃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멀지 않은 곳에 주차장으로 통하는 연결 통로가 보였다. 처음 차를 세워 두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 정말로 주영은 이대로 배를 타고 도망치려는 걸까. 절반의 수사팀은 1층 선착장으로 나가는 문으로 튀어나갔다. 이내 선착장에는 아무도 없다는 무전이 울려 퍼졌다.
“1팀은 2, 3층. 2팀은 4층. 나머지는 나와 함께 5층으로 간다. 놈 아직 여기 있어.”
엘리베이터를 봉쇄하고 5층까지 뛰어올랐다. 5층을 향해 뛰던 이소는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떴다. 달콤한 담배 냄새, 주영이 바에서 피웠던 그 담배 냄새다. 문 앞에 다다르자 수사팀이 먼저 달려 나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뒤이어 도착한 검사들이 문고리를 잡았다.
‘부디 무사히 있어, 해수야.’
이소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윽고 강한 힘으로 문이 열리고 문틈으로 오후의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곳에 주영이 있었다.
* * *
제5 주차장 야외 난간, 길게 뻗은 다리를 한 남자가 난간에 기대어 여유롭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코트와 목도리, 모든 짐을 벗어 두고 가벼운 셔츠 차림인 남자는 허공을 바라보며 연기를 내뱉었다. 남자의 다리 아래에는 허리춤까지 오는 커다란 하얀 트렁크도 있었다.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누구인지를 인지한 순간 형사들이 와르르 쏟아져 총을 겨눴다.
“윤주영! 그대로 멈춰!”
천천히 고개를 돌린 주영이 난간에 손바닥을 짚었다. 지루한 표정이었다. 경찰들이 순식간에 주영을 둘러쌌다. 개가 요란하게 짖었다. 어어, 이 녀석 왜 그래. 하더니 마약탐지견이 컹컹 짖었다. 주영은 개를 바라보며 연기를 훅 짧게 뱉었다. 개가 더 요란하게 짖자 큭큭 웃었다. 눈이 풀려 있었다.
“미친, 저 새끼 저거…. 대마 아냐?”
“놔둬요. 어차피 형량 좆 된 거 몇 년 더 추가해서 빵에서 뒈지려나 보죠.”
형사들이 총을 든 채 혀를 찼다.
이소와 해준이 천천히 다가갔다. 연초를 다 태운 주영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사람들 사이를 쫓았다. 제일 먼저 이소를 찾았고 그 옆에 서 있는 해준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참 말없이 해준을 바라보다 능글맞게 고개를 꺾어 웃었다.
“또 보네, 차 교수.”
해준은 말이 없었다. 저 역시 정상은 아니었지만 저 약쟁이 새끼도 정상은 아니다. 눈이 돌아 있는 채로 큭큭 웃던 주영이 툭 담배꽁초를 난간 밖으로 버렸다. 휘이잉 야외에 불어온 겨울바람이 매섭게 꽁초를 데려갔다.
주영은 힘을 빼고 기대섰다. 경찰을 피해 다녔는지 머리는 땀에 절어 있었고 몇 개비를 태운 건지 그사이 눈 밑이 퀭했다.
“으, 추워.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씹.”
주영이 난간에 기댄 채 몸을 떨었다. 먼지가 가득 낀 유리 울타리에 몸을 기울이자 사이 틈이 벌어지며 끼이익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까 봐 수사팀이 단체로 당황하며 짧은 탄식을 뱉었다.
“와, 공사 개떡같이 했나 봐. 기대면 골로 가겠는데.”
사람들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우스운 듯 주영이 푸흣 웃었다. 주영은 발끝으로 트렁크를 드르륵 밀어냈다. 묵직하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인 트렁크 때문에 주영을 조준한 경찰들의 시선도 다급하게 트렁크를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다.
주영이 이소를 나른한 목소리로 불렀다.
“우리 이소 왜 여기 있어. 비행기… 안 타고.”
이소가 눈에 핏발이 선 상태로 주영을 노려보았다. 다리를 비스듬히 짚고 선 주영의 가슴에 붉은색 레이저 포인터 여러 개가 조준되었다. 주영은 눈동자만 내려 제 가슴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음 지었다.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한 인생이 문득 우습게 느껴졌다. 난간 너머에서 등으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찼다.
“이소야, 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해수 어떻게 했어.”
이소가 이를 악물었다. 주영의 차분한 목소리는 조곤조곤 금이 간 땅바닥을 기어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바라는 건 많지도 않았는데 뭐 하나 내 손에 제대로 들어온 게 없어.”
“해수 어떻게 했냐고.”
이소가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가려 하자 해준과 형사들이 막아섰다. 괜히 주영을 도발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지금 이소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해수 지금 그 안에 있냐고 묻잖아!”
“쉿, 놀라서 깰라.”
주영의 손가락이 입술에 가 닿았다.
“…….”
“생각보다 빨리 잠이 안 들길래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자장가를 불러줬더니, 금방 잠들었어.”
“야…. 이 개애새끼야….”
이소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들었다는 말의 의미가 충분히 중의적이기에 총을 조준하고 선 형사들의 안광도 함께 흔들렸다. 친딸이라고 하지 않았나. 미리 조사한 정보들을 떠올리며 인면수심의 용의자를 앞에 두고 이를 갈았다.
주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창백한 낯을 한 주영의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진동했다. 약물 반응인지 추위에 떠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는 얼굴이 예쁘더라. 아이들은 자는 얼굴이 천사라더니.”
이소가 빠르게 달려들어 주영의 멱살을 잡았다. 얼마나 입술을 짓씹고 달려왔는지 셰이크를 빨아 마시던 곱고 매끈한 입술에 피가 덕지덕지 맺혀 있었다.
“너 해수한테 무슨 짓 했어.”
“우리 이소 입술 찢어졌네.”
“대답해, 이 새끼야!”
이소가 윽박지르자 주영의 몸이 난간에서 휘청거리며 이소의 어깨를 덥썩 잡았다. 순식간에 몇몇 경찰들이 조준 사격을 준비했다. 이소의 팔과 주영의 가슴에 붉은 점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쏘지 마! 새끼들아! 뒤지고 싶어?”
경위가 악에 받친 소리를 질렀다. 다들 주춤주춤하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주영은 제 멱살을 잡은 이소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내리다 ‘미안.’ 하며 발을 들어 가슴을 퍽 밀어젖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력하게 옷깃을 잡은 손이 떨어지고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소 씨!”
주영은 거칠게 트렁크를 잡아 난간 바깥에 넘겼다. 달크닥 소리와 함께 난간 바깥에 걸쳐진 트렁크에 모두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움직임을 멈췄다. 트렁크 손잡이에 연결된 가느다란 체인이 주영의 손목과 손아귀와 연결되어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체인이 주영의 손목에서 빨갛게 자국을 만들어 냈다.
“후으….”
주영이 가만가만 눈을 깜박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성인이 몸을 쪼그리면 들어갈 크기의 트렁크는 금방이라도 난간 너머로 넘어갈 것처럼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다리가 풀린 이소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해준 역시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총을 든 검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윤주영! 허튼짓 하지 말고 그대로 가방 내려놓고 앞으로 엎드려!”
“다들 총 내려놔.”
“너 이 새끼, 평생 감방에서 썩고 싶어!”
쯧, 검사의 목소리가 터져나오자 마자 주영은 혀를 차며 제 손을 가볍게 폈다 접었다. 차르르르르륵 소리와 함께 끝부분만 조금 남기고 난간 아래로 모습을 감춘 트렁크를 보자마자 이소가 숨을 크게 집어먹었다. 수사팀 전원이 몸을 굳혔다. 주영은 차가운 눈으로 읊조렸다.
“두 번 말 안 해. 총 다 버려.”
검사의 두 눈이 떨렸다 이내 입술을 떨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 안에 어린아이가 들어 있을 거라 생각하니 당장 머리통을 갈기고 싶어 온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야이… 개새끼……들아, 총 내려놔. 총 내려놓으라고!”
검사의 지시에 총을 든 수사팀 전원이 주영을 주시하며 천천히 총을 내려놓았다. 바닥을 긁는 이소의 손등 위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총을 모두 내려놓은 것을 확인한 주영이 지그시 턱짓을 하자 검사가 이를 악물었다.
“이제 나가. 개수작 부리면 바로 던질 거니까 쓸데없는 짓 말고.”
주영이 다시 한번 손을 들자 경찰들은 무겁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또 한 번 손을 놓았다가는 트렁크를 놓칠 수도 있었다. 검사가 빠르고 단호하게 지시했다.
“나가. 나가서 1층으로 가. 아래에 빨리 보호매트 깔라고 해, 뭐가 되었든 그냥 있는 대로 다 가져와. 빨리! 문은 다 막아, 막아 이 새끼들아!”
있는 대로 고함은 질렀지만 당장 주영의 손에 인질이 걸려 있는 한 경찰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력하게 수사팀들이 흩어졌다. 난간 앞에 남은 것은 이소와 해준이었다. 문 뒤로 형사 몇몇이 섰지만 주영을 제압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주영은 여전히 이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부는 바람이 드르륵 드르륵 난간 벽에 트렁크를 밀어내며 긁는 소리를 냈다.
“이제야 둘이 좀 이야기를 할 시간이 나네.”
아, 차 교수는 들어도 돼. 이소 사람이잖아. 주영이 길게 빠진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형이, 형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원망 섞인 이소의 말에 주영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안 하면 네가 날 봐 주지 않을 거잖아. 바로 경찰에 넘겨졌겠지. 꼴사납게.”
이소의 눈이 축축하게 젖었다. 당장 주영을 잡아 넘어뜨리고 싶은데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해수가 있었다. 수사팀이 1층에 도착해 추락한 트렁크를 받아 낸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무사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막막하고 절망스럽다는 감정 그 이상이었다.
주영이 이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널 처음 본 게 작은아버지 어머니 장례식장이었을 거야, 아마.”
“…….”
“그때부터였어. 그 새까만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을 때부터, 꼭 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주영은 꼭 이소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내내 입에 물고 있던 연초가 일반 담배가 아니라 대마라고 했던가. 약 기운이 도는지 눈을 감았다 뜨는 속도가 느렸다.
“그래서 그 까만 눈 안에는 다른 이가 아닌 나만 담았으면 했어.”
어린 이소는 항상 주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소야.’ 부르면 헤- 하고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내가 부르면 주저 없이 달려왔고, 내가 부탁하면 넌 무엇이든 해 주었으니까.”
그래서 내 미래에는 당연하게 네가 있었어. 내 시간 전부에 이소 네가 있었어. 재미로 개미굴 안에 뜨거운 물을 붓고 강아지의 다리를 절게 만들 만큼 감정이 메마른 어린아이의 마음에 이소는 단비가 되어 내렸다. 행복을 알게 하고 설렘을 알게 하고 기대를 알게 하고 슬픔을 알게 했다.
“차 교수. 그거 알아? 이소 치마도 되게 잘 어울리고, 머리 길어도 되게 예뻐. 교정에서 부딪혔을 때 이소인 줄 모르고 홀린 듯 바라보다, 한참 만에 곱게 분장한 이소인 걸 알고 내 심장이 뛰었는지 몰라.”
‘형, 놀랐어? 나야. 꼴이 완전 우습지. 그렇게 쳐다보지 마, 알아. 이상한 거.’
넌 예뻤다. 눈부시게 예뻤다. 원래도 눈이 가는 얼굴과 귀를 사로잡는 목소리와 가슴 뛰게 하는 손짓 발짓을 하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형으로서 너를 지켜야 한다고, 미련을 두고 그은 선이 분명 존재했다. 같은 남자여서 본능적으로 끌리기보다도 아주 어릴 때부터 온 마음을 다 주어 버린 사람이기에 네가 어떤 모습을 하건 모두 사랑했다.
‘나 사진 찍어 줄 수 있어? 이런 거 언제 남겨 보겠어. 추억이잖아.’
사진을 찍어 주고 학교를 벗어났던 그 날, 나는 정말 비뚤어지게 취했다. 창립기념일 행사 내내 네 얼굴을 상상했다. 목덜미가 훤히 드러난 짧은 머리보다 치마를 입은 채 내게 다리를 벌리는 너를 상상하니 죄책감이 좀 덜 했다. 수도 없이 신께 기도를 올리던 주일의 노력들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듯, 여자가 되어 버린 너를 떠올리며 더 마음껏 배덕한 상상을 했다. 차라리 그렇게 안을 수만 있다면. 안아도 되는 거라면 좋을 텐데.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침실에 있는 너에게 입 맞추고 품을 파고들었다. 우습게도 너는 순순히 안겼다.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는 사실 너를 사랑한다고, 내 처음을 너에게 주어도 괜찮은 거냐고 물었을 때 너는 괜찮다고 말했다.
좋아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나 떠나지 마. 나 버리지 마요.
바보처럼 그 말을 믿고. 오랜 시간 가져온 순정을 보상받는 줄 알고 기뻐하며 너와 몸을 섞었다. 어쩌면 그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는지도. 그러나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죽을 갖다주고 웃으며 내려간 너를 보면서 나는 한바탕 지독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과오이자 족쇄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오빠, 나 이소한테 말 안 할 거예요. 그러니까 오빠도 그냥 체념하고 나랑 살아요. 그게 맞는 거야. 남자 둘이서, 더구나 사촌끼리는 누구도 인정 안 해 줘요. 더럽잖아요.’
아이는 보다 보면 정이 들 거라고, 제게 완전히 마음을 다 주지 않아도 좋으니 아이 아빠로서 옆에 남아 달라는 말을 하는 은형을 보며 너 역시도 나처럼 보답받지도 못할 사랑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서글펐다. 어리고 가난한 너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가진 것 없이 평생을 살다 얻은 천금같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겠지. 아이를 낳고 나서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은 은형이 제게 전화를 하고, 한국으로 와 이야기를 마저 하자는 말에 우선은 그러자고 했다.
정작 돌아왔을 때 제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형도, 딸도, 이소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세 사람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고 적막하게 닦인 제 미래를 바라보며 난생처음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었다.
주영은 낮게 가라앉은 눈을 했다. 제 속에 담아 둔 사연을 구구절절 떠들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리 되나 저리 되나 지금 자신은 윤이소에게 천하에 둘도 없는 개새끼다. 괴물이고 악마다. 주영은 뇌까렸다.
“은형이한테는 그래서 썩 미안했어. 어쩌겠어, 제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피가 섞인 동생한테 발정하는 호모 새끼인 걸 알면서도 안겼는데.”
나중에서야 안은 게 네가 아니라 은형이인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알아. 나름 처음이었는데, 그걸 네가 아니라 걜 줬다고. 은형이 피식 웃었다.
“……이, 개새끼가….”
이소가 주먹을 떨며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네가 여자애였다면, 내가 사랑한 네가 내 아이를 가졌던 거였다면 난 아마 주저 없이 낳으라고 했을 거야. 해수? 난 범양뿐만 아니라 세상을 다 주고도 남았을 거야. 반쪽짜리가 아니라 온전히 네 몸에서 나온 내 아이였다면 난 기꺼이 그렇게 했을 거야.”
주영의 입에서 쏟아지는 모든 말이 더럽고 추악했다. 제가 알고 있던 사실을 미묘하게 비튼 진실은 이소뿐만 아니라 은형과 해수의 존재 모두를 죽이고 짓이긴다. 이소의 눈자위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아, 고태균은…. 정말 내 계획에 치명적인 오점이었어. 사업체 몇 개 굴리길래 대가리 제대로 박힌 놈인 줄 알았는데 역시 길바닥 출신은 믿는 게 아닌가 봐. 그쵸, 차 교수. 그쪽 바닥 전문이잖아요. 고 대표가 뒤지기 전에,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다시 기회 주면 진짜 잘할 수 있다나. 근데 어떡해, 기회 주려고 해도 차 교수가 너무 심하게 조져 놨더만. 코에 물 몇 번 부으니까 그냥 갔어요. 아쉬워.”
“씨발…….”
“그러니까 뜯으라는 고기나 뜯지 왜 남의 거에 손을 대서는. 아니다, 그래도 그 이상한 짓 한 덕분에 네가 나한테 오긴 왔는데. 그건 잘한 거네. 안 그랬으면 차 교수가 너 데리고 벌써 토꼈을 거거든. 저 양반 쎄한 거 감 좋더라고.”
고 대표까지 주영의 지시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영이 기분 좋게 웃기 시작했다. 흐흐흥, 흐흐흑 웃음소리 사이로 젖은 숨이 들락날락했다. 묘하게 정상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 나 그때 정말 차 교수 죽는 줄 기대했는데….”
해준을 바라보는 눈에 즐거움이 찰랑거렸다.
“생각보다 명줄이 긴가 봐. 오늘도 불길 속에서 이렇게 살아서 오시고.”
경찰까지도 데려왔네. 정말이지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다니까. 주영이 비꼬듯 내뱉은 말에 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간밤, 스트레스 때문인지 재회의 여파 때문인지 깊이 잠들었었던 해준은 명치를 꽉 누르는 답답함에 겨우 눈을 떴다. 손수건을 얼굴에 댄 채 준경이 제 뺨을 여러 차례 때리고 있었다. 코로 들이마신 공기가 뜨거웠다.
‘도련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불입니다. 불이…….’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으나 얼마나 들이마신 것인지 머리가 핑 돌았다. 60대인 준경이 제 어깨를 둘러 안은 채 부축했다. 큰돈을 들여서 만든 서까래들이 다박다박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큰 불을 만들었다. 집 밖으로 기어 나와 밭은 기침을 실컷 내뱉고 고개를 들었다. 종이를 잔뜩 가져다 놓은 작업실부터 시작해 안채 전체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목화를 심은 정원도 쑥대밭이 되었다. 행랑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저 멀리서 119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의 자연 발화라고 하기에는 불씨가 크고 범위가 넓었다.
해준이 고개를 돌려 정원 바닥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시큰한 기름 냄새가 났다.
‘방화야.’
준경과 해준은 가스를 너무 많이 마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0개의 CCTV로 용의자도 확보했다. 해준의 저택 근처 고물상에서 대량의 휘발유 통도 발견되었다. 대놓고 살해 위협까지 받고 나자 시간이 없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빠르게 응급 조치를 한 후 해준과 준경은 검·경찰과 함께 그동안의 자료를 모두 모아 윤주영의 별장과 휘령동 저택을 급습했다.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던 이소의 모든 짐이 단 몇 시간 만에 사라졌고 휘령동 저택에 있는 모든 가구와 가전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빈집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형사들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 주영을 찾아 공항까지 내달렸다.
“이소야.”
이소를 다정히도 부르는 주영의 목소리에 해준은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저와 윤주영은 기본적으로 결이 같은 인간이다. 우리처럼 추잡한 내면을 가진 이들은 귀신같이 모래 속의 진주를 찾아내어 핥고 빨고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윤주영은 마치 꼭 그 진주를 아끼다못해 이로 부수고 짓이겨서 제 배 속에 넣어야만 성에 차는 인간같이 굴었다.
“너를 괴롭히던 것들은 내가 다 보내 줬잖아.”
악마의 속삭임 같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너에게 다 돌려줬잖아. 뺏겼던 돈도, 잊었던 추억도, 잃었던 자리도, 심지어 내 딸도 너에게 아주 줘 버리겠다잖아.”
주영의 눈동자가 느리게 이소의 얼굴을 훑었다. 내 건데, 너는 내 건데.
“근데 넌 왜….”
“…….”
“단 한 번도… 나한테 너 하나를 주질 못해….”
이소의 주먹이 부들거렸다. 주영이 뒷걸음질을 치며 난간에 기댔다. 식식대는 호흡과 함께 흔들리는 고개가 나른했다. 이소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돌연 해준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게이트 쪽에서 주영을 조준하고 있는 검사들이 아래쪽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신호했다.
주영은 아이처럼 울먹거렸다. 약에 취한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이었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그러나 이소는 그런 증상은 모르는지 망연한 표정으로 주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다시 만나서 다행이라고 했잖아…. 내가 곁에 있어서 힘이 된다고 했잖아.”
“…….”
“여기서 있었던 좆같은 일들은 다 잊고, 셋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했잖아.”
“…….”
“그런데 왜 또 날 밀어내.”
주영의 손이 힘없이 흔들거렸다. 차르륵 차르륵 체인이 감긴 손목에 빨갛게 쓸린 자국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주영의 눈동자가 길게 좁아졌다. 해준은 천천히 이소에게서 떨어져 주영과 거리를 좁혔다.
“왜 난 단 한 순간도 너에게 첫 번째가 될 수 없어?”
주영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타고 엉망으로 얼굴을 적셨다. 처음 보았다. 그런 식으로 생생하게 구겨지는 주영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주영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왜 단 한 번도 날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를 않냐고!”
빈 홀에 천둥과 같은 메아리가 부딪혀 흩어진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낮추던 해준까지도 움찔하게 만드는 울림이었다.
주영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마 세 개비, 바닥에 떨어진 꽁초의 개수만큼 약이 도는 시간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주영에게는 지금 이소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포심과 불안감을 잊기 위해 습관처럼 피웠던 것이 주영의 방어 태세를 망가뜨리고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게 했다.
이소야, 사랑해.
잘 자, 사랑해.
안아 주라, 꼭.
보고 싶어, 이소야.
그러나 윤이소는 단 한 번도 주영에게 답하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어, 너에게 사랑받고 싶어. 주영은 검지를 떨며 관자놀이를 세 번, 네 번 두드렸다.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적어도 아주 오래전부터 넌 내 거였어. 내가 누구보다 널 먼저…, 널 먼저 사랑했어.”
네 딸도, 차해준도 아니라 바로 내가. 네 옆에 있을 사람이라고. 완전히 초점을 잃은 눈을 한 주영의 입가에서 타액이 주륵 떨어졌다. 츱 하고 침을 닦아 내며 낄낄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웃긴지 이내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소가 몸을 일으켜 주영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주영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형, 하지 마.”
이소 역시 한 걸음을 더 다가섰다.
“그거 알아? 처음부터 선착장에 가는 선택지 같은 건 없었어.”
“…….”
주영의 등 뒤로 차가운 난간만 남자 이소가 한 걸음을 더 다가섰다. 빠르게 손목을 낚아챈다면 어쩌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주영이 난간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그렇게 도망쳐 버리면 넌 나를 금세 잊고 행복하게 살 거 아냐.”
“하지 마, 형.”
이소가 손을 뻗었다.
“감옥에서 네게 잊혀지느니….”
“하지 말라고 했어.”
“지옥에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윤주영!”
이소의 입에서 터진 자신의 이름에 주영의 눈에서 눈물이 도로록 흘러나왔다. 윤주영은 해준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딴 새끼한테, 고작 저런 새끼한테 이소를 넘겨주는 게 죽도록 싫다는 듯 핏발 서린 눈으로 해준을 노려보던 주영이 숨을 고르며 이소를 바라봤다.
“이소야.”
“…….”
“나 없이 행복하지 마.”
덜컹,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영의 몸이 뒤집어졌다. 손목에 감겨 있던 체인이 차르르르르륵 풀리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이소의 짧은 비명과 함께 해준이 난간으로 손을 뻗었다. 콰광, 아주 깊은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났다. 이소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