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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짐은 안 넣을 거야?”
“네. 메고 다닐래요.”
공항은 사람으로 정신없이 북적였다. 가족 단위의 여행객, 신혼여행을 가는 것 같은 커플, 해외 출장으로 떠나는 직장인 등 모든 것이 이소의 눈에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숙을 배웅할 때를 제외하곤 제대로 공항에 온 것은 처음이라 이소와 해수는 꽤나 덤벙댔다. 숫자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데도 너무 넓어 게이트를 찾는 것만 한참이 걸렸다. 누가 말을 물으면 이소의 시선은 한걸음 뒤에 서 있던 주영에게 닿았고 주영은 그게 영어든 일본어든 한국어든 능숙하게 답해 주었다. 이소는 제법 제 사촌 형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둘 다 긴장 좀 풀고. 셰이크 사 올게. 이소는 밀크, 해수는 딸기. 이번엔 맞지?”
“저도 밀크인데요.”
“하… 그래, 알았어.”
주영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짐을 맡기고서야 겨우 긴장이 풀렸다. 해수는 집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여행 책자를 다시금 열어 보았다. 얼마나 보았는지 그 짧은 시간 동안 페이지 끝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소가 웃으면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여행에 대한 설렘보다도 그저 해수와 이렇게 정상적으로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벅찼다. 고작 3달이라는 시간이었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저만큼 혹은 저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게 어린 딸애라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해수야.”
이소가 해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해수는 어쩐지 아침부터 유독 기분이 좋은 제 아빠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애-’ 하고 묻는 해수의 얼굴에 구름이 걷혔다.
“아빠 비밀 하나 말해 줄까.”
이소가 해수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해수는 어쩐지 주위를 둘러보며 ‘삼촌이 알면 안 되는 거 맞지.’ 하고 속삭였다. 이소는 뜬금없이 주영을 살피는 해수를 보다 미소 지었다. 나중에는 알게 될 테지만 지금은 해수에게 먼저 말해 주고 싶었다.
“아빠 어젯밤에, 아저씨 만나고 왔어.”
“헐, 대박.”
“대박은 나쁜 말-”
“아니, 정말? 진짜로? 아저씨는 잘 지내? 친구들은? 할아버지도 만났어?”
나쁜 말은 쓰면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해수가 너무 놀랐는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뒤로 물러섰다. 이소가 눈을 깜빡였다. 해수가 다시 바짝 다가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이미 여행 책자는 일찍이 물린 뒤였다.
“아저씨랑… 화해했어?”
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한 번 더 묻자 이소가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는 고개를 흔들며 ‘OH, MY GOD.’ 하고 과장된 제스처를 했다. 이후 이소는 해수에게 계속 속삭였다. 은찬이랑 세현이도 잘 지낸대. 지금은 시골에 내려가 있는데 아빠가 여행 다녀오고 나면 편지랑 연필 세트 전해 줄 수 있게 한 번 만나자고 했어. 아저씨도 좋다고 했어.
“아저씨는 잘 지내?”
의젓하게 해수가 해준의 안부를 물었다. 이소가 ‘그럼, 잘 지내지.’ 하고 웃었다. 해수가 입을 씰룩댔다.
“아빠는 엄청 아팠는데… 자기는 잘 지내고. 전화도 안 하고 오지도 않구 밉다.”
“아니야, 아저씨도 아팠었대.”
해준이 연락도 않고 집을 떠나가 버려서 해수는 썩 섭섭했는지 한숨을 쉬며 구시렁댔다. 이소는 왜 자꾸 자신의 입이 이렇게 간지러운지, 방정맞게 제 마음을 떠들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해준의 진심을 알았고 저 역시도 해준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꼭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음이 벅차 그러나 보다 짐작할 뿐이었다.
돌연 해수가 조금 머뭇대다 이소의 손을 끌어당겼다.
“사실…. 나도 비밀 있어.”
“뭔데?”
“뭐라고 하지 않기. 약속.”
“약속할게.”
이소가 해수의 작은 손에 손가락을 걸었다. 해수는 조금 눈치를 보다 매고 있던 배낭을 풀어 가방 속에 있는 물건들을 슬쩍 보여 주었다. 평소 좋아하는 스티커북과 작은 인형들, 자주 읽는 책과 간식들, 그리고 해준이 사 준 낡은 전화기였다.
“너, 이거….”
“뭐라고 하지 않기로 했잖아.”
이소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자 해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저씨랑 연락하는 거 아니야. 삼촌네 오고 나서부터 전화가 안 돼. 대신 사진만 보려고 가지고 있는 거야. 여기 친구들 사진 다 있거든. 아저씨랑 아빠랑 나랑 찍은 사진도 있어. …보여줄까?”
해수의 말에 이소는 주영이 오나 안 오나를 살피고 고개를 숙였다. 해수가 능숙하게 갤러리를 열어 슥슥 화면을 넘겨 주었다. 그리운 얼굴들이 거기에 있었다. 해수의 사진 속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표정들이 어제 만난 이들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기특하기도 하지.
해수가 마지막으로 보여 준 사진은 셋의 가족사진이었다. 해준과 함께 공원을 다녀오는 길에 작은 사진관을 발견한 이소가 정숙과 찍었던 때를 생각하며 물끄러미 바라보자 해준의 권유로 찍게 된 사진이었다. 해수를 한 팔로 안은 해준의 곁에 선 이소가 찍힌 사진은 진한 상아색 배경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때마침 셋의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에 꽤 작은 액자까지 맞추어 별채 서랍장 위에 소담하게 놓아두었었다.
“아저씨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사진 봤어.”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말이야, 너.”
“아빠도 아저씨랑 뽀뽀하는 거 숨겼잖아.”
순식간에 이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 너어-너 그거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목덜미와 귓불이 붉어지자 해수가 은근한 눈으로 이소를 올려다보았다. 아빤 하나도 모르지.
“내가 비밀이 얼마나 많은데.”
이소가 한숨을 쉬며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눈치를 보며 해수를 돌아보자 해수가 씩 웃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아저씨하고만 아는 비밀이야.”
“아저씨가 말해 준 거야?”
차해준 이 사람이.
“아니, 내가 봤는데. 옛날 살던 집 골목길에서 뽀뽀한 거랑, 아저씨네서 볼에 뽀뽀한 거랑, 버드나무 밑에서 뽀뽀한 거랑- 읍-읍-!”
이소는 누가 들을까 얼른 해수의 입을 막았다.
“알았다. 알았어. 우리 해수가 이렇게 눈치 빠르고 시력이 좋은지 아빠가 미처 몰랐네.”
이소가 이마를 짚자 해수가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일곱 살밖에 먹지 않았는데 도무지 딸애를 이길 수가 없었다.
해수는 조금 더 해준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으나 주영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돌려 가방을 닫고 여행책자를 폈다. 해수는 유독 주영을 어려워했다. 물론 덜 친해져서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해준과 일주일 만에 농담을 트기 시작하고 두어 달 만에 비슷한 자세로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주영에게는 영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제 치료 기간 동안 해수보다는 자신에게 온 신경을 쏟느라 그럴 수도 있었다. 어쩌면 친딸이라는 점은 해수에게 오픈할 것도 아니었으니 은연중에 선을 긋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행 갈 생각에 신났나 보네.”
주영이 밀크셰이크를 내밀었다. 이소의 것이 조금 더 컸고 해수의 것이 작았다. 해수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소가 제 것을 바꾸어 주었다.
“2시간 뒤에 가?”
“별일 없으면 그때 출발하지. 그래도 우리는 출발 30분 전에는 탑승해 있을 거야.”
“어쩐지 떨리네.”
밀크셰이크를 쪼옥 빨아먹는 이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많이 추워? 실내인데 목소리를 좀 풀지.”
“어, 아니야. 괜찮아. 좀 서늘하네.”
이소의 말에 주영이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며 ‘셰이크 마셔서 그런가 봐. 차로 바꿔 올게.’ 했으나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해준의 잇자국이 생각보다 너무 커 터틀넥 위로도 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도리를 두른 것이었다. 주영이 본다면 얼마나 노발대발할지 눈에 선했다.
주영은 목도리를 추어올리는 이소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이소야,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다녀왔어.”
“아, 으응.”
“형은 너 없어져서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그냥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산책.”
산책. 이소의 말에 주영은 눈썹을 끌어 올렸다. 이소는 밀크셰이크를 쪼옥 빨며 눈을 돌렸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해수가 ‘아빠, 나 분수대 구경하고 있을게.’ 하며 자리를 피했다.
이소는 주영과 함께 자리에 남았다. 주영은 이소에게 영국에 가면 무얼 할지 주절주절 떠들었다. 식사는 가장 먼저 무얼 할 것이고, 잠은 어디서 잘 것이고, 영국은 진짜 먹을 게 없다고 다들 그러는데 자신이 알아 둔 맛집이 있다는 것과 트레이드마크인 이곳에 가서 꼭 해야 하는 활동 등등. 그렇게나 주영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방대한 계획을 듣던 이소는 턱을 괸 채 씩 웃었다.
“어쩐지 다 데이트 코스뿐이네.”
주영이 눈을 흘겼다.
“관광지라 다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뿐이야.”
“그치만 여기는 해수랑 같이 가기엔 조금 어려운걸. 형이랑 내가 액티비티 하고 있을 때 해수는 누가 돌봐.”
“해수는 집에 있어야지.”
주영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이소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묘하게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다.
“음, 그래도 같이 여행하는 건데 아이도 함께할 수 있는 걸 골라 주면 좋을 것 같아. 집에만 있을 거면 뭐하러 영국까지 가. 지금도 공부하느라 답답한 앤데.”
“가면 또래 친구들이 있을 거야. 내셔널 아카데미도 단기로 다닐 수가 있을 거고, 해수랑 할 수 있는 활동도 방과 후엔 많아. 오후 4시 이후에는….”
“잠깐, 뭐?”
상의도 없었던 계획에 이소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형, 아카데미 같은 곳에 기웃거리려고 영국에 가는 게 아니야. 우리 그냥… 여행 가는 거라고 했잖아.”
“기왕 간 거 테스트 받고 여러 경험 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성인 남자 둘이 할 수 있는 코스를 애가 따라다니기엔 좀 벅차기도 하고.”
주영이 으쓱했다. 해수의 공부에 집착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숨 돌리려고 가는 여행에서까지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번 여행이 특별해. 해수랑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기도 하고 그동안 내가 아파서 제대로 챙기지 못한 걸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만회하고 싶기도 해. 해수는 나한테 짐 같은 게 아니니까 같이 다니고 싶어. 해수가 힘들면 내가 업고 다니면 돼. 익숙한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형이 계획 세우느라 고생한 건 아는데 그래도 다시 생각해 주면 좋겠다.”
이소가 답지 않게 구구절절 제 생각을 읊어대자 주영은 멋쩍은 듯 알겠다고 대답하곤 커피를 홀짝였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이소의 시선이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던져졌다.
“사람들 모두 즐거워 보여.”
“좋겠지. 끌려가는 게 아닌 이상에야 여행 가는 건 언제나 즐거우니까.”
주영은 조금 토라진 듯 대답했다. 이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하고 여린 성격이기는 했지만 아이 일에서만큼은 고집스럽게 변해 버린 자신이 이럴 때는 참 융통성 없다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해수는 제게 애물단지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문득 주영이 이소에게 손을 포개 왔다.
“이소야.”
제 이름을 부르는 주영의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이소는 고개를 돌렸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우린 잘 살 거야. 해수랑 너랑 나랑 셋이서… 그동안 있었던 일 같은 건 모두 잊어버리고, 평화롭게 살아갈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러게, 이번 해에 일이 너무 많았다.”
인생이 다사다난하기는 했지만 정말 이번 해만큼 드라마틱한 해는 없었다. 바로 어제 일만 해도 꿈만 같았다.
“너한테 항상 너무 미안했어. 이렇게 돌아온 게 아직도 꿈만 같을 때가 많아.”
“난 벌써 다 적응했는데.”
이소가 피식 웃었다. 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난 가끔씩 네가 또 내 옆을 훌쩍 떠나 버리는 상상을 한단 말이야. 이젠 진짜로 헤어지지 않을 거야. 끝까지 옆에 있을 거야. 죽을 때도 네 손 잡고 있을 거라고.”
섬뜩한 주영의 말에 이소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됐어. 죽을 때까지 안 잡아 줘도 되거든.”
“싫어. 절대 안 놔줘.”
“그러셔, 그러셔.”
주영은 이소의 손을 쥐고 고집스럽게 토로했다. 떨어져 있었던 시간의 곱절만큼 함께 살아왔던 둘이었기에 애틋하고 애절한 마음이 제게 포개진 손에서 전해졌다. 그런 주영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차분히 손등을 두드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가끔 주영은 제게 꼭 열 살 아이처럼 불퉁하게 굴었다. 그 점이 퍽 안쓰럽기도 하고 곤란하기도 했다.
“뭐, 조금 살벌한 고백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마워.”
이소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나 해수 일도 조금 천천히 생각하려고 해. 언젠가 해수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분명히 설명해 줄 때가 오겠지만… 조급하게 하지 않을 거야. 이제 우리에겐 시간이 많잖아. 조금 특이한 형태지만 이젠 ‘가족’이니까.”
말을 마치고 주영을 돌아보았지만 주영은 웃고 있지 않았다. 연신 울려대는 전화기를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넣은 주영은 한숨을 쉬며 다 마신 커피잔을 구겼다.
마침 해수가 다가와 이소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아빠, 나 저기 서점에서 책 읽고 싶어.”
“응, 그럴까? 그런데 아빠 삼촌하고 잠시만 이야기 조금만 더 할까 하는데.”
“그럼 나 저기 앞에만 서 있을게. 보이는 데에.”
해수가 서점 코앞 청소년문고 코너를 가리켰다. 20m도 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소는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는 무사히 도착해 책을 하나 집어 들고 문고 앞 카펫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소는 해수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였으나 적어도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나면 차분히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무 당연하게 해수의 안위까지 계획하고 있는 주영의 흥분을 조금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소는 주영을 돌아보았다. 주영은 줄곧 저를 보고 있었는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란 이소는 이내 눈을 접어 웃었다.
“형, 나 많이 좋아진 것 같지 않아?”
“응. 쇼크나 발작도 거의 없어졌고 인지도 정상범위에 들어왔으니까 많이 좋아졌지.”
주영은 약간 삐쳐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퍽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이소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치.”
이소는 손끝을 매만졌다. 주영의 반응을 예상하기에 한참을 입술 끝에 맴돌던 말은 아주 무겁게 떨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나 이번 여행 다녀오고 나면 조만간 정리해서 나가서 살아볼까 해.”
구두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던 주영의 발끝이 우뚝 멈췄다. 자신이 들은 것을 몇 번이고 곱씹는 듯 한참 말이 없던 주영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그게 무슨….”
주영이 느리게 몸을 돌렸다. 이소가 손깍지를 낀 채 시선을 맞췄다.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속이 쓰렸다.
“당장은 아니고 한 달 정도 있다가. 나도 이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너 아직 치료 중이야. 정기 치료가 아니더라도 계속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고, 옆에 간호해 줄 사람 있어야 해.”
주영이 단호하게 말을 자르자 이소는 머뭇거렸다.
“어, 음…. 사실 말은 안 했지만 그 약 말이야. 어쩐지 그걸 먹으니까 더 잠만 오고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눈을 가늘게 뜬 주영이 날을 세웠다. 거짓말을 고백하는 순간은 언제나 고역이다.
“빼먹은 지…. 꽤 됐어. 그랬더니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불안증도 사라졌고.”
주영이 황당하다는 듯 맞받아쳤다.
“윤이소, 의사 동의도 없이 그렇게 처방받은 약을 중단하면 어떻게 해? 그러다가 갑자기 후유증이 크게 오면 어쩌려고?”
“아냐, 오히려 좋아진 것 같다니까. 처음에는 조금 우울하긴 했는데 나중엔 머리도 맑아지고 기억도 더 많이 나고 그랬어.”
이소의 말에 주영이 혀를 차며 비웃듯 내뱉었다.
“일시적인 거야. 의사 말을 뭘로 알아듣는 거야.”
“일시적 아니야. 안 먹은 지 한 달 정도 됐어.”
“뭐?”
그럼 여태 먹는 척했어? 내 앞에서 입에 물고 올라갔었잖아. 주영이 망연한 표정으로 되묻자 이소는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 솔직하게 ‘2층 욕실 가서 뱉었어.’라고 말했다. 하, 주영이 구겼던 커피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화를 낼 거라고는 예상했었기에 이소는 주영을 설득하려 눈을 맞췄다.
“형. 주치의 선생님도 그러셨잖아. 약이라는 게 치료를 하기 위해서 먹긴 먹지만 오래 먹는다고 좋은 건 아니라고. 더군다나 안정제라며. 이미 내 마음이 안정이 된 상태인데 뭐 하러 더 먹어. 물론 거짓말한 건 미안해, 형이 너무 화내고 걱정할까 봐 그랬어.”
“걱정하는 줄 알면 챙겨 먹었어야지! 내가 매일 제대로 한숨도 못 자고-”
“…그러니까 나간다는 거야. 형이 누구보다 나를 더 잘 케어하는 건 알고 있지만 하루 종일 내 곁에만 붙어서 나한테만 관심 가지고, 내 걱정만 하잖아. 형 일상이 망가진 지 오래라고. 그러다 형까지 병나.”
“내가 괜찮아.”
“난 안 괜찮아. 범양은 젊고 똑똑한 새 회장에게 거는 기대가 크잖아. 고작 동생 하나 돌보겠다고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건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할 거야. 나 이젠 24시간 간호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좋아졌어. 아주머니도 식사 챙겨 주시고 이동은 경호원들이랑 하잖아. 형이 나만 신경 쓰기엔 해야 할 일도…”
“내 일까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범양은 고작 내가 며칠 자리 비웠다고 안 돌아갈 규모도 아니야. 그딴 이유 납득하기 어려워.”
구구절절한 이소의 설명을 잘라 낸 주영은 눈을 치켜뜨고 뇌까렸다. 이소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주영이 당황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목전에 두고 갑작스럽게 요양 생활을 청산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여전히 약을 먹으며 치료 중임에 불구하고 주영의 보살핌을 거부하고 나가겠다는 것도 모두 당혹스럽고 배신감이 들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자신만 생각한다면 언제까지고 비비고 있을 수 있겠지만 제게는 딸린 식구가 하나 더 있었다.
“사실… 해수가 너무 힘들어해서 그래. 형은 분명 좋은 삼촌이고 보호자지만 그것과 별개로 난 조금 더 아이가 자유롭고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거든. 아직 어린 나이인데 학업에 치여서 매일매일 우는 걸 보는 건… 마음이 좋지 않아. 좋은 머리 아깝게 썩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오히려 해수가 영특하기 때문에 조이지 않고 풀어 주면 지금보다 더 빨리 제가 원하는 것을 찾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걸 그냥 뒷받침해 주고 싶을 뿐이야. 형이 길을 닦아 주는 거 너무 고맙지만… 시간이 좀 필요해. 그래서 그래. 형이랑 연을 끊자는 게 아니라 그냥 집만 독립해서 살겠다는 이야기야. 지금처럼 자주 만나서 얼굴 보고 지내면 되잖아, 충분히 그렇게 해도 형이랑 나랑 해수가-”
“씨발, 말끝마다 그놈의 해수. 해수. 해수….”
주영이 듣기 싫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형.”
욕설에 놀란 이소가 표정을 굳혔다.
주영의 전화가 다시 한번 울려댔다. 주영은 받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주영의 표정은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래, 너한테 해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모르는 거 아니야. 여태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다만 내가 너를 위하는 마음을 멋대로 재단하고 끊어 내진 마. 내 일상이 망가져? 아니, 웃기지 마. 나는 더 할 수도 있어. 네가 평생 다리를 절고 눈이 안 보이고 바보 천치가 되어 버린대도 난 네 오물을 다 받으면서 살아가라면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섬뜩한 이야기였다. 이소가 할 말을 잃고 바라보자 주영은 볼을 짓씹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네 충동적인 결정에 동의할 수 없어. 완전히 나아질 때까진 못 나가. 네가 그렇게 아끼는 해수가 아빠가 거품 물고 발작할 때마다 얼마나 기겁을 하고 놀라는지를 봤잖아. 그렇게 쓰러지고 나면 그다음은? 제대로 정신이 들 때까진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하고 바닥을 기어 다니잖아. 퇴원하고 밤마다 악몽을 꾸고 이불을 질질 끌고 오면 품에 안아서 재워 주던 게 누구였어? 그런데 나 없이 뭘 어쩌겠다고? 넌 지금 나 없으면 안 돼. 오직 나여야만 한다고.”
분명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답지 않게 흥분한 주영을 보며 이소는 몹시 불쾌감을 느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미묘한 뉘앙스로 흘린 문장들이 혀끝에 걸린다.
“꼭 내가 나아지질 않길 바라는 것처럼 들려.”
“비꼬아 듣지 마. 난 누구보다 네가 나아지길 바라는 사람이야. 다만 네 무모하고 충동적인 결정은 동의할 수 없다는 거지. 넌 지금 온전하지 않으니까.”
주영의 말에 이소가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
“온전하지 않다고?”
“그래. 내가 없는 7년 동안 네 인생은 가열하게 망가졌으니까.”
주영이 짓씹듯 뱉은 말에 이소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소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당장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순식간에 끓어오른 분노는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턱턱 떨어진다.
“개소리 하지 마. 내 인생은 형이 저지른 짓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형이 도와주지 않아서 망가진 게 아니야.”
잊을 만하면 주영은 자신의 부재로 인해 이소가 겪어야 했던 악몽들을 끌어 올렸다. 아이를 데려가고, 도망 다니고, 사채 빚에 끌려다니고, 결국 정신병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주영이 저지른 일을 책임지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형이 내게 해 준 것과 별개로 그 문제는 양보할 생각 추호도 없어. 그러니까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그딴 식으로 가볍게 말하지 마. 무모하대도 상관없어.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만 해도 충동적인 것들투성이였지만 잘만 살았으니까.”
이소가 쏘아붙이자 주영이 고개를 삐뚜룸하게 기울이며 눈을 맞췄다.
“그래서 어젯밤 기어이 차해준을 만나러 갔어?”
이소가 눈을 치켜떴다. 더러운 기시감에 치가 떨렸다.
“…알고 있었잖아. 왜 모르는 척했어.”
“그렇게 티를 내고 나가면 아무리 눈치 없어도 다 알아.”
“…또 사람 붙였어?”
주영이 혀로 볼을 훑었다 이내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이소를 바라봤다. 꼭 10년 전 어느 날 말도 없이 늦게 들어왔을 때 현관에서 저를 밤새 기다리던 그때 그 모습처럼 상처 받은 듯한 눈빛이었다.
“글쎄, 마음대로 생각해.”
“그딴 짓 그만두라고 했지!”
이소의 고함에 두 사람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분노로 손이 벌벌 떨렸다. 어떻게 된 인간들이 조금만 자신들 눈에 안 보이면 음침하게 뒤를 밟느냔 말이야.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 주영이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찾는 듯했다가 손을 팩 쳐내곤 한숨을 쉬었다. 답답한 듯 보였다. 한참 동안의 적막 끝에 주영이 입을 열었다.
“윤이소, 차해준은 네가 구제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야.”
이소는 주영을 험악하게 노려봤다. 주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소의 앞으로 느리게 다가왔다. 188cm의 훤칠한 키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날이 선 시선이 저절로 올라와 붙는다. 그러나 마주한 주영의 표정에서는 어떤 것도 읽히지 않았다. 주영이 흐트러진 이소의 옷깃을 얌전히 정돈하며 뇌까렸다.
“이 바닥에 있다 보면 말이야. 반반한 낯짝을 하고 기저에는 음침하고 사특한 생각만 가득한 인간들을 아주 많이 만나게 돼. 앞에선 다정한 말로 꾀인 후에 네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고 입맛대로 개조하지. 그들은 네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신뢰를 아주 가볍게 박살 내고 순종하길 바랄 것이며, 기어코 정상적인 사고가 불능하도록 널 세뇌할 거야. 너같이 순진하고 바보 같은 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잡아먹히겠지.”
소름 끼치는 가설이며 과민반응이었다. 해준을 콕 집어 구체적으로 괴물 취급을 하는 주영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자 주영이 이소의 셔츠 깃을 말없이 만지작거렸다.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얼굴은 꽤 가까이 있었다.
“차해준은 잊어. 물론 이젠 다시 돌아오기도 어렵겠지만 괜한 동정심으로 미련 갖는 일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내 사람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주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내 사람?”
이소의 동공이 흔들림 없이 주영을 응시했다.
“그리고 내 마음은 내가 알아서 해. 나한테 집착하는 형 마음도 형이 알아서 하듯. 다른 건 몰라도 피차 누굴 만나는지는 신경 꺼. 월권이니까.”
“아, 월권.”
월권이라고. 조용히 읊조리던 주영이 돌연 이소의 목도리를 아래로 휙 젖혔다. 처음에는 작은 반점 정도로 생각했던 목덜미에 새로 생긴 커다란 잇자국이 선명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붉은 자국은 일전에 병원에서 해준이 이소의 목에 남겼던 것과 꼭 같았다.
“왜, 아예 숨통을 끊어 달라고 하지 그랬어.”
“선 넘지 마!”
이소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쳐내고 늘어진 목도리를 끌어 올렸다. 주영이 고압적으로 노려보며 낮게 뇌까렸다.
“윤이소, 정신 차려. 잊었나 본데 그 새끼는 법적으로 접근금지 조치 상태야. 네 발로 찾아갔다고 하더라도 좋다고 발정 나서 이딴 개 같은 짓을 저지르는 새끼를 더 봐줄 인정은 없어.”
“경찰에 알리기만 해, 여행 따위 다 때려치우고 돌아갈 거야.”
주영이 말없이 노려보자 이소는 이를 악물었다.
“못 할 거 같지? 어디로든 형 없는 곳으로 갈 거야.”
여행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저를 애 취급하고 해준을 욕보이는 주영에게도 화가 났고 여행 전에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상황을 악화시킨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냥 다 싫었다. 이소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대충 꺼내 놓은 여행서와 핸드폰, 이어폰 등을 거칠게 집어넣으며 씩씩댔다. 반은 충동적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이런 기분으로는 여행이고 뭐고 주영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격양된 태도로 자리를 피하려는 이소의 손목을 주영이 빠르게 낚아챘다.
“놔, 놓으라고.”
“…….”
“장난 아니야. 여행 안 간다고!”
몇 번이고 손을 뿌리치며 발길질을 했지만 주영은 손만 놓지 않은 채 말없이 그 패악질을 다 받아 줬다. 결국 이소가 눈에 날만 세운 채 씩씩거리며 움직임을 멈추자 주영은 부러트릴 듯 잡았던 손아귀 힘을 조금씩 거뒀다.
그렇게 한참 동안의 적막이 이어졌다.
주영이 깊게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한결 진정된 톤이었다.
“…미안해.”
이소가 무어라 말을 더 하려 할 때 주영이 말을 가로챘다.
“집을 나가는 문제는 다시 생각해 봐. 별장이 답답하면 도시로 가면 되고, 해수가 힘들어한다면 내가 노력하고 풀어 주면 되는 문제야.”
“또 그딴 식으로 일방적으로….”
“말했지, 내가 앞으로 더 잘할 거라고. 넌 그냥 내가 주는 선의를 받기만 하면 돼.”
이소가 말을 받아치려는데 다시 한번 주영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주영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전화를 받아 들었다.
“왜.”
주영은 통화를 하면서 이소에게 바짝 다가왔다. 불쾌해져 시선을 바닥에 내리꽂은 이소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주영은 손끝으로 이소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졌다.
“장난해? 손대지 마.”
이소가 손을 팩 쳐내자 주영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이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수화기 속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이소의 얼굴을 뚫어지게 마주하고 있었다. 이소 역시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주영을 노려봤다.
‘난 너한테 다 줄 거야.’
주영이 입 모양으로 말하며 이소의 뺨에 손을 댔다. 차가운 손이 흥분으로 붉어진 뺨에 닿았다. 주영은 천천히 뺨을 문질렀다.
‘더 줄 수도 있어.’
“필요 없어.”
이소가 이를 갈며 노려보는 내내 주영은 말없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간헐적으로 눈만 깜빡였다. 이소의 이글이글한 시선을 마주하던 주영은 눈을 한 번 깊게 감았다 뜨며 ‘내가 못되게 말했어. 사과할게. 화내지 마, 여행 가자.’ 하고 천천히 읊조렸다. 사과를 받으면서도 주영이 져 준다는 느낌이 들어 이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단 빨리 터졌군.”
전화를 하던 주영이 급히 일어나 몸을 일으킨 채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이소는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거뒀다. 괜히 여행 전에 기분을 망쳤나 싶다가도 차라리 주영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빨리 알아차린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주영의 통화는 길게 이어졌다. 이소는 한숨을 쉬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말싸움을 하느라 해수를 너무 서점에 혼자 방치해 두었다. 몸을 일으켜 해수에게 가려던 때에 통화를 끝낸 주영이 이소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놈의 손목, 오늘 남아나질 않는다.
“이소야.”
“놔. 해수 데리러 가야 돼.”
아직 기분이 덜 풀렸다.
“해수, 내가 데려올게.”
이소가 냉한 눈으로 주영을 바라보자 주영이 면구스러운 듯 입술을 달싹이며 짧은 숨을 토했다. 평소 주영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안해…. 네 지난 시간 가볍게 여긴 거 아니야. 실수했어. 해수 일에도 과민하게 군 거 인정해.”
“형 성질나면 진짜 말 막 하는 거 알아? 나한테 해수가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그런 식으로 뭉개서 쏘아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형이 제일 잘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냐고.”
이소가 조용하지만 힘 있게 따박따박 쏴대자 주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제발 농담으로라도 나 없는 곳으로 간다는 말은 하지 마.”
“농담 아니야. 진짜로 아까는-”
“알았어, 내가 잘 할게. 그러니까… 화 풀어. …나 미워하지 마.”
주영이 이소의 손목을 살포시 그러쥐었다.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렇게 사람에게 악담을 퍼붓던 미인은 순식간에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이소가 치떴던 눈의 독기를 빼고 누그러진 기세로 대꾸했다.
“이깟 걸로 미워 안 하거든.”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에 주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소는 서점 쪽으로 턱짓했다.
“반성했으면 가서 해수 데려와 줘. 난 여기서 기다릴 거야.”
“나 기다려 줄 거야?”
누가 군대 기다린댔냐. 유학 가는 거 기다린댔냐고. 이소가 다시 가자미눈을 뜨고 고개를 흔들었다.
“뭐라는 거야. 얼른 데려와. 이번 여행에서는 둘이 좀 친해져야지.”
주영은 이소의 화가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아 보이자 다시 입꼬리를 씰룩대고 농담을 했다. 이소가 짐짓 냉한 눈으로 노려보자 얼른 손바닥을 펴고 웃었다.
“알았어, 네 말대로 노력 좀 해 볼게. 친해질 기회를 만들어야지.”
마지막으로 해수 좋아하는 책이라도 몇 권 더 사 주면 점수 따지 않을까. 주영이 물어 이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 주영이 몸을 돌려 서점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영이 자리를 떠나고 이소는 벤치에 앉아 제 손바닥을 편 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큰 발작이나 불안증도 없어진 지 한참 되었다. 분명 몸이 나아지고 있다. 주영이 걱정하는 마음을 모두 이해하지만 분명 제 몸의 변화는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주영의 우려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소는 지난 일로 인해 더욱더 단호하게 선을 긋고 싶어 했다.
집착. 애정이 커지면 그 사람이 내 소유물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 이소는 그 비뚤어진 감정을 아주 잘 알았다. 이소가 해준을 무서워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고 저 역시도 기저에는 해수에 대한 지독하고 고약한 애정이 숨어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주영이 제게 가지는 감정도 엇비슷할 것이라 추측했다. 죽은 줄로만 알고 살았던 아픈 손가락이 7년 만에 돌아온다면 저 역시도 그럴 것이다.
이소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꼭 쥐었다. 언제쯤 제 인생은 평탄해질까. 어지러운 팔자를 타고났느니 하는 말에 순응하며 산 것은 아니지만 반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는 평범한 사랑과 물 흐르듯 평온한 일상이 못 견디게 고팠다.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사건 사고는 질색이었다.
해준이 보고 싶었다. 어젯밤 재회가 모두 꿈만 같았기에 몇 번이나 볼을 꼬집으면서 별장으로 돌아왔다. 주영은 해준의 배경과 과오를 지적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해준과 있으며 제가 느꼈던 감정은 안정과 인정이었다. 제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 주었고 직접 걸을 수 있게끔 길을 닦아 주곤 했다. 이소가 원했고 해준이 앞으로 주기로 한 것은 격려와 신뢰였다. 그것 외에 더 이상의 유리온실은 바라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왜 이리 안 오지.”
책을 몇 권을 사길래 함흥차사야. 이소는 주영이 사라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친해지는 방법으로는 무언가 사 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는 주영이라 일곱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또 명품관까지 들른 것은 아닌지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이소가 막 일어나 서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손안의 전화가 울렸다. 주영인가 했더니 예고 없는 해준의 전화였다. 백 일 만에 전화로 듣는 목소리라 긴장감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처음 하는 통화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뛰었다.
“여보세요, 교수니-”
- 이소 씨. 지금 어디예요.
수화기 건너편의 해준의 목소리는 다급해 보였다.
“저 지금 공항이죠.”
- 지금, 하, 아니…. 아, 아니에요. 지금 어디, 몇 번 게이트. 아니, 차 돌려. 기습할 겁니다.
“공항에 오셨어요?”
해맑은 이소의 목소리와 달리 해준은 답지 않게 말을 더듬기도 하고 같이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정신없이 통화를 이어 갔다. 여보세요? 교수님. 다시 한번 부르자 해준이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혹시 지금 윤주영 같이 있어요? 같이 있으면 대답은 따로 하지 말고 바로 해수 데리고 자리 피해요.
해준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수화기 반대편에서 울리는 한숨 소리가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형 지금 옆에 없어요, 말씀해 보세요. 침착하게 대답하자 한참 말이 없던 해준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 윤주영이 다 죽였어요. 윤치승 회장, 이명희 본부장, 고태균 대표와 그 외 7명 전부. 아, 상근이까지 여덟 명.
상근? 오상근 씨? 이소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었다.
“…….”
이소가 잠시 말이 없자 해준은 예상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 화장실에 떨어져 있던 이명희 이사의 손톱에서 윤주영 DNA가 검출됐어요. 해류로 러시아 바다 근처에 떠밀려 온 시체 3구가 당시 고 대표가 데리고 있던 놈들로 확인됐고 조직 쪽에서 자칭 해결사로 불리던 중국인 브로커가 윤주영 사주로 시신 8구 모두 처리한 걸로 자백했어요.
이소가 잠시 말을 잃었다. 눈동자도 갈 곳을 잃었다.
“그게 무슨, 저 지금…. 그럼 지금 형이 살인을, 사람을 죽였다는….”
- 공항은 미리 연락한 공항 경찰에 의해서 이미 막혔고 아마 이소 씨와 해수를 버리고 도망간다면 미리 연락한 공범과 선박으로 이동할 계획이 커요. 우선은 이소 씨는 나를 만나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고 여기는 경찰에게….
“해수….”
이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해준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해수, 해수가 아직 서점에서 안 왔는데. 이소가 고개를 들었다. 말을 다 맺지 못하고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미 왔어도 한참 전에 왔어야 할 아이가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소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불안한 적막을 알아챈 해준의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 자기야, 해수 어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