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23/50)

6

「본격적인 여름을 맞이하기 전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한반도 남쪽에서 북태평양 고기압이 예년보다 크게 세력을 넓히고 있고 일본에선 65년 만에 가장 빠른 장마가 찾아왔는데요. 우리나라도 이르면 다음 주부터….」

“아저씨, 죄송한데 라디오 볼륨 좀 줄여 주세요. 애기 잠들어서요.”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해수는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가 떨어졌다. 늦은 저녁 비 냄새가 옅게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비가 오려나 짐작했는데 때이른 장마가 온다고 했다. 쥐들이 천장 바닥을 갉아대고 낡아서 떨어진 창틀 사이로 빗물이 고일까 고민이다. 집을 좁히더라도 조금 더 나은 환경으로 이사를 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 어느덧 익숙한 골목에 택시가 접어들었다.

“해수야, 집에 가서 자야지. 아빠 안아.”

이소는 뛰어노느라 녹초가 되어 버린 해수를 겨우 안고 계단을 올랐다. 어느덧 20kg가 훌쩍 넘는 무게라 팔다리에 힘을 빼고 잠이 들면 짧은 거리를 옮기는데도 제법 진땀이 났다.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는 중에도 졸고 있는 해수에게 얼른 칫솔을 물리고 온수를 틀어 후다닥 씻겼다. 선풍기에 머리를 말리고 있는 해수를 뒤로하고 이부자리를 만들고 머리를 털어 주었다. 날개뼈에 닿을락 말락 하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샴푸향이 폴폴 났다. 어린이 샴푸가 값이 비싸 콩알만큼 짜 쓰던 것이었는데 언젠가 집에 들렀던 해준이 로션과 함께 잔뜩 사 주고 갔다. 그 덕에 거품을 많이 내서 씻길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이불을 턱 끝까지 덮은 해수 곁에 이소도 베개를 가져와 모로 누웠다. 졸음이 턱 밑까지 차오른 해수가 이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아빠, 기분 이제 좋아졌어?”

“응?”

“낮에는 아빠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좋아진 거 같아.”

티가 났었나. 지쳐 있던 심신은 해수를 만나고 난 후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희석되고 갈무리가 됐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더 많이 웃었고 장난도 훨씬 많이 쳤다. 핫도그를 먹다가 케첩을 코에 묻히기도 했고, 평소에는 사 먹지도 않았던 색소가 잔뜩 들어간 음료수도 나눠 먹었다.

사람은 우습다. 지금은 소중한 이가 미래에는 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지금까지 미뤄 두고 제한했던 것들을 허겁지겁 해치우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결국 상대가 떠나고 나면 생각보다 얼마 안 되는 추억을 끌어안고 후회하며 산다. 이소는 저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될까 괜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해수가 저를 걱정할까 봐 이소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해수랑 있으니까 좋더라. 아빤 왜 그동안 그렇게 바빴지.”

“돈 많이 벌어야 하니까 그랬지. 괜찮아.”

말랑말랑한 해수의 볼을 매만지던 이소는 해수가 무심히 던진 말에 입을 닫았다. 정작 해수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는데도 제가 그동안 아이에게 알게 모르게 궁핍한 티를 냈던 것 같아 면구스러워졌다.

“미안해. 아빠가 많이 못 놀아 주고, 시간을 같이 못 보내 줘서…. 돈 많이 벌면 해수랑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랬어.”

“돈이 많으면 좋은 거야?”

“응, 좋지. 여기보다 더 큰 집 살 수도 있고, 해수 좋아하는 레이스 달린 치마도 많이 입을 수 있고, 지금보다 공부도 많이 가르쳐 주는 학교로 옮길 수 있지. 해수 영어유치원 다니고 싶어했잖아.”

사실 그랬다. 범양이 들쑤시고 갈 때마다, 주영이 왔을 때마다 만약을 가정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순리대로였다면 누구보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맛 좋고 영양 많은 음식을 먹으며, 좋은 교육과정을 밟으며 지낼 해수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아들인 주영에게만큼은 투자를 아끼지 않는 윤 회장 내외였으니 아마 그의 손녀인 해수에게도 잘 해 주었을 것이다.

물론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은형과 주영은 공인된 연인관계도 부부 사이도 아니었으니 갑작스럽게 태어난 해수가 환영받지 못한 아이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이소는 때때로 그런 공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제가 줄 수 없는 것들을 당연하게 가진 그들이 아이를 길렀다면 해수가 조금 더 유복하게 자랐을 텐데. 지금보다 더 날개를 펼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도리어 가지지 못한 제 처지를 탓하곤 했다. 아마 지금 해수에게 선택권을 준다면 지금 저와는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쓰렸다.

“아빠, 근데 그러면 지금보다 더 바쁜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니까.”

“그럼 난 지금이 좋은 거 같아.”

이소의 말에 해수가 씩 웃었다. 곧 졸음이 오려는지 크게 숨을 들이쉰 해수가 이소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 하루 종일 잡고 있었던 손은 어릴 때와 다르게 잘 영근 키위만치 커졌다. 해수의 도톰한 손가락이 이소의 손마디를 꼭꼭 눌렀다.

“난 아빠랑 같이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거든.”

나 먼저 잘게, 아빠도 잘 자. 해수는 그 말을 끝으로 길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이소는 코끝이 매워지는 걸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자, 내일 보자. 정말로 피곤했는지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해수의 손에서 스륵 힘이 빠졌다.

이소는 여전히 제 손가락에 얽혀 있는 해수의 손을 쥔 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들여다봤다. 저를 한 톨도 닮지 않은 얼굴이어도 이소는 해수를 참 예뻐했다. 잠에 씌여 무방비한 표정에서는 스물이 넘은 은형의 모습도 보이고, 미간을 찌푸리다 옅게 미소를 띤 얼굴에서는 스물네 살 주영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 이소가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제 한 사람은 세상에 없고 또 한 사람은 저를 괴롭게 하고 있지만 둘 사이에 나온 아이 하나가 제 삶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사람 일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이소는 해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살짝 열어 둔 창문으로 습도 높은 밤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해수야….”

이소는 노을이 잔뜩 진 둑방에서 둘이 함께 토끼풀을 찾던 일상을 떠올렸다. 샤워를 하고 나와 벌거벗은 채로 밥상을 사이에 두고 옷을 입히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세 살, 커다란 해바라기 가면을 만들겠다고 온 집 안을 노란 색종이 조각과 물풀로 엉망진창을 만들었던 네 살, 소풍에서 돌아온 날 아빠에게 주겠다며 가져온 초코파이가 다 녹았을 때 실망해 주저앉아 오열하던 다섯 살, 밤산책을 나와 강아지풀과 꽃가지를 모아다가 이소의 밀짚모자에 잔뜩 꽂아 두었던 여섯 살, 해준이 사 준 수십 개의 풍선을 들고 뛰어오며 해사하게 웃던 일곱 살의 해수를 떠올렸다.

두 사람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추억더미들을 더듬자 괜히 웃음이 났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해수가 잊지 않고 저와의 시간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고마워. 다 고마워.”

둥근 달 같은 이마에 입을 맞추자 해수가 몸을 비틀어 안겨 왔다. 이소는 작은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끌어안았다. 한 품에 쏙 들어오던 작은 아이는 어느새 제 허리를 감싸안으며 파고든다. 이소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나의 아이, 나의 천사, 나의 우주, 나의 해수.

* * *

아주 잠깐 잠이 들었었나 보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해수는 이불을 발로 차고 요 바깥에 다리를 걸치고 잠들어 있었다. 이소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해준에게 뒤늦은 메시지를 보냈다. 집에 잘 들어왔고, 깜빡 잠이 들어서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전한 뒤 몸을 일으켰다. 메시지를 보내고 난 후 눈을 더 붙이려 했으나 무거운 몸과 달리 머릿속이 영 복잡해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해수가 깨면 놀랄까 낮은 조도로 수면등을 켜 두고 신발을 고쳐 신었다.

눅눅한 방 안 공기와 달리 현관문 바깥의 밤바람은 선선한 편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파고들 때마다 진창을 구르던 기분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일 층에 내려와 낡은 평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팔을 뒤로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은 없고 달도 보이지 않는 그믐, 유독 별이 잘 보이는 밤이었다. 사람이 적은 골목은 이른 폐장으로 불이 꺼진 가게가 많았고, 방치된 가로등의 조도가 낮아 도리어 어두운 밤 별을 보기에 좋았다.

“좋네.”

별을 보고 있으면 이따금씩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부모님 생각이 났다. 엄마의 손을 잡고 마당을 뛰어다니던 것이나 아버지의 서재에 가서 책을 꺼내려다가 와르르 쏟아 버린 두 가지 일 말고는 어릴 때 기억이랄 게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복이 미소가 피어올랐다. 물기에 젖은 잔디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넘어질까 봐 조심히 뛰어오라던 다정한 목소리나 책더미에 깔린 저를 보고 호탕하게 웃었던 그 날의 분위기만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곱씹곤 했다. 어쩌다가 저를 두고 한꺼번에 돌아가셨는지는 몰라도 짧은 시간 사랑받고 자랐다는 것만은 확실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소는 만족하며 살았다.

“응, 그러니까…. 아니야, 엄마가 곧 가면 애들 봐주면 되지. 그때 보내준 돈으로 급한 불은 끈 거지? …아유, 잘됐어. 그래. 엄마가 다 해 준다고 했잖아.”

멀지 않은 곳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댄 팔을 당긴 후 몸을 기울인 이소는 고개를 빼어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두운 조명 아래기는 했지만 정숙이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며 빌라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장님?”

“그래, 그러면 엄마가 내일 또 전화…, 어, 이소 씨! 준교야, 나중에 전화할게.”

자는 줄 알았는데 나와 있었네, 멋쩍게 웃으며 잰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온 정숙이 얼른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늦은 시간에 예고없이 정숙을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소는 눈을 깜빡이며 정숙이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슈퍼 다녀오셨나 봐요. 정숙이 웃으며 ‘그냥, 술이 좀 땡겨서’ 하고 웃었다. 어쩐지 꽤 오랜만에 정숙과 단둘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아 퍽 반가운 마음에 이소는 여유있게 미소 지었다.

“오늘 잘 다녀왔어? 해수랑은 잘 놀고?”

“그럼요. 얼마나 뛰어다니는지 이젠 제가 잡지도 못하겠더라고요.”

“내가 말했잖아. 쟨 운동시켜도 잘할 거라니까.”

아이 이야기로 물꼬를 터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늘어놓던 정숙이 못내 아쉬운 듯 얼굴을 긁적였다. 매번 그렇듯이 이소와의 대화는 저보다 서른 살은 어린 이소가 제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데 그쳤고 그동안은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제 아들과 같은 녀석이 얼굴을 죽상을 하고 여름밤에 청승을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오늘 제가 코다리찜에 어묵국물을 곁들여 먹었다는 유의 쓸데없는 이야기는 쏙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저 근데 사장님.”

“응.”

“혹시 미국… 가세요?”

일부러 들으려던 건 아닌데, 이소가 미안한 듯 말꼬리를 늘였다. 정숙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자정까지 한참 남은 시간, 비닐봉지에는 안주도 넉넉했다. 큰 눈으로 제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말간 얼굴의 이소를 쿡 찌르며 정숙이 넉살좋게 웃었다.

“이소 씨, 시간 있어?”

“지금요? 네, 있죠.”

이소는 맥락없이 묻는 질문에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숙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럼 나랑 술 한잔할까?”

* * *

오래된 미닫이문은 워낙 두께가 얇아 조금만 큰 소리를 내도 새어 나가기 일쑤였다. 해수가 아직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이소는 엉금엉금 기어 주방 앞 싱크대에 편 작은 상 맞은편에 구겨 앉았다. 정숙이 사 온 마른 오징어와 땅콩 따위를 접시에 담아 놓고 잔 두 개를 놓고 기다리자 정숙이 곧 문을 빼꼼 열고 들어왔다. 평소에 즐겨 마시던 빨간 뚜껑의 두꺼비 소주를 들고 올 줄 알았는데 정숙은 난생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술병을 흔들어 젖혔다.

“웬 술이에요?”

이소가 술병을 받아 들었다. 이렇다 할 라벨지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마개마저 시중에서 유통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자 정숙이 푸근하게 웃으며 병을 받아 들었다.

“차 교수 집에서 받아 왔지. 정월 첫해일에 담가서 버들가지 날릴 때쯤 완성해서 백일주(百日酒)라나… 뭐 그렇게 말은 하는데, 나는 그런 거 하나도 모르겠고 얻어먹었는데 맛있길래 달라고 했더니 가져다 드시라고 주더라고.”

“와…. 엄청 좋아 보이는데요.”

“좋은 술은 좋은 사람과 마시라잖아. 내가 누구랑 마시겠어. 이소 씨랑 마셔야지.”

정숙이 싱긋 웃으며 술병을 땄다. 명주 천으로 꼭 둘러맨 마개가 빠지자 놀라울 정도로 향긋한 냄새가 좁은 주방에 퍼졌다. 이소는 얼른 정숙의 손에서 병을 받아 들고 두 손으로 술을 따라냈다. 동네 마트에서 산 작은 컵에 몇십만 원이나 할지도 모르는 좋은 술이 꼴꼴 들어찼다. 상앗빛을 띤 술이 삼 분의 이가량 찼을 때 정숙은 잔을 내려놓고 이소에게도 반 잔을 따라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숙이 이소보다 조금 더 잘 마셨다.

이리 좋은 술을 꺼내 올 줄 알았다면 안주라도 더 준비할 것을 그랬다. 이소는 냉장고에 남은 명란과 오이 등을 생각하며 메뉴를 구상했지만 그런 것쯤은 크게 개의치 않는지 정숙은 컵을 부딪혀 왔다.

“앞으로 있을 우리의 좋은 날을 위하여.”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이 할 법한 건배사를 나지막이 내뱉은 정숙이 코를 찡긋하며 술을 들이켰다. 꼴깍꼴깍 소리를 내며 그 독한 술을 한꺼번에 마신 정숙이 푸하 숨을 내뱉자 진한 꽃내음이 났다. 생각보다 마실 만한가 보다. 이소는 고개를 돌리고 한 모금을 머금어 삼켰다.

달았다. 술을 자주 즐기지 않는 이소조차도 쉽게 꿀꺽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게 감도는 말린 과일 맛이 진했다. 은은한 꽃내음을 맡으며 털어 넘기면 담백하게 떨어지는 단맛과 끝에서는 낯선 청량함까지 감도는 신기한 술이었다.

“맛있어요.”

“그치. 그때 차 교수 집에 내가 며칠 더 있다가 내려왔잖아. 얻어먹기도 많이 얻어먹었는데 약주로 잠깐 나온 이 녀석이 맛나더라고. 나 곧 간다고 하니까 차 교수가 주더라니까.”

자연스럽게 던진 말이었으나 정숙은 냉큼 이소의 눈치를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 미국 사는 아들과 합치겠다는 언질 한 번이 없었고 유난스럽고 가벼운 정숙의 성정에 이런 일이 있었더라면 기미만 있었어도 금세 달려와 이야기를 했을 테니 이소가 이리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소는 잔을 만지작거리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드님이 오시라고…, 한 거예요?”

“…그렇게 됐지.”

정숙은 멋쩍게 웃었다. 평소 미국으로 건너간 아들은 두어 달에 한 번씩 전화를 할 정도로 소식이 뜸했다. 남편과 이혼한 후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자식들을 키워 내고 장가까지 보냈다. 술만 마시면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왜 사람이 자식을 키울 때 짝이 있어야 하는지를 몇 번이고 하소연하다 잠들곤 했다. 그래서 유독 혼자 해수를 키우는 이소에게 마음을 주었고 안타까워했다.

“이젠 거기서 자리 좀 잡으셨나 봐요. 한동안 연락이 없으셔서, 사장님이 돈… 보내주시고 그러셨잖아요.”

얼마 안 되는 돈이었지만 조금씩이라도 보냈다. 한국에 있는 조모가 그래도 애들 용돈이라도 보낼 수 있는 형편이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하고 나면 며칠 뒤 고맙다고 연락이 오곤 했다. 돈을 보낼 때만 전화가 오는 게 씁쓸한 현실이기는 했지만 그렇게라도 통화를 하고 나면 어린 손자 손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사업이 잘됐대. 뭐, 석유 뽑는 사업 있잖아. 그게 대박이 터졌다나. 그래서 나보고도 한국에서 혼자 청승 떨지 말고 얼른 와서 합치라대. 지 엄마 줄 방도 다 있다고.”

“와, 세상에! 진짜예요? 정말 너무 잘됐어요, 사장님!”

최근 보기 드물게 이소가 환하게 웃었다. 이소는 이렇게 좋은 일이 있는데 왜 말을 그동안 안 했냐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새 술기운이 달아올랐는지 새빨갛게 익은 귀를 하고 긴 다리로 휘적휘적 밥상을 건너가 냉장고 앞에 닿았다. 정숙이 됐다고 괜찮다며 말렸지만 이소는 눈을 접어 웃으며 ‘사장님이셨어도 저한테 이렇게 해 주셨을 거잖아요.’ 하며 정숙을 도로 앉혔다.

냉장고에는 해준이 준 술에 어울리는 고급 식재료는 없었지만 이소의 머릿속에 대략적인 레시피는 만 가지 이상 있었다. 그나마 나쁜 머리는 아닌지 대충 음식을 먹으면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었고 어디서 한 입 먹은 맛은 엔간해서는 잊지 않았다. 이소는 냉장실을 뒤적거리며 간단한 재료들을 꺼내어 늘어놨다.

냉장고 안에서 나온 재료들은 평범했다. 볶음밥용으로 쓰는 얼린 새우살, 오징어 조각과 쪽파, 통마늘, 고추, 버섯 따위였다. 이소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오래된 웍을 꺼내 들었다. 아껴 두었던 올리브유의 절반을 콸콸 쏟아붓고 얼었던 새우살과 오징어 조각을 물에 가볍게 씻어 냈다. 키친타올의 물기를 제거하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했다. 올리브유의 온도가 올라갈 동안 통마늘을 빠른 속도로 썰어 낸 이소는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정숙은 술을 홀짝이며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아쉬울 법도 하고 제게 이야기를 하지 않아 서운할 만도 한데 이소는 그저 축하한다며 안주를 만들고 있었다.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건지 실은 제게 정이 없는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마늘과 해산물이 익어 가기 시작하자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가 주방에 퍼졌다. 이소는 환기 대신 현관문을 열고 방충망을 걸어 내렸다. 작은 그릇에 소담하게 옮겨 담은 음식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본 것만 같은 요리였다. 정숙이 언제 이런 걸 배웠냐 물었더니 이소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것을 보고 기억나는 대로 따라 만들었다고 했다.

썩 괜찮은 안주와 함께 한 술자리는 나쁘지 않았다. 이소는 술이 입에 꽤 잘 맞았는지 정숙이 주는 대로 받아 마셨고 삼십 분도 안되어 안주는 동이 났다. 눈이 풀린 이소가 다시 일어나 안주를 더 만들겠다고 했으나 정숙이 자리에 앉히기를 두어 번을 더했다. 이소는 한참 정숙과 보냈던 지난 시간에 대해 반추하다가도 정숙의 얼굴을 빤히 보고는 ‘잘됐다. 우리 사장님 너무 잘됐다.’ 하며 또 배시시 웃었다. 정숙은 이소의 축하가 거짓이 아님에, 제가 잠시라도 그 마음을 의심했다는 사실에 몇 번이고 마음이 미어지고 찡해졌다.

“그래서… 부동산 더 안 알아보셨구나.”

“나도 갑작스럽게 연락 온 거라 경황이 없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지. 골치 아픈 거 안 하고 가서 그냥 손주들 봐주면서 살려고.”

“너무 좋죠. 아가들 본 지도 오래됐잖아요. 여기는 그럼 이번 달 말에 그냥 정리하면 되겠네요.”

“이소 씨는 어쩌게.”

“괜찮아요. 일 구하면 돼요.”

“걱정이다. 해수 연장반 또 넣어야 하는데….”

그건 걱정 마세요. 정숙에게 잔을 쨍 맞추며 이소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동안 정숙이 때늦은 영어공부를 한다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미국에 가는 이유 때문이었다니. 비행기 타는 거 너무 신나시겠어요. 정작 자신도 타 본 적이 없으면서 이소는 또 한참 들떠 있었다.

“이소 씨.”

“예에.”

“내가 많이 미안해.”

“아니에여…. 사장님이 뭐가 미안하세요….”

볼이 발갛게 물든 이소를 보며 정숙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오전부터 푹 꺼진 눈을 하고 있던 이소를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돈을 갚으러 다녀오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눈에 띄게 어두운 얼굴을 한 이소를 보며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놓으라고 닦달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이소는 그때마다 괜찮다고 입을 다물었지만 정숙은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곤 했다.

“항상 의지가 안 되는 사람이라, 자기가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애 기르면서, 나 챙기면서.”

“아니에요. 사장님이 얼마나 의지가 되는데요.”

“말로만.”

“진짠데.”

이소는 입술을 죽 내밀고 서운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럼 왜 맨날 나한테는 속엣 이야기를 하나도 안 해, 가족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면 서운해. 결국 정숙이 먼저 볼멘소리를 하자 이소가 떨궜던 시선을 당겨 올렸다.

“제가 괜히 짐이 될까 봐요.”

이소는 큰 눈을 깜빡이고 멋쩍어졌는지 또 한 잔을 들이켰다. 이제는 목덜미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흰 피부는 군데군데 물감을 떨어뜨린 듯 붉게 번졌다. 정숙은 무어라 더 말을 할까 하다 이소가 입술을 우물대는 것을 보고 다시 입을 닫았다. 또 제멋대로 한마디 얹으려던 습관이 나와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조금 기다리자 이소가 무거운 입을 떼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 누가 왔었냐면요.”

“응.”

“해수 아빠요.”

“응? 누구?”

“해수 친아빠요.”

정숙이 눈을 부릅떴다.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소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해수와 이소는 정말 닮지 않은 얼굴이기도 했거니와 성부터 달랐기 때문에 동사무소 혹은 경찰서에서 종종 오해를 사거나 했을 때도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증인이 되어 주던 것이 정숙이었다.

다만 지난 2년간 이소가 정말 뭣 빠지게 고생하고 있을 때 친부라는 작자는 나타난 적도 없었고 연락 한 번 하는 꼴을 못 봤다. 때문에 정숙은 속으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 작자를 몇 번이고 씹어 죽였다. 스물대여섯밖에 안 먹은 애가 엄마 아빠 노릇을 동시에 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어떤 쌍놈이 애만 싸지르고 이 어린것에게 맡기고 얼굴 한 번 보이질 않는지 창자가 꼬였다.

“개쌍 호로 새끼가 어디라고 여길 왔어? 찢어 죽일 놈이….”

“아이, 사장니임…. 해수 들어요오….”

이소는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쉿, 쉿 하고 자고 있는 해수의 눈치를 살폈다. 음, 음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한결 담담해진 표정으로 오전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자극적인 것들을 빼 버리고, 감정도 최대한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사실만. 이소는 괜히 제 발목을 매만지며 몸을 좌우로 작게 흔들었다. 그래서 결국은 제가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어요. 하고 말을 마치자 정숙은 이를 벅벅 갈며 새우를 잘근잘근 씹어 넘겼다.

“잘했어, 다신 오지 말라고 해. 어딜 와. 나중에 또 오면 나 꼭 불러. 그놈 쌍판대기 구경이나 좀 하자. 칠 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이제 와서 무슨, 뭐? 애를 달라고?”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은 아니고, 그 집안이요.”

“그 새끼도 한통속이야. 아마 지 엄마 보내서 말 안 통할 것 같으니까 아들 보냈겠지. 어휴,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인 줄 알았는데. 그 여편네도 오면 머리채 다 뽑아 버릴 거야.”

정숙은 정말로 분통이 터지는지 제 가슴을 팡팡 쳐 가며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소도 제 답답한 속을 정숙이 대신 뇌까리는 욕을 들으며 조금씩 풀었다. 이소는 아예 병을 잡고 잔에 콸콸 따라 목을 축였다. 생각보다 술이 달큰하다는 것도 한몫하겠지만 왜 사람들이 속이 쓰릴 때 그렇게 술로 마음을 달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날이 섰던 감정은 조금씩 알코올에 둥글게 희석이 되고 눈앞의 문제들은 다 아무것도 아니게끔 기분이 말랑말랑해졌다.

“흔히 기른 정이 중요하다고들 하잖아요.”

이소는 다시 한번 쫍 소리를 내며 술을 털어 넣었다.

“말이라고. 당연히 기른 정이 중요하지. 낳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는데, 그거 아니야.”

“근데 왜애…, 자꾸만 자신이 없어지는 건지 모르겠어요….”

“…….”

“내가 그냥 복이 없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정숙은 말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어렵지, 어려운 일이야. 제 아이도 아닌데 저만큼 길러낸 것도 대단하고 어린 나이에 책임감을 갖고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훌륭하고.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었다. 제 아들은 저 나이대에 못해도 서너 명은 꼭 붙어 다니며 연락이나 도움을 주고받곤 했는데 이소의 곁에는 퍽 사람이 없었다. 타고나기를 외롭게 태어난 사람처럼 딸과 저를 제외하곤 참 사람이 진득하게 붙어 있지를 못했다.

“그런 생각 하지 마, 이소 씨 열심히 사는 거 다 알고 해수도 누구보다 잘 알어. 봐, 반질반질하니 잘 키웠잖아. 봐봐, 보라고. 그리고 일곱 살밖에 안 된 애가 얼마나 속이 깊어. 애답지 않게 떼 한 번 안 쓰고 어릴 때부터 얼마나 얌전했어.”

“애답지 않은 거요. 그거요,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려요.”

이소가 푸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입에서 꽃 더미가 쏟아져 나오듯 진한 향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아이라면 떼도 쓰고…, 화도 내고…, 고집도 부리고 그래야 맞는 건데. 해수는 꼭 열여섯 살처럼 굴어요. 아빠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괜찮다고만 하니까 때때로 저는 그게 정말…, 괜찮은가 보다 하고… 방관하게 돼요. 그럼 내가 좀 편해지니까….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귀한 애인데. 혹시 알아요, 친부랑 살았으면 더 애답게 살았을지.”

“쓸데없는 소리 한다.”

이소는 흔들거리던 몸을 멈췄다. 볼과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숙은 이소에게서 잔을 빼앗아 들었다. 그만 마셔, 절반이나 마셨네. 이야기는 더 들어 줄 마음이 있었지만 이소의 눈이 풀려 있은 지 오래였다. 그동안의 주량으로 보아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테다. 망연히 잔을 빼앗긴 이소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정숙은 문득 고개를 내려 이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차 교수한테는 이야기 안 해 봤어?”

“교수니임…? 차해준?”

이소가 웬일로 해준의 성과 이름을 다 불렀다. 취했군, 정숙은 눈썹을 끌어 내리고 ‘그래, 차해준 교수. 이소 씨 친구.’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소는 느리게 고개를 돌리더니 낡은 싱크대에 등을 기댔다.

“안 돼요.”

“뭐가.”

“말 못 해.”

이소는 뒤통수를 기대고 푸흐흐 웃었다. 정숙이 주안상을 치우다 말고 쪼그려 앉았다. 왜, 뭐가 안 되는데. 이소는 정숙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거 봐라, 정숙은 제 무릎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이소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래도 나름 어른 대접을 해 주느라 한 번도 손 댄 적 없는 영역이었지만 때로는 너무나 철만 일찍 든 막내 아들 같아 볼을 꼬집거나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마침 술도 마셨겠다 정숙은 마음껏 소원을 풀었다.

“왜. 차 교수한테는 말 못 해? 나보다 더 잘 들어 줄 텐데.”

정숙은 해준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과 저보다도 더 해수와 이소를 잘 챙겨 주는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제가 미국에 가게 되더라도 그는 아마 이 부녀를 잘 거둬 줄 것이다. 정작 눈 앞에 겁 많은 새끼 송아지만 제 모습이 구질구질하다며 절대로 말을 않겠다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저 가진 거 쥐뿔도 없는데. 친부니 뭐니, 애를 데려가니 마니…. 일이 커져서 소송이라도 걸리면 그 큰 회사 상대로 전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럼 진짜 옆에서 봐도 너무 구질구질하잖아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얘는 뭐하고 살아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이 나이 먹고 아는 게 이렇게 없나…, 그렇게 생각할까 봐요.”

“누가 해결해 준대. 이야기라도 해 보라는 거지.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나는 알아, 차 교수 그거 물렁물렁해 보여도 사람이 참 단단하고 성실하잖아. 젊은 나이에 교수씩이나 할 테니까 얼마나 똑똑하겠어. 분명 이소 씨 도와줄 수 있을 거야. 못 도와준대도 옆에서 지지라도 해 줄 거야. 그러려면 이소 씨도 그렇게 매번 속으로만 꽁하지 말고 가서 말을 해야 알지.”

정숙의 말에 이소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더듬더듬 움직이는 시선은 선택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소야.”

“예에.”

정숙은 꼭 제 아들을 부르는 것처럼 상냥하고 나지막하게 이소의 이름을 불렀다.

“가서 말해도 돼, 차 교수는 다 들어 줄 거야. 네 편이 돼 줄 거야. 내가 없으면 제일 든든한 너의 보호자가 되어 줄 거야. 그러니까 오늘 나한테 했던 것처럼 편하게 속을 다 털어놔. 그래야 사람 관계가 유지되는 거야. 일방적으로 비밀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신뢰가 깨져 버리는 거야.”

이소 씨, 듣고 있어? 정숙의 말에 이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관계, 이소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지만 해준과 결부되는 순간 무시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정말 해준에게 모두 다 털어놓으면 실마리가 풀릴까. 적어도 후련은 할 것 같은데 그 이후의 일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고 할까 봐, 여태 그 협박에 겁먹고 이곳저곳을 도망 다니며 살았던 거냐고 저를 질책할까 봐 무서웠다. 다른 누구보다 해준이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우습게도 제 곁을 2년간 지킨 정숙보다 몇 달 얼굴을 맞대고 살을 섞었던 해준의 말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교수님 보고 싶다.”

입술 끝에서 나지막이 뱉은 말을 정숙은 듣지 못했는지 말없이 그릇을 치웠다. 이소만 그 옆에 쪼그려 앉아 몇 번이나 해준이 보고 싶다는 말을 저만 들리게 곱씹었다. 늦은 자정 덜그덕 절그덕 그릇이 물에 씻기는 소리만 요란히 주방을 채웠다.

* * *

“이소 씨, 들어가서 자자.”

“…저 더 마시고 싶어요.”

이소는 반쯤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팔을 잡아끈 정숙을 졸랐다. 밥상에서 언제 몰래 빼돌려 품에 안고 있었는지 뚜껑이 반쯤 열린 백일주와 잔 하나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안 돼. 가서 얼른 양치해. 얼른.”

“아, 한 번마안.”

“얼른. 이불 펴놓게 얼른 씻고 나와. 내가 해수 보고 있을 테니까 샤워까지 하고 자면 좋고.”

정숙은 이소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싱크대에 부어 버리곤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남은 술도 명주 마개를 꼭 닫아 찬장 깊숙이 숨겨 두었다. 잘 만든 안주와 남은 비싼 술이 아깝긴 했지만 더 마셔 대다가는 이소 앞에서 제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펑펑 울어 버릴 것만 같아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소는 정숙이 제 엉덩이를 펑펑 치면서 욕실로 밀어 넣자 문틀을 잡고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저 술 넣으신 거 다 봤어요. 또 먹을 거예요. 그거 제 거예요.”

“그래, 이소 씨 다 먹어라. 근데 오늘 말고 내일 먹어. 어여 가서 씻어.”

“치.”

입술을 툭 내밀고 들어가려던 이소는 다시금 머리를 내밀고 씩 웃었다.

“사장님 지금 되게 엄마 같다.”

욕실 문이 닫히고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던 정숙은 기어코 터진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 대여섯 살에 부모 죽고 나서 천정부지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자랐던 이소를 알기에, 큰아버지 집에 얹혀살면서 온갖 눈칫밥을 다 얻어먹고 결국은 남들 다 대학 갈 나이에 애를 기르기 시작한 막막함을 알기에, 이소가 던진 저 말에 묻어나는 미련과 동경을 읽고 정숙은 무너졌다.

저 애를 어쩌면 좋아. 정숙은 주책맞게 흐르는 눈물을 썩썩 문지르며 해수의 곁에 자리를 폈다. 서랍을 열어 이소의 옷가지를 앞에 두고 방 안에 있자 욕실 문을 열고 나온 이소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났다. 주방 등이 꺼지고 비누 냄새가 잔뜩 나는 이소가 이불 안으로 꼬물꼬물 기어 들어왔다.

“해수야아, 아빠 왔어.”

“아유, 애 깬다. 살살 말해애.”

목소리 조절이 안 되는지 잠든 해수의 귓가에 큰 소리를 내자 해수가 움찔거리며 이소를 밀어냈다. 아빠, 술 냄새 나. 웅얼웅얼하며 비적비적 곁을 떠나려 하자 이소는 바싹 따라붙어 해수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아빠…. 절루 가아….”

“응, 아빠도 사랑해.”

이소는 그렇게 해수의 등을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오늘 하루가 유독 길었다. 주영의 갑작스러운 방문부터 해수와 데이트, 그리고 정숙과의 술자리까지. 일 분 일 초 허투루 쓴 것이 없는 하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허했다. 제가 거절하기는 했지만 결국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소는 해수의 등에 이마를 부볐다. 내일, 내일은 꼭 만나야지. 하루 종일 얼굴 보고 있어야지. 해준의 스케줄 따위 알지 못하지만 이소는 제멋대로 그렇게 할 것이라 다짐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이소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정숙은 몇 번이나 이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채질을 했다. 젖은 머리가 싸구려 광고 부채에 사락사락 흩어져 날았다. 할 말은 많았지만 말을 아껴야 했다. 누구보다 곁에서 오래오래 돕고 부대끼며 살고 싶었지만 이미 제 손을 떠난 사람이라 그저 돌봐 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마음을 놓기로 했다. 어쩌겠는가, 제게는 일흔이 다 되어도 거둬야 할 자식들이 있었고 결국 그 찬란한 지옥에 걸어 들어가기로 한 것은 자신의 선택인 것을.

정숙은 불을 끄고 현관을 나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직은 제 전화번호부에 올라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남자의 이름을 꾹꾹 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이소에게 해준과의 신뢰에 대해 일장연설을 한 것과 달리 정숙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수화음이 몇 번 울리다 곧 해준이 전화를 받았다.

“응, 차 교수. 나야. 이소 씨 막 재웠어.”

- 잘하셨어요. 이제 가서 쉬세요.

“응, 올 거야?”

- 곧이요.

해준은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숙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새벽 한 시 반, 보통 사이라면 이 시간에 아무렇지 않게 친구 집에 방문할 리 없었지만 정숙은 일절 토를 달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 해준은 더 이상 제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에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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