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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 씨, 미안해. 나 오후에 나갈게.”
“그러세요. 피곤하면 하루 쉬셔도 되고요.”
정숙은 요 며칠째 잠시 가게에 나왔다가 금세 올라가는 등 아예 이소에게 가게를 맡겨 버렸다. 나이 든 여자들과 함께 지내 본 적이 없어 갱년기라든지 주부 우울증이라든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요새 정숙은 꼭 다른 것에 정신이 빠진 것처럼 가게 일에 소홀했다. 부동산을 왔다 갔다 하며 빈 점포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이소가 할 일이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학교 앞이나 다른 동네로 가려면 적어도 몇천은 더 필요해 아쉬움만 커졌다.
“으차.”
이소는 마늘이 소담히 담긴 바구니를 내려놓고 텔레비전을 켰다. 한 주의 이슈를 다루는 코너에서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 냈다.
이소의 시선을 잡아 둔 것은 범양의 예술재단 확장 소식이었다. 중견 예술가뿐만 아니라 유망한 신진작가들을 대거 스카우트해 전속 계약을 맺었다고 했다. 아트 엔터테이먼트 형식을 지향하는, 전례없는 매우 파격적인 행보는 다소 어린 나이인 서른한 살 윤주영 이사의 지휘 아래 결정된 사안이었다. 텔레비전에는 곧 익숙한 교정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원로 미술계는 전속계약이라는 이름 아래 10년짜리 그림 노예로 만드는 거라며 반발했지만 졸업을 앞둔 학생들과 지원이 필요한 신인작가들은 오히려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며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자 미술대학 동양화과 학생이라 소개된 남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성의 없게 인터뷰를 했다.
「사실 천재가 아닌 이상 그림으로 먹고살기 힘들잖아요. 작가는 마음 편하게 그림 그리고 소속사가 팔아 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치만 어쩐지 교수님들이 들으면 슬프겠는걸. 이소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가게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이소는 마늘을 까며 어제 일을 곱씹었다.
집 주소까지 물어봐 놓고, 받아야 하는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사람이 이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걸까? 그저 사무실을 정리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급하게 빠져나간 것 같은 광경이 눈앞에 생생했다.
‘고 대표는 죽은 걸까.’
분명 핏자국이었다. 학습된 공포는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항상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난 5년간 그 낡고 소름 끼치는 현판은 그 자리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피와 살을 먹고 쑥쑥 성장한 파라다이스 대부가 어딘가에는 높은 빌딩을 세웠다더라, 역세권 금싸라기 땅을 샀다더라 하는 소문도 들려왔다.
고 대표의 사무실이 아마 그곳 하나만은 아닐 테지만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어질러진 사무실과 박살이 난 창문들을 보면 평화롭게 떠난 것은 아닌 듯했다. 이소는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부터였지, 고 대표의 마지막 문자를 받은 것이 아마 한강에 가기 전 즈음이었나.
“그럼 내 돈은 어떻게 되는 거지….”
혹시 범양이 고 대표에게 묶인 자신의 채무금을 처리했을까. 그래서 연락도 안 하고 사무실을 두고 떠나 버렸나. 남은 돈이 얼마였든 간에 범양의 입장에서는 푼돈이었을 테니 해수를 데려가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쉽게 상환했을 테지만, 이소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은 문제였다. 차라리 야간에 택배 상하차 일을 더 해서 몇 푼이라도 더 갖다 박았다면 박았지 범양에게 손을 벌리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물론 그것은 이소의 사정이다. 고 대표 입장에서는 몇 년에 걸려 쥐꼬리만 한 봉투를 가져다주느니 한 번에 상환하는 것을 더 원했을 테지만. 그러나 이것 역시 의미 없는 추론일 뿐이다. 명확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 정말 일 안 풀려.”
이소는 한숨을 쉬었다. 범양가 사람들을 맞닥뜨리고부터는 스트레스로 편두통과 코피까지 늘었고 설상가상으로 고 대표까지 사라져 불안감도 커졌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매일매일을 조마조마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이소는 핸드폰을 들어 다시 한번 고 대표의 번호를 찾았다. 혹시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 두었나? 오래된 핸드폰은 해준이 버려 준다고 가져갔고, 자신이 손수 저장한 전화번호는 끝자리만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 여전히 깜깜했다. 이소는 몇 번을 더 의미 없이 손가락을 놀리다 포기하고 사진첩을 열었다.
어릴 적 해준의 사진을 다시 열어 본 이소는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지금은 꼭 거대한 곰처럼 커다랗지만 사진 속 해준은 지금 이소의 명치께도 못 오는 작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크고 검은 눈동자와 수줍게 웃는 뺨이 정말 빼어나게 잘생겼다. 이소는 할 수 만 있다면 이 어린 소년을 제 주머니에 넣고 틈날 때마다 꺼내 귀여워해 주고 싶었다.
어린 해준이 잡고 있는 여자의 손에는 얼기설기 엮은 팔찌가 걸려 있었다. 색이 알록달록하고 어설프게 감긴 팔찌는 누가 봐도 아이의 솜씨였다.
‘어린 교수님이 만들어서 준 건가 봐. 귀여워.’
그래서 이렇게 뿌듯한 표정인가 보다. 해준은 누구를 닮았을까. 짙은 눈썹은 아빠를 닮았을까, 옆으로 시원하게 빠진 눈매와 얇은 쌍커풀은 엄마를 닮았을까. 이소는 사진에 나오지 않은 여자의 얼굴이 못내 궁금했다. 크림색의 플랫 슈즈를 신은 여자의 자세에서 기품이 느껴졌고 해준을 붙잡은 손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사진을 다 보고 마늘 바구니를 주방에 갖다 놓으려는데 돌연 핸드폰이 울렸다. 양반은 못 된다고 해준이 전화를 했다. 이소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마늘 바구니를 던져 놓고 장갑을 벗었다. 이른 오전이라 손님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문을 닫고 마늘을 깠더니 온 가게가 마늘 냄새로 진동을 했다. 이소는 얼른 손을 씻고 제 청바지에 손바닥을 썩썩 문질러 닦았다.
“교수님.”
- 안녕, 이소 씨.
해준은 항상 담백한 어조로 ‘안녕.’ 하고 인사하곤 했다. 이소는 그 인사가 참 좋아서 종종 요리를 하거나 청소를 하다가도 해준을 따라 하며 ‘안녕.’ 하고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 다정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을 담아 내기는 참 어려웠다.
- 늦게 받았네. 뭐 하던 중이었어요?
“아, 저 마늘 까던 중이었는데…. 지금은 다 했구요, 네. 문 열고 있었어요….”
이소는 빗자루를 꺼내어 바닥에 흩어진 마늘껍질들을 쓸어 바깥으로 내다 버렸다. 신선한 공기가 문을 통해 밀려 들어와 한차례 돌고는 빠져나갔다. 해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한쪽 어깨에 전화를 기댄 채 조금 불편한 자세로 통화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방금 전에 뉴스 봤는데요. 학교가 나왔어요. 교수님 학과 학생이 인터뷰를 하더라구요….”
이소의 말에 해준이 웃으며 혀를 찼다.
- 그 학생 안 그래도 교수들한테 불려가서 돌아가면서 혼나던데.
가벼운 안부로 시작한 수다는 10분이 넘게 이어졌다. 어젯밤에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식사는 무엇을 했는지, 오늘 기분은 어떤지 어디 쓸 데는 없지만 상대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그런 대화였다. 대화거리가 거의 다 떨어졌을 무렵 이소는 해준에게 저만 아는 이야기를 꺼냈다.
“맞다, 저 교수님 방에서 사진 봤어요.”
-무슨 사진?
“어릴 때 사진이요. 반바지 입고 누구 손 잡고 있는 거.”
해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 말실수인가. 때아닌 정적에 이소는 당황했다.
“어…. 혹시 제가 보면 안 되는 거였어요?”
- 아니에요. 봐도 되죠. 이소 씨라면 일부러 보여 줬을 사진이기도 하고.
말을 고르는 이소를 해준이 안심시켰다. 한껏 긴장한 어깨를 내려놓고 이소가 빙긋 웃었다.
“다행이다. 사실 저 사진도 찍어 왔어요. 정말 너무 귀여워서요.”
이소는 가게 의자에 앉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뒤 사진첩을 다시 열었다. 사실 묻고 싶은게 많았는데 해준이 기꺼이 보여 준다고 하니 마음을 놨다. 이소는 참 이것저것 많이 물었고 해준은 생각나는 대로 조곤조곤 대답했다. 서른다섯 해준의 중저음으로 듣는 어린 해준의 일화는 색다른 재미를 줬다. 이소는 앳된 얼굴을 잔뜩 확대해 놓고 중얼거렸다.
“이때는 되게 귀여웠는데….”
- 지금은 안 귀엽고?
해준이 덥썩 말꼬리를 잡았다. 이소는 눈을 굴리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다고… 하시기엔 키가 너무 크시잖아요. 지금은 그냥, 멋있으세요.”
- 얼마나?
“어…. 아주 많이?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선 제일?”
이소의 가감 없는 칭찬에 해준은 소리 없이 웃었다. 부끄러움이 많고 표현을 아끼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최근의 이소는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원래 표현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거나. 물리적으로 짧은 시간을 만났기에 해준은 아직도 이소가 늘 새로웠다.
“누구 손 잡고 있는 거예요? 엄마? 이모?”
- 글쎄, 어머니도 이모도 아닌데.
“그럼… 선생님?”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을 무척 좋아했거나, 사진을 찍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행복한 거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거짓말이 서툴다. 아무리 무감한 아이들이라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쉽게 감정이 드러났다. 그걸 7년 차 아이 아빠인 이소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소의 질문에 해준은 음, 하고 말을 고르다 옅게 웃었다.
- …음, 첫사랑.
“첫사랑?”
제법 단호한 해준의 대답에 이소는 어, 하고 말을 잃었다.
“진…짜로요?”
- 뭐, 그런 비슷한…. 존경하고 무척 사랑했던 사람이죠.
“엄마도, 이모도, 선생님도 아니고요?”
- 응.
제법 단호한 해준의 대답에 이소는 어, 하고 말을 잃었다. 손과 옷차림을 보면 적어도 나이 차이가 열댓 살, 혹은 스무 살은 더 나 보이는데 첫사랑이라니. 어린 해준은 무척이나 성숙했던가. 이소가 말이 없자 해준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아마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인지 대충 상상이 갔다. 아마 얼빠진 표정으로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있겠지.
- 점심은 뭐 먹으려고요?
해준의 말에 이소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떡볶이 먹을 거예요. 매운 게 당겨서.”
- 매운 게 당겨요?
해준이 큭큭 웃었다. 그러고는 들으라는 듯 제법 진지한 투로 중얼거렸다.
- 우리 자기 임신했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 저번에 수육도 그렇고, 며칠 전 배즙도 그렇고, 오늘은 매운 거…. 이소 씨, 내가 오늘 끝나고 비빔국수 사 갈까? 자기 열무김치 좋아하잖아.
“비빔국수도 맛있겠…, 아니 그게 아니고. 뭐예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해준의 실없는 농담에 이소는 웃음을 터뜨리다 인기척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손님이 올 시간이 다가왔나, 시선을 돌렸을 때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그림자가 바닥으로 툭 떨궈졌다. 이소는 다급하게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교수님, 저 나중에 전화할게요.”
- 왜요, 이소 씨 무슨 일 있….
“아니, 손님.”
핸드폰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박은 채 이소가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어느새 성큼성큼 걸어 나간 정장을 입은 남자는 제 할 일을 끝마쳤다는 후련한 발걸음이었다. 정작 이소는 누가 주었는지도 모르는 장미 바구니를 벌써 대여섯 차례나 갖다 버렸다. 오토바이 기사가 주고 간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대놓고 문이 열린 가게 앞에 내려 두고 갈 정도면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나 보지. 이소는 흰 세단 앞으로 걸어가는 남자를 덥썩 붙잡았다.
“잠시만요.”
당사자가 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인가 했지만 일면식도 없는 남자였다. 이소는 남자의 팔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이런 장난질은 한두 번이면 족하다. 고 대표가 보낸 것이라면 그 자리에서 돌려보내고 당장 제대로 얼굴을 보이라고 경고할 것이고, 또 제가 짐작하는 그 사람이 보낸 것이라면 그때는.
“도대체 매번 이런 식으로 남의 가게 앞에 쓰레기를….”
“쓰레기 아니고 선물이었는데.”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이소는 생각했다. ‘그 사람’이 보낸 것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하기로 했더라. 귀를 휘감는 익숙한 목소리에 이소는 몸을 굳혔다. 남자의 팔을 쥔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건 거의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이 목소리를 들으면, 15년을 그래 왔듯이 가슴이 뛰었다. 이소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만나고 싶지 않았으면서도 사실은 죽을 것처럼 힘들 때 가장 먼저 이소의 기억 끝에 남은 사람의 목소리가 골목길에 우아하게 퍼졌다.
“이소야.”
상처 입은 나비 같은 눈매, 수그러진 콧날, 보기 좋게 휘어진 입꼬리까지, 완전무결해 보이는 모습의 남자. 이소는 떠올렸다. 팔을 벌리고 다정히 안기라는 듯 굴면 어린 윤이소는 달려가 폭 안기곤 했다. 제 위치상 마땅히 그렇게 해야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이소는 그렇게 안겨 그에게 얼굴을 부비고 쓰다듬을 받는 것이 퍽 좋았다.
‘착하지, 이리 와.’
‘주영이 형!’
윤주영, 7년 전과 다름없이 저를 바라보는 다정한 감빛 눈동자에 이소는 다시 한번 숨이 가빠졌다.
* * *
「너 우리 집에 가자.」
22년 전, 부모님의 장례식장 구석에 앉아 낡은 자동차를 쥐고 벽만 쳐다보고 있던 이소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어주던 것은 막 아홉 살이 된 주영이었다.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 무엇보다 고작 아홉 살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아버지에게 낯선 아이를 데려가라고 요구하는 태도. 이소는 그날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주영의 손을 잡고 잠을 잤다.
눈을 뜨면 항상 제 옆에는 주영이 있었다. 제 방은 집 안의 가장 구석진 곳, 주영의 방은 2층의 가장 환한 곳에 있었음에 불구하고 주영은 항상 잠을 잘 때면 베개를 가지고 내려와 이소의 옆에서 잠을 잤다. 그때마다 윤치승은 주영을 크게 질책하고 이소를 대신 매질했다. 그러나 주영은 바락바락 대들면서 이소의 방에 와서 자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 달이 넘어갈 즈음부터 윤치승은 포기하고 이소를 주영의 방에서 재우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소가 2층에 발을 들이는 것이 탐탁찮았지만 잘난 제 아들이 군더더기 식구에게 빌붙는 모양새로 베개를 질질 끌고 내려가는 것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소는 주영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가볍게는 손톱을 스스로 깎는 법부터 신발을 제대로 신는 것, 자전거를 타는 것까지 모두 주영에게 배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영이 친절하고 상냥하게 가르쳐 줬다기보다는 그저 물건을 던져 주고 스스로 해낼 때까지 놀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소는 엉망이지만 여덟 살에 손톱을 스스로 깎을 수 있게 되었고, 신발을 거꾸로 신고 가면 저만치 뛰어가는 주영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눈 감고도 똑바로 신을 수 있게 되었다. 자전거 역시 주영의 타는 폼을 기억해 내고 몇십 번이고 넘어져 가며 깨우쳤다. 그래도 좋았다. 어떻게든 해내고 나면 주영이 꼭 손에 달콤한 캐러멜을 하나씩 쥐여 줬다.
‘잘했어.’
그 말이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이소는 저를 부모처럼 아껴 주는 주영이 좋았다. 그 커다란 집에서 저를 예뻐하는 이는 네 살 위인 주영 하나였기에. 주영이 하는 말은 모두 들었고 주영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식구들에게 받는 눈총과 구박을 덜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범양이 조금 더 커지고 윤치승의 권위의식이 하늘을 찔렀을 무렵 주영의 일탈도 함께 커졌다. 그리고 이소는 주영을 괜히 쫓아다니다 같이 엄벌을 받곤 했다. 머리 큰 녀석들이라 어릴 때처럼 쥐어팰 수는 없었고 주로 지하창고에 갇혀 있다 나오곤 했다.
‘형, 이거 술 아니야?’
‘맞아, 아버지가 아끼시는 거지.’
‘그럼 더 마시면 안 되는, …어, 까면 어떡해!’
‘아버지 엿 먹으라고 해.’
주영은 항상 무서운 것 없이 굴었다. 아버지가 저를 어찌 못 한다는 것을 알기에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가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영이 언제나 어떤 상황에라도 끝까지 이소만은 제 품에 보호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소 건드리면 아버지고 어머니고, 저랑 다시는 안 보시는 거예요.’
주영은 툭하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밥상 앞에서조차 아무렇지도않게 그런 말을 하곤 해서 윤치승의 화를 돋웠다. 그 때문에 이소는 자주 체했다. 이소는 제 편을 들어주는 형이 고마우면서도 저를 두고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 같아 불안했다. 저 때문에 주영이 범양에서 내쳐지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주영은 언제나 걱정 말라고 했다. 저와 함께 있으면 너는 절대로 다치지 않을 거라고, 외아들인 제가 범양을 물려받게 되면 넌 나와 함께 같이 회사를 이끌거라고 했다.
물론 백퍼센트 믿지는 않았다. 주영이 외출을 하고 나면 이소는 언제나 불려가서 네 분수를 알라며 잔소리를 듣곤 했으니까.
* * *
이소가 제게 아는 척을 않자 주영은 손을 흔들다 말고 쓰게 웃었다.
“키가 조금 더 컸네.”
주영이 손등을 들어 제 눈썹 정도에 대고 키를 가늠하듯 흔들었다. 이소는 남자의 팔을 놓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주영을 바라보았다. 7년 만에 나타난 주영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 혹시 나 기억 못 하는 건…. 그런 건 아니……죠?”
이소가 말없이 주영을 바라보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다. 내리깐 시선에서 저도 모르게 깊이 배어 있던 습관이 드러났다. 주영의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리던 그때처럼, 이소는 아주 천천히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형.”
이소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였다. 오랜 시간 동안 억울하게 꽁꽁 싸매고 있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까 봐 꾸역꾸역 참아 냈다. 성대가 묵직하게 당기고 가슴이 찌르는 듯 아팠다. 입술 끝에 꽃잎마냥 매달린 말들은 결국 주영에게 가닿지 못하고 힘없이 툭 떨어진다.
“…다행이다. 기억하네. 보고 싶었어, 이소야.”
오래전 그때처럼 이소가 저를 부르자 주영은 눈을 접어 웃으며 좋아했다. 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소는 몇 번이고 울리는 전화기를 주머니 속에 넣은 채 주영을 서글픈 눈으로 응시했다.
* * *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이소는 동희 씨가 준 커피를 마시지도 않고 만지작거렸다. 해준이 몇 차례 더 전화를 했기에 걱정할까 봐 가벼운 메시지를 남기고 동희 씨가 하는 카페에 왔다. 어색함이 감돌았다. 누구보다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지만 직접적인 말은 차마 건네지도 못하고 입술만 우물댔다. 주영은 단정하게 깎은 손톱으로 애꿎은 테이블을 두드렸다. 억지 미소가 입술에 걸려 있었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은 가장 가벼운 인사부터 전했다.
“…영국은 잘 다녀왔어?”
무려 7년이나 묵힌 안부였다. 주영이 영국에 간 후 소식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소였기에 건넬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뉴스를 통해서 접한 주영의 일화는 아주 조금이었고 그것마저도 언론이 가공하고 회사에서 조금씩 푼 것이라 정보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재벌 아들의 일상을 거렁뱅이가 알 수 있는 통로는 없었다.
이소의 물음에 주영은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이소는 주영의 눈을 마주하면서도 자꾸만 손바닥에 땀이 났다. 주영은 가볍게 시선을 내려 이소를 한 번 훑었다. 뱀의 혀처럼 저를 시선으로 핥아내리는 주영의 눈동자를 따라 이소의 눈동자도 함께 움직였다.
“…딸이….”
주영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이소는 숨이 멎을 뻔했다. 공연한 비밀도 아닌데 주영이 저를 떠보듯 던지는 말 같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어금니를 악물었다.
“예쁘더라.”
이명희가 알 정도라면 주영도 알겠지. 자신들은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는데 여태 누군가에게 그 일상이 전시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주영은 여상한 투로 입을 열었다.
“널 많이 닮았어.”
“말이 돼?”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 날이 선 이소는 고개를 들었다. 민감한 문제였다. 주영이 눈썹을 내린 채 말꼬리를 늘였다.
“그냥, 웃는 모습이 너랑 꼭 닮아서. 아무래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친부보단 7년이나 끼고 산 너를 닮는 게 당연하겠지.”
“…형, 해수는 내가….”
“아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내내 웃고 있었던 주영은 이소의 입에서 해수의 이름이 나오자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말투는 상냥했지만 웃음기가 빠진 주영의 표정에 냉랭한 기가 감돌았다. 이소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리지 않으려 주먹을 쥐었다. 한 번도 저를 때리거나 밀쳐낸 적도, 윽박을 지른 적도 없지만 주영은 언제나 어려웠다. 무엇보다 지금은 다른 누구도 아닌 주영이 직접 제 발로 찾아왔기에, 이소는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주영의 붉은 혀가 부드럽게 입술을 핥아 내렸다. 입술이 맞붙었다 떨어지며 귀엽게 뻐끔,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은 심기가 뒤틀렸을 때 나오는 주영의 오랜 버릇이었다. 변한 게 없었다.
“어머니가 왔다 갔단 이야기 들었어. 변호사도…. 무례하기 짝이 없어, 이제 와 무슨 권리로.”
“…….”
“정말이지 제멋대로야. 예전부터 그랬는데. 우르르 끌고 와서는 사람 겁주는 게 특기야. 약한 사람 상대로 서류나 들이대고.”
주영은 말없이 이소를 응시했다. 두 눈동자가 마주치자 주영은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냉랭했던 눈에 차츰 온기가 감돌았다.
“근데 이제 못 올 거야.”
부산하게 손톱을 뜯어내던 이소의 손이 멎었다. 주영은 청량한 여름 햇살 아래 서 있던 스무 살 그때처럼 미소 지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못하게 내가 지켜 줄 거거든.”
주영의 손이 테이블 위를 지나 이소의 손등에 포개졌다. 말투는 다정했지만 여전히 주영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소는 문득 제 기억 속 낡은 서랍을 뒤져 오래된 추억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고등학생이던 저와 은형, 그리고 이십 대 중반이 되기도 전 풋풋했던 주영의 어떤 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세 사람, 혼탁한 사회에 내던져지기 전 순진하기만 했던 아이들. 구두보다는 운동화를, 계약서보다는 성적표가 소중했던 그때가 이제 와 왜 생각이 나는 것일까.
‘형, 진짜로 오늘 일 안 가도 돼?’
‘너 이 영화 보고 싶었다며.’
그 말에 후드를 뒤집어쓴 이소가 운동화 코 끝을 바닥에 툭툭 치며 씩 웃었다. 모의고사 잘 보면 영화 보여 준다는 약속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만족할 만한 성적이 나왔다. 주영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외 한 번 받은 적 없는데도 이소는 꽤 상위권을 웃돌았다. 주영이 이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잘했어, 상 줄까?’
‘내가 애야? 오늘은 다른 거.’
이소가 눈을 빛내며 손가락으로 팝콘을 가리켰다. 라지 사이즈 캐러멜 콤보.
‘팝콘 먹어도 돼?’
‘그럼. 이소가 먹고 싶으면 사 줘야지.’
‘제일 큰 거 먹어야지. 아, 은형이 거의 다 왔나 보다, 잠시만.’
은형의 전화를 받은 이소가 작은 소리로 ‘형이 사다 줘. 나 화장실.’ 하며 뒷걸음질 쳤다. 주영은 멀어지는 이소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직 제 턱에 닿지도 못하는 아담한 키의 이소가 뛸 때마다 어설프게 묶은 신발 끈이 풀려 나풀거렸다. 주영은 낭창거리며 달음박질하는 이소의 발목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오빠, 일찍 오셨네요!’
‘응, 은영이도 안녕.’
‘은형이라니까요. 강은형이요.’
‘응, 미안. 은형아.’
주영은 제가 들고 있던 팝콘을 덥썩 가져가는 은형에게 가볍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영화 팸플릿을 들고 선 채 곧 상영할 영화의 예고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이소를 찾아내자 주영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몇 번이나 같은 장면이 반복해서 나오는데도 이소는 질리지도 않는지 입술까지 헤 벌린 채 눈동자를 쉼없이 굴렸다.
주영은 이소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낡아빠진 운동화 끈을 양쪽으로 당겨 팽팽히 동여매며 발그스름한 복숭아뼈에 시선을 두었다. 덜 자란 걸까, 아직도 소년 티를 벗지 못한 매끈한 발목는 터럭 하나 없었다. 주영은 천천히 일어서 이소의 어깨를 잡았다.
‘얼마나 집중해서 보면 운동화 끈이 풀린지도 몰라.’
‘아, 끈이 낡아서 자꾸 풀리네.’
‘나한테 새로 사 달라고 해.’
‘그건 다음 시험 잘 보면 또 부탁할게.’
자리에 앉아 영화가 시작하기 전 주영은 아버지에게 전화가 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소에 오른쪽에 앉은 은형이 은밀하게 몸을 붙였다. 상영관 스크린에는 다른 영화의 예고편들이 정신없이 쏟아졌다.
‘진짜 인간적으로 너무 완벽한 거 아니냐.’
‘누구? 저 배우?’
이소가 팝콘을 입에 물고 스크린 속 아이돌 출신 배우를 가리키자 은형이 으이구, 소리를 내며 이소를 밀어냈다.
‘뭐래, 주영이 오빠 얘기하는 거거든.’
‘형? 형… 멋있긴 하지.’
‘아, 여자친구 있겠지?’
‘형 여자친구 없는데.’
이소의 말에 은형이 눈을 반짝였다.
‘대박! 진짜? 왜 없지? 눈이 너무 높은가?’
‘바빠서…? 형 오늘도 원래 회사 가야 하는데 겨우 시간 내서 뺀 걸 거야.’
‘아, 오빠랑 사귀면 소원이 없겠다….’
은형은 자기 자리 앞 의자 등받이에 이마를 댄 채 그동안 주영을 보아 오며 느꼈던 감정들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5년 전 처음 이소를 데리러 학교에 온 이후부터 쭉 동경해 왔던 친구의 형은 어느새 오랜 연정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좋아하면 고백해 봐.’
이소는 빨대로 음료를 빨아들이며 여상한 투로 말했다. 은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백? 제가 감히 주영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사는 수준부터 생활 패턴, 취향까지 뭐 하나 겹치는 게 없는 은형이 제가 그걸 어찌하겠느냐고 입술을 죽 빼고 투덜거렸다. 툴툴 대는 은형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소가 손을 들어 볼을 톡톡 쳤다.
‘말 잘하고 뻔뻔한 강은형 어디 갔냐.’
‘됐거든. 짝사랑의 슬픔과 괴로움을 모태솔로인 네가 어찌 알겠냐.’
‘너무 좋아하면 저지르는 거지 뭐.’
‘지 일 아니라고 겁나 쉽게 말하네.’
통화를 끝낸 주영이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이소는 제 옆자리에 가방을 치우지 않은 채 주영을 올려다보았다. 주영이 가방을 치워 달라며 고갯짓을 하자 이소는 씩 웃으며 은형의 옆자리로 가라며 주영을 툭툭 밀었다.
이소야, 왜.
주영이 입 모양으로 묻자 이소는 어깨를 그저 으쓱하곤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결국 주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소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자리를 옮겨 은형의 곁에 앉았다. 제 옆자리에 앉은 은형이 팔꿈치로 저를 콕콕 찌르며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지만 이소는 모르는 척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은형은 많이 울었는지 주영에게 손수건을 받아 코를 풀고 있었다. 주인공의 애인이 죽는 장면이 너무 슬펐다고 오열하는 은형을 보며 주영이 옅게 미소 지었다. 이소는 어쩐지 자리를 비켜 주고 싶어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분명 굉장히 보고 싶던 영화였던 것 같은데 몇 년이나 지난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둘은 그 때부터였을까. 두 사람 모두 이소에게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진행형인지 아니면 서투른 고백이 실패로 돌아간 상태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은형의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의 그 절망감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때는 차라리 붙잡을 동아줄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 생각하며 윤치승 회장에게 갔었던 거였다.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치기로 아이를 안고 그 대저택에 달려든 소년은 지금도 여전히 무모하고 대책이 없다.
“…참 변한 게 없네.”
이소는 주영을 앞에 두고 읊조렸다. 무서워야 하는데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 * *
“…지켜 준다고.”
이소는 작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읊조렸다. 제 손 위에 겹쳐 잡은 주영의 손바닥에서 느껴지지 않는 냉기만큼이나 무감하게 들리는 말투에 문득 서글퍼졌다. 이소는 한숨을 쉬며 손을 빼냈다. 망설임 없이 떨어진 체온에 주영이 멋쩍은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제 앞으로 가져갔다. 이소는 자꾸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눈을 감았다.
그러나 제 눈 앞에 있는 주영을 외면할수록 자꾸만 7년 전 그 날이 눈에 훤했다. 빗속을 뛰어다니며 울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연락 한 통 없었던 주영의 사정이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제 앞에 서니 별안간 속에 묵혀 놓았던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결혼.”
이소의 말에 주영의 손이 멈칫했다. 내내 여유롭던 주영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했더라.”
“…….”
“속이 좁아서 축하는 못 해 주겠다.”
이소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주영은 마치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눈을 피했다. 이소는 숨을 들이켰다. 어금니가 맞물린 자리에 힘이 들어가며 턱이 불거졌다. 주영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반지 자국조차 없었다. 구속되기를 싫어하고 제멋대로인 주영이 또 반지를 빼 놓았겠지만, 그 자리의 주인이 은형이 되었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자 몹시 불쾌해졌다.
“뭐, 형도 장례식에 안 왔으니.”
떠보듯 한 말이었는데 주영은 사실이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윤치승 회장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던가.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게 결혼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이소는 주영의 턱시도 입은 모습을 상상했다. 2년 전이면 이소가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일주일이나 누워 있었던 때였고, 몇 번 본 적 없던 정숙에게 해수를 맡기던 해였다. 본디 질투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이소였지만 어쩐지 목이 메였다. 주영의 인생에 저와 은형과 해수, 이 셋을 지우고 칠 년을 살았다는 것이 서글프기는 했다.
“은형이는….”
이소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마음의 빚은 오로지 저 혼자만의 것은 아닐 거라 판단했다. 누구보다 떳떳했으며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기에, 오히려 이제 와 제 아이를 내놓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고 믿었다. 주영 역시 그들과 같은 마음이라면 더더욱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가족을 갖고 싶어 했어. 자신만 사랑해 주는 남편과 아이. 그게 은형이의 오랜 꿈이었어.”
이소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주영을 메마른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이 아빠가 누군지 물었을 때 말을 해 주지 않길래, 안 좋은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어.”
이소는 조심스러웠다. 그 시절의 은형은 이소의 눈에는 무척 밝고 싱그러웠기에 갑작스럽게 변해 버린 변화에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최악 혹은 차악뿐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내가 돌아오면 항상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어. 꼭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때 짐작했어. 아이 아빠랑 아는 사이구나. 문자 메시지나 전화가 오면 소스라치게 놀랐고, 기대하는 표정으로 전화를 붙들곤 했지만 매번 실망했어. …그 모습을 나는 수십 번, 수백 번을 봤어.”
임신 말기가 될수록 은형의 히스테리는 심해졌다. 털털하고 당찬 은형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바뀐 신체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옆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은형을 견딜 수 없이 외롭게만 만들었다.
‘윤이소, 동정하지 마. 난 내가 알아서 잘 살 거야. 네가 안 도와줘도 다 알아서 잘 먹고 잘 살아. 그러니까 이따위 것 사 오지 말라고!’
제가 사 들고 온 간식과 과일을 집어 던지고 우는 은형을 바라보며 이소가 해 줄 수 있는 건 말없이 엉망이 된 방을 치우는 것뿐이었다.
“아이를 낳고 우울증이 도졌을 때도 몇 번이나 바깥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을 붙잡으며 달랬어. 괜찮다고, 무서운 꿈을 꾼 거라고. 어쩌면 문득 약을 먹여 재우면서도 그때의 은형이의 상태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는지도 몰라.”
은형을 설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심한 입덧으로 먹은 것을 모두 게워 내는 은형에게 이럴 거면 그냥 가서 지우자고 말하자마자 뺨을 맞았다. 은형을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저를 향해 윽박지르는 것을 보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 그 자리에서 네가 알아서 하라며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날 밤 은형은 하혈을 했다.
‘내 탓이야, 미안해. 미안해, 은형아. 어떡해, 내가 잘못했어, 응? 내가 다 잘못했어. 은형아, 정신 차려 봐.’
이소는 엉엉 울며 잘못했다 말하고 제 통장을 깨서 병원비를 댔다. 그 때도 아이 아빠는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그냥 같이 키우자고 했어. 아빠 같은 좋은 삼촌이 되어 줄 거라고 했지. 은형이에게는 공수표처럼 들렸을지 몰라도 나름 그 때는 진심이었거든.”
이소는 남은 커피를 입에 톡 털어 넣었다. 캐러멜이었는데도 끝맛이 너무 달아 쓰게 느껴졌다.
“어쩌다 보니 아빠가 되어 버렸지만.”
비 오는 그날 밤이 아니더라도 이소는 어린 해수를 안고 수십 번이나 고민했던 밤이 있었다.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들면서 어린 것을 주워다 키운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임신 기간 고작 몇 달 태담을 했다고 정이 깊게 들어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지난한 세월을 주영은 모를 것이다. 누구도 모를 것이다. 해수가 천진난만한 눈으로 웃으며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라고 말할 때마다 속으로 삐뚜룸하게 ‘글쎄, 네 진짜 아빠는 널 버렸는데?’라고 비아냥거릴 때도 있었다. 그 우울과 경멸을 떨쳐 내는 것이 정말로 많이 힘들었을 때가 있었다.
“형과 회장님이 보시기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우리의 시간은 함부로 들쑤실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겨울 바다에 발을 담갔다 빼면서 돌아온 게 몇 번인지 셀 수조차 없어. 아이가 울 때마다 구석에 웅크리고 귀를 막으며 밤을 지새던 날들도, 아이와의 관계가 불분명하다고 경찰서에 몇 번이나 불려가서 취조를 당했을 때도,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면서 이사를 가야 했을 때도 결국 아이 옆에 있었던 것은 형이 아닌 나였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버티면서 살았어. 내가 데려왔으니까, 내가 결정한 거니까. 형이 싸지르고 도망간 씨를 내가 이만큼 키워 내면서 내게 남은 게 뭐였을 것 같아? 악? 독? 아니, 난 그런 알량한 복수심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야. 난 이제 해수밖에 안 남았어. 누구도 못 뺏어 가. 시간이나 돈 따위로 보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속에 있던 말들을 우르르 내뱉을수록 치가 떨렸다. 저 말끔한 얼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잠깐의 반가움과 답답함, 울분 그리고 경멸. 7년의 독(毒)은 주영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빠른 속도로 이소에 안에서 터져나와 사지 곳곳에 퍼졌다. 손끝이 저리고 머리에 피가 몰렸다. 자꾸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지러웠다. 이소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빠르게 내뱉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이렇게 몇 번이고 찾아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대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 해수도 나도 조금의 양보도 없이 굴 테니까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마. 무엇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형은….”
혈혈단신이지만 그래도 나름 일군 것들이 있었다. 주영이 저와 은형과 해수를 외면했을 지난 7년 동안 금방이라도 흩어질 모래성이지만 몇 번이고 다시 쌓아 올리며 짓고 또 짓기를 반복했다. 이소에게는 소중한 공간이었고 절대로 쉽게 잊혀지거나 버릴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 어떤 자격도 없어.”
형이 외면한 건 한 사람이 아니니까. 이소는 다 마신 컵을 꼭 쥐고 손을 떨었다. 어릴 때는 유약하고 말이 없었던 이소였지만 계속된 풍파에서 살아남으려면 저절로 억세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주영의 얼굴을 테이블에 엎어 버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 내며 이를 악물었다.
* * *
주영은 내내 시선을 피하고 대화하는 이소를 향해 손을 뻗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이제는 스물, 스물넷의 어린 소년들이 아니기에, 두 사람 간의 삶의 간극과 깨진 시간의 파편들이 발 밑에 흩어져 있기에 예전처럼 쉽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이소야.”
“내 이름 부르지 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소가 제 이름을 부르는 주영의 목소리에 낮게 으르렁거리며 대꾸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 작은 새끼 토끼 같았는데 지금은 어느새 제 목을 물어뜯기 전 삵과 같이 노려보는 이소를 보며 주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소야. 변명 같겠지만 정말 사정이 있었어, 네가 이렇게 사는 줄 몰랐고….”
주영은 이소의 손목을 붙잡았다. 낭창하고 흰 손목이 한 줌에 잡혔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소는 주영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얼마나 세게 쳐냈는지 짝 소리가 카페 안을 크게 울렸다. 카페 바닥으로 주영의 유리잔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몰랐다고?”
“잠시만 내 말 들어.”
“거짓말하지 마.”
이소는 완전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채 주영에게 다가가 옷깃을 그러쥐었다. 이소가 허리를 가까이 숙여 오자 발에 밟힌 유리조각들이 까드득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듣는 이가 소름이 끼치는 소리였다. 카운터에 선 동희 씨는 혹여라도 몸싸움이 일어날까 봐 빗자루를 쥔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옷깃을 쥔 이소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붉게 번진 눈자위에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이소는 이를 악물었다. 부득, 이가 갈리는 소리는 주영의 귀에도 선명히 들렸다.
“항상 내가 어디 있었는지 귀신처럼 찾아내던 형이,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못 찾아냈을 리 없어.”
주영은 항상 이소가 어디에 있건 잘 찾아왔다. 동선이 단순했었던 것도 있었지만 제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 친구에게 들었어, 집사에게 들었어, 비서에게 들었어 정도의 이유면 어린 이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주영이 말하기 전 이소가 먼저 하루 일과를 떠들어 대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한 주영이 몹시 흡족해하며 고개를 돌리곤 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관심이라 여기고 기꺼워했지만 주영과 헤어지고 나서는 그것이 묘하게 이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이다. 당연히, 알고 있었어야 했다. 알면서 나타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래야 참고 참았던 지난 시간과 노력이 온전히 이소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주영의 책임이 덜어지는 결말은 너무 비겁했고 가혹했다.
“이번에는 얘기가 달랐겠지. 의지도 없었겠고.”
의지가 없었다는 말에 주영이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자 이소는 주영을 내던지듯 밀어냈다. 잘 정돈되어 있던 값비싼 셔츠 깃은 엉망으로 구겨졌다. 이소는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더 있다간 주영의 입을 깨진 유리에 갈아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며 치를 떨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쌓아 왔던 분노가 이런 식으로 기어 나올 줄은 몰랐기에 이소는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찾아오지 마, 다신 보고 싶지 않아. 그리고 저딴 쓰레기 보내는 장난질도 하지마. 또 오면 그땐 정말로 형이어도… 안 참아.”
* * *
보상 따위를 바란 적은 없다. 흔한 복권이라도 당첨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저 매일매일을 한 끼 식사만큼은 쫓기지 않고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오늘 저녁 메뉴를 무얼 고를까 고민하는 사람들의 밥을 만들며 부디 오늘은 갑자기 사채업자가 들이닥치지 않기를 바라고, 검은 세단을 보며 뒷걸음치며 도망가지 않는 삶을 바랐다. 해수와 소박하게 사는 그런 삶, 이소가 바란 것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동희 씨의 조심히 가라는 인사에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문을 나서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언제나 모든 일을 한 수 앞에서 내다보던 주영이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정말로 몰랐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로 주영의 7년에는 제가 없었다는 것을 마주하자 이제 와 찾아온 주영이 밉고 또 미웠다.
밖으로 나오자 울컥 눈물이 터질 것 같아 하늘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숨을 몰아쉬고 주먹을 쥐었다 펴며 다시 들어가서 주영을 갈기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동희 씨의 가게 안이었고 더 이상의 소란을 원하지 않아 이소는 얼른 자리를 옮겼다.
“아, 어지러워.”
가게로 돌아오면 주영이 쫓아올까 봐 이소는 걷고 또 걸었다. 뒤를 돌아보면 그 길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을 주영이 있을까 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내달렸다. 멍해진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소는 골목길 구석에 있는 전봇대를 붙잡은 채 입 안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목젖 가까이 손가락을 넣은 채 몇 번이고 찔러대자 지금까지 마셨던 커피가 위액과 함께 와르르 쏟아졌다. 눈물과 콧물은 덤이었다.
“하, 진짜 뭔… 우욱….”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숙취에 시달리는 잡배로 보이겠거니 싶었다. 두어 번을 더 토하고 나서야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늘이 유난히 말갰다. 시계를 보자 어느덧 세 시 반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해준에게 일이 끝나면 전화를 준다던 메시지를 몇 번 만지작거리던 이소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제게 일어날 최악을 가정했을 때, 어쩌면 이제 해수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물론 그 시간을 떼 줄 생각을 추호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평소보다 한 시간은 더 일찍 해수의 어린이집 앞에 도착한 이소는 벨을 눌렀다. 가게를 일찍 닫은 후 셔터를 내리자 반대쪽 골목길에서 가게 쪽으로 들어오려던 손님 하나가 멈칫하고 섰다. 오늘은 일찍 닫습니다, 했더니 고개를 꾸벅하고 사라졌다. 완전히 문을 잠그기 전이었지만 당장 손안에 들어올 육천 원보다 아이의 얼굴이 더 중했다.
“아빠, 오늘은 일찍 왔네?”
“해수 보고 싶어서.”
“나랑 같은 마음이네!”
해수에게서 어린이집 가방을 받아 들고 이소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설프게 묶어 준 머리는 언제나 어린이집 선생님이 하원할 때 즈음 다시 잘 정돈된 상태로 바꾸어 주었다. 그럴 때마다 해수는 아빠가 묶어 준 모양이 더 예뻤다며 투덜댔다. 솜씨가 좋지 않아 아침 시간 10분을 꼬박 머리 묶어 주는 것으로 허비하는데도 해수는 이소의 손을 타는 것을 기꺼워했다.
“머리 예쁘다.”
“응. 이번에 새로 오신 선생님이 완전 마법같이 묶어 줘. 이거 봐, 새우 같지 않아?”
고개를 양쪽으로 흔들자 곱게 땋은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소는 ‘그러네, 꼭 새우 같다.’ 하고 웃었다. 저 멀리서 일찍 하원한 친구들이 손을 흔들자 해수가 놀이터를 향해 달음박치려는 때 이소는 해수의 손을 꼭 붙잡아 들었다. 해수가 몸을 돌리자 이소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오늘은… 아빠랑 놀아 주라.”
바로 가게로 가자고 할 줄 알았던 이소의 입에서 놀자는 말이 나오자 해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너무 좋지.’라고 말하는 해수의 말투에서 행복이 묻어났다.
* * *
해수와 보낸 시간은 아주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이른 시간에 하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작해야 버스를 타고 옆 동네에 가서 놀거나, 근처 유원지에 갔다가 돌아오는 일 정도였지만 이소는 잠시나마 주영을 만났던 일을 잊을 수 있었다.
지갑 가득 천 원짜리를 두둑이 뽑아다 오락실에서 오락을 했고, 얇게 저민 감자를 여러 겹 꽂아 놓은 간식도 사서 나눠 먹었다. 날이 더워져 실내를 돌아다니는 게 좋겠다 싶어 마트 안으로 들어가 전시된 에어컨 앞에서 바람을 쐬고, 시식 코너를 돌며 소시지와 만두를 집어 먹었다. 해수가 좋아할 만한 동그랑땡도 두어 팩 사고 어김없이 스티커 사진도 찍었다. 별로 한 것도 없었는데 이런저런 것들을 하고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 7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해수를 키즈카페에 넣어 두고 이소는 잠시 한숨을 돌리며 전화를 꺼냈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해준의 전화가 몇 통이나 와 있었다. 분명 별 일 아니라고 말했음에 불구하고 갑자기 전화를 끊어 버린 채 연락이 되지를 않으니 해준 성격에 일을 손에서 놓은 채 걱정하고 있을 것이 눈에 선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수화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해준이 전화를 받았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바로 받은 걸로 보아 여태 기다린 듯싶었다.
“저예요.”
- 이소 씨, 어디예요? 괜찮아요?
제 목소리에 묻어 있던 불안을 눈치챘는지 해준이 기분을 물어왔다. 이소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그네를 타고 있던 해수가 손을 흔들었다. 이소는 딱딱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 주위를 꾹꾹 눌렀다. 해준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요동치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고 본래의 리듬대로 뛰기 시작했다. 꼭 해준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얌전해진 채 숨을 고르자 놀랍게도 뻣뻣했던 목덜미가 시원하게 풀어졌다.
“교수님은 내 약인가 봐요.”
- 약?
“응. 눈도 아프고, 목소리도 안 나오고 그랬는데 통화하니까 다 나은 것 같아요.”
이소의 말에 해준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수화기 너머로 해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에 그려졌다. 교수회관 현관을 지나 계단을 뛰어 올라가면 복도 끝에 해준의 방이 있다. 문을 열면 먹 냄새와 가지런히 정리된 화선지, 붉은 오동나무 선반에 정갈하게 걸려 있는 붓들과 수북히 쌓여 있는 고서적들. 그리고 그 안에서 옷을 꿰어 입고 안경을 벗는 해준의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보이듯 그려졌다.
“교수님, 지금 밖으로 나오셨죠.”
탁, 경쾌하게 닫히는 문소리는 제가 비 오는 날 들었던 그 문소리와 꼭 같았다. 해준이 응, 맞아요. 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소리가 끊기니 통화를 하며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소는 오늘 해수와 무엇을 했는지를 끊임없이 떠들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생각나는대로 두서없이 내뱉었다. 해준에게만큼은 좋은 이야기만 해 주고 싶어서, 우울하고 구질구질한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과장되게 입을 놀렸다.
수화기 안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어느덧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자 이소는 귀를 기울였다. 차 안이다. 해준이 차를 탔다. 그리고 조금 느려진 속도로 대답하는 해준을 상상하며 웃었다. 아, 이쯤 했으니 이야기해 줘야 할 것 같은데 눈에 띄게 실망할 것 같아서 미루고 또 미뤘다. 이소는 머뭇대다 해준을 불렀다.
“교수님.”
- …아, 응. 잠시만요…. 내가 지금 검색을….
“오늘 안 오셔도 돼요.”
- …왜요. 자기 떡볶이 먹고 싶다고 했잖아.
해준은 뒤늦게 이소의 말을 듣고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이소는 그 소리를 또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별일 아닌데 정말, 그냥 오늘은 해수랑 있고 싶기도 하고. 이소는 제 마음이 왜 이리 변덕을 부리는지 몰랐지만 오늘은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었다. 해준을 보면 또 마음 놓고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착잡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너무 하는 일 없이 해준에게 기대기만 하는 자신이 우스워보였다. 제게 일어나는 폭풍같은 일들과 해준은 별개의 인물이 되어야 했다. 그 일로 영향을 받은 자신의 모습 역시 해준에게 괜히 보여 줘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냥요. 안 먹고 싶어졌어요.”
저 변덕 심하거든요. 이소가 덧붙이며 배시시 웃었다.
* * *
- 교수님은 제 약인가 봐요.
이소가 실없는 농담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딘데, 묻자 까르륵 웃는 아이들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해준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재킷을 걸친 채 문을 열었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서도 지친 목소리인 걸로 보아 또 애 먹인다고 제대로 안 먹고 물만 마시다가 식사를 끝냈을 이소가 생각났다.
차에 오른 후 핸들에 몸을 기댄 채 인터넷 창을 켰다. 여전히 떡볶이가 먹고 싶으려나. 해준은 생전 제 돈 주고 사 먹어 본 적도 없는 떡볶이를 검색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빨갛고 빨갰으며 뻘건 소스에 질펀하게 절여진 떡 사진은 기괴하게까지 보였다.
정말 이렇게 매운 걸 먹을 수 있다고? 떡볶이란 자고로 소고기 넣고 간장에 볶아 밥반찬으로 먹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해준은 제 기준 영양가 없고 매워 보이기만 하는 음식 사진을 옆으로 휙휙 넘기며 개중 가장 재료가 많이 들어가고 푸짐해 보이면서 안 매워 보이는 것을 골랐다.
- 오늘 안 오셔도 돼요.
평소처럼 기대가 묻어난 말투가 아니었다. 분명하고 단호하게 제 방문을 거절하고 있었다. 해준은 눈썹을 까딱 올리며 이소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 그냥요. 안 먹고 싶어졌어요. 저 변덕 심하거든요.
변덕이 심하다고 덧붙인 말에 기가 빠졌다. 평소 같으면 더 치대며 그럼 다른 것을 준비하겠다는 둥, 다시 한번 제집에 와서 편히 먹고 쉬다 가라는 둥 수작을 부렸을 텐데. 묘하게 힘이 빠져 있는 이소의 말투에 해준은 평소처럼 농담을 하거나 생떼를 부릴 수가 없었다. 이소는 하루를 정리하며 해수를 일찍 재우고 자신 역시 일찍 잘 것이라 덧붙였다. 어디 몸이 안 좋은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오늘 메시지에 답을 빨리 못 해서 미안하다고 말한 후 이소는 전화를 끊었다.
“변덕은 무슨.”
해준은 이소를 알게 된 이래 이소가 변덕을 부리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말을 뱉으면 대부분 지켰다. 애초에 경험해 본 것들이 적기도 했거니와 자신이 선택한 것을 쉬이 바꾸지 않는 강직한 성정이 마음에 썩 찼던 것인데. 분명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시 무슨 일이 있다는 증거였다.
아. 무슨 일이, 있긴 했지.
해준은 운전석에 기댄 후 이소의 사진을 다시 훑었다. 보호차원에서 붙여 둔 사람들은 일을 꽤 성실히 했다. 사진을 찍거나 일상을 보고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시때때로 손님인 척 찾아가 말을 걸며 이소의 기분과 분위기를 전달하곤 했다. 오늘은 아는 사람을 만난 것 같다는 추측과 함께 사진이 도착했다. 이소 역시 저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메시지를 보내 별일이 아니라며, 아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했으니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업무를 어느 정도 끝내고 교수실에서 나왔을 무렵 몇 장의 사진이 도착한 것을 뒤늦게 확인했다. 이소는 젊은 남자와 함께 동희의 카페에 있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채 명품을 줄줄 두른 남자와 함께 있는 이소의 표정은 어땠는지 나오지 않아 해준은 그 작은 뒤통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관상 같은 거 안 믿는데.”
* * *
얼마 전 이소가 해준의 집에 왔을 때 술에 취한 춘식이 제가 공연을 다니며 어깨너머로 배운 관상을 이소는 꽤 흥미롭게 들었다. 다들 잘생기고 키가 큰 새 손님의 주위를 빙 둘러앉아 관상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하품을 하며 그런 것은 믿는 게 아니라고 술잔을 기울이던 해준 역시 이소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춘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춘식은 이소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이소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춘식의 표정을 살폈다. 왜요, 저 오래 못 사나요? 돈 많이 못 버나요? 이소의 관심사가 얼마나 노골적인지 해준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춘식은 입술을 비죽였다.
‘그기 아니구유, 요런 작은 동네서 장사하고 있으면 안 되는 관상인디.’
‘왜요?’
‘아니, 그 도화살이 잔뜩 끼어 있는 게. 아, 도화살이 무엇인가 하믄, 대체적으로다가 예쁜 얼굴이다 이 말이에유. 이렇게 희여멀건 살결, 적당히 도톰한 요 입술, 볼은 홍조가 있고 또 초승달마냥 휘어진 눈썹. 눈동자하고 이 머리색깔이 딱 갈색빛이 돌고, 눈이 소눈마냥 촉촉하잖어. 이게 딱 도화살이 든 얼굴이라 이 말이어유.’
해준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렇지, 우리 이소가 정말 매력적으로 생겼지. 해준은 고개를 기울여 이소를 처음 보았던 그 날을 회상했다. 헬멧을 벗으며 고개를 흔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시선이 꽂혔던 바로 그때, 그 남자가 지금은 제 옆에서 이렇게 술이나 받아 마시게 되는 사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거 아녀, 도화살은 연예인들 관상이래.’
‘맞아. 아, 근데 도화살이 남자가 있으면 술 좋아하거나 호색한이라던데.’
‘엄마, 손님 그렇게 안 생겨서! 깔깔깔깔….’
옆에서 듣던 아낙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소가 얼굴을 붉히자 애교살이 도톰하게 접힌 눈이 길게 접히며 웃음 지었다. 춘식은 그 모습을 보고 턱을 벅벅 긁었다.
‘마냥 좋은 것두 아닌디.’
‘왜요?’
‘이 관상인 사람은 한 사람에게 정착을 못 해유. 자기가 안 그래야지- 해두 날파리들이 하도 꼬여서 이놈 저놈 만나면서 풀어야지, 한 놈만 만나면 스트레스 받는다니께.’
‘맞어, 연예인들도 그렇게 연애를 이 사람 저 사람 하잖어.’
아, 잘난 놈들끼리 얼굴 맞대고 일하다 보면 이놈 저놈 골라가며 사귀는 거제. 식솔들은 그렇게 또 자기들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몇 번 더 떠들다 흩어졌다. 술에 취한 이소만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관상 보는 것도 재밌다, 하며 속없이 웃었다.
사진 속 남자는 이소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갠 채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애틋한지 두 손을 꼭 포갠 채 앉은 남자를 이소는 가만히 놔두었다. 아무리 봐도 강제로 잡혔다거나 싫은 상황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해준은 사진을 확대해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는 얼굴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머리가 대체로 좋은 편이었지만 해준은 관심 없는 사람의 얼굴을 정말 지독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잘 빠진 슈트와 단정하게 자른 머리, 남자가 끌고 온 세단까지 모두 평범한 축에 속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해준은 손가락을 두드리며 기억을 곱씹었다. 분명 어디서 본 남자인데, 누굴까. 누구더라. 이럴 때는 정말 제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세세히 기억하는 제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윤이소의 왼쪽 허벅지 어느 지점에 어떤 색의 점이 있는 것까지 눈에 선히 그려지는데 대충 기억하고 싶은 것들은 아무리 되뇌이려 애써도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해준이 화면을 전환하자 커다랗고 복잡한 지도에 붉은 점 하나가 깜빡깜빡 점멸했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우리 병아리, 누굴 만나고 다니는 거니.”
해준은 화면에서 깜박이는 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워낙에 윤이소 주변에 잔챙이들이 많이 꼬이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해준이 보낸 사람들의 말로는 커다란 미꾸라지 말고도 가볍게 기획사에서 캐스팅 문제로 나오거나, 스토커같이 따라다니던 여학생들, 음침하기 짝이 없는 변태 녀석들까지 있다 전했다. 물론 모두 해준의 지시에 따라 적당히 겁박해 돌려보냈지만 일일이 쳐내는 것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배우를 했다면 인기가 좋았겠지만 이소는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이소가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해준은 뒤늦게 이 사실들을 전해 듣고 나서 몹시 불쾌해했다. 다행히 이소는 평소에는 얼빠진 듯 해실해실 굴었지만 별안간 사람들이 제게 다가오거나 관심을 가지면 한 발 뒤로 빠지는 태도를 보였다.
‘애인이었나. 연애한 적 없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면 현재 해준 몰래 만나고 있는 사람인가. 남자가 절절하고 애틋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걸로 보아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이소는 뻣뻣하게 굳은 채 남자와 손을 잡고 있었다. 제 앞에서는 수줍은 듯 굴던 이소가 아무렇지 않게 남자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자 속이 뒤틀렸다.
해준은 이소가 보낸 문자를 들여다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말투에는 조금의 부끄러움이나 거짓도 없어 보였는데.
[저 해수랑 같이 놀고 있어요. 끝나고 저녁도 먹을게요.] 06:01
[스티커 사진도 찍었고] 06:42
[사진] 06:43
[지금은 이동해요.] 06:44
[오랜만에 아빠랑 나오니까 좋은가봐요.] 06:46
[전화 못 받아서 밍나해요.] 07:23
[미안] 07:23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와서는 이렇게 상냥하게 메시지를 보내고, 또 전화로는 선을 그으며 저를 못 오게 하다니. 해준은 당장에라도 달려가 이소의 손목을 잡아 끌고 오고 싶어졌다. 집에 내려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다른 남자와 자리를 마련하질 않나, 잡힌 손을 빼지도 않은 채 멍청하게 앉아 있질 않나.
해준은 이소를 앉혀 놓은 채 놀리듯 추궁하는 상상을 했다. 또 울먹거리며 아니라고 해명하려나. 경계심 많은 이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군지 생각하니 질투심에 명치가 저렸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문득 요란하게 진동이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이내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해준은 눈을 감고 운전석에 머리를 기댔다.
“말해요.”
- 도련님, 어…. 보내드린 사진 중에 제가 보낸 줄 알았는데 실수로 빠뜨린 사진이 몇 장 더 있습니다. 근데 좀 놀라실 것 같은데….
“놀라? 내가요?”
- 그게, 좀 싫어하실 만한 사진이 몇 장 더….
해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손잡은 것만 봤는데도 면상이 시궁창에 처박힌 기분인데 더한 것이 있을 수 있다 생각하니 이가 부득 갈렸다. 해준이 미간이 깊게 패였다.
“최 실장님. 일 처리 이렇게 하실래요? 안 그래도 기분 좆같은데.”
-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일단 전부 보고해야 할 것 같아서 보낸 사진을 받아 보시면….
해준은 손가락을 들어 남자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앞선 받은 사진과 같은 구도의 장면이었다. 다만 몇 장의 사진들은 마치 급박한 상황을 그대로 담으려는 듯 연사로 찍혀 있었다.
“…이게 뭐야?”
자리를 피하려던 이소는 남자에게 손목이 잡혔다. 선 채로 남자의 이야기를 얌전히 듣는 듯싶더니 돌연 거칠게 남자의 손을 쳐내고 바짝 다가가 멱살을 쥐었다. 이소가 팔을 크게 휘두르자 테이블에 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남자는 굳은 표정을 하고 이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어 이소는 남자의 몸을 내던지듯 세게 밀어 버린 후 빠르게 가게를 빠져나갔다. 문을 열고 나와 가게 앞에서 숨을 고른 이소는 고개를 들고 한참 허공을 노려보다 자리를 피했다. 상처 받은 짐승같은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가게 안에 남겨진 남자는 이소를 잡으러 오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해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 …저, 도련님?
“안 끊었어요. 말씀하세요.”
- 아, 네. 조용하시길래…. 그, 저…. 윤이소 님은 그 이후에 골목길에 가서 구토를 좀 하시고, 해수 양을 찾으러 어린이집으로 갔습니다. 지금까지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시다가 현재는 백화점에 계시고요. 그 남자는 윤이소 님과 헤어진 뒤 카페에서 바로 차를 타고 돌아간 듯합니다. 제가 계속 붙어 있었지만… 따로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알았어요. 수고했어요.”
통화가 끝난 핸드폰 화면에는 가게에서 막 나온 윤이소의 울 듯한 얼굴이 꽉 차게 찍혀 있었다. 해준은 손가락을 들어 문을 박차고 나온 이소의 얼굴을 크게 확대했다. 아주 천천히 차근차근 뜯어보며 제 손가락으로 그리듯 매만졌다.
춘식이 말했던 소처럼 순하고 큰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붉고 작은 입술은 앙다물린 상태였다. 볼과 귓바퀴가 새빨갛게 상기된 채 바깥으로 나온 이소는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코를 들이마셨는지 작고 오똑한 코 끝도 발갛게 익어 있었다. 주먹을 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모가 가늘고 풍성한 고동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사진을 넘기던 해준은 카메라 렌즈와 정면으로 마주친 이소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사진 너머의 저와 눈이 마주친 듯한 이소는 분명 서럽게 울고 있었다.
이 얼굴은 누구보다 잘 아는데.
돌연 해준의 아래가 빠듯하게 당겨 왔다. 이 얼굴을 안다. 이 표정을 안다. 저와 밤을 보낼 때마다 제 밑에서 도리질을 치며 울 듯 말 듯 한 낯을 하고 쾌락에 몸부림을 치던 윤이소. 해준은 엄지를 들어 다시 사진을 넘겼다. 이소가 남자의 멱살을 그러쥔 채 일갈하고 있는 사진에는 조각조각난 유리 파편을 아무렇지 않게 밟고 올라선 이소가 있었다.
분노에 사로잡혀 남자를 겁박하는 이소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고 했을까, 애인이 있으니까 수작 걸지 말라고 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나와 있었던 모든 기록은 지우고 당장 꺼지라고 했을까. 평소 얌전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이소가 조곤조곤 떠드는 목소리가 참 좋았기에 해준은 사진과 같은 상황이 이소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꾸만 터질 듯한 샅 때문에 불편감이 커졌다.
윤이소가 화를 내고 있었다. 해준은 눈자위가 붉게 물든 이소의 얼굴을 화면에 띄운 채 바지 지퍼를 내렸다. 평소 차뿐만이 아니라 집에서도 혼자 하는 것은 취미도 없었고 내키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잡고 흔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에 휩싸였다. 해준은 어느새 빳빳하게 고개를 든 기둥을 잡은 채 느리게 쓰다듬으며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또 다른 사진 속 이소는 바닥에 구토를 한 후 벽에 아무렇게나 기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투명한 토사물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골목은 더러웠다.
‘별 사진을 다 찍었군. 비위도 좋지.’
이소의 온몸이 붉었다. 내내 터지지 못한 눈물이 구토 한 번에 다 쏟아져 나온 듯 콧물과 침이 범벅이 되어 헐떡였다. 해준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더 빠르게 기둥을 쓸어올렸다. 강하게 그러쥔 뒤 위 아래로 흔들자 뻣뻣하게 세운 기둥에서 조금씩 쿠퍼액이 새어 나왔다. 해준은 제 것을 이소의 입에 처박고 싶은 것을 줄곧 참아 왔다. 초밥 하나가 쏙 들어가는 작은 입인데 제 것을 물 수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차해준은 윤이소에게 그런 극악무도한 짓은 시키지 않을 거라고 나름 적정의 선을 그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종종 잊는다. 이소 역시 성인 남자라는 것을. 제 품에 두고 약과나 물리며 엉덩이나 두드리고 싶은데 생각해 보면 180cm가 조금 못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제 아래에 순순히 다리를 벌리고 엉엉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해준은 이성을 잃고 허리 짓을 하곤 했다. 남자를 받아 본 적 없는 몸을 억지로 열었을 때, 나중에는 저절로 제 목에 손을 감았을 때, 먼저 하고 싶다고 졸랐을 때…. 해준은 대체로 이소에게 발정하지 않을 때가 없었지만 이소의 새로운 모습을 볼 때마다 유독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지금처럼 분노에 이성을 잃은 모습이라든지, 구토를 하고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이라든지.
“하아….”
미지근한 열감을 품은 건조한 손바닥이 탁탁 좆과 음낭을 번갈아 때렸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저 예쁜 얼굴 위에 제 정액을 마구 뿌릴 생각을 했다. 초점이 없는 눈으로 혀를 내어 핥아 주려나. 아니면 무서워하며 눈을 가늘게 뜨려나.
제가 아닌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목덜미를 잡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뒤에서 허리를 잡고 강하게 박아 넣었을 때도 비명을 지를지언정 저에게 모진 말 한마디를 않던 이소였다. 그런 이소가 저렇게 흥분해서 사람 멱살을 잡아챌 정도라니, 저 인사도 어지간히 잘못 뱉었나 보군.
“흐음…….”
해준은 이소가 제 귓가에 욕지거리를 하는 상상을 하며 길게 사정했다. 해준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감은 눈을 떴다. 제 핸드폰 화면 위 우는 이소의 얼굴 위에 파정액이 혼란하게 튀어 있었다. 이소의 발간 귓가, 상기된 볼, 붉은 입술 위로 뿌연 정액이 주륵 흘러내렸다. 나중에 침대에서 욕을 해 달라고 하면 저런 표정으로 노려볼 것 같다. 해준은 제 상상이 황당해서 피식 웃었다.
“하긴 나름 성깔도 있었지…. 도대체가 안 예쁜 구석이 없어.”
해준은 마치 이소의 얼굴을 만지듯 엄지로 쓸어올렸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티슈를 뽑아 화면을 대충 닦은 후 해준은 가라앉은 눈으로 시동을 걸었다. 이소는 여전히 백화점에 있었다. 깜빡깜빡 반짝이는 불빛이 자리한 곳으로 해준이 차를 돌렸다. 가서 왜 울었는지 들여다볼까, 본래 해준은 이소 말을 들을 위인도 아니었거니와, 정작 제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면 주거 침입도 서슴치 않는 인물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