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50)

7

축축한 냄새에 눈을 뜨자 어느새 성큼 다가온 비구름이 코 앞이었다.

잠깐 고개를 파묻고 있으려고 했는데 그새 졸았는지 시간이 지체되어 있었다. 힘겹게 눈을 뜬 이후에도 일어나 가게로 가고 싶지 않아 한참을 밍기적댔다. 멍하게 앉아서 핸드폰 화면을 켰다. 배터리는 고작 7퍼센트만 남아 있었다. 부재중 전화가 7통, 메시지가 12통. 정말로 혼자 있고 싶었다면 화면도 열어 보지 않았을 텐데 그런 건 또 아니었는지 채팅창을 열어 해준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온 메시지들은 오늘 하루 계획을 줄줄 읊고 있었다.

-친구랑은 잘 만나고 있어요?

-맛있는 거 먹고 있어요?

-도착하면 몇 시쯤이에요?

-날씨 좋은데 우리 드라이브 갈까요?

-아직이에요?

-그럼 주말에 갈까요?

‘물음표투성이….’

누가 저에게 이렇게까지 하겠나. 저 수많은 질문은 모두 관심의 표현이라는 것은 해수를 키우며 체득한 사실이었다. 이소는 화면을 매만졌다. 해준이 보낸 문자만 읽고 있어도 제 곁에 있는 것 같았다.

교수님 그거 아세요? 저는 사실 되게 자주 이런 일이 생겨요. 저도 알아요.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팔자가 사나운 거. 남들이 저한테 막 해도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어요. 누구나 다 이 정도는 비슷하게 쓸쓸하고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담장 너머에 들꽃 천지인 줄 모르고 살았을 때는 내 발 밑에 있는 잡초 한 포기도 참 예뻐 보였는데요. 정신 차려 보면 교수님이 자꾸만 내게 온 세상 꽃들을 한 아름씩 안겨 줘요. 이러다가 제 곁에서 훌쩍 떠나 버리시면 분수에 맞지도 않게 저는 꽃 한 송이로 만족할 수 없을 거예요. 두 배, 세 배…. 어쩌면 백 배쯤 교수님을 만나기 전보다 더 많이 외로워할 거예요.

그러니까요.

조금만 덜 잘 해 주세요.

내 마음에 조금만 천천히 들어오세요.

내가 너무 많이 좋아하지 못하게 조금은 빈틈을 보여 주세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알고 있었다. 모두 부질없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결국 그 끝에는 항상 차해준이 있었다. 왜 좋아하는 마음은 이렇게 거침없이 불어나 눈사태처럼 저를 덮치는 걸까. 쏟아지는 눈발처럼 정도를 모르고 날뛰는 제 연정은 순백의 색을 띠고 있지만 밋밋하고 다채롭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마음에 소복이 쌓이는 것뿐인데 그것마저 해준의 근처에 닿기도 전에 소리 없이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소의 마음은 쉬지도, 지치지도 않고 보고 싶어 했다.

이소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으차, 숨을 몰아 쉬고 난 후 기지개를 켰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 멍하게 앉아 한두 시간 정도를 우울해하고 나면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건 이소의 특기였다. 마음속에 피어난 억울하고 슬픈 감정을 저만의 서랍에 곱게 집어넣고 닫고 나면 천천히 잊혔다. 이소는 단순해서 나쁜 일을 잘 잊어버리는 제 성격이 좋았다.

비가 더 오기 전에 돌아가면 저녁 시간에 여유 있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쿠르릉, 거칠게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유난히 탁했다. 핸들을 돌려 둑방을 빠져나가면서 오늘은 자고 가라고 던져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불을 세탁했었나. 베개는 충분히 있나. 갈아입을 옷은… 있나. 가는 길에 파스타 소스와 면을 사야겠다. 토마토 좋아하실까.

이소는 해준만큼은 아니지만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을 다 주고 싶었다. 곁에 있는 동안만큼은 있는 힘껏 잘 해 주고 싶었다. 적어도 곁에 있는 동안은.

* * *

“야, 안 돼…. 정신 좀 차려 봐, 하씨….”

어쩐지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난다 했다. 10분도 채 못 가 오토바이의 시동이 천천히 꺼져 버리자 이소는 급하게 눈에 보이는 공원 주차장으로 행로를 바꿨다. 대리점 주인이 너무 오래된 녀석이니 웬만하면 적당한 가격의 중고로 바꾸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을 것을 괜한 고집을 부렸더니 결국 이 사달이 났다. 그나마 도로 한가운데서 픽 하고 꺼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소는 시동이 꺼져 버린 녀석을 질질 끌고 주차장 구석에 대충 세워 두었다.

“하…그냥 중도 상환 하지 말걸….”

그 돈으로 오토바이 사는 데 보탤걸. 설상가상으로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꼭 안 좋은 일은 연달아 터진다. 이소는 오토바이를 두드리며 ‘미안해. 내일 데리러 올게.’ 하고는 근처에 보이는 버스정류장으로 달음박질쳤다. 집까지 빨리 갈 수 있는 버스는 모두 40분 후에 온다고 하고, 그나마 조금 돌아가기는 하지만 곧 도착하는 버스가 5분 뒤였다. 배터리가 완전히 나가기 전에 해준과 정숙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싶어 핸드폰을 들었다. 비에 젖은 손으로 자판을 치려니 자꾸만 오타가 났다. 정숙에게 ‘30분 있다 집 도착할 것 같아요.’라고 보낸 뒤 얼른 해준의 번호를 띄웠다. 배터리가 1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 빨리, 진짜 빨리 쳐야 해.

[교수님]

[ㅈ ㅓ 지금]

가고 있…다고 보내려고 했는데 화면이 툭 꺼져 버렸다. 비와 오토바이에 이어서 핸드폰까지. 워낙 잘 꺼지는 거야 감수하고 쓰고 있었는데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나가 버리다니 정말 지지리 운도 없지. 다행히 저 멀리서 이소가 타야 하는 버스가 오고 있었다.

“일단 연락했으니까…. 괜찮겠지.”

버스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빗줄기가 요란하게 차창을 때렸다. 먼지처럼 엉켜 있던 마음이 시원하게 씻겨져 내려가고 있었다.

비가 조금 잦아들 때 즈음 이소는 버스에서 내렸다. 동네 마트에서 파스타 소스와 면을 사고 돈이 조금 남아 식빵도 하나 샀다. 가게 주방에 어제 쓰고 남은 양송이버섯과 토마토도 있으니 잘게 썰어 넣으면 조금 더 풍미가 있을 것이다. TV에서 보니 갓 구운 마늘빵을 애피타이저로 주곤 하던데 그걸 좀 따라 해 볼까 싶었다. 다진 마늘과 올리고당, 파슬리 등 머릿속으로 재료를 배합하며 장보기를 마쳤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는 했지만 우산 없이 걸어왔더니 셔츠고 바지고 할 것 없이 흠뻑 젖었다. 사람이 없는 동네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유독 티가 났다. 인적이 드문 스산한 골목은 온기 한 점 없는 특유의 섬짓한 분위기가 있었다. 서둘러 봉투를 품에 안고 들어가려는데 등 뒤에서 자꾸만 저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

빈집이 많아서 그런가. 이 동네에는 오래된 귀신도 있으려나. 목덜미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서둘러 가게 문을 쥔 손에 뜨끈한 열감이 피었다. 딸랑, 눅눅한 공기가 가득한 가게, 정숙은 의자에 기대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티브이를 보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이소를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아이고, 이소 씨. 다 젖었네, 다 젖었어.”

“별일 없었죠?”

“별일은 무슨. 우산이 없었으면 전화를 하지…. 아니, 늦어도 두 시간이면 오던 사람이 연락이 없으니 애가 타서 그냥.”

“그러게요. 전화기 바꿔야 하나 봐요, 정말.”

정숙에게서 수건을 받아 든 이소는 대충 머리를 털고 주방 테이블 위에 사 온 물건들을 올려놓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충전 포트에 꽂고 전원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정숙은 이소의 눈치를 보며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던 신문과 간식 봉지 같은 것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았다.

처음에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였던 정숙이었지만 이소와 함께 일을 하면서 종종 몸이 편한 대로 늦장을 부리곤 했다. 이소는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숙의 가게였고 운영 방식을 가지고 예민을 떨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심신이 지쳐 있는 오늘 같은 날은 주방이고 카운터고 너저분한 꼴이 조금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해수는요?”

“오늘 감자 캐는 활동 다녀왔다더니 엄청 피곤했나 봐. 흙범벅이 돼서 목욕시켰더니 저녁잠을 자네. 조금 이따가 깨워서 저녁 먹이면 돼. 비오니까 아마 잘 잘 거야. 나도 오늘은 문 닫고 일찍 들어갈 테니까 이소 씨도 다른 거 하지 말고 쉬어. 내일 하나 오늘 하나 똑같다.”

“그럴게요. 안 그래도 조금 쉬어야 할 것 같긴 해요. 열도 좀 나는 거 같고.”

“열나? 거기 해열제 있어. 들어가서 좀 자. 해수는 오늘 내가 데리고 자면 돼. 전번에는 뭐라더라, 이제 혼자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더라. 걔는 맨날 말로는… 아 맞다, 아까 차 교수가 왔었는데.”

무시로 지나가듯 말하는 정숙의 말에 이소는 막 전원이 켜진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돌아보았다. 가게에 왔었다고?

“차 교수님이 오셨었다고요?”

“응. 연락이 안 된다면서…. 잠시 들렀었지. 금방 갔어 근데. 저기 간식도 차 교수가 주고 간 거야. 그런데 둘이 오늘 만나기로 했었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오신다는 말씀은 없으셨어서.”

“친구끼리 보고 싶으면 그냥 오는 거지 뭐.”

버스를 타기 전까지 확인했던 메시지 말고도 더 보냈던가? 마트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마주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핸드폰은 항상 느지막이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뜨곤 했다. 아무것도 오지 않은 메시지 함을 참을성 있게 들여다보고 있자 뒤늦게 빨간 알림창의 숫자가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제가 보낸 ‘교수님’, ‘ㅈ ㅓ 지금’ 이후에 바로 읽었는지 메시지가 연달아 와 있었다.

[이소 씨.]

[괜찮아요?]

[전화가 꺼져 있어요. 배터리 나간거예요?]

.

.

.

[지금 가게로 갈게요.]

.

.

[어디예요?]

[비가 많이 와요. 우산 있어요?]

.

.

[이소 씨. 나 일이 생겨서 학교 다녀올게요.]

[끝나면 바로 가게로 올거예요.]

[왔을 때 이소 씨가 도착해 있었으면 좋겠네요.]

.

.

.

[지금 학교 도착했어요.]

[끝나고 가게로 갈게요.]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한 지 20분 정도 지나 있었다. 이소는 그대로 충전 포트를 뽑은 채 몸을 돌렸다.

“사장님, 저 나갔다 올게요. 다녀와서 저녁 같이 먹어요.”

“아니, 다 젖어서 어딜 또 가! 열도 난다며!”

이제 고작 3퍼센트 충전된 핸드폰을 쥐고 가게 문을 열었다. 변덕이 심한 비는 어느새 또 쏟아붓고 있었다. 문 옆에 대충 꽂아 둔 우산을 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등 뒤에서 다른 우산을 가져가라는 정숙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제멋대로 몸이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 * *

우산대가 꺾여 반절이나 접힌 우산은 안 쓰느니만 못했다. 몇 번이나 미끄러져 구를 뻔한 것을 땅을 짚고 고쳐 서서 달린 지 10분, 언덕을 넘어 고요한 교수회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물에 한 번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완전히 젖어 있었다. 봄비가 따뜻하다지만 열이 끓는 몸에 닿는 빗방울은 마치 얼음을 쏟아붓는 것처럼 찼다. 우산을 대충 아무 곳에나 세워 두고 문 앞에 섰더니 그제서야 출입 카드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맥이 풀렸다. 허탈감에 사지가 떨렸다. 뒤늦은 오한이 찾아오고 있었다.

“저기…. 학생, 괜찮아?”

고개를 돌리자 출입 카드를 목에 건 중년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심보다는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하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턱대고 보안 핑계를 대며 쫓아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소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엉망이 된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비에 젖은 백옥같은 낯을 한 미청년은 한눈에 봐도 상당히 지쳐 있었다. 가늘게 뻗은 팔과 다리에 난 생채기들과 떨고 있는 몸뚱이는 교수회관이 아니라 보건실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그…. 보건실은 본관 2층으로 가면 되는데.”

“…….”

“교수님 보러 온 거야? 레포트 제출해야 하는 거야?”

남자는 지레 짐작하며 카드를 찍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이소는 머뭇대다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학번 같은 걸 물어보면 어떡하나 고민했지만 우선은 들어가는 게 먼저였다.

“아…. 그게…, 네. 레포트를 내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비를 다 맞고 오면 어떻게 해. 아무리 과제가 중요해도 무리하면 안 되지.”

“네, 죄송합니다….”

“나한테 뭘 죄송해? 여기, 이거로 좀 닦아요. 다 쓰고 나갈 때 행정실 앞에 갖다 둬도 돼요. 나 거기 있으니까. 와서 우산도 빌려가고.”

남자는 의심 없이 문을 열어 주며 등을 떠밀었다. 남자가 손에 쥐여 준 손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은 이소는 고개를 숙이고 남자가 사라지자 곧바로 몸을 돌렸다. 눈 앞에 엘리베이터가 2층에 있었지만 바로 옆 비상구를 통해 뛰어 올라갔다. 고작 그 몇 초를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당장 해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말라죽을 것 같았다.

몇 층 안 되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해준의 연구실 앞에 도착해서야 불현듯 ‘엇갈렸으면 어쩌지’라는 불안한 예감이 고개를 들었다. 쥐똥만큼 충전한 핸드폰은 다시 먹통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두운 복도,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눈에 띄었다.

‘아직 있어.’

이소는 남자의 손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어 넘겼다. 차가운 물기가 부산하게 떨어졌다.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싹싹 쓸어넘겼다. 코는 차가웠고 볼이 뜨끈했지만 몇 번 더 닦아 내자 제법 사람 꼴을 갖췄다. 똑똑똑, 두드리자 덜그덕거리던 소리가 멈추고 ‘네.’ 하는 해준의 무감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정히 제 이름을 부를 때와는 사뭇 다른, 고저 없이 차갑고 단조로운 톤이었다.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입꼬리가 휘어졌다. 물기 어린 옷깃 끝을 잡아 내리고 쥐어짜며 어떻게든 단정한 모습을 보여 주려 했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손은 더욱 바빠졌다. 이소는 허리를 수그린 채 옴팡 젖은 바지의 물기를 털어보려 갖은 애를 썼다.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이소는 얼른 허리를 세우고 숨을 들이켰다. 문이 열리자 뜨끈한 차향과 온기가 훅 끼쳤다. 항상 고개를 살짝 올리면 다정히 마주치던 눈이 거기 있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나무 냄새를 맡자 절절 끓었던 열이 식는 느낌이었다.

크림색의 셔츠를 입은 해준의 코에 못 보던 안경이 걸쳐져 있었다. 유리알 너머로 비친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소 씨?”

“…교수님.”

저절로 잇새가 벌어졌다. 골이 흔들리는 듯한 두통은 온데간데없고 잔상처럼 흐릿했던 시야도 순식간에 분명해졌다. 이소는 흡사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아이가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부모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온기에 홀린 듯 저절로 고개가 기울어지고 몸을 기대고 싶었다.

해준이 손을 뻗어 이소의 머리와 옷을 매만졌다. 털어 낸다고 털었는데 물기 하나 없는 해준의 손에 닿으니 제가 젖어 있는 것이 실감이 났다.

“세상에, 옷이…. 비 맞고 왔어요?”

“저, 배터리가 다 나가서요. 그러니까…. 혹시나 걱정하실까 봐…. 핸드폰이 오래되기도 했고요. 메시지를 무시하려던 건 아니고, 정말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좀, 일단 물기부터 닦고….”

이소는 횡설수설 제가 하고 싶은 말부터 전했다. 해준이 당황하는 얼굴을 처음 봐서 그런지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이소가 배시시 웃는 낯이 무척 붉었다. 해준은 이소의 볼에 손을 대었다 데는 듯한 열기에 놀라 손을 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 열나.”

“아, 이거는…. 그냥 좀 원래 피곤하면 열이 자주 나고 잠들고 그러거든요…. 별거 아닌데.”

이소는 낮게 웃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살갗이 따끔거렸다. 뛰어오며 몇 번 미끄러져 땅을 짚었던 손바닥이 쓸린 듯했다. 비에 젖었는데도 열 때문인지 입술과 코안이 수시로 마르고 있었다. 혀로 천천히 입술을 적시고 젖은 눈을 깜빡이자 해준의 눈동자가 천천히 제 몸을 훑는 게 느껴졌다. 아, 너무 쫄딱 젖었지. 굉장히 없어 보이겠네, 나.

이소는 멋쩍게 웃었다. 이제 좀 들여보내 주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니 너무 복도는 너무 춥고, 내내 굶어서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해준이 좀 안아 주면 우울한 마음이 가실 것 같은데. 이소는 가지런히 모은 손을 꼬무락댔다.

“교수님.”

“네.”

“저…. 지금 너무 많이 젖었거든요.”

후으, 좀 춥다. 하하. 이소는 과장되게 몸을 떨며 미소 지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따뜻한 방이 코 앞인데 저는 눅눅한 복도에 서서 궁상맞고 초라하게 서 있었다.

“…….”

해준이 아무 말이 없자 이소는 괜히 무안해져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렸다. 진짠데.

“그러니까…, 저 좀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면 안 될-”

갑작스럽게 허리를 채가듯 당긴 해준의 손에 이소의 몸이 기다렸다는 듯 맥없이 끌려 들어갔다. 힘없이 놓친 손수건만 해준의 연구실 앞에 덩그러니 떨어졌다. 문이 닫힌 빈 복도에 낮은 천둥소리가 퍼졌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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