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하루하루가 행복하도록
본가 앞에 도착해서 기준이 랑일이와 내리려고 할 때 희원이 기준을 불렀다.
“기준 씨, 집에 어머니 계시면 인사하고 싶은데…….”
“그래요, 잠깐 인사만 하고 가죠, 뭐. 급할 거 없으니까.”
기준이 짐짓 여유를 부리는 척을 했다.
“할머니!”
랑일이가 현관으로 들어서며 박 여사를 힘차게 불렀다. 주방에 있던 박 여사가 한걸음에 달려 나와 랑일이를 품에 안았다. 그러다 현관문 앞에 서 있는 희원을 발견하고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희원아.”
“어머니. 잠시 인사드리려고 들렀어요.”
박 여사는 희원의 손을 잡고는 이끌었다.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
“어머니, 저희 바빠요.”
기준이 박 여사의 손을 잡고는 희원하고 분리시켜 희원을 뒤로 숨겼다. 박 여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꾸 그런 식으로 할래?”
“어머니.”
“기준 씨, 차 한잔 마시고 가도 되잖아요. 어머니, 저 커피 한잔 마실래요.”
“그래 희원아, 엄마가 맛있게 내려 줄게.”
희원은 박 여사의 손에 이끌려 소파에 앉았다. 기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희원의 옆에 앉았지만 박 여사는 기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희원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이준아, 커피 두 잔만 내려서 가지고 와.”
기준이 기가 막힌다는 듯 박 여사를 쳐다봤지만 박 여사는 아들의 그런 시선쯤은 가볍게 무시했다.
“마치 어머니가 커피 내려 줄 것처럼 그래 놓고는 저보고 내리래요?”
주방에서 이준이 나오며 투덜거렸다.
“형도 와 있었어?”
“엄마 호출. 랑일이 온다고 와서 보라잖아. 오늘 해준이 없다고. 희원 씨 왔어요?”
이준이 커피 두 잔을 박 여사와 희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안녕하세요. 아, 그리고 고맙습니다.”
희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이준이 “뭐가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희원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 주었다.
“이거요.”
“아, 반지. 랑일아, 마미 선물 드렸어?”
“응! 큰아빠, 오늘 쿄우는 없어요?”
랑일이가 고양이를 찾았다.
“쿄우는 방에 있어. 올라가 봐.”
“고양이 또 데리고 왔어?”
기준의 물음에 이준이 ‘뭐, 안 돼?’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 정도면 그 고양이 형이 분양받은 거 아냐? 고양이 주인은 또 어디 갔는데?”
“여행 가셨지요.”
이준이 툭 내뱉었지만 그 말속에 묘하게 짜증이 묻어 있음을 기준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형의 연애가 그리 탄탄대로는 아닌 것 같아서 기준은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큰아빠, 나 쿄우 보러 갈래요.”
이준이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미, 내일 일찍 집에 올 거예요?”
“응, 아침 먹고 놀고 있으면 마미가 올게. 같이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놀자.”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인 후 희원의 뺨에 뽀뽀를 하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는 동안 기준은 제 형을 불퉁하게 쳐다봤다. 이준이 그 눈빛을 알아채고 “뭐?” 하고 물었다.
“나는 왜 커피 안 줘?”
“안 먹는다며.”
희원이 자신의 커피를 기준에게 쓱 밀었다. 그러자 이준이 제 동생을 비웃듯 쳐다봤다.
“아, 맞다. 나 형하고 할 말 있어. 잠깐 와 봐.”
기준은 이준을 데리고 주방으로 사라졌고 희원은 거실에 박 여사와 마주 앉았다.
“어머니, 시계 감사해요. 뭘 이런 걸 다 주셨어요.”
“당연히 챙겨야지. 이제 희원이도 우리 집 사람인데.”
박 여사가 희원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나는 늘 기준이랑 랑일이 때문에 걱정이었어. 해준이는 설이 낳고 루세랑 잘 살고 있고, 이준이야 기준이보다는 그래도 따듯한 편이니까 꼭 누구를 만나 결혼하는 게 아니라도 마음을 나눌 사람이야 있겠지 싶었는데 기준이는 얼음같이 냉랭하기만 해서 말은 안 해도 걱정이었어. 그런 아빠 밑에서 자라는 랑일이는 또 어떻고.”
박 여사의 말에 희원은 그녀의 걱정이 무엇이었을지 알겠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 이준이는 어릴 때부터 책 보고 그림 보러 다니는 것밖에 몰라서 저놈은 경영에는 안 맞겠다고 생각해서 우리 부부는 애초에 기대를 접었거든.”
기준에게서도 한 번 들었던 이야기라 희원은 묵묵히 들었다.
“반면에 기준이는 어릴 때부터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애였어. 그래서 기준이를 후계자로 키웠는데 문제는 그러다 보니 머릿속 지식은 커 가는데 마음이 안 크는 거야. 마치 심장이 안 뛰는 사람처럼 차갑고 계산적이기만 해서 랑일이를 덜컥 낳아 놓고서도 걱정이었어.”
“어머니가 어떤 부분을 염려하셨을지 짐작이 가요.”
“그런데 우리 희원이 만나서 기준이도 랑일이도 변해 가는 게 보이는 거야. 그게 엄마는 얼마나 행복하던지 아마 아무도 모를 거야.”
박 여사가 우아하면서도 따듯하게 웃어 보였다. 희원이 따라서 마주 웃었다. 희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박 여사가 정말 행복해해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했다.
“오늘도 보니까 랑일이가 정말 희원이를 많이 의지하고 따르더라.”
“랑일이가 워낙 착해서 그래요.”
“랑일이는 오늘 내가 잘 볼 테니까 기준이랑 재미있게 놀고 와. 그동안 유치원 행사 준비하느라 쉬지도 못했을 거 아냐. 오늘 보니까 살도 많이 빠진 것 같더라. 우리는 나중에 따로 백화점 쇼핑하자.”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동안 기준이 제 형과 이야기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희원 씨, 가요.”
“그래, 희원아 가서 잘 놀고 푹 쉬고 그래.”
“네.”
희원이 일어서며 이만 가 보겠다고, 랑일이 좀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했다.
“랑일이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데리고 잘게요. 그리고 내일 천천히 오셔도 괜찮아요. 랑일이 데리고 점심때 나갔다 올게요.”
이준이 주방에서 나오며 희원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점심때까지 오면 되는걸요.”
“괜찮아요, 희원 씨. 형이랑 얘기 다 끝났어요.”
희원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준의 손에 이끌려서 마당으로 나왔다.
희원이 차에 타자마자 기준은 그대로 희원의 뺨을 감싸고는 입을 맞췄다. 아직 집 주차장이라서 희원의 눈동자가 똥그래졌지만 기준은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 한 손으로는 희원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헤집었다.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요? 죄다 희원 씨만 쳐다봤던 거 몰라요?”
“누가 저를 봐요. 다 아이들 보느라 정신없었지요.”
“이것 봐. 본인은 모른다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희원이 타박하자 기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입을 맞췄다. 아직도 집이라는 사실에 희원이 민망해서 손으로 밀어내자 그제야 기준은 뒤로 물러났다.
“희원 씨, 우리 드라이브할래요?”
“네, 좋아요.”
희원이 눈을 접으며 웃자 기준은 희원의 뺨을 톡 치고 다시 입술을 살짝 물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희원은 입을 작게 벌렸다. 한동안 둘 다 여유가 없어서 회사, 유치원, 집이 반복되었는데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였고 간만에 갖는 여유였다. 그런데 기준이 신경을 썼는지 창밖의 풍경이 꽤나 예쁜 거였다.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아요?”
“왜 몰라요? 찾아보면 알지.”
“찾아봤다고요? 기준 씨가?”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빤히 쳐다봤다.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러워요.”
“거짓말. 기준 씨가 부끄러운 게 어디 있어요?”
“있지, 왜 없어요. 부끄러워서 얼굴이 다 빨개졌는데.”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뻔뻔하게 대답하는 기준에 희원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기준이 피식 웃으며 강이 잔잔하게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11월이라서 푸른 나무도, 울긋불긋한 단풍도 많이 떨어졌지만 반짝반짝 비치는 조명이 보이고 그 불빛이 강물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꽤 근사했다.
기준이 희원을 바라보며 주머니 속에 있는 작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희원은 곧 어떤 얼굴을 할까, 무슨 말을 할까. 기준은 떨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눌렀다.
강물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밤하늘에 걸린 별과 같아서 희원은 싱글벙글 웃으며 물을 바라봤다.
“기준 씨, 정말 예뻐요.”
희원이 한껏 신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응? 기준 씨?”
옆에서 아무 대답이 없기에 희원이 기준을 살폈다. 그의 페로몬이 살짝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희원 씨.”
“혹시 몸이 안 좋아요? 페로몬이…….”
차 안을 점령해 버린 기준의 페로몬에 희원은 숨을 골랐다.
“아니에요, 미안해요.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그럼요? 혹시 피곤해서 그래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떨려서요.”
“네?”
기준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희원 씨.”
희원이 재촉하지 않고 기준을 조용히 바라봤다. 기준이 심호흡을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것도, 생일 선물을 고르는 것도, 희원 씨가 처음이에요.”
희원이 편하게 말하라고 기준과 가만히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평소 그리 자신만만하고 매사 어깨를 쫙 폈던 기준이 희원과 눈도 잘 마주하지 못하고 앞만 바라보는 게 희원은 어리둥절했다.
“나는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지도 처음 알았어요.”
희원이 고개를 앞으로 쑥 빼서 기준과 눈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어 주었다.
“저도요. 저도 누군가와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기준 씨, 고마워요.”
기준이 운전석에 이마를 박고 한숨을 내쉬었다. 놀란 희원이 기준의 어깨에 살짝 손을 댔다.
“기준 씨?”
“아, 오늘 다 망했네요.”
“응? 그게 무슨 소리예요?”
기준이 의자에 뒤통수를 기대고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크 선택도 랑일이한테 뺏겼죠, 반지도 랑일이가 먼저 줬죠, 이젠 고맙다는 말도 희원 씨한테 뺏겼어요.”
희원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결국 웃어 버렸다.
“그게 뭐예요, 기준 씨.”
“뭐긴 뭐예요. 희원 씨 생일 멋지게 해 주고 싶었는데 계획이 다 틀어진 거죠. 하지만 희원 씨, 이건 내가 먼저 말할 거예요.”
희원이 다급해 보이는 기준을 다정하게 바라봤다.
“희원 씨, 이제 우리 같이 살아요. 저번에는 내가 바빴고, 이번에는 희원 씨가 바빴고 그러다 보니 내 애간장이 녹아요.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얼굴 보는 걸로는 이제 부족해요. 밤에도 옆에 끼고 자고 싶고 바쁜 희원 씨 외조 내가 해 주고 싶어요. 대놓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시켜 주고 싶고 랑일이 아버님이 아니라 이희원 선생님 남편으로 유치원에 맛있는 것도 보내고 생색도 내고 싶어요.”
“기준 씨…….”
“처음에는 누군가와 연애를 해 본 적도 없고 그러다 보니 그럴싸한 데이트를 해 본 적도 없어서 희원 씨와는 데이트도 많이 해 보고 알콩달콩 연애도 하고는 천천히 결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안 되겠어요.”
희원은 놀란 듯 토끼 눈이 되어서 눈만 깜박였다.
“내가 정말 잘할게요. 하루하루 나랑 살면서 정말 이기준하고 살길 잘했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할게요.”
희원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어어! 왜 울어요. 울리려고 그런 거 아닌데.”
“아니, 그게 아니라…….”
기준이 희원을 끌어다가 품에 안았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컵 홀더와 공간이 있어서 폭 안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준은 희원을 품에 안고 등을 도닥여 주었다.
“희원 씨는 그냥 나한테 오기만 하면 돼요. 아무것도 할 거 없어요. 희원 씨만 있으면 돼요.”
“기준 씨,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인가 봐요. 기준 씨에 랑일이에 기준 씨 식구들 모두 함께 있으면 정말 행복해지게 만들어 주니까요.”
“내가 더 그런걸요. 누가 애까지 있는 이혼남한테 선뜻 오려고 그러겠어요. 근데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고 착한 희원 씨가 오는 거잖아요. 그쵸? 나한테 올 거죠?”
기준의 재촉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기준이 희원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속삭였다. 낮은 기준의 목소리에 절절함이 배어 있어서 희원은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제가 뭐라고. 기준에 비해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는데 이리 사랑해 주는 걸까.
“희원 씨는 나한테 정말 과분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저는 좀 뻔뻔해지려고요. 과분한 희원 씨를 원하고 또 원하려고요.”
희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기준이 말했다. 희원은 과분한 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기준은 계속해서 희원에게 귀한 사람, 소중한 사람이라고 속삭였다.
한때 희원은 의기소침했다. 대학교 때 오랫동안 사귀었던 알파와 페로몬 문제로 헤어지고 난 뒤 희원은 자신이 쓸데없는 오메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알파와 오메가에게는 페로몬이 중요하고 그게 형질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희원은 페로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준은 처음부터 희원이 오메가라는 것도 몰랐고 알게 된 지금도 그게 둘 사이에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기준은 그런 문제가 둘 사이에서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늘 말하고 있었다.
기준은 희원을 오메가가 아닌 한 사람으로 아껴 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희원은 기준과 만나 오는 내내 그가 아낌없이 퍼 주는 사랑에 촉촉이 젖어 들어갔고 이제는 굳건해졌다. 그게 다 기준 덕이었다.
“희원 씨, 이거 껴 줄래요?”
기준이 안고 있던 희원을 살짝 떼 놓고 주머니에서 남색 케이스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벨벳 케이스를 열자 심플하지만 단아하고 우아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치원에서 꼬맹이들이랑 있는 시간이 많을 테니 일부러 심플한 거로 골랐어요.”
희원이 그 무엇보다 자신의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아는 기준은 그래서 그가 반지나 시계 같은 것을 일절 안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반지를 주고 싶어서 최대한 심플해서 아이들 몸이나 얼굴에 긁히지 않을 것으로 준비했다.
“기준 씨, 고마워요.”
희원은 이 남자의 이런 다정함과 세심함, 배려가 정말 좋았다. 눈물이 날 것같이 말이다.
“울지 마요. 생일날 왜 울어요.”
“자꾸 기준 씨가 감동시켜서요.”
기준이 다정하게 웃으며 희원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희원이 반지 낀 네 번째 손가락을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달빛처럼 쏟아지는 기준의 사랑만큼 반지가 반짝하고 빛났다.
“정말 예뻐요.”
“다행이에요. 희원 씨한테 어울릴 만한 거 찾느라고 심혈을 기울였어요.”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기준을 쳐다봤다. 울어서 눈꼬리가 조금 붉은 게 기준의 눈에는 그저 예쁘기만 했다.
“반지 기준 씨가 고른 거예요?”
“그럼 누가 골라요?”
“진짜요? 정말 예쁘다. 고마워요.”
희원이 다시 한번 달빛에 반지를 비추어 보고는 어여쁘게 웃으며 기준의 입술에 촉 입을 맞췄다. 기준이 희원의 뺨을 어루만지며 엄지로 눈 아래 눈물 자국을 살살 닦아 주었다.
“희원 씨가 기뻐해서 저도 기뻐요.”
희원이 기준의 손에 뺨을 비비며 웃었다. 기준은 희원의 뺨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희원 씨, 나도 반지 껴 줘요.”
희원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기준에게 반지를 받아서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도 끼워 주었다.
“그런데 기준 씨.”
“네.”
“저는 기준 씨 생일날 제대로 된 것도 못 해 줬는데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쩌죠?”
기준이 피식 웃었다. 기준은 다 기억한다. 올해 자신의 생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다.
희원이 처음으로 랑일이 일이 아닌 사적으로 전화를 해서 밥을 사겠다고 시간을 내 달라고 했던 날이다. 그에 기준이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조바심이 나서 한달음에 차를 몰고 왔던 날이다. 기뻤던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까?
“뭘 받기만 해요? 희원 씨 그날 기억 안 나죠?”
“뭐가요? 저 다 기억나요. 그날 기준 씨 생일인 거 아침에 알아서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걸요.”
기준이 희원의 코를 손끝으로 톡 쳤다.
“이것 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네.”
희원이 아니라는 듯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기준은 그게 귀여워서 입술에 촉 입을 맞췄다.
“그날 내가 고백했잖아요. 우리 연애하자고 말했는데 기억 안 나죠?”
희원이 입을 벌렸다. 기준은 거봐 거봐 하나도 기억 못 하네, 하며 희원을 놀렸다.
기준이 그날 좀 화를 냈다. 음식점에서 나오다 옛 알파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가 한 행동 때문에 기준이 불쾌해했다. 그러고는 희원의 사과에 어떻게 그런 찌질한 놈을 만났냐고 보는 눈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종국에는 자신과 연애를 하자고 했다.
“기억나요.”
희원이 작게 중얼거렸다. 기준이 희원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그날 희원 씨랑 연애하고 싶게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우린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사이가 되었잖아요. 난 그걸로 충분해요. 희원 씨라는 선물을 받았으니 그게 가장 큰 선물이었어요. 여태 살면서 받은 그 수많은 선물 중에 희원 씨가 가장 최고라는 소리예요.”
기준은 차에서 나와 희원의 손을 잡았다. 살짝 찬 바람이 불어왔지만 기준이 뒤에서 희원을 꼭 끌어안았다. 기준의 넓은 품에서는 숲 냄새가 났다. 기준이 희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희원 씨는 랑일이와 나한테 선물 같은 존재예요. 알고 있죠?”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준 씨도 마찬가지예요.”라고 속삭였다.
“살면서 희원 씨가 속상해할 일 만들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이라서 실수할 경우에는 마음에 품고 있지 말고 그때그때 얘기해 줘요. 어떤 작은 일이라도 상관없어요. 절대 희원 씨의 일은 나에게 사소한 게 될 수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응, 그럴게요. 기준 씨도요.”
“연애와 결혼은 다르대요. 근데 나도 잘 모르겠어요. 연애를 안 해 봐서.”
기준의 말에 희원이 웃었다. 한 사람은 결혼은 해 봤으나 연애를 안 해 봤고, 한 사람은 연애는 해 봤으나 결혼을 안 해 봤다. 하지만 경험의 유무와 상관없이 두 사람이 함께하는 연애는 일단 행복했고 서로 사랑하느라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희원 씨가 나와 함께하는 그 일분일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도요.”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희원이 등을 돌려서 기준을 마주 봤다. 날카로웠던 인상도, 차가웠던 눈매도, 자신의 앞에서는 자취를 감춘다는 걸 희원은 알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에게만 다정한 기준이 희원은 좋았다.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그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준 씨, 나도 잘 부탁해요.”
희원이 웃었다. 이 사람이면 충분하다. 이 마음이면 충분하다.
“희원 씨, 사랑해요.”
희원이 발꿈치를 들어서 기준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잠시 입술을 떼고는 속삭였다.
“제가 더 사랑해요.”
기준이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떼려고 했지만 희원은 그의 옷깃을 꼭 잡고는 떼지 못하게 했다. 안다. 아마 자신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항변하려고 한 것일 테다. 하지만 희원은 오늘만큼은 자신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비가 톡톡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기준도 느꼈는지 희원을 조금 더 바짝 당겨 품에 안았다. 그의 품이면 된다. 그의 손길이면 된다.
서로 부족한 둘은 이제 연애를 끝마치고 결혼으로 접어들려고 하고 있었다. 이제는 둘만 아는 은밀하고 야한 결혼, 시작이다.
* * *
카디건에 머플러를 두르고는 희원은 손을 호호 불었다. 생각보다 날씨가 쌀쌀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디건 대신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오는 건데 그랬다. 버스에서 내린 희원은 얼른 백화점 안으로 쏙 들어갔다.
희원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응, 희원아.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이제 막 백화점에 들어왔는데 어디 계세요?”
기준이 랑일이를 맡기고 희원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조건으로 박 여사 역시 희원과의 데이트를 요구했다. 그에 기준은 어쩔 수 없이 주말 하루 동안 박 여사에게 희원을 양보해야만 했다.
“희원 씨!”
“어, 루세 씨!”
루세가 먼저 희원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희원의 어깨를 톡 쳤다. 희원이 밝게 웃으며 루세에게 인사를 하고 뒤에서 걸어오는 박 여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혹시 오래 기다리셨어요?”
희원이 박 여사 오른쪽에 딱 붙으며 말하자 박 여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이제 막 주차하고 올라왔어. 근데 우리 희원이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나왔어? 오늘 바람이 쌀쌀한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버스에서 내려서 바로 앞이라서 괜찮았어요.”
“버스 타고 왔어? 차 안 갖고 오고?”
박 여사는 희원의 손을 끌어다가 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이 딱 기준과 닮아서 희원은 이 와중에도 기준이 보고 싶었다.
“차 갖고 오면 늦을 것 같아서요.”
“뭐 어떠니? 루세랑 쇼핑하고 있으면 되는데.”
“아니에요, 어머니.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죠.”
“예의 바른 것 좀 봐. 루세야, 우리 희원이가 이렇다.”
박 여사의 왼쪽에 있던 루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누가 유치원 선생님 아니랄까 봐요, 어머니. 그나저나 희원 씨 너무 춥겠다. 어머니, 우리 희원 씨 옷 사러 가요.”
루세의 말에 박 여사가 희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희원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옷을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계속해서 괜찮다고 그렇게 춥지 않다고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먼저 들어선 곳은 구두 매장이었다. 당연히 옷을 산다고 해서 옷 매장으로 갈 줄 알았는데 눈에 보이는 곳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돌아다니려고 그러는지 희원은 덜컥 겁이 났다. 지금이라도 기준에게 연락을 해서 어머니를 좀 말려 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사모님, 오셨어요? 루세 님도 같이 오셨네요? 안녕하셨죠. 어머, 오늘은 다른 분도 같이 오셨네요?”
루세와 자주 가는 곳인지 아니면 박 여사가 원래 유명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들어서자마자 매장 직원들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여기 우리 둘째네. 우리 이 이사랑 같이 온 적 없나? 희원아, 여기 온 적 없어?”
박 여사는 매장을 훑어보며 말했다. 희원은 기준과 쇼핑 데이트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평소에는 랑일이까지 셋이 있는 시간이 많았고 어쩌다 랑일이 없이 둘이 있을 때는 서로 몸을 맞추고 실내에서 뒹굴뒹굴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아, 요즘 이 이사님 도통 저희 매장 안 들러 주셔서요. 도련님 것만 사시나 봐요. 위층은 자주 다녀가신다고 하던데.”
“그래요? 어머, 이것 예쁘다, 희원아.”
박 여사가 희원을 불렀다.
“희원아. 이거 신어 봐.”
“어머니, 이거 구두인데요? 저 평소 구두 신을 일 별로 없는걸요.”
“얘는. 당장에 우리 상견례 있잖니. 그날 신고 나오면 되잖아.”
“네?”
기준에게 반지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이렇게 상견례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희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자 박 여사가 한번 신어 보게 사이즈를 달라고 했다. 루세가 그저 웃으며 사양하지 말고 신어 보라고 했다.
“어머, 너무 잘 어울리세요.”
갈색 구두는 클래식하지 않아서 오히려 희원에게 잘 어울렸다. 박 여사는 아이에게 꼬까옷 입히는 엄마처럼 뿌듯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희원아, 너무 예쁘다. 이거 너한테 딱이야. 이거 사자.”
“어머니…….”
“루세야, 계산하고 와.”
루세는 박 여사의 백에서 카드를 꺼내어 척 하고 내밀었다. 그 모습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그러고는 난감해하는 희원에게 귓속말을 했다.
“벌써부터 이러면 오늘 쇼핑하다 거품 물어요. 그냥 마음을 놓고 정 안 되면 나중에 팔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해요.”
명품을 중고로 파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하지만 희원은 어떻게 선물로 받은 걸 팔 수 있을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루세도 심각하게 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희원은 기준이 좀 나타나서 말려 주기를 바랐지만 어째 기준이 나타난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기준이 더 옆에서 부추길 것만 같았다. 지금 찬 손목시계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얘, 우리 구두 샀으니까 희원이 코트 한 벌 보자. 루세야, 겨울 다가오는데 너도 하나 사. 우리 막내며느리도 하나 사 줘야지.”
루세가 그래도 되냐고 박 여사의 팔짱을 끼며 싱글벙글 웃었다. 희원만 난감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뒤에도 박 여사는 희원을 끼고 이것저것 사기 시작했다. 희원이 평소 자주 입곤 하는 청바지는 물론이고 슬랙스, 셔츠도 사 주고 결국 지갑도 사 주었다.
“어머니, 너무 많아요.”
희원이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는 말하자 박 여사 옆에 있던 루세가 말했다.
“오늘 어머니 많이 아끼신 건데요? 그쵸?”
“그러게. 하긴 우리 루세도 처음에는 희원이같이 그랬어. 안 된다고 너무 많다고. 루세야, 네 형님 배포 좀 키워 줘.”
루세가 싱글벙글 웃었다.
“저 자꾸 형님 데리고 나가면 미움받아요. 안 그래도 설이 때문에 랑일이가 동생 싫다고 해서 우리랑 안 보려고 하는데요.”
“누가? 기준이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커피를 마시던 박 여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루세는 이때다 싶어서 랑일이의 동생 싫어 사건에 대해서 줄줄 말했다. 옆에서 희원이 말렸지만 박 여사와 루세는 이미 쿵짝이 맞아서 대화의 장이 열렸다.
“걔는 아무튼 주책이야. 난 우리 아들이 그렇게 주책인 줄 몰랐어. 희원아, 다시 생각해 봐. 이기준하고 같이 살아도 되겠니?”
“어머니, 기준 씨가 그래도…….”
“어머, 벌써부터 두둔하는 것 좀 봐. 희원아, 엄마 앞에서는 안 그래도 돼. 우리 집 삼 형제 중에서 가장 정 떨어지게 구는 애가 이기준이야.”
“아니 그래도 어머니…….”
뭔가 되게 어머니께 미움받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희원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게 다정하고 스윗한데…….
“어머니, 그러다 진짜 결혼 안 한다고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루세가 웃으며 말리는 척을 했다. 그러자 박 여사가 “그런가?” 하며 웃었다.
“그래, 우리 희원이가 이기준 본색 드러나서 결혼 안 한다고 하기 전에 얼른 상견례 해야겠다. 희원아, 내년 봄에는 결혼하는 게 어떠니?”
박 여사의 말에 희원이 컵을 들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결혼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뭔가를 이야기하니 가슴이 뛰었다.
“기준 씨랑 상의해 볼게요.”
“희원아, 기준이는 벌써부터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이야. 그러면서도 너 기다려 준다면서 그러는데 그러다가는 진척도 없을 것 같아. 걔는 왜 그런다니? 회사 일은 좀 하는 것 같은데 영 연애 고자야.”
옆에서 듣던 루세가 풋 하고 웃었다. 희원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어머니, 뒤에서 아들 욕하려고 희원 씨 불러내신 거예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희원이 깜짝 놀라서 뒤돌아봤다. 여긴 또 어떻게 왔는지 기준이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와서 희원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니? 루세 네가 알려 줬어?”
루세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루세의 표정을 보니 저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너 혹시 희원이 위치 추적하고 그러니?”
박 여사가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자 기준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희원은 몰래 기준에게 자신의 커피를 밀어 주었다.
“어머니, 아들을 어떻게 보시고! 김 기사님께 연락해 봤어요.”
“희원이랑 우리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왜 여기까지 왔어?”
박 여사가 다리를 꼬며 우아하게 차를 마시면서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기준은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며 희원이 밀어 준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이제 희원 씨 돌려받으려고요.”
“허! 우리 이제 시작이야, 얘.”
루세도 당황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기서 뻔뻔한 이는 기준 혼자였다.
“희원 씨랑 많이 노셨잖아요.”
“얘, 루세는 일요일에 이렇게 종일 나랑 나와 있어도 해준이가 잘 다녀오라고만 말하지 너처럼 군 적 없어.”
“그건 어머니 말씀이라면 껌벅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이해준이고요. 저는 이해준이 아닌걸요. 아무튼 희원 씨 데리고 갈게요.”
모자지간의 싸움에 옆에 앉은 희원만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기준 씨, 그래도……. 근데 랑일이는요?”
그러고 보니 랑일이는 어쩌고 혼자 여기 와 있단 말인가?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랑일이는 해준이가 데리고 있어요.”
그 말에 갑자기 박 여사가 웃음 지었다. 기준이 미간을 좁혔다.
“너 랑일이 동생 갖겠다고 해준이네 이용했다며?”
기준이 루세를 쳐다보자 루세는 모른 척 커피 잔을 입에 가져갔다. 희원만 불안한 눈동자로 기준과 박 여사를 쳐다봤다.
“너는 애가 어쩌면 그렇게 철부지니? 둘이 결혼해서 한집에 살면서 랑일이 예뻐하면 어련히 랑일이가 동생 낳아 달라고 할 텐데.”
“어머니.”
“그 전에 집 합치고 싶으면 상견례 날짜나 잡아라. 희원아. 엄마는 언제 해도 상관없어. 희원이네 부모님께 여쭙고 괜찮은 날로 알려 줘. 그럼 아버지랑 나갈게. 식당이랑 이런 것도 신경 쓰지 마. 희원이는 몸만 나오면 돼. 알았지?”
기준을 그렇게 놀리고 퉁바리를 놓던 박 여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희원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왠지 그 다정함이 기준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그 다정함과 닮아 있어서 희원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희원네 식구들은 아침부터 바지런을 떨었다. 살면서 이렇게 분주하고 정신이 없던 적이 또 있었던가?
“희정아, 엄마 괜찮니? 옷 좀 봐 줘.”
아침부터 불려 온 희원의 누나는 엄마의 옷매무새를 봐 주면서도 한마디 했다.
“엄마, 무슨 결혼식장 가?”
“얘는. 그래도 꾸미고 가야지. 처음 뵙는 자리인데. 희원아, 준비 다 했으면 아빠 좀 봐 드려.”
희원은 거울 앞에 서 있다가 엄마의 말에 아빠의 타이와 양복을 다시 살펴봐 줬다.
“엄마,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그리고 아빠도 긴장 안 해도 돼.”
희원이 아무리 말해도 엄마와 아빠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살피고 또 살폈다. 하지만 희원은 부모님에게는 긴장 안 해도 된다고 하면서도 그게 불가능하단 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박 여사와 너무나도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아직 이 회장은 희원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희원아, 오늘 랑일이도 온다니?”
“아니, 기준 씨랑 부모님만.”
희원의 대답에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이나 저 집이나 식구들이 많아서 상견례에는 당사자들과 부모님만 참석하기로 했다. 식구가 적으면 형제자매도 함께하기도 하는데 그러기에는 희원네는 삼 남매에 기준네는 삼 형제였다.
“그럼 랑일이는 누가 보고?”
“오늘은 일요일이라 루세 씨가 봐주기로 했어.”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랑일이를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희원이 종종 사진으로 보여 주곤 했는데 아직까지 랑일이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상견례 끝나고 나중에 랑일이 한번 데리고 올게.”
희원의 말에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이제 가야 한다고 재촉을 하고 나서야 부모님은 겨우 거울 앞에서 멀어졌다.
―희원 씨, 출발했어요?
차에 타자마자 기준이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전화를 해 왔다.
“네, 기준 씨. 가고 있어요. 출발했어요?”
―응, 우리도 이제 막 출발했어요. 운전 조심히 해요.
희원이 웃었다. 어젯밤 희원이 기준에게 상견례할 거 생각하면 벌써부터 너무 떨린다고 했더니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뒤에 아버지랑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서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희원은 기준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기준 씨도 조심히 와요.”
희원은 전화를 끊고 거울에 비치는 부모님을 힐긋 쳐다봤다. 아버지는 워낙 표정이 없는 분이고 교수로 사는 동안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 봐서 그런지 별로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게다가 상견례가 처음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누나와 형의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 자리도 가져 봤으면서도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기준네 집안이 위화감을 주기 때문일 터였다.
“엄마, 너무 긴장하지 마요. 기준 씨 부모님 두 분 다 좋은 분들이에요.”
엄마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긴장이 되는지 자꾸만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주차장에 들어서서 발레파킹을 맡기고 내리자마자 저쪽에 기준이 서 있는 게 보였다. 희원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기준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희원 씨, 왔어요?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세요. 오시는 데 불편한 건 없으셨어요?”
“잘 지냈어?”
엄마는 기준을 보니 긴장이 조금 풀리는지 그제야 웃어 보였다. 아버지는 기준을 보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기준 씨, 왜 나와 있어요? 언제 도착했어요? 우리 늦은 거 아니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기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 왜 이렇게 긴장했어요? 희원 씨 긴장한 게 역력한데요?”
“아니에요, 그런 거.”
희원은 제가 생각해도 평소의 제 모습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뭘 아니에요? 하나씩만 물어봐요. 희원 씨랑 부모님 마중 나왔고, 도착한 지 5분 됐어요. 늦지도 않았고 아직 약속한 시간 되려면 멀었어요. 우리가 빨리 도착한 것뿐이에요.”
기준이 웃으며 설명하자 그제야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긴장한 거 맞네. 손 왜 이렇게 차가워요?”
“아닌데, 그런 거 아닌데.”
희원이 손을 잡아 빼려고 하자 기준이 더 꽉 잡았다.
“왜 피해요?”
“아니 엄마랑 아버지도 있고.”
기준이 피식 웃고는 손을 놓아주었다.
상견례 장소는 한정식집이었다. 평소 기준과 종종 오던 곳이었다. 상견례 장소로 호텔을 잡으려다가 그러면 희원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해서 이곳으로 잡은 거였다. 박 여사가 더 맛있는 것 먹지 한정식으로 괜찮겠냐며 아쉬워했지만, 희원네 식구가 편한 곳, 편한 시간과 날짜로 맞추기로 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 회장과 박 여사가 일어서며 희원네 식구들을 맞이했다. 서로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오시는 데 불편한 것은 없으셨어요?”
박 여사가 먼저 입을 뗐다. 희원의 어머니가 웃으며 괜찮다고, 덕분에 잘 왔다고 인사했다. 박 여사는 오늘 더 화려했다. 아무리 수수하고 단아하게 꾸며도 외모 자체가 화려해서 그게 불가능했다. 희원의 엄마는 그 기세에 좀 기가 죽었다.
“우리 희원이가 누굴 닮아서 예쁜가 했더니 어머니를 많이 닮았네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우리 희원이를 많이 예뻐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워낙 희원이가 예쁨받을 행동을 하니까요.”
두 여인 사이에 덕담이 오갔다.
“어머니, 주문할까요?”
“우리가 알아서 했어. 혹시 가리시는 것 있나 미리 희원이한테 물었는데 그런 것 없다고 해서 미리 주문해 놨습니다. 이 집 음식이 정갈하니 맛이 참 좋거든요.”
희원은 박 여사가 이 자리를 잘 이끌어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자리인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희원이 생일에 기준이가 반지를 건네주었다고 해서요. 이왕 그렇게 된 거 결혼식을 내년 봄에는 올리는 게 어떨까 하는데 생각 어떠신가요?”
박 여사가 운을 띄웠다. 그러자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희원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희원이를 좋게 봐 주신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부족한 아이인데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아내도 내년 봄에 식을 올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혹시 그때가 놀이 한창 바쁠 시즌이 아닌가 싶어서 조금 염려스럽습니다.”
희원의 아버지는 놀이 새 학기와 어린이날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희원이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미리 언질을 주었을 때 그 부분을 염려했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아버님, 그 부분은 문제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 그 부분은 염려 놓으십시오. 놀은 늘 바쁘기는 합니다만 그것조차 소화하지 못한다면 이사라는 자리 내놓아야죠.”
이 회장의 말에 기준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럼 따듯하고 날이 좋을 때로 해서 날을 한번 받아 보겠습니다.”
이 회장이 다시 말했다. 그에 희원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자꾸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목이 타서 물을 마셨다. 마침 음식이 들어오자 박 여사가 희원을 불렀다.
“얘, 희원아. 물 그만 마셔. 앞에 맛있는 음식 놓고 왜 이렇게 물을 마시니? 물배 찰라.”
희원이 얼굴이 빨갛게 되어 뺨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어머니, 희원 씨 오늘 엄청 긴장했어요.”
“긴장할 게 뭐 있어. 희원아, 긴장하지 마. 이미 결혼하기로 결정하고 날짜 정하려고 나온 자리인데 뭘 그렇게 긴장해.”
“아니에요, 어머니. 긴장 안 했어요.”
희원이 작게 말하자 기준이 웃으며 개인 접시에 음식을 덜어서 희원에게 밀어 주었다. 희원이 부모님들께 먼저 드리라고 하며 손사래를 치자 이 회장이 말했다.
“엄마는 내가 챙길 테니 희원이 많이 먹어라. 어서 드십시오. 여기 음식 맛있습니다.”
희원은 괜히 민망해져서 기준을 향해 눈을 찡그렸지만 기준은 왜 그러냐는 듯 뻔뻔하게 받아쳤다.
식사를 하고 차까지 마신 뒤에 양가 집안 식구들은 밖으로 나왔다. 기준이 희원과 조금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 회장이 기준의 차를 끌고 가기로 하고 희원의 아버지가 희원의 차를 끌고 가기로 했다.
양가 부모님이 가는 것을 보고 난 뒤 기준은 희원의 손을 잡았다.
“아직도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겨울이잖아요.”
희원이 괜히 민망해져 불퉁하게 말하자 기준이 웃으며 희원의 손을 제 코트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어어, 옷 망가지는데.”
누구는 옷 모양새 망가진다고 주머니에 손도 안 넣던데 기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희원의 손을 잡은 채 주머니에 꾸겨 넣었다.
“뭐 어때요. 옷 망가지면 한 벌 사면 돼요.”
“그래도…….”
“나랑 손잡는 거 싫어요?”
희원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기준이 조금 걷다가 희원과 마주 섰다.
“혹시 추워요?”
“아뇨, 괜찮아요.”
“그럼 우리 이렇게 조금 걸어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준이 조금 더 희원의 손을 꽉 잡았다. 전해져 오는 온기가 참 좋았다.
“나는 너무 신기해요.”
“뭐가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그를 올려다봤다. 눈이 너무 예뻐서 기준은 길거리인데도 불구하고 희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희원의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내가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희원의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원치도 않는 사람과 정략결혼을 할 때 이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희원 씨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희원 씨, 결혼하면 더욱 잘할게요. 물론 결혼 전에도 잘하겠지만 더 잘할 거예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는데요?”
희원이 웃으며 말했다.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느끼게 해 줄게요. 아주 손에 물 한 방울 못 묻히게 할 거야.”
희원이 살짝 뒷걸음쳤다. 그러자 기준이 단번에 미간을 좁혔다.
“왜요?”
“아뇨.”
“왜 뒷걸음쳤어요?”
“물은 좀 묻히게 해 줘요. 나중에 기준 씨가 세수도 시켜 준다고 할까 봐 좀 겁나서…….”
희원의 대답에 기준이 그대로 희원을 끌어안고 마구 웃었다. 그러면서 얼굴 여기저기 온통 입을 맞춘 것은 덤이었다.
* * *
결혼식은 5월 중순으로 정했다. 두 사람이 바빠도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따듯한 봄에 식을 올리기로 결정을 하고는 날짜를 따져 봤더니 3월에는 유치원 입학식이 있어서 희원이 너무 바빴고, 4월에는 기준이 어린이날을 앞두고 새로운 장난감 출시 때문에 너무 바빴다. 5월에는 어린이날에 어버이날에 스승의 날까지 행사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모든 행사가 끝나고 중순쯤 하기로 결정했다.
집은 박 여사가 더 큰 데로 이사를 하라고도 했고 지금 사는 집은 랑일이와 기준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결국 둘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둘의 일터와 조금 가까운 곳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희원이 괜찮다고 지금 랑일이와 기준이 살고 있는 집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박 여사가 말렸다.
“희원아, 원래 ‘시’ 자 들어가는 곳하고는 멀리 있어야 한다고 했어.”
“어머니, 저는 어머니랑 가까이 사는 거 좋은걸요.”
지금 사는 랑일이네 집은 박 여사네 집과 같은 동네였다. 걸어서도 갈 만한 거리였다. 하지만 박 여사는 신혼이기도 하니 그럴 때는 시댁하고 떨어져 사는 게 좋다며, 자신의 경험담이라고 말하기도 해서 희원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친정 근처 가서 살아도 돼, 희원아.”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기준 씨랑 상의해 볼게요.”
그래서 둘은 둘의 회사 근처로 신혼집을 얻기로 했다. 그리고 혼수는 지금 기준네 집에 물건이 있으니 거기에 희원이 쓸 물건만 사기로 했다.
희원은 혼수 준비를 얼마나 해야 하나 싶었지만 기준이 의외로 가구는 희원이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자기 돈 쓰는 거는 상관없지만 희원의 돈을 쓰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희원은 내일 랑일이를 자기네 집 식구들에게 맡기고 혼수 물품을 사러 가기로 했다. 매번 일이 있을 때마다 랑일이를 박 여사나 해준에게 맡기는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랑일이를 정식으로 집에 소개해 주고 싶기도 했다.
“이랑일, 가서 어른들 뵈면 인사 잘해야 해.”
“나 인사 잘해.”
랑일이를 내일 맡겨야 하니 그 전에 친해지게 하기 위해 오늘 희원네 집에 가서 미리 인사를 시켜 주기로 했다. 기준은 출발하기 전 랑일이를 붙잡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랑일이는 이제 좀 컸다고 왜 자꾸 반복해서 말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 마미가 유치원에서 인사 제일 잘한다고 했어! 그쵸, 마미?”
랑일이를 데리러 온 희원에게 랑일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에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랑일이가 제 아빠를 거보라는 듯 쳐다봤다.
“랑일아, 이제 갈까? 할머니가 맛있는 것 많이 해 놨대.”
랑일이를 데리고 간다고 했더니 온 집안사람들이 벌써부터 모여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매번 바쁜 희원의 형수조차도 오늘은 벌써 와서 기다린단다.
가뜩이나 식구도 많은데 오늘은 조카들까지 와 있다고 해서 혹시라도 랑일이가 놀라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기준에게 랑일이가 놀라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기준은 가족인데 뭘 놀라느냐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희원을 안심시켰다.
“마미, 가면 고기 있어요?”
“그럼, 우리 랑일이가 좋아하는 소고기 있지.”
“빨리 갈래요!”
랑일이는 희원의 손을 잡는 대신 손을 뻗었다. 안으라는 소리였다.
“이랑일. 마미 힘들어.”
기준의 말에 랑일이는 대번에 인상을 쓰며 입술을 삐죽였다. 희원은 그러지 말라고 하며 랑일이를 품에 안았다. 집에서 나와서 마당에 있는 주차장까지인데 뭐가 힘들겠냐며 말이다. 랑일이는 희원의 품에 안겨서 제 아빠를 향해서 이겼다는 표정을 지어 기준을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착하게도 가는 동안에는 희원을 제 아빠 옆자리에 양보했다. 하지만 희원은 기준보다 랑일이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미, 가면 형아도 있어요?”
“그럼. 우리 랑일이 기다리고 있지.”
랑일이는 집에서 설이랑만 놀았기 때문에 희원네 가면 형아가 있다는 소리에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 봐야 나이 차이가 꽤 나서 재미있을까 싶었지만 랑일이는 그저 좋은 것 같았다.
“근데 기준 씨.”
“네.”
저 멀리 희원네 집을 발견한 기준의 만면에 화색이 가득했다. 마치 처갓집 말뚝에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오늘 자고 가는 거 불편하지 않겠어요?”
“뭐가 불편해요. 저번에도 잤잖아요.”
기준은 꽤 까칠하고 차갑게 생겨서 먹는 것은 물론 잠자리도 가릴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렇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희원을 만나고 랑일이와 같이 자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이제는 몸이 서서히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얘기해 줘요. 저녁만 먹고 집에 가도 되니까요.”
“뭐 하러 그래요. 희원 씨도 오늘 가족들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거잖아요. 오늘 희원 씨네서 자고 내일 백화점 갔다가 와서 랑일이 데리고 집에 가면 되죠.”
어차피 내일 또 랑일이를 여기에 맡겨야 하는데 왔다 갔다 해서 뭐 하냐는 뜻이었다. 희원은 자기네 식구들과 함께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기준에게 고맙다고 했다.
“대신 기준 씨.”
“네.”
“술 많이 마시면 안 돼요.”
기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응? 대답해요. 저번처럼 많이 마시면 안 돼요!”
“알았어요.”
저번에 희원네 집에 인사하러 왔을 때 말술인 희원네 식구들과 거하게 술을 마시다 결국 신세를 졌던 전적이 있다. 술 마시다 자는 것쯤이야 상관없지만 그다음 날 오후까지 술이 안 깨어서 숙취로 꽤나 고생했고 그걸 희원은 염려하는 거였다.
“약속 지켜요. 내일 우리 백화점에도 가야 하는 거 알죠?”
“알아요,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기준은 웃으며 서글서글하게 대답했지만 희원은 마음 한편으로 좀 의심이 갔다.
집 앞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난 뒤 차에서 내리자마자 안에서 희원의 누나가 나왔다.
“이 서방, 왔어?”
“네, 안녕하세요. 랑일아, ‘이모 안녕하세요’ 해.”
랑일이가 희원의 손을 꼭 붙잡고 있다가 손을 떼고는 배꼽 손을 했다.
“이모, 안녕하세요.”
희원의 누나인 희정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희정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랑일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랑일이 듣던 대로 엄청 씩씩하구나!”
랑일이는 도로 희원의 옷을 잡으려다가 슬며시 손을 떼고는 웃었다. 누나가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이모랑 안에 들어갈까?”
랑일이는 희원을 보고 눈치를 살폈다.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희정의 손을 잡았다.
“엄마, 아버지. 나와 보세요. 랑일이 왔어요!”
누나가 큰 소리로 말하자마자 식구들이 죄다 문 앞으로 몰려 나왔다.
“어머! 너무 귀엽다.”
“어머어머!”
형수와 엄마는 난리가 났다. 표정이 풍부하지 않은 아버지조차도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희원이 랑일이에게 말했다.
“랑일아, 인사해야지.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희원이 엄마와 아버지를 가리키며 설명해 주자 똑똑한 랑일이는 배꼽에 손을 딱 올리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그에 엄마가 단번에 랑일이를 안아 들었다. 랑일이가 어리둥절해 희원을 찾았지만 희원이 괜찮다고 작게 말하자 랑일이가 특유의 붙임성으로 희원의 엄마에게 꼭 안겼다.
“어머, 붙임성 좀 봐.”
“어머님, 저는 안 보이시나 봐요. 안녕하셨어요.”
기준이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했다. 희원은 이 순간에도 아들에게 질투하는 기준 때문에 살짝 부끄러웠다. 하지만 희원네 식구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기준을 반겼다.
“어서 오게, 이 서방.”
형이 기준을 안으로 이끌었다. 기준의 손에 든 와인을 보며 뭘 이런 걸 가져왔냐고 하면서도 앞으로 있을 시간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형, 술 많이 마실 생각 하지 마.”
희원이 그 눈빛을 알아채고는 다시 한번 단속했지만 이미 기준과 형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형수가 희원의 손을 이끌고는 어깨를 두르며 말했다.
“놔둬요, 도련님. 뭐 그런다고 들을 사람들도 아니에요.”
“그치만 형수, 내일 나가야 한다고요.”
“괜찮아요. 내일은 내일이고, 일단 오늘을 즐겨요. 맛있는 것 엄청 많아요. 형이 잔뜩 솜씨를 부렸어요. 그나저나 우리 꼬마 도련님은 뭐 좋아해요?”
희원이 랑일이를 돌아봤다. 랑일이는 어느새 누나네 아들들 손을 잡고 있었다.
“랑일아, 뭐 하고 놀까? 이거 장난감 좋아해?”
장난감집 아들에게 장난감을 보여 주면 어쩌자는 거야. 희원이 머쓱해했지만 랑일이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형아들을 만난 게 기쁜지 고개를 끄덕이며 로봇을 품에 꼭 안았다.
“꼬마 도련님은 잘 노니까 놔두고 이리 와요. 우리 도련님이야말로 요즘 왜 이렇게 말랐어요? 바빠서 그런가?”
아무래도 희원은 결혼 준비도 조금씩 하고 유치원도 연말이라 바쁜 탓에 살이 조금 빠지긴 했다.
“오늘 많이 먹고 가요.”
식구들이 한 상에 둘러앉았을 때 랑일이는 다시 희원의 옆으로 왔다. 희원이 랑일이를 살피자 당연하다는 듯 희원의 허벅지에 올라앉았다.
“응? 랑일아, 왜?”
“마미, 나 조고 먹고 싶어요.”
랑일이가 닭강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장에서 파는 게 아닌 형이 직접 만든 거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먹음직스러웠나 보다. 배달 음식 같은 것을 시켜 먹어 본 적이 없는 랑일이는 저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리 와 랑일아. 이모가 줄게.”
누나가 부르자 랑일이가 희원의 눈치를 살폈다.
“랑일아, 가서 먹어. 이모가 주신대. 그리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할머니랑 이모한테 말해도 괜찮아.”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래도 마미가 제일 좋아요.”
희원은 랑일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잠시 뒤 랑일이는 입 주변에 닭강정 소스를 잔뜩 묻히고는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었다. 옆에서 누나와 엄마가 그저 귀엽다는 듯 손과 입 주변을 닦아 주면서도 랑일이 앞에 음식들을 끌어당겨 주었다.
반면 기준은 희원이 그렇게 단속했음에도 이미 주량을 넘어서고 있었다.
* * *
랑일이가 졸음이 서서히 몰려오는지 눈을 비비며 희원을 찾았다. 희원이 한달음에 달려와 랑일이를 안아 들었다.
“우리 랑일이가 졸려요?”
랑일이가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희원의 뒷머리를 만졌다. 랑일이의 버릇인데 그걸 보고 형수와 엄마, 누나는 끙끙 앓았다.
희원은 랑일이에게 칫솔을 물려 주고는 양치질하는 것을 도왔다. 아이들은 칫솔질하는 거 귀찮아하는데 랑일이는 착하게도 그런 것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마미, 나 형아들하고 잘래요.”
그새 조카들과 친해졌는지 랑일이는 누나네 아들들하고 같이 자겠다고 했다. 희원은 웃으며 그러라고 했고 자다가 마미가 생각나면 언제든 방으로 오라고 했다.
“랑일이 잘 자.”
희원은 두 형아 사이에 자리를 잡은 랑일이 이마에 뽀뽀를 해 주고 조카들에게도 잘 자라는 말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어휴.”
긴 복도를 걸어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희원은 한숨이 나왔다. 말술인 가족들은 어째 모일 때마다 이 모양인지. 그나마 이제는 나이가 들어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아버지가 엄마와 먼저 방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이 서방, 마셔 마셔. 집에서 먹는 건 취하지도 않는다니까.”
“그럼요, 형님께서 뭘 아신다니까요.”
알긴 뭘 알아! 희원은 이마를 짚었다. 둘 다 나이가 자신보다 어렸으면 가서 등짝 스매싱을 날렸을 거다. 희원이 이를 뿌득 갈았다.
“우리 도련님 화났네, 화났어.”
화장실에서 나온 형수가 희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토닥였다.
“형수, 형 좀 어떻게 해 봐요.”
“어떻게, 가서 술상을 둘러엎을까요?”
어차피 형수한테는 말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희원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툭 내밀자 형수는 그런 희원을 엄청 귀여워하며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이리 와서 앉아 봐요. 아가씨, 와 봐요. 우리 도련님이 고민이 있대.”
취해서 남자 세 명이 허허 웃는 것을 누나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 세 사람 중에서 이기준이 가장 술이 약하다는 것을 희원은 알고 있었다.
“이 서방, 저렇게 마셨다가는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날 것 같은데.”
“그러니까 누나가 좀 말리라고.”
“말린다고 듣겠니? 처음부터 술을 적게 마시고 내일 나가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 같은데.”
희원이 입술을 꽉 깨물고는 눈에 힘을 빡 주었다. 그러고는 얼른 자리를 파투 내려고 하는데 뒤에서 형수가 희원의 손목을 잡았다.
“왜요?”
“도련님 여기 앉아 봐요. 아가씨도 빨리.”
셋은 주방으로 향했다. 형수는 희원의 앞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내려놓고는 그 건너편에 앉았다. 희원은 빨리 저 셋을 찢어서 이 자리를 끝장내야 하는데 형수가 막고 있어서 애가 탔다.
“원래 저런 버릇은 한 번씩은 다 겪는 문제예요.”
“그러니까 못 하게 해야죠.”
“도련님 성급하게 굴지 말고요. 아가씨도 얘기해 봐요. 아가씨도 한 번쯤 있지 않았어요?”
형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누나는 알아들었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앞에 놓인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저 인간은 아마 저렇게 먹다가도 내가 눈 부라리며 집에 가자고 하면 따라 나올 거예요.”
“매형 취한 거 아냐?”
“네 매형이 한때는 술만 마셨다 하면 집에를 안 들어왔잖니.”
희원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술만 마셨다 하면 새벽에 들어오고 외박하고…….”
“지금도 그래? 설마?”
“미쳤니?”
“그럼?”
누나는 신혼 때 그 문제로 몇 번 크게 싸웠고 결국 하루는 문을 잠그고 안 열어 주었다고 했다. 그것도 한겨울에 말이다. 매형은 그때 당시 어디 들어갈 데도 없고 집에서는 문을 계속 안 열어 주어서 결국 추운 집 앞에서 그렇게 덜덜 떨었다고 한다.
형수는 더했다. 형수는 술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로 매번 싸워서 나중에는 아예 아버지한테 전화를 했다고 한다. 다른 이가 아닌 희원의 아버지 말이다.
“아! 맞아. 나 기억해요, 형수.”
“응, 맞아. 도련님 기억할 거예요. 아버지가 빗자루 들고 죽이니 살리니 한 거.”
“맞아요. 그때 무슨 일이었는지는 자세히 기억 안 나는데, 나 우리 아버지 그렇게 화난 거 처음 봤어요.”
그러고 나서 형수가 이혼하니 어쩌니 해서 형이 싹싹 빌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련님. 초기에 잡아야 해요.”
“아니 그래도 형수.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형수는 희원의 반응에 속이 탄다는 듯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진짜예요. 우리 집 와서 저렇게 인사불성 되는 것 빼고는 밖에서는 멀쩡해요.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요.”
“어휴, 도련님.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요. 연애랑 결혼은 다른 문제예요. 나중에 결혼해서도 도련님 말에 귀 기울여 주고 그 누구보다 도련님이 우선이 되게 하려면, 이렇게 한 번쯤인데 어때요, 하는 문제들을 초반에 고쳐야 한다고요. 지금 기 싸움을 하라는 게 아니라 한 번 정도는 이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구나, 어떠한 부분을 싫어하니 그 부분은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 이런 것을 보여 줘야 한다고요. 결혼해서 그저 이 사람한테 다 맞춰 줘야 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결혼은 오래 못 가요.”
희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30년 이상을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이제 하나의 가족이 되는 과정이에요. 어떻게 그게 쉽겠어요. 당연히 어렵지.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요. 그럴 때마다 내가 저 사람을 이해해 줘야 해, 그냥 나만 참으면 별문제 없어,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서로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누고 마음을 나눠야 해요. 그게 싫은 부분이건, 무엇이건 말이에요.”
형수의 말을 듣던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았어요.”
“알겠죠? 무조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참으려고 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네, 알겠어요. 기준 씨 저렇게 무리해서 술 마시는 건 제가 잘 이야기해 볼게요. 다른 곳에서는 안 그러는데 여기서 그러는 건 아무래도 우리 가족이라서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매번 저러면 기준 씨 몸에도 무리가 가고 우리도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형수가 웃으며 희원의 앞에 안주를 더 밀어 주었다.
“우리 똑똑한 도련님은 역시 금세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니까요. 어휴 똑똑해. 아주 똑쟁이야.”
희원이 랑일이한테 쓰는 말들을 역으로 들으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형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희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언제 이렇게 큰 거냐며 놀려 댔다.
* * *
기준은 갈증이 나서 잠에서 깼다. 사위가 깜깜한 게 밤인 모양이었다. 기준은 초점을 맞추고는 그제야 여기가 희원네 집 거실인 것을 눈치챘다. 제가 언제 잠에 들었는지 자각도 없었다. 기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서 벌였던 술판은 어느새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기준은 마시다가 잠든 건지 소파에 누워 있었다. 기준은 소파에서 발을 내려 잠시 정신을 깨려고 애썼다. 하지만 머리만 아플 뿐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기준은 주방에 가서 냉수를 한 사발 들이켰다. 그러고는 희원의 방으로 갔다. 희원은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4시 정도 되었다. 기준은 일단 희원의 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얼마나 마신 건지 머리는 여전히 아팠다. 기준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옷을 훌훌 벗었다. 옷에서도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미온수를 틀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샤워도 하고 양치도 한 기준이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왔다.
“깜짝이야.”
어느새 깼는지 희원이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내가 깨웠어요?”
“옷 거기 있으니까 머리 말리고 자요.”
희원이 냉랭하게 말했다. 기준이 희원의 눈치를 살짝 살폈지만 지금 기준에게는 세심하게 희원을 살필 정신이 없었다.
“깨워서 미안해요. 더 자요.”
평소에는 희원이 잔소리를 하면서도 기준의 머리를 말려 주고 꿀물도 타다 주고 신경 써 줄 텐데 희원은 그런 것 없이 자리에 다시 누웠다. 기준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다시 욕실로 들어가서 머리를 말렸다.
정리를 하고 나왔을 때는 희원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기준은 조금은 좁은 침대로 들어가 희원을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기준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기준이 잠에서 깼다.
“으응?”
“아빠, 일어나아!”
“더 자, 랑일아. 아직 새벽이야.”
기준은 랑일이가 다른 방에서 자다가 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랑일이를 품에 안고는 등을 토닥거렸다. 하지만 랑일이가 몸을 뒤틀고는 품에서 빠져나왔다.
“일어나라고!”
“랑일아. 지금 몇 신데 그래.”
기준이 눈을 떠서 주변을 살폈다. 희원은 벌써 일어났는지 자리에 없었다. 기준이 상체를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응?”
“아빠, 이제 그만 자.”
기준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시간이 맞다고?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쳐다봐도 오후 2시가 맞았다. 이렇게 오래 잤을 리가 없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런 적이 없었다.
“랑일아, 마미는?”
“으아, 술 냄새!”
랑일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술이 덜 깨서 그런지 기준에게는 여전히 술 냄새가 났다. 기준이 침대에서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다시 나와서 랑일이에게 물었다.
“랑일아, 마미는 어디 있어? 거실에?”
“아니, 집에 마미 없어.”
“응?”
기준이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목으로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미는 나랑 아침 먹고 어디 갔다 온다고 나갔어.”
“그럼 아빠를 깨웠어야지.”
“마미가 깨웠어. 근데 아빠가 안 일어났어.”
기준이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랑일이가 쐐기를 박듯 말을 붙였다.
“마미가 전화하지 말라고 했어. 마미 엄청 화났다고 했어. 아빠 밉다고도 했어. 이제 아빠는 큰일 났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라는 건 이럴 때 하는 말이었다!
기준은 우선 희원에게 전화부터 했다.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해도 혹시나 싶어서 말이다. 제발 전화를 받아 주길 바랐지만 역시나 희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준이 절망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랑일아, 아빠 일어나셨어?”
방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기준이 얼른 침대 밖으로 나왔다.
“어머님, 저 일어났습니다. 씻고 나갈게요.”
랑일이 대신 대답한 기준이 랑일이를 뒤로한 채 욕실로 들어가서 빠르게 씻기 시작했다. 늦게까지 자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속은 쓰리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기준이 거실로 나와 보니, 랑일이는 장인어른 무릎을 베고는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기준은 민망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술 마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속은 좀 괜찮나?”
“네.”
기준은 주방에서 나온 희원의 어머니를 보고도 고개를 숙였다.
“저 어머니, 희원 씨는…….”
“전화 안 받아?”
“네.”
기준이 죄송하다고 하자 어머니는 기준의 등을 두드려 주며 괜찮다고 말했다.
“해장하고 찾아. 어차피 백화점 갔을 거야. 그리고 랑일이 여기 있는데 금방 오겠지.”
“죄송합니다.”
기준은 식탁 앞에 앉아서 해장국을 먹으면서도 계속해서 희원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희원은 단단히 화가 난 건지 전화를 한 통도 받지 않았다.
어째 밥을 먹어도 모래알을 씹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래도 사위 사랑 장모님이라고, 해 주신 해장국을 마다할 수는 없었다. 기준이 그렇게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동안 할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고 있던 랑일이가 소파에서 폴짝 내려와 기준에게 다가왔다.
자기 집 냉장고인 양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를 꺼내던 랑일이가 제 아빠를 보고 말했다.
“아빠, 마미 언제 온대?”
그건 기준도 알고 싶었다.
“랑일아, 마미 화 많이 났어?”
기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랑일이는 기준의 앞에 앉으며 해맑게 말했다.
“응! 마미가 할무니한테 아빠 일어나면 집에 가도 된다고 했어.”
“랑일이 너는?”
“나는 집에 있어도 된다고 했어.”
그 말인즉슨 랑일이는 보고 싶지만 기준은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기준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하지.”
“응? 뭐를?”
상황을 보니 희원이 랑일이에게 직접 기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에게 말하는 걸 눈치 빠른 랑일이가 듣고 기준에게 전하는 모양새였다. 기준은 그만 식탁에서 일어났다.
“아빠, 어디 가?”
해맑기만 한 랑일이가 기준의 뒤를 졸졸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