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차곡차곡 쌓이는 순간들
날은 점점 쌀쌀해져 오고 선생님들은 환절기에 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아람제도 얼마 안 남은 시점에, 이럴 때일수록 아이들의 건강이 가장 우선이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완벽하게 무언가를 해내는 것보다는 그저 건강하고 재미있게 준비해 나가길 바랐다.
“얘들아, 밤에 잘 때는 꼭 이불 덮고 자야 해. 알았지?”
희원은 하원하는 아이들에게 한마디씩 덧붙여 가며 인사를 했다. 가는 뒷모습에다가도 손을 흔들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봤다.
“오늘도 야근이에요?”
랑일이를 데리러 온 기준이 냉랭한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누가 보면 기준이 화가 난 건 아닐까 눈치를 볼 테지만 희원은 안다. 기준은 지금 화가 난 게 아니라 불만이 한가득한 상태라는 걸 말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딱 열흘 남았어요.”
놀 유치원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아람제 무대에 그저 건강하게 올라가길 바라면서도 그와는 별개로 아무래도 가족에게 보여 주는 행사이니만큼 손이 갈 게 많아 고군분투 중이었다.
무대를 꾸미는 거나 소품을 만드는 것은 오롯이 선생님들 몫이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계속 야근 중이었다.
10월 셋째 주부터 아이들을 하원시킨 뒤 선생님들은 다시 모였다. 즉, 야근이었다. 무대 의상은 대여해서 입히지만 문제는 자잘한 소품들이었다. 손이 더 많이 갔고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
가끔 다른 선생님들은 요령껏 일찍 들어가기도 하고 그러는데, 일 욕심 많은 희원은 꼭 한두 시간씩 남아서 일을 했다. 유치원 전체 일 때문이 아니라 반 아이들을 위한 별개의 일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기준은 희원과 평일 데이트를 해 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랑일아, 오늘 바람 많이 부니까 이거 하고 집에 가.”
희원이 랑일이 목에 손수건을 둘러 주었다.
“집에 가서 저녁 많이 먹고, 꼭 따듯한 물로 목욕하고 이불 꼭 덮고 자야 해. 알았지?”
“네!”
랑일이는 희원이 둘러 준 손수건을 매만지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기준 씨, 어서 가요.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가는 길 꽉 막히잖아요.”
“알았어요. 꼭 저녁 챙겨 먹고 일해요.”
“네!”
기준의 당부에 희원은 랑일이처럼 씩씩하게 대답했다.
“희원 쌤! 이것 좀 그려 줘요.”
랑일이까지 집에 보내고 유치원으로 다시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일감이 주어졌다. 손재주 많고 그림 잘 그리는 희원은 할 일이 더 많았다. 희원은 선생님들이 원하는 그림을 단번에 척척 그려냈다.
“희원 쌤, 진짜 그림 잘 그린다. 미대 안 가고 왜 유교과 갔어요?”
하도 듣는 질문인지라 희원은 그저 웃었다. 희원이 유교과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기란 그랬다.
“희원 쌤은 미대 갔어도 인기 많았을 거야.”
“저 학교 다닐 때 별로 인기 없었어요.”
“거짓말하지 마요.”
선생님들은 희원의 말을 애초부터 믿을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희원도 웃으며 대충 답하고 넘길 뿐이었다.
“아, 저 잠시만요. 전화 좀.”
희원이 울리는 벨 소리에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기준이었다.
“네, 기준 씨.”
―저녁 시켰어요?
“아직이요. 이제 시켜서 먹어야죠.”
희원의 대답에 기준이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려왔다.
―내가 저녁 먹고……!
“알았어요. 지금 시켜서 먹을게요. 화내지 마요.”
기준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희원이 일에 빠지면 저녁도 먹지 않고 집중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희원의 저녁 식사에 꽤 예민하게 굴었다. 희원은 그런 기준을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행동인 걸 아니까 말이다.
―희원 씨.
“네?”
―원 실장 보냈어요.
“원 실장님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도시락 보냈으니까 선생님들하고 먹어요.
“어? 진짜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기준의 말투는 불퉁했지만 그가 얼마나 희원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 누구보다 희원이 제일 잘 알 수 있었다.
―자꾸 굶어서 살 빠지고 나 속상하게 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희원은 쏟아지는 잔소리를 그냥 다 받아주고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했다. 핸드폰 저편으로 “아빠!” 하고 랑일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퇴근할 때 연락해요.
“네, 알겠어요. 운전 조심히 하세요!”
희원이 살갑게 인사하고는 전화를 끊자마자 원 실장에게 전화가 왔다. 유치원 앞에 있다고 했다. 희원은 즉시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안녕하세요. 이사님께서 주문해 주신 겁니다. 맛있게 드세요.”
희원은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고는 꽤나 많은 쇼핑백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선생님들이 쇼핑백을 한 아름 들고 들어오는 희원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희원 쌤, 그게 뭐예요?”
“이거 랑일이 아버님이 보내셨어요. 선생님들 늦게까지 고생하신다고 드시고 건강 챙기시래요.”
희원은 도시락을 하나씩 나눠 주면서 제가 준 양 뿌듯해했다. 쇼핑백에는 도시락만 있는 게 아니라 디저트로 준비된 과일과 비타민 음료도 하나씩 들어 있었다.
선생님들은 랑일이 아버님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희원은 마치 제 남편 칭찬을 듣는 것처럼 어깨가 점점 올라갔다.
[선생님들이 랑일이 아버님 센스 있다고 엄청 칭찬하고 있어요.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기준 씨.]
희원은 도시락 사진을 찍어서 기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도 운전 중인 기준은 한참 뒤에야 랑일이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희원은 남몰래 웃으며 랑일이 사진을 저장했다.
유치원 정리를 하고 문을 잠그는 것까지가 희원의 몫이었다. 희원은 밤이 늦었으니 여자 선생님들은 위험하다고 얼른 가라고 보내 놓고는 자신은 한 시간 정도 더 남아서 일을 했다. 행사 후에 따로 나갈 작은 선물을 만드는 거였다.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의 동영상과 사진을 따로 USB에 담아 내보낼 것이지만, 희원은 그동안 찍어 둔 아이들 연습 사진도 따로 몇 장씩 뽑아서 담아 보낼 예정이었다. 어떤 이들은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하겠지만 희원이 조금 고생해서라도 학부모 및 가족들이 기뻐한다면 그게 희원의 행복이었다.
희원은 느지막이 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문단속을 잘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유치원 앞에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응? 기준 씨?”
익숙한 차에 희원이 의구심을 가지고 다가갔다. 창문이 열리고 기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준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랑일이는요?”
“고생했어요. 어서 타요.”
언제부터 이곳에 와 있었는지 기준의 등장에 희원은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랑일이는 어디 갔나 싶어 뒷좌석을 기웃거렸다.
“랑일이 그만 찾고 애인한테 인사나 좀 해요.”
기준이 조수석에 타서도 뒷좌석으로 몸을 돌리고 있는 희원의 몸을 자기 쪽으로 돌리고는 입술을 가리켰다. 희원이 눈꼬리를 접어서 배시시 웃으며 기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근데 랑일이는요?”
기준이 희원을 흘겨보며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랑일이 본가에 있어요.”
“응? 저녁에 같이 하원했잖아요.”
“맞아요. 본가에 가서 같이 놀다가 재우고 희원 씨 데리러 온 거예요.”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간은 이미 10시가 다 된 상태였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
“그냥 와서 기다렸어요.”
“피곤할 텐데.”
희원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는 기준을 살폈다. 기준이 희원의 뺨을 쿡 찌르고는 말했다.
“내내 야근하는 희원 씨보다는 덜 피곤해요.”
“그래도…….”
“바쁜 애인 때문에 본의 아니게 독수공방하게 되어서 말라 가는 느낌이에요, 내가. 그래서 온 거예요. 나 좋으라고.”
기준이 불퉁하게 말했지만 희원은 그의 따듯하고 다정한 속마음을 알기에 그저 소리 내어 웃었다.
“아람제 끝나고 많이많이 놀아 줄게요.”
“그 말 잊으면 안 돼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 씨.”
“네, 희원 씨.”
“우리 이렇게 가니까 그때 생각나요. 기준 씨랑 저랑 야근하다가 우연히 유치원 앞에서 본 날이요. 혹시 기억해요?”
기준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저녁을 먹으러 본가에 갔다가 회사에서 급하게 봐 주어야 할 디자인이 있다고 와 달라고 해서 짜증이 치솟은 상태였다. 일도 제대로 끝마치지 않고 워라밸을 따지며 퇴근해 버린 직원들이 못마땅했던 때였다. 그러던 차에 유치원 앞에서 퇴근하는 희원과 마주쳤다.
희원 역시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하고 퇴근하는 길이었고 희원이 저녁도 안 먹고 일했다는 소리에 유치원은 워라밸도 없냐고 생전 입에 올리지도 않던 단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희원을 데리고 샌드위치를 사 먹이고 커피도 사서 산책도 했다.
그때 희원의 손이 꽤 차갑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한의원에 가는 게 계기가 되어 잦은 만남이 이어지게 된 거였다.
“그날 기준 씨 안 만났으면 우리 이런 사이가 되지도 않았겠죠?”
희원의 말에 기준이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떻게든 이런 사이가 되었을 거예요.”
“어떻게 그리 확신해요?”
“희원 씨가 랑일이한테 행동하는 거, 학부모인 나한테 말 한 마디 한 마디 건네는 거, 그런 것들 겪고 나면 어떻게 안 사랑하고 배겨요?”
단언하는 기준의 말에 희원은 부끄러워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 *
유치원 원복을 단정하게 입은 랑일이가 거울 앞에 섰다. 뒤에서 기준은 랑일이를 내려다보며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 간다는 것을 실감했다. 3월에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유치원에 첫발을 내딛던 아이는 이제 제법 키도 크고 말도 부쩍 늘었다.
“아빠, 나 어때?”
매일 입는 원복인데도 이렇게 묻는 이유는 오늘이 유치원 행사 아람제 날이기 때문이다. 기준이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멋있어.”
“마미가 예쁘다 해 주겠지?”
“그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희원은 이번 주는 연락조차 힘들었다. 집에 들어와서는 자기 바빴고 아침에도 일찍 나가는 것 같았다.
물론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있는 시간에는 원래 연락이 안 되었지만 집에 있는 시간만큼은 둘이 핸드폰을 붙들고 살았다. 하지만 요즘은 희원이 집에 들어가면 피곤해해 예전만큼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기준은 차라리 랑일이가 부러웠다. 랑일이는 어쨌든 유치원에서 종일 희원과 함께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랑일아, 오늘 아람제 끝나고 마미랑 맛난 거 먹을까?”
“응! 좋아. 그럼 오늘 마미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랑일이의 물음에 기준은 살짝 랑일이의 눈치를 살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녁도 단둘이서 먹고 싶었으나 그것까지 빼앗으면 랑일이가 심통을 부릴 게 뻔해서 저녁은 양보한 건데 랑일이의 마음과 기준의 마음이 당연히 일치할 리 없었다.
기준은 ‘아들아, 아빠도 연애 좀 하고 결혼도 좀 하자.’ 하고 속으로 빌었다.
“글쎄… 오늘은 마미가 우리 집에서 자기에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왜냐하면 오늘 기준도 집에 들어올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기준이 말꼬리를 흐리고는 얼른 돌아섰다. 그러지 않으면 랑일이는 왜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할 거였다.
랑일이는 다른 일에 있어서는 설명해 주면 잘 납득하고 이해하면서도 유독 희원에 관한 것은 자기가 원하는 답이 아니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랑일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제 아빠의 뒤를 바짝 쫓았다.
“왜? 마미랑 같이 자고 싶은데, 왜?”
그러니까 네 아빠가 그 마미랑 같이 자야 한다니까! 기준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아들을 상대로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어서 이를 으득 물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마미도 좀 쉬어야지.”
“우리 집에서.”
그게 아니라 아빠랑 쉬어야 한다고 이놈아! 기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돌렸다.
“할머니 어디쯤 오셨나 전화해 볼까?”
기준은 핸드폰을 들고 곧바로 박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지 그러지 않으면 오늘 밤에도 랑일이를 가운데 끼고 자게 생겼다.
“어디세요?”
―우리는 유치원으로 곧장 간다고 했잖니.
이렇게 답변이 돌아올 거라는 건 기준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랑일이는 내내 기준의 다리를 붙잡고는 희원과 같이 자고 싶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그래라, 일요일에도 우리 집에서 같이 놀면 좋겠다, 계속해서 조를 게 분명했다.
“아, 여기 들렀다 같이 가신다고요? 얼마나 걸리세요?”
―무슨 소리니?
“그래서 15분이면 오신다고요?”
―아……. 오늘 도와주면 다음에 뭐로 갚을래?
눈치 빠른 박 여사가 기준이 왜 동문서답을 하는지를 대강 눈치채고는 물었다. 기준은 무슨 모자 사이에 거래를 하느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라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숙이고 가야 할 사람은 기준이었다. 당장 저녁에 기준은 랑일이를 본가에 맡겨야 했으니 말이다.
“뭐 필요하신데요?”
―희원이. 단둘이 데이트하게 넌 좀 빠져.
기준의 반듯한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이게 바로 첩첩산중이라는 걸까?
“다른 거 말씀하세요.”
―됐어. 나랑 해준이는 유치원으로 직접 가마.
기준이 한숨을 내뱉으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 우리 이제 막 집에서 나왔으니까 10분이면 네 집에 도착하겠구나. 오늘 약속한 건 잊지 마라.
“알겠다고요.”
―들었지, 해준아?
박 여사는 옆에 있는 해준을 증인으로 삼아 확인까지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기준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뭐 이리 희원을 탐내는 사람이 많은지 기준은 희원을 숨겨 두고 저만 독점하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자, 가족분들께서는 강당으로 올라가시면 되고요, 우리 놀 친구들은 각자 교실로 들어가서 준비하면 됩니다.”
역시 유치원 문 밖에서 원생의 가족들에게 안내를 하는 이는 희원이었다. 기준이 선물해 준 하얀색에 검은색 무늬가 들어간 셔츠를 입고 검은색 슬랙스를 입은 희원은 여느 날보다 더 단정하고 예뻤다.
“어머, 우리 희원이 살 빠져서 어째.”
박 여사는 차에서 내려 저 멀리 서 있는 희원을 보자마자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는 자신도 동의하는 바이기에 기준은 오늘 그동안 못 먹였던 것을 다 먹이겠다고 다짐했다.
“너는 그동안 뭐 했니? 희원이가 만날 야근하고 바쁘면 도시락이라도 싸서 갖다주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도 시켜 주고 그래야지.”
기준이 제 어머니를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해준은 짐짓 모른 척 설이를 안고 랑일이 손만 잡고는 딴청을 했다.
“어머니, 저도 직장인이에요.”
기준이 기가 막혀서 결국 항변을 했다.
누가 들으면 저는 집에서 노는 줄 알겠다. 희원보다 기준이 평소에 더 바빴으면 바빴지, 덜 바쁘지는 않다. 게다가 기준은 싱글 대디다. 혼자서 랑일이 육아를 한단 말이다. 물론 가끔 본가에 랑일이를 맡기기는 하지만.
“얘, 그건 마음의 문제고 사랑의 크기야.”
기준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제 어머니를 바라봤지만 박 여사는 뭐 틀린 말 했냐는 눈빛이었다. 기준이 한숨을 폭 내쉬며 해준을 바라봤지만 해준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 봐도 소용없어. 엄마가 루세를 일요일마다 데리고 나가는 바람에 나는 주말마다 항상 독박 육아야. 나는 우리 엄마가 며느리한테 하는 것 반만큼만 아들한테 해 줬으면 좋겠어.”
사실 그렇게 따지면 해준만큼 고통스러운 사람도 없었다. 루세가 요식업을 하는 만큼 쉬는 날이 일요일 하루니 토요일 육아는 오롯이 해준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박 여사가 일요일마다 루세를 끼고 놀러 다니거나 아니면 따로 루세 것만 영화표를 끊는다거나 공연 티켓을 예매한다거나 해서 루세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바람에 해준은 일요일도 거의 독박 육아나 다름없었다.
해준의 사정을 잘 아는 기준은 왠지 결혼 후 자신의 미래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
거리가 좁혀지자 해준의 손을 놓은 랑일이가 곧장 희원에게 뛰어갔다. 희원은 늘 그렇듯 랑일이를 안아 올렸다.
“우리 랑일이 오늘 정말 멋지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희원은 랑일이를 듬뿍 칭찬해 주었다. 큰 행사를 앞두고 아이들이 긴장했을까 봐 희원이는 랑일이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이런 식으로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진심이 담겨 있었다. 특히 랑일이에게는 더더욱.
“선생님, 아빠랑 작은아빠랑 할머니랑 왔어요. 설이도 왔어요.”
랑일이가 설이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희원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 등을 토닥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금 강당으로 가시면 돼요. 아직 많이 안 오셔서 앞자리 맡으실 수 있어요.”
아직 주변에 다른 가족들이 있기에 박 여사와 해준은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눴다.
“엄마, 먼저 가서 자리 잡아요. 랑일아 이따 보자. 파이팅!”
해준이 랑일이에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파이팅!”
랑일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따라 외쳤다. 해준이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박 여사와 함께 먼저 강당으로 올라갔다.
“랑일이도 들어가서 준비해야지. 아빠한테도 인사하고.”
희원이 랑일이를 내려 주자 랑일이가 기준을 올려다보며 작은 손을 흔들었다. 기준은 랑일이와 눈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 한쪽이 뭉클했다. 그래서 한쪽 무릎을 굽히고 바닥에 앉아 랑일이와 눈을 마주했다.
“랑일아, 그동안 선생님하고 연습한 거 잘 보여 줘.”
“응!”
랑일이는 집에서 연습을 할 법한데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다. 비밀이라면서 말이다. 기준은 뒤돌아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는 랑일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많이 컸죠?”
희원의 말에 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랑일이가 집에서 한 번도 안 보여 줬다고요? 얼마나 잘하는데요. 보다가 감동해서 울지도 몰라요.”
기준이 희원과 눈을 맞추며 잔잔하게 웃었다. 다 이 사람 덕분이다. 어리광 부릴 줄 모르고 투정이라곤 할 줄 모르던 랑일이가 그 나이의 어린아이가 할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재벌가 도련님답게만 커 와서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던 아이가 이제는 고집도 부리고 애교도 부리고 애정 표현도 마음껏 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눈앞의 이 사람 덕분이었다.
랑일이는 알게 모르게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그 자리를 회피하곤 했다. 어린아이지만 불편했던 모양인지 엄마와 관련된 그림책은 조금 보다가 덮어 버리곤 했고 그건 만화도 마찬가지였다. 식당이나 어디를 가서 가족 단위로 있는 모습을 보면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랑일이가 피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희원과 기준과 셋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면서부터일 거다. 동물원에 가서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들을 보고 울적해했던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않게 되었다.
희원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랑일이는 밝아졌고 아이다워졌다. 이제는 여느 가족들을 봐도 피하지 않았고 불편해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기준은 지금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응? 뭐가요?”
“그냥 이것저것 다요. 이따 끝나고 저녁 먹으러 가요.”
기준은 평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왠지 그의 눈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희원이 그 눈을 마주하다가 맑게 웃었다. 다정하고 따듯하게. 그러다 괜찮다, 내가 더 고맙다는 듯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기준을 강당 안으로 들여보내고 유치원 안으로 들어온 희원은 5세 아이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 머리 묶어 주세요.”
의상을 입느라 머리가 헝클어진 여자아이가 머리끈을 들고 서 있었다.
“응, 이리 와.”
희원은 아이들 의상을 입히는 것뿐 아니라 여자아이들 머리가 헝클어지면 다시 머리를 예쁘게 묶어 주기도 했다. 5세 아이들은 다른 반 선생님과 부담임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유독 희원을 찾았다.
“5세 준비되었어요?”
원장 선생님이 사회를 보는 동안 원감 선생님은 무대 뒤편에서 동선을 살폈다. 희원은 아이들을 챙기고 난 뒤 줄을 세우고는 말했다.
“우리 5세 친구들, 무대 아래에 선생님 있으니까 춤추다가 기억 안 나면 선생님 보고 따라 하면 돼요. 알았죠?”
아이들은 이번 주 수요일부터 리허설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무대에 오르면 수많은 시선 때문에 긴장하기 마련이니 희원은 계속해서 선생님을 보라고 안심시키고 당부했다.
“틀려도 괜찮아. 신나게, 재밌게만 하면 돼.”
희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자세를 취하자 조그마한 아이들도 의지를 불태웠다. 그중에서도 랑일이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그 눈을 마주하며 희원은 속으로 응원했다.
‘랑일아, 우리 열심히 해서 아빠를 감동시키자!’
희원은 아이들이 무대 뒤에 서는 걸 보고 난 뒤 자신은 얼른 뛰어 무대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이 무대 위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출 때 선생님 한 명은 무대 맞은편에서 아이들이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같이 움직여 주어야 했다.
5세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것들이었다. 6세는 난타를 하고 7세가 부채춤을 추었는데 5세는 박자에 맞추어 트라이앵글을 치고 심벌즈를 치는 등 단순한 타악기를 연주하는 거였다.
율동도 마찬가지였다. 6세와 7세가 응원단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것에 반해 5세는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이리저리 엉덩이를 흔들고 씰룩이는 것이었다.
“자, 이번 순서는 놀 유치원의 막내들이죠. 5세 친구들이 꿀벌로 변신해 무대를 펼쳐 보입니다. 많은 박수 부탁드려요.”
원장님의 말이 끝나자 꿀벌 모양의 옷을 입은 아이들이 무대 위에 섰다. 여기저기서 “귀여워!” 하며 끙끙 앓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죄다 핸드폰을 들고는 자기 아이들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 아빠!”
어린아이들은 무대 위에서 자신의 부모를 발견하자 무대에 서 있다는 것도 잊고는 엄마, 아빠를 불러 대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모습들에 사람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랑일이는 그 와중에도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랑일이의 시선은 희원에게 고정된 채였다.
“형, 랑일이 봐. 형수만 바라보고 있어.”
기준이 픽 웃었다.
“그런데 애들 엄청 귀엽긴 하다. 설아, 오빠 어디 있어? 랑일이 오빠 찾아봐.”
해준은 설이에게 속삭이며 핸드폰을 들었다. 꿀벌 옷을 입은 랑일이는 엄청 귀여웠다. 랑일이가 아무리 도도한 도련님처럼 굴어도 아직 어린 다섯 살이었다. 그 모습에 밖에서는 도도하고 교양 있기로 소문난 박 여사조차도 미소를 머금고 랑일이를 바라봤다.
“얘, 해준아. 잘 찍어 봐.”
해준은 박 여사의 명령에 핸드폰을 들고 어느 가족 못지않게 훌륭한 사진가 역할을 행하기 시작했다. 기준도 슬그머니 핸드폰을 들었다.
음악이 나오고 아이들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기저기 앓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꼬맹이들은 서로 맞지도 않고 움직임도 제각각이었다. 그중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도 있었고 한 박자씩 늦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귀여움을 가중시켰다.
그 속에서 랑일이는 군계일학이었다. 랑일이는 희원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움직이며 서툰 아이들 속에서 홀로 완벽하게 율동을 하고 있었다.
“형, 랑일이 혼자 다 외웠나 봐. 랑일이 나중에 춤춘다고 하면 어떡하지?”
해준이 옆에서 기준에게 속삭였지만 기준은 해준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기준은 랑일이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랑일이 시선 끝에 아이들과 같이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준은 랑일이의 몸짓도 사랑스러웠지만 그보다 제 연인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낭창한 몸이 아기자기한 율동을 찰떡같이 소화해 내고 있었다. 누가 베테랑 유치원 교사 아니랄까 봐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다.
“어머님,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아버님, 오늘 유민이가 엄청 잘했죠? 유민아, 진짜 진짜 잘했어. 멋있었어!”
희원은 아이들에게는 손을 흔들어 주면서 오늘 찾아온 가족들에게는 감사의 말과 아이들 칭찬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형, 형수님 너무 바쁜데?”
아람제를 시작할 때만 해도 단정했던 희원의 옷은 아이들이 안기고 여기저기서 붙잡고 그러느라 구겨지고 뭐가 묻고 난리가 났다. 갈색 머리칼도 살짝 헝클어져서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렸다.
“우리 선생님은 너무 인기가 많다.”
“그러네. 형이 고생 좀 하겠어.”
다른 가족들과 조금 거리를 벌리고 있는 랑일이네 가족들은 희원을 바라보며 이야기 중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친한 아이들의 부모끼리 서로 인사도 나누고 그러는데 기준에게 와서 살갑게 인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준이 회사에서 보여 주는 이미지는 냉랭했기 때문이다.
“랑일이 아버님! 와 주셔서 감사해요. 할머님이랑 작은아버님도 감사해요.”
희원이 아직 주변에 있는 다른 가족들을 의식하며 인사했다. 그에 기준 역시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랑일이 일인데 당연히 와야죠. 랑일이 가르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유치원에 남아 있는 다른 학부모들이 힐긋 쳐다봤다. 회사 내 이기준 이사는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기획력, 빠른 추진력으로 존경받는 상사였다. 하지만 곁을 내주지 않는 차가운 성격으로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존재였다.
그런 이기준 이사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는 것은 회사 내에서 유명했다. 아침저녁으로 아들의 등하원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 이렇게 행사에 다른 가족들까지 행차할 줄이야! 재벌가라고 해도 아이에 대한 사랑이 지극정성이구나 싶었다.
“할머님은 어떠셨어요? 재미있게 보셨어요?”
희원이 박 여사에게도 살갑게 인사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박 여사는 따듯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께서 너무 고생하셨겠어요.”
“고생은요. 아이들이 귀여워서 준비하는 내내 즐거웠어요.”
희원의 말에 옆에서 기준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몇 주 내내 야근의 행진이었는데 그걸 즐거웠다고 하는 희원이 야속했다. 그럼으로 인해 기준이 독수공방한 시간이 얼마인데.
“그나저나 선생님 살이 많이 빠지셨어요.”
“아,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희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바지가 좀 헐렁해졌기 때문이다. 박 여사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희원아, 다음 주에 엄마랑 백화점 가자. 살이 빠져서 맞는 옷도 없겠어.”
어느새 다른 가족들이 돌아가서 랑일이네만 남자 박 여사가 말투를 바꾸어 말했다. 희원이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랑 해준이는 먼저 갈게. 랑일이랑 기준이랑 밥 먹고 오늘 생일 즐겁게 보내.”
“어! 생일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수님 또 토끼 됐어요.”
해준이 장난스럽게 웃자 희원이 눈을 사르르 접으며 따라 웃었다.
“형수님 생일인 거 왜 모르겠어요. 오늘 형이 랑일이 맡긴다고……!”
“선생님!”
랑일이가 가방을 메고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랑일이는 다른 가족보다 희원을 먼저 찾았다. 대화 중이던 희원이 뒤돌자마자 쏜살같이 내려와서 다리를 끌어안았다.
“계단에서 뛰면 큰일 나.”
랑일이가 방긋방긋 웃었다. 박 여사와 해준이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잘했다고 멋있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희원아, 엄마가 기준이한테 선물 맡겨 놨으니까 이따가 달라고 해. 해준이가 주는 선물도 있어.”
“감사합니다.”
“형수님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생일 축하드려요.”
“감사해요.”
희원은 박 여사와 해준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랑일이를 안고 같이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우리도 가요.”
랑일이가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고 말했다.
“우리도 이제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네!”
“이랑일, 내려서 걸어.”
기준의 말에 랑일이 입술이 뿌우 하고 튀어나왔다. 싫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기준은 종일 고생한 희원을 제 아들이라도 힘들게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힘들어서 안 돼요. 이랑일 마미 힘들어. 내려.”
랑일이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희원이 힘들 거라고 하자 결국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 대신 희원의 손을 꼭 잡았다.
차에 다 도착하자 기준이 당연하다는 듯 조수석을 열어 희원을 먼저 태웠다. 랑일이가 제 아빠를 불퉁하게 쳐다보다가 기준이 “마미 힘들게 하면 안 돼.”라고 말하자 수긍하듯 뒤에 얌전히 올라탔다.
“오늘 고생했어요.”
“랑일이가 너무 잘해 줬어요.”
둘이 동시에 말했다. 그러고는 둘이 뒤돌아보고는 희원이 랑일이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어 기준이 말했다.
“랑일아, 오늘 아빠 감동했어.”
“진짜?”
“응, 정말 멋있었어.”
기준이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칭찬하자 랑일이가 꽃같이 웃었다. 햇살같이 예쁘게. 그 미소가 이제는 기준보다 희원을 더 닮아 있었다.
셋이 향한 곳은 이제는 셋이 종종 가곤 하는 한정식집이었다. 희원이 처음으로 랑일이랑 기준과 밥을 먹었던 곳이기도 했다. 랑일이가 미끄럼틀에서 떨어지는 걸 희원이 받아서 그 보답으로 기준이 식사를 대접했던 곳이었다.
“이사님,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기준이 안으로 들어서자 한복 차림을 한 주인이 직접 기준을 맞이했다.
“선생님도 같이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랑일아, 인사해야지.”
희원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랑일이가 주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안으로 모실게요.”
셋은 안내에 따라 늘 식사를 했던 조용한 룸으로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주인이 나가자마자 기준이 랑일이를 불렀다.
“이랑일, 이리 와.”
랑일이가 아예 희원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상태였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희원이 설이를 예뻐한 사건 이후로 랑일이의 어리광과 애착이 조금 심해졌다.
기준은 자신이 판 구덩이에 스스로 빠진 꼴이라 뭐라 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이래서 동생을 만들어 줄 수나 있을지 고민이었다.
“기준 씨, 괜찮아요. 오늘 랑일이 너무너무 애쓰고 잘한 날인데 뭐라 하지 마요.”
“그건 희원 씨도 마찬가지잖아요. 랑일아, 그럼 마미 옆에 똑바로 앉아.”
희원의 품에 안겨 있던 랑일이가 고개를 휙 돌려서 제 아빠를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저러다 둘이 또 싸우지 싶어서 희원이 말리려고 할 때였다.
“아빠, 마미 생일 축하해야 해?”
랑일이의 말에 기준이 그제야 너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들 똑똑하네. 그래, 예쁘게 앉아서 마미 생일 축하해야지.”
기준의 칭찬에 랑일이는 스스로 내려와서 옆에 똑바르게 앉았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도련님답게 단정한 모습으로 말이다.
“랑일아, 우리 생일 케이크에 불 켜고 마미한테 노래 불러 줄까?”
“응!”
기준은 여기로 오는 길에 산 생일 케이크를 상자에서 꺼냈다.
“와, 너무 예뻐요!”
케이크를 보고 희원이 감탄했다. 희원은 차 안에서 내리지도 못하게 하고 기준이 랑일이랑 둘만 내려서 고른 케이크였다. 딸기가 한가득 둘러싸여 있는 케이크는 달콤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희원이 좋아하니 랑일이도 싱글벙글 웃으며 “마미, 내가 골랐어요!” 하고 자랑스레 말했다. 희원은 귀여운 랑일이 뺨에 입을 맞추고 고맙다며 꼭 끌어안아 주었다.
기준은 초를 꽂고는 불을 붙였다. 랑일이는 힘차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준비가 끝났는지 눈이 초롱초롱했다.
“랑일아, 노래 불러.”
“응응! 나 노래 잘해!”
랑일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작은 손으로 박수를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희원은 그런 랑일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핸드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마미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희원은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언하지 못할 정도의 행복함이었고 태어나 이렇게 뭉클한 생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희원 씨, 얼른 촛불 꺼요.”
“랑일아, 마미랑 같이 끄자.”
희원이 랑일이를 끌어안고 다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불을 끄려고 하자 랑일이가 말했다.
“마미, 소원 빌어야 한대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잠깐 모았다가 뗐다. 그러고는 랑일이와 같이 촛불을 불었다. 기준이 흐뭇한 표정으로 둘을 사진으로 담았다.
케이크를 먹고 싶어서 입맛을 다시는 랑일이에게 밥을 다 먹고 먹어야 한다고 설득하고 난 뒤 케이크를 정리했을 때 주문한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소에 먹는 것보다 뭔가 더 푸짐한 것 같아요.”
희원이 들어오는 음식들을 보며 감탄하면서 말했다. 주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사님께서 오늘 선생님 생신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셔서 솜씨 좀 부려 보았습니다.”
희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준이 세세하게 신경 쓰고 있을 줄 몰랐다.
“감사합니다.”
희원이 고개 숙이며 인사하자 주인은 좋은 시간 보내라며 마주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갔다. 룸의 문이 닫히자마자 기준과 눈이 마주친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오늘 고마워요.”
“희원 씨가 기뻐해서 다행이에요. 어서 먹어요. 많이 먹어요. 요즘 너무 말랐어요.”
“그렇게 살 빠지지 않았어요. 기준 씨도 많이 먹어요. 랑일이 우리 애기도 많이 먹어.”
희원의 다정함에 랑일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 이거 먹어 봐요. 이 집 대하 미나리찜은 일품이에요. 이것 먹으려고 11월에 여기 많이들 와요.”
기준이 대하 미나리찜에 있는 대하를 손수 까서 희원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기준 씨도 좀 먹어요.”
기준은 내내 희원을 챙기느라 정작 본인은 밥에 손도 안 댄 상태였다. 희원이 꼬막 껍질을 떼어 기준의 접시에 놓으려고 하자 기준이 그대로 입을 벌렸다.
“접시에 놓을…….”
“아. 지금 손 이래서 접시에 놓으면 못 먹어요.”
기준이 자신의 접시를 저쪽으로 치우고는 입을 더 크게 벌렸다. 희원이 랑일이 눈치를 살짝 살피고는 기준의 입에 쏙 집어넣어 주었다. 옆에서 밥을 열심히 먹던 랑일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마미, 나도 아!”
랑일이가 금세 따라서 입을 크게 벌렸다. 기준이 고개를 숙이고 웃었고 희원은 민망함에 귀가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밥을 다 먹고 난 뒤 디저트로 유자차가 들어왔다. 셋은 달콤한 유자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희원 씨, 이건 박 여사가 준 선물이에요.”
“이게 뭐예요?”
기준이 꺼내서 내민 것에 희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시계가 틀림없었다.
“내가 희원 씨 평소에는 아이들 때문에 시계 못 찬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럼 주말에 차면 된다고 주더라고요.”
“이, 이걸 어떻게 받아요!”
기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두 푼짜리가 아닌 걸 알고 있다. 물론 재벌은 돈 쓰는 범위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건 그냥 마음먹는다고 살 수 있는 명품의 차원이 아니었다.
“박 여사랑 쇼핑 안 해 봤죠? 워밍업이라고 생각해요. 이것도 못 받으면 박 여사랑 쇼핑하다가 희원 씨 졸도해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우리 집에 들어올 식구한테 박 여사가 하는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에요.”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아끌고는 하얗고 여린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었다.
“어떡해요. 기준 씨가 좀 말리지 그랬어요.”
“난 분명 말렸어요. 며칠 못 찬다고.”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비싸니까.”
“희원 씨 나 재벌 집 아들이에요. 괜찮아요. 마음껏 누려요. 그리고 이건 해준이랑 루세 씨가 주는 선물.”
희원의 눈이 또 동그래졌다. 하얀색 운동화였다. 당연히 고가의 명품이었다.
“희원 씨 또 토끼 눈 됐어요.”
“토끼? 토끼가 어디 있어?”
주스를 마시던 랑일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기준을 쳐다봤다. 기준이 랑일이의 모습에 또 한 마리의 토끼를 발견하고는 그저 웃었다.
“해준 도련님하고 루세 씨한테는 제가 직접 고맙다고 얘기할게요. 어머니한테도요.”
“그래요.”
기준이 미소 지었다. 기준은 희원이 제 식구들한테 사랑받는 게 기뻤다. 앞으로도 희원은 더욱 많은 사랑을 받을 거라고 기준은 확신했다.
“마미! 나도 생일 선물 있어요!”
랑일이가 희원을 보고는 활짝 웃었다.
“진짜?”
“네! 마미 주려고 생일 선물 가져왔어요.”
랑일이의 말에 희원뿐 아니라 기준도 놀랐다. 랑일이가 생일 선물을 준비할 줄은 기준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짠!”
랑일이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희원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희원이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을 보고는 눈이 엄청 커다래졌다.
“랑일아!”
“어때요? 예쁘죠?”
“이걸 랑일이가 산 거야?”
“네! 큰아빠랑 둘이서 놀았던 날 샀어요. 큰아빠가 가게에 데려가 줬어요.”
“돈이 어디서 났어?”
“돼지 저금통.”
랑일이가 자랑스럽게 웃었다. 기준이 놀란 얼굴을 했다.
어린것이 어느 날부터 돼지 저금통에 돈을 모으기 시작해서 왜 그러나 싶었다. 집에서 신발 정리를 하고 용돈을 달라고 하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양치질도 하고 옷도 개켜 놓고 또 용돈을 달라고 하곤 했다. 그에 기준은 단순히 유치원에서 저금에 대해서 배웠나 보다고 생각했다.
희원은 손바닥 위에 랑일이가 둔 은색 반지를 보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마미, 울어요?”
“랑일아, 고마워. 우리 아가가 언제 이렇게 컸어? 정말 고마워, 랑일아.”
희원은 반지를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었다. 그러고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그 손가락을 바라보며 웃었다. 희원은 다시 한번 랑일이를 힘차게 껴안고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기준은 어린 랑일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대견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주머니에 든 상자를 매만지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아들놈한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본가에 가는 동안 기준은 랑일이 눈치를 살폈다. 랑일이는 뒷좌석에 희원과 앉아서 알콩달콩 대화 중이었다.
“랑일아.”
“응?”
“오늘 할머니랑 같이 있을 수 있지?”
“왜? 마미는?”
기준과 희원의 시선이 거울을 통해 마주쳤다. 기준이 큼큼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랑일아, 마미가 오늘 말고 내일 집에서 자고 가도 될까?”
“내일요?”
“응, 오늘은 우리 랑일이도 아람제 하느라 힘들어서 금방 자야 하잖아. 그리고 이미 밤이라서 우리 오래 못 놀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마미가 일찍 올 테니까 그때부터 실컷 놀자.”
“음… 그럼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거예요?”
랑일이의 물음에 희원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미가 자고 갈게.”
랑일이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랑일이는 진짜 멋져. 마미도 잘 이해해 주고 정말 고마워.”
희원의 말에 랑일이가 가슴을 쫙 펴고 웃었다. 자신이 매우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이다. 기준은 아빠인 저보다 희원이 랑일이를 더 잘 다룬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둘만 모르는 연애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