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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점점 솔직해지는 마음 (9/31)

9. 점점 솔직해지는 마음

매미 소리가 시끄럽도록 울리고 햇빛은 쨍쨍 내리쬐며 비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히고 더워서 어디 차가운 돌바닥에 등을 뉘고 싶은 그런 날씨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시원한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는 유치원 한가운데 앉아서 자기네들끼리 재잘거리고 있었다.

“우리 수영장 간다!”

“나는 캠핑한다!”

“아빠랑 엄마랑 비행기 타고 어야 간다!”

희원은 멀찍이 떨어져 아이들이 조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휴가 시즌이긴 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7월에 들어서면서 부모들은 휴가를 가기 몇 주 전부터 언제 아이가 못 나온다고 미리 말해 주곤 했다. 매해 있었던 일이라 희원은 그저 묵묵히 일정을 기억해 두고 있을 뿐이었다.

“랑일아, 너는 어디 가?”

옆에 앉아 있던 윤이가 랑일이에게 물었다. 언제나 앞장서서 말하곤 했던 랑일이가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이상했던 모양이다. 랑일이 이름이 불린 순간 희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랑일아.”

랑일이가 대답하지 않으니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다시 재촉했다. 랑일이는 물끄러미 땅만 바라봤다.

“아직 몰라.”

“그럼 언제 가?”

랑일이가 고개를 저었다. 희원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 우리 ‘모두 제자리’ 할까요? 각자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은 어디에?”

“장난감 통에!”

“옳지. 모두 제자리 하고 누가 먼저 와서 앉나 보자!”

희원의 말에 아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잊은 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재빠르게 움직였다. 랑일이도 일어나서 자기가 가지고 놀았던 자동차를 장난감 통에 집어넣고 희원의 앞에 와서 앉았다.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다섯 살 아이들이 모두 와서 자신의 머리도 쓰다듬어 달라는 듯 배를 내밀고 웃었다. 희원은 아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한 번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 이제 방과 후 하는 친구들은 남고 집에 먼저 가는 친구들은 가방 챙겨서 나갈까요?”

“네!”

먼저 집에 가는 아이들은 옆의 친구들과 인사하고는 각자 사물함에 가서 자기 가방을 챙겼다. 휴가라서 그런지 일찍 집에 가는 아이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랑일아, 안녕.”

랑일이가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어딘가 축 처진 느낌에 희원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 * *

오늘도 마지막까지 남은 랑일이가 희원의 허벅지에 앉아서 희원의 옷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에 재잘재잘 떠들어 대던 랑일이가 입을 꾹 다물고는 그저 손가락만 움직여 대서 희원도 랑일이의 등만 어루만져 주고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

“응?”

랑일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희원이 내려다보자 기준과 똑 닮은 눈이 자신을 올려다봤다. 희원은 그 순간 귀여워서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나도 휴가 갈래요.”

휴가라는 단어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아이들이 제 엄마 아빠의 말을 빌려 휴가라는 단어를 뱉자 랑일이도 그게 그렇게 부러웠던 모양이다.

“랑일이 유치원 나오기 싫어?”

희원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랑일이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화들짝 놀란 얼굴로 말이다.

“나 선생님 좋아요.”

그치만 그렇게 말하고도 금세 축 처졌다.

“랑일이 유치원 나오는 건 좋은데 아빠랑 어디 놀러 가고 싶은가 보구나?”

그 말이 정답이라는 듯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이 아빠 엄마와 여행을 간다며 여름방학이라고 말하니 랑일이도 똑같이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도 여름방학 하고 싶어요.”

“그렇구나. 이따가 아빠 오시면 한번 물어볼까?”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희원의 품에 폭 안겼다. 자기도 아빠랑 놀러 간다고, 여행한다고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 희원은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정한 눈길로 바라봐 주었다.

“이랑일.”

기준의 목소리였다. 더운 여름에도 정장을 챙겨 입은 그의 모습이 멋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그러면서도 희원은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서 있는 기준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아빠.”

랑일이는 아빠가 왔음에도 희원에게 껌딱지처럼 붙어서 가지 않았다. 기준이 왜 그러냐는 눈을 해 보였다.

“랑일아, 아빠 오셨잖아. 아빠, 다녀오셨어요, 해야지.”

희원이 랑일이를 내려 주려고 했지만 랑일이는 희원을 꼭 끌어안고는 고개를 저었다. 속상한 마음이 묻어나서 희원은 강제적으로 떼어 놓지 못했다.

“선생님.”

“우리 애기가 속상하구나.”

희원이 랑일이를 안고 일어났다. 희원이 랑일이의 귀에 속삭였다.

“랑일아, 아빠한테 마음을 이야기해 줘야 해. 그래야 아빠가 아시지. 응?”

하지만 랑일이는 입을 떼기가 뭐가 그리 어려운지 희원의 옷만 만지작거렸다. 희원도 마음이 아파서 랑일이의 손만 내려다봤다.

“랑일이 무슨 일 있었어? 아빠한테 와서 이야기해 줄래?”

기준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랑일이는 고개를 젓고 이제는 희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작은 손이 희원의 머리칼을 만졌다. 랑일이의 버릇 중에 하나였다.

“랑일아, 선생님이 집까지 데려다줄까?”

희원의 말에 랑일이가 폭 안겨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희원을 바라봤다. 눈이 똘망똘망해졌다. 희원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이랑 집에 같이 갈까?”

“네! 나 선생님이랑 저녁도 먹을래요!”

다른 때 같았으면 분명히 당황했겠지만 이제는 기준과 연인이 되었으니 곤란할 것도 없었다. 기준도 딱히 막지 않았다. 그래도 희원이 기준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의중을 물었다. 기준이 피식 웃었다. 뭘 물어보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럴까? 오늘 선생님 맛있는 것 사 드릴까?”

기준이 랑일이에게 묻자 랑일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반가운 기색을 해 보였다.

“선생님이랑 고기 먹을래! 선생님, 우리 고기 먹어요!”

“그럴까? 우리 맛있는 고기 먹을까?”

“네!”

희원의 말에 랑일이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는 게 보였다.

기준은 종종 가곤 하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희원에게 이왕이면 더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싶어서 동네 고깃집이 아닌 접대를 할 때 찾곤 하는 곳으로 향했다.

“오셨어요, 이사님.”

“네, 안녕하세요.”

셋은 안내를 받아 룸으로 들어갔다. 랑일이는 당연하다는 듯 기준의 옆이 아닌 희원의 옆에 앉았다. 기준이 눈짓으로 이리 오라고 했지만 랑일이는 본 척도 안 했다.

“이랑일, 선생님 힘드셔. 이리 와.”

“싫어. 선생님하고 먹을 거야.”

“제 옆에 있어도 괜찮아요.”

희원의 말에 랑일이가 찰싹 달라붙으며 웃었다. 희원은 그런 랑일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고기가 나오자 기준은 마치 고기를 굽기 위해 이 자리에 온 사람처럼, 그리고 두 사람을 먹이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아버님도 좀 드세요.”

아버님이라는 호칭에 기준이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가 자신도 어쩔 수 없음을 아니 어깨를 으쓱였다. 표정이 변화무쌍한 기준을 보며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아빠, 우리는 언제 방학해?”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랑일이가 물었다. 조금 마음이 풀린 건지 이제 마음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방학?”

“친구들이 휴가 떠나면서 자기는 오늘부터 방학이라며 갔거든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랑일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뭔지 알아챈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휴가세요?”

이번에는 희원이 물었다. 하지만 별로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기준은 원래도 일이 많았고 지난번 희원의 히트사이클 때문에 갑자기 연차를 이틀이나 쓰는 바람에 일이 더 늘었다. 켜켜이 쌓인 일들은 희원의 히트사이클이 끝난 지 한참은 되었는데도 여전히 기준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휴가를 가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 갈까요?”

희원은 기준이 함께 휴가를 가자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나저나 자신이 가겠다고 하면 갈 수 있는 건가?

“랑일아,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희원이 대답 대신 랑일이에게 물었다. 랑일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아무 데나요! 아빠랑 가면 다 좋아요.”

랑일이의 대답에 희원은 마음이 짠했다. 랑일이에게는 아빠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거였다. 희원은 혹시 자신이 랑일이와 기준이 단둘이 있을 시간을 요즘 들어서 너무 빼앗은 것은 아닌지 싶어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축 처졌다.

“그래. 랑일아. 아빠가 시간 빼 볼게. 시간 정해서 다시 말하자.”

“정말?”

“응. 그 전에 많이많이 먹어야지.”

“응!”

아빠가 안 된다는 말 대신 긍정의 대답을 내놓자 신이 나는지 랑일이의 숟가락질이 빨라졌다. 희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랑일이 밥 위에 고기를 얹어 주었다.

“랑일이만 챙기지 마시고 좀 드세요.”

기준이 희원의 밥그릇에 고기를 수북하게 쌓으며 말했다. 희원이 산처럼 쌓인 고기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자 기준은 따듯하게 웃으며 어서 먹으라는 눈길을 보냈다.

“지금 뇌물 주는 거예요. 그거 드시고 저랑 랑일이랑 휴가 같이 가자고.”

희원이 젓가락을 들고 움찔 놀랐다가 이내 배시시 웃으며 고기를 한 점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셋은 디저트로 나온 과일까지 먹고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랑일이 많이 먹었어?”

희원의 물음에 랑일이가 빵빵해진 배를 내밀며 방싯방싯 웃었다. 배에 부우 하고 배방구를 불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모양새에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 머리를 넘겨 주었다.

“잘 먹어서 정말 예쁘다.”

“나 예뻐요, 선생님?”

“응. 예뻐. 랑일이 앞으로도 잘 먹어야 해.”

“네!”

기준은 건너편에 앉아 둘을 바라봤다. 희원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자기가 낳은 아이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사랑스러운 눈을 한 채 바라볼 수가 있지? 기준은 희원이 신기하기만 했다.

뜨거운 시선에 희원이 고개를 들다가 기준과 눈이 마주쳤다. 희원은 멋쩍은지 작게 웃었다.

“일어날까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랑일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희원의 손을 꼭 쥐었다. 기준은 순간 자신도 희원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셋이 룸 밖으로 나와서 계산대로 향할 때였다.

“랑일아!”

랑일이 이름에 셋 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

“어머니!”

박 여사였다. 랑일이가 반색을 한 반면 기준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반면에 당황한 이는 희원이었다. 여기서 랑일이 할머님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님도 같이 계셨네요.”

“랑일이 할머님, 안녕하세요.”

희원의 얼굴을 아는 박 여사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희원이 랑일이 손을 놓고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랑일이가 희원이 제 손을 놓자 다시 손을 잡았다. 잡히지 않은 손끝이 살짝 떨렸다.

기준이 희원과 박 여사의 사이를 가르고 제 어머니 어깨를 감쌌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늘 뻣뻣하기만 한 아들의 살가움에 박 여사가 얘가 왜 이러나 싶어 기준을 쳐다봤다. 하지만 기준은 희원을 향한 박 여사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하고는 다시 물었다.

“모임 있으세요?”

“루세 맛있는 것 좀 먹이려고.”

“오늘 가게 장사는요?”

“점심에 장사 너무 잘됐는지 재료가 떨어졌대. 그래서 일찌감치 마감하고 나랑 저녁이나 하자고 했다.”

기준은 쿵짝이 맞는 두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일찍 일이 끝난 날 집에서 쉬고 싶어 하지 시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할까?

“해준이는요?”

“해준이는 먹여서 뭐 하니. 루세가 가게 일 하고 애까지 보느라 고생이 많지. 안에서 루세 기다린다. 나중에 보자.”

박 여사는 자신이 낳은 삼 형제보다 루세를 더 아들처럼 여겼다. 그 관심이 제발 희원에게는 쏠리지 않길 기준은 바랐다.

“선생님, 다음에 뵈어요.”

“네, 할머님. 즐거운 저녁 시간 되세요.”

희원이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희원은 행여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아닌지 신경 쓰였다. 박 여사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난 뒤 희원은 가게에서 밖으로 나올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희원의 얼굴을 보며 기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희원은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여사가 둘에게 뭐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둘이 스킨십을 하던 중도 아니었다. 둘이 연애를 하는 걸 알게 된 것도 아니었는데 희원은 괜히 식은땀이 났다.

“가요. 데려다줄게요.”

“네. 랑일아, 아빠 빠방 어디 있을까?”

희원은 멀뚱멀뚱 서서 희원을 올려다보는 랑일이를 내려다보며 웃어 보였다. 눈치 빠른 랑일이가 좀 전에 이상했던 기류 때문에 희원을 살피다가 희원이 금세 웃으며 다정하게 이야기하니 그저 좋아서 헤벌쭉 웃었다.

“아빠 빠방 저기요!”

“잘 아네? 역시 똑똑해요!”

희원이 랑일이를 번쩍 안아서 기준의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기준이 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음 지었다.

집까지 가는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랑일이는 이내 뒷좌석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희원은 창밖만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희원 씨.”

“네?”

기준의 목소리에 희원이 화들짝 놀라서 앞을 바라봤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 네.”

희원이 말을 좀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대화를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 막냇동생의 배우자는 어떤 분이에요?”

지난번 기준의 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박 여사가 막내아들의 배우자를 엄청 예뻐한다는 걸 타인인 희원도 알 수 있었다.

“희원 씨, 어떤 게 궁금해요? 아니면 어떤 부분이 염려스러워요? 편하게 얘기해 줘요.”

희원이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기준은 알 것 같기도 한데, 정말 자신이 짐작하는 이유가 맞나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나 말이죠.”

희원이 입을 뗐을 때 기준은 차를 세웠다. 희원이 주위를 살폈다. 아직 집은 아니었고 골목길에 들어선 상태였다.

“앞으로 올래요?”

“랑일이가…….”

“랑일이 잠들었잖아요. 이동하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희원 씨랑 얼굴 보면서, 눈 맞추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희원이 곤히 잠든 랑일이를 바라보고는 결국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희원 씨.”

기준이 아예 희원 쪽으로 몸을 틀고는 희원의 손을 꼭 잡았다. 늘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이 기준의 커다랗고 따듯한 손에서 온기를 전해 받고 있었다. 희원은 그 온기에 복잡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혼자서 고민하지 말고, 어려워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봐요. 궁금한 것, 신경 쓰이는 부분, 모두요. 희원 씨 말을 확대 해석하거나 곡해하지 않을 테니.”

희원은 기준의 눈을 보는 순간 그가 뱉은 말은 꼭 지킬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준은 왠지 모르게 신뢰감을 갖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기준 씨 어머님께서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들으면 벌써부터 그리 심각하게 사귀는 관계도 아닌데 뭘 그리 걱정하느냐고, 혼자서 앞서 생각하는 것 아니냐며, 오버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다. 사실 둘이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더 알아가야 할 것도, 맞추어야 할 것도 많은 상태였다.

하지만 희원은 장난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기준을 만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연애 감정으로, 만나다가 아니면 말지라는 생각으로 그와 만남을 갖는 게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은 많은 사람을 만나 봐야 한다고, 가볍게 만나는 게 뭐 어떠냐고 하지만 희원은 성격상 그런 게 가능하지 않았다.

아직 기준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사람 일이라는 게 오늘 열렬히 사랑하다가도 어떤 계기로 내일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어려웠지만 희원은 지금 그냥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자, 희원 씨, 냉정하게 생각해 봐요.”

기준은 심호흡을 하고는 희원에게 말했다.

“희원 씨는 꽃다운 서른 살이에요. 우성 오메가이기까지 하고 집도 잘살죠. 유치원 교사라는 번듯한 직업도 갖고 있어요. 예쁘고 잘생겼죠. 게다가 성격은 어떻고요?”

희원은 기준의 말에 얼굴이 점점 홧홧해졌다. 이 남자가 또 왜 이럴까 싶었다. 자기는 심각한데 이 사람은 전혀 심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마주 보고 있는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서 또 그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나는 어때요? 30대 중반 아저씨죠.”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근데 어디가요? 어디가 아저씨예요? 그리고 무슨 서른셋이 중반이에요?”

희원의 물음을 기준은 못 들은 척하고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제가 가진 배경은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돈은 있다가도 없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이사는 언제든 잘릴 수 있는 거 알아요?”

희원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누가 회장님 아들을 자른단 말인가? 그리고 돈이 있다가도 없을 수 있다는 말은 기준네 집안 같은 재벌가에서 할 소리는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결격 사유. 이혼남인 데다가 애까지 있잖아요. 나는 오히려 나중에 희원 씨 집에서 반대할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희원이 기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준이 마지막 말을 뱉는 순간 희원의 마음이 탁 풀렸다. 자신이 오버하는 게 아니었구나, 앞서가는 게 아니었구나, 혼자서만 미래를 생각하는 게 아니었구나 싶어서 괜스레 울컥했다.

“희원 씨.”

희원이 아무 말도 안 하자 기준이 조금 더 앞으로 몸을 수그리고 희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희원 씨, 잊어버렸죠?”

“뭐를요?”

“내가 처음 우리 연애하자고 할 때 했던 말.”

희원이 눈만 깜박이고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기준이 대신 말했다.

“충동적으로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곱씹고 또 곱씹어 본 뒤 고백하는 거라고 말했죠.”

“네,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요. 이 나이에 조건도 안 좋은 사람이 고백하는 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자꾸 조건이 안 좋다고 말씀하세요?”

희원이 입술을 삐죽이며 속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자꾸 페로몬 문제가 있는 오메가라며 땅 파고 들어가면 기준 씨는 좋겠어요?”

“아뇨, 속상하죠.”

“거봐요. 똑같은 거예요. 왜 자꾸 그래요?”

기준은 이 순간에도 제 편을 들어 주는 희원이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진짜 어쩔 수가 없네요.”

“네? 뭐가요?”

기준이 그대로 희원의 뒤통수를 살며시 잡고는 입을 맞췄다. 희원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 * *

기준은 지금까지 휴가라는 것을 제대로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늘 일에 매달려 살았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준이 이사가 된 뒤로부터 그를 모셨던 비서인 원 실장은 기준이 3박 4일 동안 휴가를 간다고, 일정을 조절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원 실장님?”

“네! 아, 죄송합니다. 그럼 7월 마지막 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일정 비우고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준은 원 실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휴가 가는 게 이상합니까?”

“아닙니다. 이제 이사님께서도 여름휴가도 가시고 해야지요.”

원 실장 말의 뉘앙스가 묘했지만 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 보라고 했다. 이사실 문이 닫히고 난 뒤 기준은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희원과 랑일이와 같이 시간을 보낼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기준은 희원과 고민한 끝에 7월 마지막 주로 휴가 날짜를 잡았다. 그때가 가장 성수기이기 때문에 유치원 아이들이 많이 빠지는 날이기도 했다.

물론 희원은 비수기인 9월이나 10월쯤 휴가를 가고 싶었으나 유치원은 그때가 여러 행사로 인해 가장 바쁜 달이라서 여느 회사원들처럼 그렇게 일정을 짤 수는 없었다. 그나마 돌볼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7월 말이 희원이 휴가로 쓸 수 있는 날짜였다.

기준은 해외로 나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아직은 랑일이가 어려서 장시간 비행기를 타거나 오래 걸어서 이동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래서 둘이 결정한 게 강원도 별장이었다. 뒤에는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도 있고 별장 내에 수영장도 있었다.

희원은 기준의 결정에 만족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준은 이미 언론에 얼굴이 몇 번 공개되었기 때문에 밖에 나가면 기준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혹시라도 랑일이나 희원의 얼굴이 공개되면 오히려 기준이 곤란할 수도 있었다.

“정말 강원도 별장으로 괜찮겠어요?”

휴가를 일주일 앞둔 날, 기준은 랑일이와 집에 돌아와서 랑일이가 잠들고 난 뒤 희원과 통화를 했다.

―저 너무 기대돼요.

“더 좋은 데 가고 싶지 않아요?”

―아직 랑일이가 어리고 랑일이는 아빠랑 시간 보내고 싶어 하는 게 더 크니 그것만으로도 괜찮아요.

희원의 말에 기준은 쓰게 웃었다. 지금 둘이 서로의 얼굴이 안 보이는 상태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희원 씨는 나랑 뭐를 하고 싶은 게 없나 봐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희원 씨 휴가에 대해 물어봤지 누가 랑일이 물어봤어요?”

기준의 볼멘소리에 희원이 핸드폰 너머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라니까요.”

―아들한테 질투해서 뭐 하려고요.

“질투가 아니라……! 됐어요.”

―혹시 화났어요?

희원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기준은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희원 씨한테 화를 내요.”

―저는 그냥…….

희원의 망설이는 듯한 말투에 기준은 채근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저는 그냥 기준 씨랑 있으면 어디든 좋아요.

“하아, 진짜 졌다. 졌어.”

―네?

“보고 싶어 죽겠어요.”

조금 전 유치원에서 희원에게 랑일이를 받아서 집에 돌아온 지 이제 세 시간도 안 됐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끼리끼리라고.

―저도 보고 싶어요.

누가 들으면 며칠은 못 본 연인 같지만 사실 둘은 거의 매일 보고 있었다.

“사랑해요, 희원 씨.”

―저도요, 잘 자요.

둘은 잘 자라고 해 놓고도 한참을 통화한 뒤 끊었다.

* * *

랑일이는 차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강원도 별장으로 휴가 갈 거라는 말에 랑일이는 곧바로 만세를 외치고는 제 아빠의 다리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연신 ‘아빠 최고!’를 외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당일 아침이 되자 랑일이는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기준을 깨우기 시작했다. 빨리 일어나서 가자고 채근하는 바람에 기준은 예상보다 일찍 깼다. 랑일이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세수를 하고 식탁 앞에 앉아 기준을 기다렸다.

기준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밥과 국을 준비해서 랑일이와 아침 식사를 했다. 점심은 별장에 도착해서 먹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아침을 먹자 랑일이는 기준이 설거지를 하며 정리하는 동안 이를 닦고 옷을 골랐다. 옷은 당연히 희원이 사 준 거였다.

랑일이는 평소 유치원 원복과 체육복을 입으니 사복을 입을 날이 손에 꼽혔다. 그럴 때마다 랑일이는 꼭 희원이 사 준 옷을 고집했다.

그 사실을 알고 희원이 며칠 전에 또 새로 옷을 선물해 주었다. 기준은 애 버릇 나빠진다고 한사코 말렸지만 희원은 그럼 기준도 자신에게 옷 사서 선물하는 거 그만하라고 하는 바람에 할 말이 없어졌다.

결국 기준은 왜 선물을 둘이 주고받아야지 이상한 방향으로 주는 게 흘러가냐고 또 볼멘소리를 해서 희원이 아들에게 질투 좀 그만하라고 퉁바리를 놓았다.

“랑일아, 그렇게 좋아?”

“응!”

“그럼 우리 랑일이 위해서 선물을 하나 더 줘야겠다.”

“선물?”

기준이 선물을 준비했다는 말에 랑일이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자, 다 왔다!”

“어! 선생님이다!”

창밖에 보이는 희원의 모습에 랑일이의 목소리가 단번에 커졌다.

희원과 기준은 랑일이가 조금 더 기뻐했으면 하는 마음에 둘이 랑일이에게는 당일 아침까지 비밀로 하기로 했다. 전혀 언질을 안 해 주고는 여행 가는 날 아침에 기준이 희원을 데리고 가는 것으로 입을 맞춘 상태였다.

뒷좌석을 열고 희원이 랑일이 옆에 자리했다.

“랑일아, 안녕?”

희원이 인사를 건넸는데도 랑일이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기준이 희원의 가방을 트렁크에 넣고 운전석에 앉으며 재촉했다.

“랑일아,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선생님, 안녕하세요. 근데 선생님 우리 차에 왜 탔어요?”

아직도 어리둥절한 랑일이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선생님도 랑일이랑 여행 가려고.”

“응? 아빠! 선생님도 우리랑 여행 간대!”

랑일이가 놀란 눈으로 제 아빠를 쳐다봤다. 기준이 랑일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응, 선생님이랑 같이 가는 거야.”

랑일이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우아! 우아! 우아아아아!”

랑일이가 별안간 소리를 지르더니 희원을 바라보며 그렇게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준은 좋아하는 랑일이의 모습에 따스하게 웃음 지은 반면 희원은 한쪽 가슴이 찡해 왔다.

“랑일아, 그렇게 좋아?”

“네!”

희원이 랑일이를 꼭 안아 주고는 이마 여기저기에 입을 맞춰 주었다.

“자, 이제 출발할게요.”

기준이 그 말로 셋의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랑일이는 그저 좋아서 가는 길에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그러다가 30분 정도 지나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이 들자 기준이 거울로 희원을 바라보고는 물었다.

“휴게소 갈래요?”

“저는 괜찮은데 기준 씨 운전하느라 힘들죠. 제가 운전할까요?”

기준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운전하는 거 안 힘들어요. 괜찮아요. 근데 희원 씨가 옆에 앉았으면 좋겠어요.”

“랑일이 깨면 어쩌려고요. 대신에 올라올 때는 제가 랑일이한테 잘 말해서 조수석에 앉을게요. 응?”

꽁했던 마음이 희원의 말에 사르르 풀렸다.

“대신에 이거 줄게요.”

희원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운전석과 조수석 가운데에 있는 컵 홀더에 놓았다. 커피였다.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차가운 커피.

“이게 뭐예요?”

“기준 씨 주려고 타 왔어요. 근데 혹시 산미 들어간 거 싫어해요?”

희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기준이 빙긋 웃었다. 그동안 자신과 커피를 마시러 간 게 몇 번인데. 분명 희원은 기준의 취향을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묻는 게 분명했다.

“제 취향 알잖아요.”

“네, 그래도 혹시 몰라서요.”

“나랑 희원 씨랑 커피 취향 똑같아서 그동안 내가 좋아했는데.”

보통 산미보다 고소한 맛을 많이 찾곤 한다. 하지만 기준은 산미가 들어간 커피를 좋아하는데 희원이 커피 종류를 고를 때 같은 것을 고르는 것을 보며 반가워했다.

“잘 마실게요.”

기준은 부드럽게 운전하면서 희원이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기준 씨, 근데요. 저 정말 그냥 몸만 오면 되는 거 맞아요?”

“희원 씨, 지금 나 못 믿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또 다른 거 뭐 준비할 거 없나 해서요.”

“그냥 몸만 가면 돼요. 가면 장도 다 봐 놓고 준비 다 되어 있어요.”

별장 관리인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가면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는 상태인데 희원은 그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지 계속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희원 씨가 같이 휴가 가 주는 게 저한테는 가장 감사한 일이에요. 어쩌면 희원 씨가 친구들하고나 가족들하고 보내고 싶을 수도 있는데 저랑 랑일이한테 시간 내준 거잖아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만약에 기준 씨 휴가 가는데 저랑 안 갔으면 저 서운해했을 거예요. 저야말로 고마운걸요.”

기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게 거울로 보였다. 거울 너머로 서로 시선이 마주했을 때 기준이 툭 말을 내뱉었다.

“예뻐 죽겠다 정말. 휴가 끝나고 올라갈 때는 꼭 조수석에 앉아요. 뽀뽀도 못 하고 정말 미치겠어요.”

희원은 얼굴만 붉히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차가 막혀서 정체되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촉 하고 볼에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 * *

어젯밤은 고기를 구워 먹고 신나게 떠들며 놀다가 셋이서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랑일이는 기준보다 희원의 품이 더 좋은지 희원에게 바짝 붙어서 그의 옷자락을 손에 꼭 쥐고 잤다. 기준은 그런 랑일이가 귀엽기도 하면서도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것에 대해 씁쓸하게 웃었다.

잠에서 일찍 깬 기준은 커다란 창을 톡톡 두드리고 있는 가느다란 빗방울을 보며 일기예보를 검색해 보았다. 다행히 오전에 잠깐 비가 내리고 말 모양이었다. 별장 뒤에 산책로가 있으니 비가 그치면 셋이서 산책로를 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곤히 잠든 두 사람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고는 기준은 손을 뻗어서 희원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러고는 이불을 끌어서 두 사람을 잘 덮어 주었다.

여름날이지만 강원도의 아침은 선선했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기준은 두 사람이 여름 감기에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싶어 다시 한번 이불을 정리해 주고는 자신은 발코니로 나갔다.

별장은 이층집으로 되어 있는데 침실이 있는 위층에는 탁자가 놓여 있는 발코니가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줄곧 담배를 태우곤 했는데 랑일이가 생기고 난 뒤에는 금연에 성공했기에 기준은 그저 바깥 공기를 쐬러 창문을 열고 나갈 뿐이었다.

빗줄기가 싱그러운 정원을 적시고 있었다. 기준은 정원을 내려다보며 자신에게 생긴 여유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비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는데,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리더니 그대로 기준의 등에 누군가가 달라붙었다.

“잘 잤어요?”

“네에. 잘 잤어요?”

기준은 희원이 행여 춥기라도 할까 봐 그를 자신의 앞으로 데리고 와서 뒤에서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넓은 품에 쏙 들어간 희원이 헤실헤실 웃었다. 아직 잠이 덜 깨어 몸 여기저기 잠이 잔뜩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랑일이 때문에 잘 못 잔 거 아니에요?”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랑일이는 집에서는 기준과 따로 자면서 이곳에 와서는 꼭 희원의 옆에서 붙어 자려고 해서 기준이 어제 곤란해했다.

“괜찮아요. 옆에서 누가 자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 늘 형하고 자던 버릇이 있어서요.”

기준은 솔직히 누군가와 같이 자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방이 따로 있었고 독립된 공간 속에서 자라 왔기에 오히려 기준은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하는 게 불편하고 어색했다.

“기준 씨는 같이 자는 거 괜찮았어요? 혹시 잘 못 잔 거 아니에요?”

희원이 기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기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마에 촉 입을 맞췄다.

“희원 씨랑 꼭 끌어안고 자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어요.”

“정말요?”

“응, 정말요.”

기준이 다시 입을 맞췄다. 기준은 지난번 희원의 히트사이클 때 함께 시간을 보내고는 자신도 놀랐다. 희원과는 같이 공간을 쓰는 게 전혀 불편하거나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희원에게 답한 것처럼 그와 같이 자고 싶었는데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아들 때문에 조금, 아주 조금 섭섭했다.

“비가 오네요.”

희원이 손을 뻗어서 빗방울을 손에 모았다. 기준이 그 손을 천천히 잡았다.

“감기 걸려요.”

희원이 눈을 휘며 웃었다. 미소에서 사르르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기준이 희원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몸이 차요. 들어가요.”

기준의 따스한 미소에 희원이 발꿈치를 들어서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발코니 창 너머로 이불에 푹 파묻힌 랑일이가 꼼질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기준이 문을 열고 먼저 희원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자신의 등 뒤에서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 보이는 기준이 창에 비쳐 희원이 다시 한번 웃었다.

“선생님!”

랑일이는 깨자마자 희원을 찾았다. 그러더니 밥을 먹을 때에도 소파에 앉아 있을 때에도 희원의 옆자리를 차지하고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랑일아, 우리 산책하러 갈까?”

“좋아요!”

랑일이가 자기를 안아 달라는 듯 팔을 높이 들었다.

“산책은 걸어서.”

기준이 딱 잘라 말하자 랑일이가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아빠 미워!’를 온 얼굴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기준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희원이 곤란한 듯 웃으며 랑일이 귀에 속삭였다.

“조금 걷다가 힘들면 이야기해 줘. 그러면 안아 줄게.”

희원의 말에 랑일이가 그새 얼굴을 풀고는 배시시 웃었다. 웃는 모습이 기준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희원은 그저 랑일이 이마에 촉촉 소리가 나도록 입 맞춰 줄 뿐이었다.

기준의 얼굴이 점점 불퉁해지는 것 같아서 희원은 오늘 저녁에는 랑일이를 조금 일찍 재우고 기준을 많이 사랑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남몰래 가졌다.

온통 초록색인 산책로를 세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랑일이는 왼손에는 희원의 손을, 오른손에는 기준의 손을 잡고는 신나서 들썩거렸다.

“랑일아, 바닥 조심해야 해. 비가 와서 미끄러워.”

“네!”

병아리같이 조그만 입술로 종알거리다가도 희원이 이야기하면 랑일이는 귀를 쫑긋거리고는 귀담아들었다. 그러고는 아빠에게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미운 짓을 골라 하면서도 희원에게는 바로바로 긍정의 대답을 내놓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게 꼭 자신을 예뻐하라는 표정 같았다.

산책로는 언덕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그리 경사가 높지 않은 편이라서 랑일이도 곧잘 올라갈 수 있었다.

“선생님, 안아 주세요.”

정작 올라갈 때는 씩씩하게 올라가 놓고는 별장으로 다시 돌아갈 때는 랑일이가 희원에게 여지없이 팔을 뻗었다.

“언덕 내려가는 거라서 안 힘들잖아.”

기준의 말에 랑일이가 뚱하게 쳐다봤다. 희원이 부자간의 싸움을 애초에 종식시키려는 듯 얼른 랑일이를 들어 안았다. 랑일이가 이겼다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을 하고는 기준을 힐긋 쳐다봤다. 그러고는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희원이 기준을 바라보며 눈으로 아들하고 싸우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다. 그에 기준은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희원은 그런 기준이 밉지가 않고 귀여워서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비 와서 바닥 미끄러우니까 조심히 가요.”

“네.”

“랑일이 무거우면 내려놓고요.”

“괜찮아요.”

랑일이가 희원의 목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기준은 반 발자국 뒤에서 혹시라도 희원이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워서 둘을 잘 지켜보며 걸었다.

“어!”

비에 젖은 나뭇잎을 밟는 바람에 희원이 휘청거렸다. 기준이 뒤에서 얼른 희원과 랑일이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랑일아, 괜찮아? 우리 애기 괜찮니?”

“희원 씨, 괜찮아요?”

기준이 얼른 품에 안은 덕분에 둘 다 넘어지지 않았지만 희원은 랑일이를 품에 안고 있었기 때문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서 랑일이부터 챙겼다.

반면 기준은 희원부터 챙겼다. 랑일이부터 챙기지 않은 것은 희원을 더 좋아해서가 아니라 희원이 랑일이를 엄청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믿고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온 반응이었다.

“선생님, 나 괜찮아요.”

랑일이가 희원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희원의 품에서 내려와서 희원을 올려다봤다. 희원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랑일이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 애기 많이 놀랐지. 미안해.”

랑일이가 고개를 젓고는 희원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선생님이랑 있어서 나 안 놀랐어요.”

“그래, 다행이다. 제가 랑일이 안고서 휘청해서 놀라셨죠. 죄송해요.”

랑일이 상태를 확인한 희원이 기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기준은 재빨리 고개를 저어 희원을 안심시킨 뒤 랑일이를 보며 말했다.

“랑일아,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히 걸어서 가자.”

“응! 근데 아빠.”

“응?”

랑일이는 더 이상 떼쓰지 않고 기준의 손과 희원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 뭔가 궁금한 게 있다는 듯 제 아빠를 쳐다봤다.

“근데 아빠는 왜 선생님 이름 불러?”

기준이 무의식적으로 희원을 먼저 찾는 순간이었다.

* * *

박 여사는 찻잔을 앞에 두고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지금 한가하게 차나 마시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박 여사는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때문에 늘 숨이 막혀 왔다. 그래서 막내가 방싯방싯 웃으며 곰살맞게 굴 때마다 있는 정 없는 정 다 퍼 주다 보니 그게 어느새 과잉이 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막내아들은 제 형들과 다르게 제멋대로 컸다. 즉, 박 여사의 자식 농사는 가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중 기준은 어찌나 이 회장의 성깔머리를 갖다가 박았는지 어미인 박 여사가 보다가도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차갑기로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요새 그런 작은아들, 이기준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박 여사도 느끼고 온 집안 식구들이 죄다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들려온 소식이 기준이 강원도 별장에서 휴가를 지내겠다고 했다는데, 랑일이와 단둘이 오려고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별장을 관리하는 관리인은 박 여사가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준을 보필하고 있는 원 실장은 원래 이 회장의 비서로 있던 이였다. 박 여사는 이 두 사람에게서 기준이 휴가를 가기 위해 일정을 뺐다는 소식과 별장에 먹을거리를 준비하라고 했는데 그게 두 명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흠…….”

그런 소식들을 접했을 때, 박 여사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랑일이 유치원 선생님. 왜 그 선생님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엄마 된 이의 감이랄까?

며칠 전 갈빗집에서 마주한 셋을 박 여사는 기억한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게 있다. 바로 다름 아닌 박 여사 본인의 아들내미 이기준이었다.

아들의 성격을 잘 아는 엄마인 박 여사는 이씨 집안 차남, 이기준이 절대 타인과 같이 식사를 할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미팅과도 같은 업무상의 이유가 아니면 절대 자신의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미팅이라고 해도 차나 마셨지, 오붓하게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 이가 이기준이었다.

이씨 집안의 막내 이해준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형제는 성미가 까탈스럽고 차가웠다. 타인에게 신경 쓰는 것을 상당히 귀찮아했다. 그중 기준은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박 여사는 기준의 결혼이 파투 난 뒤 더 이상 집안에 아들의 배우자로 들어올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이 요즘 이상했다. 결국 박 여사는 그나마 찌르면 뭐라도 불 해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문제는 이야기의 화제가 이기준이라서 평소에는 종알거리기 좋아하는 이해준이라도 쉽게 말해 줄 것 같지가 않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 * *

숯불 위에 놓인 고기가 자글자글 기름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랑일이는 희원의 허벅지에 앉아서 먹음직스럽게 익고 있는 고기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맛있는 냄새 난다, 그치?”

희원이 랑일이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이니 랑일이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을 자랑하고 있는 고기가 숯으로 피운 불판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어 둘은 군침을 흘렸다.

기준은 희원의 손에 물 한 방울 묻히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희원이 집게를 잡으면 어느새 희원을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혀 놓고 집게와 가위는 자신이 가지고 갔다. 채소라도 씻을라치면 그런 건 애초에 씻어 놓았다며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만 했다.

“자, 드세요.”

접시에 한가득 고기를 쌓아서 둘의 앞에 밀어 주자 희원이 호호 불어서 랑일이 입 속에 쏙 넣어 주었다. 랑일이가 엄지 두 개를 척 들어 올리며 희원을 보고 웃었다.

“아빠가 고기 맛있게 구워 주셨잖아. 아빠한테 잘 먹겠다고 인사해야지.”

희원이 랑일이에게 말하자 랑일이가 희원을 보며 배시시 웃을 뿐 제 아빠에게는 건성으로 엄지 한 개만 들어 올려 줄 뿐이었다. 기준은 그런 랑일이를 보며 아들자식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희원은 상추에 고기를 얹고 맛있게 싸서 그대로 기준에게 가져갔다.

“좀 드세요.”

희원은 당연히 기준이 쌈을 손으로 받을 줄 알았는데 기준은 가위와 집게를 양손에 쥐고 보여 주며 말했다.

“손으로 잡을 수가 없는데요?”

“네? 그럼 어떻게…….”

“아.”

기준이 입을 벌리고 그 속으로 집어넣어 달라는 시늉을 했다. 도리어 희원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어서요.”

기준이 다시 재촉했다. 희원은 손을 뻗어 얼른 기준의 입 속에 쌈을 넣어 주고는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랑일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

희원이 놀라고 당황해서 말을 더듬을 때였다.

“선생님, 나도요! 나도 아!”

랑일이가 참새 부리 같은 입술을 벌리고 몸을 내밀었다. 희원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얼른 랑일이 입 속에 고기 한 점을 더 넣어 주었다. 오물오물 씹는 모양새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기준이 그런 랑일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랑일이에게 제 아빠는 안중에도 없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난 뒤에도 기준은 희원과 랑일이에게 과일을 주며 자리에 앉아 있게 했다. 희원이 자기가 치우겠다고 했지만 기준은 웃으며 거절했다.

“저도 잘할 수 있어요.”

“알죠, 손끝 야무진 거. 근데 굳이 여기까지 나와서 그런 일 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제가. 휴가잖아요.”

“그치만 저만 휴가인 건 아니잖아요.”

희원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기준은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희원은 유치원에서도 아이들을 돌보느라 바빴다. 늘 손에 물을 묻히고 아이들을 챙겼다. 유치원이 어린이집에 비해서는 교육적인 부분을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희원이 여태 주로 맡았던 만 3세는 여전히 손이 많이 갔다. 그래서 기준은 희원이 자신과 있을 때만이라도 좀 편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기준을 도우려고 하는 희원을 보며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아마 랑일이가 없었다면 기준은 진작 희원의 얼굴을 잡고 여기저기 입을 맞췄을 게 분명했다.

“정 그러면 랑일이 목욕시켜 줘요.”

목욕이라는 소리에 랑일이 눈이 반짝 빛났다. 랑일이는 희원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어서 욕실로 가자고 말이다.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랑일이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따듯한 물을 틀어 욕조에 받아서 그 속에 랑일이를 앉혀 주었다.

아이들은 머리 감는 거 싫어하는데 랑일이는 머리를 감겨 줄 때도 그저 희원의 옷을 붙잡고 눈을 꼭 감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몸을 닦아 줄 때는 발가락이나 옆구리, 겨드랑이를 만질 때마다 까르르 웃으며 희원의 품속에 파고드는 바람에 희원의 옷이 온통 젖고 말았다. 하지만 희원은 그런 것쯤은 괘념치 않고 랑일이와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을 목욕 놀이 중이었는데 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기준이 문을 열었다.

“랑일이 이제 나와서 코해야지.”

“으응응.”

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랑일이는 이렇게 중간에 끊지 않으면 하루 종일 욕조에 앉아 있을 애였다. 그걸 너무나 잘 아는 기준이 고개를 젓는 랑일이를 보고는 다시 말했다.

“지금 안 자면 내일 못 노는데.”

“싫어. 선생님하고 놀 거야.”

목욕하는 랑일이를 욕실에서 빼내 잠을 재우는 건 기준이 늘 난항을 겪고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기준이 또 시작이라는 표정을 짓다가 온통 물에 흠뻑 젖은 희원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랑일아, 선생님 저렇게 물에 젖어 있으면 나중에 감기 걸릴 수도 있는데?”

기준의 말에 랑일이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놓칠세라 희원도 덧붙였다.

“랑일아, 우리 나가서 조금 더 놀고 코할까? 물에 오래 있으면 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나가서 놀자.”

랑일이는 조금 더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선생님하고 잘래요.”

“그래!”

희원은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는 커다란 타월로 그대로 랑일이를 품에 안았다. 그에 기준이 팍 인상을 찌푸렸다.

한참을 희원과 놀던 랑일이는 어느새 희원의 품에서 곤히 잠들었다. 희원은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연신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랑일이 자요?”

“네.”

중요한 전화인지 발코니에서 한참을 통화를 한 뒤 기준이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희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 안겨 있는 랑일이를 조심스레 팔에서 빼어 눕혔다. 그러고는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랑일이는 뭔가 허전한 듯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에 희원이 이불을 살짝 쥐여 주니 그새 다시 편안한 표정으로 잤다.

“무슨 일 있어요?”

오랜 통화에 걱정이 된 희원이 살짝 물어보자 기준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일요일까지 희원 씨랑 느긋하게 좀 놀려고 했더니 회사에서 전화가 와 버렸네요.”

희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밤중에요?”

“그러게요. 콘텐츠 팀 부장인데 휴가 중인데도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 대네요. 회사 그만둘까 봐요.”

“네?”

워커홀릭인 이기준에게 그깟 밤중에 전화가 오는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워커홀릭이 이제는 과거형이 되었다는 거였다.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밤이건 새벽이건 상관없이 전화를 받고 보고를 받았으며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기준에게는 희원과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중요하게 되었다.

“아니 어떤 회사가 휴가 중인 사람한테 전화를 하냐고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거 나중에 너님 회사 아닌가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괜히 자신의 옷매무새만 내려다봤다.

“그래서 혹시 회사 가야 해요?”

희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기준이 난처한 듯 망설이며 말했다.

“토요일에 잠시 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같이 보내려고 했는데, 오전에 가서 일 처리하려면 금요일 밤에는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랑일이도 본가에 맡겨야 하고요.”

기준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희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기준 씨 잘못도 아닌데 왜 미안해하고 그래요. 괜찮아요.”

기준이 희원을 끌어다 자신의 품에 안았다.

“아까부터 이렇게 안고 싶은데 랑일이 녀석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참느라 힘들었어요.”

어리광 잔뜩 섞인 말에 희원이 그를 마주 안고는 넓은 등을 쓰다듬었다. 기준이 그에 조금 더 힘을 줘 희원을 껴안았다.

“혼자 고기 굽고 설거지하고 정리하느라 고생했어요. 기준 씨 덕에 잘 먹었어요.”

“희원 씨는 평소에 에너지도 많이 소비하고 마른 편이기도 해서 많이 먹어 둬야 해요.”

“그러다 살찌면 어쩌려고요.”

“뭐 어때요? 그리고 희원 씨는 어떻게 해도 예쁠 텐데요, 뭘.”

기준이 조금 몸을 떼고는 희원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하자 희원이 배시시 웃었다.

“어쩜 이렇게 예쁘지?”

그 말에 희원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응? 말해 봐요, 누구 애인인데 이렇게 예뻐요?”

희원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기준의 어깨에 숨겼다. 기준이 희원의 얼굴을 찾아 다시 입을 맞췄다.

“대답해 봐요, 응? 누구 애인인데 이렇게 예쁘냐니까요?”

희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기준의 옷자락을 죽 잡아당겼다. 기준이 그런 행동까지도 어여쁘다는 듯 다시 얼굴 이곳저곳 입을 맞췄다.

“희원 씨.”

“네?”

“나 벌써 이렇게 됐는데 어쩌죠?”

“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희원이 멀뚱한 얼굴로 기준을 쳐다봤다. 그러자 기준이 희원의 손을 끌어당기고는 어느 곳으로 가져갔다.

손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희원의 하얀 얼굴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기준이 웃으며 희원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아, 아파요.”

“아파요? 나도 아파요. 여기 터질 것 같아.”

“기준 씨이.”

희원이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기준은 조금 더 희원의 손을 잡아당겨서 자신의 중심부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속삭였다.

“우리 같이 씻을까요? 응?”

희원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기준이 그대로 희원을 안아 들었다. 희원은 부끄러운 마음에 기준의 목에 팔을 걸고는 얼른 그의 가슴에 얼굴을 숨겼다.

“춥지는 않아요?”

욕조 안에 희원을 앉히고 뒤에 자리한 기준이 희원의 목덜미에 짧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왜요? 추워요?”

대답을 하지 않자 계속해서 쪼는 듯 입을 맞추며 귓가에 속삭이다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희원이 어깨를 움츠리며 기준에게 도망치듯 앞으로 몸을 숙였다.

“아뇨, 간지러워서요.”

“우리 희원 씨는 군데군데 죄다 성감대인가 봐요.”

“성감대가 아니라, 아읏.”

기준이 놀리듯 또다시 귓불을 핥다가 깨물었다. 희원이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부르르 떨었다.

“놀리지 마요.”

“놀리긴요. 잘 느껴서 예쁘다고 그러는 건데.”

이제는 혀를 내어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아으, 기준 씨.”

“이것 봐요. 벌써 예쁘게도 섰네.”

기준이 앞으로 손을 뻗어서 희원의 성기를 한 손에 쥐었다. 꼿꼿하게 머리를 쳐든 성기를 꽉 쥐었다가 힘을 빼고는 귀두를 엄지로 확 긁었다.

“아읏!”

“쉬잇, 그러다 랑일이 깨겠어요.”

“아으, 그치만. 자꾸 기준 씨가 그러니까…….”

희원은 혹시라도 제 목소리가 잠든 랑일이 귀에 들릴까 걱정이 되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자 기준이 그건 안 된다는 듯 성기를 잡지 않은 다른 손을 가져와 이로 잘근거리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러 뺐다.

“입술 깨물면 안 돼요.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치만… 으읍.”

기준이 그대로 희원의 얼굴을 돌려서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맞춤에 희원이 눈을 꼭 감았다. 기준이 알파 페로몬을 조금 흘리자 희원이 허겁지겁 몸을 돌려서 기준의 목에 팔을 둘렀다. 밤은 짧은 듯하지만 연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습한 욕실에는 더운 향이 가득했다.

기준은 희원을 욕조 턱에 앉히고는 가랑이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희원이 본능적으로 기준의 어깨를 밀었지만 기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희원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흐읏.”

“기분 좋게 해 줄게요.”

지금도 충분히 머리가 아플 정도로 쾌락에 젖은 상태였는데 여기서 무얼 더 하려고 하는 건지 희원은 자꾸만 몸이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기준이 단단하게 받치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읏, 기준 씨. 잠깐, 잠깐만요!”

기준은 입을 벌려서 바짝 선 성기를 그대로 담았다. 말랑하고 따듯한 입 안이 성기를 옥죄는 느낌에 희원이 등을 둥글게 말았다. 아랫배가 꽉 뭉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자 기준이 양손에 쥔 엉덩이를 살살 달래듯 부드럽게 주물럭거렸다.

“흐읏. 으으.”

희원은 눈앞에 보이는 음란한 광경에 눈을 꾹 감았다. 자신의 성기를 입에 문 기준이 턱을 움직이며 성기를 압박했다. 목구멍까지 집어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침이 주르륵 흐르며 찹찹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적나라해서 희원은 당장이라도 쌀 것만 같았다.

야한 광경을 볼 수가 없어서 희원이 기준의 어깨를 밀었지만 그럴수록 기준의 머리가 더 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온몸을 휘감는 알파 페로몬에 희원의 뒷구멍이 움찔거렸다. 이미 감각을 알고 있는 구멍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한 듯 기대감으로 오물거렸다.

“아, 아아! 이제 기준 씨, 그만!”

기준이 착하게도 입에서 성기를 꺼내 주었다. 희원은 이때까지만 해도 기준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준은 그대로 희원을 뒤로 돌려서 방금까지 앉아 있던 욕조 턱을 팔로 괴고 기대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뒤로 빼게 했다.

“기준 씨?”

기준이 그대로 다리를 더 벌리게 하고는 엉덩이를 주무르더니 볼기짝을 양손으로 벌리고는 그 사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기, 기준 씨, 하지 아읏!”

지금은 히트사이클도 아니고 맨정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기준이 알파 페로몬을 노출시키며 가랑이 사이, 정확히는 뒷구멍을 혀로 핥으니 희원은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희원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얼굴을 숨기고 싶어서 하는 수 없이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으며 몸을 뒤챘다.

하지만 이기준이 어디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위인인가. 기준은 희원이 몸을 숨기려고 드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제는 노골적으로 뒷구멍을 빨기 시작했다.

춥춥, 게걸스러운 소리가 욕실을 메웠다. 희원의 성기는 꺼덕거리며 질질 울고 있었고 알파 페로몬에 젖은 뒷구멍도 번들거리며 잘생긴 기준의 콧대를 적셨다.

“제발, 제발요, 기준 씨.”

희원이 입술을 질근거리며 울음에 젖은 목소리를 냈지만 기준은 안 들리는 척 열심히 혀를 놀렸다. 조붓한 구멍 속에 혀를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는데 그게 마치 섹스의 축소판과도 같았다. 희원은 욕조 턱을 붙잡고는 바들바들 떨었다.

“흐읏, 기준, 흐, 제발.”

기준은 실컷 맛을 본 뒤에야 입을 떼고는 자신의 성기 끝을 구멍에 비비댔다.

“질척거리는 소리 들려요?”

그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기준은 희원의 목덜미를 빨며 서서히 새어 나오고 있는 오메가 페로몬을 깊게 들이마셨다.

“희원 씨 페로몬에 벌써부터 내 자지 터질 것 같아요.”

평소에는 다정하고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이기준이 섹스하는 순간에는 온갖 욕망을 입으로 내뱉는다는 걸 희원은 히트사이클을 통해서 경험한 바가 있다. 벌써부터 오스스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기준이 손을 앞으로 뻗어서 희원의 귀두를 엄지로 슥슥 문질러 주었다. 욕실에 있어서 물이 묻은 건지, 아니면 여태 기준이 입 속에 처넣고 있어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벌써부터 질질 싼 건지, 질척질척한 액체가 기준의 손가락에 묻어났다. 기준이 희원의 귓불을 핥고는 속삭였다.

“우리 섹시한 희원 씨는 음란하기도 하지.”

“아흣. 기준 씨…….”

기준이 희원의 손을 잡아끌어다가 스스로 성기를 잡게 했다. 자신의 바짝 선 성기를 스스로 잡는 게 부끄러워서 희원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손등을 기준의 커다란 손이 덮고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알파 페로몬을 더 흘리자 희원이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미끈미끈한 액이 벌써 엉덩이 사이를 적시고 있었다.

“이제 넣어 줄까요?”

희원은 그 말뜻이 무언지를 알아채고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이 희원의 귓불을 잘근 깨물다가 다시 핥았다. 희원은 뒤에서 뭔가 새어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한번 졸라 봐요, 응? 듣고 싶어.”

“기준 씨…….”

누가 이런 이기준을 상상이나 할까? 늘 젠틀한 이기준이 이렇게 음란한 말을 흘리고 남을 곤란하게 한다는 것을 누가 알까? 희원은 이런 건 자신밖에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뒤로 뭔가가 왈칵 터졌다.

“지금 뒤로 조르는 거예요? 야해라. 바로 넣어 줄게요. 힘 빼 봐요.”

“으응, 아, 아읏!”

아무리 기준이 성심성의껏 희원의 뒤를 풀어 주었다고 해도 평균 크기보다 크고 두꺼운 성기가 안을 벌리고 들어올 때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귀두가 좁은 구멍 사이에 대가리를 들이밀 때 희원은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기준은 희원이 아픔을 느끼기보다는 쾌락을 느끼기를 원하며 손에 잡힌 희원의 성기 귀두를 살살 훑었다. 기준의 손 아래에 있는 희원의 손이 파드득 튀었다.

“힘 조금만 더 빼 봐요.”

“손, 손 좀…….”

기준이 손에서 살짝 힘을 풀어 주자 희원이 잽싸게 자신의 손을 뺐다. 그 바람에 희원의 성기는 오롯이 기준의 손안에 잡혀 들었다.

기준이 다른 쪽 손으로 희원의 유두를 둥글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희원은 기준이 어서 들어와 제 안을 채워 주기를 바라면서도 당장에 찾아온 아픔에 몸을 덜덜 떨었다.

“괜찮아요, 응?”

기준이 뒷덜미에 쪼듯 키스했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는 성기를 만져 주고 한 손으로는 유두를 조몰락거렸다. 희원이 조금 힘을 빼자 그대로 몸을 끌어당겨서 성기가 더 안쪽으로 파고들게 만들었다.

“흣!”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자 기준이 희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 들어갔어요.”

“으응.”

“움직일게요.”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기준이 뒤에서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준은 이미 마음은 흉포하지만 사랑하는 연인을 놀라게 하기 싫어서 최대한 자제하며 몸을 움직였다.

찰박찰박 물이 튀는 소리, 서로의 물기 어린 몸이 찰싹거리며 맞붙으면서 내는 소리가 그렇게 야살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 아아. 기준 씨, 천천히.”

“응, 그래, 읏, 요.”

하지만 아무리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고 참아도 자신의 성기를 꼭 옥죄며 더 달라고 조르는 내벽에 기준은 어쩔 수 없이 점점 몸짓이 빨라졌다. 희원이 천천히 해 달라고 애원해도 기준은 건성으로 대답할 뿐 전혀 몸과 말이 따로 놀고 있었다.

“으응, 응!”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걸 느낀 희원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입을 막았다. 그걸 알아차린 기준이 희원의 손을 내리고 대신에 자신의 손가락을 물렸다. 희원이 기준을 아프게 하기는 싫어서 고개를 도리질했지만 기준은 괜찮다는 듯 목덜미에 입술을 내리고 희원의 잇새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둘이 욕실에 들어온 지 시간이 조금 지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기준이 이제는 식어 빠진 물의 온도에 행여 제 연인의 체온이 떨어지는 건 아닌지, 그로 인해 감기라도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 어서 이 행위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더 많이 몸을 섞고 싶었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니 말이다. 기준은 절대 자신의 욕망과 욕심 때문에 희원을 다치게 하거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희원 씨.”

“읏! 네에. 아아.”

“물이 차요.”

“응? 아! 아읏.”

기준이 뒤에서 허리 짓을 더 빠르게 하니 희원이 기준의 손가락을 콱 물었다. 희원이 깜짝 놀라서 몸을 경직하는 순간에 기준이 희원의 몸을 잡고 자신에게서 뗐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서로의 성기를 잡고 비볐다.

빠른 손놀림에 희원의 몸이 점점 기준에게 쏟아졌다. 희원의 목소리가 욕실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기준은 그대로 입을 맞췄다. 더운 숨이 서로에게 섞이고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가며 둘은 서로의 몸에 정액을 쏟아부었다.

둘의 몸이 서로의 페로몬에 흠뻑 취하는 순간이었다.

* * *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한 어린 동물이 제 품을 파고드는 꿈을 꿨다. 희원은 기분 좋은 꿈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 지었다. 그러면서 그 어린 동물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으으응, 선생니임. 이제 일어나요오.”

귓가에 들리는 잔뜩 투정 섞인 음성에 희원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선생니임.”

랑일이 목소리였다. 꿈에서 어린 동물을 품속에 품었다고 생각했더니 아마 랑일이였던 모양이다.

“랑일아.”

“선생님, 이제 그만 자요.”

랑일이는 이제 희원의 품에 안기다 못해 희원의 배 위에 걸터앉을 참이었다. 그러고는 희원을 흔들어 깨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제 몸을 누르고 있던 따끈한 몸이 덜렁 들려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응?”

희원이 팔꿈치로 침대를 짚고 반쯤 몸을 일으키자 기준의 품에 반강제적으로 안긴 랑일이의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한테 갈래.”

랑일이가 내려 달라며 발을 굴렀지만 기준은 그대로 랑일이를 품에 더 꽉 끌어안았다.

“아빠한테도 뽀뽀해 줘야지.”

그러면서 랑일이를 내려놓을 기미가 전혀 없어서 희원이 피식 웃었다.

어젯밤 희원은 욕실에서 기준과 이리저리 몸을 섞은 뒤 축 늘어져서 침대 위에 올랐다. 기준이 희원의 몸을 씻기고 수건으로 뽀송뽀송하게 닦이고 새로운 옷을 입혀서 침대에 눕히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기준보다 체력이 약한 희원은 그저 피곤하기만 했다.

그렇게 금세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어서 정신없이 잤다. 그러고는 랑일이가 잔뜩 볼을 부풀리며 투정 부릴 때까지 자고 만 거다.

“이랑일, 우리 밥 먹으러 갈까?”

“선생님, 선생님도!”

랑일이는 아직도 미련이 남는지 희원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기준은 랑일이를 희원의 품에 안기는 대신 희원을 일으켜서 조심스레 욕실로 밀어 넣었다.

“밥만 푸면 되니까 세수만 간단하게 하고 나와요.”

랑일이가 선생님과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쓸까 봐 기준은 얼른 랑일이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희원은 살짝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어기적거리며 세면대 앞에 섰다.

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이제 막 한 고슬고슬한 밥 냄새가 코를 찔렀다. 희원을 발견한 기준이 따듯하게 웃으며 희원이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의자 위에는 어디서 났는지 방석이 놓여 있어서 희원의 귓불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희원이 작게 말하자 기준이 희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거 싫어서요. 앉아요. 밥 맛있게 됐어요.”

희원은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로 기준은 집안일을 잘하는 듯싶었다. 언제 이 음식들을 했을까 싶게 따듯한 국이며 찌개, 채소가 콕콕 박힌 달걀부침과 랑일이가 좋아하는 소시지볶음까지 희원과 랑일이 입맛에 맞춘 음식들이 즐비해 있었다.

“언제 했어요?”

“두 사람 자고 있을 때요.”

“피곤하지 않아요? 잠은 좀 잤어요?”

희원의 걱정 어린 눈길에 기준이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어서 먹으라는 듯 랑일이와 희원의 손에 숟가락을 들려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희원이 말하자 랑일이가 희원을 바라보며 똑같이 따라서 말했다. 희원이 랑일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잘 먹겠다는 인사는 아빠한테 해야지. 아빠가 만들어 주신 음식인걸.”

“잘 먹겠습니다!”

그제야 랑일이는 제 아빠를 보며 인사를 했다. 희원과 있는 내내 한결같은 랑일이를 보며 기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 사람은 밥을 다 먹고 난 뒤 디저트까지 먹었다. 랑일이는 주스를 앞에 놓고 발을 동당거리며 장난을 치고, 희원과 기준은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쉽지만 오늘 오후에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어젯밤 나누었던 내용이기에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랑일이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랑일이가 희원과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해맑은 표정에 희원이 마주 웃어 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랑일아.”

“네?”

랑일이가 자기 얼굴만 한 컵을 들고는 주스를 꿀꺽꿀꺽 마시며 눈을 맞췄다. 그 얼굴에 기준의 얼굴이 묻어나서 희원은 랑일이 이마에 무턱대고 입을 맞췄다.

“오늘 아빠 빠방 타고 집에 가야 하는데…….”

“오늘 일요일이에요?”

아직 날짜에 대한 개념이 확실치 않은 랑일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일요일까지가 방학이라고 들은 랑일이는 별장에 일요일까지 있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왜요? 왜 집에 가요?”

기준은 희원이 난처해하는 것 같자 자기가 끼어들어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을 맞춘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토요일에 아빠가 잠깐 회사에 가 보셔야 한대.”

그 말에 아니나 다를까 랑일이의 표정이 뚝 굳어 버렸다.

“그래서 랑일아, 토요일에는 집에서 선생님하고 놀자.”

놀란 건 랑일이뿐만이 아니었다. 기준의 눈도 랑일이 눈처럼 댕그래져서 희원을 쳐다봤다. 희원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학 동안 랑일이 신나는 거 많이 해야지. 그치? 아빠는 토요일에 잠깐 회사 갔다 오시지만 그동안 선생님하고 마트 가서 장도 보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러자.”

“진짜요?”

“저기 희원 씨.”

기준이 희원을 다급하게 불렀다.

“어때, 랑일아?”

여느 때는 기준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희원이 이번에는 랑일이에게 먼저 물었다. 랑일이는 망설일 것도 없이 그대로 희원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희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랑일이를 안전하게 받았다.

“선생님 좋아요! 나 선생님하고 놀래요!”

“그래, 랑일아. 선생님도 랑일이하고 노는 거 좋아.”

기준만이 안절부절못한 채 희원을 애타게 쳐다보며 자신과 눈을 마주할 것을 재촉했다. 희원이 랑일이를 꼭 끌어안고 작은 머리통에 얼굴을 비비며 기준을 바라보자 기준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괜히 랑일이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요. 랑일이는 본가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면 되니까 괜히 희원 씨 시간 빼지 않아도 돼요.”

기준의 말을 듣자 랑일이가 온몸으로 거부하듯 더욱 희원에게 폭 안겼다. 희원은 랑일이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며 기준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괜찮아요. 저도 랑일이랑 놀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기준과 일요일까지 함께 있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랑일이가 있어서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눈빛으로만 기준에게 말할 뿐이었다. 기준은 희원의 눈빛을 보는 순간 입꼬리를 올리며 개구지게 웃어 버렸다.

“어? 알아들었어요?”

기준의 표정이 마치 다 알겠다는 듯해서 희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고 말았다. 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 마신 컵을 챙겨 들었다. 컵을 개수대에 내려놓고 희원의 품속에 있는 랑일이를 떼어 내 바닥에 내려 주었다.

“가서 이 닦아야지. 안 그러면 벌레가 이를 다 먹어 버릴 거야.”

요즘 자꾸 단 거를 먹으려고 하는 랑일이에게 기준은 치과에 가는 토끼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토끼가 아픈 이를 끙끙거리며 치과에 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박혔는지 다행히 랑일이는 양치는 잘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이 닦으라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군소리 없이 욕실로 향했다.

“그렇게 나랑 있고 싶었어요?”

랑일이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기준이 희원의 뺨을 어루만지며 놀리듯 물었다. 희원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시선을 피하자 기준이 그대로 입술에 촉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런 마음 갖고 있으면 내가 예뻐 죽지. 안 그래요?”

“같이 있고 싶은데 어떡해요.”

“오늘 서울 올라가서 우리 집에서 주말 내내 있을 거죠?”

희원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응? 대답해 봐요. 그러면 집에 갔다가 토요일에 올 생각이었어요?”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 봐서…….”

“어차피 일요일까지 휴가잖아요. 일요일까지 우리 집에 있다가 저녁에 집에 가면 안 돼요? 응? 내가 집까지 잘 모셔다드릴게요, 내 애인님. 응?”

애인님이라는 단어에 희원의 얼굴이 단박에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기준은 그저 귀엽다는 듯 여기저기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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