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둘만 모르는 플러팅
기준은 회사에 있을 수 있는 만큼 있다가 결국 랑일이를 데리러 퇴근길에 올랐다. 회의만 제대로 끝났으면 가뿐한 마음으로 일찍 퇴근할 수 있었는데 여러모로 마음이 좋지 못했다.
여전히 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기준은 차를 회사에다 두고 걸어서 유치원으로 향했다. 랑일이를 데리고 차가 있는 회사까지 둘이 걸으며 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네, 랑일이 아버님.
“선생님, 오늘 아침에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곤란하셨죠.”
―아니에요.
“다름이 아니라 랑일이가 아침에 비옷이 갖고 싶다고 했는데 그게 없어서요.”
희원이 작게 웃었다.
―안 그래도 랑일이가 이야기했어요. 윤이랑 똑같은 거 입고 오고 싶었대요.
“그래서 지금 퇴근길에 비옷을 좀 사 가려고 하는데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고 기준은 말하려고 했다. 회사에 있을 때 원 실장을 시켜서 얼마든지 비옷을 사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랑일이에 관련된 건 기준이 직접 하고 싶었다.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천천히 오세요. 랑일이랑 놀고 있을게요.
희원이 먼저 말해 준 덕분에 기준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기준은 희원에게 윤이가 입은 비옷이 뭔지도 정보를 알아내서 똑같은 것을 사러 갔다. 그러고는 서둘러 유치원으로 향했다.
“아버님, 오셨어요.”
유치원에 도착하니 랑일이는 희원의 품에 안겨서 잠들어 있었다.
“랑일아, 이랑일.”
기준이 랑일이의 등을 도닥이며 깨우려고 했다. 그러자 희원이 말렸다.
“아버님, 괜찮아요. 깨우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안고 있으면 이 녀석 꽤 무거운걸요.”
희원은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말을 덧붙였다.
“랑일이가 친구들 하원하는 동안에 혼자서 그림책 한 권을 봤어요. 근데 그게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이야기였거든요. 오늘 기분이 계속 별로였는데 그 책 보고 결국엔 또 울음이 터졌어요. 그러고는 그때부터 저한테 안겨서 떨어지질 않다가 이제 막 잠들었어요.”
그 얘길 듣는데 기준은 마음이 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랑일이를 희원에게 안고 있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랑일아, 이랑일.”
기준이 희원한테서 랑일이를 떼어 놓으려고 하니 랑일이가 잠결임에도 또 울먹울먹하면서 희원을 꼭 끌어안았다. 기준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버님, 괜찮으시면 제가 랑일이 안고 차 있는 데까지 갈게요.”
“선생님 힘드실 텐데요.”
“괜찮아요. 그리고 차 회사에 세워 두셨다면서요. 비 오는데 혼자서 랑일이 안고 우산 쓰고 그렇게 가시기 힘들어요.”
결국 기준이 랑일이 짐을 챙겨서 들고 우산을 들었다. 그러고는 랑일이를 안은 희원과 같이 우산을 썼다.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둘은 그렇게 같은 우산을 쓰고 길을 걸었다. 랑일이를 안은 희원에게 우산을 기울이느라 기준의 한쪽 어깨가 다 젖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다. 랑일이를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쪼개고 마음을 써 주는 희원을 위해서라면 온몸이 다 젖는다고 해도 기준은 상관없었다. 비록 몸은 젖었지만 마음은 따듯해져 옴을 기준은 느끼고 있었다.
원래는 사 온 비옷을 입히고 같이 주차장까지 걸어가며 마음을 풀어 주려고 했는데 랑일이가 자는 바람에 걸어서 10분 정도 되는 길을 희원이 안고 오게 되었다. 10분은 그리 먼 길은 아니었지만 비가 많이 오는 데다 랑일이까지 안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평소보다 더 걸렸다.
주차장에 도착하도록 랑일이가 희원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는 바람에 결국 희원은 차 앞에까지 오게 되었다.
기준은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랑일이를 뒷좌석에 앉히려고 했다. 그러자 랑일이가 언제 잤냐는 듯 눈을 번쩍 떴다.
“랑일아, 깼어?”
희원이 잠에서 깬 랑일이를 내려 주려고 하자 랑일이가 이제는 희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랑일아, 선생님 가셔야지.”
“선생님, 가지 마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희원보다 기준이 더 당황해서 희원을 쳐다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희원이 곤란해하는 기준을 보며 괜찮다는 듯 웃었다.
“랑일아, 이제 집에 가서 밥 먹고 코 자야지.”
희원이 랑일이의 등을 토닥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선생님이랑 같이 밥 먹을래요.”
그동안 안 썼던 떼를 오늘 몰아 쓰려고 하는지 랑일이는 다른 날과 달리 유독 심하게 굴었다. 기준은 안 되겠다 싶어서 희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 고생하셨는데 아직 저녁 전이시면 같이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실래요?”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랑일이가 더 좋아했다. 희원의 목을 내내 끌어안고 있던 손을 놔주며 박수를 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모습을 보고는 희원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희원과 랑일이를 뒤에 태우고 자주 가곤 하는 조용한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기준은 가는 중에 직접 한정식집에 예약을 했다.
“선생님, 고기 맛있어요.”
잠에서 다 깬 랑일이가 차에서 내려서 한정식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방긋방긋 웃었다. 희원과 오면서 기분이 풀렸는지 기준과 똑같이 생긴 눈으로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희원은 커다란 고급 한정식집을 바라보며 살짝 부담감을 느꼈다.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랑일이 때문에 고생하셨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요.”
마치 희원의 생각을 읽은 양 기준이 말했다. 물론 희원의 집안도 잘사는 편이기에 이런 한정식집쯤은 별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학부모에게 받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기준은 희원이 부담된다며 집에 가기라도 할까 봐 재차 당부하며 희원을 안으로 먼저 들어가게 했다.
“어서 오세요, 이사님.”
한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여인이 셋을 맞이했다. 랑일이는 언제 떼쓰고 울었냐는 듯 의젓한 모습으로 여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도련님도 오랜만에 오셨네요.”
여인이 따듯하게 웃음 지으며 랑일이에게 인사를 했다. 한정식집은 기준의 집안이 줄곧 모임을 갖는 곳이기도 했다.
“안쪽 룸으로 자리 마련해 놓았습니다.”
셋은 여인의 뒤를 따라 안쪽 룸으로 들어갔다. 기준과 희원이 마주 앉았고 기준이 랑일이를 자신의 옆에 앉히려고 했다.
“싫어. 선생님 옆에 앉을래.”
랑일이가 언제 의젓하게 굴었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랑일아, 선생님 힘들게 하면 안 돼.”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버님.”
희원이 제2차 부자의 난이 발생할까 봐 랑일이를 끼고 자리에 앉았다. 기준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희원은 괜찮다며 웃었다.
“선생님, 가리는 음식 있으신가요?”
“아니요, 특별히 없어요. 다 잘 먹는 편이에요.”
“그럼 제가 알아서 시켜도 될까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체 음식을 정갈하게 잘하는 집이었지만 기준은 그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맛있는 음식으로 주문했다. 랑일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희원의 팔에 착 달라붙어서 연신 방긋방긋 웃어 대고 있었다.
조금 뒤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랑일이는 고된 하루를 보낸 만큼 배가 고팠는지 작은 손으로 박수를 치며 고기를 보고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이 마냥 귀여워 희원이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좀 드세요.”
기준은 접시에 음식을 담아서 희원에게 내밀었다.
“잘 먹을게요, 아버님.”
희원이 접시를 잡으면서 서로의 손가락이 스쳤다. 희원의 손가락이 몹시도 차가웠다.
“그나저나 선생님께서는 손이 좀 차가우신가 봐요.”
“네, 좀 그런 편이에요.”
희원이 멋쩍게 웃었다. 희원은 몸이 차가운 편이었다. 자다가 자신의 차가운 발이 종아리에 닿아서 깜짝 놀라 깰 때도 있었다. 어느 순간 페로몬 문제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역으로 페로몬 문제 때문에 몸이 차가운 것일지도 몰랐다.
“여기 엄청 맛있는 곳인가 봐요. 냄새만으로도 벌써부터 군침이 도네요.”
희원이 서둘러서 화제를 전환했다. 희원은 오메가니 알파니 이런 소재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려 했다. 그 소재 끝에는 꼭 자신이 오메가임을 밝히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게 되어 있어서 애초에 그런 화제는 꺼내지 않았다.
희원은 우성 알파인 아버지와 우성 오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우성 오메가이다. 위로 우성 알파인 형과 우성 오메가인 누나가 있다.
아이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덕에 늦둥이 아들로 태어난 희원은 우성 오메가 판정을 받았지만 페로몬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도 함께 받았다. 이유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들은 희원을 베타라고 생각했다.
“오늘 랑일이랑 저 때문에 애쓰셨는데 많이 드세요. 더 맛있는 것 사 드려야 하는데 그나마 이곳이 맛도 괜찮고 조용하기도 해서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옆에 있던 랑일이가 희원의 말을 따라 했다.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 앞에 물을 밀어 주었다.
“랑일아, 이제 막 잠에서 깼으니까 물도 마셔 가면서 먹어.”
“네!”
랑일이는 기분이 다 풀렸는지 희원의 왼쪽 팔을 잡고는 계속해서 방실방실 웃었다. 그런 랑일이를 보다가 기준은 희원도 왼손잡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랑일아, 선생님 팔을 놔야 선생님도 식사하시지.”
“그럴까, 랑일아? 우리 잠깐 손 놓고 맘마 먹을까?”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이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착하다고 칭찬을 했다. 기준은 애정이 가득 담긴 희원의 두 눈을 보며 마음 한곳이 따듯해져 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햇병아리 선생이라고 생각해서 불신도 의심도 가득했는데 그건 자신의 편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희원은 처음부터 저렇게 다정하고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봤는데 정작 자신은 선입견 탓에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 *
“모셔다드릴게요.”
“아니에요, 저 여기 근처에서 택시 타고 들어가면 돼요.”
희원은 괜찮다고 했지만 기준은 차가 있는데 왜 택시를 타냐며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랑일이도 “선생님, 차 같이 타요.” 하고 조르기 시작했다.
결국 따듯한 차까지 한 잔 마시고 셋은 다시 차에 올랐다. 누군가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는 도도한 도련님인 랑일이가 유독 희원에게는 껌딱지처럼 굴었다. 둘이 나란히 뒷좌석에 타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보며 기준은 미소 지었다.
그러다 뒷좌석이 어느새 조용해진 걸 눈치챈 기준이 거울로 뒷좌석을 살폈다.
“피곤했겠지, 아무래도.”
어느새 희원도 창에 머리를 대고는 자고 있었다. 아무리 유치원 교사라고 해도 어린아이를 종일 본 거나 다름없는데 피곤하겠지 싶었다. 기준은 빨리 그를 집에 데려다주는 게 좋을지 아니면 차에서 조금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게 차를 안정적으로 모는 게 나을지 고민했다.
시간을 확인한 기준은 어서 데려다주고 편하게 자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빠르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 짧은 시간에 조금이라도 푹 자라고 음악 볼륨을 살짝 낮추는 건 덤이었다.
희원이 말해 준 주소에 도착하니 눈앞에는 깔끔한 단독주택이 있었다. 기준의 본가보다는 작은 규모였지만 그래도 꽤 부유한 집에 살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안 그래도 외향을 보면 꽤 곱게 컸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직접 마주한 집은 그 추측을 확신으로 굳히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도 될 만큼 잘사는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두 팔 걷어붙이고는 아이들을 안고 서슴없이 소매로 눈물도 닦아 주고 흐르는 콧물도 닦아 주는 희원의 모습이 생각나 그가 꽤나 아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저, 선생님.”
기준은 조용히 희원을 불렀다.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기준은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어? 어어!”
작게 불렀는데도 희원이 깨서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기준을 쳐다봤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잠들었나 봐요.”
“괜찮습니다. 하루 종일 랑일이 때문에 고단하셨을 테니 당연한걸요.”
“그래도 아버님 운전하시는데…….”
희원이 미안한 표정을 짓자, 기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랑일이 놈이 종일 떼쓰는 바람에 얼마나 힘드셨을지 아는걸요.”
“맛있는 것도 사 주시고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피곤하실 텐데 어서 들어가세요.”
랑일이도 꽤 피곤했는지 기준과 희원이 아무리 떠들어도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준은 그런 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희원이 짐을 챙겨서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기준도 따라서 내렸다.
“내리지 마세요. 괜찮아요.”
“그래도 들어가시는 것까지 봐야죠,”
“바로 대문 앞인데요.”
희원이 눈꼬리를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기준은 희원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희원은 이목구비 하나하나는 뚜렷한 편이었으나 모아 놓으면 꽤나 유순한 인상이 되었다. 아마도 그린 것같이 예쁘게 빠진 눈꼬리와 입꼬리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웃을 때는 그 수려한 눈꼬리와 입꼬리가 더욱 보기 좋게 휘어졌다. 그래서 희원의 웃는 얼굴을 보면 기준까지도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들어갈게요. 오늘 감사합니다.”
희원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잠깐만요, 선생님.”
기준이 조수석 쪽에 놓인 쇼핑백을 들어 희원에게 내밀었다.
“지난번에 랑일이가 미끄럼틀에서 떨어질 때 받아 주시느라 손목에 무리가 갔을 것 같아서요. 오늘도 내내 안고 계셨고요. 고민하다가 이게 손목에 좋다고 해서요.”
“이게 뭔데요?”
“마사지 기계입니다.”
“네?”
놀란 희원이 쇼핑백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자 기준이 희원의 손을 끌어다가 쇼핑백을 잡게 만들었다. 스친 희원의 손이 차가웠다. 반면 기준의 손은 따듯했다.
“나이 들어 보이는 선물인가요?”
기준이 멋쩍어하며 웃었다. 그에 희원이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오늘 밥만 해도 너무 비싸서…….”
“감사해서 드리는 거예요. 사실 더 좋은 것 드리고 싶은데 부담되실까 봐 이걸로 대신하는 거예요. 정말 별거 아니지만 꼭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기준의 마음에 희원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받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말 잘 쓸게요. 감사해요.”
희원이 연거푸 인사를 했다. 고마워하는 희원의 모습에 기준은 고민해서 선물을 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준 적은 많았다. 대부분은 사업적인 것이었고 선물이라고 해 봐야 가족 행사 때 의무적으로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사적으로 선물을 주고는 기분 좋기는 랑일이 이후에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재벌가라고 해서 모두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기준네 집안은 식구끼리 서로 사이가 꽤 좋은 편에 속했다. 물론 알콩달콩, 오순도순, 아기자기한 맛은 떨어져도 말이다.
삼 형제 중 둘째인 기준은 결혼을 했을 때도 분가하지 않고 본가에 있다가 랑일이가 다섯 살이 되면서 올해 분가했다. 분가를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반면 형과 동생은 애초에 분가했다. 특히 동생은 대학생 때부터 자취를 하며 오메가와 동거를 하더니 결국은 그 오메가와 졸업도 전에 아이를 갖고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오늘은 형만 빼고 기준과 랑일이, 동생네 식구가 본가에 모였다.
“랑일아!”
“작은아빠!”
기준과 랑일이가 집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겨 준 사람은 동생 해준이었다. 해준이 랑일이를 번쩍 들어 올려서 뱅글뱅글 돌았다. 랑일이가 재미있다며 웃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는 동안 계단에서 해준의 오메가, 이제는 배우자가 된 일명 루세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이를 안고 내려왔다. 인형같이 생긴 딸아이가 랑일이를 보더니 방긋방긋 웃었다.
“작은아빠, 설이!”
랑일이의 요청에 해준이 딸아이에게 다가가자 랑일이가 작은 손으로 설이 얼굴을 만졌다. 랑일이와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랑일이는 꽤나 의젓한 오빠처럼 굴었다. 해준이 랑일이를 바닥에 내려 주니 랑일이는 설이의 작은 발을 만지며 올려다봤다.
“설이랑 놀래.”
“그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께도 인사해야지.”
“응.”
안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나온 기준의 아버지, 어머니가 랑일이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랑일이는 이 집안의 첫 손주다. 그리고 갓난아기 때부터 이 집에서 할머니 손에 자란 랑일이는 키운 정 무시 못 한다고, 이 회장과 박 여사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할머니!”
랑일이가 박 여사 품에 폭 안겼다. 할머니 치마폭에 얼굴을 비비는 모습에 기준은 마음 한구석이 왠지 짠했다.
“어째 우리 강아지가 애교가 는 것 같다.”
기준은 제 어머니의 말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3월, 4월 한결같은 모습으로 랑일이를 사랑해 주고 보듬어 주었던 사람. 바로 몇 시간 전까지도 랑일이를 품에 안고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 바로 희원이었다.
기준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웃었다. 박 여사는 랑일이를 놓아주고는 기준을 바라봤다. 둘째 아들은 3월, 4월 혼자서 육아를 하면서 살짝 마른 듯했다.
“배고프니? 애들 놀게 시간 좀 주고 식사해도 되겠니? 그래도 되죠, 여보?”
박 여사의 말에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기업을 책임지고 호령하는 이 회장조차 고개를 젓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집의 호랑이는 이 회장이었다. 그의 말이 곧 이 집안의 법이었다. 하지만 기준의 정략결혼과 이혼으로 인해 이 회장은 이제 박 여사의 말이라면 끔뻑 죽었다.
식구들은 저녁을 차리는 동안 거실 소파에 자리했다. 소파 가운데 바닥에서는 랑일이와 설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뭐라 뭐라 종알거리며 놀았다.
“그나저나 랑일이 선생님은 어떠니? 그때 반을 바꾸니 마니 한 거 아니었어?”
박 여사의 물음에 기준이 흘긋 랑일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 눈빛을 다른 식구들이 따라갔다. 다행히 랑일이는 어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는지 열심히 노는 데에 전념 중이었다.
“그런 얘기 꺼내지 마세요, 어머니. 랑일이 난리 나요.”
박 여사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빛을 보냈다.
“그날 어머니랑 통화하고 나서 울고불고 난리였어요. 바꾸지 말라고.”
“우리 강아지가 그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잘 울지도 않고, 떼도 잘 쓰지 않는 랑일이가 울고불고 난리였다면 제 아빠의 행동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도 박 여사는 4년 내도록 랑일이를 키운 사람이다. 아들들이 아무리 말썽이 없이 컸다고 해도 삼 형제를 키우는 것에 비해 랑일이는 식은 죽 먹기였다. 무슨 아기가 그리 방싯거리며 잘 웃고 순한지, 아무리 내리사랑이라고 해도 박 여사는 제 자식들보다 랑일이가 훨씬 예뻤다. 그런 랑일이가 울고불고 난리였다면 정말 마음에 안 든 거였을 테지.
“다행히 선생님이 정말 잘해요.”
“그래. 그 유치원에 베테랑인 남자 교사가 있다고 했어.”
“네, 그 교사가 랑일이 담임 선생님이 맞는 것 같아요. 사람이 정말 선하고 좋아요.”
잠자코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해준이 끼어들었다.
“형, 정말 마음에 드나 보다? 형이 다른 사람 칭찬을 다 하고?”
“그게 무슨 칭찬이야? 있는 걸 얘기하는 건데.”
기준이 무슨 소리냐는 듯 해준을 쳐다봤다. 해준은 빙글빙글 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기준은 누군가를 칭찬하는 것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도 꽤나 냉정하고 차가운 상사였다. 회사에서 일을 잘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이였고, 일을 못하는 건 능력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기준이 정말 선하고 좋은 사람이라며 희원의 얘기를 하면서 웃는 모습에 기준을 뺀 나머지 식구들은 놀랐다. 다만 해준처럼 말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녁을 먹고 랑일이는 설이와 또다시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의 체력은 날개를 단 것 같았다. 배를 채워 주었더니 또다시 놀고 머리카락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결국 둘 다 목욕을 시켰다. 그러고 나니 졸음이 몰려오는지 소파에 앉아서 까닥까닥 옆으로 졸고 있었다.
“랑일이 데리고 갈 거니? 괜찮으면 여기서 재우고 내일 아침 먹고 가렴. 설이도 그렇게 할래? 루세, 괜찮니?”
“네, 저는 좋아요.”
루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해준이 자연스레 설이를 품에 안았다.
“기준이는 어떻게 할래?”
“저는 회사 일 좀 처리해야 해서요. 어머니 괜찮으시면 랑일이 좀 봐주실래요?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요.”
오늘은 좀 쉴까 했더니 식사 중에 연락이 왔다. 새로 기획 중에 있는 장난감 디자인을 급하게 좀 봐줘야 한다고 말이다. 확인할 테니 메일로 보내라고 했지만 막상 확인하고 나니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다른 논의 사항이 있어서 랑일이를 어머니한테 맡기고 콘텐츠 사업부 부장하고 만나야 하나 싶었는데 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 여사가 먼저 말을 꺼내 주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 그럼 랑일이 설이랑 같이 재울게요. 아버지 코 골아서 랑일이 그 방에서 못 자.”
“그럼 해준아, 랑일이 좀 부탁해. 부탁할게요, 루세 씨.”
기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준이 루세에게 설이를 안겨 주고 저는 랑일이를 안아 들었다. 그새 곯아떨어졌는지 랑일이가 해준의 품에 폭 고꾸라졌다.
* * *
기준은 본가를 나와 회사로 다시 들어갔다. 누군가에게는 오후 내내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다 칼퇴근하는 금요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런 게 무엇인가요?’ 싶은 금요일이기도 했다. 늘 무엇인가를 기획하고 만들어 내야 하는 콘텐츠 사업부에게는 후자 쪽에 가까웠다.
기준은 아직 퇴근하지 못한 콘텐츠 사업부의 부장과 휴게실에 마주 앉았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퇴근하셨는데 다시 오시게 해서요.”
“됐습니다. 두 분도 황금 같은 금요일 밤에 회사에 계시니까요. 그나저나 왜 두 분만 계십니까? 다른 팀원들은 식사하러 갔습니까?”
기준의 말에 부장과 팀장이 서로 눈치를 봤다. 기준은 알 만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팀원 문제는 두 분이 알아서 하시고요. 됐고, 봅시다. 뭐가 문제인지.”
기준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이기준 이사는 콘텐츠 사업부 이사이면서 이 기업의 후계자다. 부장과 팀장은 한창 진행되던 일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약속이 있다며 저마다 슬금슬금 퇴근한 팀원들을 떠올렸다.
저마다의 워라밸도 중요하지만 하던 일이나 좀 함께 마무리 짓고 가면 좋겠다 싶다가도 이제는 팀이고 상사고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개개인의 일상이 중요한 사회 분위기에 별수 있나 싶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이기준 이사의 말에 결국 둘이 남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자신들에게 칭찬의 박수를 보냈다.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이사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이사님.”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기준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인사를 해 대는 콘텐츠 사업부 부장과 팀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서 본가로 갈까 그냥 집으로 갈까 고민했다. 어차피 같은 동네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두어 달 동안 혼자서 육아를 하느라 사실 기준도 조금 지친 상태였다. 기준은 피로한 눈을 깜박이며 조금 빠른 곡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요일 밤은 시끌시끌했다. 여전히 차는 많았고 사람들은 소란스러웠다. 피곤하다고 생각한 순간 피로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급하게 몰려왔다. 사람들이 많은 대로변으로 가기보다는 조금 한적한 골목길로 가고 싶은 마음에 기준은 유치원이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어?”
유치원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기준이 잠시 정차한 뒤 유치원을 쳐다봤다. 누군가 아직까지 일을 하는 모양일까?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구나 싶은 마음으로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 타이밍 좋게 불이 꺼지더니 이내 누군가 유치원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기준은 출발시키려던 차를 움직이지 않고 유치원 대문을 열고 나오는 이를 바라봤다. 희원이었다. 뒤에 어떤 차도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기준이 벌컥 차 문을 열었다.
“어!”
희원이 대문을 열고 나오다가 기준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눈만 깜빡거렸다.
푸른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밤하늘에는 별빛만이 아롱거렸다. 시끌시끌한 금요일 대로변의 풍경과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 퇴근하시는 거예요?”
“아! 네.”
기준의 목소리가 신호탄이 된 듯 얼어 있던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버님은 여기 왜…….”
“퇴근했다가 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다시 나왔습니다.”
“그럼 지금 회사 가시는 거예요?”
“아니요, 일 보고 다시 집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아, 네. 그럼 랑일이는… 아, 오늘 할머니네 간다고 했죠?”
랑일이가 종일 할머니네 가서 맛있는 것 먹을 거라고 노래를 불렀던 걸 희원은 기억했다. 그때 저 멀리에서 차가 한 대 들어오고 있었다. 차를 어중간하게 세워 놓은 기준이 희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준을 바라봤다.
“일단 타세요.”
“네?”
“어디 약속 있는 거 아니시죠?”
“네.”
희원은 당황했음에도 기준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기준은 희원을 조수석에 앉히고는 자신도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희원은 아직도 당황한 표정을 하고서도 착실하게 따라서 안전벨트를 맸다.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네? 아, 아니에요. 저 그냥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 주시면 돼요.”
“늦게까지 일하셨는데 편하게 가세요. 그런데 유치원도 그렇게 늦게까지 야근하고 그래요? 그래도 불금인데 워라밸도 없이. 쯧, 안 되겠네요, 그거.”
지금까지 속으로 워라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기준 이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늦게까지 일을 한 희원을 걱정, 그렇게 일을 시킨 유치원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 희원은 그런 기준의 말에 그저 웃었다.
지난번에는 랑일이와 함께 있었으니 그런 느낌이 없었는데, 단둘이 있으려니 어색했다. 기준은 막상 희원을 차에 태우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지난번에 자신이 준 작은 선물이 떠올랐다.
“손목은 괜찮으세요?”
“네? 아, 주신 선물 덕분에 괜찮아요. 그거 정말 좋더라고요. 요즘에도 조금 무거운 걸 들거나 그러면 저녁에 꼭 사용하고 자거든요. 그러면 다음 날 말끔해져요. 좋은 선물 주셔서 감사해요.”
희원의 말에 기준은 다행이다 싶어 웃었다. 가로등 불빛이 비쳐 드러난 기준의 옆모습이 그림 같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마치 중세 시대 조각품 같기도 했다.
“랑일이가 잘생긴 게 아버님 닮아서 그런가 봐요.”
희원의 말에 기준은 민망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랑일이는 저보다 할머니,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어요.”
“아, 저 할머님 뵌 적 있어요. 유치원에 입학 전 상담하러 오셨을 때요.”
신호등이 걸려 기준이 희원을 바라봤다. 희원은 언제나 눈빛이 맑았다. 꼭 아이의 눈과 같았다.
“아, 이렇게 보니까 아버님이 랑일이 할머님 많이 닮으셨구나. 회장님, 그러니까 랑일이 할아버님은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봤었는데요, 확실히 아버님은 회장님보다 랑일이 할머님을 더 많이 닮으셨네요.”
해준은 아버지와 똑 닮았지만 형과 저는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
아버지는 젊을 때 굉장한 미소년이었는데, 오히려 그 외모가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강한 성격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반면 어머니는 굉장히 도도하고 차갑게 생겨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같이 생겼지만, 화려하고 차가운 외모에 반해 성격은 부드럽고 온화했다.
즉, 기준은 어머니의 외모에 아버지의 성격을 닮은 셈이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기준이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너무 바빠서 간식으로 때웠어요.”
“배고프지 않으세요? 뭐 좀 드실래요?”
“네? 아니에요. 이 밤중에 뭘 먹어요. 살찌라고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흘긋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딜 봐서 살이 찐다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그럴 체질도 아닌 것 같고 애들이랑 하루 종일 씨름하려면 잘 드셔야지요. 너무 부담스럽지 않고 가볍게 먹을 만한 데로 갈게요. 괜찮으시죠?”
“그런데 아버님.”
“네.”
기준은 이미 차를 돌리고 있었다.
“되게 과묵하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말씀 잘하시는 것 같아요.”
“네?”
“그래서 랑일이가 말 잘하는구나 싶어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조금 민망해져서 시선을 사이드미러로 돌렸다. 그렇게 많던 차들이 조금 줄어든 것 같기도 해서 기준은 속도를 살짝 높였다.
기준이 이 시간에 찾아간 곳은 야근하면서 가끔 시켜 먹는 샌드위치 가게였다. 원 실장의 소개로 종종 먹곤 했는데 맛도 깔끔하고 늦게 먹어도 그리 위에 부담이 가지 않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커피나 그 외의 음료들이 맛있었다.
기준은 따듯한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희원의 몫으로 샌드위치와 생과일주스를 주문했다. 직접 주문하고 가지고 온 쟁반을 기준이 희원의 앞에 놓았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제가 가지고 와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일하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이게 뭐라고요.”
기준은 희원에게 물티슈를 건네주며 어서 먹으라고 했다. 기준도 일하다가 온 것은 마찬가지면서 희원을 챙겨 주는 모습에 희원은 고마웠다.
“그런데 아버님은 커피 한 잔으로 괜찮으시겠어요? 이거 나눠 드실래요?”
“아닙니다. 저는 본가에서 저녁 먹고 다시 회사로 들어갔던 거라서 배부릅니다. 어서 드세요. 드시고 모자라면 더 시켜 드릴게요.”
“이것도 많아요, 저.”
희원이 눈썹을 팔자로 누이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웃으니 더욱 어려 보였다.
희원은 손에 든 빵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오물오물 씹었다. 기준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는 희원을 보고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랑일이가 열심히 뭔가를 먹을 때 그걸 지켜보는 느낌과 같았다. 왠지 뿌듯하고 몽글몽글 따듯한 느낌이 들었다.
“와, 정말 배부르네요. 감사해요, 잘 먹었습니다.”
희원은 잘 먹는 것에 비해서는 활동량이 많아서 그런지 조금 마른 편이었다. 지금도 순식간에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으면서도 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기준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괜찮으시면 커피 들고 조금 걷다가 들어가실래요?”
기준의 말에 희원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랑일이는 본가에 있는 건가요? 혹시 자다가 아빠 찾거나 그러지는 않나요?”
희원은 그렇게 묻고서도 이내 랑일이가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유치원에서는 만 3세, 그러니까 다섯 살부터 원아를 받고 있었다. 요즘은 영아 때부터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오면 초반에 곧잘 불안해하고 울곤 했다.
하지만 랑일이는 늘 씩씩했고 의젓했다. 아이이기 때문에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아빠가 보고 싶다며 울거나 집에 가겠다며 떼를 쓴 적은 없었다.
“랑일이는 어릴 때부터 떨어져 있는 시간이 꽤 돼서요.”
기준은 대답을 하다가 말을 흐렸다.
“커피 괜찮으세요?”
“네. 그런데 아메리카노 말고 저는 달콤한 거 먹을게요.”
희원이 살짝 민망한 듯 웃자, 기준은 그런 희원이 귀엽다는 듯 따라 웃었다.
“캐러멜 잔뜩 들어간 거로 주문할까요? 아니면 우유나 모카?”
“캐러멜이요.”
희원의 커피를 주문해서 받아 들고 둘은 따듯한 커피를 쥐고 밖으로 나와 카페 근처에 있는 공원을 걸었다. 늦은 밤인데도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연인들이 하하 호호 정답게 떠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혹시 추우세요?”
낮에는 따듯했지만 아직 밤에는 조금 서늘했다. 기준의 물음에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커피가 따듯해서 괜찮아요.”
“혹시라도 추우면 말씀하세요.”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5월에 어린이날 앞두고 소풍 가는데 혹시 랑일이도 갈 수 있을까요?”
“그럼요.”
기준은 랑일이만큼은 여느 아이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하며 평범한 일상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소풍에 부모님도 같이 가야 하는 건가요?”
기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선생님들 많으니까 다 케어 가능해요. 그리고 도시락이랑 간식 이런 것도 다 유치원에서 준비하니 신경 쓰실 것 아무것도 없어요. 동물원으로 가는데 랑일이가 동물원 좋아하나요?”
“네, 동생네 가족하고 같이 가 본 적 있어요.”
“그럼 못 먹는 음식이나 이런 것 있을까요? 초반에 식품 알레르기 관련한 공문에는 알레르기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은 또 다른 문제니까요.”
기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지난번에 당근 싫다고 골라내던 게 기억이 났다.
“유치원에서는 잘 먹나요? 지난번에 당근을 고르고 있던데요.”
“정말요? 유치원에서는 가리지 않고 잘 먹어요.”
“아, 그럼 그냥 투정 부린 거네요.”
희원이 그런 랑일이가 귀엽다며 웃었다.
“그런데 원래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세요?”
“유치원은 잔손이 많이 가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낮에는 아이들 보느라 시간이 없으니 남아서 할 수밖에요.”
기준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어쩌다, 아니 어떻게 유치원 선생님을 하시게 된 거예요?”
“어, 그게요…….”
희원은 말을 망설였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들을 워낙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 이유 말고 다른 이유도 있기 때문이다. 우성 오메가, 그렇지만 페로몬 문제가 있는 오메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래서 딱히 고칠 방법도 없는 페로몬 문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오메가. 그게 바로 희원이었다.
기준은 희원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조잘조잘 떠들며 웃던 희원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망설이는 듯한 눈을 했다. 그때였다.
“어어!”
앞에서 자전거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희원이 얼굴을 들었고 앞에 다가오는 자전거에 놀란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기준이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희원을 잡아다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자전거를 탄 남자가 내려서 고개를 연신 숙였다. 기준이 미간을 좁히고 남자를 노려봤다.
“앞에 사람이 오고 있는 것 안 보입니까? 자전거 등도 켜지 않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놀란 희원이 기준의 품에서 색색 숨을 고르다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기준을 살짝 밀었다. 품에 희원을 안고 있던 기준이 그런 희원을 내려다봤다.
“괜찮으세요?”
“네, 저 괘, 괜찮아요. 그러니까…….”
희원은 자신을 품에서 놓아 달라고 그런 건데 기준은 앞에 선 남자에게 차갑게 일갈했다.
“됐으니 가 보세요.”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기준은 그제야 희원을 품에서 떼고는 들여다봤다.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네, 조금 놀라서…….”
“차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커피에 데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어요?”
그러고 보니 컵 두 개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다행히 커피는 진작 배 속으로 다 들어간 뒤였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빈 컵을 확인하고는 기준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기준이 몸을 굽혀서 컵을 주워 들려고 하자 희원이 서둘러서 쪼그리고 앉았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기준은 컵 두 개를 잘 포개어 한 손에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목에 감긴 머플러를 풀었다. 희원이 왜 그러나 싶어 기준을 바라봤다.
“바람도 차고 놀랐을 텐데 이거라도 좀 두르세요.”
“네?”
“어서요.”
기준이 자신의 머플러를 내밀었다. 희원이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기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이 들고 있는 컵을 희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희원이 멀뚱멀뚱 기준만 쳐다봤다.
“잠시만 들고 계세요.”
기준은 그대로 자신의 머플러를 희원의 목에 감았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둘러 풀지 못하게 매듭을 지었다. 희원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듣지 않고 희원의 손에서 이제는 컵을 빼앗아 들었다.
“가시죠.”
기준이 한쪽 손으로 먼저 발걸음을 떼라는 듯 앞을 가리켰다.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희원은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 부근을 손으로 누르며 고개를 숙이고는 앞으로 향했다. 기준이 감아 준 머플러에서 조금 전 그의 품에 안겼을 때 맡았던 향이 났다.
집에 가는 길에 희원은 자꾸만 조금 전 상황이 생각났다. 순식간에 자신을 끌어다 안았던 단단한 팔과 넓은 가슴, 그리고 그의 품과 지금 두르고 있는 머플러에서 나는 청량한 향. 꼭 시원한 여름 숲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신호에 걸리자 기준은 옆에 앉은 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희원이 기준을 보며 애써 웃었다.
자신이 페로몬 문제가 있다고 해서 타인의 페로몬조차 맡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희원의 페로몬 문제는 우성 오메가임에도 페로몬 향이 옅어서 타인은 그가 오메가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희원도 히트사이클이 오기는 온다. 여느 오메가가 1년에 서너 번이라면 희원은 많게는 두 번, 어느 때는 그조차도 오지 않았다. 주기도 정확하지 않았다. 언제 갑자기 히트사이클이 올지 몰랐다. 그래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약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기준은 극우성 알파니 당연히 그의 머플러에 페로몬 향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성 오메가인 희원은 그 향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단순히 놀라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희원도 형질은 우성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손 좀 줘 봐요.”
“네?”
“어서요.”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깜박이면서도 얌전히 왼손을 내밀었다. 기준의 커다란 손이 희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
“놀라서 그런가. 엄청 차갑네요.”
“그건……! 원래 손이 차가운 편이에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차갑잖아요. 불편하시더라도 이러고 가요.”
기준이 희원의 손을 꼭 잡았다. 기준의 손은 따듯했다.
희원은 기준의 스킨십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지금 그 행동을 자신만 의식하고 있나 싶어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 랑일이가 시도 때도 없이 희원에게 덥석 안기고 다리를 붙들고 얼굴을 비비고 등에 업히고 하는 게 기준의 자연스러운 스킨십 덕분인 것 같기도 했다.
희원은 기준의 손에 감싸인 채 손을 꼼지락거렸다. 기준이 피식 웃었다.
“불편하세요?”
“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손이 조금이라도 따듯해지면 놓아 드릴게요. 조금만 참으세요.”
희원이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둘은 희원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손을 잡은 채였다.
“놀라서 저녁 드신 거 소화 다 됐겠어요.”
“괜찮아요. 오히려 좋지요. 들어가서 씻고 바로 자도 되겠어요.”
희원의 말에 기준이 웃었다.
“오늘 맛있는 것 사 주셔서 감사해요. 산책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저도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네, 랑일이 아버님도요.”
희원이 차에서 내려 집으로 쏙 들어갔다. 기준은 희원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 * *
집에 들어온 희원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옷을 벗으려고 했다.
“어! 머플러!”
정신이 없어서 목에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던 사실도 잊어버린 채 차에서 내려 들어온 거였다. 희원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왠지 머플러를 못 돌려줬다고 전화를 하면 기준이 차를 돌려서 다시 올 것 같았다.
[랑일이 아버님, 머플러를 깜빡 잊고 못 돌려드렸어요. 죄송해요. 월요일에 하원할 때 드릴게요.]
아무래도 등원할 때는 다른 학부모들도 많아서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었다. 랑일이는 하원이 여느 아이들에 비해 늦는 편이었기 때문에 희원은 그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운전 중인지 답이 금세 돌아오지는 않았다.
희원은 머플러의 세탁 방법을 들여다봤다. 손으로 주물러서 빨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세탁소에 맡겨야 하는 걸까? 자신이 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은 안 될 것 같아서 희원은 집중해서 세탁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희원이 고개를 들었다.
“네.”
문이 열리고 열린 문틈으로 누나가 보였다.
“어? 누나 언제 왔어?”
“저녁에 왔지. 근데 이제 들어오는 거야? 금요일인데 약속이라도 있었어?”
희원의 누나 희정은 스물네 살에 결혼을 했다. 대학교 때부터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졸업하자마자 뭐가 그리 급했던지 서둘러 결혼을 했다. 알고 보니 배 속에 지금의 첫째 조카가 있었던 거다.
희원은 그때 누나가 참 부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질 수 있었던 누나가 말이다.
“유치원 일 좀 하다가 저녁 먹고 왔어.”
“여전히 유치원 일밖에 모르는구나.”
희정이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어? 우리 막내, 연애하니?”
희정이 희원의 손에 들린 머플러를 보며 물었다. 희원이 당황한 빛을 띠고는 서둘러 머플러를 가방 속으로 쑥 집어넣었다. 우성 오메가인 희정은 극우성 알파인 기준의 향을 맡았을 것이다.
“아냐, 연애는 무슨.”
희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연애한다고 해서 누나가 어디 가서 떠벌리겠니? 알파야?”
“아니라고 누나.”
“누나는 네가 연애도 좀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 이렇게 예쁜데 관심 보이는 사람 없어? 왜 아무도 우리 막내를 안 데리고 가지? 여전히 곱고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희원이 고개를 저었다. 희원도 대학교 때는 연애를 했다. 친구 소개로 만난 알파였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던 때였다. 그저 만나면 좋고 모든 게 즐거웠다.
하지만 그 알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음이 전부가 아니었다. 알파와 오메가의 성적인 접촉과 관계를 원했다.
어느 날, 그는 희원에게 왜 오메가인데 히트사이클이 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희원은 자신의 페로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뒤로 그는 변했다. 진정한 사랑 어쩌고저쩌고 개소리를 늘어놓으며 이별을 고했다.
그러다 예상치 못했던 히트사이클이 학교에 있는 중에 터지고 말았다. 그 알파는 그동안 자신을 속였던 거냐고, 자신과 하기 싫어서 약을 먹었냐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에 희원은 속이 있는 대로 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때는 그 시커먼 속내를 알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딱 봐도 그저 몸만을 원했던 건데 말이다.
그 뒤로 희원은 누군가와 만나 연애를 하는 게 꺼려졌다.
알파와 오메가에게 이성보다 더 앞서는 건 페로몬이었다. 마음이 없어도 히트사이클이니 러트니 이런 문제들로 본능에 휩쓸려 몸을 섞을 수 있었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관계가 시작되기도 하고 끝이 나기도 했다.
희원은 그게 싫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우성 오메가라는 게 변하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 막내, 좀 말랐네? 새 학기 시작이라서 그런가? 새로 들어온 꼬맹이들은 어때? 힘들지는 않고?”
희정은 희원의 볼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제는 저보다 작은 누나지만 언제나 저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괜찮아. 새 학기 때는 원래 일이 좀 많으니까.”
“잘 먹고 다니는 거지? 몸은 좀 괜찮고?”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만큼 체력이 많이 요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먹는 건 꼬박꼬박 삼시 세끼 다 챙겨서 잘 먹으려고 한다.
“페로몬 문제 빼고는 건강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누나는 너무 걱정돼. 행여 학교 다닐 때처럼 그러면…….”
희정이 말을 하다 멈췄다. 희원의 반듯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기 때문이다.
“누나가 오랜만에 와서 이게 뭐 하는 거니, 그치? 나이 들고 주책만 늘었나 봐.”
“아니야,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였지 뭐. 미안해. 혼자 왔어?”
“응, 셋이서 낚시 간다고 그래서.”
아들만 둘 있는 누나네는 줄곧 삼부자끼리 낚시를 하러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희정은 친정에 와서 엄마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갖다가 돌아가곤 했다.
희원은 그게 참 부러웠다. 어릴 적에는 누나처럼 엄마에게 애교 많은 막내였다. 엄마 앞에 앉아서 방긋방긋 웃으며 치마폭에 얼굴을 비비고 무릎을 베고 잠들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시름 중 한 원인이 막내아들이란 걸 알게 되고 나서는 늘 미안한 마음이 컸다. 가족 중 누구도 희원을 탓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 마음 저편에 자신의 건강을 향한 걱정이 있다는 것을 희원은 잘 알고 있었다.
“피곤할 텐데 푹 쉬어.”
“응, 누나. 내일 가는 거야?”
“응, 내일 같이 저녁 먹을래? 매형이랑 애들하고 온다고 했는데.”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정이 나가자 희원은 침대에 털썩 앉았다.
사랑하는 누나와 누나를 닮은 어여쁜 조카들. 희원은 그 가정이 굉장히 부럽고 그만큼 좋았다.
유치원 교사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화목한 가정을 보면 부러운 만큼 어여쁘기도 해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게 즐거웠다.
그래서 아빠밖에 없는 랑일이에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결핍 때문에 아픈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결핍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신경 쓰였다.
기업 놀의 차남이자 후계자 이기준. 그의 결혼식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당연히 언론에서도 난리가 났었다. 우리나라 문구 완구 제품의 일인자인 놀과 알아주는 학원, 교육 관련 기업의 장녀의 결혼식이었다. 누가 봐도 정략결혼이었고 놀의 인수 합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상했던 대로 기업은 결혼하자마자 합병이 이루어졌고, 두 사람 사이에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하지만 둘은 아이를 낳자마자 얼마 안 가 이혼했다. 이유는 성격 차이라고 보도했다.
알아주는 기업 놀의 후계자의 결혼과 이혼은 세간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이야기이다. 유치원 입학 원서를 낼 때 기준은 그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했다. 기준의 어머님이 입학 전 상담을 하러 와서 꺼냈던 이야기 가운데에도 그 이야기가 있었다.
랑일이의 엄마의 부재. 랑일이의 식구들은 그것에 대해 조심해 달라고 당부하지 않았다. 숨기고 모른 척해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기준의 어머님, 박 여사는 대놓고 ‘랑일이가 엄마 없는 건 알고 계시죠?’라고 말을 꺼냈다.
희원에게 랑일이는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다. 더 사랑해 주고 품어 주고 싶었다.
드르르륵, 가방 속에 있는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희원은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면서 성급하게 집어넣었던 머플러도 끄집어냈다.
[랑일이랑 통화하다가 선생님 이야기를 했더니 녀석이 자기는 안 데리고 갔다고 삐쳐 버렸네요. 머플러는 편하실 때 주세요. 주말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희원은 핸드폰을 보고는 웃어 버렸다. 참새같이 짹짹거리며 삐친 티를 낼 랑일이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런 랑일이와 통화를 하며 기준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따듯한 말 한마디와 그보다 더 따듯했던 손, 그리고 그 품.
순간 희원은 자신의 볼이 복숭앗빛으로 홧홧하게 물들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