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도 못 뜬 강아지인 줄 알았는데
3월, 아직은 바람이 찼다. 그 전해에 비해 겨울 날씨가 따듯해서 봄도 금세 찾아올 줄 알았는데, 올해 봄 날씨는 유독 변덕이 심했다. 어느 날은 따듯해서 드디어 봄이 왔나 싶으면, 그다음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영하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날씨와는 상관없이 기준은 눈앞의 꼬맹이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듯해졌다. 랑일이가 벌써 다섯 살이라니! 기준은 검은색 세단 뒷좌석 차 문을 잡고 랑일이를 지켜봤다.
맵시가 좋은 유치원 원복을 입은 랑일이가 뒷좌석 베이비 카 시트에 스스로 올라앉았다. 잘빠진 외제 세단 뒷좌석에 덩그러니 놓인 베이비 카 시트는 누가 보면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볼 만큼 조화롭지 못한 광경이지만, 기준에게는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었다.
기준은 랑일이가 다섯 살이 되는 올해부터 랑일이를 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 더불어 자신이 랑일이를 도맡아 키우기로 결심했다.
이전까지는 기준의 어머니인 박 여사가 랑일이를 키워 주었다. 바쁜 기준이 영아인 랑일이의 육아까지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년까지는 본가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그러다가 랑일이가 다섯 살이 되는 올해 초 분가했다. 비록 같은 동네인 데다가 걸어서도 20분이 넘지 않는 거리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랑일이가 유치원에 입학하는 날이었다.
“이랑일.”
기준은 운전을 하며 랑일이를 불렀다. 창밖을 보던 랑일이가 바로 대답했다.
“응?”
“유치원 가서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맞지? 아빠, 오늘만 딱 이이만큼 말했어.”
랑일이가 양손을 쫙 펴며 말하는 걸 거울로 확인한 기준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더 이상 그만 말하라는 뜻이 확연했다.
원래 기준은 했던 말을 반복해서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랑일이의 문제에 있어서는 본연의 모습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랑일이가 다른 아이에 비해 성숙하고 똑 부러지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반복해서 당부하게 될 만큼 걱정이 앞섰다. 기준도 어쩔 수 없는 아빠였기 때문이다.
기준은 여전히, 그리고 늘 바빴지만 그렇다고 유치원 입학 첫날부터 랑일이를 비서인 원 실장이나 어머니 박 여사 손에 붙들려서 보내고 싶진 않았다. 2월 마지막 날, 기준은 원 실장에게 3월 월간 회의를 오후로 늦추자고 했다.
좀처럼 일정 조율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기준 이사임에도 불구하고 일정을 늦출 것을 말하기에, 원 실장은 평소라면 크게 놀랐을 텐데 달력의 날짜를 기억해 내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원 실장은 이기준 이사가 얼마나 자신의 아들 랑일이에게 각별한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 유치원 건물이 보였다. 기업에 딸린 유치원이지만 같은 건물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치원이 사내에 있으면 아무래도 부모들의 관심이 그리로 쏠리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유치원을 회사 밖에 두게 했다. 그것도 대기업 건물이 즐비한 삭막한 곳이 아닌 조금 떨어진 골목 주택가 쪽에 말이다.
차가 덜 다니는 골목길에 유치원 건물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걸어서 10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기준은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업인 ‘놀’의 콘텐츠 사업부 이사이다. 놀의 주된 사업은 어린이들과 관련이 있다. 기준이 다니고 있는 놀은 장난감 및 문구류 사업을 주로 했다. 그룹 놀은 여러 계열사를 두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독서 운동 및 논술 교육에 대한 사업도 있었고, 따로 출판사도 있었다.
놀은 어린이 관련 사업을 하는 만큼 사내 유치원의 규모가 꽤 커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다니기를 희망하는 회사였다. 근무 환경이나 복지 면에서 워킹 맘, 워킹 대디들이 다니기 좋은 회사가 바로 놀이었다.
놀의 사내 유치원은 선생님들의 교육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성품이 좋기로 유명했다. 기업의 이름을 걸고 하는 곳이라서 놀 유치원에서는 학벌은 물론, 인성이 훌륭한 선생님에 모토를 두고 교사를 채용했다.
유치원 앞에 선 기준은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고 숨도 좀 골랐다. 회사는 물론, 그 어디에서도 두려울 게 없는 기준이지만 아빠로서의 그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기준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꼬맹이를 내려다보고는 무릎을 굽혀 앉아 랑일이의 옷매무새를 다시 봐줬다. 네이비 컬러의 유치원 원복은 랑일이의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기품까지 있어 보였다. 명품 맞춤 정장을 입혀 놓은 것 같았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했던가. 누가 그 아빠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랑일이는 리틀 이기준이나 다름없었다.
기준은 랑일이에게 다시 말했다.
“이랑일, 가서 주눅 들지 말고…….”
기준을 닮았으면 어디 가서 주눅 들 성격도 아닌데, 아빠이기에 걱정이 앞섰다.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아빠. 이제 이만큼 말했어.”
랑일이가 기준의 말을 자르고는 열 손가락을 보여 준 뒤 손가락 한 개를 더 보여 주었다.
“어, 그래.”
아들의 단호함에 기준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일어나 랑일이의 손을 잡았다.
유치원은 단독주택을 개조하여 만들었다. 울타리가 둘러진 담과 작은 문 너머에는 잔디밭이 있고, 유치원 안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있었다. 기준은 괜히 자신이 긴장되어 심호흡을 하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네, 잠깐만요!”
인터폰 너머 목소리에 기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목소리가 좀 특이했다. 여자 목소리가 아닌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웬 남자 선생님이 앞치마를 두르고는 뛰어나오는 것이었다. 눈앞에 선 남자 선생님이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안녕. 랑일이 맞지?”
듣기 좋은 미성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기준은 그 순간에도 앞에 선 남자를 이모저모 뜯어봤다. 사업을 하는 기준의 버릇 중 하나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데 비해 입꼬리와 눈꼬리의 선이 마치 그린 듯이 예쁘게 빠져 있어서 전체적인 인상이 순하고 고와 보였다.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날카로운 부분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예쁘장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랑일이 다섯 살 맞지? 랑일이랑 같이할 씨앗반의 이희원 선생님이야.”
원 실장한테 받은 보고로는 유치원에 남자 선생님이 딱 한 명 있다고 했다. 경력도 어느 정도 있고 야무지고 노련해서 아이들은 물론, 부모님들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그만두고 새로 왔나?’
기준의 눈매가 길어지며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경력이 어느 정도 있다고 들었는데 자신을 랑일이와 함께할 선생님이라고 소개한 이 눈앞의 남자는 경력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였다.
무릎을 굽히고 랑일이와 눈높이를 맞춘 희원이 랑일이 손을 잡고 살살 흔들며 긴장감을 풀어 주었다.
“랑일이 되게 멋지게 생겼다. 잘 부탁해.”
살짝 얼어 있던 랑일이가 배꼽에 손을 가져가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랑일입니다!”
“우아, 진짜 씩씩하다!”
희원이 랑일이에게 엄지를 척 내밀어 보였다. 희원은 랑일이와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기준을 마주 보고는 자기소개를 했다.
“원장 선생님한테 말씀 들었어요. 랑일이를 맡게 될 이희원입니다. 아버님, 랑일이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지낼 테니 염려 마세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기준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 눈앞의 남자 선생에게 자신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맡겨도 되는 것일까? 다섯 살이면 유치원에서 가장 어린데, 그러면 가장 베테랑인 선생님이 맡아야 하는 게 아닐까? 기준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아버님, 오늘 입학식 보고 가실 거죠? 랑일이는 교실에서 준비하고 올라갈 테니 3층 강당에 가 계시면 돼요.”
희원의 손을 꼭 잡은 랑일이가 기준에게 다른 쪽 손을 흔들었다. 희원이 그런 랑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기준에게 웃어 보였다. 기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살짝 숙였다.
인사를 하고 3층 강당으로 향하는데도 기준은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솔직히 기준은 엄마가 없는 랑일이가 여자 선생님을 만나길 바랐다.
선생님한테 엄마 역할을 바란다는 게 아니라 그저 랑일이가 젊은 나이의 여성과 조금 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집안에 할머니인 박 여사를 제외하고는 죄다 남자밖에 없어서 랑일이가 다른 성에 대해서 아예 모르고 자라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알파와 오메가, 베타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대한 구분이나 역할에 대해서 평등을 주장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기준은 극우성 알파였다.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알파, 오메가, 베타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었고, 그중 기준은 소위 말하는 상위 계층 집안의 일원이었다. 그러니 이기준만큼 보수적이고 편견을 많이 지니고 있는 인간도 없었다.
3층 강당에는 수많은 부모가 자리하고 있었다. 놀은 다른 회사에 비해 기혼자가 많았기 때문에 졸업식과 입학식 시즌에 휴가를 내는 사원들이 많았다. 오늘은 기준도 그중 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기준은 온전히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반차라는 걸 선택했지만 말이다.
기준은 고고한 학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입학식을 지켜봤다. 하지만 식이 진행되는 내내 여러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 * *
기준은 출근을 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냉정한 이사지만, 아들 랑일이와 관련된 일에는 안절부절못하는 초보 아빠일 뿐이었다.
랑일이가 어디 가서 주눅 들거나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아이치고는 좀 시크한 편이라 친구들이나 제대로 사귈까 걱정, 그 선생님은 애들을 보살피기는커녕 애들한테 휘둘릴 것같이 순하게만 생겼던데 그것도 걱정, 집에 와서 랑일이가 유치원 재미없다고 안 가겠다고 하면 그것도 걱정이었다.
“이사님, 이사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기준이 그제야 원 실장을 쳐다봤다.
“이사님, 도련님께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단칼에 잘라 내는 기준을 보며 원 실장은 괜찮겠구나 싶었다. 평소와 너무나도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준은 조금 뒤 다시 미간을 좁혔다.
한편 기준의 걱정과는 달리 그 시각 랑일이는 희원 선생님과 새 친구들하고 무척이나 재미난 첫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할머니랑도 아빠랑도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오늘 해 보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랑일이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할아버지가 우리나라 제일이라고 꼽히는 유아 아동 장난감 및 문구류 회사의 회장이고, 아빠가 그 회사의 차기 주인인데 부족한 게 뭐가 있었겠는가? 랑일이에게는 삼촌도 두 명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집안이 화목한 편이라 외롭지 않게 자랐다.
단 하나, 엄마. 랑일이에게 있어 결핍은 그것뿐이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빠와 삼촌들도, 집안 식구들 모두 랑일이가 결핍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우리나라 경제를 주무르는 이 회장도 랑일이에게는 그저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알아주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박 여사도 랑일이에겐 그저 마음씨 좋은 따뜻한 할머니였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희원 선생님처럼 놀아 주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첫날이라 처음에는 서먹서먹해하더니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에, 분홍빛 뺨을 하고는 숨을 색색 고르며 웃고 있었다. 희원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땀을 닦아 주며 눈을 맞추고 마주 웃어 주었다.
시계는 이제 슬슬 하원 시간을 향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 기업 놀의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희원은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간단한 간식을 먹이고 동화책을 읽어 준 뒤 하원을 시킬 생각이었다.
종일 미간을 좁히고 있던 이기준 이사가 평소와는 다르게 칼같이 퇴근을 했을 때 그제야 비서실은 한숨을 놓았다. 기준이 유치원 대문 앞에 도착해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문을 노려보다 초인종을 눌렀다.
“네, 랑일이 아버님 잠깐만요. 랑일아, 아빠 오셨다!”
문이 벌컥 열리며 랑일이가 희원의 손을 잡고 모습을 드러냈다.
“랑일아.”
기준의 부름에 랑일이는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희원의 손을 놓지 않고 계단을 내려왔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랑일이가 배꼽에 손을 딱 대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 인사는 처음이었기에 기준은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랑일이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렀을 때 느꼈던 기분과 같았다. 생소한 기분을 만끽하기 전에 랑일이가 이번에는 뒤로 돌아서 희원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안녕, 랑일아. 내일 또 만나요.”
희원은 마주 배꼽 손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바로 쭈그리고 앉아서 랑일이와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검은색 보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말이다.
기준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꼬맹이와 이제 막 눈을 뜬 강아지같이 생긴 선생의 포옹을 바라보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건 마치 오늘 하루 종일 품었던 의심에 대한 부정과도 같았다.
* * *
어린 도련님은 제 아빠를 쏙 빼닮아서 그리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무척 재미있었지만 그걸 조잘조잘 풀어내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준은 랑일이가 신이 난 걸 알 수가 없었다.
기준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어머니 박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은 어머니가 더 잘 알 것 같았다.
―그래.
“어머니, 랑일이 유치원이요.”
―그래, 랑일이는 뭐래니? 우리 강아지는 잘 놀았다니?
집안 식구들이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건 박 여사도 마찬가지였는데, 랑일이가 생긴 뒤로는 아직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혼자 계속해서 말을 걸 만큼 박 여사도 보통의 할머니가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랑일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요. 거기 경력 많은 남자 선생님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랑일이 선생님은 새로 온 분인 것 같던데, 좀 알아봐서 될 수 있으면 반을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그걸 떠나서 그래도 좀 베테랑인 여자 선생님이 맡아 주었으면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완전 신입 같은 남자 선생님이라니……. 어머니 가셨을 때 그런 말씀 안 하셨어요?”
입학 상담을 박 여사가 갔는데 그때 분명 여러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결과가 이러니 기준은 한숨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어머니, 얘기를 들어 보니 간혹가다가 아이들 사이에서 사이가 서로 안 좋거나 친한 친구 없어서 적응을 잘 못하는 아이일 경우 반을 바꾸어 주기도 한다는데, 랑일이는 친구 문제는 아니지만 여자 선생님이나…….”
그때였다. 자신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기준이 핸드폰을 쥔 채 내려다보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랑일이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랑일이가 제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노려보고 있었다. 기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머니, 제가 다시 전화드릴게요.”
기준이 서둘러 전화를 끊자 랑일이가 말했다.
“아빠 미워.”
기준은 정말로 당황했다. 자신은 아무 짓도 한 게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랑일이에게 잘못한 게 없었다.
기준이 당황한 것과 상관없이 랑일이는 휙 몸을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준은 매정하게 돌아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황당함을 느꼈다.
기준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랑일이 방으로 가서 노크를 했다. 안에서는 아무 대꾸도 들리지 않았다.
“랑일아.”
기준이 조심히 문을 여니 랑일이가 침대에 앉아서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나 선생님네 반 할 거야.”
기준이 엄청 길게 떠들었는데 눈치가 빠른 데다가 똑똑하기까지 한 랑일이는 그중 몇 문장만으로 상황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랑일이는 기준을 보며 한마디만 한 뒤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마음이 상한 걸 여느 아이들처럼 떼를 써서 표현하는 대신 입을 다물어 버리는 걸 선택한 거다.
기준은 랑일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침대에 앉은 랑일이와 시선을 맞췄다. 랑일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다가 이내 그 자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응? 뭐라고? 랑일아, 아빠한테도 얘기해 봐.”
“아빠, 선생님 바꿔? 그럼 나 유치원 안 가.”
“아니, 선생님을 바꾸는 게 아니고…….”
아무리 기준이라고 해도 사람을 자르고 그런 것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해서도 안 되고 말이다. 다만 때에 따라서는 반을 옮길 수 있다고 들었기에 그러기를 원했던 것뿐인데 랑일이는 그 선생님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물론 선생님이 아이들 마음에 드는 게 중요하지만 부모 마음에 드는 건 그와는 별개였다. 더군다나 기준은 랑일이 문제에 있어서는 여느 치맛바람 휘날리는 엄마들 저리 가라였다.
기준은 랑일이를 경험도 많고 랑일이의 결핍을 채워 줄 수 있는 선생님에게 맡기고 싶은 욕심이 컸다. 하지만 이런 거를 어떻게 다섯 살짜리한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걸 말한다고 해도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알아듣기나 하겠느냐 말이다.
“아빠, 선생님 바꾸는 거 싫어. 선생님네 반 할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들의 모습에 기준은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랑일아. 아빠가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 랑일이 아빠랑 같이 목욕할까?”
기준이 두 손을 뻗으니 랑일이가 풀썩 안겼다. 랑일이가 기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응?”
“약속.”
“약속? 무슨?”
기준은 고사리같이 작은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그게 반 바꾸지 말라는 뜻임을 깨닫고 시선을 피했다. 집안과 기업을 이끌어 나갈 도련님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기준이 이번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아빠, 얼른.”
언변의 달인, 독설가 중의 독설가인 기준이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설프게 손가락을 걸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이희원 선생님이 부디 잘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 * *
유치원 커리큘럼에는 한 달에 두 번, 에코아이 숲 체험이라는 게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날씨가 차서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을 데리고 바깥나들이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 정한 곳이 수목원이라고 했다.
“선생님!”
아빠를 닮아 도도하기 짝이 없는 랑일이는 자기가 먼저 덥석 안기는 사람이 손에 꼽힐 만큼 적었다. 그런데 유독 희원에게는 원래부터 알았던 사이처럼 잘도 안겼다. 기준은 매일 아침,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랑일아, 안녕! 아버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기준은 여전히 희원에 대해 걱정을 놓지 못한 상태였다. 유치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선생님, 오늘 버스 타고 가요?”
“그럼.”
희원이 눈을 휘며 웃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다정하고 따스했다.
“아버님, 랑일이 버스 처음 타 보는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수목원에 잘 데리고 다녀올게요.”
오늘 일정은 수목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한쪽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작은 놀이터에서 조금 놀다가 오는 것이었다. 자고로 아이들은 방방 뛰고 에너지를 발산해야 병이 안 나는 법이었다.
하지만 랑일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버스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버스는 고사하고 멀리 어딘가를 나간 적도 손에 꼽혔다. 태어나면서부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랑일이는 여느 아이들처럼 주말에 부모 손을 잡고 동물원을 간다든가 키즈 카페를 간다든가 이런 일상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랑일이는 놀이터에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물론 할머니네 집 정원에 어린이용 미끄럼틀과 그네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친구들과 가는 건 처음이라 며칠 전부터 들뜬 상태였다.
랑일이의 흥분은 어젯밤 정점을 찍었다. 제 아빠의 다리를 붙잡고는 몇 번이고 놀이터에 간다고 말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도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모습에 기준은 그동안 자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애를 너무 집 안에서만 키웠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신이 난 랑일이와는 반대로 기준은 미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걱정이 앞섰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고 차를 타고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아이를 홀로 버스에 태워 보내도 될까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랑일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기에는 기준이 너무 바빴고, 그 말을 들은 박 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 역시 아침 출근길에, 유치원에 데려다주면서 계속해서 주입식 교육을 시켰다.
“이랑일, 선생님 잘 따라다니고 만약에 선생님 잃어버리면 전화번호랑 주소 알지? 그리고…….”
“아빠, 이만큼 이야기했어. 나 이제 아기 아니야.”
그렇게 아빠의 걱정을 일갈하고는 랑일이는 지금 희원의 다리를 붙잡고 얼굴을 비비댔다. 랑일이의 그런 행동을 희원은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받아들이며 기준을 안심시키기에 바빴다.
“아버님, 부담임 선생님도 계시고요, 보조 선생님들도 계시고요…….”
기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랑일이가 다시 손을 위로 뻗었다. 자신을 안아 달라는 뜻임을 아는 희원은 자연스레 랑일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 랑일이가 희원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한테 좋은 냄새 나요. 선생님 뭐 먹었어요? 사탕?”
“아니,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희원은 기준과 말하던 걸 멈추고는 랑일이랑 눈을 맞췄다.
“이랑일, 내려와.”
기준이 낮은 목소리로 랑일이를 불렀지만 랑일이는 희원의 목을 끌어안고는 그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들은 척도 안 했다. 희원이 목덜미에 비벼지는 아이의 머리칼이 간지러운지 작게 웃었다.
아침에 희원을 마주할 때마다 기준도 느끼는 거였지만 희원에게는 달콤한 과일 냄새가 아주 연하게 났다. 신경 쓰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향이었다.
체격을 봐서는 오메가 같기도 한데 오메가 페로몬이라고 하기에는 거의 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향수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자, 랑일아.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으응. 선생님 계속 안아 주세요.”
랑일이가 고개를 저으며 희원의 목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희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당황스러운 건 기준뿐이었다. 이랑일이 누구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1년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드물었다. 게다가 랑일이는 이렇게 누구 품에 덥석 안겨서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대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희원이 여전히 랑일이를 안은 채 기준에게 말했다.
“아버님, 다녀오세요. 오늘 수목원 잘 다녀올게요.”
“아빠, 안녕.”
랑일이가 작은 손을 흔들며 어서 가라는 듯 굴었다. 기준은 살짝 미간을 좁히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럼 선생님,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길고 늘씬한 몸이 뒤돌아 차가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희원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랑일이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 * *
기준은 늘 일이 많았고 바빴다. 그래서 유치원 하교 시간에 늦게 도착하는 부모 중 한 명이었다. 기준이 도착했을 때 랑일이는 마침 유치원 마당 잔디밭에 앉아서 또래로 보이는 아이와 다른 선생님과 이야기 중이었다.
“이랑일!”
기준을 발견한 랑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툭툭 옷을 털었다. 옆에 있던 선생님이 랑일이의 옷을 마저 털어 주고는 옆에 놓인 랑일이 가방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오셨어요?”
기준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어째 늘 보이던 희원이 없었다. 3주 동안 희원은 아침과 저녁으로 손수 나와서 인사를 하고 배웅을 해 줬는데…….
기준이 이상하다 생각하는 찰나, 랑일이가 제 아빠를 잡고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놀란 기준이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랑일이가 먼저 말했다.
“아빠, 선생님이 아파서… 병원에……. 으앙.”
이렇게 우는 애가 아니라서 기준은 깜짝 놀랐다. 일단 랑일이를 안아 든 기준이 어떻게 된 일이냐는 얼굴로 선생님을 쳐다봤다.
“랑일아, 울지 마. 희원 선생님 내일은 괜찮으실 거야. 응? 울지 말자. 괜찮아.”
선생님은 랑일이를 달래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수목원의 놀이터 미끄럼틀에서 놀던 랑일이가 작은 미끄럼틀에서 내려오는 길에 휘청거리며 옆으로 쏠렸다고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희원이 망설임 없이 그대로 랑일이를 받았다고 한다.
아무리 높이가 어른 키보다 작은 높이의 미끄럼틀이라고 해도 그대로 아이가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면 발목이 삘 수도 있고 잘못하면 머리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버님, 다른 선생님들도 주변에 같이 있었는데 그 찰나에는 너무 놀라서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희원 선생님이 몸 날려서 랑일이 받고, 어깨도 아플 텐데 애들 끝까지 돌보다가 결국 다른 선생님들한테 등 떠밀려서 병원 간 거예요.”
기준은 정말 깜짝 놀랐다. 희원이 아니었으면 랑일이가 자칫 크게 다칠 뻔했으니까 말이다. 기준은 희원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아무리 작은 아이라고 해도 위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받았으면 그 무게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갔을 거다.
“선생님, 으아앙, 선생님.”
랑일이는 기준의 목을 끌어안고는 계속해서 울었다. 기준이 랑일이의 등을 도닥여 주며 달랬다. 집에 오는 길에 랑일이는 오늘 하루 피곤하고 놀랐는지 결국에는 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기준은 랑일이를 침대에 눕히고는 희원에게 전화를 했다. 요즘은 교사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전화번호를 공개하지 않지만 희원은 아이에 대한 용건이라면 언제든 전화하라며 자신의 개인 번호를 학부모들에게 알려 주었다.
한참 동안 통화음이 울려 댔지만 아직 병원인지 희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 * *
다행히 병원에서는 크게 문제는 없다고 했다. 근육이 좀 놀라서 아플 테니 약을 먹고 찜질을 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면 괜찮을 거라는 말에 희원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아프면 자기의 귀여운 아가들을 돌볼 수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희원은 병원에서 나와 유치원에서 가장 친한 선생님께 전화를 하려고 했다. 남은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는 걸 못 봤는데 잘 갔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 어…….”
핸드폰 액정을 본 희원의 얼굴이 급격히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부재중 전화에 랑일이 아버지 번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희원은 기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목구비가 서로 잘났다고 자랑하는 듯 또렷하면서도 화려하게 어울려 있었던 모습이 기억났다.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은 눈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 있어 강하고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오뚝한 코에 붉은 입술, 그리고 하얀 얼굴은 그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와는 상반되게 예쁘장했지만 그보다 차가운 인상과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랑일이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혼나는 거 아닌가.”
희원이 중얼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희원은 알고 있었다. 랑일이가 우성 알파임을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아빠인 기준 역시 우성 알파임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극우성 알파일 거였다.
예전처럼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차별이 많이 없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오메가들은 알파 앞에서는 위축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희원같이 페로몬 문제 때문에 베타에 가까운 오메가는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때때로 주눅이 들곤 했다. 희원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기준입니다.
사무적인 태도에 희원이 숨을 들이마셨다.
“랑일이 아버님 안녕하세요. 저 랑일이 담임 이희원입니다.”
―아, 네. 선생님.
“전화하셨기에…….”
―네. 다른 선생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랑일이 때문에 다치셨다고요.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병원에서 괜찮대요. 그리고 제가 더 잘 봤어야 하는데……. 제가 더 죄송해요.”
기준과 희원은 서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다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희원은 맥이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굉장히 예의 바른데 그만큼 사무적이었다. 딱딱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희원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자신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작은 몸을 떠올렸다. 반면 애교 많고 귀여운 랑일이는 그의 아버지와 전혀 달랐다. 희원은 어서 나아서 내일 웃는 낯으로 랑일이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랑일이를 생각하자 저절로 웃음이 입꼬리에 걸렸다.
* * *
랑일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랑일이는 기준의 걱정과는 달리 적응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재미지게 생활했다. 오늘은 유치원에 데리러 온 기준을 보자마자 대문 앞에서 종이 몇 장을 쥐여 주었다.
“아버님, 오셨어요? 랑일아, 아빠께 먼저 인사드려야지.”
“아빠, 다녀오셨어요.”
랑일이는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말했다.
“아빠, 유치원 오래.”
“응?”
랑일이의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기준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희원을 쳐다봤다.
‘오늘도 강아지네.’
여지없이 자신과 똑 닮은 멍멍이 앞치마를 두른 희원이 웃으며 랑일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새 학기 학부모 면담이 있어요, 아버님. 다음 주 금요일 저녁 6시에 혹시 오실 수 있을까요? 시간이 안 되시면 다른 시간으로 바꿔 드릴게요.”
랑일이가 유치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했고 눈앞에 서 있는 이희원 선생에 대해서도 궁금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사실 기준은 요즘 꽤나 바쁘긴 하지만 없는 시간이라도 쪼개서 면담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다음 주 금요일은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가정의 날이었다. 그날은 전 직원이 4시에 퇴근했다. 사내 유치원이기 때문에 회사의 일정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희원이 랑일이네 상담 시간을 굳이 6시로 잡은 것은 가정의 날이라고 해도 기준은 일찍 퇴근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지금까지의 랑일이 하원 시간으로 봐서는 말이다.
“네, 시간 괜찮습니다.”
“혹시 빠른 시간 잡아 드릴까요?”
희원은 그래도 자신이 넘겨짚은 게 아닐까 싶어서 스리슬쩍 물었다.
“아닙니다. 6시가 좋습니다.”
역시나 단호한 대답에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온대요?”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랑일이가 희원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기며 물었다.
“응, 아빠 오신대.”
희원이 랑일이와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들과 있어서 그런지 웃는 모습이 꾸밈이 없다고 기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유치원에서 거의 2주 전에 일정을 잡은 탓에 면담일이 다가올수록 기준은 더 안절부절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당연했다. 그도 아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는 아빠였기 때문이다.
금요일이 되자 기준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십 명이랑 하는 회의에서도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호령하는 이기준 이사는 어디로 갔는지, 기준은 아침부터 내내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네, 이사님.”
기준의 호출에 원 실장이 안으로 들어섰다. 원 실장에게는 딸이 두 명 있었다. 이미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그래도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 실장님, 혹시 유치원 학부모 면담에 참여해 본 적 있으십니까?”
“네, 오늘 도련님 면담일이라고 하셨죠?”
이사실 책상 달력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게 보였다. 물론 기준의 핸드폰에도 표시가 되어 있었고 말이다.
“면담하러 갈 때 무슨 선물을 해 가야 할까요?”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원 실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사님, 요즘에는 유치원에서도 일절 선물 같은 걸 받지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래도 뭔가를 좀 하고 싶은데요.”
기준은 지난번 랑일이의 수목원 미끄럼틀 사건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신세 지고 사는 걸 못 견디는 기준이 그걸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오늘은 아마 받지 않으려고 할 테니 추후 가벼운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기준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정리하고 퇴근하세요.”
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깔끔하게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원 실장을 비롯한 비서들은 기준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유치원 문 앞에 선 기준은 한 번 숨을 크게 고르고 벨을 눌렀다. 당연히 희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학부모와 면담 중인지 기준을 맞이한 이는 다른 반 선생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랑일이는 지금 다른 교실에서 놀고 있으니 편하게 말씀 나누시면 돼요.”
기준은 안내에 따라 교실 근처로 향했다. 희원은 다른 학부모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버님.”
오늘은 새끼 고양이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이 그려진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입는 앞치마마다 꼭 자기 같은 것만 입는다고 기준은 생각했다.
기준은 희원이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아서 희원이 준 주스를 마시며 면담을 시작했다.
“여기 보면 아버님께서 랑일이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지 궁금하다고 적으셨잖아요. 랑일이는 리더십도 있고 다섯 살밖에 안 되긴 했지만 그 뭐랄까… 카리스마가 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랑일이를 굉장히 잘 따르고 좋아해요. 그러니까 랑일이 친구 관계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랑일이는 이기준의 아들이 틀림없었다. 다섯 살짜리에게 리더십과 카리스마라니? 기준은 뿌듯해서 점점 광대가 올라갔다.
사실 기준은 랑일이의 교육적인 면은 걱정이 안 되는데 친구 관계가 가장 걱정이었다. 엄마 없이 자란 랑일이가 정서적으로 결핍이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엄마가 없다는 이유로 의기소침해져 있으면 어쩌나 염려스러웠는데 친구들과 잘 지낸다니 다행이었다.
기준과 희원은 랑일이의 생활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기준은 랑일이가 집에서와는 달리 유치원에서는 다정하고 애교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랑일이는 아빠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는 의젓한 도련님일 뿐이었다. 어린아이 같은 부분이 없어서 걱정스러울 정도였는데 유치원에서는 평범한 여느 또래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기준도 모르던 거라 신기하기도 하고 묘한 배신감도 느꼈다.
끝으로 희원이 말했다.
“아버님, 랑일이가 왼손잡이인 건 아시죠? 왼손잡이 중에는 양손을 다 쓰는 아이도 있는데 랑일이는 완전히 왼손잡이더라고요. 그래서 가끔 방향을 헷갈려 하기도 해요. 그런 건 그냥 과정 중의 하나니까 굳이 오른손을 쓰게끔 안 하시는 게 좋아요. 물론 요즘에는 굳이 그렇게 하지도 않지만 혹시나 싶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도 왼손잡이라서 랑일이 보면 재밌고 신기해요. 어? 근데 아버님도 왼손잡이세요?”
기준이 컵을 들고 프린트를 넘기고 하는 걸 유심히 보던 희원이 물어봤다. 그러고는 되게 신기해했다. 원래 왼손잡이가 흔하지 않은데 여기 다 모인 것 같다며 말이다.
그 뒤에도 희원은 이런저런 부분에 대해 세심하게 말해 주었다.
“아버님, 또 다른 궁금하신 사항이나 하실 말씀 있으세요?”
희원은 오른손에 찬 시계를 힐긋 보고는 물었다. 그에 기준이 덤덤하게 말했다.
“랑일이가 엄마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엄마 자리에 대한 부재를 많이 느낄 겁니다. 결핍이 분명히 있을 거고요.”
희원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어려운 화제였다. 유치원 교사로서 굉장히 민감한 화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희원이 지금까지 겪은 여느 결손 가정과는 다르게 이상하리만치 랑일이네 집안은 랑일이의 엄마에 대한 화제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지금도 기준은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듯 말했다. 이런 점 때문에라도 희원은 매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입학 전에 랑일이 할머니가 상담을 하러 왔을 때도, 입학 뒤에 원생 카드를 적어 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마 집안 자체가 언론에 노출되어 있어서 애초부터 숨기거나 금기시하는 게 불가능하니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하던 희원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버님, 더 많이 사랑해 주시면 돼요. 유치원에 있는 시간에는 제가 그런 결핍을 느끼지 않게 더 많이 사랑해 줄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희원의 더 많이 사랑해 주겠다는 말이 기준에게 와닿았다. 어찌 보면 ‘뭐가 그리 두루뭉술하게 대꾸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학술적, 이론적으로 다가오기보다는 마음을 다하겠다는 말이 기준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앳되어 보이기만 했던 얼굴 속에 성숙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희원은 계속해서 찬찬히 말했다.
“제가 원장 선생님이나 원감 선생님처럼 오랜 경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섯 살만 8년째예요. 저 믿어 주시고 맡겨 주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사랑할게요.”
기준은 가슴 한쪽이 찌르르 울리는 걸 느꼈다. 유치원은 작은 학교이다. 보육보다는 교육에 조금 더 비중을 두는데 희원은 감정적인 부분을 먼저 이야기했다.
그런데 잠깐! 8년? 도대체 몇 살이라는 거지? 기준은 갑자기 밀려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저… 근데 선생님…….”
“네, 뭐 궁금한 거 있으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선생님 나이가…….”
“네? 아… 나이… 으하하.”
방금 전까지 듬직해 보였는데 아이같이 웃는 모습을 보니 마냥 어려 보이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 어려 보여서 물어보시는 거 맞죠? 으힛! 저 생각보다 나이 많은데……. 저 서른이에요.”
“네? 서른이요? 아, 나이 물어봐서 죄송합니다. 요즘 그런 거 물어보면 실례라던데.”
기준은 정말로 놀랐다. 생긴 건 열아홉처럼 생겼는데 자신과 세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 거였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버님. 아, 그런데 랑일이가 우성 알파 맞죠?”
“아, 네.”
“성별란에 알파라고만 쓰여 있어서요.”
예전과 다르다고 해도 여전히 알파와 오메가는 성별란부터 표기하게 되어 있었고, 계급과 차별이 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상위 그룹에 우성 알파들이 있었다.
기준이 놀 그룹의 이사라는 것과 차기 주인이 될 몸이라는 것은 암암리에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기준은 어릴 때부터 랑일이가 상위 계층이라는 이유 때문에 역차별을 받는 게 싫어서 우성이라는 것을 빼고 기입했는데 숨길 수 없는 사실인 듯했다.
“오메가도 있고 베타도 있는데 그 페로몬이라는 게 어릴 때부터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사들은 상세하게 알고 있어야 하거든요.”
덧붙인 설명에 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오늘 상담을 통해서 이희원 선생이 생각보다 나이가 있다는 것과 자기보다 랑일이에 대해서 더 파악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해요.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기준과 희원이 교실에서 나오자 저 멀리서 체구가 작은 아이가 문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랑일이가 나왔다.
“아빠!”
랑일이가 달려 나와서 기준의 손을 잡고는 올려다봤다. 기준이 왠지 뿌듯한 마음에 랑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랑일아, 지금까지 윤이랑 놀았어?”
“네.”
“이제 집에 가야지.”
희원이 랑일이 가방을 챙겨 주었다. 기준이 랑일이 가방을 받으면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십시오.”
“네, 아버님도요. 랑일아, 잘 가.”
계단을 내려가며 인사를 하고는 문 앞에 다다르자 랑일이가 희원에게 두 손을 높이 들어 보였다.
“선생님, 안아 주세요. 우리 주말엔 못 보잖아요.”
희원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랑일이를 폭 감싸 안았다. 랑일이가 작은 손을 등 뒤로 뻗어서 희원의 등을 쓰다듬었다.
집에서는 무뚝뚝하면서 희원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기준은 그동안 봐 왔고 오늘 면담을 통해 들었지만 그래도 좀 기가 막혔다.
“아빠, 뭐 해? 아빠도 선생님이랑 안고 쓰담쓰담 해.”
둘의 모습에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해져 흐뭇하게 보고 있던 기준의 얼굴이 당황함으로 가득 찼다. 기준이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랑일아, 괜찮아.”
“왜? 어서 선생님이랑 쓰담쓰담 해.”
기준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희원에게 보내자 희원이 얼른 웃으며 대답했다.
“랑일아, 아빠랑 선생님은 이렇게 악수할게.”
희원이 얼른 기준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하얀 손이 생각보다 작고 차가워서 기준이 그 손을 내려다봤다. 희원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이 기준의 눈에 그림처럼 와 박혔다.
* * *
오늘은 뭔가 꼬이는 날인 것 같았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출근 시간이 가까이 오자 빗발이 더 거세어지면서 당연하다는 듯 교통 체증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월요일은 도로가 주차장이 될 것을 알기에 기준은 아침부터 좀 예민해져 있었다.
더구나 아침에 중요한 회의도 있었다. 각 팀의 팀장들이 어떤 기획안을 갖고 들어올지 사실 별로 기대도 되지 않는데, 지난번 회의에서 엄청 깠으니까 그래도 좀 나아지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어쨌든 아침부터 조금 예민한 상태로 서두르는데 평소에는 그러지 않던 랑일이가 꽤나 칭얼거리면서 떼를 쓰는 것이었다.
다른 날은 일찍 일어나서 유치원 갈 준비를 하는데, 오늘은 전날 조금 늦게 자더니만 아침에 더 자겠다고 꼼지락꼼지락 늦장을 피웠다. 깨워서 앉혀 놓으면 아직 밤인데 왜 그러냐고 칭얼거렸다. 비가 와서 밖이 어둑어둑해서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기준의 혈압이 상승하고 말았다.
겨우 깨워서 식탁 앞에 앉혀 놨더니 이제는 볶음밥에 들어간 호박이 싫다고, 당근이 싫다고 젓가락으로 골라내고 있는 게 아닌가!
‘저게 진짜!’
그래도 참았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요즘 멋을 부리기 시작한 랑일이가 비가 오니까 비옷도 입고 장화도 신고 우산도 들어야 된다고 했다. 당연히 비옷 따위는 없었다.
“비옷 없으니까 오늘은 장화랑 우산만 하자.”
“싫어! 나도 비옷 입을래. 윤이도 입었어!”
도대체 이 아침에 어디서 비옷을 산단 말이냐. 랑일이가 유치원을 다니면서 점점 친구 이야기를 하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렇게 고집을 부릴 줄이야!
“아빠가 퇴근길에 사 올게.”
“지금 입을래. 지금 사 줘.”
“이랑일, 너 자꾸 떼쓸래!”
평소 기준은 랑일이에게 절대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랑일이가 아무리 의젓하다고 해도 어린아이였다. 떼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준은 그럴 때마다 눈높이에 맞추고 차근차근 얘기해서 풀어 나갔다.
하지만 오늘 랑일이의 떼는 유독 심했고 기준도 예민한 상태였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이름 석 자를 부르자 랑일이가 정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제 아빠를 쳐다보다가 이내 울먹울먹했다.
“울지 마. 뭘 잘했다고 울어. 너 잘한 거 하나도 없어. 울지 마.”
기준이 냉정하게 말했다. 자존심이 센 랑일이는 입을 꾹 다물고 소매로 얼굴을 훔쳤다. 누가 이기준 아들 아니랄까 봐 어린 나이에도 독한 구석이 있었다.
기준은 그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하지만 일단 늦었다. 아이를 설득하는 것도, 갈등을 해소하는 것도 부모가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비까지 오기 때문에 여기서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기준은 랑일이를 차에 태우고 그대로 유치원으로 출발했다.
차에 탄 랑일이는 창밖만 바라보고 제 아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준은 랑일이가 등원하기 전에 풀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달랠 일만도 아니었다. 어쨌든 랑일이가 잘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금쪽같은 내 새끼라고 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훈육도 필요한 법이었다.
유치원 앞에 도착한 기준이 차 시동을 껐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 랑일이랑 이야기를 좀 나눌 필요가 있었다.
“랑일아.”
기준이 뒤를 돌아보며 랑일이를 불렀을 때 랑일이는 작은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고 있었다.
“랑일아, 아빠 안 봐?”
기준이 다시 불렀지만 랑일이는 안전벨트를 벗을 뿐 별 대꾸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랑일이가 문을 열고 내리는 것이었다.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이 그냥 내려 버렸다. 기준이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따라 내렸다.
“선생님!”
랑일이가 언제 봤는지 저 앞에서 다른 아이들하고 인사를 하고 있는 희원을 발견한 것이다. 기준이 랑일이를 잡기도 전에 랑일이가 희원에게 전속력으로 달렸다.
뒤쪽에서 누군가 찰박찰박 물 튀기며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희원이 뒤를 돌아봤다. 저쪽에서 랑일이가 우산도 안 쓰고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희원이 놀라서 인사를 한 아이를 다른 선생님에게 맡기고 랑일이에게 달리기 시작했다. 비가 제법 많이 오는데 그 비를 맞으며 아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랑일이 뒤에서는 희원보다 더 당황한 기준이 허겁지겁 쫓아오고 있었다.
희원은 랑일이에게 재빠르게 달려가서 우산을 씌워 주었다.
“랑일아, 비 오는데…….”
“선생님, 으앙!”
랑일이가 희원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자기를 안아 달라는 듯 팔을 위로 뻗었다.
희원이 얼른 쪼그려 앉아서 한 손으로 랑일이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 우산이 기울지 않게 어깨 사이에 끼고 단단하게 잡았다. 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는 탓에 이미 랑일이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랑일이가 젖은 몸으로 희원의 목을 감고 다리로는 허리를 감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크게 소리 내서 서럽게 울었다.
기준은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심정이 복잡했다.
“이랑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기준이 애써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랑일이는 제 아빠의 목소리에 더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행여 희원이 자기를 내려놓기라도 할까 봐 더 안기면서 어깨를 들썩들썩하면서 울었다.
희원이 랑일이를 고쳐 안으면서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러면서 귓가에 조용조용 속삭였다.
“랑일아, 울지 마. 응? 우리 애기 뚝. 응?”
“선생님…….”
기준이 뭔가 이야기하려고 하자, 희원이 막았다.
“아버님, 랑일이가 속상한 일이 있었나 봐요. 늦으신 것 같은데 출근하세요. 제가 달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기준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그럼 잘 부탁드린다고 머리를 숙였다. 희원이 계속해서 랑일이의 등을 토닥이며 고개를 숙여 기준에게 인사했다.
기준이 돌아서서 차로 향하는데 뒤에서 희원이 말했다.
“빗길에 운전 조심하세요.”
기준이 돌아서서 다시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는 차에 올랐다. 기준은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희원과 랑일이를 보며 가슴 한쪽이 저릿함을 느꼈다.
차가 골목을 돌아서 가는 걸 희원이 랑일이를 안은 채 지켜보았다. 기준도 백미러로 희원이 랑일이를 안은 채 돌아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걸 봤다. 그렇게 시야에서 서로 사라졌을 때 희원이 랑일이를 안고 유치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리 랑일이, 옷 갈아입을까요? 젖은 옷 입고 있으면 감기 걸려. 감기 걸리면 선생님 마음이 아픈데.”
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웃어 보이자 뾰로통해 있던 랑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은 랑일이 옷을 서둘러 갈아입히고 머리도 잘 말려 주었다. 그리고 담요로 폭 감싸서 한동안 품에 꼭 안고 있었다.
기준은 내내 신경이 쓰였다. 랑일이를 잘 타일러서 잘못한 건 이야기하고 남자답게 서로 풀려고 했더니 이 아들이 거기서 문을 열고 뛰어나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날은 아빠로서 많이 속상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게 조금 버겁기도 했다. 강한 기준이지만 아이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서툴고 약한 아빠이기도 했다.
좀처럼 집중할 수 없는데 거기에 중요한 회의는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실무진들 때문에 완전히 파투가 났다. 그 회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아침에 랑일이에게 여유롭지 못했던 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아 기준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이럴 거면 그 연봉을 왜 받는 거냐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기준은 다음 날로 다시 회의를 잡았고 하루 종일 화를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늦게까지 남아서 실무진들을 쪼고 싶지만 워킹 대디는 그게 불가능했다.
회의실에서 나온 기준은 주머니에서 작게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아버님, 랑일이 잘 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희원이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내온 거였다. 랑일이가 유치원에 둔 여벌 체육복으로 갈아입고는 친구들과 블록 쌓기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기준은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내고는 이사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