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26. 형제의 이름으로 (26/30)

26. 형제의 이름으로

“옳지, 좋아. 이리 와라.”

눈썹이 하얗게 센 노의사는 고양이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좀처럼 뒤뜰을 벗어나지 않는 녀석이라 뜰 주위를 조금만 돌아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달빛이 환하게 드는 뜰 한가운데에 앉아 털을 고르고 있었다.

“제법 살이 올랐구나. 이빨이 빠진 자리도 다 아물었고 꼬리의 상처도 나았으니 살 만할 게다.”

노의사 곁에는 그의 허드렛일을 하며 뒤를 따라다니는 간호인이 지혈하는 데 필요한 헝겊이 든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스승인 노의사가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그의 일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살로네 성 분위기가 다른 날과 달라 주위를 흘끔거리게 됐다.

“다른 곳도 아니고 통령 각하의 성에 들어와 이렇게 극진히 치료를 받으니 알아서 제 살길을 잘 찾아온 녀석이야. 운도 좋지.”

“이 녀석 다음은 관저 3층 복도에 있는 노란 고양이가 맞죠?”

“그래. 듣자 하니 그 녀석은 어제부터 1층의 주방 문 앞에 머문다는구나. 그리로 가 보자.”

노의사가 옷에 묻은 털을 털고 일어나는데 멀찍이 물러나 지켜보던 주세페가 다가왔다.

“끝났습니까?”

“예, 이제 주방으로 가야겠습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는지요?”

통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뒤뜰에 있는 고양이를 진찰할 때면 대개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물은 것이었다.

“처리하셔야 할 일이 있어 집무실에 계십니다. 각하께 드릴 말씀이 있으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이제 귀가 잘린 녀석을 보러 갈 차례입니다. 이것 참, 이름이라도 지어 놓으면 부르기 좋을 텐데요.”

주세페가 앞장서자 노의사가 간호인을 데리고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뜰에서와 마찬가지로 실내에서도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자 간호인은 복도를 둘러봤다. 경비병들도 제자리에 있었고 검소한 통령의 성정에 따라 쓸데없는 양초를 낭비할 일 없이 복도의 불도 모두 꺼져 있었다. 전부 평소와 다름없는데 미묘하게 뭔가 달랐다.

컴컴한 복도 끝을 보며 걷는데 앞서가던 주세페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잠깐.”

그는 창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희미하지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순서를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4층 복도에 있는 고양이를 먼저 봐주십시오.”

“예, 위층에서 울음소리가 나네요. 올라가 봅시다.”

왔던 복도를 되돌아가 계단을 오른 그들은 한 층을 더 올라갔다. 양탄자가 깔린 복도에 카펫 위를 걸어 다니는 고양이의 작은 발소리가 울렸다.

“여기 있었구나. 이리 와라, 그래. 기운도 좋지.”

창가에 앉아 손을 핥고 있는 고양이를 발견한 의사가 가까이 다가가 품에 안았다. 뒤로 물러난 주세페는 간호인의 곁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복도 끝에 시선을 뒀다. 이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은밀히 배치한 경비병들이 복도 끝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 * *

“그 일이 있고 나서 다시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갔지. 아, 말해 뭐 하나. 둘도 없는 기회였다니까.”

“잘됐군. 잘됐어. 잠깐, 자물쇠가 왜 이렇게 헐겁게 채워져 있지? 고장이 난 건가?”

하품을 하던 두 간수는 철문의 자물쇠가 덜렁거리자 의아한 듯 서로 얼굴을 봤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간 그들은 손에 든 등잔으로 감옥 내부를 비췄다. 구금돼 있는 죄수들의 머릿수를 세며 계단을 내려가던 두 간수가 동시에 놀란 것은 계단을 전부 내려갔을 때 즈음이었다.

“빌어먹을!”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는 쇠창살 앞으로 다가간 두 간수는 급히 등잔 불빛을 비췄다. 그러나 손발이 묶인 채 그곳에 있어야 할 죄수는 온데간데없었다. 발목의 족쇄를 풀어 헤친 흔적과 돌벽을 파낸 흔적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탈옥을 시도한 자가 있다! 조반니 스포르차! 그자가 이곳을 빠져나갔어!”

고함을 지른 간수들은 감옥 내의 다른 죄수들에게 위협적으로 등잔을 들이대며 윽박질렀다.

“그자가 언제 탈옥을 했지? 대답해라! 그가 언제 이곳을 탈출했느냔 말이야!”

그러나 죄수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욕지거리를 퍼부은 간수들은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탈옥 사건이 발생했어! 살인 사건의 죄수가 지하 감옥을 탈출했다고! 그를 당장 잡아 와야 해!”

* * *

“그 과정에서 비밀을 알아차렸나 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오늘에서야 밝혀진 것 같습니다. 불과 몇 시간 앞서 모든 사실을 알아차렸으니 지독한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사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소? 다 알면서도 참을성 있게 때를 기다렸다니 그자도 보통 치밀한 자가 아니군.”

“이렇게 된 이상 제6군단에 알려 상위 단원들부터 생포하는 수밖에 없어. 그들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방법이 유일해.”

“군대를 움직여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는 거요?”

“네.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군을 동원해 검거에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없고 무식한 데다 정세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없어 말을 더하는 것이 옳은 일인 줄 모르겠소만, 군을 동원해 소탕에 나서기보다는 우선 작전을 짜는 것이 먼저인 것 같소. 나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각오를 하고 루바노 전역을 돌풍처럼 휩쓸고 지나갈 방법을 강구해야 하오.”

“단테의 12인이 진실을 알아차렸다는 점에서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곳에 앉아 머리를 맞대는 동안 그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몸을 숨길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숙집에 도착하자 엘베라는 로미오의 방으로 옮겨졌다. 이 밤중에 의사를 구할 수가 없어 세 사람 중 그나마 의학적 지식이 있는 발레리아가 나서서 엘베라의 상처를 살폈다. 의사인 여동생의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총동원한 발레리아는 엘베라의 상처가 보기보다 깊지 않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엘베라는 호흡이 고른데다 이곳으로 옮겨오기 전에 다행히 피가 멎었다.

로미오는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엘베라의 숨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그녀가 죽을 의도로 스스로를 찌른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저 잠시 함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함인지도 몰랐다. 의도치 않게 적에게 사로잡혀 있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자 자결하는 체하는 방법을 쓴 것일지도 몰랐다.

“저자가 단테놈들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는 거요? 스포르차 선생이 감추고 있던 진실을 깨닫고 너무 놀란 나머지 미처 동료들에게 알릴 새도 없이 로미오 당신을 납치해 추궁했을 가능성은 없소?”

“엘베라는 차기 수장이 될 만한 자격을 가진 자입니다. 적어도 상위 단원들에겐 이번 일과 관련해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전부 전달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무책임한 방법을 썼을 리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단원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 죽음을 택할 만큼 무모한 자가 아닙니다.”

“단테놈들이 엘베라로부터 진실을 전해 듣고도 대책을 강구하지 못해 저들끼리 주저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소? 엘베라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모른 채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에게도 시간이 충분하오. 저자가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어떻겠소?”

“제6군단의 습격을 우려한 상위 단원들이 은신하는 것보다 도망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다면 이미 이동하고 있거나 혹은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반대로 상위 단원들 중 신중한 자들의 목소리가 더 컸다면 숨는 쪽을 택했을 겁니다. 한 번 숨기로 마음먹은 이상 인내심을 갖고 오랫동안 은거할 겁니다.”

오늘 밤에 있을 암살 공모가 거짓 정보였으니 통령의 관저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위협도 감지하지 못한 카를로타는 지금 이곳으로 사람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초조하지만 신중히 기다리는 것이 현명했다. 갑작스럽게 펼쳐친 이 상황을 카를로타에게 전달한다면 그녀도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

“두 분께 설득력 부족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라는 걸 압니다만 그들과 은밀히 접촉하는 것도 방법이 될 듯합니다.”

로미오가 긴 생각 끝에 말을 꺼내자 발레리아가 물었다.

“은밀한 접촉이라니?”

“저와 스포르차 선생님 사이에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만한 일이 벌어졌다고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제가 엘베라의 편에 붙고자 그녀와 만남을 가졌으나 예기치 못한 습격을 당했다고 설명하며 믿음을 심어 주는 겁니다. 상위 단원들 중에는 스포르차 선생님의 친우도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오니시오라는 이름의 상위 단원인데 그분과 접촉을 시도하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포르차 선생님이 밀정이라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테니 그 혼란스러운 마음을 말로써 뒤흔들어 볼 생각입니다. 아니면 엘베라가 깨어나는 대로 그녀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극형을 면하게 해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협상을 하는 겁니다. 단테의 12인을 생포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 공로를 인정해 주겠다고 회유하는 겁니다.”

“협상이 통하겠소?”

“그런 꾐에 넘어갈 만한 자가 아니라 장담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당장 고문을 가할 수 없으니 어떤 방법이든 시도해 봐야 합니다. 일단 자정까지 기다려 봅시다.”

저택 관리인의 집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받은 카를로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중요했다. 그녀가 내릴 판단을 믿는 로미오는 주세페가 되었든 체사레가 되었든 어서 그들 중 한 명이 기별을 주길 바랐다.

“내가 당신을 생포했던 단원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둬야 했던 거요? 목을 꺾어 죽인 게 경솔한 행동이었소?”

“아닙니다. 살려 둬 봐야 번거롭기만 했을 겁니다. 죽은 자들의 시체를 말끔히 치워 두고 돌아왔으니 누군가 그 집을 방문하더라도 당분간은 이상한 점을 모를 겁니다. 늦지 않게 저를 구하러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신과 발레리아가 아니었다면 제가 가진 정보 중 일부분이 그들에게 넘어갔을 겁니다.”

이브는 큰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보초를 서듯 한참 동안 거리를 내다보던 그녀는 엘베라가 누워 있는 방으로 향했다.

“상처를 살펴보고 오겠소. 여차하면 뺨을 몇 대 때릴 테니 소리가 들리더라도 놀라지 마쇼. 누가 아오? 눈을 번쩍 뜰지.”

이브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발레리아가 사이를 두었다가 물었다.

“저택 관리인의 집 안에 있던 그림 액자를 봤어. 그 그림의 존재에 대해 알아?”

로미오는 발레리아의 쪽으로 고개를 돌려 앉았다.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알아?”

“……예.”

로미오가 대답을 꺼리는 것 같자 발레리아는 이브가 듣지 못하도록 소리를 낮췄다.

“왜 통령 각하의 그림이 그곳에 있었지?”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는 일이라 죄송합니다. 각하께서 이번 일과 관련되어 있으시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때가 되면 모든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발레리아가 뭔가 추측하는 것처럼 생각에 잠기는데 방 안에서 이브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동시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로미오와 발레리아가 방으로 들어가자 이브가 창문을 향해 등진 채 놀라서 외쳤다.

“뭐요, 당신! 여기가 2층이라는 사실을 잊은 거요?”

“무슨 일입니까?”

볼 수 없는 로미오와 달리 발레리아는 방 안의 상황을 보고 할 말을 잃은 듯 창가 앞으로 다가갔다. 그 누구도 열어 준 적 없는 창이 활짝 열려 있었다.

위태롭게 매달린 것치고 여유가 있어 보이는 조반니는 허술한 나무 창틀에 의지한 채 집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으며 로미오를 향해 말했다.

“깨어 계셨기 때문에 다행스럽게 보입니다. 이게 얼마 만인가요? 대위님께서 저를 거의 만나 오지 않으셨으므로 직접 찾아왔습니다.”

씨익 웃은 조반니는 긴 다리로 창을 타 넘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누더기 같은 옷차림을 한 그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이브와 발레리아를 무시하고 오직 로미오만을 바라봤다. 이 기회에 한껏 눈에 담아 가려는 것처럼 뚫어져라 응시하며 금방이라도 앞으로 달려들 것같이 로미오의 쪽으로 윗몸을 뺐다. 야윈 얼굴에는 생기 있는 웃음이 가득 번져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가 묘하게 그답지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이 상황 때문에 즐거워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딘가 과장되게 들떠 있었다. 그래서 발레리아는 놀란 와중에 표정이 미묘해졌다. 조반니를 몇 번 만나 보지 않은 이브조차 그 낌새를 눈치챌 정도였기 때문에 그녀도 발레리아와 비슷한 표정이 됐지만 목소리밖에 들을 수 없는 로미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제가 공안국에 죄를 자백했고 그 자백이 끼친 결과로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이 퍼져 대위님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그래서 저의 용서에 대해 희망을 가지며 이곳까지 찾아오도록 했는데 제 자백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한밤중에 2층 벽을 기어오른 기행을 저지른 조반니를 이상한 눈으로 보던 이브는 그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알아듣기 힘든 말을 늘어놓자 인상을 찡그렸다. 로미오를 돌아보니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차갑게 굳어 눈빛에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낯빛에 혼란스러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잠깐이었다. 그는 조반니를 상대로 강한 경계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대위님께서 저를 만나러 오시기만을 기다렸고 고민하실 시간이 필요하셨을 테니 참으면서도 오지 않으셔서 초조한 중이었습니다. 대위님의 목소리가 귀로부터 들리는 것 같아 생각을 자꾸 잃게 되고 얼굴이 아른거릴 때 잠들 수가 없었습니다.”

조반니는 어린아이처럼 미소 짓더니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지저분한 머리도 쓸어내리고 옷소매로 세수를 하듯 얼굴을 닦은 후 자신이 말끔해졌다고 믿고 로미오를 쳐다봤다. 이브와 마찬가지로 발레리아도 조반니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방 안에 한차례 침묵이 감돌고 나서야 조반니의 이상한 어투보다 그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더 날카롭게 반응한 로미오가 입을 뗐다.

“선생님께서 어떻게 여기 계신 겁니까?”

큼직하게 뜬 눈으로 로미오를 보고 있던 조반니는 로미오가 입을 열자 가슴을 부풀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혀로 입술을 핥고 입가를 씰룩댄 그는 보지 못한 사이 로미오가 더 아름다워졌다고 생각하며 중얼댔다.

“하아…… 대위님의 목소리로 드디어 숨을 제대로 쉬는 날이 온 기분입니다. 감옥에서 대위님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렸으며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고 이렇게 다시 만날 때를 손꼽아 고대했다는 것을 생각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이브는 어색한 침묵을 지키며 다시 로미오를 슬그머니 봤다. 조반니가 하는 말을 절반가량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 안에 숨은 노골적인 속뜻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반니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조리 없이 말을 하는 이유는 차치하고, 그는 아무래도 로미오를 보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온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레리아에게 눈빛을 보내는데 그녀의 시선이 조반니의 발에 향해 있었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남루한 조반니의 옷 아래로 그의 맨발이 보였다.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로미오는 조반니의 행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돌아가십시오. 선생님께서 계셔야 하는 곳은 감옥입니다.”

“저는 재판을 당하며 제가 저지른 벌을 달게 받을 것이고 그 단죄를 피하지 않을 것이니 그 사실이 대위님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 주는 관계로 제게 용서를 빌 기회가 주어졌다고 믿습니다.”

“하고 계시는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군요. 왜 알아듣기 힘든 말로 제게 용서를 구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나가 주십시오. 저는 죄를 자백하는 조건으로 선생님을 용서해 드리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몰래 탈옥으로 이곳까지 왔고 제가 감옥을 빠져나갔으므로 공안국이 추적해 위험했기 때문에 이 하숙집의 1층 문이 아닌 2층 창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다시 감옥에 가야 하는 데다 뒤를 봐주는 이 없이 홀로 탈옥하여 저를 미행하는 자들까지 경계해 여간 힘들었던 게 아닙니다.”

명료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조반니는 자신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저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지금까지 망설이고 계셨어도 이 자리에서 간단히 대답해 그 대답을 이유로 저에게 용서를 빌 자리를 주신다면 대위님의 대답을 듣게 돼 돌아갈 겁니다. 어떤가요? 저는 모든 것으로 자백을 통했는데, 사형을 당해 광장의 사형대에 올라가 교수형을 당한다 해도 제게 용서를 주지 않으실 겁니까?”

“이런 식으로 사과를 종용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의미 없는 사과를 통해 선생님을 향한 제 증오를 끝낼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제 마음이 어떻든 용서한다는 말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시겠다면 해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을 용서합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조반니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불쾌함이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할 만큼 강했으나 뒤죽박죽으로 엉킨 그의 호소를 듣는 동안 로미오의 얼굴에는 짙은 의문이 드리워졌다. 조반니는 통제력을 잃은 사람처럼 목소리의 높낮이가 이상했고 말 끝맺음도 제멋대로였다. 그가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조반니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반니는 말의 맥락만 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기괴하게 주절대고 있었다.

“가십시오. 선생님과 더는 대화를 나누지 않겠습니다. 이 이상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로미오가 나가는 길을 알려 주듯 문 옆으로 비켜섰지만 조반니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데다 감옥 안에서 오직 대위님께서 저를 만나러 오기만을 기다려 인내심이 바닥났습니다. 그곳에서는 제가 원한 말의 쓰임도 불가능하고 공안국 간부들이 묻는 말에도 대답해야 하며 제가 필요로 하는 것에 무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위님에 관하여 이야기를 했지만 알아듣는 자가 없었고 저는 오직 대위님만을 생각하기 위해 버텼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제가 사형을 면해 풀려나는 일도 생길 것이나 저는 바치에 있기 힘들어 살인마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제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대위님께서 저를 이런 용서로 받아들여 주신다면 제게 가해지게 될 비난을 참을 수 있는 상태로 될 겁니다.”

침착하게 이야기한 조반니는 무릎을 꿇은 채 로미오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그를 제지하기 위해 나선 것은 조반니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고 판단한 발레리아였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우선 돌아가세요. 단테의 12인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선생께서 투옥되어 있는 동안 그들이…….”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반니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발레리아를 매섭게 쳐다봤다. 노려보는 시선은 집요하고 강렬했지만 그의 얼굴은 수척했다. 어두운 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기력이 쇠한 것처럼 보였다.

다시 로미오를 본 조반니는 넝마 같은 옷을 뒤적거려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내뱉고 사라져 남아 있지 않으면 잊히게 되어 적어 왔습니다. 제가 곁에 없던 상황에서라도 이 편지를 통해 제 진심을 알아주세요. 대위님을 위하면서 마음을 담아 정성 들이고 썼습니다. 대위님께서 읽지 못하실 사정이 있으니 이 자리로써 읽어 드리겠습니다.”

편지는 공안국 내에서 펜과 종이를 훔쳐 급히 적은 것이라 변변치 않았다. 옷 속에 숨겨 넣어 오느라 구겨진 그 편지를 손으로 눌러 편 조반니는 내용을 읽었다.

“대위님, 이 편지를 보여 드리게 될 날이 오기 위해 진심으로 적습니다. 저는 현재 지하 감옥에 있으며 죄수들이 있던 이곳에 낮과 밤은 구분할 수 없고 온종일 어두워 그 누구와도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좁은 공간입니다. 저는 독살의 위협 앞에 시달리게 되고 질식에 이르는 독한 연기로 괴로우나 밤새 대위님을 생각하며 그런 괴로움을 참아 왔고…….”

편지가 떨어지자 조반니는 오랫동안 굶어 뼈대가 도드라진 손으로 편지를 주웠다. 반듯하게 펼쳐 다시 읽으려고 했지만 그 전에 이브가 막아섰다. 조반니의 말을 들으며 아연해 있던 이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만! 헛소리는 이쯤하고 그만 나가쇼. 대체 왜 거나하게 취한 주정뱅이같이 말하는 거요? 갇혀 있는 동안 미치기라도 했소?”

조반니가 네 명을 살해하고 투옥됐다는 사실을 이브에게 알려 준 것은 마르코였는데 그는 조반니가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서도 그를 두고 명백히 살인마라고 칭했다. 본래 의사였지만 이제 아니니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로미오가 감당하기 힘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브는 조반니를 이 방에서 내보내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다고 생각했다.

“선생을 끌어내고 싶지 않으니 제 발로 걸어나가쇼. 문은 저쪽이오.”

“아뇨, 편지를 스스로 전부 읽어 드리며 제 뜻을 전해 대위님께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가 쓴 편지로부터 반드시 읽어 드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 그런 꼴로 이런 밤중에 창을 타고 침입한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오. 심지어 당신은 살인자가 아니오? 나도 사람을 죽여 본 일이 있지만 오로지 살해를 목적으로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소. 범상치 않은 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사람을 죽인 살인마라니 당신의 그 눈빛에서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요.”

“마음이 되는대로 생각하세요. 대위님과는 저 사이에 이렇게 풀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방해 말고 비켜 주시지요.”

“우린 지금 시간이 남아돌아 한가하게 이곳에 모여 있는 게 아니오. 오늘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오.”

“당신이 저를 방해하도록 하는 이유 등이 짐작되나 대위님께서는 당신에게 마음을 주실 일이 없게 될 겁니다. 잠깐이라도 되니 이 방에서 나가십시오. 당신 따위에게 끼어들어 줄 문제도 아닙니다.”

“미쳤군. 제대로 미쳤어. 당장 일어나쇼!”

이브가 조반니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려 하자 그는 손을 뿌리치며 몸을 뒤로 젖혔다. 몸싸움이 번질 것 같자 발레리아가 로미오의 팔을 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스포르차 선생이 맨발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 같아. 옷이 너절한 데다 야위어 보여.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니 더 소란을 일으키기 전에 돌려보내는 게 좋겠어.”

한때 로미오는 투옥된 조반니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단테의 12인의 연루자를 감금하고 취조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죄수들이 투옥 중에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는지 잘 알았기에 조반니의 모습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말을 조리 있게 하던 자들도 취조실에서 이틀을 보내면 점점 말을 더듬고 했던 말을 반복하며 맥락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게 된다. 고문이 시작되면 인치되어 올 때의 모습이 어떠했든 비렁뱅이처럼 추레해지고 야위어 주위를 정돈하거나 몸치장에 신경 쓸 여력을 잃는다. 참을성 많고 이성적이었던 자도 감정 조절이 어려워져 쉽게 흥분하고 성을 낸다.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면 처음 취조실에 끌려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조반니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좁은 감옥 내에서 먹고 자는 동안 투옥되기 전의 모습을 점차 잃어 갔을 것이다. 고립된 생활이 지속되며 그의 병증도 악화되었을 테고 그 과정에서 그를 돌봐 주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광증에 관해서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데도 논리 없는 말을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는 조반니를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움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그는 죗값을 치르기 위해 투옥된 것이었다. 광질의 악화를 막을 방법 따윈 없고 설사 있다고 해도 로미오 자신이 염려할 이유는 없는데 미치광이처럼 떠들어대는 조반니를 이렇게 눈 앞에서 마주하니 경악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런 편지를 적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된 처지로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허기와 졸음을 이기지 못한 조반니는 바닥을 손으로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편지를 고이 접어 두 손에 쥐었다.

“제게는 대위님이 필요하여 대위님의 곁에 머물고 싶어 떨어져 있고 싶지 않습니다. 투옥된 상태 때문에 대위님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하루도 견디기가 힘들어 대위님께서 제게 얼마나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던지 그 실감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를 소유할 방법도 없지만 대위님께서 제 것이 되는 상상에 빠진 적이 많습니다. 그러한 상상을 하며 다른 이들이 대위님의 주위를 맴돌고, 그러다 대위님에게로 마음을 뺏겨 대위님의 곁을 차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조반니의 난해한 어투에 로미오는 형용하기 힘든 심정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자신의 말을 어기고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는 여전했지만 그 분노 위에 다른 감정이 덧대어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조반니에게 논리적인 설명과 설득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는 광증에 잠식당한 것처럼 보였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미쳐 버린 것 같았다.

“돈을 주고서라도, 제 남은 삶을 통한 대가로라도 대위님의 마음을 사고 싶습니다. 대위님께서 영원히 제게 용서를 주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칼날에 심장이 베이는 것같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위님의 용서를 통해 받아 내지 못한다면 저는 다시 투옥되고 숨이 끊겨 죽어 갈 것입니다. 저를 미행하려는 자들과 해할 자들은 어떻게 돼도 좋습니다. 제게는 대위님만이 필요로 하며 대위님의 모든 것이 제 것으로 된다면 죽어도 좋습니다. 태어나 누군가를 이런 정도로 원하고 그리워한 일이 없습니다. 제발 제게 용서를 주세요. 부디 지금 이 자리로부터 제게 살아갈 이유를 주십시오.”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축이며 이야기하는 조반니는 간절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그럴수록 로미오는 더한 혼란과 분노에 휩싸였다. 말을 이을 수 없을 정도의 강도 높은 감정이 몸을 덮쳤다.

“선생님께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스스로 하고 계신 말씀을 돌아보십시오. 투옥되어 계신 동안 선생님께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제가 마음이 급했던 관계로 두서없이 이야기하듯이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마음까지 진실이기에 그런 것은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제가 하는 말을 들어주시기만 하세요. 저는 사형에 당한다면 대위님과 함께할 수 없게 되므로 사형을 피했어야 하지만 대위님께서 제가 죗값을 받길 원하시므로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제 마음과 제게 이루어져 있는 영혼과 이 몸의 모든 것이 대위님의 것입니다. 제 목숨까지 대위님께 묶여 있으니 저를 살게 하며 죽게 하는 것도 전부 대위님의 감각에 맡겨진 일입니다.”

조반니는 부디 용서해 달라는 말로 끝을 맺더니 다시 편지를 읽었다. 로미오는 그가 정말로 미쳐 버렸다는 생각에 더 이상 경악스러워할 여력도 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는 완전히 통제력을 잃고 있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 없을 거라고 믿어 왔는데 조반니를 향한 경멸 어린 마음이 서서히 무력화되었다. 광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고 그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는 조반니의 존재 자체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광증의 발병 원인도, 이유도, 그 경과도 알 수 없지만 조반니는 구금돼 있는 동안 그 증세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돼 있었다. 단지 비논리적인 망상을 하는 것에 불과했던 그는 그사이 흡사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그 사실에 로미오는 더 이상 조반니를 향해 강한 거부감을 표출할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하십시오. 더는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께선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이미 공안국이 선생님을 찾고 있을 겁니다. 쫓아내지 않을 테니 그만 이 방에서 나가십시오. 나가서 기다리십시오.”

“아니요. 대위님께서도 아직 제 마음을 알지 못하셨던 겁니다. 제 진심을 알고 있지 않으실 겁니다. 대위님을 모르게 됐던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면 믿으실 건가요?”

“지금은 제 믿음을 논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하고 계시는 말의 방식을 보십시오.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선생님께 해 드릴 것이 없으니 속히 공안국으로 돌아가십시오.”

“제가 어떠한 말로 이야기했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위님께로 향한 제 마음만 있다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 이 마음을 알아주세요. 대위님께 품은 제 마음이 영원히 여전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주절대는 조반니의 간절한 목소리에 로미오는 점점 더 짙은 허탈함을 느꼈다.

자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반니에게 겁탈을 당하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데 그는 그의 마음에 대한 진실성만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조반니의 마음을 부정했던 지난번과 달리 어쩌면 그 일부분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조반니는 미쳐 가면서도 그의 마음만은 거짓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일신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마음은 진실된 데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러 감정들이 솟구쳐 마음을 괴롭혔다. 조반니가 정말로 자신에게 애정을 갖고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도,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 조반니가 미쳐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가 투옥된 이후 지난 며칠간 미칠 듯한 증오심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증오심과 더불어 비참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반니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소화시키려 애써 왔는데 도리어 더 얽매이는 기분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면 될 터인데.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말은 물론 그의 광증도 못 본 체 무시해 버리면 될 일인데.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 편지를 여기에 둘 테니 대위님을 제외하여 그 누구도 함부로 읽는 것은 안 됩니다.”

조반니는 침대 옆의 작은 탁자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제야 침대에 누워 있는 엘베라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자가 어떻게 하여 이곳에 누워 있고 제가 그것을 이제야 본 겁니까?”

그때까지 조반니와 로미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이브가 두 사람의 관계를 오해한 채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내게 당신의 말을 해석할 능력이 있다는 걸 고맙게 생각하쇼.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소? 단테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소. 이자가 당신과 로미오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로미오를 납치해 협박했소.”

조반니는 순식간에 얼굴 전체가 붉게 달아올라 눈을 번뜩였다.

“언제 납치를 통하여 대위님을 데려가 협박까지 했단 겁니까? 어떻게요?”

“설명하기 긴 이야기라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없소. 분명한 것은 당신이 단테놈들을 와해시키려는 뜻을 갖고 그놈들 틈으로 숨어들었다는 걸 그들이 알아차렸다는 것이오. 바로 수 시간 전에 엘베라 저자가 미끼를 던져 로미오를 데려갔소. 내가 뒤늦게 쫓아갔지만, 잠깐, 뭘 하는 거요!”

“감히 대위님께로 위협을 가하였다니 죽여 버리겠어!”

별안간 고함을 친 조반니는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엘베라의 목을 조르려고 덤벼들었다. 놀란 이브가 그를 막았지만 조반니는 그 잠깐 사이 크게 분개해 있었다.

“왜 이러는 거요!”

“이자가 대위님께 위해를 가함으로써 납치하려 한 동안 당신은 뭘 했던 겁니까? 이런 쓸모도 없는!”

어떻게든 엘베라의 목을 조르기 위해 달려드는 그를 억지로 침대에서 떼어 내고 나자 조반니는 성을 내며 이브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로미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괜찮으셨던 건가요? 엘베라가 대위님을 데려간 뒤 무엇을 한 겁니까?”

로미오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발견한 조반니는 로미오가 뒤로 물러서기도 전에 걱정스레 어깨를 붙잡았다.

“뺨의 상처는 그런 이유로 생겼던 이유입니까? 목에도 상처는 있습니다. 이런, 어쩌면 이런 큰 상처가… 다른 곳에는 괜찮으셨던 겁니까?”

조반니의 손이 닿자 망연해 있던 로미오는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불쾌함을 드러내며 그의 손목을 거칠게 쳐 냈다.

“제 몸에 손대지 마십시오. 선생님께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로미오의 표정이 매서워졌지만 조반니는 퍼뜩 프란코의 일을 떠올리고 다시 로미오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 순간 로미오는 조반니에게서 나는 악취를 맡았다.

“바르톨루치 위원은 어떤 일로 해결됐습니까? 제가 탈옥을 하고 그자의 집으로 찾아가지 않으며 이곳으로 왔던 이유는 대위님을 생각해서입니다. 대위님이 아니었을 경우 그자의 집으로 찾아가고 살해했을 겁니다. 그자가 다시 대위님에게 찾아와 뭐라고 한 겁니까? 줄리오에게 부탁하며 그자를 처리해 버리려고 했지만 망할 줄리오 녀석도 제 말을 무시했습니다. 프란코 그자가 대위님께 무슨 말을 했던 겁니까? 무례한 짓을 굴었던 건가요?”

“바르톨루치 위원이 제게 어떤 말을 했든 무엇이 중요합니까? 우습군요. 그자가 설사 제게 위해를 가한다 해도 선생님께서 저지르셨던 잘못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겁니다. 또한 제 선택에 의해 선생님의 생사 여부가 결정되는 것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을 결정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권한이 주어진다면 제가 어떤 선택을 할지 선생님께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로미오는 조반니가 짧은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숨소리에선 조급함과 불안함이 느껴졌다. 도망자 신세이기 때문인 것일까.

조반니가 바치 내에 존재하는 다수의 의사 협회로부터 회원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그라나 부인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니었다. 자신이 알던 조반니도 아니었다. 평생을 바쳐 이뤄 온 그의 명성과 업적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 카를로타가 목숨을 살려 준다 해도 평생 이곳을 떠나 숨어 살아가야 할 것이다.

눈앞에서 조반니가 사라지게 될 테니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자신은 그에게 동정심을 느낄 필요가 없으며 아량을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의 광증을 고려해 이해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가 미쳐 버렸다고 해서 이전에 저지른 잘못이 쇄신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반니가 한 짓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 판단에 이견은 있을 수 없다. 없어야 한다. 없을 것이다.

“대위님께서는 제가 죽어 없어지는 대로 절대로 만나지 못하여도 아무렇지 않으신가요?”

조반니가 뒤로 물러서자 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발소리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

“……제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아도 슬픔 없이 평온하게 일상을 보내며 잊게 되실 건가요?”

로미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조반니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성적 논리가 통하지 않는 무의식 너머에 자신의 본심이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반니에게 혼란과 분노, 허탈함과 같은 여러 감정을 번갈아 느끼는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본심이 숨어 있었다.

그 본심이 혐오스러웠지만 강하게 부정하기 힘들었다. 조반니가 죽어 없어질 경우 자신이 그를 완벽히 잊고 평범히 살아갈 가능성.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미친 것은 조반니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몰랐다.

“두 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의미 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을 시간은 없으니 끌려 나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제 발로 걸어 나가십시오…… 당장.”

로미오가 문을 가리키자 조반니는 엘베라를 한 번 쳐다봤다. 그는 엘베라가 어떻게 진실을 알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다시 로미오에게 시선을 보냈다.

탄력 있고 매끈하게 광채가 나던 조반니의 뺨이 해쓱해진 채 떨렸다.

“몸을 조심히 하시고 위험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대위님의 안위가 가장 안전해졌기를 바랍니다. 대위님께서 잘못되실 때 저는 고통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으며 대위님께 제 목숨이 저당 잡히고 맡겨져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루바노가 무너진 모양이어도 대위님만은 무사하고 계셔야 합니다.”

조반니는 금방이라도 바닥에 엎드려 로미오의 발등에 입을 맞출 것 같은 눈빛으로 그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느리게 걸음을 떼 방을 나갔다. 문을 닫고 나갔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브가 창가로 다가가 내려다보니 거리로 나간 조반니는 주위를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며 공안국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흰 맨발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거요? 아니, 그보단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이상하지 않소? 내가 스포르차 선생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까무러쳐 다시 감옥으로 돌아갈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요. 그리고 다시 제 발로 감옥으로 돌아갈 거라는 말을 믿어도 되는 거요? 거리를 돌아다니며 죄 없는 사람들을 살해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소?”

“선생님께선 정신이 온전치 않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본래 변덕스러운 분이라 일의 우선순위를 가리는 데에 선생님 자신의 득실을 가장 따지기도 하십니다.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약속은… 아마 지키실 겁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그때 엘베라에게서 기척이 느껴졌다. 미세한 소리였지만 로미오가 가장 먼저 기척을 듣고 침대를 보자 이브와 발레리아도 뒤를 돌아봤다.

“그녀가 깨어난 겁니까?”

발레리아가 침대 가까이 다가가 힘겹게 눈을 깜빡이는 엘베라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안색은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다.

“응, 깨어났어. 하지만 얼굴빛이 너무 좋지 않아.”

“대화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대답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

로미오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 서서 침대맡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말했다.

“정신이 든다면 대답하십시오. 단테의 12인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떤 방책을 마련한 상태입니까? 당신은 분명 그들에게 이번 일에 관해 언질을 했을 겁니다.”

엘베라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천장을 살피다가 도로 눈을 감았다. 마른 입술을 닫은 그녀는 신음하듯 몇 차례 가슴을 들썩이며 급히 호흡했다.

“대답하십시오. 당신은 부상을 입은 몸입니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으며 우리는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겁니다. 당신은 상위 단원들에게 저와 스포르차 선생님에 관한 비밀을 알리고 방도를 마련했을 겁니다. 모든 계획을 철회하고 몸을 숨기는 것이 당신들이 선택한 대비책입니까? 묻는 말에 대답한다면 단테의 12인의 일소 후에 이뤄질 재판에서 당신이 극형을 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습니다.”

침묵이 이어지자 엘베라의 표정을 볼 수 없는 로미오가 발레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이자에게 설득은 통하지 않겠어. 몸이 회복되어도 대답을 달리 하지는 않을 거 같아.”

그럼에도 로미오는 그녀를 고문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보류하기 위해 한 번 더 말했다.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에게 협력한다면 사형을 면할 방법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상위 단원들은 현재 어떤 계책을 강구해 놓은 겁니까?”

역시나 엘베라에게서 대답이 없자 로미오는 더 이상 설득을 이어 가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협상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옷장으로 다가간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옷장 문을 열었다. 지팡이가 아닌 장검을 꺼낸 그는 검집 허리띠를 허리에 둘렀다. 그 행동에 부자연스러움은 없었다.

“제6군단으로 엘베라를 데려가 그곳에서 고문해 정보를 받아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6군단에 모든 사실을 알려야합니다. 이미 상위 단원들도 시일 내로 제6군단을 동원한 대대적인 색출이 이뤄질 거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이 이상 은밀히 움직이는 것은 무의미한데다 시간을 지체할 뿐이니 제6군단의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그들과 접촉할 필요가 있다면 접촉 장소와 방법도 엘베라를 통해 마련해야 할 겁니다.”

“그들을 습격하는 것이 우리의 최종 계획이 아니오? 이자를 고문할 필요 없이 당장 급습하는 게 낫지 않겠소?”

“상위 단원들의 은거지로 찾아가 봐야 그들은 그곳에 없을 겁니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엘베라만이 알고 있습니다. 분명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리아가 창가로 가 몰래 내려다보니 1층에서 누군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자를 쓴 노인이었는데 그는 정중히 문을 두드리고 뒤로 물러섰다.

“누구요?”

이브도 가까이 다가와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발레리아는 노인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로미오에게 말했다.

“바닥까지 끌리는 긴 로브를 입고 있은 노인이야. 점잖아 보이는 인상인데 누구인지 알아?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이야.”

“뭐로 보나 단테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오.”

이브가 의수를 쥐었다가 펴며 이음새 부분을 점검하는데 로미오가 방문객의 정체를 눈치채고 대답했다.

“내려가서 이야기하고 오겠으니 채비를 해 주십시오. 엘베라의 상처가 악화될 것을 우려해 부대까진 마차로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브. 당신은 여기 남아 그라나 부인과 엔초를 살펴봐 주십시오. 부대에 도착하는 대로 사병을 보낼 테니 그때까지만 부탁드립니다. 사병들이 도착하면 뒤따라 부대로 와 주십시오.”

* * *

“그렇다면 자네들이 데려온 그자가…… 흠…….”

포치 소장은 탄식에 가까운 큰 숨을 내뱉으며 로미오와 발레리아를 쳐다봤다. 그들의 옆에 물러나 서 있는 마르코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보였다.

오래전에 퇴역 절차를 밟아 이곳을 떠난 두 장교가 이런 시각에 느닷없이 부대를 방문한 이유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로미오와 발레리아는 연루자도 아닌 단테의 12인의 단원을 인치해 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자가 차기 대총장 자리를 노리는 대표 격 상위 단원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제6군단이 창설된 이래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것도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어 낸 수확이었다.

집무실 내에는 그들 말고도 여러 명의 장교가 있었는데 아닌 밤중에 갑작스럽게 들려온 상위 단원의 체포 소식에 모두들 급하게 소장의 집무실로 소집된 것이었다. 소장에게 직접 명령 하달을 받는 장교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대령과 중령이었다. 기립을 하고 선 장교들의 줄 맨 끝에는 로미오의 퇴역 처리를 맡았었던 프라타 대령도 있었다.

소장의 앞에는 로미오가 직접 작성한 상위 단원들의 인명록과 단테의 12인의 정보에 관한 기록지가 놓여 있었다. 그들의 은거지에서부터 입회 의례, 그들이 사용하는 비밀 부호, 그리고 이번에 획책된 통령의 암살 공모에 이르기까지 아주 세세한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캄캄한 밤중에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쓴 것처럼 삐뚤삐뚤한 글씨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소장은 그 이유를 알았다. 낙서 같은 어지러운 글씨체는 앞을 볼 수 없는 로미오가 다른 이의 도움 없이 기록지를 혼자 작성했음을 뜻했다.

“허가해 주신다면 엘베라라는 이름의 상위 단원을 고문하여 나머지 상위 단원들과 접촉할 방법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들의 인명록을 넘겨받아야 합니다. 해당 인명록은 특정한 장소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되기에 그 인명록이 손에 들어온다면 단테의 12인의 일소가 즉각적으로 이뤄질 겁니다.”

포치 소장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턱을 쓰다듬었다. 손으로 탁탁 탁자를 두드리던 그는 로미오에게 되물었다.

“정말로 자네 혼자서 단테의 12인과 접선하여 은밀히 공작을 꾸며 왔다는 말인가? 이런 때가 오리라고 믿고서?”

부대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만 그리 철두철미한 편이 아닌 포치 소장은 얼떨떨한 목소리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몇 달 전에 퇴역한 장교가 이런 큰 일을 벌이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무소 대위 자네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예. 다만 알피에리 대위가 단독으로 밀정 공작을 꾸민 것은 맞습니다.”

“말로 대위 자네 역시 그러한가?”

“예, 소장님. 이번 일에 가담하긴 했으나 모든 것은 대위의 공적입니다.”

“크흠…… 흠, 흠. 그렇군. 그렇구만.”

군인이 아닌 로미오와 발레리아를 저도 모르게 대위라고 지칭한 포치 소장은 목을 긁적였다. 로미오의 퇴역 당시 그의 퇴역에 관한 보고를 받고도 별다른 힘을 쓰지 않았던 그였다. 통령과의 알현에서 로미오의 유능함을 인정하는 말을 하긴 했으나 그것은 소극적인 태도에 그쳤다. 눈먼 맹인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로미오의 퇴역을 허락한 것이었다.

“대단하구만. 스포르차 무어라고? 일전에 자네가 취조했던 그자를 통하였다고 해도 입회를 위해 단원들의 신임을 얻었어야 했을 터인데…….”

겸연쩍게 중얼댄 포치 소장이 뒷짐을 지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로미오가 말했다.

“로사티 3번가로 군인들을 보내 주십시오. 제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주인 어르신과 어린 제 남동생을 보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검거가 끝날 때까지 적어도 다섯 이상의 사병들이 그곳에 배치되어야 합니다.”

“습격을 우려하고 있나?”

“예. 두 사람에 대한 호위가 필요합니다.”

“좋네. 별도의 명령서 없이 지금 당장 사병들을 보내도록 하지.”

바쁘게 머리를 굴리던 포치 소장은 자신의 부관을 불러 열두 명의 사병을 로사티 하숙집에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더불어, 로사티 거리 일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즉시 보고하게.”

“예, 소장님.”

포치 소장은 벗어 놓았던 모자를 눌러 쓰고 장갑을 꼈다. 단테의 12인의 차기 대총장이 될 만한 거물의 얼굴을 자세히 볼 차례였다.

“고문실로 가지.”

네 사람이 집무실을 나서자 장교들이 뒤따라 나왔다. 그들은 달팽이의 등껍질 같은 구불구불한 계단을 올랐다. 중앙탑의 바닥에는 로미오가 퇴역할 당시에도 그러했듯 흐릿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고문실 앞에 도착하자 문 앞을 지키는 군인들만 여섯 명이었는데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한 태도로 경례를 했다. 문이 열리자 고문실 내에는 어지러울 정도로 환하게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기름을 아낌없이 부어 불을 밝힌 덕에 팔이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엘베라의 얼굴이 잘 보였다. 허리에 채찍을 찬 군인들의 맹렬한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는 것도 잘 보였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고 있는 존엄성과 품위가 단 한 순간도 허락되지 않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엘베라의 등 뒤에 즐비해 있는 고문 도구들이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시작하지.”

엘베라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포치 소장의 명령하자 군인들이 허리에 찬 채찍을 빼 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채찍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거뭇하게 남아 있었다.

* * *

“저런 염병할 자식은 종일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독방에 가둬야 해. 감히 탈옥을 하다니!”

“저자의 손과 발을 당장 묶어라. 그리고 ‘그곳’에 가둬 버려!”

“조사는 전부 마무리됐잖아. 대체 언제 재판을 연다는 거지? 저런 자식은 하루빨리 청사의 지하 감옥으로 옮겨 버려야 해. 그곳에 구금되면 제깟 게 어떻게 탈옥을 하겠어? 저런 놈들에게는 본보기를 보여 줘야 한다고!”

손이 묶인 조반니를 앞세운 간수들은 각자 한마디씩 씨근덕대며 복도를 걸었다. 경계가 삼엄해진 복도에는 허리춤에 검을 찬 공안국 간부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한밤중의 탈옥은 탈옥수가 제 발로 다시 공안국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났지만 죄수의 탈옥을 눈치채지 못한 간수들은 면책을 피할 수가 없게 됐다. 정신이 멀쩡한 자도 아니고 미치광이 하나가 벽을 파내 탈출을 했으니 뻔히 눈을 뜨고 당한 것이나 다름없어 약이 올랐다.

“다른 죄수들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람? 그놈들이 입을 딱 다물고 버티지만 않았어도 더 빨리 잡아들였을 텐데!”

넘어질 것처럼 비척대는 조반니를 이끌고 간수들이 향한 곳은 복도의 끝이었다. 그곳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독방이 있었다. 감옥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협소해 빗자루나 빈 검집 등을 넣어놓는 공간처럼 보였다. 그런 독방들만 줄줄이 늘어서 있는 이 지하 복도에는 현재 구금돼 있는 죄수가 없었다.

“들어가라!”

좁디좁은 창고 같은 감옥 문에는 손바닥 반절 크기만 한 구멍이 나 있어 감옥 밖을 볼 수 있었는데 철문이 워낙 두꺼워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간수 세 명이 겨우 달라붙어 육중한 철문을 활짝 열자 조반니처럼 건장한 사내가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어서 들어가!”

로미오에게 용서를 받고자 탈옥을 했으나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에 조반니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간수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자 간수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조반니는 그제야 간수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제가 탈옥을 한 행위와 죄수들이 입막음을 당하게 하여 화가 나는 것은 알겠으나 제게 위해를 가하게 하지 마십시오.”

“입 다물어!”

본래였다면 몇 마디 더 했을 조반니였지만 그는 말없이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오줌 자국이 있었고 철문에는 딱딱하게 굳은 피가 묻어 있었다.

“핏자국이 보이나? 여기 들어간 놈들은 하루만 지나면 꺼내 달라며 철문에 머리를 부딪쳐 댄다. 네놈의 미래니 잘 봐 둬라. 그럴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재주껏 버텨 보라고.”

간수가 이를 갈며 말했지만 조반니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허공에 시선을 뒀다.

“다시 한번 탈옥을 시도하면 오물이 가득한 방에 처넣어 주겠어!”

조반니가 등을 기대어 서자 간수들이 철문을 힘껏 밀어 닫았다. 쾅! 문이 닫히고 나자 감옥 안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에 휩싸였다. 철문이 바로 코앞에 닿아 있어 고개를 돌리는 것은 물론이고 어깨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감옥 밖을 볼 수 있도록 뚫어 놓은 작은 구멍은 간수들의 눈높이에 나 있었기 때문에 키가 큰 조반니의 시선에선 보이지 않았다. 가리개가 달린 그 구멍으로 들어온 빛은 조반니의 아랫입술과 턱 언저리에 닿았다.

“…….”

조반니는 눈앞에 보이는 철문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로미오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떠올려 봤지만 실현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 탈옥을 한 번 더 감행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로미오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도 용서받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로미오의 마음도, 그가 느낄 기분도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가진 감정의 깊이가 지나치게 깊어 어떤 용서의 말을 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로미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많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가 자신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마치 허락 없이 열어 볼 수 없는 비밀스러운 금서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긴 생각 끝에 조금만 더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로미오에게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이곳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옳았다.

마음을 그렇게 정하고 나자 이곳에서의 시간을 때울 만한 상상이 필요했다.

여러 순간들을 떠올리다 하숙집에 불이 났던 다음 날을 생각해 냈다. 로미오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갔던 날 아침 그를 위한 요리를 준비할 때의 기분을 되살렸다. 잠에서 깬 로미오가 주방 문 앞으로 다가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되새겨 보자 수년도 더 지난 오랜 옛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 평온한 일상은 로미오가 있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위님…….”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한 조반니는 더 깊은 상상에 빠져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 * *

“헉, 허어…… 후…….”

고문실 내에 울려 펴지는 가쁜 숨소리는 고문을 당하고 있는 엘베라의 것이 아니라 채찍질을 하는 군인의 것이었다. 쓰고 있던 군모까지 내려놓고 힘껏 채찍질을 하던 군인은 뒤로 물러서서 숨을 골랐다.

“다시 한번, 후…… 묻도록 하겠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은거 중이지?”

군인의 등 뒤에 선 포치 소장은 고문이 시작될 때와 달리 여유를 잃은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그사이 엘베라의 체포 소식을 들은 장교들이 고문실을 드나들었는데 그들 중 몇몇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살가죽을 터뜨릴 것 같은 모진 채찍질에도 엘베라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있었다. 채찍질의 강도는 점점 세지고 있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엘베라는 이미 몰골이 성하지 않았는데 어찌 된 것인지 신음 한 번 하지 않고 있었다.

채찍이 스친 자리마다 핏물이 나와 옷은 피범벅이 돼 있었고 상처가 난 주위의 살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검었다. 팔을 옥죄고 있는 밧줄이 오히려 채찍으로부터 엘베라의 몸을 보호해 줄 정도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안색이 극도로 창백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채찍질은 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평범한 자가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보기보다 대단하오.”

뒤늦게 부대로 도착해 쭉 고문을 지켜본 이브는 고문실 내의 다른 장교들이 하지 못하고 있던 말을 대신했다.

그러자 마르코가 거들었다.

“저렇게까지 버티는 자는 연루자들 중에서도 보기 드뭅니다. 차기 대총장이 될 만한 자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고문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단합니다. 채찍질은 그 어떤 고문 기구보다 연루자의 입을 가장 쉽게 열게 하는 방법인데 말입니다.”

제6군단은 여러 고문 기법을 약 수십 가지에 걸쳐 문서화 해 갖고 있었는데 그중 채찍질은 현존하는 고문 기법 중 구타하는 것 다음으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고문 기법이었다. 높은 곳에 몸을 매달거나 치아를 발치하거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등의 여러 신체적 고문 기법 중에서 별도의 기구나 과정이 필요하지 않은 손쉬운 고문 기법이었기 때문에 고문 기술을 갖고 있지 않은 장교도 해당 고문을 행할 수 있었다.

여유가 많다면 굴욕감이나 모멸감을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고문의 강도를 높여 가겠지만 현재 제6군단은 되도록 빨리 엘베라로부터 얻어 낼 것이 있었기 때문에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고문을 선택했다.

“도저히 대답할 것 같지 않아 보여. 혹시 저자와 관련해 쓸 만한 정보가 있어? 채찍질은 소용이 없는 것 같아.”

이브와 마르코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있던 발레리아가 로미오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녀는 채찍질이 쉽게 엘베라의 입을 열게 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면 고문 방법을 바꾸는 게 어떻겠소? 이러다 날이 밝을지도 모르오.”

곁에서 발레리아의 그 말을 들은 이브도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그러나 로미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

그는 포치 소장이 가져다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는데 발레리아와 이브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긴 모습에 이브가 듣고 있냐고 물으며 어깨를 잡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거요?”

이브의 목소리에 로미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엘베라 저자 말이오. 고문 방법을 달리해야 할 것 같소.”

“그래.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어. 저자에게는 고문이 통하지 않는 자들 특유의 고집이 보여. 저런 자들은 고문의 강도를 높여 봐야 채찍을 휘두르는 장교들만 지치게 할 뿐이야.”

볼 수 없지만 고문실 내의 풍경을 짐작한 로미오는 지금껏 엘베라가 한 번도 소리 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 채로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인데 의식을 잃지 않고 채찍질을 전부 당해 내고 있었다.

엘베라의 입을 열게 할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봤으나 그녀에게는 약점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녀 혼자서 온전히 보호해야 하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테의 12인에 입회한 계기도 협박거리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했다.

“저를 그녀의 앞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로미오가 부탁하자 발레리아가 그에게 팔을 내어 주었다. 발레리아를 따라 엘베라에게로 가 서자 엘베라의 가장 가까이에서 고문을 지켜보던 포치 소장이 말했다.

“자네의 말대로라면 단테의 12인 놈들은 이미 도주할 준비를 마쳤거나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야. 바꿔 말하자면 이자가 그들과 우리를 연결해 줄 유일한 다리인 셈인데, 흐음…… 고문 중에 죽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큰일이 아닌가.”

채찍질이 잠시 그치자 의사가 다가와 엘베라의 상처를 살폈다. 옷이 전부 피에 물들어 있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상처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의사가 고개를 들게 하자 엘베라의 이마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이 시체처럼 희었는데 그녀 특유의 고요하고 차분한 눈빛에선 가혹한 고문을 당한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지친 기운이 엿보였다.

가슴께에 칼에 맞은 상처가 나 있는 그녀는 기운이 크게 쇠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턱대고 고문 종류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녀 자신이 입을 열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정신적 저항력을 가진 것과는 별개로 몸이 견디지 못할 수 있었다. 포치 소장의 말대로 그녀가 죽을 경우 제6군단은 별다른 소득 없이 검거에 나서야 했다.

“그러니 상처를 살펴 가며 고문을 이어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를 살려 두어야만 군에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로미오는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생각에 잠겨 고개를 떨궜다. 하고 있는 말과는 관계없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애써 머리에서 지워 버리며 말을 이었다.

“이자는 단테의 12인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모두 지켜본 후에 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사로잡히지 않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했으니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나 다시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닫게 됐다. 쉽게 몰아내기 힘든 잡생각에 눈썹을 찌푸린 그는 지팡이를 굳게 쥐며 말을 계속했다.

“접선 장소가 마련된다면 이자를 그곳으로 데려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산 채로 말입니다.”

대화로 유도하기 위해 엘베라의 앞에 선 것이었지만 로미오는 그렇게만 말하고 이내 뒤로 물러섰다.

의사가 엘베라를 치료하는 사이 포치 소장이 고문을 중단하자 장교들이 고문실을 드나들며 소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마르코와 발레리아는 물론 군인이 아닌 이브까지 그들의 대화에 끼었지만 로미오는 외따로 떨어져 지팡이를 쥔 채 서 있었다. 장교들의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왔지만 집중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이런 때에 조반니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그의 탈옥 따위 자신이 조금도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다시 공안국으로 돌아가 감금되었을 그를 여기 있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가 보여준 광증의 증세가 심각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조반니는 통령에 의해 무사히 감옥을 나와 광증을 치료받을 것이다.

그가 했던 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들에 진심은 없을 테니 거듭 생각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조반니의 입에서 나왔던 말들은 증명할 수 없는 거짓뿐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여태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조반니가 야위고 추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던 데다가 머리를 손질할 여력조차 없어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누가 보아도 죄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몰골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만약 볼 수 있었더라면 구금 생활이 조반니에게 미친 영향을 쉽게 가늠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더 이상 의사처럼 보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의 삶은 이제 여기서 끝난 것 같다고. 자백을 하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그는 조만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엘베라가 정신을 잃었어.”

곁에서 발레리아의 목소리가 들린 직후 의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미오는 소리로 미뤄 엘베라가 바닥으로 넘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고문실 내의 피 냄새는 아까보다 짙어져 있었고 숨소리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충분히 들을 수 있을 만큼 거칠었다. 견디는 듯 보이지만 엘베라에게도 몸의 한계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조반니에 대한 생각을 거둔 로미오는 체사레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은 통령이 내릴 결정을 짐작해 봤다. 포치 소장이 이미 통령의 관저로 급서를 보냈으니 그녀가 부대로 직접 찾아와 이번 일에 대해 논의한다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을 테니 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엘베라의 상태를 보면 현재로서 두 가지 결과가 예상됐다. 입을 열지 않는 엘베라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던 군이 그녀가 죽을 것을 두려워해 그녀에게 휘둘리거나, 아니면 엘베라에게서 그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하고 그녀를 죽인 뒤 날이 밝는 대로 군대를 움직여 색출에 나서거나 둘 중 하나였다. 시간이 많다면 고문과 치료를 반복하며 엘베라를 압박하겠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로미오가 포치 소장에게로 다가가 얘기하자 그가 물었다.

“저자의 입을 열게 할 묘책이 생각났나?”

“우선 대화해 보겠습니다. 고문의 종류와 강도를 달리해도 저자는 상위 단원들의 은신처를 실토하지 않을 겁니다. 가능하다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대답을 끌어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엘베라를 의자에 바로 앉힌 의사가 상처에 약을 바르고 물러나자 군인이 채찍질을 가해 의식이 없는 그녀를 깨웠다.

“일어나라! 아직 끝나지 않았어!”

매섭게 후려쳐대는 채찍 소리가 몇 차례 들리더니 엘베라가 고개를 움직였다. 그녀는 눈을 뜨며 몸을 움직였지만 로미오를 올려다보지 못했다. 채찍 줄이 얼굴에 스쳐 입술 끝이 터져 있는 그녀는 입 안에 고여 있던 피를 뱉었다.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신음은 조금도 내지 않았지만 등 뒤로 겹치고 있는 팔이 경련하며 떨렸다.

육체적 고통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작용했다. 그 고통이 입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뱉게 하느냐, 지키게 하느냐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로미오는 지팡이 손잡이 위에 두 손을 얹고 허리를 펴 섰다. 군복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퇴역 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은 듯 보였다.

“날이 밝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고문이 통하지 않은 것에 조급함을 느낀 우리가 당신을 설득하기 위해 방법을 바꾼 것이 아님을 알려 드립니다. 밤은 길며 제6군단은 동이 트면 검거에 나설 준비를 시작할 겁니다. 장교들을 소집하는 것은 이 중앙탑의 꼭대기에서 부는 나팔 신호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엘베라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기침을 했다. 쇳소리가 섞여 있는 숨소리는 가빴다.

“입을 다무는 이유가 뭡니까? 시간을 끌면 더 나은 방도가 마련된다고 믿어서입니까? 스포르차 선생님이 당신들의 일원이 됐을 때 이미 단테의 12인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중앙 지부의 내부로 숨어든 시점에서 이미 당신들은 정해진 길을 달려왔던 겁니다. 당신의 그 침묵이 막다른 길에 다다른 운명을 다른 길로 인도할 일은 없습니다.”

로미오는 눈 앞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등잔 불빛을 보며 엘베라의 표정을 상상했다. 그녀의 얼굴 생김새를 몰랐으나 평소 성정과 목소리를 통해 대략적인 인상을 유추했다.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지난 수년간 모아 오신 정보가 모두 제게 넘어와 그 정보는 이제 군의 정보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입을 열지 않으면 우리는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단테의 12인의 와해를 늦출 뿐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상위 단원들을 한 명씩 체포해 강도 높은 고문을 이어갈 것이며 당신을 가장 마지막까지 살려 둘 겁니다.”

엘베라가 눈을 들어 로미오를 올려다봤다. 숨을 쉴 때마다 채찍의 고통을 느끼는 그녀는 곧 도로 눈을 내리며 한 차례 더 피를 뱉어 냈다.

“상위 단원들이 지금 어디에 은신해 있는지 말하는 것을 그들에 대한 배신으로 여긴다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이미 그들은 당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당신의 입에서 정보가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해 조치도 취했을 겁니다. 여기 있는 당신도, 그리고 몸을 숨기고 있는 그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시간을 버는 헛수고는 그만두십시오.”

로미오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엘베라가 입을 열었다.

“내게서…….”

엘베라의 원래 목소리를 아는 자가 있다면 누구나 놀랄 만큼 쇠약해진 목소리였다.

“……원하는 대답은 얻을 수 없을 걸세.”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다시 정신을 잃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의자가 기울어지며 바닥으로 쓰러지자 군인들이 다가와 엘베라를 일으켜 세우고 의자를 바로 해 그녀를 앉혔다.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와 그 위에 발린 끈끈한 약초와 뒤엉키자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깨워 주십시오.”

로미오의 말에 의사가 처치를 하자 군인이 거센 채찍질을 가했다. 철썩대며 후려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엘베라가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애써 신음을 삼키고 있었지만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기척을 통해 그녀가 눈을 떴음을 안 로미오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당신이 정신을 잃을 때마다 계속해서 채찍질을 가할 겁니다. 당신이 불구의 몸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군은 단테의 12인의 단원들을 모두 색출할 것이며 그들은 사형을 언도받는 것으로 이 나라에서 추방될 겁니다. 이것이 곧 다가올 미래입니다. 당신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답을 하지 않건, 하건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선택은 앞으로의 일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니 어서 대답하십시오.”

“……차라리 고문을 계속하게… 무엇 하러 나를 추궁하며 대답을 요구하는가…….”

“당신에게 시간을 끌기 위한 목적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제6군단에 일조하고 싶지 않아서 객기를 부리는 게 아닙니까? 우리에게 정보를 줌으로써 단테의 12인의 와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

“대답하십시오. 상위 단원들은 지금 어디에 은신해 있습니까?”

“……그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제6군단을 동원하여 바치를 수색하게.”

엘베라는 핏물 같은 침을 바닥에 토해 낸 후 기침했다. 큰 숨을 들이켜며 불편한 몸으로 호흡하던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목소리를 냈으나 다시 기침만 뱉어 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숨을 가다듬고 로미오를 올려다봤는데 지그시 그를 주시하는 눈빛에서 기묘한 투지가 드러났다.

“……자네는 여전히 자네의 형제가 군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믿나?”

엘베라의 시선이 고문실 내의 군인들을 향했다. 그들 모두를 둘러보고 가장 마지막으로 포치 소장을 본 그녀는 로미오를 향해 물었다.

“그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로미오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 자세 그대로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가만히 있었다. 말로써 자신을 도발하거나 약점을 건드리는 것이 엘베라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알았다. 응해 줄 마음은 없었지만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대답했다.

“제가 스포르차 선생님과 손을 잡게 된 계기에 제 동생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을 일소하고자 하는 소명에는 죽은 제 동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목숨값이 달려 있습니다. 제 동생이 설사 제6군단에 의해 죽었다고 해도 저는 이 일을 매듭짓기 위해 이 자리에 섰을 겁니다.”

“……군은 자네를 퇴역시켰네. 그 사실을 잊었나? 조금 전에 내게 배신이라는 말을 썼지. 제6군단이 자네에게 행한 것이야말로 배신이 아닌가?”

“당신의 그 말이 설득력을 발휘하려면 저는 사관 학교에 다니던 생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그때 제가 가졌던 사명감이 실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로미오는 지팡이로 바닥을 쓸며 두 발자국 가까이 엘베라에게 다가가 섰다. 짧게 침묵한 그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에서 고아 출신의 두 자매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교장이 자매를 상대로 포섭을 진행하고 있더군요. 언니 쪽이 군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고 교장은 그 아이가 군인이 될 경우 단테의 12인이 얻게 될 군의 정보력을 고려해 포섭에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두 소녀는 머리가 무척 명석했으니 교장의 의중은 물론 그 학교를 방문한 저와 디오니시오 선생님, 그리고 친치아가 누구인지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을 겁니다. 알면서도 뜻을 꺾지 않은 것은 두 소녀가 느끼기에 그것이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당신들의 손에 반역자로 키워질지 생각해 본다면 이 일은 희생자가 될 아이들의 목숨을 좌우할 일인 겁니다.”

로미오는 단테의 12인이 검거된 이후의 두 자매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두 자매에게 인도적인 처분이 내려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당장 상위 단원들 중에도 아이가 있지 않습니까? 친치아 말입니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몰락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하더군요. 어린 소녀가 멸문한 가문으로부터 도망쳐 이 먼 이국의 땅으로 왔습니다. 루바노는 그녀에게 새 삶의 터전이 됐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땅은 그녀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도 있었지만 당신들이 그것을 막았습니다.”

“친치아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우리의 일원이 되었네. 상위 단원으로 입회한 것도 능력을 인정받아 추진된 것이었네. 어린아이라 하여 정치적 신념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지.”

“강력한 왕권을 가진 체사 국왕의 지배 아래에서 귀족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녀입니다. 루바노의 공화정이 불완전하기에 변혁이 필요하다고 부추긴 것은 당신들일 겁니다. 설마 그녀가 독자적으로 고국도 아닌 이 루바노의 정치 체제를 무너뜨릴 마음을 먹었다고 말하려는 겁니까? 공화정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어린 귀족 소녀가 말입니까?”

로미오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분노가 묻어 나왔다.

“제 동생이 이 고문실 밖의 탑 아래로 떨어져 죽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그 아이가 흘린 핏자국이 아직도 탑의 바닥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 죽은 또 다른 소녀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들의 사상에 물든 결과로 벽보를 붙이기에 이르렀으니 당신들을 역병이라고 표현하여도 잘못된 표현은 아닐 겁니다.”

피에트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브가 로미오를 쳐다봤다. 옆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 속에 묻어 나오는 감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 아이가 죽고 저는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습니다. 당신은 신념이라는 말로 포장했으나 저는 당신들의 그 신념에 의해 제 삶의 일부분을 도둑맞았습니다. 평화로웠던 제 삶이 제 동생의 죽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들이 존재했으니 어쩌면 우리 형제의 운명은 당신들에 의해 결정돼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 동생이 열여덟의 짧은 생을 살다가 이 땅을 영원히 떠나게 되리라는 것은 당신들에 의해 정해진 일이었던 겁니다. 저는 제 동생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 당신들에 의해 희생될 다른 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보답받겠습니다.”

엘베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피투성이 뺨을 타고 흐른 식은땀이 핏물이 되어 허벅지를 전부 적시고 나서야 입을 뗐다.

“……조반니 그자는 이런 일에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자지. 오랜 벗인 레오나르도를 자신의 입으로 고발하는 꼴이 됐지만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야. 그렇다면 자네는 어떠한가? 우리는 반역자이기 이전에 우리 나름의 소명과 소원을 갖고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네. 그런 우리를 처단할 기회가 자네에게 주어진 것일세. 이 사실이 자네에게 그 어떤 감정도 가져다주지 않는가?”

“제게 죄책감을 유발하려는 것이라면 그만두십시오. 불필요한 도발입니다. 저를 순진한 어린아이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자네에 의해 한날한시에 중앙 광장의 사형대에 함께 올라 숨이 끊어질 것이네. 자네가 조금이나마 연민을 갖고 있는 그 친치아마저도 그렇게 되겠지. 자네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우리의 과거와 미래 또한 알고 있네. 우리 모두의 삶을 자네의 손으로 파괴하는 것에 진정으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가?”

로미오는 동요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지팡이를 굳게 잡으며 부러진 손끝을 한 번 떨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본 엘베라가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 포섭돼 이 일에 가담한 자들도 전부 사형대 위에 올라가게 될 것이네. 자네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팔레르모 사립기숙학교의 두 자매도.”

“통령 각하께 아량을 베풀어 주실 것을 청할 겁니다. 받아들여질지는 모르나 적어도 포섭에 이용당한 아이들은 당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극형에 처해지지 않을 겁니다.”

“비스카르디 통령 그자가 아량을?”

엘베라는 비웃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비스카르디 통령은 취임 이후 전례 없는 강력한 칙령을 발표했네. 산 채로 화형을 시키는 형벌은 루바노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던 미개한 처단 방식이네. 칙령이 발표되고 민중들이 제6군단의 눈이 닿지 않는 뒷골목의 으슥한 술집에 모여 통령의 야만성에 대해 입방아를 찧었던 것을 모르나?”

그때 로미오의 등 뒤에 서 있던 마르코가 목소리를 높였다.

“통령 각하에 대한 기만은 용서하지 않겠다! 그 어디에서든 각하의 존함을 입에 담아 더럽히는 행위는 인정되지 않아.”

엘베라는 마르코에게 눈길을 줬지만 수그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야만스러운 것은 군도 마찬가지이지. 우리는 저마다가 가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움직이지만 군은 어떠한가? 끔찍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자들이 몇이던가. 자네가 직접 취조를 담당했으니 비토리오 나르디를 기억하고 있겠지. 군이 그자에게 얼마나 가혹한 고문을 가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야. 루바노를 수호한다는 명목 아래 군이 얼마나 많은 패악질을 저지르며 선량한 민중의 목숨을 앗아 갔는지 생각해 보게. 허리에 검을 찬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가면 반나절 만에 시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 수순이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신념이지만 군은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가? 맹인인 자네를 자네의 형제와 함께 내친 이곳으로 왜 다시 돌아온 것인가? 군의 개가 된 이유가 정말로 사명감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네.”

“모든 것은 당신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신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제6군단도 창설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군은 죄 없는 자들의 목숨을 앗아 간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에게 가담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더 이상 선량한 민중이 아니라 불온한 이념에 물든 반란분자입니다.”

“자네는 자네의 형제가 죽고 무엇을 했지? 조사 과정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나? 자네는 이곳에서 형제를 잃고도 그 일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네. 고작 벽보 한 장을 붙였다는 이유로 이곳으로 끌려왔고 취조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죽음을 겪었음에도 피에트로 알피에리의 죽음은 금기에 붙여졌네. 그리고 그 금기는 민중들에게까지 동일하게 작용되네. 단테의 12인에 연루되어 체포된 후 고문 끝에 죽은 자들의 죽음은 금기시돼. 지하 소각장에 처넣어져 몸이 불타 죽지만 민중들은 감히 두려워 그들의 죽음을 입에 담지 않으려 하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포치 소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로미오에게 말했다.

“피에트로 알피에리에 대한 죽음은 이미 보고가 마무리되었고 그의 조사를 담당했던 몬테 중령은 그 일 이후 부대를 옮겨 더 이상 제6군단에 남아 있지 않네. 죽음의 경위에 대한 조사 보고서는 자네도 보지 않았나?”

로미오가 포치 소장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예, 소장님. 알고 있습니다. 이자는 그저 저를 도발하기 위해 농간을 부리는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몸을 바로 한 로미오는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엘베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응시했다.

엘베라는 입 속에 고인 피를 뱉어 내며 말을 계속했다.

“군은 누가 단테의 12인이며 누가 연루자인가 하는 문제를 고문으로 정의하네. 합리적인 검증을 앞세우는 일은 없지. 우선 의심하고 협박해 자백을 요구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일세. 자네는 민중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군의 행태에 암묵적으로 동의해 왔네. 자네를 군에 동조하게 한 것이 정말로 사명감인가?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포섭해 반역자로 키우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제6군단이 소년·소녀들을 군인으로 키워 우리에게 대적할 야만인으로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이 나라와 통령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공동의 약속을 강요하는 군의 수법은 정의로운 것이 아니네. 자네는 군이 자네에게 심어 준 그 환상 때문에 죄 없는 민중들의 죽음을 여태껏 침묵했고 결국 자네의 형제도 피차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잃은 것이네.”

“계속해서 저를 도발하려 하시는군요. 하지만 통하지 않을 겁니다. 제 동생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인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그 아이의 혐의는 분명했습니다. 고작 벽보 한 장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은 당신 개인의 판단입니다. 그 벽보는 제 동생에게 민중의 해방을 이끈다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 벽보를 통해 혁명의 길을 꿈꾸는 몽상가가 되었습니다. 몽상의 끝은 그 자신이 정말로 혁명의 중심으로 뛰어 들어가 피를 흘리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네에게 열 살 남짓 된 어린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그 아이가 먼 훗날 형제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나? 벽보를 붙인 혐의로 군에 붙잡혀가 시체가 되어 그곳을 나온 형제, 그리고 그런 형제의 죽음에 반기를 드는 대신 군의 편에 선 또 다른 형제. 감히 말하지. 자네의 어린 동생은 우리에게 적합한 포섭 대상이야. 죽은 자네의 남동생과 자네 사이에 반목이 있었을 것이라고 그릇된 짐작을 한다면 포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쉬워지네.”

엔초가 거론되자 로미오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우리는 그 아이에게 죄책감과 복수심을 동시에 심어 줄 수 있으며 군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 주는 것은 그보다 훨씬 쉽네.”

“당신들은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아이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을 겁니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말입니다.”

짧은 찰나에 격한 감정을 드러냈으나 로미오는 서서히 본래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지금 엘베라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말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계속해서 자극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이 나라를 바꾸고자 마음먹었다면 혼자서 그 뜻을 펼치면 될 일입니다. 무리를 이루고 집단을 만들어 죄 없는 이들을 끌어들였으니 당신들은 단죄받아야 마땅합니다. 교묘한 말로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진정으로 간절히 혁명을 원한다면 민중을 끌어모아 그들의 뒤에서 비열하게 움직이기보단 맨몸으로 중앙 광장에 나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당신의 사상을 떠들어 대는 편이 나을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유네. 국가와 군인이 그것을 통제하고 있으니 타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 하나로는 역부족이나 민중은 뭉치면 거대한 눈보라와 불길을 만들어 낸다네.”

“그래서 뜻대로 되었습니까? 당신들은 지난 긴 세월 동안 오로지 혁명 하나만을 위해 기다려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루어 냈습니까? 당신들의 그 염원이 얼마나 풍부한 실현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는지 궁금하군요. 민중의 뜻을 대신한다는 구실로 그들을 이용해 오며 지금껏 무엇을 이루었는지 대답해 보십시오. 대총장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통령 각하의 암살 계획도 우리에게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아직 변혁기에 다다르지 못한 데다 민중은 무장을 하지 않았기에 급진적이고 열렬한 투쟁을 유도할 수 없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는 시대에 이뤄 내지 못할 위업을 여러 세대에 걸쳐 이뤄 갈 것이며 이는 단테의 12인을 창시했던 단테 피치니의 뜻을 이어받은 방식이네. 몽상가니 음모꾼이니 하는 말로 우리를 조롱하여도 상관없네. 우리는 때를 기다릴 것이며 수백 년 만에 한 번의 기회가 도래한다면 기꺼이 그 수백 년을 견딜 것이네.”

로미오는 명백한 저의를 드러내며 엘베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민중의 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우습습니다. 당신들이 이용한 자들은 민중이 아니었습니까? 당신은 당신들의 뜻을 위해 도구처럼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민중과 혁명 이후의 세상을 누릴 민중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용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네. 우리는 우리의 편에 서서 함께 힘을 모을 자들에게 특정한 조건이나 지위를 부여하여 선발하지 않네. 갖고 있는 재산이나 교육 수준은 중요치 않아. 삶을 바꾸고자 하는 불덩어리 같은 의지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우리와 뜻을 함께할 수 있네. 민중의 해방은 민중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응당한 일이지. 단테의 12인은 혁명이 성공하는 그 즉시 와해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우리 역시 한 명의 평범한 민중으로 돌아갈 것이네.”

“당신들은 와해되지 않을 겁니다. 혁명 이후의 격변을 지탱하기 위한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민중의 위에 올라설 겁니다. 그 누구보다 동등하길 원하지만 당신들이야말로 당신들의 사상에 가장 반하는 조직인 것입니다. 당신들은 권력을 가진 이들을 매도하고 불신하며 그들을 재산과 명예를 유지시키는 데에 일평생을 바치는 야만인으로 묘사하지만 인간은 본래 그렇게 태어났으며 모든 권위자가 비인간적인 품성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이 나라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목숨을 거는 당신들 역시 혁명이 성공하면 어떤 집단으로 변모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만 꿈에서 깨어나십시오. 이 세상은 온건하고 평화로운 말로 끝맺음 낼 수 있는 한 권의 역사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혁명을 앞당기기 위해 그 어떤 것도 불사하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사욕을 추구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우리의 지하 지부에 황금을 쌓아 놓으려 한 적이 없네. 지도자의 자리를 넘본 적도 없지. 그 어떤 집단보다 민중다운 집단이 바로 우리일세.”

“현실을 마주하십시오. 당신은 우리에게 사로잡혔습니다. 당신이 이곳에서 도망쳐 상위 단원들과 접촉해 조직을 재건할 기회는 없을 겁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고문을 그만두고 당신과 대화를 이어 간다고 해서 상황이 당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착각하지는 마십시오.”

앞서 엘베라가 엔초를 언급했기 때문인지 로미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대화를 이어 갈수록 엘베라에게 치욕감을 안겨 주려는 의도가 저도 모르게 말속에 깃들었다.

“모르시겠습니까? 단테의 12인이라는 이름의 불온한 결사 조직은 더 이상 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이 당신들의 최후의 날입니다. 루바노의 역사에 당신들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새겨질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말입니다.”

로미오는 잠시 말을 끊었다.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뗀 그는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당신의 과거에 대해서 스포르차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말하길 당신은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우연한 계기로 입단을 한 것이라더군요. 그 이상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혁명의 길로 들어섰는지 짐작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알 겁니다. 당신이 지지하는 사상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보상해 주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자유를 원했지만 이렇게 두 팔이 묶인 채 포로 신세가 됐습니다. 당신의 신념도, 민중들의 지지도 지금의 당신을 구제해 주지 못합니다. 당신은 이 나라가 당신을 가난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이 주장하는 비이성적인 평등은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들이 저마다의 의지로 각기 다른 삶을 부여받아 그들의 욕망에 따라 무언가를 얻고 잃으며 일생을 사는 이상 빈곤과 풍요는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할 것이며 모든 인간은 절대 같은 조건으로 대등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비논리적이고 허황된 꿈의 세계가 아니네. 부유한 자들로부터 재산을 몰수하고 우두머리인 통령을 몰아내고 인류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을 공평히 나누어 민중들이 스스로 그들의 모든 것을 조직한 세상이 한 번이라도 존재했다면 이야기가 쉬워지겠으나 루바노의 역사에 그런 때는 존재한 적이 없었네. 자네는 우리가 가진 신념을 이해할 만한 인간이 아닐세. 세계가 완벽히 한 번 해체되어 다시 만들어진다면 자네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걸세.”

목소리와 몸짓은 쇠약했지만 엘베라의 눈빛에는 그녀의 뜻이 꺾이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볼 수 없지만 로미오는 느낄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이상 그녀는 결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뒤로 물러서며 포치 소장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신을 꺾을 수 없다면 육체를 꺾어 버리리라.

“이자의 입을 통해 은신처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니 고문을 이어 가는 게 좋겠습니다.”

로미오의 말에 포치 소장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채찍을 든 군인에게 지시했다.

“다시 시작하지.”

* * *

“레오나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친치아는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는 레오나르도의 어깨를 짚었다. 생각에 잠겨 몇 시간째 같은 자세로 앉아 있던 레오나르도는 등 뒤로 다가온 친치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날이 밝으려면 얼마나 남았지?”

“서너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해요.”

그들이 있는 곳은 바치 외곽의 성벽 근방에 위치한 버려진 포도주 가게 지하 창고였다. 포도주를 숙성시키기 위해 개조된 이곳 지하실은 수년 전에 포도주 가게가 문을 닫으며 자연히 창고로서의 기능을 잃었는데 가게 주인은 현재 살아 있지 않았지만 그는 한때 포섭의 명수라 불리던 단테의 12인의 단원이었다.

포도주가 숙성되는 동안 지하실 내에는 사람 여럿을 질식시킬 수 있을 정도로 독한 공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지하실 문은 가게 주인조차도 쉽게 열 수 없도록 까다로운 잠금 방식을 갖고 있었다. 바깥에서 여는 것보다 안에 갇힌 사람이 쉽게 열고 나갈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처음 지하실을 방문한 사람은 문을 여닫는 것에 애를 먹었다. 상위 단원들 중 조반니를 제외한 나머지 이들에게 위치가 공개된 이곳은 지상으로 이어지는 문을 여러 군데로 나눠 갖고 있어 은밀한 모임을 갖거나 몸을 숨기기에 적합했다.

이 장소를 알려 준 것은 엘베라로 그녀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상위 단원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그중 한 무리에게 이곳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그녀는 암살 공모에 돌입해 있던 단원들에게 믿지 못할 한 가지 비밀을 폭로한 뒤 로미오를 사로잡기 위해 그가 사는 하숙집으로 향했다. 그것도 검을 쓸 줄 아는 단원들을 여럿 데리고서.

지하실에는 레오나르도와 친치아 외에도 다 몬티와 노프리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각자 앉거나 선 자세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포도주 가게 앞의 길거리로 나가면 바치시 전체를 둘러싼 성벽 문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는데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성벽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미 수 시간 전에 이곳으로 와 몸을 숨기고 있는 네 사람은 동이 터 성벽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자정 전에 돌아왔어야 했을 엘베라는 돌아오지 않고 있는 데다 그녀와 함께 움직이던 귀도라는 이름의 단원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엘베라가 데려갔던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무리의 상위 단원들은 바치 서쪽 외곽의 성벽 근방에 은신하기로 했는데 과연 그들이 약속대로 그곳에 은신 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것인지도 몰랐다.

성벽의 문이 열리는 대로 바치 밖으로 빠져나갈 채비를 끝낸 네 사람은 외국 지부로의 망명을 결정하고 가진 모든 것들을 내버려 둔 채 몸만 이곳에 와 있었다. 네 사람은 루바노를 완전히 떠나기 위해 나라와 나라 사이를 이동하는 데 필요한 위조된 통행증까지 소지하고 있었다. 바치를 빠져나가는 방법과 빠져나간 이후에 어떻게 국경까지 이동할지 전부 계획해 놓은 상태였다. 오래전에 설립해 놓은 프리올로 공국의 지부로 가서 그곳의 하위 단원들과 접촉해 몸을 숨길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후일의 일을 모두 계획한 것과 달리 네 사람은 얼굴이 어두웠다. 통령의 암살 계획은 철회된 지 오래였고 암살자 역할을 할 소년도 다른 장소에 은신 중이었다.

입 밖에 꺼내어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네 사람 다 날이 밝은 뒤 자신들에게 벌어질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

“다른 방도가 없으니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대로 기다려도 엘베라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레오나르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야기하자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던 다 몬티가 머리를 들었다. 노프리는 팔짱을 낀 채 빈 포도주병 선반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바닥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모두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이미 약속한 시간은 지났습니다. 특별한 묘책 없이 시간을 끄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적막한 지하실의 공기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평소였다면 명랑한 목소리로 대꾸했을 친치아조차 침묵했다.

“……엘베라는 지금 제6군단의 부내 내에 있을 겁니다.”

레오나르도가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하자 노프리가 끼고 팔짱을 풀고 주위를 몇 걸음 걸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레오나르도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나? 조반니에 관한 비밀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건가? 자네는 그와 지금껏 많은 일을 함께 해 왔잖나. 정말로 몰랐다고 말할 셈인가?”

레오나르도가 대답하지 않자 노프리가 격양되어 외쳤다.

“그가 비스카르디 통령의 남동생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야?”

노프리의 고함 소리가 지하실 내에 홀연히 울렸다. 그는 친치아와 다 몬티에게 시선을 주더니 다시 레오나르도를 향해 말했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단 말이지? 지금까지 통령과 조반니 그놈의 인형극에 우리 모두 놀아났어. 쥐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실컷 발버둥을 쳤으니 남은 일은 산 채로 덫에 발이 잘리는 일밖에 없다고! 다른 이도 아니고 비스카르디 통령이야. 그자가 모든 일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루바노 땅을 벗어날 수 없어. 대체 무슨 수로 통령의 눈을 피해 이 나라 밖으로 벗어날 수 있단 말이야? 중앙 지부의 위치도 이미 만천하에 들킨 것이나 다름없는 형국이니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어!”

분을 참지 못해 큰 소리로 외친 노프리는 곧 의심하듯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는 레오나르도를 노려보며 물었다.

“레오나르도 자네 정말로 몰랐나?”

알면서도 숨긴 게 아니냐고 묻는 것 같은 말투에 다 몬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레오나르도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그를 의심하는 것은 그만둬.”

“하지만 말이 되지 않잖아! 대체 조반니가 어떻게 지금까지 우리 모두를 감쪽같이 속여 온 거지? 어떻게 통령의 암살을 이틀 앞둔 지금에서야 이 거대한 진실이 드러났느냐는 거야.”

레오나르도는 세 사람을 천천히 둘러봤다. 마지막에 시선이 머문 것은 친치아였다. 단테의 12인에 입회한 이래 그녀와 가장 오랫동안 포섭 활동을 했던 레오나르도였다. 나이가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났지만 친구이자 가족과도 같은 관계였다. 지금 이 순간 레오나르도는 머지않은 미래에 닥쳐 올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녀의 죽음도 예견하고 있었다.

“……조반니의 과거에 대해 예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거기에 석연찮은 점은 없었습니다. 꾸며진 가짜 과거였겠지만 전 여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는 본래 그렇습니다. 제게 곁을 준 적이 없지요. 조반니에 대해 다 알지 못했던 것이 제 잘못이라면 잘못일 겁니다. 그가 구금된 이후 만나 보지 못했으니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흐레 전의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제 말을 무시했던 녀석입니다. 조반니에게 전 이용하기 좋은 상대에 불과했을 겁니다.”

“어떻게 그놈이 그 긴 시간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비밀을 감춰 왔던 거지? 레오나르도 자네, 정말로 조반니가 언젠가 우리 모두를 배신할 거라는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나? 그의 비밀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

레오나르도가 침묵하자 친치아가 나섰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같은 입장이에요. 진실은, 조반니가 우리를 보기 좋게 속여 왔단 사실이죠. 엘베라는 그 진실에 너무 늦게 다다랐고요. 살인자 신세가 된 조반니가 지금 감옥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겠지만 만약 눈 앞에 있다면 물어보고 싶군요. 우리 모두를 속인 소감이 어떤지.”

친치아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그녀가 한 말속에는 뼈가 있었다.

“제가…….”

말이 없던 레오나르도가 웃옷의 호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입을 뗐다. 호주머니 속에는 집을 나오며 유일하게 챙겨 온 반지가 들어 있었다. 지난 수십 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닦았음에도 몹시 낡은 반지였다. 가족이 남긴 마지막 유품이었기 때문에 이것만은 주머니 깊이 넣어 챙겨 왔다.

“그들을 만나 봐야겠습니다.”

반지를 꺼내 웃옷 안쪽의 작은 주머니에 넣은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사이 노프리가 쏘아붙이듯이 물었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알피에리 대위를 만날 생각입니다. 분명 그도 지금 제6군단의 부내에 있을 겁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있을 테니 그것을 주고 목숨을 구걸하겠습니다.”

다 몬티가 고개를 저으며 나섰다.

“소용없는 일이야. 그자에게 구걸해 봐야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야. 날이 밝을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 보도록 해.”

“조반니는 덫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난 수년간 우리는 그 덫을 발아래에 두고 살아왔습니다. 그가 주목할 필요 없는 하위 단원이었을 때 우리에겐 기회가 있었지만 우리 중 누구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상위 단원으로 받아들였고 막강한 권한을 줬습니다. 그 시점에서 이미 끝이 정해졌던 겁니다. 엘베라가 더 일찍 진실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도 우리에게 조반니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며 말하지 않았습니까? 조반니의 존재가 어떤 형태로든 조직에 큰 타격을 입힐 거라고 말입니다. 예상과 달리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갔고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으니 군을 만나 협상의 여지가 있는지 따져 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가령 사형을 면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사형을 면할 방법은 없어. 자네의 말대로 끝은 정해져 있네. 엘베라도 지금 그 사실을 직감하고 있을 거야.”

“통령이 모든 것을 알았다면 날이 밝는다 해도 성벽 문이 열리지 않을 겁니다. 우리를 바치 시내에 가둬 두고 제6군단을 움직일 겁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레오나르도가 말을 맺지 못하며 고개를 숙이자 친치아가 그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리고 대신 얘기했다.

“엘베라에게서 이미 비밀이 새어 나갔을 수도 있어요.”

노프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지금 엘베라가 우리를 배신했을 거라고 말하는 건가?”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전 그녀가 제6군단의 고문을 견딜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군에게 사로잡힌 이상 둘 중 하나가 아니겠어요? 모든 사실을 자백하거나, 혹은 고문으로 죽거나.”

거의 다 타들어 간 양초 불빛이 희미해지며 지하실 내부에 어른대는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레오나르도는 새 초를 가져와 불을 붙였다. 그리고 세 사람을 둘러보며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이 밝는 즉시 제6군단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단원들의 목숨을 대가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겠습니다. 비스카르디 통령과 이 나라가 우리에게 지금껏 원해 왔던 것을 넘기겠습니다.”

* * *

양손이 머리 위로 묶인 채 도르래 밧줄에 손목이 묶여 있는 엘베라는 오른쪽 어깨뼈가 부러져 있었다. 두 발목에 감긴 밧줄은 고문실 바닥에 박아 놓은 쇠갈고리에 연결돼 있었다.

녹슨 도르래에는 밧줄을 당길 수 있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는데 그 손잡이를 돌리면 묶인 양팔이 위로 힘껏 당겨 올라갔다. 단순한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고문 기구였지만 그렇게 매달린 채로 몸이 늘어나는 고문을 당한 엘베라는 등과 팔의 근육까지 찢어져 있었다. 그 상태로 여러 차례 채찍질도 당해 더 이상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강도를 높인다면 뼈가 어긋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피부가 찢겨나가게 될지도 몰랏다.

“윽…….”

신음하며 고개를 떨군 엘베라의 가슴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다섯 번도 더 정신을 잃은 그녀는 상처 부위마다 약초가 발라져 있었다. 피로 젖었던 옷은 말라붙었다가 젖기를 여러 번 반복해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값비싼 약초가 그녀의 치료에 쓰이고 있었는데 그사이 고문실 내에는 의사의 수가 더 늘어나 있었다.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군! 벌써 날이 밝았다고. 그만 입을 여는 게 어때?”

도르래를 돌리던 장교가 성을 내며 엘베라에게 윽박질렀다. 고문실 내에는 창이 없어 하늘을 볼 수 없었지만 복도로 나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면 중앙탑의 창 입구로 스며들어 오는 새벽 어스름을 볼 수 있었다.

밤새 고문이 계속되는 동안 결국 동이 틀 시간이 되었다. 부대 내에 엘베라의 체포 소식이 퍼져 장교와 사병들은 소집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위 이상의 고위급 장교들은 밤사이 고문실을 드나들며 사건의 전말을 파악했는데 그중 몇은 고문실 내에 자리를 잡고 서서 엘베라를 지켜봤다.

포치 소장은 지난밤부터 아침에 이른 지금까지 고문실을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고문 중에 나온 말은 고문실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장교에 의해 모두 기록되고 있었는데 엘베라가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아 기록된 말이 많지 않았다.

“단테의 12인 놈들은 죄다 맷집이 좋은 자들밖에 없나? 징그러운 놈들 같으니라고.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들인지!”

고문실의 철문 근처에 서 있던 발레리아가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큰 숨을 쉬자 마르코도 그녀와 비슷한 동작을 취하며 눈을 감았다. 마르코의 옆에 서 있는 이브와 로미오만이 지친 기색 없이 엘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목은 괜찮은 거요?”

이브가 로미오의 다리를 살피며 물으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부축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쇼. 도와주겠소.”

엘베라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지금 로미오는 오로지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몸의 한계를 견디지 못한 그녀가 마음이 약해질 때를 노려 다시 한번 대화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내게 할 일이 있을 줄로만 알고 이곳에 온 것인데 아무래도 아닌가 보오. 이제 내가 도움 줄 일은 없을 것 같소.”

이브는 지팡이 위에 올려진 로미오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러진 그의 손가락은 지난밤에 대강의 처치만 받아 흉하게 부어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고 물으려는데 로미오가 대답했다.

“당신은 이미 제게 한 번의 도움을 줬습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로미오가 자신의 쪽으로 고개를 돌려 이브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새파란 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종신 연금을 노리고 이 일에 힘을 보탠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욕심이 나지 않소. 여기 이렇게 많은 군인들이 있는 데다 나는 한낱 떠돌이 용병에 불과하지 않소?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으니 괜찮다면 그만 이곳에서 나가고 싶소. 남은 일수 동안 단테 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바치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지켜볼 요량이오.”

고국도 아닌 외국의 정치 문제에 끼어든 격이 된 이브였다. 엘베라의 고문을 지켜보는 동안 자신이 철저히 이방인을 실감한 그녀는 그리 멀게 생각하지 않았던 로미오를 새삼스레 먼 타국의 낯선 이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비록 눈이 멀었지만 한때 군인이었고 일견 여전히 군인인 것처럼 보였다. 루바노의 복잡한 정세는 자세히 모르지만 이 문제가 루바노인들을 둘러싼 해묵은 문제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로미오가 그 파고에 휘말려 동생을 잃었다는 것도 알았다.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지만 같은 목표를 갖고 있으니 끝을 함께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 좀 더 머물러 계십시오. 왜 마음을 바꾸셨는지 모르겠으나 종신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군인이 아닌 것은 저와 발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연히 말하자면 저와 그녀도 이 일을 맡기엔 자격이 부족합니다.”

로미오는 이브에게 한 차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가 이곳에 남길 바랐지만 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로미오는 기척을 통해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이곳에 있어 봐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거요.”

잠시 후 엘베라가 의식을 잃자 군인들이 사납게 채찍을 휘둘렀다. 의사가 먼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순서였지만 약초가 바닥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정신을 차린 엘베라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고문실 내에 울려 퍼지자 도르래가 돌아갔다. 채찍이 피부를 후려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엘베라의 신음 소리가 한층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이브는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실은…….”

로미오의 눈을 응시하던 그녀는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당신의 형제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있소. 사정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일전에 들었소.”

로미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단테 놈들을 잡기 위해 성가시게 굴어서 미안했소. 아픈 상처를 들쑤시며 괴롭히려던 것은 아니었소. 그런 사정이 있는 줄 알았다면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을 거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의 의도를 곡해하지 않습니다.”

이브는 다시 고개를 들어 로미오를 올려다봤다. 말을 아끼던 그녀는 주저하며 물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당신의 형제를 위한 일인 거요?”

이브는 그 말을 하며 목에 걸린 아버지의 목걸이를 매만졌다. 산 자들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렇게 믿고서 시작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를 위한 일이 됐습니다. 이곳에서 퇴역식을 치르던 때를 떠올려 보면 앞으로 제게 이보다 더 큰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이들의 인생에 뛰어들 자격이 없다고 믿어 왔던 저인데 결국은 이런 자리에 서게 되었군요. 동생조차 지키지 못한 제가 얼굴도 알지 못하는 무수한 자들의 목숨을 구하려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상한 일이 아니오. 당신은 이런 일에 잘 어울리는 편이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소. 술집의 급사라니, 당신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소.”

“사실 제게는 이 나라와 통령 각하 외에 드높일 이름이나 명예가 없습니다. 가진 것 없이 장교가 된 터라 앞세울 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저 제 동생의 이름을 걸 뿐입니다. 두 동생이 있으니 두 동생의 이름 전부를 거는 것이 옳겠지요.”

“나도 평생을 내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살아왔기 때문에 죽은 가족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오.”

이브는 목걸이를 옷 속에 넣은 뒤 로미오에게로 몸을 돌려 섰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 후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테 놈들이 체포되고 나면 한동안 바치가 시끄러워질 테고 그러면 통행에 어려움이 많겠지만 나는 열흘 내로 이 나라를 뜰 생각이오. 여길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요.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고 바다를 떠돌며 다시 용병질을 시작할 거요. 그러니 미리 인사하겠소.”

이브는 오른쪽의 의수를 내밀려다가 멈칫하며 손을 바꿔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웠소.”

로미오는 이브가 자신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오른팔의 철 의수가 아닌 왼손으로.

정말로 떠나는 것이냐고 묻는 대신 허공을 더듬어 그녀의 손을 찾아냈다. 그녀는 부러진 로미오의 손가락을 건드리지 않도록 가볍게 손등만 잡고 금방 놓았다.

“잘 지내쇼. 앞으로의 일에 행운이 따르길 바라겠소.”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그리고 고문실 문을 지키고 선 군인들에게 다가가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브의 설명을 들은 군인들이 문을 열기 전에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중하고 절도 있었지만 문 앞까지 다가온 발소리는 누구나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다급했다.

“들어와라.”

정신을 잃은 엘베라를 지켜보던 포치 소장의 명령에 문이 열렸다. 철문 앞에 서 있는 것은 프라타 대령이었는데 그녀는 어젯밤까지 줄곧 엘베라의 고문을 지켜보다 곧 이루어질 대대적인 검거에 대비해 장교 회의에 잠시 참석한 참이었다. 로미오의 퇴역 당시와 비교해 눈에 띄게 건강이 나빠진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장님.”

목소리에 깃든 힘을 알아차린 것인지 고문실 내의 군인들이 일제히 그녀를 돌아봤다. 프라타 대령의 등 뒤에 서 있는 부관들도 그녀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들의 눈빛 속에 묻어나오는 뜻을 읽은 포치 소장이 채찍을 휘두르는 장교들을 제지하자 프라타 대령이 말했다.

“부대를 찾아온 이가 있습니다.”

부러진 어깨뼈를 가누지 못하던 엘베라가 바닥에 피를 토해 내며 고개를 들었다. 피범벅이 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그녀는 띄엄띄엄 끊기는 숨을 가까스로 내쉬며 문 앞에 선 프라타 대령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어 나올 말을 예상한 듯 고개를 떨궜다.

“자신을 상위 단원 중 한 명이라고 소개한 자가 협상을 요구하며 소장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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