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올빼미의 덫
“이게 무슨 소리지?”
수프와 빵이 담긴 접시를 든 간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지하 감옥으로 이어지는 철문의 자물쇠를 풀던 경비병이 말했다.
“지하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그 자식이에요. 어젯밤부터 계속 저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새벽에도 끊임없이 중얼대더군요. 감옥 내에 이상한 연기가 퍼져 있다며 코와 입을 막을 헝겊을 가져다 달라는 요구도 했습니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돌아 버렸나 봅니다.”
“그런데 누굴 찾고 있는 거지?”
“‘대위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는데 누군지는 저도 모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요. 풀어 달라거나 내보내 달라고 난동을 부리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한시도 조용하지 않고 떠들어 대서 골치가 아픕니다. 그 음식들, 가져다줘도 먹지 않을 겁니다.”
“아직도 독을 탔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나?”
“네. 바치 병원에서 일하던 의사라고 하던데 저렇게 미친 자식일 줄은 몰랐습니다. 웃긴 것은 그 자식을 비호하는 여인들입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작자이길래 하나 같이 그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놈을 보기 위해 감옥을 찾는 건지. 그런데 그건 뭡니까?”
경비병이 간수의 뒷주머니에 꽂힌 종이 뭉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자의 앞으로 도착한 문서인데 의사 협회에서 보낸 것이라더군. 곧 사형을 당할 죄수에게 이런 것을 보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텐데 말이지.”
경비병이 문을 열자 간수는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죄수 여러 명을 가둘 수 있는 넓은 공간에 유령 같은 목소리가 맴돌았다.
“대위님이신가요?”
차가운 돌벽을 타고 올라온 목소리는 어딘가 음산하게 들렸다. 간수는 조반니가 갇혀 있는 감옥 앞으로 다가갔다.
“아침 식사요. 먹으쇼.”
쇠창살 아래에 난 작은 칸으로 접시를 밀어 넣은 간수는 감옥 안을 들여다봤다.
죄수 세 명을 한꺼번에 가둘 수 있는 넓은 감옥 안에는 딱딱한 나무 침대와 소변통이 있었는데 조반니는 벽에 연결된 쇠사슬에 발이 묶인 채 침대 위에 서 있었다. 구금실의 쇠창살을 구부리며 간부들을 위협한 터라 쇠창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은 것이었는데 그는 둘둘 만 옷을 얼굴에 감아 코와 입을 가리고 있었다. 구금할 죄수가 없어 넓은 감옥을 독방처럼 쓰고 있지만 발이 묶여 있어 별소용이 없어 보였다.
이상한 것은 조반니가 어제와 달리 부산스러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독을 태운 음식을 누구더러 먹으라는 겁니까? 그보다 대위님께서는 아직이신가요?”
체포돼 왔을 때부터 배후니 음모니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긴 했지만 지금 조반니는 나무 의자를 밟고 다니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데다 눈빛도 어딘가 이상했다.
“그자가 대체 누구인데 계속 찾는 거요? 당신을 만나러 온 사람은 지난번의 그 포르치오 가문 도련님과 이름 모를 여자들밖에 없소. 그런데 왜 침대 위에 올라가 있는 거요?”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지는데 이는 필시 저를 해하려는 자들의 움직임에 의한 진동입니다. 간수에게 이야기했지만 그가 제 의식을 대신해 지켜 주지 않으니 제 감각으로 습격을 대하는 수밖에요. 그건 그렇고 대위님께서 저와의 만남을 위하려 했는데 거짓말을 한 게 아닙니까? 그분이 저를 만나 보셨는데 강제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까?”
“무슨…… 뭐라는 거요? 알아듣게 얘기하쇼.”
간수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조반니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그러면서도 몸을 낮춰 지상으로 이어지는 감옥 계단을 흘깃댔다. 혹시 거기 있을지 모르는 로미오의 그림자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제 말에 이해가 없다는 것 때문에 저를 몰아가는군요. 경비병과 작당이라도 했답니까? 그자도 제 말의 변화가 어렵다는 핑계로 대위님께서 왔던 것을 거짓말로 둘러댔습니다. 이건 저와 대위님께서 계속 이야기를 해야 하는 문제인데다 그동안 얘기하지 못해 오해가 깊어졌습니다. 오해라는 것은 오래되어 해묵은 의심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므로 저 역시 의심과 부딪치는 일이 많습니다.”
고개를 빼고 문 쪽을 살피던 조반니는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간수가 멍청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자 한숨을 쉬었다.
“전략도 좋은 전략이네요. 계속 그런 식으로 제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다가 대위님이 오셔도 제가 알지 못하게 보낼 생각이 아닙니까?”
조반니는 간수가 자신과 로미오의 만남을 막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게 하려고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데 간수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군. 마음대로 생각하쇼. 그보다 당신 앞으로 도착한 문서 한 통이 있으니 읽어 주겠소. 의사 협회에서 보내온 것인데 오늘부로 당신을 협회에서 제명시킨다는 내용이 적혀 있소. 바치 내에 존재하는 모든 의사 협회의 협회장들이 빠짐없이 서명했소. 당신에게서 협회의 회원이 될 자격을 영구히 박탈할 것이라고 하는데 이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전달 의무가 있어서 알려 주는 거요. 그럼 이만.”
간수가 할 말을 마치고 돌아서자 조반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명? 그깟 의사 협회 따위에 중요함이 있다고 믿는다니까 어디 실컷 해 보라지.”
이미 예상한 일이었던 데다 의사 협회에 미련이 없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간수가 지상으로 이어지는 문을 닫고 나가자 조반니는 그 너머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중얼댔다.
“바닥의 진동들은 완전히 그칠 줄은 모르는군. 대체 어떤 원리로부터 시작 중인 진동이지?”
조반니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침대 위로 올라섰다. 로미오만 아니었다면 진작 이 위험한 감옥에서 탈출했을 것이다. 저 돌벽을 파내서라도 누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도 마무리되어 가고 이제 재판을 받을 일만 남았으니 로미오가 자신을 용서해 줄 마음이 들도록 소란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갇혀 있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죄를 달게 받으면 로미오가 자신을 가여워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감옥 안에 퍼져 있는 연기에 질식이라도 당한다면 그 점 역시 로미오의 동정을 유발할 것이다.
“대위님이신가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감옥 내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모를 소리가 들리자 조반니는 큰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이 들리지 않자 한 번 더 물었다.
“대위님?”
그러나 컴컴한 감옥 안에는 자신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로미오가 혹시 줄리오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대위님께서 생각 대신 시간이 필요한 것이겠지. 시계를 갖고 있어도 단절 없는 채로 보내기는 힘드니 말이야. 기다림이 필요해질 때지.”
조반니는 카를로타에게 전달된 투서에 대해 생각하며 침대 위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오늘로서 자신이 며칠을 굶은 것인지 잊은 그는 뺨이 야위어 가고 있는 사실을 모른 채 코와 입에 두른 옷을 더 단단히 조였다.
* * *
“열 살 때 처음으로 용병 부대에 들어갔다가 버티지 못하고 도중에 도망을 쳤소. 용병 대장에게 붙잡힌 벌로 오른손이 잘렸는데 나도 실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오. 용병들이 내 손을 자른답시고 양쪽에서 몸을 붙들더니 칼을 든 자가 팔을 대라며 고함을 쳤었소. 내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보고 그대로 기절해 반나절 만에 깨어났었소.”
“끔찍하기 짝이 없군요. 어떻게 어린아이에게 그런 야만스러운 짓을 한답니까?”
“병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용병대장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 많아져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우선 지원자로 받아 주고 보는 거요. 이 어깨는 전투 중에 잘렸는데 본래 이렇게 깔끔하게 잘린 것이 아니었소. 어느 말 탄 창기병에 의해 팔꿈치를 절단당했는데 상처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른 것이오. 이 어깨를 자를 때도 기절을 해서 뒤늦게 깨어났는데 일어나 보니 어깨 전체가 없었소.”
마차가 덜컹거리자 이브의 오른팔 의수도 덜커덕 소리를 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브의 이야기를 듣던 마르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루바노가 용병 부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라는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어떻게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그런 짓을 한답니까? 야만인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자들입니다.”
“돈에 눈이 멀면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되는 짓도 하는 법이오. 돈 냄새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용병의 일생인데다 그들과 계약을 맺는 고용주들이 공공연히 악행을 눈감아 주는 까닭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거요.”
방금 막 제6군단의 부대 앞을 벗어난 마차는 곧 로사티 거리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할 얘기라는 게 뭐요? 로미오가 단테의 12인과 관련해 내게 도움을 주려나 보오?”
“글쎄 말입니다. 저도 집으로 와 달라는 이야기만 들어 아는 것이 없습니다.”
마차가 멈추어 선 곳은 로미오의 하숙집이었다. 이브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로사티 거리 경관을 구경했다.
마르코가 문을 두드리자 그라나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오랜만입니다, 부인.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오랜만이우. 그렇지 않아도 올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우. 그런데 이쪽은?”
그라나 부인이 이브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목례를 해 보였다.
“이브 헤스라고 합니다.”
“으응? 이브 무어라고?”
“이브 헤스요. 근사한 집이군요. 부인의 집입니까?”
“그렇다우. 그나저나 옷차림이 독특한데 루바노 사람이 아닌 거이?”
“저는 하슬러 공국 출신으로 비록 떠돌이 신세지만 용병입니다.”
“이분은 로미오와 함께 나눌 얘기가 있어 제가 모셔 온 분입니다. 대위는 위층에 있습니까?”
“조금 전부터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우. 기다리고 있을 거이.”
위층으로 올라가니 문이 열려 있었다. 마르코가 열린 문을 두드리며 소리 내자 창가에서 창틀을 닦고 있던 로미오가 뒤를 돌아봤다.
“오랜만이오. 실례하겠소.”
이브가 먼저 인사하자 로미오가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움직이며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뵈었던 날 비가 오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이오. 단테의 12인과 관련해 별다른 수완은 없었지만 나를 알아보는 자들 덕분에 돈 한 푼 내지 않고 식사 대접을 몇 차례 받았소. 나에 관한 소문을 들어 본 적 있다는 이유만으로 호의를 베푸는 자들이 많은 것을 보면 루바노 사람들이 인심이 좋은 모양이오.”
“뭘 하고 있었나? 창가를 정리하는 거라면 내가 도와주지.”
“아니요. 다 끝났습니다. 앉으십시오.”
로미오가 앉을 자리를 권했으나 이브는 집 안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검소하고 단정한 실내에서 루바노 특유의 정취가 느껴지는 게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화분 하나 없는 창가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는 수수한 커튼이 달려 있었는데 그 커튼에서도 루바노다운 맛이 느껴졌다. 열 살 때 이후로 자신의 집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이브는 이 꾸밈없는 소박한 집에 묘한 정감을 느꼈다. 집이 갖고 있는 분위기가 로미오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일로 우리를 보자고 한 건가?”
두 사람이 탁자 앞에 앉자 로미오가 선 채로 대답했다.
“이야기를 드리기에 앞서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들은 얘기는 반드시 비밀에 부치셔야 합니다. 국정에 관한 기밀이기에 외부로 흘려보내선 안 됩니다. 실수로라도 이야기가 발설될 경우 루바노의 운명이 뒤바뀌게 될 겁니다. 이 이야기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두 분과 저, 그리고 발레리아뿐입니다.”
로미오가 ‘운명’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쓰자 마르코가 이브를 슬쩍 봤다. 그녀도 마르코를 슥 보더니 뭔가를 눈치채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제에 감히 어떻게 이 나라의 운명을 팔아먹을 수 있겠소. 명심할 테니 걱정은 접어 두쇼. 그래서 할 얘기가 뭐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군에서 퇴역을 한 이후 우연한 계기로 단테의 12인의 단원과 접촉하게 됐습니다. 그자는 제가 군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입회를 권유했고 덕택에 저는 입회식을 치렀습니다. 제게 입회를 권유한 단원은 단테의 12인을 와해시키고자 다른 단원들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에게 가담하게 됐습니다. 때를 노려오던 중 드디어 기회가 온 것 같아 두 분께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마르코와 이브는 동시에 놀란 표정이 되어 입을 떡 벌렸다. 짧은 정적이 흐르더니 두 사람은 다시 동시에 말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무어, 무슨… 뭐라고?”
“로미오 당신이 그들의 일원이란 말이오?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이오? 다른 이도 아니고 당신이 그 단테놈들이란 거요? 당신이?”
마르코보다 더 흥분한 이브의 말이 빨라지자 로미오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반니가 통령의 남동생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자신이 아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이 자신에게 협력해 주어야 하는 이유와 통령의 암살 공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단테의 12인의 입회식을 치르게 된 이유와 과정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했다. 한때 같은 목표를 갖고 군에 몸담았던 마르코가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자 그는 다른 이유로 감정이 격양됐다.
“대체 이게 다 무슨…! 그러면 여태 그런 위험한 일을 혼자서 해 왔다는 말인가? 맹인이라는 이유로 자네를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 취급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해야겠어. 그들의 은거지에서 입회 의식까지 치렀다니 어떻게 그런 위험한 짓을 독단적으로 할 수 있나? 이렇게 무사히 내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은 큰 운이 따른 일이야. 올빼미 놈들이 얼마나 비열한 자들인지 알고 있잖은가?”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는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비밀은 알고 있는 자들이 많아질수록 지키기 어려워지는 법이라고 생각해 은밀히 이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논의 없이 그런 일을 감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몇 번이고 숙고했어야 할 문제였어. 그들은 다수지만 자네는 혼자가 아닌가? 자네의 속내를 알아차린 자가 있었다면 단테의 12인이 가차 없이 자네를 처단하려 들었을 거야. 그 어떤 것보다 자네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돼.”
상황을 전부 파악하기까지 마르코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이브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들의 명부를 얻어 내기 위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마르코가 동생을 나무라는 나이 많은 형님처럼 꾸짖는 말을 몇 마디 더 하는 가운데 이브가 재빨리 상황 판단을 끝내고 반색했다.
“만약 이번 일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하면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거요?”
“예. 제가 시작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한 공로는 반드시 여러분께 돌리겠습니다. 통령 각하께서도 외면하시지 않을 겁니다.”
“종신 연금은 어떻게 되는 거요? 그것도 받을 수 있는 거요?”
“그럴 겁니다.”
“우리가 공평하게 나눠 갖는 방식으로 말이오?”
“저는 종신 연금에 관심이 없으니 발레리아를 포함하여 세 분께서 나눠 가지는 것으로 해 두겠습니다. 그런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로미오는 방에서 피에트로의 편지를 갖고 나왔다. 이브는 여태 종신 연금에 목을 맸으면서도 막상 로미오가 받지 않겠다고 하니 마뜩잖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나눠 가지는 게 맞지 않겠소? 내가 할 일이라고는 당신이 시키는 것을 하는 게 전부일 텐데 말이오.”
“저도 종신 연금에 큰 욕심이 없으니 원하신다면 다 가지셔도 됩니다.”
엄한 표정이었던 것도 잠시 마르코가 흔쾌히 이야기하자 이브는 팔짱을 끼며 고민에 잠겼다.
그 사이 로미오는 탁자 위에 편지를 펼쳐 놓았다.
“우선 이 편지의 내용을 확인해 주십시오. 이번 일과 관련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단서가 적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무슨 편지지?”
“바치시 축제날 피에트로와 함께 벽보를 붙인 혐의로 붙잡혔던 소녀가 피에트로에게 보냈던 편지입니다.”
편지를 집으려고 손을 뻗었던 마르코는 멈칫했다. 피에트로가 로미오의 죽은 첫째 동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브도 벌리고 있던 입을 얼른 다물며 눈을 굴렸다. 로미오의 얼굴을 흘끔대니 그는 눈을 내리깐 채 마르코가 편지를 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마르코가 편지를 뜯자 이브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내가 단테놈들을 잡을 수 있게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했을 때 당신은 내게 비밀을 들킬 위험을 감수했던 거요?”
“예. 당신의 도움을 거절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단테의 12인에게 제가 밀정임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당신의 접근이 달가울 수 없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곤경에 빠트릴 수도 있었단 얘기요?”
이브가 당황해 입을 벙긋거리자 로미오가 말했다.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지 않았으니까요.”
지난번 만남 때까지만 해도 이브를 ‘손님’이라고 불렀던 로미오는 이제 당신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가 평범한 급사 나부랭이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이브로서는 그 편이 로미오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번화가 술집에서 손님들에게 술이나 꺼내 주는 일을 하기엔 비범한 자였다.
“편지에 제가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 적혀 있습니까?”
마르코가 편지를 내려놓는 기척에 로미오가 물었다. 편지를 읽는 동안 마르코의 표정엔 착잡함이 번져 있었는데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편지 끝만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어린 소년·소녀들이 주고받을 법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어. 그리고 벽보에 관한 이야기도 적혀 있군. 공모자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만 논의한 모양이야. 서로의 일상에 관한 평범한 이야기도 적혀 있는데 자네에 관한 이야기도 있어.”
“어떤 이야기입니까?”
“……피에트로가 벽보에 관한 일이 알려질 경우 자네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우려했던 것 같아. 소녀 역시 그 점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려고 했던 것 같군. 그리고 두 사람 사이가 각별했던 것처럼 보여. 연인들 간의 편지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애틋한 말이 적혀 있어.”
이브는 자신이 끼어들어 아는 체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로미오의 표정을 살폈다. 이 편지가 유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 외에 이번 일과 관련하여 도움이 될 내용은 없겠습니까?”
“……없는 것 같군.”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느낀 마르코의 목소리가 잦아들었지만 로미오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편지를 접었다. 손을 더듬어 삐뚤삐뚤하게나마 편지를 전부 정리한 그는 이브에게 말했다.
“오늘 밤 저와 함께 단테의 12인의 인명록을 갖고 있는 상위 단원들을 습격해야 하니 이곳에 머물러 주십시오. 자정이 가까워 올 무렵에 행동에 나설 겁니다. 이 일에는 발레리아도 함께 하게 될 겁니다. 인명록을 얻기 위해 상위 단원들을 협박하고 고문하여도 좋고 회유하거나 설득해도 좋습니다. 저는 그들을 회유하는 것이 더 수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자가 생긴다고 해도 불가피한 상황이라 판단하고 괘념치 않을 겁니다. 어차피 사형대에 올라 처단을 받을 자들이니 고문 과정에서 죽여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인명록을 갖고 있는 상위 단원들이 어디 있는 줄 알고 그들을 습격한다는 말이오?”
“그들의 은거지를 알고 있습니다. 단원들 간의 연락망을 통해 습격 사실이 전해질 것을 우려해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일을 진행할 겁니다. 인명록을 특별한 장소에 보관하고 있지 않은 이상 단원들은 자신들의 은거지 어딘가에 숨겨 놓았을 겁니다. 고문 과정에서 그곳을 수색해야 할 겁니다.”
로미오는 상위 단원들의 이름과 출신지, 나이 등이 적힌 양피지 조각을 갖고 나와 두 사람에게 준 뒤 마르코에게 말했다.
“계획이 어그러질 경우 제6군단의 힘을 빌려야 하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주십시오.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간다면 장교들을 동원해 습격을 감행해야 할 것이며 그때가 되면 포치 소장님께도 이번 일의 전말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겁니다.”
양피지를 들여다보던 이브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금 당장 습격하면 안 되는 것이오? 여기 이렇게 버젓이 그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기다리는 이유가 뭐요? 이자들을 지금 당장 잡아들여 고문하면 되지 않겠소?”
“생포 과정에서 다른 단원들이 달아나 버리면 추적에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그들을 단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도주할 시간을 주지 않고 한 번에 해치우려는 겁니다. 생포 대상들이 수도인 바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6군단을 파견하기 위한 시간도 벌어야 합니다. 상위 단원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인명록을 얻어 낸 뒤 남은 하위 단원들을 체포하고 지방 지부를 습격하는 식의 순차적인 방법을 쓴다면 포위망에 구멍이 생길 겁니다. 도주에 성공한 소수 단원들은 어떻게든 자신들과 뜻을 도모할 자들을 다시 모아 조직을 이끌 겁니다. 밀정이 있었음을 깨달았으니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자신들의 몸집을 불릴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이 나라는 또다시 그들과 긴 전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로미오는 발레리아 몫의 양피지 한 장을 접어 옷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마르코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양피지 제일 마지막에 적힌 이름을 가리켰다.
“이건 스포르차 선생의 이름이 아니야?”
“맞습니다. 제게 접촉을 시도하며 입회를 권유했던 자가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분 역시 단테의 12인을 와해시키고자 오래전에 입회를 결정하신 겁니다.”
마르코가 얼떨떨해진 표정으로 입을 벌리자 이브도 놀라서 양피지를 들여다봤다.
“하지만 그분은 구금되셨고 살인 혐의를 받고 계시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럼 습격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제게 계획이 있지만 두 분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 * *
“여기가 묘지야. 저 묘석 보이지?”
“저기에 피에트로 형이 있어?”
“응. 땅 밑에 묻힌 관 속에 있어.”
로미오의 손을 잡고 묘지를 걷던 엔초는 뒤를 돌아봤다. 묘지를 둘러싼 담장 밖에 타고 온 마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마차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에게 눈길이 갔다. 해가 저물어 주위가 어두웠지만 은빛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화실에서 돌아왔을 때 마르코, 로미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낯선 사람이었다. 이름은 이브 헤스라고 했다.
“저 누나 말이야. 저기 서서 계속 이쪽을 보고 있어.”
엔초가 이브를 가리키며 속닥대자 로미오가 대답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로미오의 손을 잡고 묘지를 걷는 동안 엔초는 몇 번 더 뒤를 더 돌아봤는데 세 번째로 돌아봤을 때 이브는 짧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 절뚝거리는 로미오의 발목을 가리키기도 했는데 그것이 로미오를 잘 부축하라는 뜻인 것 같아 엔초는 로미오의 손을 꼭 잡았다.
로사티 거리에서부터 동행한 그녀는 마차 안에 타는 대신 마부대에 앉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바치 시가지를 구경했다. 바치를 아름다운 도시라고 칭찬하며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그녀는 묘지가 가까워 오자 입을 다물었는데 엔초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크게 놀라며 로미오에게 했던 첫말을 기억했다.
[동생이라더니 사실은 아들이 아니오? 형제가 이렇게까지 닮을 수 있다니 놀랍소.]
그녀의 옷차림이 독특하다고 생각하던 엔초에게 이브는 자신을 용병이라고 소개했다. 로미오는 그녀가 오늘 밤까지 집에 머물 거라고 이야기했다.
“여기 봐. 이게 피에트로의 묘석이야.”
지팡이로 바닥을 더듬어 위치를 확인한 로미오가 어느 묘석 앞에 멈춰 섰다. 엔초가 들여다보니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왜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거야? 피에트로 알피에리라고 적혀 있어야 하잖아.”
“사정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대신하게 됐어. 하지만 이 땅 아래에 묻혀 있는 건 피에트로가 맞아. 관을 묻는 과정을 전부 지켜봤으니까 틀림없어.”
엔초는 로미오의 손을 잡은 채 허리를 숙여 묘석을 들여다봤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힌 묘석에는 무덤의 주인이 이곳에서 평화로운 잠에 들었다는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묘지에 죽은 사람들이 묻힌다는 것도 알았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쏭달쏭하지만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말은 여전히 믿지 않았지만 피에트로가 관속에 들어가 땅 아래에 묻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해석하더라도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묘지에 들어섰을 때와 달리 조금 풀 죽은 표정이 됐다.
“피에트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다른 묘석들을 둘러본 엔초는 이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피에트로 형, 나 엔초야.”
말하고 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 뒷말을 머뭇거리게 됐다. 피에트로는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여기서 아픈 곳 없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 비가 오거나 날이 추울 때도 따뜻하게 잘 지내. 내가 로미오 형이랑 자주 올 테니까 심심해하지 마. 그리고 음, 또…….”
로미오가 손을 놓아주자 엔초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땅을 쓰다듬었다. 묘지의 흙은 차가웠다.
“형 말을 잘 듣지 않고 말썽 피웠던 거 사과할게. 우리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그때가 오면 형 말도 잘 듣고 사탕을 사 달라고 떼쓰지도 않을게. 형이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할 거야.”
엔초는 묘석 주위를 걸어 다니며 피에트로에게 계속 말을 걸더니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러니까 나중에 또 보러 올게. 안녕. 이제 형 차례야. 형도 얘기해.”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쏟아…낸 엔초는 다시 로미오의 손을 잡았다. 로미오가 말이 없자 형, 하고 손을 당겼다. 그러자 로미오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음속으로 했어.”
“벌써?”
“응. 그러니까 그만 가자.”
“무슨 말을 했는데? 나한테도 알려 줘.”
“비밀이야.”
로미오가 얼굴을 감추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자 엔초는 한껏 몸을 낮추고 로미오를 올려다봤다. 표정이 슬퍼 보이자 조심스레 물었다.
“형 울어?”
“아니야. 울지 않아.”
“나중에 언제 다시 여기에 올 수 있어?”
“네가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자. 내일 또 오고 싶다면 내일 또 오자.”
묘지를 나오는 길에 엔초는 피에트로의 묘석을 향해 한 번 더 손을 흔들었다. 묘지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로미오의 걸음이 느려지자 로미오의 허리를 안으며 가까이 달라붙었다.
“더 있다가 갈까?”
“아냐, 곧 잘 시간이니까 얼른 집에 가자.”
마차에 오르고 보니 이브는 마부대에 올라타 있었다.
“저 누나는 왜 저기 앉아서 가는 거야? 같이 타고 가면 안 돼?”
“그럴까?”
로미오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부르자 이브가 마부대에서 내려왔다.
“도움이 필요한 거요?”
이브가 마차 안을 둘러보는 모습에 엔초가 빈자리를 가리켰다.
“같이 앉아서 가요. 오는 길에 바치 시내를 전부 구경해서 더는 구경할 게 없을 거예요.”
엔초가 마차의 주인인 양 의젓하게 얘기하자 로미오가 그러십시오, 하고 거들었다. 똑같이 생긴 두 형제가 권유하니 이브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지.”
마차가 출발하자 엔초는 호기심 많은 눈으로 이브의 얼굴을 쳐다봤다. 붉은색 눈을 가진 사람을 처음 보는 까닭에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보자 이브가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엔초도 눈을 크게 뜨자 이브는 더 크게 떠 보였다.
엔초가 손으로 눈꺼풀을 벌리며 더 크게 눈을 뜨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로미오가 물었다.
“밀라니 선생님 댁에 가는 건 생각해 봤어?”
“응. 형한테 얘기한 뒤로 틈날 때마다 고민했어. 그런데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정말 좋은 기회인데다 이번에 거절하면 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거 같거든. 형이랑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슬프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어. 밀라니 선생님 댁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조각 실력도 키워서 나중에 아주 유명한 조각가가 되면 형한테 멋진 옷과 신발을 사 줄게.”
엔초가 씩씩하게 말하자 로미오가 미소를 지었다. 고민스럽거나 슬픈 감정을 오래 갖지 않고 금세 명랑해지는 것은 엔초의 장점이었다.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걸.”
“형이 지금까지 나를 키워 줬잖아. 그러니까 나중에 내가 부자가 되면 요리사를 고용해서 매일 아침마다 형한테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게 할 거야.”
“정말?”
“응. 그리고 바치에서 제일 실력 좋은 장인이 만든 지팡이도 사 줄게. 분명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지팡이일 거야.”
엔초가 두 팔로 로미오의 몸을 껴안자 로미오가 어깨를 안아 줬다.
“너한테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야. 그럼 곧 밀라니 선생님 집으로 떠나게 되는 거네?”
“응, 그러니까 남은 시간 동안 형이랑 재밌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
“어떻게 재밌게 보낼까?”
“생각해 볼게.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까 내일부터 함께 재밌는 걸 해 보자.”
두 팔로 안기 힘든 로미오를 낑낑대며 안느라 볼이 눌린 엔초는 윤기 흐르는 이브의 가죽 로브를 관심 있게 쳐다봤다. 그녀는 자신과 로미오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자신과 로미오가 얼마나 닮았는지 비교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보면 볼수록 붉은 눈이 신비롭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묻는 말이 나갔다.
“누나의 눈은 원래부터 붉은색이었어요?”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를 어려워하지 않는 엔초는 순수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이브는 어린아이들과 대화해 본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눈높이를 맞춰 주고자 간단히 대답했다.
“내 눈 색은 날 때부터 이랬어. 하슬러 사람들 중에는 붉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꽤 돼.”
“그럼 하슬러에서는 붉은 눈이 특이한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봐야지.”
엔초는 이브가 입고 있는 옷을 관찰하다가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용병은 무슨 일을 해요?”
“용병 부대에 들어가 전투를 하는 게 우리들의 일이야. 여러 나라를 떠도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용병을 필요로 하는 나라에 정착해 용병대장의 밑에서 일을 하는 자들도 있지. ‘방랑’이 무슨 뜻인지 알아?”
“네, 알아요. 누나는 그럼 방랑하는 쪽이겠군요? 그런데 그 목걸이는 뭐예요?”
엔초가 가슴께의 목걸이를 가리키자 이브는 약간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아버지의 유품이야. 내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일한 물건이지.”
“누나는 가족이 없나요?”
“어렸을 때 다 죽었어. 마지막 남은 사람이 내 아버지였는데 이렇게나마 목걸이를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인 일이야.”
“내 꿈은 조각가인데 누나도 어렸을 때부터 용병이 꿈이었어요?”
“뭐, 그렇다고 해 두지.”
엔초가 이브를 신기한 눈으로 보듯이 이브도 엔초를 신기한 눈으로 봤는데 이유는 당연히 엔초가 로미오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로미오와 달리 엔초는 머리카락이 고불거린다는 점이었다.
“오른팔에 그건 왜 차고 있는 거예요? 멋있어 보이기 위해서 찬 거예요?”
의수 안이 비어 있는 것을 모르는 엔초가 묻자 로미오가 주의를 주듯 “엔초.”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이브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맞아. 이런 팔을 끼고 다니면 모두들 날 두려워하거든. 이 소리를 들어 봐. 이 철컥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전부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
“무겁지 않나요?”
“무거워. 이것 때문에 키가 자라지 않는다고 느꼈던 적이 있을 정도로 아주 무겁지.”
“만져 봐도 돼요?”
엔초가 들떠서 묻자 로미오가 엔초의 무릎을 짚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만져도 되겠냐고 묻는 건 실례되는 질문이야.”
로미오가 제지하자 이브는 손을 저었다.
“문제없으니 놔두쇼.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 이 팔을 모른 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요. 괜찮으니 어디 한번 만져 봐라. 평범한 철 의수지만 이런 건 처음 보지?”
이브가 팔을 내밀자 엔초가 의수를 만지며 와아, 하고 감탄했다. 팔꿈치의 이음매 부분을 자세히 살피며 신기해하던 엔초는 철커덕대는 소리가 나자 눈을 빛냈다.
“척 보기에는 정교해 보이지만 세밀하게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 이렇게 뒤로 기울이면 이음새 부분이 돌아가며 방향이 바뀌지만 물건을 집는 건 어려워. 무거운 것을 받치거나 들고 있는 건 가능하지만 손가락을 하나씩 꼽거나 집게손가락으로 모양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여기 이 부분은 녹이 슬어서 이렇게 된 거예요?”
“맞아. 너무 오랫동안 쓴 데다 관리하기가 힘들어서 이렇게 되어 버렸어.”
“와, 정말 무거워요!”
“그래서 이걸 벗으면 몸이 가볍게 느껴지지. 이런 쇳덩어리를 달고 다니니 매일 몸을 단련하는 기분이기도 해.”
이브의 의수를 두 손에 올려놓고 위아래로 들어 올렸다가 내린 엔초는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엔초가 행여나 무례한 행동을 할까 봐 둘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로미오는 이브가 엔초에게 장단을 맞춰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숙집까지 돌아오는 내내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얘기를 나눴는데 이브가 루바노의 관습이나 문화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이 많아 엔초가 가르쳐 줄 게 많았다. 아직 어려서 모국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은 없지만 루바노 사람이 아닌 이브가 루바노를 칭찬하니 엔초는 신이 나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왔을 땐 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엔초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잊지 않고 이브에게 밤 인사를 했다.
집 안이 조용해지자 로미오와 이브는 일부러 촛불을 켜지 않고 창가 가까이 다가가 아래를 살폈다.
“발레리아라는 자는 언제 오는 거요?”
“곧 오실 겁니다. 조금 전에 들으셨겠지만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이 친 관계로 이제부터 공안국이 거리를 단속할 겁니다. 거리로 나가게 되면 되도록 골목을 통해서만 다닐 텐데 만약 공안국과 마주친다면 도망쳐야 합니다.”
“알겠소.”
시각을 확인해 보니 곧 암살 시도가 벌어질 듯했다. 로미오는 발목과 손이 다 낫지 않았지만 부목을 전부 풀고 있었다.
“묘지에서 보니 절뚝거리면서 걷던데 다친 곳은 괜찮은 거요?”
“오늘 아침에도 의사가 왕진을 왔습니다.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모든 비밀을 전해 듣고 종일 생각해 보았는데 조반니 그자와 당신이 단테놈들이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소. 그놈들을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는데 코앞에 있었다니 바보가 된 기분이오. 당신도, 그자도 참으로 대담하오.”
“제가 퇴역하기 전에 선생님을 제6군단으로 모셔가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일을 떠올려보건대, 선생님께선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분이십니다. 제6군단이 무능한 것이 아니니 선생님께서 주도면밀하셨다고 봐야 하지요.”
조반니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로미오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일이 마무리되면 당분간은 이 나라를 떠나기 힘들어지실 겁니다. 루바노 밖으로 이어진 육로가 차단되고 국경마다 제6군단의 엄격한 검문이 이뤄질 겁니다.”
“지난번에 내가 한 말을 잊어버렸소? 나는 돈만 있다면 이 나라에 눌러살 생각이오.”
“기분 삼아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이곳은 내 고향인 하슬러만큼이나 살기 좋은 나라요. 지금껏 불친절한 루바노인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소. 성급하고 흥분을 잘하는 이들은 봤지만 다들 술과 노래를 즐긴다는 점에서 유쾌한 자들인 것 같소.”
“나라가 부강한 덕분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술과 노래, 춤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그림과 같은 예술과 친숙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화려한 시대를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만 이 나라에도 그림자가 드리운 곳은 있습니다. 그 그림자로부터 태어난 이들이 단테의 12인을 만든 것입니다. 공화주의자가 아닌 자들 말입니다.”
루바노의 정세에 대해 잘 모르는 이브는 ‘공화주의자’라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창 너머를 내려다봤다. 보통 때 같았다면 이 시간에 허기에 시달렸을 그녀였지만 로미오에게 배 터지게 저녁을 얻어먹은 덕에 허덕이는 기색 없이 창밖을 열심히 살폈다. 거사를 앞둔 것치고 지나치게 고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마침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리아는 잠기지 않은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니었다. 약속되지 않는 방문자라는 생각에 로미오가 얼른 문을 돌아보자 이브가 고개를 빼고 창밖을 내다봤다.
“마차 한 대가 서 있소.”
이브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데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있는 거요?”
로미오가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브에게 말했다.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여기 계십시오.”
카를로타가 예상보다 더 빨리 사람을 보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로미오는 발소리를 죽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 두드림이 한 번 더 들려 문 앞으로 다가가는데 문을 두드린 자가 정중한 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십니까?”
문 틈새에 입을 대고 말하자 열어 달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은 순간 로미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짧은 머뭇거림 후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완전히 감춘 로미오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문객이 주위를 살피는 것 같은 인기척을 내며 말했다.
“내가 집을 제대로 찾았군. 조반니와 관련해 급히 논의하여야 하는 일이 있어서 찾아왔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엘베라였다. 로미오는 다시 한번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선생님의 구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려는 겁니까? 유감스럽지만 저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로미오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자 엘베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네. 장소를 이동하도록 하지. 더 적합한 곳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옳을 듯해.”
“구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겁니까? 혹 선생님께 다른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전 그분이 체포된 이후부터 얼굴을 뵙지 못하고 있어 소식을 잘 알지 못합니다.”
로미오는 엘베라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집 안으로 안내할 필요성을 느꼈다.
“길지 않은 이야기라면 올라가서 하도록 하십시오.”
“복잡한 이야기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은밀히 나눠야만 하는 이야기야.”
“어린 동생이 집에 혼자 남아 있습니다. 새벽녘에 갑자기 깨 저를 찾는 일이 많은 아이라 집을 비울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렵다면 그만 돌아가십시오.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적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엘베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지만 그녀를 따라나서는 것은 이번 일에 차질을 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위층을 살피는 척 돌아서는데 엘베라가 목소리를 한층 낮춰 말했다.
“조반니에 관한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올랐네. 그는 밀정이야.”
순간적으로 숨소리가 조급해졌다. 눈이 크게 뜨였으나 엘베라에게 등을 보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정신이 또렷해진 로미오는 자신이 보여야 할 반응을 한 가지로 좁히고 숨을 가다듬었다. 자신은 엘베라를 볼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을 볼 수 있었으므로 자신에겐 약점이 하나 있는 셈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돌아선 로미오는 엘베라의 얼굴이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향해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고 계신 겁니까?”
“자네에게 알리지 않았으나 우리는 이번에 한 가지 작전을 모의했네. 그 작전은 비스카르디 통령과 관련된 것인데 조반니가 밀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서 그에게 정보를 노출했네. 자네와 시급히 상의하여야만 이 사태를 매듭지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나를 따라오게. 여기에는 우리의 대화를 엿들을 자가 있어서 위험해.”
“설명이 부족합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려 대답할 말이 없군요. 무슨 이유로 선생님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조반니는 모종의 이유로 우리들의 틈으로 숨어들었으며 그가 밀정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진실이네. 이 의심의 뿌리에 대해 자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해.”
로미오는 문고리에 올린 손에 힘을 줬다. 엘베라가 대체 어떻게 비밀을 알아차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따라가야 할까, 아니면 여기에 머물러야 할까.
판단이 서지 않아 엘베라의 의심을 한 번 더 반박함으로써 시간을 벌기로 했다.
“선생님께서는 죽은 형제의 복수를 하고자 하는 저의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제 입회를 직접 추진하시기까지 했는데 그 과정에서 선생님이 저를 포함한 상위 단원들 전부를 속였다는 겁니까?”
“나는 오랫동안 조반니를 의심해 왔네. 그리고 단서를 모아 왔지. 이제야 확신하네. 그는 우리를 배신하기 위한 준비를 오래전부터 해 왔어.”
“단서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우선 가지. 자칫하다간 자네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위기에 처할 수 있네. 오늘 밤을 기점으로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하고 있는 말과 달리 엘베라는 그녀 특유의 낮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위기가 닥쳤음을 알면서도 허둥거리지 않는 것이 그녀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한 로미오는 더 이상 거절할 말을 찾지 않고 응수했다. 계속 대화를 거부하며 버티면 엘베라에게 이상하게 비춰질 수 있었다.
“잠들어 있는 동생에게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금방 내려올 테니 기다리고 계십시오.”
위층으로 올라가자 문 앞에 서서 아래층의 이야기를 대화를 엿듣고 있던 이브가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로미오는 빠른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뒤 이브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엘베라가 찾아왔습니다. 스포르차 선생님이 밀정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돌아가길 권유했으나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아직 저를 의심하는 단계는 아닌 것 같으니 따라가서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크게 놀란 이브는 입 모양으로 되물으려다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며 로미오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자가 진실을 어떻게 안 거요?”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나눠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오래 걸리는 게 아니오?”
“예정된 시간이 되기 전에 오겠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겠소?”
“예, 없을 겁니다. 엘베라는 현재 선생님만을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지팡이를 챙긴 로미오는 이브를 향해 고갯짓을 해 보이고 문을 닫았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엘베라가 먼저 현관을 나섰다.
“마차를 타지.”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따라와 보면 아네.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그곳만큼 적합한 곳은 없어. 중앙 지부는 수일 전에 폐쇄해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네.”
엘베라가 마차에 오르는 소리에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올라탔다. 마차의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부가 말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정부 청사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읍!”
마차 안에 다른 인기척이 있음을 채 깨닫기도 전에 손 두 개가 등 뒤에서 뻗어 나왔다. 한 손은 입을 막고 한 손은 등 뒤로 두 팔을 붙들었다. 두 개의 손이 더 덤벼들어 어깨를 내리누르며 마차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미리 마차에 타고 있던 자들은 두 명이었는데 그들은 등을 발로 밟고 가슴을 짓누르며 숨통을 옥죄었다. 머리 위에서 엘베라가 마부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갈빗대가 졸리는 느낌과 함께 현기증이 전신을 엄습했다.
“윽, 읍……!”
꿇린 무릎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양다리에 힘이 풀렸다. 입과 코를 있는 힘껏 압박하는 손길에 정신이 흐려지며 그대로 몸이 축 늘어졌다.
* *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뺨이 바닥에 닿아 있다는 것이었다. 양팔이 등 뒤에 묶여 있는 탓에 근육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기어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다리 역시 묶여 있었다. 마차가 아닌 실내에 들어와 있음이 분명한데 코끝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아 장소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가 없었다. 두통이 느껴지는 데다 가슴 부근에 극심한 통증이 있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윽, 하아……하…….”
이마를 바닥에 대며 고개를 들었으나 다시 꼬꾸라지며 머리를 처박았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문제는 내가 진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에서 시작된 듯하군.”
다섯 걸음 앞에 서 있는 것은 엘베라였다. 그녀는 선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다른 인기척도 들렸는데 둘 혹은 셋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잠자코 있는 그들이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깊은 낭패감에 있는 대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은 엘베라에게 속았다.
“내게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네의 정신을 잃게 만든 것일세. 운신이 가능해졌다면 일어나 앉게.”
로미오는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꿇고 있는 무릎에 나무 바닥이 눌리며 삐거덕대는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게 왜 이런 위협을 가하는 겁니까?”
이곳이 바치가 아닐 수도 있었다. 정신을 잃은 동안 마차가 먼 거리를 달려 도시를 벗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자신은 한낮에도 창의 커튼을 모두 쳐 놓으면 밤중으로 착각하는 맹인이었다. 긴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면 이미 새벽이 됐을 것이다. 저들이 자신을 여기 두고 떠난다면 여기에서 나갈 방법은 없었다. 낯선 장소에 남겨지면 자신은 걸음마를 막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이 무력해졌다.
일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아니, 자신이 잠들어 있는 사이 이미 모든 일이 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조반니를 의심해 왔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모든 의문을 풀었어.”
입 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부어오른 잇몸 사이에 고인 피를 삼키는데 엘베라가 말을 이었다.
“최초의 의심은 조반니가 올빼미가 될 만한 성정이 아니라는 것에서 시작됐네. 의심이라기보다는 의문에 가까웠다고 봐야 하지. 조반니같이 자기 자신의 흥미만을 중시하는 불나방 같은 자가 구태여 왜 공화주의자들을 처단하고자 하는 비밀 의회에 가입한다는 말인가. 그 생각에서부터 의문을 갖게 됐네. 어쩌면 제삼자에게서 영향을 받았거나 공개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이유에 의해 올빼미가 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네. 가령 사랑하는 연인의 뜻을 대신한다든가 하는 이유 말일세. 특정한 경험이나 인물에 의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맡게 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네.”
로미오는 방 안에 몇 명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시간을 끌었다.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토록 강하게 확신하다니 놀랍습니다.”
“상위 단원들을 감시하는 것이 내 일인 터라 처음에는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았네. 다른 단원들 역시 내게 같은 의심을 받았으니 말이야. 하지만 조반니에겐 다른 점이 있었지. 그는 한때 단원들의 인명록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으려 한 적이 있었고 그 직책을 맡고자 하는 의지가 집요할 정도로 강했어. 나는 그가 인명록에 손을 대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네. 그는 대총장이 되기 위해 조직 내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 나는 한 번 누군가를 의심하면 그자가 밀정일 가능성을 가장 먼저 염두에 두고 그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검증을 거치네. 당연한 일이지. 우리는 비밀조직이야. 명쾌하지 않은 의도를 가진 자가 있다면 그자의 목적이 밀탐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해.”
“선생님을 의심한 이유가 그것이 전부입니까? 고작 그런 이유들로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해 오신 겁니까?”
애써 부인하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지만 엘베라에겐 통하지 않았다.
“연극은 그만두지.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가슴의 통증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어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눈을 굳게 감았다 떴으나 패배감은 더 짙어지기만 했다. 이로써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엘베라가 자신을 살려 둘 가망성은 없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알게 된 것들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대체 어떻게 이 거대한 비밀을 알게 된 것일까.
“두 번째 의심을 하게 된 이유는 조반니가 자네를 영입했기 때문이었네. 포섭하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제6군단의 장교를 상대로 조반니는 급조한 듯 포섭을 진행했고 자네는 믿을 만한 확률과 믿지 못할 확률이 반반인 이유를 들어 입회를 희망했지. 자네가 무모하거나 도전적인 성정이었다면, 혹은 내가 조반니를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면 형제의 복수를 위한다는 자네의 명분을 걸고넘어지지 않았을 것이야. 자네가 입회식에서 했던 말은 내게 석연치 않은 두 번째 의문을 가져다주었네.”
“이미 전부터 선생님을 의심하고 있었으면서 왜 제 입회를 허가한 겁니까?”
“조반니의 꼬리를 잡기 위해서였지. 내가 자네의 입회를 반대하고 나섰다면 조반니가 지금껏 내게 대담하게 내보이던 꼬리를 슬그머니 숨기려 들지 않겠나?”
엘베라는 잠시 이야기를 멈춘 뒤 이어 말했다.
“세 번째 의심은 조반니가 누군가와 비밀스레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에서 시작되었네. 의심의 순서를 매긴다면 실은 가장 첫 번째에 와야 하겠지만 편지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 오늘에서야 깨닫게 됐으니 결정적인 마지막 의심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조반니는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아 왔는데 편지를 전달하는 인물이 조반니의 집을 방문하고 조반니가 답장을 보낸다는 것 외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네. 그들 사이에 오가는 편지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따라가 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어. 누가 보더라도 수상한 일이 아닌가? 대체 보내는 자가 누구기에 그토록 철저하고 교묘하게 보내는 이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지?”
방 한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저택 관리인은 손목의 끈을 풀기 위해 몸을 뒤트는 로미오를 날카롭게 주시했다. 그의 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자네의 영입 이후 나는 자네가 조반니의 배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네. 비록 내가 입단을 하기 전의 이야기지만 조반니가 입회식을 치르던 당시 자네는 바치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시에서 사관 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생도였어. 이야기의 아귀가 맞으려면 조반니가 개인적인 이유로 먼저 입회를 하고 자네를 이용하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라고 봐야 옳겠지. 자네가 조반니에게 속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심해 보았으나 그렇게 이해하기엔 상황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조반니의 목적인데 괜스레 자네를 같은 편으로 만들 이유가 뭐란 말인가? 자네가 정말로 이 나라를 배신하고 올빼미가 되고자 한다면 조반니로서는 자네를 멀리하는 것이 옳지. 자칫하다간 자네에게 밀정이라는 사실을 들킬 수 있으니 말이야.”
로미오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손과 발에 묶인 끈이 더 강하게 조여 오는 것을 느끼고 몸부림을 멈췄다.
“자네가 조반니와 같은 패를 쥔 것이 맞고 우리에 관한 정보가 자네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하며 제6군단을 의심했지만 그들과 조반니 간에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어. 제6군단 역시 배후가 아니었네. 나는 조반니에게 편지를 보내는 자에게 실마리가 있다고 믿었기에 그 편지를 입수했네. 거기에 적힌 암호를 풀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그 암호를 풀었네. 그것도 바로 수 시간 전에.”
로미오는 엘베라가 걸음을 옮기는 소리와 커다란 천을 벗기는 소리를 들었다. 비록 로미오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벗겨진 천 아래에는 그림 액자가 놓여 있었다.
“편지를 보낸 자는 비스카르디 통령일세. 조반니가 밀정임을 알고 그의 꼬리를 잡기 위해 이중의 거짓 정보를 흘렸는데 설마 그 꼬리의 끝에 통령이 있을 줄이야. 이는 명백한 내 실수네. 조반니의 뒷배를 봐주는 것이 통령인 줄 알았다면 배후를 캐내겠다며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네. 내 예상과 달리 너무도 거대한 배후가 아닌가?”
로미오는 고개를 떨궜다. 턱을 끌어당기며 머리를 숙이고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없었다. 모든 비밀은 간발의 차로 전부 탄로 났다.
“나는 단테의 12인의 괴멸을 앞둔 심정으로 통령과 조반니의 관계를 추측했네. 처음에는 단순히 조반니가 통령의 명을 받았다고 생각했지. 조반니가 본래 국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자였을 수도 있다고 의심했네. 긴 생각 끝에 가장 유력한 의심 하나를 하게 됐고 그 의심이 현실일 가능성을 따지기 위해 통령의 얼굴을 모르는 어느 화가에게 통령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그림 속 여인의 젊은 시절을 상상해 그려 줄 것을 부탁했네. 지금보다 스무 살가량 나이가 적은 얼굴로 말일세. 그림은 오늘 낮에 완성되었고 그제야 나는 비로소 확신했네.”
그림 속에 그려진 금발 여인은 서른 전후로 보였다. 얼굴에서 주름이 사라지고 젊은이다운 생기가 불어넣어졌으나 카를로타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조반니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그자를 데려오게.”
엘베라가 저택 관리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방 밖으로 나가 입이 막힌 채 손발이 묶여 있는 사내를 끌고 왔다. 이미 몇 시간 전에 목숨이 끊어진 사내는 몸이 딱딱하게 굳은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죽었습니다.”
저택 관리인의 목소리를 들은 로미오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엘베라가 조금 전에 말한 ‘이중의 거짓 정보’라는 말을 해석하려던 것을 멈췄다. 이 목소리는…….
“자네의 앞에 쓰러져 있는 이자는 바치 시민들의 신분증명서를 발급해 주는 시 행정 기관의 기관장일세. 이자를 통해 알아낸 결과 조반니의 진짜 이름이 위조되었음을 알게 됐지. 조반니 비스카르디. 그것이 그의 진짜 이름이네. 통령의 숨겨진 남동생이지.”
로미오는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억센 손에 의해 멱살이 끌려 올라갔다. 목젖 아래에 대어진 것은 칼날이었다.
“처음부터 이자에게서 조반니의 진짜 이름을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스포르차가 영락없는 그의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해서였네. 조반니에게 오늘 밤 통령을 암살하겠다고 거짓 정보를 흘렸으니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 통령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 지금쯤 살로네 성에는 경비병들의 경계가 삼엄해져 있을 것이야. 하지만 암살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네. 우리는 애초에 오늘 밤을 노리지 않았어.”
“이런 이야기를 제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진실을 알았다면 저를 이곳으로 데려와 그간 당신이 알아낸 것들을 폭로하기보다는 우리가 당신을 찾지 못하도록 먼 곳으로 달아나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의 정보가 통령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 뻔한데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다 한들 죽은 목숨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나. 우리가 정보를 넘겨줬으니 자네에게서도 정보를 넘겨받아야 공평하지. 그렇게 해서 방법을 모색할 생각이네. 그리고 얻어 낼 것을 얻어 낸 뒤에 자네를 이 자리에서 죽일 것이네.”
칼끝이 피부 가까이 맞대어지자 살이 벌어지며 핏방울이 맺혔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대답하게.”
“제게서 대답을 얻어내는 것은 결코, 윽……!”
저택 관리인이 멱살을 누르며 바닥에 넘어뜨리자 로미오는 얼굴을 부딪치며 쓰러졌다. 이번에는 목덜미에 칼날이 대어졌다.
“통령에게 우리 상위 단원의 인명록이 넘어갔음은 자명한 사실일 터. 그러니 다른 것을 묻도록 하지. 통령이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처단하겠다고 하던가? 구체적인 계획을 말하게.”
로미오가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자 저택 관리인이 무릎으로 로미오의 목을 눌렀다.
“아학, 악……!”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걸세. 통령이 우리를 어떻게 생포할지, 그리고 그 계획에 관여된 자들이 누구인지 말하게.”
저택 관리인이 힘을 줘 목을 찍어 내리자 로미오가 경련을 하듯 어깨를 들썩이며 신음했다. 거칠게 몸부림치며 저택 관리인을 뿌리치기 위해 애쓰는 동안 목이 점점 더 옥죄어 왔지만 격렬히 저항하며 발버둥을 쳤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 숨조차 쉬기 힘들었지만 금방이라도 저택 관리인을 주먹으로 후려갈길 것처럼 눈에 핏발을 세워 댔다.
“윽, 흐…… 악, 학……!”
“말할 기분이 들 때까지 계속 같은 방법을 반복할 것이니 시간을 끌지 않는 것이 좋을 게야.”
하지만 질식의 공포가 몸을 덮치자 손끝과 발끝이 떨리며 귓가에서 이명이 들렸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뇌 속으로 파고들었다. 전신의 피가 빨리 돌기 시작하자 눈가로 열이 몰리며 얼굴이 붉다 못해 검어졌다.
“놓아주게.”
엘베라가 지시하자 저택 관리인이 로미오의 목을 조이고 있던 무릎을 치웠다.
“하아, 윽, 하…….”
“다시 한번 묻지. 비스카르디 통령이 우리를 어떻게 생포한다고 하던가?”
저택 관리인이 머리채를 당기며 턱 밑에 칼을 댔지만 순간적으로 강하게 목이 졸린 로미오는 고개를 떨구며 대답하지 못했다. 동공은 넓게 퍼져 있었고 입 안에 머금고 있던 피는 입가로 흘러내렸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얼굴이 시체처럼 흰빛을 띠고 있었다.
엘베라의 턱짓에 저택 관리인이 로미오를 바닥에 눕히고 다시 목을 조르려는데 문밖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을 지키던 자들의 비명 소리였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문 앞으로 다가오더니 문을 거세게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충격에 나무 문에 금이 가며 가루가 날렸다. 무지막지한 괴력에 의해 다시 한번 발길질이 가해지자 문고리가 덜렁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녹슨 철 의수가 부서진 나무 문을 뚫고 문 너머에서 나타나더니 그대로 문짝을 뽑아냈다.
멀리 날아간 문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구는 것도 잠시, 검을 든 발레리아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저택 관리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크윽!”
어깻죽지가 베인 저택 관리인이 비명을 지르자 이브가 달려들어 목을 꺾어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녀는 틈을 주지 않고 방 안에 있던 자들을 같은 방식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웠다. 그들 모두는 품 안의 검을 꺼낸 직후 이브의 철 의수에 목이 꺾여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브는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로 동작이 빠른 데다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이 손쉽게 사람의 목뼈를 비틀어 버렸는데 단 한 명만이 노련하게 몸을 피하며 이브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브도 허리춤의 검을 빼내 마치 도끼 휘두르듯 휘두르며 맹렬하게 공격을 받아쳤다. 머리를 베어 갈 것처럼 위협적으로 검을 쓰는 이브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단원을 순식간에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엄연히 검을 든 상대와 대결하고 있었지만 상처 입을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며 심장을 노렸다.
“큭……!”
결국 단원의 가슴뼈를 깊이 찌른 이브는 그가 검을 놓치고 쓰러지자 머리채를 잡아 문밖으로 내던졌다. 그사이 발레리아는 엘베라를 향해 돌진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엘베라는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발레리아를 막아 냈지만 칼이 정확히 일곱 번째로 맞부딪쳤을 때 벽 쪽으로 완전히 몰려 있었다. 발레리아가 검 등으로 엘베라의 손을 후려쳤지만 엘베라는 단도를 놓치지 않고 무모하게 휘둘렀다.
“단도를 버리쇼!”
그러나 더 이상의 기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단원까지 전부 처리하고 난 이브가 발레리아에게 가세해 엘베라에게 검을 겨눴기 때문이었다.
엘베라에게 겨눠진 두 개의 검이 방 한구석에 켜 놓은 촛대 불빛에 날카롭게 번쩍였다. 이브의 검 끝에 묻은 피는 엘베라의 발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눈이 있다면 이 방에 당신 혼자 남았다는 것을 알 거요. 수세에 몰린 생쥐 신세인데 잠자코 우리의 말을 따르는 게 좋지 않겠소?”
대답은 없었으나 엘베라는 이브와 발레리아를 차례로 쏘아봤다. 좁혀진 미간에서 궁지에 몰린 자 특유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끝까지 저항할 셈이오? 이자와 내게 대항해서? 이자는 군인이고 보다시피 나는 용병이오.”
이브가 턱짓으로 발레리아와 자신을 가리키자 엘베라는 문밖에 시선을 뒀다. 두 사람이 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자들을 모두 해치웠다는 뜻이었다. 로사티 거리에 남아 동태를 살피던 이들도 사정은 같을 것이다. 특별히 검을 잘 쓰는 단원들을 선별한 것인데 전부 당한 것이었다.
“상황 파악이 빠르군.”
엘베라가 칼을 내리자 이브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로미오를 곁눈질로 봤다. 발레리아는 얼른 검을 거두고 로미오에게 다가가 손과 발을 풀어 줬다.
“괜찮은 거야?”
“……괜찮, 윽, 하아… 괜찮습니다, 하…….”
로미오는 기침을 하며 비틀대다가 몸을 바로 했다. 손목과 발목에는 줄에 묶인 자국이 남아 있었고 바닥에 처박힌 얼굴은 흉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목의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발레리아가 지혈해 주는데 이브가 엘베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로미오에게 설명했다.
“당신이 가고 낯선 손님들이 집을 찾아왔소.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리기에 대답을 하지 않았더니 허락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란 말이오. 2층으로 올라온 그자들이 잠긴 문을 따고 들어와 집 안을 살피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는데 손에 칼이 들려 있었소. 제압해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쉽게 입을 열지 않더군. 그들을 협박해 이곳을 알아내는 데 시간이 걸려 이렇게 늦어진 거요. 협박을 끝내고 그 자리에서 죽였으니 뒤탈을 걱정할 필요는 없소.”
발레리아가 죽은 저택 관리인의 얼굴을 확인하곤 표정이 굳어졌다.
“이자는 스포르차 선생의 저택을 관리하던 자잖아?”
로미오는 밭은기침을 뱉어내며 손목을 감싸 쥐었다. 목이 졸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엘베라로부터, 하아… 밀탐 임무를 받고 선생님께 고용된 걸 겁니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실 때마다 집 안의 물건을 살피며 필요한 정보를 얻었을 겁니다. 저와 선생님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발레리아는 방 안에 있는 그림 액자를 발견했으나 우선 방 밖으로 나갔다. 이곳이 지하실이었기 때문에 계단을 타고 올라간 그녀는 위층에서 책 한 권을 갖고 돌아왔다.
“저택 관리인의 이름을 알고 있어?”
“선생님께선 ‘귀도’라는 이름으로 그자를 부르셨습니다.”
“이 집은 저택 관리인의 집이야. 선물로 받은 책에 그 이름이 쓰여 있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베라가 소리 없이 이브의 검 끝을 내려다본 뒤 그녀의 붉은 눈을 마주 봤다. 이브는 엘베라의 눈빛 속에서 꺼림칙함을 느끼고 로미오에게 말했다.
“이자를 지금 죽이는 게 나을 것 같소. 눈빛이 굉장히 불순하오.”
엘베라가 눈을 돌려 방 안에 쓰러져 있는 자들을 둘러보자 이브가 위협을 하듯 칼날을 더 가까이 댔다. 딴짓할 생각 말라는 뜻이 묻어 나오는 손짓이었다.
“얻어 낼 정보가 있으니 살려 둬야 합니다. 그녀는 모든 사실을 알고서 이번 암살 공모와 관련해 거짓된 정보를 흘렸습니다. 물어야 할 게 많습니다.”
그 순간 엘베라가 이브의 검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칼날을 맨손으로 잡은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향해 칼날을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찔러 넣었다.
“젠장!”
이브가 재빨리 검을 거두며 물러섰지만 가슴이 찔린 엘베라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검 끝에 묻어 나온 피를 본 이브가 급히 엘베라를 돌려 눕혔지만 이미 웃옷이 피에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엘베라는 밭은기침을 몇 차례 하더니 몸을 떨다가 눈을 감았다. 발레리아가 급히 다가와 호흡을 살폈지만 가슴의 피는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어. 우리에게 정보를 넘겨주기보다 죽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숨은 쉬고 있지만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어.”
방 안에 있는 세 사람 중 누구도 칼에 찔린 사람을 처치할 줄 모르는 데다 엘베라가 살아 있는 쪽과 죽는 쪽 중 어느 쪽이 더 이득일지 따져 보려면 가슴에 난 상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부터 자세히 살펴야 했다. 엘베라를 억지로 살려 내 정보를 캐낸다 한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수고가 들 게 뻔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단테의 12인이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는 가정 하에 획책했던 것들을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엘베라가 단원들에게 조반니와 관련된 비밀을 전달했다면 그들은 이미 수를 썼을 것이다. 엘베라가 이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그럴 가능성이 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이브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로미오와 발레리아를 번갈아 봤다. 로미오는 두통이 가시지 않아 이마를 감싸며 큰 숨을 들이켰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때였다.
“가능하다면 엘베라를 살려 봐야겠습니다. 하숙집으로 돌아가죠. 하지만 그곳이 안전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단테의 12인이 선생님과 제가 밀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6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