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65)

난 운이 좋아.

자리에 다시 앉은 지혜가 꺼낸 말은 이거였다. 뭔 소리인가 싶어 쳐다보고 있자니 그녀는 나와 효진을 스윽 둘러본다. 아직 눈가가 젖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표정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

남편은 이상한 놈을 만났지만 친구를 잘 두었어. 남편이랑은 이혼했으니 더 이상 볼 일이 없지만 친구는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잖아.

지혜가 잔을 들었다. 나와 효진도 마주 든다. 서로 짠하고 부딪히며 소주를 삼키고 밤이 늦도록 서로의 잔을 채워주었다. 지혜의 아픈 가슴을, 찢어진 가슴을 술로 채워줄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몇 마디 말로, 몇 마디 위로로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고 또 치유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른다. 사람에게 새겨진 상처가 얼마나 오래 되어야 사라지는지, 또 얼마나 깊이 자국을 남기고 아무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분명히 있었다. 지금 여기에 지혜와 함께 있어줄 수 있고, 그녀를 사랑하는 효진과 함께 있어줄 수 있다는 거. 그게 내가 해야할 일이다.

너무 취해 정신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음주운전을 하며 산을 내려가진 않았다.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효진이가 앞장 서서 근처 모텔에 방을 잡았다. 지혜는 조금 머뭇거리긴 했지만 이내 우리 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효진이 이끄는대로 따라왔다. 방에 들어서고, 커다란 침대에서 우리 세 사람은 한데 엉켜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난 효진에게 키스했고 효진은 지혜의 젖을 빨았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자 노력했다. 진심으로, 땀 나도록 노력해 마지 않았다.

하아....하악.... 더... 더.... 박아줘.....

 지혜야....

 흐읍....

나에게 더 박아달라고 외치며 다리를 벌리는 지혜의 입술은, 효진의 입술이 덮어버렸다. 농염하게 혀를 섞어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보지를 향해 최선을 다해 자지를 찔러넣는다. 지혜의 위에 마치 샌드위치 빵처럼 엎어져 있는 효진의 보짓살은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이쪽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두 사람의 젖은 한데 엉켜 뭉게지고 있을 것이다. 몹시 보기 좋은 광경일 테지만 지금은 이쪽의 사정이 더 급하다.

하악...하악.....나도...나도 박아줘....

안타깝다는 듯이 꿈틀거리는 효진의 보짓살이 못내 불쌍했다. 지혜의 보지에서 자지를 뽑아내어 거기로 가져간다. 자지를 뽑을 때, 뽁-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셋은 웃었다. 그리고 내 자지가 효진의 안으로 박아 들어간다.

하악...하악....학....

그렇게 우리 셋의 밤은 깊어갔다.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건지 내 머리통을 두드리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눈을 비비고 고개를 드니 간밤의 행위가 얼마나 난잡했는지 보여주는 흔적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일단 알몸의 두 사람을 한쪽으로 잘 밀어두고 이불을 덮어준다. 지혜에게 꼭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효진의 뒤에서 넣느라 애먹었던 어젯밤을 상기한다. 효진이가 지혜의 보지를 빠는 동안은 엉덩이를 들게 하고 쑤실 수 있어서 편했지만 지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켜 있을 때는 내가 다리를 위치시키고 자세를 잡기 상당히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잘 쑤셔 넣었고 간간히 지혜에게도 넣었다. 효진이가 좀 질투를 하긴 했지만 내가 쑤시고 있는 동안은 자기도 지혜의 황홀한 표정을 보며 키스를 나누었기에 크게 불평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사정은... 양쪽에 골고루 했던 것 같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쿵쿵쿵-

이제야 확실해졌다. 내 머리를 두드리는 게 아니라 문을 두드리는 게 맞았다. 설마 모텔에도 룸서비스가 있는 건 아닐테고....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보아도 아직 퇴실 시간은 아니었다. 옷을 찾아 입고 싶었지만 어젯밤 방에 들어오며 옷을 사방에 벗어던진 까닭에 양말 한쪽과 셔츠 말고는 찾을 길이 없었다. 일단 벽에 걸린 가운을 내어 걸치고 허리끈을 조였다.

쿵쿵쿵-

네, 나갑니다. 누구시죠?

문에는 도어뷰렌즈가 달려있지 않았다. 아침이라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어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돌아온다.

아가씨가, 안에 계십니까?

아가씨? 순간 아가씨라고 불리는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홱 돌려 침대 위를 본다. 방금 이불을 덮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걷어차고 자기 배를 북북 긁어대며 입맛을 다시는 저 효진이라는 애가 그렇게 불렸다는 걸 기억해낸다. 동시에 이 목소리의 주인도 누구인지 떠올랐다.

서...선미 씨?

 네. 그렇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 아침에, 그것도 춘천 모텔까지 대체 그녀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일까.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예의 그 메이드 차림의 그녀가 여행용 가방 하나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내게 아주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리고 지체없이 침대로 걸어 들어가 효진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시죠.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효진은 귀찮다는 듯이 이불을 끌어다 머리 위까지 뒤집어 쓰고 있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선미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불을 확 들어 효진을 침대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들고 있던 이불을 지혜에게 덮어주었다. 인기척이 크게 났기에 지혜도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는데 이 난리통에도 효진은 결코 눈을 뜨지 않는다. 효진의 겨드랑이에 팔을 껴넣어 강제로 일으켜 앉힌 선미는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오늘은 맞선이 다섯 군데나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빨리 준비하지 않으면 시간이 맞지 않습니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부득이하게 찾아온 점, 양해바랍니다. 시간이 많지 않고 지금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도 계시기에....

말을 하면서도 선미의 손은 착착 준비를 갖추어간다.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효진이었지만 어느새 머리 빗질이 끝나고 얼굴에 팩도 다 붙여진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걸로 보아 저건 안 일어난 게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척 하고 있는 모양이다. 선미의 악전고투 끝에 효진은 눈을 뜨지 않고도 어느 샌가 맞선녀의 모양새가 다 갖추어진다. 선미가 가져온 여행용 가방에는 효진의 속옷부터 시작해서 각종 메이크업 도구, 정장, 헤어스타일링 도구가 빼곡하게 들어있던 모양이다. 진정한 전문가의 손길 아래 평소 동네 백수 꼬라지의 효진은 말끔한 며느리 스타일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지혜와 나란히 서서 그걸 구경하며 감탄을 내뱉았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데.. 저 정도면 무죄라고 하기에 사법부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는다. 저 정도면 최하 징역 10년짜리 범죄급 변신이라고! 물론 효진이가 선보러 간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지금 보여지고 있는 광경은 무슨 진기명기를 보는 듯 했다.

씨잉... 넌 내가 선보러 간다는데 구경만 하고 있어? 뜯어말릴 생각도 안 하고?

결국 못 참겠는지 효진은 눈을 뜨고 날 가리키며 비난했다.

말...말려야 하는 거야? 몰랐네...

 내가 선 봐서! 너보다 더 멋진 놈 만나버려가지고! 결혼하겠다고 하면 넌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은근한 손길이 내 팔에 와 닿았다. 그쪽을 돌아보니 옅은 미소를 띄고 있는 지혜가 내 팔을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새 티셔츠를 입기는 했지만 아직 브래지어는 하지 않았는지... 묵직하고 풍만한 감촉이 팔에 아주 잘 닿아 날 몹시 짜릿하게 만든다.

그러면 나나 한석이나 너한테 차이는 거네. 차인 사람끼리 잘해 보지, 뭐. 어쩔 수 없네. 한석아. 나... 한번 갔다 왔는데, 괜찮아?

그러면서 내 팔을 자기 가슴으로 꼬옥 당기는데..... 역시 넌 뭘 좀 아는구나.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자 효진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쳇! 아니면 내가 지혜랑 결혼해버릴 거야! 아이씨잉. 선 보는 거 정말 귀찮은데... 오늘도 째면 안되나? 나한테는 이미 지혜라고 하는 가슴 크고 섹시한 애인이 있단 말이야.

그러자 효진의 치마 주름을 다듬고 있던 선미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날에는 많이 그러셨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오늘? 오늘이 왜?

 왜냐하면...

선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애비가 왔으니까, 안된다.

효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나 역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효진의 아버지, 박 회장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고 그의 등 뒤에는 하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그렇지만 난 너무 놀라 그 인사에 응대할 생각도 못 했다.

아...아빠...

 회...회장님....

나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효진에게 가 꽂혀 있었고 그의 말투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겨우... 집에도 안 들어오고 하고 다닌 짓이.... 이러고 있는 거냐?

 아빠, 나는...

 게다가!

그는 고개를 돌려 지혜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타나고 나서 지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박 회장의 손가락이 지혜를 가리켰다.

여전히... 이 아이를 만나는 거냐. 그런 거냐? 아직도.... 아직도 그러고 있는 게냐?

 아냐. 아빠. 난 그저....

 그래서, 그래서 선 자리도, 남자도 다 마다하고... 그러고 있는 거냐고.

그의 말끝이 분노로 떨렸다. 손이 올라간다. 아마도 효진의 뺨을 내려치기 위해서겠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한 번 그 모습을 봤던 사람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 이미 행동은 무례하지만 말투만은 정중하게 말해본다.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만... 제가 사랑하는 효진이가 맞는 걸 보는 건 사양하고 싶거든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박 회장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날 올려다보았다. 그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더 컸다. 바짝 붙어있는 관계로 그는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몹시 경멸하는 눈빛으로 날 훑어본다. 아무리 내가 당신보다 가난하고 없이 살아도... 그런 눈빛으로는 보지 말아줘. 그건 사람을 보는 눈빛이 아니라 마치 벌레보듯 하잖아. 기분이 몹시 나쁘다. 그는 한참만에 노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네 놈은 뭐냐. 네가 효진이 기둥서방이라도 된다는 게냐?

하아, 이것 참. 그렇다면 내가 당신 딸 기둥서방이라고 말이라도 하란 말인가? 그렇게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성질을 억눌렀다.

기둥...까지는 아니고 곁다리 서방쯤 됩니다. 죄송합니다만 둘이서 보낸 시간과 관계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뭐라고?

어쩔 수 없이 건방진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딸 가진 분에게는 할 소리가 아니라서 내 뺨을 내줄 생각 정도는 당연히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는 날 뚫어져라 쳐다보며 손을 내렸다.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자네... 남자인가?

보면 몰라?! 기가 막혔지만 대답은 한다.

그렇습니다만...

 호모나... 뭐, 그런 거는 아니겠지?

 네에? 제가요?

한 번도 내 성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다. 남자를 보면서 가슴이 설레거나 그의 알몸을 꿈꿔본 적은 없고 여자를 보면 좋아하고 살색 영상도 여자가 나오는 걸 보는 걸 좋아하니 분명 멀쩡한데 말이다. 게다가 어젯밤만 해도....

제...가, 그렇게 보이시나요?

너무 황당해서 말이 잘 안 나온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그 역시 내가 신기한 모양이다. 나와 효진을 번갈아 보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다가 다시 묻는다. 당당하고 낮은 목소리였던 아까와는 달리 몹시 주저하는 말투다.

그럼... 너희가... 그런 사이란 말이냐? 남녀....간의?

 에? 그거야... 그렇게 물으시면.....

너무 대놓고 물어보는 통에 답을 못 하겠다. 효진 역시 황당한 표정이었고 내 얼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입을 딱 벌린 채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박 회장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에 있는 하영에게 귓속말로 무어라 한참을 말한다. 말을 하는 중간중간 우리를 돌아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다시 돌리는 걸로 봐서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그는 방을 나가버렸고 하영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서 하영은 선미에게 회장을 보좌하라고 일렀고 선미는 가방을 챙겨 급히 방을 나갔다. 

아침의 평화가 산산히 깨져버린 부산한 아침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건 30분 가량이 흐르고 나서다. 옷을 다 찾아입고 근처 카페로 내려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앞에 시켜두고 나와 효진, 하영과 지혜 이렇게 넷이 둘러 앉았다. 하영이 안경을 고쳐 쓰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한석 씨는 게이가 아니었군요.

아, 정말 이 여자는 진짜.... 테이블을 탁 내리치며 강한 어조로 말한다.

당연하죠! 대체 어디서 그런 터무니 없는 오해를....

 하아. 이게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건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박 회장은 자신의 딸과 지혜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에 효진이 제일 먼저 비명을 질렀다.

아빠가?! 대체 언제부터!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혜 씨랑 그러지 않았니? 아마도 그 때 우연히 보신 모양이다.

 그거야... 그랬지만....

고등학교 때 둘이서 그랬다고는 하나 그건 치기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그녀의 아버지가 보았다니... 충격이 될만도 하다.

지혜 씨가 자취할 때 그곳에서 머물기도 했구.

 그랬죠.

 회장님은 너가... 지혜와 그러는 걸 본 이래로 네가 여자만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대단히 걱정하셨지. 그래서 널 빨리 시집 보내려고 그렇게 애를 쓴 거야.

 아아....

나로선 상상이 잘 가질 않는다만.... 굳이 상상을 해본다. 내 딸이 여자와 성적인 접촉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모른 척 할 것인가. 아니면 못 하게 막을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빨리 눈 앞에서 치우려고 노력할 것인가. 도무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석이가 왜 게이라는 거야. 그게 ...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효진의 질문에 하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평소처럼 빠른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회장님은 네가 동성애자라고 철썩 같이 믿고 계셨다. 그런 네가 남자랑 있다고 하니 그 남자도 당연히 동성애자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언젠가 네가 한석이랑 한 방에서 나오는 걸 봐도 별로 개의치 않으신 거야. 그리고 오늘 아침, 어제 밤에 너랑 지혜 씨랑 그리고 한석 씨랑 같이 방을 쓴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당연히 너랑 지혜 씨가 그러고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모양이야. 한석 씨는.... 아예 논외로 치셨지. 그게 아니면 네 그런 취향이 한석에게 전염되었다고 생각하시거나.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을 뻔 했다. 동성애자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물론 나라고 해서 그들의 처지나 행동양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모르고 있다는 편이 맞겠다. 별로 관심이 없기도 하고... 그러나 박 회장의 생각은 터무니 없었다. 동성애가 무슨 전염병도 아니고 옆에 있다고 해서 그게 전염되나? 그리고 애초에 효진이는 동성애라고 보기보단 여자 사이에 흔하게 있는, 아니, 저 정도가 흔하진 않지만 아무튼 아주아주아주아주 지나친 우정이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좀 특이한 정도지 저게 무슨 동성애야. 그녀는 나랑도 열심히, 아주 열심히 했단 말이다. 잠깐, 그러면 양성애자라고 해야 하나. 도무지 모르겠다.

회장님은 몹시 당황하시고 일단 돌아가 계시겠다고 했어. 오늘 선자리는 일단 전부 캔슬이다. 이따 한석 씨와 함께 집에 가보도록 해. 하실 말씀이 있을 거야.

아침부터 난데없는 침입을 받고, 또 어처구니 없는 오해를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국 효진과 부친의 해묵은 오해의 고리는 하나 풀린 모양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를 나왔다. 전망대 난간에 기대어 산머리에 덮인 구름을 구경하고 있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돌아본다. 효진이었다.

자기야.

 응?

어딘가 결연한 목소리. 난데없는 결투신청 같은 목소리에 자못 긴장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난간에 기대고 있는 팔을 빠트릴 뻔 했다.

나랑 결혼하자.

 뭐?

난생 처음 받아보는 프로포즈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어느새 내 옆에 나란히 선 효진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땀이 살짝 맺혀 있는 그녀의 이마를 바라본다. 나와 마찬가지로 먼 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효진은 드문드문 말을 이어 나갔다.

나... 그렇게 나쁜 상대가 아니잖아. 우리 집 잘 살기도 하고.... 우리 오빠도 자기가 볼 때 괜찮은 사람이고..... 아버지야 뭐 어떻게 하면 될 거고.. 엄마는 원래 우리 일에 관심이 별로 없으니 상관없을 것 같아.

 효진아. 네 가족이 문제가 아니라...

 나, 싫어?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럽잖아.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내심 효진과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결혼이라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냐.

지금 당장 결혼하자는 게 아냐. 지혜가 그 자식이랑 이혼하고 나면.. 떨어지고 나면 너무 외로울 거 아냐. 나 지혜랑 같이 살고 싶어. 그렇게 상처입고 외로워하던 아이를 내가 데리고 살고 싶다고.

그거야 효진의 오랜 숙원이었다. 지혜를 데리고 사는 거. 그녀가 결혼 하기 전에도, 결혼 하고 난 후에도 효진은 늘 그걸 꿈꿔왔다. 심지어 나와 하는 중간에도 말이지. 그런데 그건 그거고 왜 날 끌어들이냐고.

근데 갑자기 나는 왜?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결혼을 빨리 하라고 강권하는 이유를 알았잖아.

 그거야... 그렇지.

어처구니 없지만, 동성애에 대한 세간의 시선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준의 행동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내가 부모된 입장이라면.. 또 다를까?

결국은 내가 누구랑 결혼하느냐가 관심 있는게 아니라 남 보기에 부끄러워서라도 빨리 결혼시켜 버리려고 하는 거야. 남자랑 결혼을 하면...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하시는 거지.그러니까... 네가 나랑 결혼해 줘. 그러면 우리 아버지도 만족할 거구.... 지혜도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어.

 지혜도... 함께라니?

 응. 어젯밤에 너 우리에게 실컷 싸대고는 먼저 잠들었잖아. 그러고 나서 지혜와 한참동안 이야기 했어. 언제고 내가 우리집의 간섭에서 자유롭게 되면, 지혜를 내가 데리고 살겠다고. 지혜도 이제 남자라면 다 꼴뵈기 싫지만.... 너라면 괜찮다고 했어. 그러니까, 우리 셋이 살자. 어때?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 섹시하고 관능적인 효진이라는 여자와 가슴 크고 마음 착한 지혜라는 두 여자를 공짜로 얻게 되는 거라고! 어때?

손가락을 들어 효진의 이마를 가볍게 찌른다.

섹시한 건 지혜 쪽인 거 같은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가슴 큰 쪽을 더 좋아하잖아.

그러자 효진이 발끈한다.

지혜 가슴은 내 꺼야!

 하아. 이것 봐봐. 네 태도를 보고 있자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지혜랑 결혼하는 데 나를 동원하는 것 같다니깐.

효진은 살짝 풀이 죽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 터무니없고 무모한 생각에 혀를 차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런 그녀의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귀엽게까지 보인다. 이런이런, 나도 콩깍지가 제대로 씌였구나. 풀이 죽은 효진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가끔, 지혜 빌려 줄꺼야?

세계의 근본적 실재는 정신이나 관념이 아니라는 위대한 마르크스여. 그의 유물론을 빌어와 감히 사람을 대여의 대상으로 보고 있나니. 나란 놈은 정말, 답이 없네. 그러나 내 제안을 듣고 반색하는 얼굴을 하는 효진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빌려주고 말고!

빌려준다는 건, 결국 소유는 자기 꺼란 소리잖아. 나랑 결혼하겠다고 나서면서도 놓지 않겠다는 거잖아. 하하. 그래.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면 말야. 징표의 의미로, 내게 키스해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효진이 내 목에 와락 팔을 끌어안고 안겨왔다. 숨이 막혔지만 포옹을 받아들여 꾹- 안아주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항상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으면서, 그렇게 살자. 약속해.

효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 두 사람은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지혜가 우리를 부르러 올 때까지, 효진이 다시 지혜를 끌어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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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끝납니다.

 끝이 보이는 터라 빨리 끝내고 싶어 밤을 꼬박 새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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