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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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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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서는 바지춤을 추켜 올리며 바깥을 살폈다. 아까부터 들려온 아래층의 소음은 이제 잠잠해지고 있었다. 아주 크게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타이어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 후에도 바로 조용해지진 않았다. 교회 경비와 바텐더의 신변 보호를 위해 고용한 조직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요란하지는 않았다. 

소파 위에서 흐트러진 자세로 누워있는 알몸의 여자 아이를 내려다 보며 입맛을 다신다. 벌써 몇 번이나 해댔지만 이 아이는 만족의 끝을 모른다. 애액과 정액이 엉켜 흐르는 다리 사이를 보며 슬며시 웃음 지었다. 어린 녀석치고는 정말 뛰어난 명기를 가졌다. 쫀득한 맛이 정말 일품이다. 멍한 눈으로 이쪽을 향해 또 비척비척 기어오기에 발을 들어 살짝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더 하고 싶어도 지금은 자기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바텐더에게 정력제라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랬다가는 또 얼마만큼의 돈을 청구할지 몰라 주저되었다. 교회 초기만큼 신도 수가 폭증하고 있지 않아 요새 수입이 많이 감소한 탓에 함부로 돈 쓰기가 애매했다. 정기적으로 상납을 하는 여러 기관과 단체에는 이제 돈 대신 여자를 보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여자들과 아이들을 골라 바텐더의 약을 먹여 접대를 하면 분명 호평을 받으리라.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그만한 수고는 당연히 필요하리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런데 여자 아이가 다시 또 네 발로 기어와 그의 다리에 매달린다. 본능적으로 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기에 한 번쯤 더 빨게 하고 나가볼까 생각했다.

똑똑-

때마침 들려온 노크소리에 놀란 종서는 아이를 황급히 밀어내었다. 내리던 지퍼를 황급히 끌어올린다.

누구십니까?

 원 목사님. 접니다.

쇠를 긁는듯한 목소리에 종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아, 김 권사님. 들어....오시기에 지금 사무실이 좀 번잡스럽군요. 제가 나가겠습니다.

종서는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검은 옷을 두른 삐적 마른 여자, 김 권사가 복도에 서 있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나오는 종서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바쁘신... 모양이군요.

 흐흐흠. 잡무가 좀... 있어서요.

종서의 대답을 들으며 김 권사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미처 다 올라가지 않은 그의 바지 지퍼를 보며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까 원 목사의 사무실로 어떤 아이가 들어갔는지 이미 들어 알고 있던 그녀였다.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원 목사의 엽색 행각은 도를 넘고 있었다. 지난 번에 여신도 둘을 한꺼번에 덮치고 있다가 그녀에게 들키자 한다는 소리가 성령을 전하고 있었다였다. 

그녀의 오빠인 부목사 김태윤도 기도원에서 비슷한 짓을 수도 없이 저지르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오는 마당에 김은혜 권사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자신이 걷는 이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복음을 전파한다는 목적 아래 신도와 그의 가족들을 납치하고, 휴거와 종말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있다. 원 목사의 교리해석과 그가 보여주는 신앙에 감읍하여 그를 따르기로 결정한지 이제 2년이 조금 넘어간다. 날이 갈수록 도를 넘는 교회의 행각을 진두지휘하면서 그녀는 마음 한 구석에서 회의가 싹트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골방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렸다. '저의 이 삿된 생각을 몰아내주소서. 길을 보여주소서. 주여.' 그러나 기도의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정진이 부족한 까닭이라고 여겼다.

아까.. 그 난리는 해결이 되었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원 목사를 따라가며 김 권사는 사태를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그들이 징벌실에 가두어두었던 이를 구출하기 위해 알 수 없는 조직들이 쳐들어왔고 그들을 막아내고 몰아내는 와중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물론 엄밀히 따져 쳐들어 온 것은 예린 하나였다. 경비를 담당한 조직에서 자신들의 실책이 드러날까 우려해서 공격측의 인원을 과장해서 보고했기에 김 권사는 꽤 많은 이들이 쳐들어온 걸로 알고 있었다. 보고를 들으며 원 목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상자라니. 다친 사람 말고 죽은 사람도 있습니까?

 네.

목을 베인 자와 눈을 찔린 자는 그대로 교회에서 절명했다. 교회의 방침상 제아무리 중한 환자라도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기 때문에 내부에서의 처치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가장 의사다운 짓을 할 수 있고 설비가 가장 잘 갖추어진 곳은 바텐더와 그의 실험실인데 그는 지금 모종의 테스트를 한다며 다른 이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들은 원 목사는 입맛을 다시며 바텐더의 실험실로 향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처리는 김 권사에게 일임한다. 그녀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물러났다.

이봐요, 박사님. 아까 그 난리는 대체...

바텐더의 실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원 목사는 흠칫했다. 피투성이인 남자가 팔을 벌린 채 벽에 고정하여 강제로 세워져 있었다. 걸친 것이 거의 없는 그였지만 맨살이 드러난 부분이 없을 정도로 피범벅이었다. 그의 발 밑에는 각종 오물과 피로 작은 웅덩이가 하나 만들어져 있을 정도였다. 흡사 골고다 언덕에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매달렸던 어떤 남자의 자세와도 비슷했다. 역한 피비린내에 눈살을 찌푸리던 원 목사는 그 남자가 아까 소녀를 데리고 올 때 그에게 욕을 해대던 이였음을 기억해냈다. 이름이 뭐였더라. 한석이라고 했던가. 한석의 앞에서 뭔가 열심히 약을 조제하고 있던 바텐더가 뒤를 돌아본다.

실험실에 들어오실 때는 노크를 해달라고 분명히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요.

바텐더의 목소리는 몹시 예민해져 있었다. 원 목사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흠흠... 그건 미안하게 되었소만 상황이 워낙 다급하여... 그나저나 이 놈은 아까?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렇기도 하고 오늘 난리의 한 축을 담당했던 녀석이라 뭐 좀 알아보려구요.

바텐더는 벽에 병 하나를 매달더니 거기에 붉은 색의 용액을 담았다. 그리고 거기서 길게 튜브를 빼내어 끝에 달린 주사바늘을 한석의 목 뒤에 꽂았다. 튜브에 달린 조절기를 만지자 붉은 색의 용액이 한석의 혈관에 흘러들어가기 시작한다. 한석이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지만 힘이 적잖이 빠진 듯 움직임은 반사적인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

그건 뭡니까?

바텐더의 실험을 몇 번 지켜보았던 원 목사로서도 처음보는 피보다도 더 붉고 진한 용액이었다. 그것이 흘러들어 갈수록 매달려 있는 한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손 끝과 허벅지가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킨다. 바텐더의 한석의 상태를 보고 조절기의 개도를 조정하며 말했다.

이것도 칵테일입니다. 배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칵테일?

 유명한 말이 있죠. 취중진담이라고..... 노래도 있던데 들어보셨습니까?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삿된 가요는 듣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바텐더가 원 목사 쪽을 향하여 몸을 돌리더니 빙그레 웃는다. 천상 뼛속까지 과학자인 그는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취한 사람은 원래 거짓말을 못 합니다. 진실만을 이야기하죠. 거기에 착안을 한 칵테일입니다. 일종의 자백제라고나 할까요.

 자백제요?

 아직 완성은 안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심이라는 것이 어디 쉽게 드러나는 게 아니니까요. 아직은 약간 부작용이 있습니다. 이것도 꼴에 술이라고 한 잔 하고 나면 필름이 심하게 끊기고 개가 되고... 뭐 그렇죠. 하하하하.

원 목사는 속으로 지독한 놈이라고 욕을 했다. 자기 자신이 이 자의 능력을 높이 사서 막대한 돈을 투자하며 약을 얻어내고는 있는 데도 가끔씩 이 자의 표현이나 사고방식은 섬뜩한 구석이 있다. 약물이 주입되고 시간이 좀 흐르자 한석의 눈이 떠졌다. 그러나 의식을 차려서 떠진 눈은 아니고 무언가의 작용에 의해 기계적으로 이루어진 몸의 반응이었다. 바텐더가 핀라이트를 들어 한석의 눈을 비춰본다. 동공반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바텐더는 손을 비비면서 원 목사에게 실험의 시작을 알렸다. 카트를 하나 끌어오더니 노트북에 연결된 캠코더의 전원 스위치를 켠다.

어디 보자.... 쉬운 질문부터 시작해보죠.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하면 반응성을 측정할 수 없으니까요. 일단 가벼운 질문을 거듭해서 복잡한 질문까지 이르게 합니다. 자, 이봐. 어이! 이봐. 내 말 들리지?

 들려...

마치 ARS의 합성음처럼, 건조하고 딱딱한 말투의 음성이 한석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자네 이름이 뭐지?

 ....최...한...석...

 나이는?

 스물 셋.....

 지금 살고 있는 곳은?

 K대 후문 근처....

 종교는 있나?

 없어....

 부모님의 이름을 말해봐.

 엄마... 최...영희... 아버지는.... 없어.....

바텐더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원 목사를 돌아본다.

어떻습니까? 지금 이 녀석은 외부 자극에 대해서 거의 무감각하죠. 청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은 차단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청각만 활성화되어 거기서 들어오는 질문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대답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신이 난 그와 달리 원 목사는 아직도 회의적이었다.

저 정도는 물어보면 누구나 답하는 거 아닙니까. 이름이나 나이 정도는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별로 안 신기하신가 보죠. 좋습니다. 그럼 좀 더 복잡하고 미묘한, 제정신이라면 쉽게 대답하지 않을 질문을 해보죠.

바텐더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한석의 앞에 걸터앉았다.

어이, 최한석. 여자랑 자 본 적 있나?

 응.....

 첫 여자가 누구지? 기억 나나?

 이명희.... 아니.... 명희라고 알고 있었던 지혜.....

뭔가 대답이 기묘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긴 했다. 원 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호오... 저런 질문에 답도 하는 군요.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이 녀석은 이제 답하는 기계나 마찬가지입니다. 후후. 목사님께 보여드릴만큼 보여드렸으니 이젠 제가 궁금한 걸 캐물어보아야 겠군요.

바텐더의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예린과는 아는 사이인가? 그 리사라는 여자랑도 알고 있나?

 리사.....의 경호원...예린.... 앞집 사는.... 마리의 언니.....리사........

 마리? 그건 또 누구야?

바텐더는 마리를 본 적이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리사의 동생.....

그러자 원 목사가 풋- 하고 웃었다. 마리의 언니가 리사이니 리사의 동생이 마리라는 정보는 참 쓸모 없는 정보였기 때문이다. 바텐더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약의 강도를 더 올린다. 그리고 한석을 다그쳤다.

자, 다시 리사에 집중해봐. 네가 리사를 어떻게 알지? 넌 부산 출신이냐? 백당 소속이야?

 고향은... 부산....자라기는 화순에서.....

 아아, 이것 참. 질문은 한 번에 한 가지만 해야겠군. 중복되는 질문에 있어서의 반응은 다소 둔함. 오케이.

수첩을 펼쳐놓고 무어라 열심히 적어넣은 바텐더는 다시 캐묻기 시작했다.

리사! 리사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봐!

다그치는 바텐더의 조바심과는 달리 한석의 대답은 상당히 늦게 흘러나왔다. 한참 대답이 없던 한석이 입을 벌리자 바텐더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예뻐.....

 뭐시라?

 ....몸매도...좋....고.....

 으아아아악!!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껄껄 웃는 원 목사와 달리 바텐더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들어 한석의 뺨이라도 쳐볼까 했지만 괜히 외부자극을 주어 실험에 오류가 생기도록 할 필요는 없었다. 씩씩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꺼져가는 목소리로 들려오는 한석의 말에서 뭔가를 캐치해낸다.

...리사느....는...처녀...였어....나에게... 하루...동안...연인이....

바텐더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냐. 그러면 네가 리사랑 잤다는 거냐?

 .....내...방....침대....에서.....

 뭐라고? 으하하하하. 리사랑 잤다고?

허리를 펴고 껄껄 웃는 그를 보며 원 목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뭐가 그리 웃기신가요?

 하하하. 아아, 그게 말입니다. 역시 제가 제대로 된 놈을 주워왔군요.

한석은 리사와 있었던 놀이동산의 일을 두서 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바텐더가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예전에 부산에 잠시 있을 때 보았던 아주 귀여운 아가씨가 있거든요. 아주 그냥 톡 쏘고 앙칼진 면모가 귀엽기도 하거니와 마치 공주처럼 대접받고 있기에 무너뜨리고 싶은 욕구가 물씬 들게 하는, 아주 그런 핫한 아가씨였는데 이 놈이 이미 따먹은 모양이군요. 푸하하.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흐음. 그래서 무려 예린이 들어와서 그 난리를 친 모양입니다. 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대어를 낚았군요.

 아! 안 그래도 아까 교회에서의 소란에 대해서...

원 목사가 항의를 하려하자 바텐더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목사님. 미리 조언을 하는데 빨리 여길 뜨시는 게 좋겠습니다. 리사 고년은 제가 부산 지역에 풀었던 약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절 잡아 죽이려던 년입니다. 어제 쳐들어왔던 예린이라는 년는 그년의 그림자나 마찬가지구요. 간신히 협상을 거쳐서 죽은 걸로 치고 그 마수를 벗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그렇게 물러났으니 아마 조만간 여기를 대대적으로 치고도 남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원 목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이... 이 성전에....감히 어떻게?

 기도를 열심히 올려서 막을 수 있으면 예배당에서 기도만 하고 계시던가요. 불신자인 전 장비를 챙겨 여길 뜨겠습니다. 일단은 기도원에 가 있어 보고 사태를 좀 지켜보시죠.

원 목사는 자신이 하늘에 드리는 기도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폭이 쳐들어 온다는데 그걸 신이 막아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바텐더에게 감사를 표하고 서둘러 실험실을 떠났다. 바텐더 역시 인터폰으로 하수인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연구결과와 약품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방을 떠나기 직전 아직도 리사와의 추억에 대해 더듬거리며 늘어놓고 있는 한석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것도 챙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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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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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송화는 옆에 있는 수사관에게 일러 경광등을 모두 끄도록 했다. 이내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회전하는 붉은 불빛들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지금처럼 생각나는 때가 없다. 한숨을 내쉰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때 송화에 품 안에 있는 휴대전화의 벨이 울렸다. 받아드니 아는 목소리였다.

리사입니다.

 ........어쩐 일이야.

어떻게 번호를 알았으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녀의 부모님 댁에 값비싼 한우세트와 돈봉투를 보냈던 전력이 있는 리사라면 자기 개인 전화번호 정도는 쉽게 손에 넣고도 남을 인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송화는 리사의 전화를 받는 게 참 곤욕이었다. 리사에게 무어라 말할 면목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냥요.

 참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리사의 말투가 더 얄밉다. 차라리 자기보고 헛수고했다고 말하거나 자신을 비난한다면 맞서서 고함이라도 쳐볼텐데 이렇게 나와버리니 그도 여의치 않다. 리사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종로 피카디리 앞에 시노벨이라는 카페가 있어요. 할 일도 없고 심심하기도 해서 여기서 잡지책 보고 있는데... 커피가 맛있네요. 그래서 검사님 생각이 나서 전화드렸어요.

 내가 종로에 차 막힐테니 오지 말라고 했잖아.

 버스 타고 왔는 걸요?

단 1mm도 밀리지 않는 리사의 말솜씨에 송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사는 할 일도 없고에 묘한 강세를 두어 말했다. 송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누군가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알았어. 내가 그 쪽으로 가지. 일단 여기 처리 좀 하고.

 네. 기다릴게요.

종료 버튼을 눌러 통화는 끝낸다.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사람을 제지하는 수사관을 불러 길을 열도록 한다. 검은 옷을 두르고 안광을 형형하게 뿜어내는 김 권사가 송화의 앞에 와 섰다.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송화의 귀를 후벼판다.

당신이 책임자라면서요?

 그렇습니다.

 어디서 많이 뵌 분 같군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저도 아주 역겨운 기억은 날 것 같은데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군요.

모를 리 없는데도 전혀 모른 척 하는 두 사람이 그렇게 맞서서 눈빛을 충돌시킨다. 김 권사는 사방에 퍼져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경찰차와 전경 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책임자라고 하시니 여쭙겠습니다. 귀하께서는 저희 교단의 성스러운 영역에 무단으로 침입하셨는데 대체 무슨 이유에서죠?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낯을 후려 갈기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송화가 대답했다.

한 용감하고 정의로운 시민이 목숨을 걸고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이 곳에서 불법행위가 이뤄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제보가 들어왔거든요. 귀 교단의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침범할 생각은 아니지만 고통 받는 국민들이 있는데 공권력이 그걸 모른 체 할 수는 있나요.

 하!

김 권사는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요. 들어와서 그렇게 들쑤셔 보니 불법행위가 있던가요? 정말로 있던가요? 참되고 복된 신앙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성령에 몸을 맡긴 순수한 신도들 말고, 또 뭐가 있던가요!

 ......

 당신들이 우리의 신앙을 모독하고 구둣발로 짓밟아도 될 만큼 이곳이 호락호락한 줄 아십니까? 교단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당신이 저지른 이 무도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고 말겠습니다. 아무 죄 없는 선량한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될 만큼! 이 세계가 썩고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군요! 이런 세계를 위해서 우리가 그토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니요!

김 권사의 적반하장격인 언사를 참아내가며 송화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역시 아침에 바로 쳤어야 한다. 몹시 후회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예린에게 구출되고나서 리사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돌아온 후 경찰병력 출동을 위한 절차를 밟는 동안 놈들의 발자취는 깨끗이 지워졌다. 거의 수사방해라고도 할 만한 윗선에서의 싫은 소리와 부당한 지시를 모두 떨쳐내고 거의 그녀 독단으로 결정하다시피한 투입이었다. 그나마 가장 빠른 시간에 치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어떤 불법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텐더의 실험실이나 약은 물론 그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사라졌다. 심지어 어젯밤 예린과 극렬하게 싸웠던 조직원들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소기의 성과는 커녕 일말의 의혹도 캐내지 못한 작금의 상황은 수색영장도 갖춰오지 못한 송화에게 있어 최대의 위기였다. 김 권사의 힐난은 이어졌다.

독재정권에도 종교시설은 함부로 하지 못 했습니다. 당신이 대체 뭐라고 신성한 종교의 자유를 침범할 생....

더는 못 참겠다. 지끈거리는 머리는 송화로 하여금 분노를 제어하기 어렵게 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김 권사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며 소리쳤다.

자유! 그래, 니들 자유! 맘껏 보장해줄테니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봐. 단! 니들이 말하는 그 종교의 자유로 인해 희생당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그때는 너희 모두 아작을 내줄테니! 명심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외쳐보지만, 송화는 가슴 한켠이 무거웠다. 자기가 정말 법대로 집행하여 자기 말대로 할 수 있을까.

......놓으시죠.

멱살을 잡힌 상태에서도 김 권사는 차분했다. 주변의 수사관들이 송화를 한사코 뜯어말렸다. 불법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덮친다고 이만한 수사력을 집중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게 무위가 되었다. 송화가 직접 잠입까지 해서 증거를 수집하겠다고 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헛된 공염불 주장이 되고 만다. 송화는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통한의 외침이었다.

모두 철수한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주변과는 달리 송화와 김 권사는 그 후에도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눈싸움은 한치의 밀림도 없이 팽팽하게 이루어졌다. 다른 이들이 모두 떠나고 직속 부하가 그녀에게 함께 떠나기를 종용할 때까지 송화는 그렇게 서 있었다. 부하의 간곡한 부탁에 못이겨 차에 올라탄 그녀는 차창을 통해 김 권사를 바라보았다. 장승처럼 땅에 못 박힌 듯 꼿꼿이 선 그녀의 표정에는 승자의 여유가 가득했다. 이를 갈며 주먹으로 시트를 내려치던 송화는 부하에게 지시했다.

나는 피카디리 앞에서 세워줘. 만날 사람이 있어.

 네? 바로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부장님이 아마도 기다....

 부장이고 나발이고! 일단 날 내려줘. 청에는 내가 알아서 돌아간다.

 아, 예...

운전을 하고 있던 수사관은 송화의 눈치를 살폈다. 송화가 평소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열혈 검사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잠입수사를 하고 돌아온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더 거칠어져 있었다. 오늘의 출동도 그녀의 독단과 아집이 이끌어낸 무리한 수사였다. 게다가 수확까지 없으니 이제 그녀가 돌아가서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시말서를 쓰는 일이 될테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그래.

차에서 내린 송화는 리사가 말한 카페를 찾았다. 길가에 있는 가게라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안쪽 자리에 앉아있는 리사가 보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송화가 자리로 다가가자 리사와 일행이 이쪽을 본다.

어머, 오셨군요?

 아, 안녕하세요오....

송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리사와는 할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 낯선 아이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잡지책을 덮고 있는 리사를 향해 턱짓으로 옆에 있는 일행을 가리켰다.

그 애는 누구야?

 저... 애... 아닌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는 목소리인지라 송화가 알아듣기에는 퍽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이쪽을 보면서 이야기하긴 하지만 시선은 꼼지락거리는 손에 내려가 있었다. 리사가 웃으며 일행을 소개했다.

여긴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닥터 윤, 윤가희 씨라고 해요. 생긴 건 이래도 저보다 언니랍니다.

 뭐?

 올해로... 스물 여섯이구요.... 그리고 의학 박사고...

순간적으로 송화는 자기 눈과 귀를 의심했다. 끽해야 리사의 막내동생이나 조카뻘 되어보이는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얼굴로? 하아. 리사.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야.

 알고 있어요. 그리고 농담도 아니구요. 이 분은 채 검사님께 빌려드릴려고 모시고 온 거예요.

 빌려줘?

역시... 사람 장사를 하는 백당의 실권자 다운 소리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빌려주다니. 꽤 심한 망발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이 분은 약물 및 신경정신계통으로 박사학위를 따신 재원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수 년전부터 후원해 온 의학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기도 하구요. 2년전 부산에서 바텐더의 칵테일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을 때 그나마 선방할 수 있었던 건 닥터 윤 덕분이에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기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가희를 내려다보며 송화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리사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제가 오늘 아침 급히 호출하여 서울로 모셨습니다. 당분간 채 검사님의 상태를 보면서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예요.

 도움이라니?

 해독, 말입니다. 지금, 별로 정상은 아니시죠?

송화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리사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가까스로 견뎌내고 있다고는 하나 자꾸만 식은땀이 나고 괜스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판단이 뭔가 미심쩍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아무런 대답을 못 하는 송화를 대신하여 리사가 말을 이어나갔다.

모르긴 몰라도 지난 번 칵테일과는 똑같지 않을 거예요. 짐작컨대 더 독해지고 더 강해졌겠지요. 곧 구해올 오빠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채 검사님의 협조가 필요해요. 닥터 윤의 치료에 응해주세요.

 곧 구해온다고....? 네가 말하는 오빠라는 사람은 한석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덮쳤을 때... 아쉽게도 한석은 이미 없었다. 원 목사는 물론 바텐더도 그렇고.... 소란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무슨 수로 찾겠다는 거야?

송화가 고개를 들고 리사를 보니 여전히 웃는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전처럼 활짝 웃는 얼굴 까지는 아니었다. 살짝 미심쩍은 생각과 혹시나 하는 생각에 리사를 다그친다.

뭔가 알고 있구나? 그렇지?

 제가...

리사가 뭔가 이야기를 하려할 때 웨이트리스가 커피 잔을 가져다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원두커피에 살짝 입술을 적신 리사는 그제서야 송화를 보고 한 마디 했다.

검사님도 커피 시켜드릴까요?

 빨리 말이나 하란 말이야!

송화는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을 내려치고 말았다. 주변의 시선이 이곳으로 향한다. 저 쪼그마한 의학박사는 리사의 등 뒤로 얼굴을 숨겼다. 벌떡 일어나 있던 송화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리사가 말?다.

것 보세요. 지금 많이 격렬해졌어요.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송화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네가 말하는 치료인가 치질인가를 받도록 할게. 저 꼬맹이 의사 말을 들으면 된다는 거 아냐? 자, 이제 되었으니 빨리 아까 하려던 이야기나 계속 해봐.

꼬맹이가 반박한다.

꼬맹이 아닌데....

 아무튼!

불만 섞인 어조로 중얼거리던 가희는 다시 리사의 등 뒤로 숨었다. 리사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제가... 공짜로 알려드리기 싫다고 한다면요?

 뭐라고?

 바텐더를 잡으려고 꽤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더군요. 그런 놈을 눈 앞에서 놓쳤으니 얼마나 원통하시겠어요. 저도 그 놈에게 볼일이 있으니 소재를 파악하고 있는 지금 당장 쳐들어가 놈의 모가지를 따고 싶은 생각 뿐이에요. 그렇지만... 그랬다가는 저도 적잖이 피해를 보게 될 거고.... 그랬다가는 제가 상처 입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능구렁이 한 마리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니까요. 

...바텐더의 소재를 알고 있다? 그 말이지?

 결재 받느라고 하루를 낭비하신 대한민국 검사님과는 달리 저희는 바로 따라 붙었으니까요. 지금 예린 언니가 놈들의 뒤를 밟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송화는 리사의 그림자, 예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사님 어쩌구 하면서 자신을 비꼬는 게 역력한 리사의 말에 배알이 뒤틀리기는 했지만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좋아. 조건을 말해봐. 듣고 판단해주지.

 후후. 너무 쌀쌀맞으시다. 저는 의사부터 붙여드리는 호의를 먼저 베풀었는데 검사님도 통크게 수락하고 시작하시죠.

지끈거리는 머리와 리사의 빙글거리는 표정이 송화를 미치게 만들었다. 또 폭발하려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백기를 들어올리기로 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해줄테니 빨리 소재나 불어. 그리고 조건이고 나발이고... 다 말해봐.

 다 들어주시는 거죠?

 불법적인 것만 아니라면.

 좋아요.

리사는 그제서야 주머니에 들어있던 작은 녹음기를 꺼내놓았다. 이미 버튼이 눌려 돌아가고 있는 기계를 내려다보며 송화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지랄맞게 치밀한 년 같으니. 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우선 바텐더는 말세교의 기도원에 숨어있습니다. 원 목사도 그곳에 있구요. 확인은 안 되었지만 우리가 찾는 두 사람도 거기에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양소란과 최한석 말인가?

 네.

한석의 이름이 나오자 리사의 얼굴이 살짝 그늘지는 것을 본 송화는 자신도 울적해지는 걸 느꼈다. 정신차리자.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리사 역시 자신의 슬픔으 크게 내비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기도원의 위치는 계룡산 깊숙히 자리한 부남리라는 마을 근처예요. 지세가 험하고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천혜의 요새 형국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경비도 삼엄하고 내부는 커녕 입구를 뚫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하는 군요. 예린 언니도 접근하는 게 고작이라고 할 정도로요.

그 밖에도 경비인원이라든가 주변 지형 같은 것을 줄줄 늘어놓는 리사를 보며 송화는 혀를 내둘렀다. 단 하루만에 그들의 뒤를 밟고 이 정도의 정보를 캐오는 걸 보면 이 녀석이나 예린이나 매한가지로 무서운 놈들이었다. 아니, 년이라고 해야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며 송화는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네가 가지 않고 나 보고 거길 쳐달라? 너희가 직접 하려면 피해가 막심할 게 뻔하니까?

 그런 셈이죠. 그런 나쁜 놈들 잡으라고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고 계신 거잔아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하는 리사를 보며 송화는 기가 찼다.

웃지마. 정드니까.

그러자 리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머, 아직 안 드셨단 말이에요? 전 이미 정 많이 들었는데...

 헛소리 하지마.

 헛소리라뇨. 저희는 음...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요. 남자들은 한 여자랑 했던 걸 가지고 구멍동서라고 한다던데... 저희는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막대동서라고 해야 하나? 저는 마땅한 용어를 잘 모르는데 혹시 검사님은 아세요?

 너 정말!!

송화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리사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데다가 테이블로 인한 간격이 있어서 무리였다. 대신 손에 잡히는 대로 카페 성냥갑을 집어 던졌다. 어렵지 않게 그걸 받아든 리사는 자기는 담배는 피지 않는다면 내려놓았다. 송화가 씩씩거리고 있자니 리사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정말... 부탁합니다. 부디 오빠를 구해주세요. 검사님이니까 믿고 부탁할 수 있어요.

 .....네 남자라면서.

 그렇기도 하지만요. 전... 오빠 하나만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이미 오빠를 한 번 실망시키기도 했구요.

리사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얼마 보지도 않았고 잘 알지도 못 하는데도 자신의 마음을 이리도 휘젓는 남자. 한석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얼빠진 얼굴. 같이 놀이동산에 갔을 때의 얼굴. 자신이 유혹했을 때 어쩔 줄 몰라하던 얼굴. 본의 아니게 리사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고 우물쭈물해하며 전봇대 뒤에서 나오던 얼굴. 그리고 자신이 차를 몰고 교회로 돌진했을 때, 헤드라이트에 비춰진 한석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온 몸이 피에 절어 아귀 같은 모습으로 송화를 구해내던 그의 표정을 운전석에 앉아 지켜보면서 리사는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다시 눈을 뜬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어떤 비아냥도 아닌 말 그대로 예의를 다한 인사다. 오히려 송화가 당황했다.

야... 너, 안 어울리게 왜 그래.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리사가 허리를 폈다.

제 일이 정리되면, 오빠를 데리러 갈테니까 그??까지만 검사님이 챙겨주세요. 그때까지만. 딱 그??까지만 빌려드리는 거니까 잘 쓰고 상처없이 돌려달라고요.

 쓰긴.... 뭘 써.

송화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리사는 가희에게 몇 가지 더 부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카페를 나서자 저쪽 도로에 줄지어 대있던 고속버스들이 시동을 걸었다. 그녀는 맨 앞 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리사가 카페를 나가고 나서 송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희가 따라 일어섰다.

저...저기....

 응? 왜 그러죠?

 피...피를 좀 주세요.

뜬금없는 소리에 송화는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가희가 뱀파이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가희는 송화를 데리고 한 대학병원으로 갔다. 거기에서 채혈을 마치고 송화는 검찰청으로 향했다. 건물을 들어서기 직전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시말서를 쓰기 전에 병력을 한 번 더 지원해 달라고 해야한다. 아무래도 시말서 말고 써야 될 게 하나 더 있을 것 같았다.

미쳤지, 미쳤어.

두 손으로 뺨을 두드리고 그녀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더 미친 놈들을 잡으러 가야하는데 여기서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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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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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나의 죄와 이 겨레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하였으며 하느님의 거룩한 산을 어여삐 여겨 달라고 나의 하느님 야훼께 간구하였다. 내가 이렇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지난번 환상에서 본 가브리엘이라는 이가 저녁 제사 무렵에 날아 오더니 나를 흔들며 이렇게 분명히 일러 주는 것이었다. 다니엘아, 다니엘아. 네가 알려고 하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내가 이렇게 왔다. 네가 간절한 기도를 올리자 곧 대답이 내렸는데 나는 그 대답을 일러 주러왔다. 하느님께서 너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대답해 주시는 것이니, 이 말씀을 잘 듣고 환상의 뜻을 깨닫도록 하여라. 아멘.

원 목사의 통독이 끝나자 강당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멘.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였고 오랜 노동과 영양 부족으로 인해 삐쩍 말라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많이 헤어져 있어 거의 누더기에 가까웠고 머리와 수염은 제대로 깎지 않아 너저분했다. 손가락 밑에 흙이 껴있지 않은 이가 드물었으며 옷 아래 드러난 피부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강당을 3~4미터 간격으로 둘러싸고 있는 검은 정장을 쫙 빼 입은 덩치 좋은 사내들과는 달리 명백히 거지꼴에 가까웠으나 그들의 눈빛 만큼은 놀랍도록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하나 같이 원 목사의 입을 향해 있었다. 그 입이 열리어 다음과 같은 말을 쏟아낸다.

다니엘 제 9장, 20절부터 23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 새겨진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그를 기억하고 어여삐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포로로 잡혀가 고초를 당하고 민족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으며 친구가 살해당하고 부인이 겁탈당했습니다. 노예 생활을 하고 있던 그의 이름이 어째서 이토록 귀이 여겨져 성경에 올려져 있으며 훗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늘 마음에 두고 있으며 하나님만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압제자가 그에게 다가와 자신들의 우상에게 절하라 압박하고 재산을 빼았겠다고 겁을 줍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나를 유황불에 던질지언정 하나님이 나를 구해주리라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토록 고귀한 이름이 되어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믿는 자는 보상받을 것이오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할 것입니다. 그 어떤 압박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앙이 있다면 여러분은 살아남을 것이고 귀이 쓰일 것이고 높이 올라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맞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저는 지금 압박을 받아 이 먼 곳으로 쫓겨오듯 해야 했습니다. 종로 바닥에 제 목숨을 바쳐 세운 교회에 불신자들이 쳐들어오고 제 목에 칼을 대고 겁박합니다. 제 신앙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악마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저희의 성전을 짓밟고 불태우고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말세가 임박한 혼란한 세상에서 저들이 어찌 그 크고 거룩한 뜻을 알 것이며, 천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며, 진정한 신앙이 무엇이고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저희는 어찌 알겠나이까. 그리하여 진정한 그때에 이르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길 너희가 진정한 믿음을 지키고 싸워왔냐고 물으시면 여러분은 어찌 대답하려 하십니까. 핍박과 고통을 받았기에 신앙을 버렸다고 말씀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내 가진 것을 빼앗고 목에 칼을 들이대며 사자굴에 던져졌다고 제 신앙을 버렸나이다 하시렵니까? (아닙니다!) 그 어떤 때라도 그 어떤 곳이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에 의심을 갖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이야 말로! 여러분이야 말로 진정으로 구원되고 귀이 쓰일 것임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주여!

이백 명이 넘는 사람이 한데 모여 내는 아멘 소리는 낡은 강당을 뒤흔들고도 남음이었다. 원 목사는 뒤이어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한 구원자고 그들이 이런 첩첩산중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구원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생활이라며 여기 모인 사람들을 한껏 추켜세웠다. 감읍한 사람들은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원 목사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번갈아 외쳐대었다. 잠시 후, 설교가 모두 끝나고 찬송가가 시작되자 원 목사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단상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목사 김태윤이 다가와 종서에게 악수를 청했다.

역시 언제 들어도 형님의 설교는 기가 막힙니다. 대체 언제 시간이 나시기에 그렇게 설교문을 잘 짜오고 연습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뭐, 그야 늘 짬나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설교였습니다. 작성할 때는 대체 뭘 보고 하시는 겁니까?

 뭐, 다 열심히 기도를 하다보면 응답이 있기 마련입니다.

연설문 작성 전문업체에서 매달 원고를 보내오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종서였다. 대충 좋은 말로 얼버무려 대답을 한다. 태윤은 손을 비비며 말했다.

하하하. 자주 내려와서 가르침을 좀 주세요. 여기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산골에 너무 박혀있으려니까 심심합니다.

 그럴까요.

 어떻습니까. 제 동생은 잘 하고 있습니까?

 예, 권사님께는 향후의 일을 일임하고 내려왔답니다. 제가 항상 신뢰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단상 뒤로 나있는 출구를 통해 강당을 빠져 나와 따로 지어져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강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이 조립식 가건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목사관은 제대로 된 벽돌집이었다. 원래 이곳은 어떤 대부호의 별장이 있던 자리였는데 그 부지를 교단에서 사들여서 주변을 그들의 용도에 맞게 개간한 곳이다. 목사관은 종래의 별장을 개조해서 쓰고 있었다. 그곳의 1층은 부목사인 태윤이 평상시에 쓰고 있고 2층은 가끔 내려오는 종서의 몫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비어있던 지하가 오늘은 오랜만에 만난 방주인에 의해서 대청소중이었다.

아, 예배는 벌써 끝난 겁니까?

교회에서 실어온 약품과 자재를 정리하던 바텐더가 돌아보며 인사했다. 태윤은 바텐더에게 다가가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한 보고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바텐더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르며 답했다.

원료 작황이 안 좋은 건 저도 보고서를 통해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생산량에 비해 반출량이 너무 적은 이유입니다. 부목사님이 생각하셔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자 태윤이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답했다.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답했다.

여기 이런 오지에 있다보니 다들 심심하기도 하고... 조금씩 쓴다는 게 그만...

바텐더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바깥에서는 그람당 얼마에 팔리는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여태까지는 어느 정도 묵과했지만 당분간은 제가 직접 컨트롤 할테니 그리 아십시요.

 지...직접이요? 서울에는 안 돌아가시구요?

 서울에는 당분간 안 돌아갑니다.

태윤은 바텐더에게 쩔쩔매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실험장비가 갖춰지고 약품이 놓여있는 실내를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 간이침대에 눕힌 남자를 보았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남자의 피부에는 이런저런 상처와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숨 쉬는 간격도 불규칙했고 입가에서는 거품 같은 것이 살짝 흘러나와 있었다. 태윤은 남자를 가리키며 바텐더에게 물었다.

이 놈은....?

 아, 그 놈은 제가 관리할 놈입니다. 그냥 두십시요.

 관리요?

바텐더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개발 중인 약을 한 번 넣어보았는데 반응이 여의치 않더군요. 깨어나질 않아서 몇 가지 시도를 좀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바텐더가 곤란하다는 투로 말하자 그걸 들은 종서가 살짝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이건 취중진담이 아니라 묵언수행 아닙니까. 이래 가지고 자백제라고 하겠습니까?

틈만 나면 바텐더의 약점을 찌르고 자기 잘난 척을 하고 싶어하는 종서의 성향을 이미 여러번 겪어 본 바텐더였지만 고까운 건 여전했다. 그는 네, 네. 거리면서 종서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그 아이가 꽤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아직까지 끼고 계시고....

 아, 예에. 맛이 좋더군요.

종서는 자신의 방에 데려다 놓은 아이를 떠올리며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이 짧은 문장에서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은 태윤 역시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종서에게 묻는다.

형님. 간만에 영계 맛 좀 제대로 보신 모양이군요.

 허허, 뭐.. 그야...

 저도 나중에 맛 좀 보게 해주시죠. 그리 좋습니까?

 어허허허. 지금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어제까지 하도 해댔으니 좀 헐거울 수도 있습니다만.

종서와 태윤은 음탕한 농담을 몇 마디 더 나누고 껄껄 웃어대며 지하실을 벗어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바텐더는 혀를 찼다.

저런 것들이 목회자라... 이거지. 목사 새끼들 자지를 다 자르거나 고자가 되어야 이 땅의 기독교가 바로 서겠구만. 에잉. 씨발.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이 저들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기자재의 작동 상태를 몇 가지 더 점검해보고 벽에 붙어있던 종이 한 장을 내려 거기에 뭔가 열심히 적어내렸다. 원심분리기를 비롯한 각종 실험기구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열고 입력해놓은 데이터와 자신의 공책을 번갈아 보며 뭔가를 열심히 계산하기도 했다. 저멀리 아련하게 들리던 찬송가 소리가 잦아들었다. 산 속의 적막이 사방을 감싼다. 바텐더는 모처럼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꼼짝도 하지 않고 약품 분석과 혈액 분석을 병행하던 바텐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펴고 팔을 쭈욱 당겨본다. 온 몸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대체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목을 좌우로 꺾어보고 바텐더는 지하실을 나왔다. 달이 뜨지 않은 산 속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미리 가져온 랜턴을 켜고 땅을 비추어 본다. 사방을 한 번 비춰보고 자신이 목표한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아까 예배가 이루어지던 강당을 지나치며 안을 슬쩍 살펴본다. 벌거벗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한데 엉켜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은 강당 바닥에 잠들어 있었지만 남자 몇 명은 여자들의 입과 엉덩이를 향해 열심히 좆질을 하고 있었다. 반쯤 넋이 나가있는 여자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까 태윤에게 다그쳤던 반출량 부족의 원인을 알 것도 같았다. 바텐더는 가볍게 혀를 차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목표하던 곳에 도착했다. 랜턴으로 한 쪽을 비추자 나무에 기대 앉아졸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바텐더는 다가가 발로 그를 툭툭 건드렸다.

어이, 이봐!

 어허업.... 아... 박사님...

사내는 벌떡 일어나며 입가에 흐르던 침을 닦았다. 

불침번이 자고 있으면 그게 불침번이냐? 침번이지.

 시...시정하겠습니다.

 됐고, 다른 하우스나 둘러보고 그래. 또 구석에 쳐박혀서 자지 말고.

 알겠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꾸벅하고 허둥지둥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바텐더는 혀를 찼다. 돈으로 사온 녀석들인데도 전혀 돈 값을 못 하는게 불만이었다. 물론 지금 시각이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가는, 몹시 피곤할 시각이라고는 하나 돈을 받고 일하는 거면 돈 값을 해야할 것 아닌가. 바텐더는 이번 겨울만 지나고 나면 원 목사에게 받을만큼 받아 챙기고 다른 곳을 알아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경비로 고용한 저 어중이떠중이 조직도 잘라버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 가량 전에 있었던 서울에서의 예린 침투 사건만 해도 그렇다. 제아무리 부산 주먹계에서 수위권을 달리는 에이스라고는 하지만 겨우 하나였고 게다가 여자였다. 이쪽은 떼로 덤비면서도 잡지를 못 하다니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바텐더는 혀를 끌끌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 보자... 13번 하우스였나. 시로시빈 매직 머쉬룸이 있는 게...

그는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고 랜턴으로 비추어보며 내용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각종 식물의 목록과 재배지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기도원의 진짜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에서는 방금 바텐더가 들어온 버섯재배 하우스 뿐만 아니라 수십개의 대형 하우스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바텐더가 필요로 하는 각종 식물을 키워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옆에 가설된 건물에서는 이러한 원료를 말리고 찌며 가공하는 처리장은 물론 이 재료들을 바탕으로 칵테일의 분말 형태를 만들어내는 수공업 설비도 갖추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점에서 바텐더와 원 목사의 이해가 일치했다. 둘은 동업의 형태로 바텐더는 기술과 약을 제공했고 원 목사는 자금과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칵테일은 은밀한 유통책을 통해 전국으로 판매되었다. 막대한 수익금은 1:1의 비율로 원 목사와 바텐더의 몫으로 돌아갔다.

원 목사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교회에서 말세의 가르침에 푹 빠진 사람들만을 엄선하여 낙원이라 이름 붙인 이 기도원에 입소시켰다. 입소 조건 중의 하나는 강한 신앙이기도 했지만 두 번째 조건은 전재산을 헌납하는 것이었다. 되도록이면 가족 전체를 데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형편 없는 식사를 제공받고 육체를 혹사시키는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성노리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몸 바쳐서 믿어야 할 신앙의 시련이라 생각하고 달게 받아들였다. 설령 이곳의 정체를 깨닫고 나가고자 하더라도 주위를 둘러싼 3미터에 가까운 담장을 넘어갈 재간이 없었다. 시퍼렇게 눈을 뜨고 감시하는 바텐더의 하수인들을 이길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재산을 다 잃고 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설령 여기서 나간다 하더라도 사회로 돌아갈 길이 막막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며칠에 한 번씩 치뤄지는 칵테일에 의한 환각파티로 인해 그들의 정상적인 판단력은 극도로 쇠퇴하고 있었다. 오래 지낸 사람들은 여기서 자신의 가족이 병이나 영양실조로 죽어 넘어지더라도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 탈출하려다가 맞아 죽은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그의 시체와 가족들을 걷어차며 비난했다. 자신들에게 이러한 낙원을 열어준 원 목사를 열렬히 찬양하며 그를 노래하는 것으로 기쁨을 표시한다. 그리하여 이곳은 살아있는 자들의 지옥인 동시에 천국이 되었다.

에잉... 쯧쯧... 물 주는 양을 조절하라고 했거늘....

바텐더는 하우스 바닥에 고인 물의 양을 손으로 재보고 투덜거렸다. 이곳 기도원을 총괄하고 있는 부목사 김태윤은 전직 깡패로 교회와 기도원을 비호하고 있는 조직의 행동대장 출신이었다. 말이 좋아 부목사지 하는 짓은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그는 농장의 경영이나 기도원의 신앙보다도 여신도를 덮치는 것으로 하루를 소일하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무리 잔소리를 한다고 해도 원료 작황은 좋을 수가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한 번 다 갈아 엎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쳇.

바텐더는 혀를 차며 바닥을 발로 찼다.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것들로 골라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썩 들게 자라난 것이 별로 없어 계속 투덜거리며 작업을 했다.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한 그가 하우스를 벗어나려고 할 때 누군가 문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누구냐? 아까 너냐?

랜턴을 비춘다. 하얀 빛 아래 드러난 상대의 얼굴을 보고 놀란 바텐더가 랜턴과 비닐봉지를 떨어뜨렸다. 랜턴이 꺼진다.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한줄기 빛이 사라지고 나니 완전한 어둠이 이곳을 감싼다. 그 어둠 속에서, 엉뚱한 소리가 들려온다. 

공자왈,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바텐더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실루엣과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공포에 질린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씨...바... 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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