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65)

그러나 어떤 공격도 나를 향하지 않았다. 예린이라는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뜨고 상황을 확인한다. 바로 다음 순간, 난 황급히 뛰쳐나가 예린의 손목을 잡고 제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이 여자. 힘만 센 줄 알았는데 돌기까지 한 걸까?

지금 뭐하는 겁니까!

 놔요!

 피나요, 피!

자기 허벅지에 대고 칼을 긋는 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설마 이 여자가 과부라서 조선시대 열녀들처럼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는 건 아닐테고.... 게다가 한 번 스윽 긋는 거면 손이 미끄러진 건가 싶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주 꼼꼼하게, 차분하게 자기 허벅지에 대고 한 일자를 긋고 있었다. 어느 정도 깊이로 찌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걸로 보아 결코 얇게 찌른 건 아닌 게 분명했다.

이 정도.... 피로 호들갑 떨지 마세요.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군요.

당신 다리에서 흐르는 피가 한강을 이루고 있는데 지금 정신이 문제입니까? 아까 묶어둔 옷, 바로 위를 그어놓은 터라 내 옷까지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소란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급한 게 따로 있는지라 아이를 덮고 있던 담요 한 자락을 찢어내어 예린의 상처를 눌렀다. 그러나 왈칵왈칵 솟아나는 피를 손바닥만한 천으로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방법을 모색한다. 한가지 방법이 눈에 보였다.

저기,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알았죠?

예린을 자리에 앉게 하고는 그녀의 바지에 걸린 벨트를 풀었다. 그런 다음 그 벨트를 상처 바로 위에 대고 단단히 당겨서 조여두었다.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처치이지만 그래도 교련 교과서에 나온 그대로다. 효과가 있는 건지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피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예린은 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상한 짓을 해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군요.

 네?

 혼잣말입니다. 이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깨를 빌려주자 그녀는 내게 기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바로 서더니 내 팔을 놓았다. 칼빵을 놓은 다리가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자기 발로 일어섰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흐음. 아무래도 한석 씨도 정상 상태는 아닌 것 같군요. 태호를 부를테니 같이 나가시죠.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 끊임없이 느껴지는 정신적 이질감은 나도 내 자신을 믿지 못하게 했다. 거기에다 바텐더라는 놈도 영 미심쩍었고 사람을 가두어 두는 이 교회도 수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중 제일 무서운 것은 공포의 대마왕처럼 문을 부수고 나타나 험악한 말로 바텐더를 위협하던 이 예린이라는 여자였다. 그 모습만 보자면 절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어쩐지 이 여자에게는 듬직함이 느껴졌다. 신뢰할 수 있다. 아무런 근거가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품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어딘가 전화하는 것을 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본다. 아아, 그래. 이걸 깜빡하고 있었군.

뭐라고? 그럼 일단 애들만 데리고 빠져나와. 바텐더도 놓친 이상 한석 씨만 확보해서 이곳을 빨리 빠져나간다.

예린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고 나를 재촉했다.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지금 바깥쪽에서 분위기가 안 좋다고 하는 군요.

 저기, 미안한데요. 저는 여기서 나갈 수가 없어요.

 네?

손을 들어 한 소녀가 누워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이 아이를 두고 나가면 왠지 안될 것 같은 기분이라서요. 그게.... 설명은 잘 못 하겠지만, 전 이 아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깥의 소란스러움에는 여태 들리지 않았던 소리도 하나 추가되고 있었다. 그것은 사이렌 소리였다. 예린은 내 팔을 붙들고 다급하게 외쳤다.

소란이는 제가 나중에 책임지고 다시 들어와 데려가겠습니다. 일단은 한석 씨만이라도 저희와 함께 가 주십시요.

고개를 젓는다. 내 팔을 붙든 예린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시간이 없습니다. 부디 리사 아가씨를 슬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예린의 얼굴을 쳐다본다. 바깥에서의 사이렌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리고 있었고 사방에서 들리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리사라는 분이 예린 씨에게 명령을 내렸나 보죠? 절 데려오라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리사라는 분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겠죠? 이 난리를 일으키면서까지 데려오게 할 정도면?

 지금 무슨 말씀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다. 나 자신 조차 믿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내심 확고한 기준 하나는 알고 있었다.

가서 리사 씨에게 전해주세요. 리사 씨가 절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저는 이 아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의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전해주세요.

 한석 씨....

그녀의 품 안에서는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었고 밖에서는 무언가 구령소리 비슷한 게 들려오고 있었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예린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예를 표할 필요는 없는데... 조금 쑥스러웠다.

저기, 예린 씨....뭘 그렇게까지......?

 실례, 하겠습니다.

 네?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어깨가 한 번 흔들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내 배는 무슨 관통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한 순간에 다리가 풀리고 휘청거린다. 

예...예린......씨.....?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바...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바닥에 주저앉아 올려다보니 예린의 얼굴이 날 향해 있었다. 그녀는 착잡한 말투로 말했다.

역시 제 컨디션이 아니다 보니 한 번에 해내질 못 하는 군요. 두 번이라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팔이 다시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목 뒤로 무언가 뜨끔하더니 그대로 눈이 감겼다. 이런 젠장. 제 컨디션이 아니라서 이 정도면, 제대로 치면 아주 그냥 사람 잡겠구만.....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어떤 여자와 침대에 누워있었다. 검은 색 브래지어에 팬티까지, 아주 섹시한 블랙으로 차려입은 여자와 한 침대에 있었다.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등이 조금 낯이 익었지만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소란이가 서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과는 전혀 딴 판으로 혈색도 좋고 활발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눈에 익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 선생님! 또 애인 만나러 오신 거예요?

 - 응. 그렇게 되었어. 넌 또 배달이야?

 - 저야 늘 그렇죠. 뭐.

어찌된 요량인지 나는 소란과 꽤 친한 사이처럼 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은 내가 날 보고 있다? 어라? 아아, 이건 꿈이지. 현실이 아니었지. 참. 가까스로 납득을 하고 그 장면을 계속 관찰하기로 했다. 날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란이와 소란이를 잘 알고 있는 '나'의 대화를 말이다. 소란은 들고 있던 옷가지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 너무 자주 오시는데... 한 번 유진이한테 일러볼까요?

 - 으음. 그렇다면 나는 소란이 네가 날 좋아한다고 유진이한테 말해주지.

 - 앗. 그건 너무 치사하잖아요.

 - 후후. 그러면 누가 더 타격이 크려나? 

- 아이, 참. 그러지 말아요.

옷가지를 건네 받자 소란이는 자유로워진 두 손을 불끈 쥐고 내 가슴을 토닥였다. 앙증맞고 작은 손으로 두드린다고 얼마나 아프겠냐만은 그 아이의 손이 내게 닿을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다. 뭐가 이리 슬픈 걸까. 게다가 유진이는 또 누구야?

- 그럼, 이르지 않을테니까 키스해줘.

 - 으응... 아직 배달할 게 더 남았는데....

 - 남은 건 내가 도와줄게.

몸을 배배 꼬던 소란은 이내 두 팔을 쭉 뻗어 내게 다가왔다. 몸을 낮추고 그 아이의 팔을 내 목에 감싼다. 서로의 입술이 겹쳐진다. 으악! 저기에 있는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상대로 애라고!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로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애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 하아... 선생님... 키스만 한다고 했잖아요....

 - 내가 언제?

 - 아잉... 차암....

내 입술은 소란의 입술만 탐하지 않았다.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쇄골과 가슴으로 점점 내려간다. 방금 전까지 교복을 입고 있던 소란은 어느 순간부터 벌거벗고 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 하아... 선생님... 흐으...응.. 거긴....

두 사람은 한데 엉켜 두 둥실 떠오르기 시작한다. 소란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며 탐닉한 나는 이내 녀석을 엎드리게 해놓고 뒤쪽에서부터 삽입을 시작한다.

- 하아...하악...하앙....

내가 봐도 내 물건은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데 저게 다 들어갈까 싶었다. 그러나 작디 작은 소란의 엉덩이 사이로 푹 파묻힌 자지는 그녀의 보지 깊숙히, 아주 문제 없이 푹 박혔다. 허리 운동을 시작하자 소란의 작은 몸이 활처럼 휘어지며 등을 젖혀온다.

- 하악... 하앙....하아...하악... 선생님... 하악.... 기분이.....

팔을 뒤로 뻗은 소란의 양 손을 잡아 당기며 그대로 허리를 밀어붙인다. 사타구니가 엉덩이를 치받을 때마다 쩔꺼덕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참을 그렇게 박아대다가 어느 순간에는 녀석의 몸을 뒤집어 놓고 정상위로 박아 넣기 시작한다.

- 하악... 하악...선생님... 허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지는 폭발 직전이고 보지는 한없이 꿈틀거리며 약동하고 있다. '나'는 팔을 뻗는다. 소란의 가느다란 목을 두 손으로 쥔다. 애무를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내 눈에는 틀림없는 살의가 담긴다. 소란의 목을 서서히 조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란은 그런 것 아랑곳하지 않고 엉덩이와 허리를 씰룩거리며 더 깊은 삽입을 요구하는 몸짓을 해온다.

- 하악... 하악...선생님... 허어.... 선생님....하악.....

그녀의 신음소리에 내가 답한다.

- 미안하다.

소란이 답한다. 

- 소희... 수혁이... 수민이.....보고 싶어요....

나는 답한다.

- 미안하다.

소란이 다시 말한다.

- 우리 너무 힘들었죠?

나는 답한다.

- 미안하다.

소란이 활짝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는다. 그 아이가 웃는 것처럼 나도 웃었고, 그와 동시에 그 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내가 그랬다. 저 비극은 내가 초래한 것이다. 그것을 바로 볼 자신이 없어 외면하고 내가 아닌 척하고 현실을 외면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방 안은 어두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움직였다.

선배님! 깨셨는교?

익숙한 사투리. 그래. 저건 마리의 목소리.

부...불을 켜줘.

 잠시만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서 환한 빛이 쏟아진다. 갑작스러운 명암 차에 눈을 찌푸렸다. 가늘게 뜨고 바라본 시선의 끝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가득한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현실인가. 그런가. 정말인가. 알 수 없다. 도무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 수 없다.

꿈 꿨어예?

 어? 어......

 허이구야. 이 땀 좀 보소. 참말 괜찮아예?

 아아... 괜찮아. 그냥... 그냥......생각이 나버렸어.....모든 생각이 다.... 한꺼번에.....

마리가 건네준 물컵을 단숨에 비워냈다. 타는 듯한 갈증도 갈증이지만 배와 머리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예린. 좀 좋게 설득해서 데리고 나갈 것이지, 암만 급해도 그렇게 실력 행사로 나오다니. 하아. 무섭다, 무서워.

뭔 생각을 그리 해예?

 그...그런 게 있어.

그제서야 사방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은은한 파스텔톤의 벽지와 천장이 둘러싸고 있는 이 곳은 일반 가정집처럼 보였다. 누워있는 자리도 꽤 널찍한 침대였고 가구라던가 인테리어도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이었다. 내 팔에 꽂힌 링거만 아니라면 무척 평화스러워 보이는 풍경이었다.

여긴, 어디야?

 양산이라꼬예. 저희 별장인데예.... 쪼까 사정이 있어가 이리로 모셔왔슴다.

 양산? 그게 어딘데?

 부산 바로 윗동네입니더.

기가 막혔다. 내가 눈을 감은 게 서울 한복판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부산 근처라고? 뻗어있는 사람을 데리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체 내가 정신을 잃고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따지고 싶은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소란이는? 걔는 어디있어?

그러자 마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을 보면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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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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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어요? 정말로?

 문제 없습니다. 이 정도는....

예린은 허벅지에 올려둔 재킷을 똑바로 했다. 평범한 동작이지만 사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바텐더의 약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여파가 오래 갔다. 몸에서 약이 돌 때, 그녀는 자기 자신의 그정도의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난생 처음 알았다. 아직 남자를 겪어 보지 못한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있는 남자, 한석에 대해 미칠듯한 욕정을 느꼈던 것이다. 극단적인 방법과 육체의 고통을 감내하며 그 마음을 일시적으로 간신히 억누르는데 성공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임시처방이었다. 그녀는 지금도 다리 사이에 일어나는 몸의 변화에 신경 쓰느라 사실 옆에 앉아 있는 리사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계속해서 은근히 젖어오는 다리 사이의 낯선 느낌에 비하면 자상으로 욱씬거리는 허벅지는 차라리 양반이었다. 지금도 불쑥불쑥 치밀고 올라오는 욕망은 그녀로 하여금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나... 사무실, 모두 연락이 되질 않아요. 송 부장의 행동이 생각보다 빨랐던 모양이에요.

 .....으음....그렇습니까....?

 다들 고생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한 번 더 고생 좀 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문제... 없습니다.

예린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버스 뒷자리를 살핀다. 그녀는 지금 45인승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검은 옷 일색의 사내들이 뒤로 주욱 앉아있다. 동생들의 상태를 가늠해보고 예린은 속으로 혀를 찼다. 리사의 질문에 문제없다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손실이 심각했다.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짭새들이 생각보다 빨리 들이닥치더군요. 분명 그만한 인원이면 긴급 출동이라기 보단 어디선가 대기하고 있던 인원임에 틀림없어요. 그 교회를 주시하고 있던 꼰대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덕분에...... 교회에서 빠져 나올 때 애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단순 폭행으로 잡혀가면 상관없지만... 조직간 항쟁으로 비쳐지면 곤란한데....

리사는 어두운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교회에 진입을 시도할 때, 곧 경찰이 출동하리란 것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대형교회에 버스 네 대 분량의 인원이 쳐들어 갔으니 어떤식으로든 제재가 들어오리란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돌입에 앞서 그녀가 추정하기에 자신들이 교회 내에서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 데리고 나올 정도의 시간은 충분하리라 보았다. 교회에 배치된 주먹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제압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도들의 저항은 예상보다 격렬했고 예린이 한석을 찾아내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찰의 출동이 생각보다 훨씬 빨랐으며 그 수도 일반적인 상황보다 훨씬 많았다. 그 교회를 쳐들어갈 생각은 리사만 하고 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원래 계획은 신속하게 치고 빠져나와 또 다른 적이 기다리고 있을 부산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 계획이 늦어지고 또한 틀어지고 있다. 경찰에 의해 체포된 조직원 다수의 손실, 에이스 예린의 부상도 그렇고 실신한 채로 예린의 어깨에 실려온 한석이 더욱 그러하다. 한석의 모습을 보는 순간 리사는 할 말을 잃었지만 그가 어쩌다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예린은 한사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리사는 더 이상 추궁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한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의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볼 뿐이었다.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는 부하들을 이끌고 부산으로 떠나기 직전 자신의 차를 마리에게 내어주며 한석을 데리고 양산에 가 있으라고 이야기했다. 

언니야는 우짤라고?

 난 부산에서 할 일이 있어. 닥터 윤에게 연락해둘테니까 오빠를 부탁해.

그러나 마리는 대답 대신 리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왜 그래?

 닌 내한테 할 말은 읍나?

마리의 뜬금없는 질문에 리사는 조금 멈칫했지만 이내 평정을 가장하고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아니다. 아니면 됐구마. 일 퍼뜩 처리하고 별장으로 온나. 뒀다 얘기하구로.

 그래.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리사는 마리를 먼저 출발하게 했다. 송 부장이 자신의 뒤를 밟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자신이 한석을 위해 이만한 인원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 물론 명목상은 바텐더를 잡겠다고 나선 일이긴 하나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리사 본인조차 믿지 않을 소리이긴 했다. - 그는 틀림없이 한석을 노리고도 남을 인물이다. 이번 기회에 송 부장을 완전히 축출하고 조직을 조용하게 만든 다음, 반드시 한석을 데리고 부산으로 가리라 마음 먹었다.

'그리고 .... 꼭 이야기 해야지....'

그녀는 가만히 손을 뻗어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한석과 보낸 단 하루의 밤이 지난 지 이제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뿐이다. 늘 같은 시기에 마리와 함께 월경을 맞이하던 리사였지만 예정대로 시작된 마리와 달리 리사는 지난 번을 걸렀다. 그녀의 생리가 꽤 규칙적인 편이라고는 하나 어쩌다 한 번 걸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리사가 느끼는 감정은 그저 한 번 건너뛴 정도의 느낌이 아니었다. 방금 전, 마리의 뜬금없는 질문도 어찌 보면 둔감하기 짝이 없는 마리조차 뭔가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연락이 왔습니다. 녹산공단 외곽에 있다고 하는 군요.

옆자리의 예린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사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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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아이를 그냥 두고 왔단 말야?

갑자기 큰 목소리를 내려니 말 끝이 갈라진다. 목이 텁텁하다.

그럼 우짭니까. 예린 언니 말로는 거동을 못 해가 호흡기 없으면 애 옮기도 몬한다 카던데예.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으윽....

화를 버럭 내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그런 격한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켜 세워 침대에 기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고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애써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리자니 마리가 나를 제지한다. 그리고 어떤 목소리도 거들었다.

저기... 일어나시면.... 안 되는데요....

벌새 울음소리, 아니, 벌새는 우는 게 아니고 날개짓으로 소리를 낸다고 했던가. 암튼 그런 소리라고 착각할만큼 아주 작고 여리여리한 소리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라보니 아주 쪼끄만 소녀가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가 인상적인, 이제 겨우 열 몇살 되었을까 싶을 정도의 아이였다. 얘는 또 누구지, 싶어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더니 마리 뒤로 후다닥 숨는다. 아니, 그게 숨는다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또 고개를 내밀어 날 보다가 다시 또 숨는다. 숨바꼭질 놀이라도 하자는 겐가? 영문을 몰라 마리에게 물어본다.

저 애는 또 누구야?

 저 애 아니에요!

마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마리의 등 뒤에서 볼 멘 소리가 터져나온다. 아니, 그런 소리를 하려면 좀 나와서 하든가.... 몸은 나서질 못 하고 머리만 삐죽 내민 채, 그 아이는... 아니, 본인이 애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애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로 스물 여섯 살이고.....의학박사이고..... 또.......

주저주저하며 무언가 말하긴 하는데 말하는 투만 놓고 보자면 꼭 요만한 아이가, 너는 아빠하고, 나는 엄마하고, 넌 애기하고, 자, 우리 이제 소꿉장난 시작하자.라는 투라서 기도 안 찼다. 아무리 들어도 신뢰감 제로인 저 소리에 내가 어이없어 하자 마리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기는 윤가희 언니라고 하는데예... 저희 집에서 후원받아가 공부하시던 분이라예. 겉은 마, 이래 보여도 사실은 박사입니더. 머리도 원체 좋아가 월반도 수시로 하구, 막... 참말루예.

꼬마 신동, 뭐 그런 건가? 아니. 본인 주장에 의거하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꼬마는 아니지. 아니, 근데 겉모습만 보자면....

.......유진이보다도 어려보이는데?

 긍까예. 언니가 지 나이로 보일 때가 되믄 롯데가 우승 먹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입니더.

비유가 어째 좀....? 고개를 갸웃한다.

난 야구 안 보는데, 롯데가 야구 되게 못 하나봐?

 하아. 선배님은예, 그런 소리 부산에서 하면 절대루 안됩니더. 알았지예? 사단 납니다. 올해도 마, 아주 죽쓰고 있는데....

 그러니?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았다. 그러나 야구 이야기와는 별개로 가희라는 아이, 아니, 아이 아니라고 했지. 암튼 그녀는 꼼지락거리면서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저...저기.. 피 뽑으셔야 하는데요...?

 뽑으세요.

 가...감사합니다.

그녀는 허리까지 꾸벅 하며 인사를 하고는 내 팔을 고무줄로 묶고 주사기를 가져다 댔다. 피를 뽑게 해주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다니. 대체 이유가 뭘까. 그녀에게 팔을 맡기면서 하도 어리게 생긴 걸로 보아 좀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그녀의 손놀림이나 처치는 완벽했다. 능숙하게 혈관을 찾고 바늘을 찔러 내 피를 주사기에 담는다. 따끔하고 얼얼한 그 느낌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그 바텐더라는 놈도 그랬지만, 제 피는 어디다 쓰시게요?

 바텐더를 직접 만나셨어요? 바텐더가 한석 씨 피를 뽑아갔다구요?

주사기를 가늠하던 가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되물었다. 안 그래도 동안인 얼굴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 더 동안이 된다.

만난 정도가 아니라, 그 자식이 먹인 약 때문에.... 으음. 암튼, 좀 그랬어요.

괴로운 기억이다. 고개를 떨쳐낸다. 그러자 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리사 씨가 날 불렀구나....

혼자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침대 옆에 놓인 앰플에 내 피를 나누어 담는다. 그리고 가희는 마리에게 뭔가 귓속말을 하고는 방을 나섰다. 그녀가 나간 다음 마리에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몰래 해?

그저 아무 생각없이 물어봤을 뿐인데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그...긍까예... 뭐, 그런 게 있심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려본다.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온다. 도저히 앉아있을 기력도 없다. 다시 침대에 드러눕자 마리가 의자를 끌어다 침대에 바짝 다가앉는다.

많이 안 좋아예?

 모르겠어. 계속 빙글빙글하고... 제정신도 아니고... 기억도 뒤죽박죽이고.... 하아. 뭣보다도.... 소란이 걔는....

 예린 언니가 부산 일 끝나는 대로 해결해 주겠다고 했어예. 쫌만 기달려 달라꼬....

 나한테도 그런 소리는 했어. 그렇지만... 하아...

아무것도 못 하고 드러누워 있는 내 자신이 서글펐다. 차오르는 울분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야 예린의 강제 구출에 의해 이런 편안한 곳에 드러누워 간호를 받고 있다지만 소란이는 그 지옥같은 교회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의식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 아이에게 올바르고 꼼꼼한 처치를 해줄 사람이 과연 그곳에 있을 것인가. 예린이 끌고 온 사람들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 분명한 그곳에서 그 작디 작은 아이를 신경 쓸 사람이 정말 있을 것인가. 생각만으로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다. 머리 속이 혼란스럽다. 그리고 그 와중에 드는 하나의 의문은... 일단 풀고 가야 겠다.

마리야.

 야.

 하나 묻고 싶은데... 답해 줄 수 있어?

 뭔데예?

마른 침을 삼켰다. 전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건 처음이라 자못 긴장되었다. 그래도 내 궁금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너희 집..... 그러니까 리사나 예린이나....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지?

 그기야... 그건.....

마리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주저했다.

조폭이나 뭐... 그런 거야?

 ......마... 머... 그렇지예. 이미 알고 계셨네예....저희는 그냥 단체생활이라고 표현합니다만....

 하아. 설마설마 하고 있었는데....

검은 옷의 예린이 한번씩 풀풀 뿜어내는 귀기 어린 살기, 그리고 그녀에게 지시를 내리는 리사의 카리스마, 이번 교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소요사태를 볼 때 리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 전부터 어느 정도 면모는 보여주고 있었지만 말이다.

- 굳이 설명하자면 참 많은 사람들을 대하고 또 그 사람들 사이를 조율해야 하는 일이에요.

.....라고 말하던 리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것이 당연히 조직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야 하는데... 나도 참 멍청하다. 물론 내심 짐작이라든가 추정은 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리사의 활짝 웃는 표정이나 기품 있는 태도에서 그런 예측을 많이 상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리사는 그런 이야기도 했었다. 

- 제 원래 계획은 오빠가 제게 푹 빠져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다음에, 그 다음에야 제가 어떤 사람인지 고백하려고 했었거든요. 

자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고백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푹 빠지게 만든다는 계획까지 세운 리사. 어찌보면 참 얄밉고 어처구니 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그녀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또 그럴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게다가 그녀는 나를 구하기 위해 조직을 동원하여 서울에서 그 난리를 피우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소란은 구출하지 못하고 나만 이렇게 빠져나와서 입맛이 쓰긴 했지만 그렇다고 리사를 비난하고 싶진 않았다. 리사는 최선을 다했고 예린은 예린 나름대로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을 위해 최선을 다한 셈이다. 비록 그 방법이 좀 거칠어서 내가 요 모양 요 꼴을 하고 드러누워 있지만 말이다.

실망했어예....?

자기 잘못도 아닌데 주눅이 들어있는 마리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팔을 뻗어 녀석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화들짝 놀라는 마리. 그러나 손을 빼내진 않았다. 사람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아냐. 실망이라니. 그냥 좀 특이한 직업이라 놀랐을 뿐이야.

 특이한.... 직업이예?

 응.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잖아.

그제서야 마리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예린 씨가 약속했다고 했지? 소란이를 반드시 구해오겠다고....

 하모요.

 그래. 그럼... 일단은 믿고 기다리자.

아까부터 덮쳐오던 피로감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한게 꼭 술마신 것 같은 기분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밀려들어온다. 거기에 수마까지 얹어진다.

불을 꺼줘... 마리야. 난 좀 잘게....

 야.

불이 꺼졌다. 눈을 감아서 깜깜해진 건지, 아니면 불을 꺼서 깜깜해진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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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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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예린은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녀의 성격상, 대개 한 번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녹산공단에 송 부장 일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쳐들어간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미리 아버님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들어간 것이 문제였을까. 잡혀서 매달린 아버님의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 동요한 부하들을 제때 추스리지 못한 것이 문제였을까. 평소 같으면 1호차에 그냥 앉아 있었을 리사가 함께 나와 현장에 나온 것이 문제였을까. 도무지 뭐가 첫번째 문제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무거운 발걸음과 거친 숨이 그녀를 더욱 괴롭게 한다.

사실 생각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리사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고 그에 따른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며칠 전, 서울행을 결정할 때부터 리사는 그녀 특유의 날카로운 지시를 잘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예린은 은연중에 그걸 느끼고 있으면서도 애써 불안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잘 되겠지... 그런 믿음이 있었다. 예린에게 있어 리사를 믿는다는 건 지구가 돌고 있다걸 믿는다는 것과 동등할 정도다.

지금도 그녀는 리사의 지시가 필요했다. 지금 이대로 도망치면 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조직의 분파로 이동해서 재기를 꾀해야 하는 건지. 예린으로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등에 업힌 리사가 자꾸 흘러내리려는 것을 추켜올린다. 팔로 자신의 목을 단단히 감으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 정도 힘을 내지 못할 정도인가.... 끈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축 늘어진 리사의 무게가 예린을 짓누른다.

아가씨....아가씨!!!

덜컥하는 마음에 리사를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예린은 주변을 둘러보고 낡은 문 하나를 발견한다. 지은지 십년은 넘은 것 같은 쓰지 않은 폐창고였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바닥에 리사를 눕힌다. 어깨를 짚고 흔든다.

아가씨....리사! 정신 차려!

리사의 등에 꽂혔던 칼은 이미 제거했다. 지혈도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완벽하진 않아도 그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응급조치는 다 취했다. 태호를 위시한 동생들이 몸을 던져 길을 뚫었고 예린은 리사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삼고 그 지옥 같은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리사의 원피스는 빨갛게 물든지 오래였고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리사야! 리사야... 잠들면 안 돼!

맥박은 희미하지만, 아직 있었다. 아직 있다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예린은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이미 그녀는 리사를 죽어가는 사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내 생각이 틀렸어. 내 생각이 틀렸다고 말해, 리사. 어서.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끄흐흑.....

리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신도 모르게 울고 만다. 가슴을 내리치고 뺨을 때려도 리사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직 있다고 생각했던 맥박도 희미해지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이건 현실이 아냐. 이런 건 전혀 현실이 아냐. 실감이 나질 않아. 이럴 리는 없어. 울고 있는 예린의 귀에 아주 작디작은 소리가 들렸다.

...어..언니... 울어요?

 리사!

리사의 손이 예린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작고 얇은 손이지만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에 전 조직이 움직이곤 했다. 그러나 그 조직은 이제 분해되어 궤멸했고 남은 조직의 파편은 비수가 되어 그녀를 쫓고 있었다.

여...역시...언니는....선글라스를.... 안 쓰는 게.... 좋아....

선글라스를 언제 떨어뜨렸을까. 기억 조차 나질 않는다.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리사의 손, 그 힘없는 움직임에 예린은 울컥해졌다.

리사야. 말하지마. 힘 빼지 말라고!

 파란 눈이.... 어때서... 예쁘잖아.... 난 처음 봤을 때... 인형인 줄.....

 리사야.. 제발...

예린은 리사의 손을 꼭 쥐었다. 손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리사는 살짝 떴던 눈을 도로 감으며 조용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리 앞으로... 숨겨놓은... 재산은.... 부산은행에..... 그리고 아빠 명의로 된... 땅은.... 화순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빨리 양산 가야지. 한석 씨가 너 기다리잖아. 눈 떠!

 아아.. 한석 오빠한테는... 정말....말하고....

 그래, 직접 가서 말해. 얼굴 보고 말하라고!

예린은 울먹이며 다그쳐보지만 리사의 태도는 완강했다.

하아.. 하하. 언니.....왜...이래요.. 선수끼리.... 나... 알아요... 정말... 아쉽고... 아쉬운데.... 여기까지인가봐.....

 리사야. 제발....

 마리가... 걱정돼.... 그 아이도... 이걸... 느끼고... 있을 거... 아냐.... 어떡하지... 미안해서....

 리사야....

리사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언니... 내 말 잘 듣죠...? 나.. 여기서 잠깐.... 잘 테니까.... 최대한... 빨리... 양산으로.....오빠랑.... 마리 데리고.... 숨어요.... 아무도 못 찾을 곳으로.... 송 부장이.....

 일어나! 나랑 같이 가자. 일어나라고!

 언니.. 내 말 잘 듣잖아요. 제발요....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부디.. 오빠에게....내가... 사실은.....오빠의.......

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예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의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렸다. 한 두 놈이 아니었다. 예린은 혀를 찼다. 아무리 바빠도 입구를 숨길 생각을 못 하다니. 정말이지.. 자긴 아무 것도 못할 년이다. 리사 없이는... 그러니 리사가 없으면 안 돼.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리사의 손을 놓고 벌떡 일어났다. 잠깐 이 손을 놓겠지만, 다시 잡을 것이다.

여기 있.....으악!

창고 문으로 들어서던 한 놈은 예린이 휘두른 단도에 목을 베였다.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 앞 사람의 비극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뒤에 있는 놈의 눈깔에도 칼날을 꽂는다.

끄아아아아악!!!

비록 몸상태가 엉망이긴 하지만 예린의 육식동물 같은 움직임은 전혀 그 예리함이 바래지 않았다. 리사를 창고 가운데 잘 보이는 곳에 눕혀놓고 문 바로 옆 공간에 몸을 납작 숙이고 있던 그녀는 아무런 대비 없이 창고로 들어서려던 두 놈을 그렇게 순식간에 해치웠다. 

끄악.. .내 눈!! 내 눈!!! 으아아악!!

목을 베인 놈은 절명했지만 눈을 찔린 놈은 그렇지 않았다. 일부러 노리고 했다. 패닉에 빠진 놈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방향을 못 찾고 허우적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상대편은 함부로 이 창고에 들어올 생각을 못 하게 되었다. 예린은 밖에 있는 적들이 주저하는 기색을 확인하고는 재빠르게 리사에게 돌아가 그녀를 들쳐 업었다. 자기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으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건만 리사는 예린의 바람대로 팔을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미 숨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예린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뒷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저쪽이다! 쫓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예린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공단을 끼고 길다랗게 늘어서 있는 콘크리트 제방을 향해 뛴다. 이제 막 시작된 새벽의 여명을 받아 번쩍이고 있는 서낙동강의 물길이 그녀의 앞을 막는다. 그러나 그녀는 기세를 전혀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사람 하나를 엎고 있음에도 그녀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뒤에 들려오는 욕설과 함성보다도 온 몸의 근육 하나하나가, 세포 하나하나가 내지르는 비명이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땅이 끝난다. 그 끝을 박차고 예린은 뛰어올랐다. 검푸른 물길이 두 여자를 삼켰다. 솟구쳐 오른 물보라가 두 사람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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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다. 요새 들어 꿈을 자주 꾸게 된다. 바텐더의 약을 먹은 후유증인가 싶었다. 꿈 속에서 리사가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한 여자 아이 둘을 데리고 있었는데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려는데 리사는 그대로 멀어졌다. 그리고 내 귀에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리?

어깨가 축축하다. 여기가 귀곡산장도 아니고... 마리의 서글픈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바라보니 마리가 내 어깨에 얼굴을 대고 펑펑 울고 있었다. 이 녀석이 침대에 대체 언제 기어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렇게 서글프게 우는 건 처음 본다. 늘 밝고 명랑하던 녀석이 이렇게 울고 있으니 더 처연한 느낌이다. 마리를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마리야, 왜 그래?

한참을 어르고 달래도 쉬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라가 망한 구한말 백성들이 이렇게 울었을까 싶다. 문가에 인기척이 느껴져 쳐다보니 그 윤가희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의사 꼬맹이 아가씨가 서 있었다. 본인 입으로는 애 아니라고 빠득빠득 우기면 뭐하나. 입고 있는 토끼 모양 잠옷이나 들고 있는 인형은 대체 어쩔겨.... 그나저나 그녀에게까지 울음소리가 들려 잠에서 깬 모양이다. 비몽사몽한 채로 서 있는 그녀에게 입모양으로 괜찮다고 전해주고는 마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리는 정말 한참만에 겨우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어깨는 여전히 들썩거리고 있었고 끅끅거리느라 말을 제대로 하질 못 했다.

왜 그래? 슬픈 꿈이라도 꿨어?

마리의 눈동자가 날 향한다. 그러나 날 보고 있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공허한 눈빛이다. 박제된 동물에게 박혀있는 유리눈알 같은 투명한 느낌이다. 숨을 가다듬느라 마리의 대답은 한참만에 나왔다.

모...몰라예. 제가 와 우는지....

 뭐?

 모르겠다구예. 그냥 막... 가심이 먹먹하고..... 뭔가 허전하고....... 그러면서.....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귀신 울음 소리 같은 걸로 깨워놓고 한다는 소리가.... 거참. 입맛을 쓰게 다시던 나는 어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뭐랄까. 뒷골이 당기는 듯한 서늘한 느낌이 온 몸을 훑어 내리는 느낌이다.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아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 떠오른다. 방금 전 꿈에서 이 녀석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건 이별의 인사였다.

마리야. 얼른... 예린에게 전화 걸어. 빨리.

 이 새벽에예?

 어쨌든, 빨리!

마리가 자신이 울고 있는 이유를 모르는 것처럼, 나 역시 내가 왜 초조해하고 답답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선전화기를 가져와 번호를 누르고 있는 마리의 모습이 너무 느리고 답답해보여서 짜증이 났다. 

빨리 하라고!

 ....알았심니더. 소리는 지르지 마예.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번호를 다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다 댄 마리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몰라예. 통화권 이탈이라는 데예.

 혹시 꺼둔 거 아냐?

 글쎄예. 원래 언니들 일할 때는 핸드폰 끄기도 합니다만 통화권 이탈이라니.... 잘 모르겠네예.

아랫입술을 깨문다.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의 정체를 도무지 모르겠다. 온 정신이 날카롭게 있다보니 바깥에서 들리는 아주 사소한 소리 하나에 귀가 번쩍인다.

마리야. 밖에 무슨 소리가 났어. 얼른 나가봐.

 네? 잠시만예.

마리가 창문으로 다가가 커텐을 걷는 동안 팔에 꽂힌 바늘을 뽑았다. 바늘에 피가 맺히는 걸 보고 제대로 뽑은 게 맞나 싶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반대편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바늘이 꽂혔던 자리를 누르며 창가로 다가갔다. 마리가 고개를 저으며 나를 돌아본다.

아무 것도 없는데예?

 그런가...

시계를 본다. 이제 겨우 새벽 다섯 시.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 옷차림이 상당히 허술하다는 걸 알았다. 아래는 팬티 뿐이고 위에는 가슴을 풀어헤친 잠옷 차림이다. 마리는 얼굴을 붉히더니 기왕 일어났으니 아침을 차리겠다며 방을 먼저 나갔다. 옷을 찾아 입고 방 안을 초조하게 왔다갔다 하다가 이내 방을 나섰다. 복층으로 된 실내구조라서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부엌이 나타났다. 신문을 보고 있던 가희가 날 보고 벌떡 일어난다. 이 아이도, 아니, 아이가 아닌 이 아가씨도 참 일찍일찍 일어나는 구나....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 예.

분명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렇게 허리까지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국민학교 바른 생활은 제대로 공부한 게 맞는 거 같다. 그녀는 쭈볏거리며 슬금슬금 피하다가 마리 옆으로 도망갔다. 그녀는 신경쓰지 않고 거실로 나가 커다란 창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었다. 마리가 짓는 밥냄새가 구수하게 퍼질 때 쯤, 맞은 편 산에서 해가 떠올랐다. 찬란하게 뻗치는 햇살을 받아 이 별장 주변에 있는 수목들이 푸르름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꽤 깊은 산 속에 자리한 별장인가 보다.

식사하세요.

 아, 예.

어쩔 줄 몰라하며 내게 다가온 가희를 따라 식탁으로 갔다. 세 사람이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반찬과 찌개가 몹시 맛있어 보였지만 선뜻 손이 나가질 않았다. 간신히 한 숟갈 담아 입에 넣어도 모래를 씹는 것처럼 텁텁했다. 눈물 자국이 아직도 역력한 마리의 얼굴 역시 좋은 편이라 하기 힘들었고 가희는 부부싸움을 하고 난 집의 아이마냥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온 신경이 바깥에 쏠려있고 머리 속은 딴 생각 중이라 맛을 느낄 틈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밖에서 차소리가 들리자마자 숟가락을 내던지다시피 하고 뛰쳐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예린!

새벽의 찬 공기가 뺨을 때린다. 영업용 택시가 마당에 서 있었다. 운전석쪽 창문은 깨져있었고 운전석에는 예린이 앉아있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그녀의 맨 얼굴을 처음으로 본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마치 망부석처럼 핸들을 잡은 채 꼼짝도 하고 있지 않았다. 푸른 눈이 무시무시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리사야!

차로 달려가 조수석쪽 문을 왈칵 연다. 의자를 뒤로 젖혀 기대 누운 자세의 리사는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아.....아......

흠뻑 젖은 드레스의 군데군데 묻어 있는 피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창백한 안색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 그녀의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 이제 결코 품 안에 그녀를 안고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리사야.... 리사야.....

그녀의 차디찬 몸 위에 엎드려 운다. 내 눈물은 이리도 뜨거운 데 그녀의 몸은 정말로 차가웠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 다음 어떻게 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와 지난 일을 생각할 수 있는 정도로 안정이 되었을 때는, 그로부터 삼일이 지나서였다. 내일 아침에 예린의 주장대로 별장을 떠나기로 했다. 마지막 밤. 1층에 있는 욕실에 있는 대형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그 안에 드러누운다. 얼굴만 내밀고 김이 가득 서린 욕실 천장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내가 리사의 주검을 안고 울고 있는 동안 별장에서 나오던 마리는 언니와 내 모습을 보고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져 기절을 하고 말았다. 가희가 그녀를 치료하고 의식을 차리게 했지만 사실 치료랄 것도 없었다. 정신적으로 자신의 일부나 다름없는 대상을 잃은 그녀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예린이 리사의 시신을 염하기 전, 마리는 단 둘이 있게 해달라고 이야기했다. 안방에 리사를 눕혀놓고 마리를 뺀 모두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기 직전, 꼼짝도 하지 않고 자신의 언니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리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또 다른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나는 마리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약 두어 시간 후, 마리는 굳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예린이 방으로 들어가 리사를 씻기고 염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낯빛이 어두운 그녀는 자신이 해야할 일만 묵묵히 처리해나갔다. 예린과 뒷마당을 파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과묵했던 예린은 더더욱 말이 없어졌고 하루에 한 마디도 채 꺼내지 않았다. 마리 역시 아무 말도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나마 가희가 나서서 제사상 비슷하게나마 차려놓았다.

리사는 별장의 뒷마당, 볕이 잘 드는 곳에 묻어주었다. 관도 없이 평소 그녀가 좋아했다는 옷을 입혀, 덮고 자던 이불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높지 않은 봉분을 만들었지만 비석은 세우지 않았다. 가희가 차린 상을 앞에 두고 술을 따랐다. 소리 없이 우는 마리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우는 예린. 그리고 그저 말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주는 가희를 데리고 리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했다. 모두 한 잔씩 받아 봉분에 부었다. 아버지를 닮아 말술이었다는 그녀에게 이 정도 술이 성에 찰까 싶었지만.... 절차를 모두 마치고 일어서기 전, 난 어떤 생각이 들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술병을 가희에게 주고 한 잔 더 따라 달라고 했다. 

왜요?

나는 말없이 한 잔을 붓고 또 다음 잔을 청한다. 그것마저 붓고 일어났다.

모르겠어요. 그냥... 리사 말고도 더 잔을 받아야 애들이 있는 것 같아서....

지난 밤 꿈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가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모두들 별장으로 돌아가 그곳을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준비를 할 게 따로 없는 나는 1층 욕실에 물을 받아 놓고 욕조에 들어가 창 밖을 내다본다. 그곳에 그녀가 있다. 그렇게 리사는 우리 곁을 떠났고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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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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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는 아랫입술을 손등으로 훔쳤다. 터진 모양이다. 피가 느껴진다. 아랫입술을 입안에 넣고 쭉 빤다. 그리고 퉤하고 뱉었다. 바닥에 떨어진 침과 피의 혼합물을 보며 흥분을 가다듬었다. 소민이 그 자식이 비겁하게 각목만 들고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녀가 충분히 쉽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맨손으로는 좀 버거웠고 결과적으로 그녀 역시 얼굴이 성한 곳이 없게 되었다. 물론 결국에는 소민을 때려 눕혀 놓았다. 이제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못할테니 자신의 상처 쯤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성 클라라 고아원의 아이들에게는 오후 3시에 간식이 지급된다. 하루 세 끼 꼬박꼬박 나오는 식사가 결코 질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원래 먹고 돌아서면 배고픈 한창 때의 아이들이니 간식은 그들의 최대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몇 달 전 들어온 소민이라는 녀석은 감히 다른 아이들의 간식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한 사람당 하나씩 돌아가야 할 쿠키나 감자를 두 개씩 집어 가는 건 물론 남이 먹고 있는 것까지 뺏아가곤 했다. 열 두살 치고는 마치 고등학생처럼 덩치가 커다랗고 주먹도 큼직한 녀석이라 다들 당하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치가 제법 있는 터라 리나 같이 매서운 눈빛을 한 아이나 태호처럼 덩치가 제법 있는 애들의 것은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리나는 그런 소민을 상당히 고깝게 보고 있었고 매일 저녁, 여자애들이 몰려와 리나에게 하소연 하는 것을 하나하나 듣고 있었다. 언제 한번 녀석을 손봐주어야 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폭발한 것이다. 오늘은 후원회에서 온다고 하여 간식이 정말 풍족하게 나왔다. 큼지막한 사과도 반 개가 아니라 하나씩 지급되었고 초콜릿도 손톱만한 작은 게 아니라 손바닥만한 것이 나온 것이다. 수녀님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서 그것을 받아들고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이 놀이방으로 돌아온다. 손에 든 것을 보고 신나하며 끼리끼리 모여 먹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민이가 나타나 징수를 하기 시작했다. 남의 초콜릿을 반씩 뚝뚝 잘라가질 않나 뺏기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아이의 배를 발로 차기도 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악다구니 소리가 점점 커질 때 쯤, 리나는 손에 든 사과를 집어 던졌다. 돌팔매질에 일가견이 있는 그녀인지라 소민의 뒤통수를 맞히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난데없는 충격에 휘청거린 소민은 자세를 바로 잡고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어떤 새끼야!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리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소민은 상대가 리나라는 것을 알고 본능적으로 주춤했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고 방금 자신이 소리친 것도 있기에 꿀지 않은 척을 하며 한 번 더 소리쳤다.

왜 이딴 걸 던지고 난리야! 미쳤어?

그러자 리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I was wondering you're a pig or a man. Now, I know, you're a really pig. So I feed a pig with my apple. Those scraps from the meals will do for the pig.

다들 침묵했다. 자신을 모욕하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못 알아들은 소민은 혼자서 씩씩거렸다. 눈치 빠른 그는 리나가 자신을 욕하고 있다는 것을 대충 알아차렸지만 내용을 몰라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대답을 택했다.

야이, 눈깔 귀신아! 한국 땅에 왔으면 한국 말을 써! 씨발. 그 사탕 눈깔을 확 뽑아버릴까 보다!

리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녀가 밀항선을 타고 한국에 온지도 벌써 3년. 처음에는 듣는 것만 잘 했던 한국말도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영어를 잊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수녀님들에게 영어책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여 틈나는 대로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대학을 나왔다는 메노도라 수녀님과 따로 시간을 내어 프리토킹을 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소민을 엿먹이기 위해 일부러 영어로 말한 것이다.

Wow. That's amazing. That pig can talk like a human!

 이 년이 진짜!

참다 못한 소민이 육중한 몸을 쿵쾅거리며 이쪽으로 달려온다. 리나는 그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가 사정거리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때 옆에 있는 의자를 확 넘어뜨렸다. 갑자기 나타난 장애물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소민은 버둥거리며 자세가 무너졌고 그의 얼굴에 리나의 주먹이 꽂혔다.

크아아악!! 아얏!!!

코를 감싸쥐고 버둥거리는 소민. 그러나 리나는 결코 한 대만 때릴 생각으로 그를 이쪽으로 불러들인 게 아니었다. 리나의 양 주먹이 번갈아가며 소민의 옆구리와 턱을 후려친다. 마지막에는 다리를 번쩍 들어 고간을 냅다 차버린다.

으아아아아악!!

불알을 움켜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소민을 보면서 다들 고소해하고 있었다. 수녀님을 부르러 가는 아이도 없었다. 대신 리나를 보며 말없는 응원을 보낼 뿐이었다. 리나는 소민의 목을 밟은 채로 조용하게 말했다.

Hey, you. 임마. 너 앞으로도 애들 꺼 뺏아먹을 거야, 안 먹을 거야?

 커..헙..이.. 발 좀.....

리나는 발을 조금 느슨하게 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떼지는 않았다.

대답해.

 아...알았어....제발... 이것 좀....

리나는 그제서야 발을 내려놓았다. 소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한 번 노려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여자애들이 한 명씩 다가와 리나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자기 초콜릿을 나눠주는 아이도 있었지만 리나는 사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놀이방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각목을 든 소민이 나타난다.

너, 이 씨발년. 어디 한번 죽어봐라.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고 몇몇은 수녀님을 부르기 위해 달려나갔다. 각목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소민을 보고 리나도 내심 당황했지만 최대한 빠르게 몸을 움직여 그의 다리를 걸어본다. 그러나 각도가 좋지 않았다. 소민이 내리친 각목에 어깨를 맞고 만다. 한 쪽 어깨를 부여잡은 리나와 콧잔등이 시뻘건 소민이 이내 엉켜서 개싸움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거운 소민이 유리했다. 리나를 올라탄 소민이 주먹을 휘두르자 리나는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얼굴을 얻어맞았다. 

이 썅년아! 이 잡년이! 니네 나라나 돌아가! 이 씨발년아! 이 튀기 새끼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리나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녀는 상대가 주먹을 휘둘러도 눈을 잘 감지 않았다. 양아버지한테 얻어맞을 때마다 눈을 치켜 뜬다고 더 얻어맞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눈을 감는 게 싫었다. 눈을 감으면 자신이 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반드시 눈을 부릅 뜨고 기회를 노린다.

으윽!

소민의 공세가 느슨해진 틈에 간신히 허리와 다리의 반동으로 소민을 떨쳐내고 일어난다. 자세가 역전되자마자 발로 차버렸다. 이번에는 리나가 소민을 올라타고 흠씬 두들겨 주었다. 얼굴을 가리고 소나기 펀치를 막아보려는 소민의 방어를 무위로 돌리고 수녀님들의 제지에 의해 끌려나갈 때까지 소민을 마구 때려주었다.

원장 수녀님과 생활 수녀님의 잔소리를 한참 들은 다음, 반성실에 갇혔다. 네 평 남짓한 작은 방은 평상시에 원장 수녀님이 기도실로 쓰는 곳이지만 아이들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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