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생들 쪽으로 다가가 협상을 벌인다. 3대 3으로 반코트를 하던 녀석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각 팀에서 한 명씩 쉬겠단다. 나는 팔을 걷어붙인 팀으로 들어가고 예린은 안 걷어붙인 팀으로 들어갔다. 가위바위보로 선공을 정하고 30점 내기게임을 시작한다. 우리 팀의 선공이었다. 내 손에서 우리의 공격이 시작된다.
일단 천천히!
드리블을 유지한 채로 바깥에서부터 안쪽을 살핀다. 원래 있던 고등학생 녀석들끼리는 맨투맨 마크가 붙었다. 자기들끼리는 이미 전력을 파악하고 있겠지. 예린이 내 쪽으로 온다. 슛이야 방금 보았는데 수비 실력은 어떨까. 자랑이라면 자랑이겠지만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농구를 할 때에 과감한 돌파와 격렬한 몸싸움으로 이름을 날린 이 몸이다. 외곽으로 서서히 돌다가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다. 예린을 힐끔 살핀다. 안정적인 낮은 자세에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 모범적인 마크. 쉽게 파고 들기 어렵다. 게다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그녀의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 정확히 가늠하기도 어렵다. 일단 몸으로 밀어붙이고 안으로 도는 척을 하다가 바깥쪽에 있는 팀원에게 패스했다. 예린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 사이에 돌아들어가 빠르게 안쪽으로 파고든다.
여기!
높게 들어오는 패스. 점프해서 낚아채고 땅에 닿자마자 재차 점프하여 슛을 한다. 백보드를 맞고 들어간다.
한석 씨! 화이팅!
내 쪽을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외치며 응원하는 리사 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예린팀의 공격이 시작된다. 내 담당은 역시 예린. 드리블이 나쁘지 않다. 안쪽을 향해 무리하게 돌파하려고 하지도 않고 어느 정도 파고들다가 외곽으로 공을 돌린다. 한 명이 노마크가 되어서 그쪽에 신경이 팔린 순간 예린에게 공이 돌아갔고 순간적으로 내가 예린을 놓쳤다. 그녀가 가볍게 슛을 던진다. 역시나 클린샷. 게다가 3점 라인 바깥이다.
언니야! 화이팅!! 이기고 있데이!
이번에는 마리가 펄쩍펄쩍 뛰며 예린을 응원한다. 호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무래도 내 응원단은 리사이고 예린 응원 담당은 마리로 정해진 것 같다. 여자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불타오른다.
그 이후로 주로 에어리어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막으려는 예린의 마크, 외곽에서 기회를 잡아 슛을 던지려는 예린의 찬스 노리기와 그것을 막으려는 나의 움직임이 번갈아 펼쳐진다. 점수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예린이라고 무조건 3점만 노리는 건 아니었다. 자기 편에 볼 돌리는 것도 꽤나 정교했고 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와 레이업도 시도한다. 고등학생들에게 공을 돌리는 동안에도 예린과 나의 몸싸움은 치열했다. 특히나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할 때는 거의 등짝을 부비다시피 하여 뛰어올랐고 에어볼 다툼은 싸움을 방불케 했다. 점프슛을 막으려 들때는 공중에서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적도 적지 않다. 처음에는 예린이 여자라는 점 때문에 몸을 붙이는게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막상 게임이 격화되면서 붙어보니 이건 뭐 봐주고 자시고 할게 없었다. 키는 나보다 좀 작을지 몰라도 점프력이나 몰아붙이는 힘은 남자 그 이상이다. 치열하게 마크하지 않으면 절대 안되는 수준이었다.
후아...후아...후아....
가볍게 한 판 뛰려고 했었는데... 이게 어딜 봐서 대체 가볍게인지 모르겠다. 땀이 장난 아니게 흐른다. 등에 달라붙는 셔츠의 느낌이 꽤나 거추장스럽다. 아웃볼이 된 사이에 웃통을 벗어버렸다. 고등학생들 녀석들도 한 놈을 빼고는 다들 이미 웃통을 벗어버린 후다. 봄날씨치고는 햇살이 꽤나 뜨거웠다. 예린을 힐끔 쳐다본다. 물론 그녀도 자켓은 벗어놓은 터지만 그렇다고 안에 입은 드레스셔츠까지 벗지는 못 하겠지. 예린도 꽤나 땀이 날텐데 선글라스도 여전하다. 보고 있으니 내가 다 덥다.
꺄아- 한석 씨! 화이팅!
리사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손을 흔든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코트로 향한다. 제법 구경꾼까지 몇 명 있을 정도로 게임이 재미나게 흘러가고 있었다. 고등학생들도 꽤나 잘 해주고 있었고 무엇보다 예린과 나의 경쟁이 치열했다. 몸싸움에서는 내가 좀 더 낫고 슛 쪽에서는 예린이 앞서고 있었다.
다만 내가 웃통을 까고 나니 예린이 좀 당황하는 눈치다. 몸싸움에서 되도록이면 안 붙으려고 몸을 떨구는게 눈에 띄게 보인다. 왠지 치트를 쓰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시합은 시합이다. 손오공도 웃통까면 전투력이 올라가지 않았던가. 게다가 30점 내기로 했는데 우리쪽은 아직 4점이 남았고 저기는 3점슛 한번이면 끝날 점수다. 샤프 슈터가 있는 저쪽에서라면 단번에 끝내버릴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는 일단 이번 골을 무조건 넣고 다음 것을 막은 다음에 또 넣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
바깥쪽에서 날 부르는 녀석에게 볼을 돌리고 링 아래쪽을 향해 돌진한다. 왼쪽으로 주춤하다가 쏜살같이 오른쪽으로 턴해서 파고 들어간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 진로상에는 예린이 서 있었고 우리 두 사람은 그대로 충돌하고 말았다.
꺄!
으악!
내 어깨에 그녀 얼굴이 부딪힌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몸을 뒤로 뺀다. 그대로 뒤로 벌러덩 나자빠진다. 예린도 마찬가지 였다. 나와 반대방향으로 넘어지는 그녀가 보인다. 바닥에 그녀의 선글라스가 뒹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뒤로 넘어지던 예린은 그대로 백덤블링 하듯이 바닥에 손을 짚고 한 바퀴 돌아 몸을 세웠고 거기에다가 몸을 곧추 세우기도 전에 바닥의 선글라스를 낚아채어 얼굴에 썼다. 무...무슨 중국 기예단이냐! 변검술이냐!! 농구를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서는 박수를 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코트에 우뚝 서 있던 예린은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는지 손을 털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흥이 깨졌군요.
그러고 나서는 코트 밖으로 걸어나갔다. 어라, 아직 시합도 안 끝났는데! 그러나 바로 그 때, 리사가 스포츠 음료가 담긴 페트병을 가지고 오면서 모두에게 권했다.
다들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어요.
우리와 같이 게임을 뛴 고등학생들에게도 일일히 종이컵을 들려주고 음료를 따라주었다. 다들 감사해하며 감로수를 마시는 것 마냥 목을 축인다. 리사가 내게 다가오더니 음료를 따라주며 물었다.
저희 아직 갈 곳도 많이 남았는데 여기까지만 하시는 게 어때요, 한석 씨?
그...그럴까요?
리사의 말투는 조용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몸에 흐르던 땀이 식고 있었다. 옷을 챙겨입고 고등학생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결말이 흐지부지해졌지만 함께 뛰는 동안은 좋은 전우였고 또한 좋은 상대였다. 남은 음료수를 그들에게 안겨주고 돌아선다. 이미 저 쪽에는 마리와 예린이 나란히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향하는가 싶었다. 내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리사에게 조심스레 물어본다.
저.... 혹시 예린 씨 말인데요.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사가 살짝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한석 씨 겉으로 볼 때는 그냥 말라 보였는데 꽤나 근육질이던데요? 덕분에 좋은 구경 잘 했어요.
예? 아.... 예.....
이쯤되면 아무리 둔감쟁이 나라도 눈치를 채고 만다. 그녀는 예린의 선글라스에 대해 묻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게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감히 리사에게는 대들지 못 하겠다. 잠자코 따라간다. 차에 올라탄 우리가 이동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한사코 거절하는 나를 어르고 달래어 리사가 셔츠를, 마리가 바지를, 거기에다 예린까지 나서서 신발을 선물이라고 사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옷으로 바뀐 채로 백화점을 나섰다. 이거 너무 부담스러운데.... 리사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주냐고 물었더니 아까 옷이 좀 별루란다. 살짝 물어보았다.
아까 옷은 .... 그렇게나 별루 였나요?
리사가 잠시 고민하더니 웃으면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쁘지는 않았는데 너무 노티나보인다고나 할까요. 옛날식 정장이잖아요.
그...그랬나요?
정장에도 옛날식이니 요즘식이니 하는게 있는 건가. 패션의 길은 참 아리송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더블 데이트 아닌 더블에 더블 제곱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빌라 앞에 누군가 서 있는게 보였다. 눈에 익은 교복. 짤막한 키에 단정한 얼굴.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어라? 니가 여긴 웬일이냐?
.........그냥 지나가다가 들른 거에요. 아저씨 선물이나 줄까 하고.
지나가다가 들른 거 치고는 꽤나 오래 기다린 것처럼 보이는데... 오늘은 토요일이라 오전 수업만 했을 텐데 아직까지 교복을 입고 있다는 건 여태 집에도 안 가고 나를 기다렸다는 건가. 불현듯 선영의 경고 아닌 경고가 떠오른다.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유진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어머, 유진이구나. 그날 잘 들어갔니?
뒤따라오던 리사가 유진에게 아는 척을 했다. 유진은 리사 얼굴을 힐끔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한다. 그러나 뒤이어 오던 마리는 본 척도 않는다.
얼래? 니 오늘도 놀러왔네? 웬일이고?
.......이거나 받아요.
녀석은 마리의 말에 대답도 않고 나에게 종이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드니 신발상자 절반 정도 크기의 박스가 안에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나 간다음에 풀어봐요. 저 갈게요.
유진이는 그대로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가더니 훌쩍 가버렸다. 내가 어벙벙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내 등을 가볍게 민다. 돌아보니 리사였다. 그녀는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데려다주고 오세요. 여자애 혼자 보내면 안 되죠.
네? 네....
리사의 말은 뭐랄까. 강요하는 투도 아니고 명령하는 투도 아닌데 왠지 듣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그런 포스가 느껴진달까. 종이가방을 그녀에게 맡기고 몸을 돌려 뛰기 시작한다. 유진이가 간 방향으로 달려가보니 녀석의 뒷모습이 보인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따라붙어서 어깨를 짚었다.
또 걸어가려고?
까....깜짝이야. 왜 따라왔어요?
왜냐니? 데려다주려고 그러지.
쳇.
입을 삐죽 내민다.
뭐가 쳇이야? 쳇은. 고맙다고 하지 못할 망정.
고.맙.습.니다.참.으.로.
어쩐지 진심이 담긴, 그러니까 정말 고마워하는 마음말고 다른 방향으로의 진심이 많이 담긴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나한테 살짝 혀를 내민 것도 못 본 척하기로 했다.
택시 안 탈래?
됐어요. 걸어갈래요.
별로 가깝지도 않은데.....
그 때 걸어가보니 갈만하더라구요. 왜요? 저 빨리 들여보내고 돌아가서 아까 그 아줌마들이랑 또 놀려구요?
아줌마들 아닌데? 다들 미혼이야.
미혼이든 뭐든요. 그래봐야 아줌마지. 쳇. 그런 아줌마들이랑 시시덕거리고 놀다오기나 하고....
10대가 볼 때는 20대가 아줌마로 보이는 구나... 하긴 나만 해도 80년대 학번인 사람이 내 앞에 있다면 아저씨로밖에 안 보이겠지.
내가 언제 시시덕거렸다고...
아까 보니 딱 그렇던데요. 헤벌쭉~ 해가지고.
하아... 말을 말자.
이럴 때 보면 이 녀석 정말 나 좋아하는 거 맞나 싶다. 하나하나 트집 잡아 시비 못 걸어 안달인게 아주 그냥 고양이 쥐잡듯이 군다. 골목길이 끝나고 큰 길로 나왔다. 한참 말 없이 걸어가던 유진이가 다시 묻는다.
오늘... 뭐 했어요?
뭐하다니?
아침부터 나가가지고 하루 종일 뭐했냐구요.
뭐하긴. 남산 갔다가 대학로 갔다가 백화점 갔다가...
근데 뭔가 이상하다.
근데 내가 아침에 나갔는지 어떻게 알아?
대답이 없다.
너 말야 혹시....
그러자 유진이 내 말을 끊는다.
전화했었어요. 아침에.
왜?
생일 축하한다고 말할려구요.
그랬어? 음... 암튼 늦게 돌아와서 미안하다. 니가 기다릴 줄은 몰랐지.
기다린 거 아니라니까요.
그래, 그래. 아닌 걸로 치자.
자신은 결코 나를 기다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꼬맹이 녀석을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오늘은 자기 집에 들어오란 소릴 하지 않는다.......... 다행이긴 한데 왠지 좀 서운하기도 하다면 내가 너무 속보이려나?
돌아와 리사에게서 종이가방을 돌려받았다. 집에 가서 열어보니 예전에 내가 유진에게 사준 적이 있는 눈이 크고 이상하게 생긴 인형이랑 같은 종류의 인형이었다. 뭐냐, 이 녀석. 남자한테 뭐 이런 선물을 하는 거야. 일단 인형을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었다. 침대에 누워서 그걸 보고 있자니 좀 웃겼다.
다시 또 한 주가 시작되었다.
월요일에 문학 속의 성 조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정소희, 유현지라는 여자애들 둘이었는데 둘 다 화공과생이고 기숙사에 지낸다고 했다. 2학년들이라 마리가 언니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 이미 지난 주에 마리가 이들과 만나 이야기를 많이 나눈 터라 나는 그들이 정한 큰 틀에 이의없이 따르기로 했다. 조 이름도 미리 정해놨는데 이름이 무려 Harem Desire란다. 뭔 뜻이냐고 묻자 소희라는 애가 지금 우리 조의 상황이 남자 하나에 여자 셋이니 딱 남자들이 꿈꾸는 하렘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로 했단다. 노래 제목인 Harlem Desire말고 말이다. 뭔가 위험한 속성이 있는 애들 같다. 발표주제를 정하고 분담하여 자료를 모으기로 했다.
화요일에는 과외를 갔다. 선영을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버벅였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그 날의 차 안에서의 일은 모두 잊은 걸까? 그러나 수업이 끝나고 그녀의 집을 나서려는데 하고 싶으면 이야기 하세요.라고 하는 걸 봐서 내가 꿈을 꾼건 아닌 모양이다.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도 못 하고 나오고 말았다. 하아. 늘 가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자료를 정리한다. 유진이가 말했던 종업원을 가끔 훔쳐본다. 이렇게 훌륭한 가슴을 내가 놓치고 있었다니. 조금씩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대놓고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카페로 들어온 유진이에게 꼬집힘을 한 번 당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제법 아프다.
수요일에는 일찌감치 학교로 나가서 수업에 참석하는 거 말고는 계속 공부를 했다. 자격증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신청서를 받으러 갔던 과사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한 후배가 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마레기가 과순이에게 집적거리다가 진호 선배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나 어쨌다나. 진호 선배가 그렇게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인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거참, 신기하군. 암튼 그 덕분인지 마레기는 학교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참 잘 되었군.
목요일에는 과외를 갔다. 여전히 선영의 얼굴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이토록 무뚝뚝하고 마이 페이스인 표정의 여자에게 어떻게 하고 싶다라는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얌전하게 수업만 진행하고 나오려는데 일요일 약속에 늦지 말라고 당부한다. 알았다고 대답했다. 또 다시 카페로 가 있으려니 이번에는 유진이 혼자 오질 않았다. 그 누구더라, 세탁소 집 딸래미라던 소란이라는 애와 함께였다. 발표수업을 준비할 게 있다나. 과외 대신 녀석들의 숙제를 도와주어야 했다.
금요일에도 역시 일찌감치 학교로 가서 수업과 공부를 병행했다. 마리도 처음에는 심심하다고 투덜거렸는데 결국에는 얌전히 내 옆자리에서 책펴고 앉아서 자기도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얼마 후에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녀석을 두들겨 깨워야 하긴 했지만....
드디어 토요일이 되었다. 아침부터 마리가 쳐들어와 들들 볶는 사람에 늦잠도 못 자고 일어나야 했다. 앞집으로 가서 아침을 먹었다. 엄마가 다녀간 다음에 내게 일어난 변화는 다름 아닌 리사가 차려주는 아침식사였다. 내 식생활을 몹시 염려한 리사는 숟가락 하나만 더 놓는거라며 나를 기어이 아침식사에 참여시켰다. 처음에는 여자들만 사는 집에 들어가는 거고 아침부터 신세끼치는게 참으로 죄송스러웠지만 이제는 아주 적응이 잘 되어 늘 감사해하며 먹고 있다. 예전에는 아침 안 먹고 어떻게 다니나 몰랐을까 싶을 정도다.
어디로 간다고 하셨죠?
어디더라. 강원도 어디라고 하던데요. 가평인가.... 아마 무슨 강 근처라던데.
어머, 좋겠네요. 거긴 벌써 물놀이를 할 수 있나보죠?
천진하게 묻는 리사의 표정이 무척이나 해맑다.
물놀이라.... 아직은 좀 춥지 않을까요. 그래도 들어가는 녀석들은 있겠지만요.
추운데 왜요?
왜긴요. 벌칙이다 뭐다 하면서 팔다디 잡고서 던져 넣는 거죠. 휙~ 이렇게요.
어머, 재미있겠네요.
마리가 준비 완료를 알려와서 리사와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손 흔들어 배웅하는 리사를 뒤로 하고 마리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가니 제법 많은 녀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는 얼굴들에게서 인사를 받는다. 4학년이라고 안 껴줄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더욱 다행인건 마리가 꽤나 많은 녀석들이랑 친하게 인사를 나눈다는 점이다. 나 모르는 사이에 동기들이랑 제법 많이 어울렸던 모양이었다. 대절한 버스를 타고 출발한다.
모꼬지는 참으로 전형적으로 흘러갔다. 어디 무슨 단체에서 일괄적으로 모여서 MT 내용을 법으로 규정하는게 아닐까 싶다. 조를 정하고 게임을 하고 그러다가 몇명은 물에 던져넣고..... 나는 나이도 있고 해서 조별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3학년들이 진행하는 걸 구경만 했다. 그런 다음 밤늦게 술먹고 꿱꿱 거리는 녀석들을 들어다가 숙소에 던져놓는 일을 맡아했다. 어쩜 내가 몇년 전에 신입생으로 왔을 때랑 토씨 하나 안 변하고 똑같나 싶다.
마리는 자기 동기들이랑 무척이나 잘 놀고 있었다. 녀석이 나한테만 붙어다닌다고 걱정했던 건 기우인 모양이다. 그렇게 1박 2일의 엠티가 흘러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가볼 곳이 있다고 마리를 먼저 들여보내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슬아슬하게 약속시간에 늦지 않게 선영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전히 검은 옷의, 그러나 평소보다 한층 더 가라앉은 분위기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선영이 나를 맞이했다.
오셨네요. 그럼 같이 나가시죠.
예.
집을 나서면서 그녀가 내게 묻는다.
혹시 운전면허 있으신가요?
있습니다만....
잘 되었네요.
잘 되었다니.... 그게 무슨....? 자....잠깜! 으악! 차 몰고 나가는 일이었던가, 이게? 이럴 줄 알았으면 궁금한거고 나발이고 절대 안 오는 건데.... 다시 한번 저승의 문턱까지 내 몸을 배달하는게 아닐까 싶은 선영의 차에서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때늦은 후회를 해야만 했다. 시내에서도 그렇지만 외곽으로 나오고 나니 난폭운전은 더 심해졌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도착해서 내린 난 한참동안이나 꿱꿱 거려야만 했다. 멀미라니.... 대체 언제적에 해보고 하는 건지 감이 안 잡힌다.
잠시 기다리세요.
도착한 곳은 꽤나 한적한 동네였다. 선영은 길가에 있는 구멍가게로 들어가더니 꽃 한다발과 비닐봉지를 하나를 들고 온다. 얼핏 보니 아마도 소주인 듯 싶었다. 구멍가게에서 웬 꽃도 파는가 싶어서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그 동네는 다름 아닌 공동묘지 입구에 있는 동네였다. 안쪽으로 조금 걸어들어가니 묘지관리소가 보인다.
잠시만요.
선영은 관리소에 들어가더니 거기 있는 할아버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오더니 내게 손짓한다. 그녀를 따라 한참을 걸어올라간다. 늦은 오후에 출발한 터라 사방이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다. 선영은 아까부터 말 한마디 없는 터라 주변의 조용함이 더 스산하게 느껴진다. 한참만에 그녀가 멈춘 곳은 어떤 작은 묘지였다. 그녀는 묘지 옆에 놓인 항아리에 꽃을 꽂아두고 비닐봉지에서 종이컵과 소주를 꺼냈다. 상석 앞에 무릎 꿇고 앉더니 컵을 올려놓고 소주를 따른다. 가득.
엄마, 한 잔 받아.
물론 대답은 없었다. 낮은 소리의 바람만이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선영의 뒤에 서서 가만히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묘를 관찰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선영은 컵을 들더니 자신이 홀짝 마셔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 잔 따라서 묘에 붓는다.
오늘은 대신 운전해 줄 사람 있으니까 음주운전 안해. 걱정은 하지 마, 엄마.
다시 한 잔 따르더니 자신이 마시고 다음 잔을 또 붓는다. 그리고 또 한참을 웅크리고 앉아서 가만히 있는다. 산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빨리 어두워진다. 검은 옷의 선영은 어둠 속에 잠기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게 된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선영이 또 술을 따라마시고 붓는다는 걸 가늠할 뿐이다.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에 그녀가 숨죽여 울고 있다는 것만 추측할 따름이다.
해가 완전히 지고 달이 떠올라서야 그제서야 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살짝 비틀거리기에 얼른 부축한다. 소주 냄새가 확 난다. 이 여자는 무슨 깡소주 두 병을 물 마시듯이 마시는 걸까. 안주도 안 사오고 말야.
괜찮아요?
그럼요. 괜찮죠. 살아있으니까. 안 죽고 살아있으니까.
그저 상태를 물었을 뿐인데 뭔가 철학적인 대답이 돌아온다. 그녀를 부축한 채로 산을 내려왔다. 길이 고르지 않아 꽤나 걱정되었지만 달이 밝아서 그럭저럭 내려올 수 있었다. 내가 대체 전생에 뭔 죄를 지어서 이런 달밤에 공동묘지에서 술 취한 사람을 부축해서 걸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모르긴 몰라도 큰 죄일 것 같다. 힘들어 죽겠다.
관리소에 불이 켜있었다. 선영이 손짓하기에 그쪽으로 그녀를 부축한다. 그녀는 관리소 할아버지에게 만원짜리 한장을 내밀면서 말했다.
아저씨, 만약 그 인간 오면... 저한테 바로 전화 좀 주세요.
그려. 조심해서 내려가라구.
그 인간이라니. 대체 누굴까. 궁금증을 풀러와서는 새로운 궁금증만 더 쌓여간다. 간신히 차까지 그녀를 데려다 앉히고 내가 운전석에 앉았다. 1종 면허 딴지 꽤 되긴 했지만 시골에 있을 때 몰아보고 간만이라 좀 걱정되었는데 다행히도 오토였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한적한 국도를 달려가고 있노라니 선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매우 잘 들렸다.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선영의 오피스텔까지 운전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돌아보니 선영은 잠들어 있었다. 깨울까 하다가 하도 곤히 잠들어 있어 그대로 들쳐업고 방으로 올라간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문 앞까지 간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문을 열기 위해서라도 깨워야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귓가에 대고 선영이 속삭인다.
0213
뭐야. 이 여자 안 자고 있었잖아. 괜히 무겁게 업고 왔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알려준대로 번호를 눌러 문을 연다. 현관에서 내려놓으려는데 선영이 내 목을 끌어안고 바싹 달라붙는다. 등 뒤에 와닿는 풍만한 물체의 무게감이 새삼 느껴진다.
침대로.
내 몸 균형 잡는 일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간신히 선영을 떨어뜨리지 않고 침대까지 운반하는데 성공했다. 그녀를 침대에 놓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키스하세요.
청유형과 명령형의 중간 쯤. 어쩐지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선영의 표정 때문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저 여자라면 환장하는 남자라는 어리석은 짐승의 슬픈 숙명 때문이려나.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한다. 방금 전까지 혼자서 소주를 들이마시던 여자의 입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달콤한 맛이 난다. 혀가 엉키고 입술이 겹치고 타액이 교환된다. 나는 한잔도 마시지 않았건만 그녀의 입으로부터 넘겨온 느낌에 취한다. 몇 번이고 입맞춤을 나눈다. 수십번 혀를 섞는다.
벗겨요.
이번에도 반쯤 청유형. 반쯤 명령형. 마찬가지로 거부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겨낸다. 검은 색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끌러낸다. 프론트 후크로 채워져있던 검정색 레이스 가득한 브래지어를 풀어낸다. 뽀얗고 탄력넘치는 가슴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온다. 보기 좋은 윤곽을 자랑하는 살언덕의 끝에는 옅은 갈색의 유두가 꼿꼿하게 세워져 있다. 그녀의 협조를 얻어 검은색 면바지를 벗겨낸다.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검은색 리본이 앙증맞게 가운데 자리한 레이스 팬티가 나타난다. 얇은 끈으로 둘러진 그것을 벗길 때는 나도 모르게 숨이 거칠어졌다. 삽시간에 선영은 나체가 되었다. 알몸이 된 그녀 앞에서 나 역시 서둘러 알몸이 된다. 아직 시키지도 않았는데 침대에 올라가 그녀의 몸에 혀를 댄다.
하으윽......
침으로 젖은 혀가 매끄러운 살 위에서 춤을 춘다. 유두를 물고 흡입한다. 목덜미를 살짝 문다. 두 손은 혀가 미치지 못한 곳들을 주무른다. 얼음보다 차가운 그녀라고 생각해왔건만 속살은 뜨겁기 그지 없다. 목덜미와 귀 뒤를 핥을 때 선영은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온 몸 구석구석을 핥아나가는 동안 자신을 아낌없이 열어주었다. 늘 검은 옷에 감싸였던 그녀의 몸은 이제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오로지 나에게 열려있었다.
넣을께요.
손가락을 넣어 만져본 그녀의 다리 사이는 이미 충분히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자지가 너무 커져서 빨리 어딜 들어가고 싶다고 성화다. 내 속삼임에 선영은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부풀어 오를대로 오른 자지를 붙잡고 그녀의 다리 사이를 조준한다. 무성한 털이 숲을 이루고 있다. 내 목표는 그 안에서 자리잡고 있는 옹달샘. 미끄러지듯, 전혀 거칠 것 없이 그녀의 안으로 내가 들어간다. 뿌리까지 깊숙히 박아넣으며 선영의 거친 숨소리를 즐긴다.
하아아아악...... 흡.......
아랫입술을 깨물며 숨을 참는 그녀의 얼굴이 미치도록 사랑스럽다. 나지막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래쪽에서 내 물건을 사정없이 조여대는 보지 주인의 이름을.
선영 씨.....
몸을 밀어넣으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실눈을 뜨고 팔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무 딱딱하게 부르지 마요.
네?
편하게 불러보세요.
조금 부담스런 주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다. 편하게라... 그녀와 내가 편한 사이였던가. 물론 몸을 섞은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편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선영아....
선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들은 걸까 싶기도 하지만 아래쪽의 조임이 장난이 아니었다. 선영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좀 더 애틋하게 불려줘요.
이번에는 나도 주저하지 않는다,.
선영아....
오늘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뭐랄까. 의외였다고나 할까, 생소하다고 해야할까. 평상시에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그녀가 모친의 묘 앞에서 꼼짝도 안 하고 앉아있던 모습은, 그 뒷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내 마음 속 한켠에 잔잔한 파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사실 지난 번의 차에서의 일만해도 난 그저 편하게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을런지 모른다. 어차피 이 여자는 술집여자니까, 유진이라면 자기 몸까지 내어놓는 이상한 여자니까.... 그러나 지금 처연한 목소리로 자기를 불러달라고 하고 있는 그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가장 여자다웠다.
선영아... 선영아.......
살결의 마찰이 가져다주는 흥분을 만끽하며, 또한 평소에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이름을 마음껏 불러본다. 허리를 흔들며 몸을 부딪힌다. 치골과 치골이 미친듯이 충돌하며 쾌락을 이끌어 낸다. 자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정말 미칠듯한 흡입력의 동굴이었다. 내 자지를 조여댄다. 나를 빨아댄다.
선영아.... .... 흐으.....
박아줘, 자기야. 내 보지를.....
선영아! 흐윽.......
핏치를 점점 올린다. 피스토닝의 극한으로 치닫는다. 결코 눈을 뜨지 않는 선영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손가락이 입술에 닿자 그 붉은 입술이 살짝 벌려지더니 매끈하고 끈적한 혀가 나와 손가락을 핥는다. 빤다. 살짝 깨문다. 손가락을 넣을락 말락 하자 마치 보지에서 이뤄지고 있는 피스톤질처럼 거기서도 흡입을 해댄다. 허락한다면 이따 자지를 뽑아들고 이 붉은 입술에 다시 한번 박아넣고 싶다.
선영아... 선영아.... 나 지금....... 더 이상은.......
싸줘요..... 하악.... 괜찮아.... 싸요......
하악..!!
그 안으로 나를 쏘아낸다. 가득 끌어안고 거친 숨을 헐떡인다. 숨을 고르며 선영을 끌어안고 있으려니 선영이 손을 가만히 뻗어 내 등을 도닥여 주는게 느껴졌다. 얼마나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두 사람의 숨소리가 다소간 평온해졌을 무렵, 그녀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 수고했어요.
.....하아. 뭐랄까. 그녀 스스로의 위안에 내가 동원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까까지는 우울의 극한에 빠져있었던 듯한 그녀였는데 지금은 제법 목소리에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소주 두 병에, 그것도 묘와 나눠마신 것 정도로 취했을리 없었겠지만 그녀가 돌아오면서 보여준 모습은 정말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양기를 충분히 흡입해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경쾌하다고 할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내가 왜 검은 옷을 입는지 궁금하다고 했죠?
.......검은 옷이 아니라 왜 사납게 하고 다니는지였는데요.
그거나 이거나죠.
천장을 보며 누운 채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한 팔을 베고 나란히 누운 선영이 이야기를 천천히 꺼낸다.
남편 잘못 만나서 평생을 불행하게 보낸 우리 엄마가.... 고생만 하다가 병으로 돌아가신 게 꼭 3년 전이에요. 제 나름의 3년상을 치룬다고 생각했어요. 오늘로 탈상을 한 셈이죠.
3년상이요?
요새 그런거 하는 사람도 있던가. 설마 그래서 검은 옷이었나?
원래 탈상하기 전까지는 금욕도 해야 한다면서요? 그렇다고 제가 하는 일이..... 아예 안할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중간에 말을 잠시 흐렸다. 생략된 말이 어떤 것일지, 짐작은 간다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유미 언니에게 부탁해서 되도록이면 초이스를 안 받도록..... 얼굴을 굳히고 있었어요. 화장도 사납게 보이도록 했구요. 그게 이유였어요.
어처구니 없는 이유이긴 하지만 나름 합당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로써 내 궁금증은 풀렸다. 그렇지만 아까의 그 궁금함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인간이라니. 대체 누구일까? 그러나 선영은 오늘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얼굴을 굳히고 살다보니 어느 순간 제 마음까지 굳고 있더라구요. 그러고 싶진 않은데....
선영은 내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녀의 손이 내 가슴와 배를 어루만지는게 느껴졌다.
제가 원래부터 그렇게 딱딱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일부러 그러다보니 굳어버린 거죠.
선영 씨는 웃는 모습이 참 예뻐요. 처음 봤을 때는 좀 놀랐어요.
쿡 소리를 내며 내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웃는다. 얼굴을 보이는게 겸연쩍다는 듯이.
빈말이라도 고마워요.
빈말 아닌데....
아무튼, 오늘 고마웠어요. 한석 씨 아니었으면 또 혼자서 술 먹고 거기서 잠들었을지도 모를텐데.
묘지에서요?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엄마 옆인데.
예에.....
은근 무서운 여자다. 이 여자.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면서 시계를 올려다보니 시간이 꽤 늦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선영이 내 어깨를 가볍게 잡아당긴다. 돌아보니 그녀가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늦었는데 자고 가요.
괘...괜찮나요? 그래도?
그러자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조용히 대답한다.
한 번 더 해도 괜찮기도 해요.
가슴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은 어느새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말랑말랑해진 녀석이 다시 단단해지도록 돕고 있었다. 분명 그녀가 말하기를 내가 원할 때 그녀의 몸을 제공한다고 했었는데 어째 점점 거꾸로 되어가는 기분이다. 뭐, 이러지 저러니 해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나 역시 선영 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리고 다시 한 번의 행위를 하면서 이제 완전히 그녀와 말을 놓기로 합의했다. 도장은 아래다 찍었다.
선영과 그녀의 어머니 산소를 다녀오고 약 2주가 지났다. 그동안 그녀와 나 사이에는 변화가 생겼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아니, 산소를 다녀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이런 낮 시간에 그녀의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있을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내 아래쪽에서 알몸의 그녀가 열심히 내 물건을 빨고 있을 거라고는 꿈도 못 꾸었텐데 말이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목요일이라 오전 일찍 그녀의 집에 와서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왔다. 집으로 돌아와 한 차례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행위를 마치고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누워있다가 다시 시동을 걸러간 그녀의 머리를 바라본다.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내 배를 간지럽힌다.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그러고 보니 해야할 말이 있었다.
참, 나 다음 주부터는 과외 못 오는데....
선영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를 타고 올라온다. 입에서 떼기 전에 자지를 한번 쭈욱 훑어주는 맛이 아주 감칠나다.
나 다음 주부터 교생실습 나가거든. 여태까지는 화, 목에 낮 수업이 없으니까 너 과외하러 왔던 건데 실습중에는 그게 안 되거든.
흐음. 나야 뭐 알아서 공부하면 되겠지만 자긴 괜찬겠어?
뭐가?
이 녀석이 안 아쉬워 하겠냐고.
내 배 위에 올라탄 채로 그녀는 손을 뒤로 돌려 내 자지를 잡고 살짝 흔든다. 아프다고 투정을 부렸더니 살짝 웃으면서 뒤로 물러나 자신의 안쪽으로 집어넣는다. 나지막한 신음을 토해내는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빙긋 웃게 된다.
듣고보니 그럴지도....
흐음. 그럼 지금 많이 할까?
그럴까?
그 날 이후, 뭐랄까. 선영은 사람이 좀 변했다. 우선 검은 옷을 벗어던지고 밝은 색의 옷을 입기 시작했으며 말수도 많아졌다. 나와의 과외가 끝난 후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관계를 가졌다. 오늘처럼 과외 시간보다 좀 이르게 와서 그녀랑 점심을 같이 먹기도 하고 그녀가 일을 쉬는 날은 그녀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단, 그녀가 밥을 하지는 않고 같이 나가서 사 먹었다. 집에서는 밥 안 해먹냐고 한번 이야기를 꺼 냈더니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오래 살고 싶으면 자기가 한 밥은 먹지 말란다. 그... 그 정도입니까? 어쩐지 그 때 유진이가 아파서 드러누워 있을 때도 직접 죽을 만들지 않고 나가서 사오더라니....
다시 한번 사정을 마친 후, 그녀에게 팔 하나를 내주고 가만히 누워있는다. 연이은 사정이 나를 몹시도 나른하게 만들었다. 아직 유진이네 가려면 시간이 남아있었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선영이 묻는다.
유진이한테도 교생실습 이야기 했어?
아니, 아직.
왜?
걔네 학교로 나가는 거라서 말야. 좀 놀래켜 줄려고.
그런다고 유진이가 놀라려나?
......뭐, 워낙 포커페이스긴 한데 그러니까 한번 골려볼려구.
유진이하고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요즘 들어서는 과외를 하면서 혼자만 문제 푸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어려운 문제에 대해 물어보는 통에 나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해가야만 했다. 시계를 보고 있다가 슬슬 가봐야하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영이 문 앞까지 배웅한다. 신발을 신으며 묻는다.
오늘은 쉬는 날이야?
아니.
그래? 알았어.
나중에 전화할게.
응.
그녀와 가볍게 키스를 나누고 집을 나선다. 유진이네를 향해서 걸어가면서 선영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딱히 사귀거나 하는 사이가 아닌데도 우리의 행위는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그녀와 나는 대체 어떤 사이라고 해야 좋을까.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육체적이다.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감정의 교류가 빈약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친구도 연인도 아닌 묘한 이중의 계약관계. 하나는 성문화 되어있는 금전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진이를 두고 얽혀있는 육체적 관계이자 구두계약이다. 어느 것 하나 남에게 쉽게 드러낼 수도, 알릴 수도 없는 지극히 프라이빗한 관계다. 누구에게 상담할 수도 없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든다. 유진이네 도착하니 녀석이 먼저 와 있었다.
일찍 왔네?
아저씨가 늦게 온 거죠.
그런가?
전에는 제가 오기 전에 기다리더니 요새는 자꾸 늦네요?
그럴 일이 좀.... 있어.
대충 얼버무리면서 내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유진의 추궁은 끝나지 않았다.
그 중학생 과외, 지금도 하는 거죠?
.....그렇지, 뭐.
그 공부 못 하는 애 말이에요.
아니, 지금은 곧잘 해.
내가 중학생(?)을 옹호하는 듯한 말을 하자 유진이는 점점 골이 난 표정이 되었다.
걔는 아저씨 말 잘 들어요?
그럭저럭. 너보다야 잘 듣지.
혹시 가슴이 크다거나....
넌 맨날 생각하는게 왜 그 모냥이냐!
아아, 슬슬 지겹다. 지겨워.
예뻐요?
녀석은 지난 번에도 물어본 적 있었던 말을 또 묻는다.
그래, 이쁘다. 무진장 이뻐. 아주 예뻐 죽겠더라구.
.........
하도 귀찮게 묻길래 좀 귀찮아서 대충 이렇게 대답했더니 유진이 녀석이 입을 꾹 다물고 문제집을 펴더니 혼자 풀기 시작한다. 30분, 1시간..... 암 소리도 안 하고 문제만 푼다. 넌지시 묻는다.
모르는 문제 없어?
없어요.
우와.... 말로 사람을 칠 수 있다면 아주 그냥 대형 교통사고가 날 정도로 살벌한 말투다. 찍소리 하지 않고 내가 보던 책만 들여다 본다. 2시간이 그렇게 지나자 그제서야 녀석이 한 마디 한다.
나보다요?
뭐?
순간적으로 뭔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들었다. 그러자 유진이 성질을 낸다.
예쁘다면서요. 나보다 예뻐요?
순간 속으로 심술이 나서 너보다 이쁘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저녁도 안 시켜주고 내쫓을 것 같아서 일단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대답을 선택했다.
........음... 너보단 안 이뻐.
그러자 유진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한 마디 한다.
쳇, 그럼 그렇지.
하아... 넌 니가 이쁘다고 생각하냐?
당연하죠.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니까 딴지를 걸래야 걸 수가 없다.
예뻐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예, 예.
지금 놀리는 거에요?
하이구, 이렇게 이쁜 분을 어찌 감히 놀립니까. 그럴리가요.
이씽~
유진의 팔이 잠시 내 팔뚝을 투닥였다. 이 녀석이 요즘 이렇게 폭력이 늘었다. 참을 수 있는 정도만 참다가 준비해왔던 말을 꺼낸다.
그건 그렇고... 나 다음 주부터는 과외 못 할거 같은데 말야.
날 때리던 손이 우뚝 멈추더니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본다. 안 그래도 눈이 큰 녀석이 그렇게 뜨니까 아주 그냥 얼굴 절반이 눈이로다.
그....만 둘거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내가 해야할 일이 생겨서 말야. 한 한달정도 어디 좀 다녀와야 되거든.
한달....? 어디요?
응. 먼 데는 아닌데, 시간은 내기 어려울 거야. 딱 한 달이라서 그 이후에는 과외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아니면 나 없는 동안 마리에게 좀 부탁해둘까?
시무룩한 표정의 유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됐어요. 그 아줌마는.
내 그럴 줄 알았다.
녀석이 하도 침울해버리기에 사실은 니네 학교로 교생 실습 나간다! 라고 말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녀석을 성공적으로 놀려먹기 위해서 꾹 참았다. 어디 가는 거냐고 꼬치꼬치 묻는 녀석의 질문에도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답을 피했다. 식사를 마치고 내가 집을 나서는데 유진이 따라와서 내 옷깃을 잡는다.
한 달 후에는 돌아오는 거죠?
야야, 내가 무슨 죽으러 가냐? 나중에 보자.
알았어요.
풀이 죽어있는 유진이라니. 꽤나 낯선 모습이다.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켕기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 기회에 유진이를 놀려먹지 언제 놀려먹나 싶다.
다음 주부터 시작될 교생실습에 대해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금요일을 보내고 토요일에는 리사와 외출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리사와 예린과 함께 한 외출이었다. 마리는 친구들이랑 놀러간다며 나가고 없었다. 애초에 리사에게 부탁했던 일이라 그녀만 있어도 되긴 했지만 예린은 거의 항상 리사의 뒤를 지키고 있는 터라 리사의 그림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본의 아니게 두 명의 여성과 함께 외출한 모양이 되었다.
안 그래도 한석 씨에게 토요일 날 시간 좀 내달라고 말씀드리려고 했었는데, 잘 되었네요.
그런가요? 암튼, 오늘 조언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너무 캐쥬얼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또 딱딱하지 않게 코디해달라는 말씀이시죠?
네, 말하자면....
한석 씨가 선생님이라니.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하하. 그런가요?
예린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리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뒤에 나란히 타고 가고 있으니 예린에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게 당연한 모양이었다. 얼마전에 리사에게 교생 실습 동안 입을 옷에 대해 조언을 구했더니 주말에 자기가 시간을 내어 같이 사러 가 주겠단다. 이렇게 어여쁘고 고마울 데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리사가 지나가는 투로 말한다.
근데 요즘 한석 씨가 많이 바쁘신가 봐요? 가끔은 아침에도 들어오시고...
굉장히 뜨끔했다. 요새 그녀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먹는 생활을 하다보니 선영이네서 자고 오거나 하는 날은 대번에 표가 났기 때문이다.
아핫.... 그게요, 그러니까.....
뭐라고 변명해야 되나 횡설수설하고 있으려는데 시트에 올려놓았던 내 손에 와닿는 리사의 손이 느껴진다. 그녀는 내 손을 살짝 잡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주세요.
네?
이건 무슨 또 소리일까.
분명 좋은 분이니까 한석 씨도 마음을 쏟고 계시겠죠?
아, 네에.....
마음이 아니라 정액을 쏟고 있습니다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내 어설픈 대답을 기점으로 대화가 잠시 멈추었다. 리사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일부러 손을 빼는 것도 좀 뭣하고 해서 가만히 있었다. 따뜻한 손의 느낌이 나에게 전해진다. 살짝 두근거린다.
리사는 참 이상하다. 아니, 특이하다. 어찌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닌 나를 항상 챙겨주고 돌봐주고 있다. 나야 외동아들이니 친누나야 없지만 암튼 그런 느낌이 든다.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걸까. 그렇다고 내가 하고 다니는 모양새에 대해 딱히 탓한다기 보다는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느낌이었다. 하긴 내가 설령 어떤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고 한들 나랑 딱히 사귀는 사이도 아닌 리사가 아쉬워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긴 하지만... 대체 이 아가씨의 사고방식은 어떤 식인지 궁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차가 대학로에 도착했다. 리사가 좋아하는 명동에 갈까 하다가 그랬다가는 내 옷을 사자는 목적이 아니라 리사가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릴 위험이 있는 고로 대학로로 타협을 보았다. 남성용 옷을 파는 가게도 제법 있어서 몇 군데를 돌면서 출근용 복장을 맞춰본다. 전체 가게를 돌아본 후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아까 갔던 가게 중에서 어떤게 괜찮은지에 대한 리사의 조언을 따라 정장바지 몇 개와 컬러풀한 와이셔츠 몇 개를 샀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순간부터 리사가 또 자기 옷과 마리 옷 쇼핑에 열을 올리는 바람에 시간이 제법 흘렀다. 쇼핑을 도와준 보답으로 저녁을 사기로 했다. 근사한 곳으로 가고는 싶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적당한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양 손 가득한 쇼핑백들은 차에 미리 실어두고 나와 리사, 예린이 가벼운 차림으로 가게에 들어갔다. 칼국수 3인분을 주문하고 주문한 음식이 나와서 막 먹으려고 하는데 어떤 전자음이 울렸다. 예린의 품 속에서 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예린은 품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가게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가게 유리창 너머 그녀의 모습을 힐끔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몸동작으로 보아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듯 언성을 높이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린이 가게 안으로 돌아오더니 리사에게 뭔가 귓속말을 한다. 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거라면 태호 씨에게 일임한 문제 아닌가요?
라며 예린에게 다소 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와는 다르다. 예린이 고개를 저으며 답한다.
......그렇긴 한데....
모르긴 몰라도 일이 잘 되는 모양이다. 예린의 표정이 어둡다. 아니, 선글라스로 가린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일리는 없지만 목소리 톤이라든가 태도에서 그런게 느껴진다는 거다.
그렇다면 예린 언니가 가보세요. 확인되는대로 저에게 연락 주시구요.
.....알겠습니다.
예린은 내 쪽을 향하더니 어쩐 일로 허리까지 굽히며 인사를 한다. 나도 모르게 같이 일어나 응대를 했다.
부디 리사 아가씨를 잘 부탁합니다.
네? 네.
그리고는 그대로 가게를 나가버렸다. 무슨 일일까 싶어 궁금하기도 한데 리사는 예린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칼국수 냄비를 가리키며 내게 말한다.
3인분을 시켰는데 어쩌죠.
제가 많이 먹죠, 뭐.
뭔지는 모르지만 따로 묻지는 말아야할 문제인 것 같다. 예전에 리사와 마리가 이사올 때도 그렇고 예린의 분위기도 그렇고 .... 그녀들의 집안은 어쩐지 평범한 직종에 관련된 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대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리사가 가보고 싶어했다. 남의 대학에 들어가는 거라 좀 생소했지만 넓은 입구의 캠퍼스는 두 이방인을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다. 게다가 아까 칼국수를 많이 먹느라 배도 좀 더부룩하고 말이다. 좀 걸을 필요가 있었다. 나란히 걷고 있으려니 내 손을 리사가 잡는다. 왜 그런가 싶어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앞만 보고 있다. 그대로 말없이 둘이서 나란히 걷는다. 캠퍼스 안에 웬 성당인가 싶은 모양새의 건물을 지나면서 리사가 말했다.
저는 학교 다닌 적 없다는 거... 말씀 안 드렸죠?
그러셨나요? 몰랐는데요.
후후.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해서요. 일년중에 따뜻한 때를 빼고는 병실에서만 내내 지냈어요.
아아....
일찍 돌아가신 엄마 닮아서 그런 것 같다고는 하는데.... 그렇게 특별히 병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구요. 그냥 계속 잔병치레하고 몸은 허약하고, 그랬죠.
전혀 몰랐다. 물론 마리와 같은 나이일텐데도 대학을 안 가는 거는 그냥 진학을 안 했나 보다 하고 그러려니 했는데 아예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니. 몸이 굉장히 안 좋았나 보다.
그 때는 주로 책을 읽거나 TV를 보면서 지냈는데요, 그것 때문에 바깥에 대한 환상이 정말 많았어요. 나중에 몸 좋아지면 해보고 싶은 걸 목록으로 적어보기도 하고 그랬죠. 지금도 집에 가면 어딘가에 노트가 있을 거에요. 1번부터 200번까지 번호를 붙여놓은....
그렇게나 많나요?
후후후. 한석 씨도 만약 침대에만 몇 달동안 있어야 한다면 좀이 쑤셔서 못 견뎠을 걸요? 지금 못 하는 거, 나중에 하고 싶은 것들이 머리 속에서 막~ 왔다갔다 할 거에요. 저절로. 저는 그런 생활을 몇 년이나 했는걸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군대 갔다 온 선배들도 비슷한 소리를 했던 거 같다. 어떤 선배는 6주간 훈련소에 있으면서 밖에 나가면 먹고 싶은 것만 적어내려가는데 종이가 모자를 지경이었다고 했었지, 아마.
예전 드라마 중에서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드라마... 혹시 보셨어요?
아뇨. 전 TV를 별로 안 좋아해서....
저런,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걸 안 보셨단 말이에요?
리사는 그때부터 홍학표가 멋있다느니 박철이 귀엽다느니 하는 내가 못 알아들을 이야기를 한참동안이나 했다. 딱히 내용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몹시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는 리사의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에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적당히 대답도 해가면서.
솔직히 최진실 이야기는 좀 별로였어요. 걔가 싫은 건 아니었는데 전 그런 내용이 남 같지가 않아서 정말 펑펑 울면서 봤거든요.
아, 예에....
대학 가면 다 저렇게 즐겁게 지낼까 싶어서 대학 공부도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워낙 기초가 없어서 안 되겠더라구요. 검정고시도 조금 준비하다가 포기하고 그랬죠.
저런.
그래서 그 때 리스트에 하나 추가했었죠. 유호정이 그랬던 것처럼 캠퍼스에서 낭만적인 키스를 하고 싶다고요.
그러셨군요.
마침 멋진 캠퍼스에 와 있고, 또 제 곁에는 그보다 더 멋진 남자분이 있으니 소원 하나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네에. 그러셨구나.... 네엣?
나란히 걷던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녀의 말에 내 발이 딱 멈추고 만다. 리사가 두어 걸음 앞서 걷더니 뒤돌아 본다. 생긋 웃는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여배우 같다.
도와주실 수 있죠?
리사 씨.....
그러자 리사가 가만히 고개를 흔든다.
전 좀 불만이에요. 마리한테는 맨날 편하게 말하면서 쌍둥이인 저한테는 왜 그런 어색한 호칭을 붙이세요?
그....그거야.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이내 마음을 먹고 리사를 쳐다본다. 입을 열어 그녀를 부른다.
리사야.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오빠.
사방이 조금씩 어두워져 가고 있으니 확 달아오른 내 얼굴이 들키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저 평범한 칭호가 이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랐는데 말이다. 나도 모르게 좀 떨리고 더듬거렸지만 리사가 원할 것이 분명한 대사를 천천히 읊어본다.
우리, 키....키스할까?
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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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너무도 오글거려서 마구 굴러다니면서 썼습니다. 뒷 부분에 여백이 많은 만큼 제가 굴러다고 있었습니다.
아오, 제 손발 퇴갤이요.
암튼, 전에도 한번 이야기했지만... 제가 가장 편애하는 캐릭터는 리사입니다.
그런데 독자들은 유진이만 좋아하구... 훌쩍.
입술과 입술의 만남은 남녀관계에 있어서 끝인 동시에 시작이다. 끝이라는 것은 입맞춤을 기점으로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수 없다는 거고 시작이라는 것은 거기서부터 무언가 더 바라는 관계가 된다는 말이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달달한 로맨스 영화의 끝은 두 사람의 키스지만 남자들이 좋아라 하는 영상은 키스부터 시작이다. 리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 가슴은 방망이로 두드리듯 쿵쾅거리고 있다.
상상했던 대로에요.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고 리사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황홀해요.
낯 뜨거워지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리사는 충분히 강한 여자다. 난 지금 엉겁결에 나눈 키스 후에 찾아오는 어색함에 몸부림치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그런가요?
네.
마리가 늘 그러하듯 리사가 내 한 팔을 끌어안고 매달리듯이 달라붙는다. 얇은 블라우스 너머 뭉클한 감촉이 팔을 감싸는 게 가득 느껴지는 고마운 스킨쉽이다. 그녀는 가만히 말했다.
전.... 이 기분을 좀 더 오래 가져가고 싶어요.
리사 씨, 그게 무슨.....
또! 자꾸 그렇게 부를 거에요?
습관이라는게 그리 쉽게 변하는가. 목을 가다듬고 다시 그녀를 부른다.
음. 미안. 리사야.
좋아요. 그렇게 불러주세요.
암튼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하루만 제 애인이 되달라고요. 아까 키스한 것처럼.
수줍게, 그러면서도 자신의 요구를 당당히 말하는 그녀의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알았어.
내 대답이 나오자마자 리사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의 조신함과는 거리가 먼, 그러니까 예전에 놀이동산 갔을 때처럼 해맑은 웃음이었다. 어느새 나는 리사가 이끄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주말의 기분에 취한 이들이 흥청대는 거리를 지나며 쇼윈도 하나하나를 구경한다. 사람들이 많이 드다드는 조금 외진 곳으로 접어든다. 크고 작은 악세사리를 늘어놓고 파는 좌판도 구경하고 가로등을 조명 삼아 연주하고 있는 이를 구경하며 박수를 치기도 한다. 훈제 닭고기를 내걸어 놓고 파는 노천 카페에서 맥주도 한 잔 한다. 함께 웃고 떠들고 이야기하다 보니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꽤나 늦어 있었다.
오늘 재미있었어.
저두요.
계단을 올라 집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