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65)

개강까지 얼마 남지 않은 학교의 분위기는 한산하고 싸늘했다. 이제 몇 주만 있으면 시끄러운 녀석들로 가득 차겠지만 그때까지는 적막강산이다. 겨울의 끝자락인데도 여전히 추운 날씨에 몸이 으스스 떨린다. 학교로 들어가는데 특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후문 쪽에서 학생회관으로 가는 길에 너른 잔디밭이 있는데 거기에 웬 조그만 텐트가 쳐 있는 것이다. 텐트 옆에는 사이드 짐받이가 달린 자전거가 세워 있었고, 바닥에 놓인 버너 위에는 코펠까지 올려져 있었다.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뭐야. 이런 날씨에 보이스카우트 캠핑을 하는 건가? 뭔가 싶어서 그 옆을 기웃거리며 지나치는데 텐트 안에서 누군가 쑥 나오더니 나를 부른다.

여기요, 선배님요, 잠시 말씀 좀 물을께예.

꽤나 억센 사투리였다. 부산인가, 대구인가. 암튼 그쪽 지방 말투였다. 텐트에서 나온 사람은 이제 갓 스물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살짝 그을린 피부에 마치 빈 소년 합창단에 소속된 사내아이처럼 짧은 머리카락 덕분에 남자애라고도 보이는 애였지만 충분히 아름답게 도드라진 흉부의 모양새가 틀림없는 여자애였다. 지혜보다 조금 작은 정도? 게다가 타이트한 스판복장이라 더더욱 몸매가 드러났다. 몹시 보기 좋다.

뭔데요?

 여가 K대 맞아예? 아까 들어올 때 입구를 보긴 봤는데 억수로 복잡시러버가... 퍼뜩 지나왔디만은 모르겠네.

 맞습니다. K대에요.

 그라믄 맞게 왔나 보네. 근데 공학관이 어디라예?

 공학관이요? 저기 저 건물이요.

 캬, 건물 윽수로 크네. 코앞에 두고 해멨구만. 대학 돌다가 다리 아파서 일단 자리부터 잡았는데 딱이네. 선배님요. 여기 앉으소. 내 마침 라면 끓였는데 한 주디 하실래예?

그 외에도 뭔가 말을 윽수로 쏟아내었는데 내가 알아들은 말은 절반도 채 안 되었다. 내가 손사래를 치는 것도 마다하고 그녀는 코펠에 라면을 네 개나 넣더니 곧바로 접시와 젓가락을 내게 안긴다.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학관 앞 잔디밭에서 라면을 먹게 되었다. 컵라면이라면 학관 편의점에서도 종종 사 먹었지만 이렇게 끓인 라면이라니.... 게다가 도시락통에 담긴 김치까지 있고 말이다. 맛있게 잘 익은 김치와 오들오들하게 잘 끓여진 라면을 들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부산출신이 맞았다.

그러면 신입생이세요?

 하모요. 내사마 예비합격 자릿수가 두 자리였는데 마침 딱 내까지 보결 생겼다 카네예. 그래서 음청 기분 좋아가 자돌이 타고 예까지 달려왔지예.

자기 자전거를 가리킨다. 애칭이 자돌이라.... 허, 거참.

에? 예비합격이면 그냥 은행에 등록금 입금하면 되는 거 아닌가?

 입금이야 했지예, 진즉 했지예. 그냥 내 올라온 거는 학교 좀 내 두 눈으로 볼라꼬예. 원서 넣을 때도 우편으로 넣어가가 실감이 안 나드라구예.

 .......직접 보겠다고 부산에서 여기까지 자전거로?

 슬슬 왔는데도 삼 일 만에 오던데예. 별로 안 멉니다.

 하하하...

이야기를 나눠보니 부산에서 여기까지 자전거로 맹렬히 달려온 이 여성은 씩씩한 모습과는 정말 안 어울리게도 이름이 마리아였다. 성모 마리아 할 때 그 마리아 말이다. 본인 말로는 냉담자인지 뭔지 암튼 철든 이래 성당에 코빼기도 안 비치는 날라리 신자인지라 그냥 김마리라고만 불러달라고 했다. 앞서 말한 대로 올해 우리 학교에 합격한 신입생이었고 게다가 과도 나와 같은 과였다. 나보다 3년 후배인 셈. 서로 합의하고 말을 놓기로 했다.

선배님이, 진짜 내 선배님이네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어. 그래. 라면 잘 먹었다. 나중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지예? 제가 다른 건 다 까먹어도 밥 사준다카는 사람은 죄 기억합니데예. 안 사주면 큰일납니더.

 알았어. 근데 여기서 진짜 잘 거야?

아직 겨울이 물러가려고 하는 시기라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겨울이다. 아무리 텐트라고 하지만 추위를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걱정스레 묻자 마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걱정 일절 마세예. 여기 침낭도 있구예, 발열기도 다 갖춰서 있지예. 예까지 이미 올라오면서 두 번이나 노숙했다 아입니꺼.

 그러냐. 근데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가...

마리는 걱정말라며 크게 웃었다. 자기를 여자로 보는 사람은 천지삐까리에 없을거래나 뭐라나. 음, 다른 건 몰라도 그 정도의 훌륭한 가슴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멘트를 날리다니... 주변의 남자들은 죄다 눈이 삐었거나 이 녀석이 보통 왈가닥이 아닌 모양이다. 

몇 마디 더 나누고 자리를 떴다. 급한 볼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거의 정기적으로 들르는 학과 사무실에서 진호 형을 만나 이야기를 좀 나누고 도서관으로 가서 보고 싶었던 책을 몇 권 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가려는데 아까 만났던 마리의 텐트 쪽에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옥신각신하는 소리 속에서 꽤 격앙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달려간다. 오늘 바로 알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후배인데...

와 이카는교!

 왜 이러긴! 몰라서 물어? 학생 대체 뭐하는 학생이야? 운동권이야?

 운동? 운동은 맨날 하지예! 예까지 자전거 끌고 온 거 보면 모르겠심더?

 뭐? 진짜 운동권이야?! 당장 이 텐트 안 걷어?

 보소! 놔라 안 캅니까!

아아. 그 운동이 그 운동이 아닌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리에게 다가갔다. 수위 아저씨 두분이 텐트를 거두려고 하고 있었고 그걸 말리려는 마리를 펄펄 날뛰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사막에서 물장사를 만난 사람마냥 반색하며 나를 잡아끈다.

아, 선배님예! 말씀 좀 해주소. 내사마 예 학생이라카는데도 안 믿어주네예.

 학생증 보여달라니까?!

 학생증이 어디있습니까? 아직 입학식도 안 치렀는데.

 그럼 학생 아니잖아!

 맞다카이!

아무래도 차분하고 바른 표준어를 구사하는 인물이 끼어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흥분한 양쪽을 달래어 차분히 중재를 해보니 수위 아저씨들은 갑자기 교내에 텐트가 등장했기에 등록금 투쟁이라도 시작하는건가 싶어서 당장 철거하려고 했고 마리는 갑자기 자기 텐트를 거둬야 한다고 하니 맞서서 투쟁을 벌인 모양이다. 나는 먼데서 달려온 마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수위 아저씨의 양해를 구했다. 수위 아저씨 중 나이 많은 분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정은 알겠네. 그런데 말야.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텐트 쳐놓고 있으면 아무래도 윗분들에게 우리가 질책을 당한다네. 요새 분위기가 안 좋거든.

 아, 예....

 그렇게 되었고... 우리도 사정이 있으니 텐트는 좀 거둬주게. 여하간 교내는 곤란하다고.

 알겠습니다.

수위들은 돌아갔다. 나는 마리에게 서울에 다른 연고가 있는지 물었다.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 녀석을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학교 밖에다가 텐트를 쳐야겠다고 궁시렁거리는 마리를 말린다. 그때는 아마도 또 다른 누군가와 분쟁이 나겠지. 무단주차만 해도 이웃간에 칼부림나는 동네가 서울인데 떡 하니 텐트까지 쳐놓으면 참 좋은 꼴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은 텐트를 걷도록 했다.

와예? 그럼 지는 어디서 잡니꺼?

 휴우. 어쩔 수 없지. 내가 재워줄게. 따라와라.

 ........에엑!

갑자기 마리가 나한테서 거리를 황급히 벌리며 경계한다.

왜 그래?

 마.... 뭐... 서울아들이 윽수로 개방적이고.... 머 그렇다고는 들었지만예.... 이렇게 처음 보자마자 막 들이댈지는 몰랐심니더.....

 뭔 소리야?

 마..... 저는 아직..... 그랴 본 적이 없어서리.... 아, 이거 미치긋네예.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빨리 텐트나 걷어. 아저씨들 다시 오기 전에.

텐트와 짐을 모두 챙겨 자전거에 싣고 마리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마리는 굉장히 쭈볏거리며 쑥스러워했다. 워낙에 솔직한 녀석이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써놓은 듯한 모습이다. 아까까지 그렇게 말 많고 시끄러운 녀석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걸 보니 왠지 웃겨서 일부러 오해를 풀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런 오해를 하면서도 따라오다니. 니가 더 대단하다, 임마.

한참만에 빌라에 도착했다. 202호 문 앞에 서서 녀석에게 다짐을 준다.

얌전히 있어야 돼. 알았지?

 야..... 부드럽게 대해주소.....

 .........여전히 그 오해를 하고 있구나. 으이구.

초인종을 누르자 지혜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네. 어머, 그쪽은 누구?

 안녕, 지혜야, 어, 음. 오랜만에 보자마자 부탁해서 미안한데, 이 녀석 좀 오늘 여기서 재워주면 안 될까?

 안 될 거 없지. 들어와.

지혜는 난처한 표정 하나 없이 선뜻 안으로 우리를 들여보내주었다. 거실에서는 효진이가 과자를 먹으며 TV 앞에 반쯤 누워있다가 눈을 껌뻑거리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 인사하자 자기도 손을 들긴 한다. 그러면서 내 뒤에 있는 마리에게서 눈을 못 뗀다.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히히덕 거린다.

어얼~ 역시 한석이는 대단해. 벌써 한 명 더 추가하는 거야? 너의 이 하렘에?

 뭔소리야.

시덥잖은 농담을 받아넘기려는데 그걸 농담이 아닌 걸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참말인교? 여가 선배님 하렘인교?

 .......그딴 소리 믿지 좀 말어.

내 부탁을 받은 지혜가 갈아입을 옷과 타월을 내주었다. 그걸 받아든 마리는 여전히 쑥스러운 표정을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지혜에게 여차저차한 사정을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지혜는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얼굴에 띄었다.

너란 애는 참....

 뭐가?

 사람이 좋은 건지, 재주가 좋은 건지...

 엥?

 됐어. 알았으니까.

거실에 가서 앉자 효진이가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장난을 걸었다. 대충 받아주며 놓여져 있던 과자 몇 점을 집어먹었다. 잠시 후, 말쑥해진 마리가 나오고 나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혜야. 부탁 좀 할게. 마리, 넌 여기 언니 말 잘 들어. 난 간다.

 엑? 선배님요? 어디 가는교?

 어디긴. 내 집에 가지.

 엥? 그....그럼....

 대체 니가 뭘 오해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리 니가 내 후배라도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널 재울 수는 없잖냐. 여기 지혜가 나랑 친한 친구라서 특별히 부탁하는거니까 얌전히 있다 가라. 알았지?

 야아....

기분탓일까. 마리가 왠지 갑자기 침울해지는 것 같아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방금전까지는 눈 밭에서 펄쩍펄쩍 뛰며 뛰어놀던 강아지가 우리에 갇힌 모습이랄까. 그러자 앉아있던 효진이가 쪼르르 오더니 내게 머리를 쑥 내민다.

오오~ 한석이. 그러니까 제법 선배같아 보이는데? 나두나두.

 넌 또 왜?

 선배니임~ 저두~ 귀여운~ 후배~ 잖아요~ 머리쓰다듬어 주세효~.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떠는 효진에게 일부러 근엄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누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푸하하하하.

뒤에 있던 지혜가 웃음을 터트렸다. 효진이도 따라 웃었고 영문 모르는 마리는 어리둥절해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지혜 집을 나와 나의 집으로 향했다. 그래보았자 바로 앞집. 옷을 갈아입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좀 보려고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왜?

 게임기 좀 빌려주라.

효진이었다. 나는 지금 몹시 귀찮으니 제발 저리 꺼져달라는 느낌을 담아 인상을 팍 써보았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TV 밑에 있는 게임기를 꺼내어 챙겨주다가 물어보았다.

근데 너 이거 연결할 줄은 아냐?

 당연히 모르지. 니가 와서 연결해 줘.

 으휴....

 게다가 니 후배라는 애, 지금 완전 얼어가지고 거실에 동상처럼 앉아있단 말야. 그렇게 훅 가버리면 어떡하냐?

 그...그런가? 활달한 애라서 괜찮겠지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효진이를 따라 다시 지혜 집으로 갔다. 내가 들어서자 마리는 마치 외출 갖다 돌아온 주인 다시 만난 강아지의 눈빛으로 나를 반긴다. 꼬리가 없어서 그렇지 만약 있었다면 흔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야?

내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가리키며 지혜가 물었다. 게임기라고 답하자 지혜는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효진이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헤헤거리며 나를 재촉하여 게임기를 거실 TV에 연결했다. 그러고는 마리에게 게임패드를 내밀며 같이 하자고 권했다. 처음에 주저하던 마리는 잠시 후 효진에게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소리지르고 열광하며 게임에 빠져들었다. 난 지혜가 내준 차를 마시며 부엌 탁자에 앉아있었다. 내 맞은 편에 앉은 지혜는 거실 쪽을 바라보며 혀를 가볍게 찼다.

애들이 따로 없네.

 저거 내 게임기인데....

 그러니까 너도 애라는 거야.

지혜의 가벼운 타박에 살짝 웃었다. 나보다 겨우 한살 많은 정도인데 지혜의 말투는 왠지 묘하게 어른스럽다. 사회물을 일찍 먹어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지혜 본 지가 제법 되었다. 바로 앞 집인데도 말이다.

요새 안 보이더니 어디 갔다 온거야?

 어, 집에 좀.

 집?

 응. 고향에.

 아아...

그녀의 고향은 강원도쪽이었다. 말투만 들어서는 그런걸 전혀 모르겠는데 말이다.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으려니 지혜가 나를 보고 묻는다.

왜 갔다 왔는지 안 물어봐?

 응?

지혜가 테이블에 반쯤 몸을 업드려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느슨한 차림이었던 지라 웃옷 윗쪽으로 가슴계곡이 훤하니..... 넋놓고 보려다가 낮에 있었던 소동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차마시는 척을 했다.

왜.... 다녀왔는데?

그러자 지혜가 쿡- 하고 웃으며 대답한다.

싫어. 안 가르쳐주지.

 뭐야, 그럼 왜 물어보라는거야?

 그냥.

지혜는 내 쪽을 보며 혀를 살짝 내밀었다. 그 혀를 붙잡고 못 들어가게 한 다음에 살짝 입술을 깨물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쪽으로 가는 바람에 그러질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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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영 5표, 김지혜 1표, 진유진 4표, 박효진 1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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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희 : + 32 pt

 | 김지혜 : + 42 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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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효진 : + 22 pt

 | 진유진 : + 24 pt

 | 한선영 : + 15 pt

 | 김마리 : 0 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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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었습니다. 전에도 한 번 그랬지만.... 경상도 아가씨입니다!! 부산!! 아아.. 부산 좋죠. 음음... 아무래도 전 부산에 대한, 아니, 엄밀히 말하면 부산 아가씨에 대한 일종의 팬터지가 있나봅니다. (한여름의 해운대가 글케 좋다 카면서요.)

근데 이번화를 마눌에게 보여주었더니 아무리 경상도라도 요즘 아가씨들은 저 정도의 말투를 구사하지는 않는다고 하네예. 그럼 어떻게 말하는 거냐고 묻자 그냥 평범하게 쓰라. 평범하게.라고 말하던데 바로 요 대답~ 요 대답도 분명 사투리 말투인데, 글로 쓰면 전혀 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마리의 말투가 좀 쎄진 겁니다. 그 쪽 지방 분들이 보시면 어색하기 짝이 없겠지만 제 필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임을 양해바랍니다.

이것으로 라인업 완성이려나? (우훗)

 효진이는 빠르다.

 마리는 정확하다.

 그리고 지혜는 강했다.

나는 꼴찌가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무슨 애들처럼 게임하냐고 못 마땅해하던 지혜였는데 어느 순간 나와 효진이, 마리가 하도 신나게 하는 터라 관심이 동하던지 게임에 은근히 끼어들었다. 초심자인 지혜도 할 수 있는 게임을 찾다보니 뿌요뿌요가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건데?

 어, 일단 같은 색끼리 모아서 한 줄로 만들어. 네 개 이상이 연결되면 터지는 거야.

 그게 다야?

 대신 그냥 터지는 게 아니라 최대한 연달아 터지게끔 해 봐. 그러면 상대에게 공격도 가능해.

 왜 이렇게 복잡해? 그림은 귀여운데...

뿌요뿌요는 테트리스랑 비슷하지만 테트리스가 블록을 쌓는 게임이라면 이 쪽은 색색의 방울들을 쌓아올려서 터트리는 게임이었다. 무엇보다 대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씩 터트리는 것이 아니라 잔뜩 쌓아올려서 연쇄로 터트릴 경우 상대에게 무시무시한 악몽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악독한 우정파괴 게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몇 년 간 이 게임을 해온 나는 각종 콤보를 구사하는 전략에 따라 신경써서 블럭을 배치하며 착착 쌓아올리고 있었다. 이제 몇군데만 더 쌓고 터트리면 나의 승리다. 계산되어 있는 나의 환상적인 배치가 보여주는 연쇄에 너희들은 무릎꿇게 되리라. 음화화화화화......... 그러나 내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초심자가 무심하게 쌓아 올린 후 터트리는 한방이었다.

어라? 내가 지금 뭐한거야? 내꺼 다 터지는데?

 크아아아아악!! 너 정말 오늘 처음 하는 거 맞아?

 응.

 으아아아아악!!!

아무것도 모르는 지혜는 자기 화면에서 방울들 - 정확히는 뿌요들이 한꺼번에 없어졌다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렇게 터져나간 뿌요들은 내 화면으로 방해 뿌요가 되어 우루루 쌓이고 있었다. 

푸하하하. 한석이 잘난척 엄청 하더니 꼴찌네?

 그라네예. 선배가 꼴찌네예.

등 뒤에서 지켜보던 마리와 효진이가 배꼽을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이미 나는 마리와 효진에게도 패한 후다. 결국 내가 나가서 술과 안주를 사오게 되었다. 피땀 어린 내 돈으로 사온 치킨을 뜯으며 효진은 이런 내기라면 얼마든지 하자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열심히 뒷다리를 뜯고 있는 마리에게도 잔을 내민다.

근데 얘도 술 마셔도 돼?

이미 잔을 내밀면서 나에게 물어보았자 대답을 해줄수 있을라나. 그러나 본인이 당당하게 대답한다.

하모요! 지도 서면에서 알아주는 술꾼이었지예!

 ......얼마전까지는 고등학생 아니었냐, 너?

 에헤헤헤~ 그리 됐심더.

그렇게 시작하여 장장 새벽 1시까지 이어진 술자리. 온갖 이야기가 오가고 온갖 게임이 펼쳐지며 술잔이 오고갔다. 무자비한 술잔의 릴레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지혜뿐이었다. 효진이는 일찌감치 거실에 드러누워 대자로 뻗어 있었고 마리는 그런 효진이의 허벅지를 베개 마냥 베고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슬슬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병을 들고 잔을 채우고 있는 지혜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너는, 안 자?

 자야지. 암. 자야지.

 그럼 얼른 자. 난 가볼게...

 안돼! 가긴 어딜가!

지혜는 분명 엄청 취했는데도 굳이 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어서려고 했더니 소매를 잡아끈다. 잡아끄는 힘이 의외로 세고 나도 휘청거리는 바람에 자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왠지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말이다. 불과 몇 달전인데도 꽤나 옛날처럼 느껴진다.

엑!

 음냐........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아냐......

하필이면 지혜쪽으로 넘어지며 그녀를 안고 바닥에 뒹굴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뻗은 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은 다리 사이로 묻게 되었다. 당황하며 손을 빼려고 하자 그녀는 오히려 다리를 조이며 손을 빼지 못 하게 했다. 푹신하면서도 알싸한 느낌이 손을 구속한다. 그리고 내 귓가에 와닿은 그녀의 입술에서는,

일부러 그래도 괜찮아. 너라면....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얼굴을 지혜의 가슴에 묻었다. 푸근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나를 감싼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아무리 술에 무지막지하게 강한 나라도 취할때는 취하는 법이다. 게다가 지혜에게서 풍겨오는 좋은 향기가 나를 더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인공적인 향수가 화장품따위에서 오는 냄새가 아니다. 옷 너머 사람의 살결에서 나오는 내음이다. 바로 얼마 전에 이 내음에 이끌려 꿈같은 밤을 보낸 적이 있었지. 그리고 그 때 나는 남자가 되었지. 어찌 그 밤을 내가 잊을 수 있을까.

숨을 한껏 들이켜 그녀의 살냄새로 콧 속을 가득 채우며 비교적 자유로운 나머지 손을 꿈틀거려 푹신한 언덕으로 옮겨놓고 마음껏 움직이게 했다. 나의 움직임에 민감한 부위를 자극받은 지혜는 거칠어지기 시작한 숨소리를 토해낸다.

하윽... 지...지금 뭐하는 거야...

 보다시피 주무르잖아.

 하지마....

정말 하지말기를 바라면 나를 밀어내야 할텐데 왜 더욱 끌어당기는 걸까. 이러다가 자칫하면 숨쉬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푹신한 살언덕은 나를 질식사시키기에 충분하다.

푸앗!

 아, 미안.

 괜찮아. 기분은 좋았어.

 증말.... 한석이는 뵨태야..... 처음 봤을 때부터.....

 뭐?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옆구리를 간지렀다. 

순진한 나를 그런데로 끌고간 사람이 누군데. 그때까지만 해도 난 총각이었단 말야.

 꺄악- 하지 마아~ 꺄악~

그녀는 까르르 웃어 넘어지며 뒤로 훌러덩 넘어갔다. 펑퍼짐한 티셔츠가 말려올라가며 그녀의 배가 드러났다. 저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아름다운 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손을 뻗어 그녀의 속살을 더듬어가려고 하자 지혜가 내 손목을 잡는다.

여기서 이러지마.

잠시 멈칫했다. 일단 몸의 움직임을 멈추고 잘 돌아가지도 않는 뇌를 필사적으로 가동시켜 생각했다. 예전의 나라면 전혀 못 했을,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캐치해낼 수 있는 말의 진의를 찾아낸다. 그렇다. 여자의 말은 포인트를 잘 짚어야 한다. 그녀는 여기서 이러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 방으로 가자.

내 말을 듣고 나서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이 보일듯 말듯한 정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귓속말을 해온다.

씻고 갈게. 좀만 기다려...

나는 후다닥 집으로 달려가 바닥을 주섬주섬 치웠다. 이불을 미리 깔아두고 미리 사두었던 콘돔의 위치를 확인했다. 조명은 모두 껐다. 유리창 너머로 은은하게 흘러들어오는 가로등 특유의 노란 불빛이 방안을 절반 정도 밝게 해주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조명은 불필요했다.

옷을 다 벗고 기다릴까 하다가 왠지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샤워를 후다닥 하고 가장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뭘 입을까 고민하다가 유사시에 가장 벗기 편하도록 츄리닝 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냄새가 나지 않나 확인해보고 이따가 아무래도 옷을 다 벗을테니 춥지 않도록 보일러 온도를 올려 놓았다.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너무 조바심이 나서 현관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한참만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저기....

저기고 여기고 간에 지금 내 자지를 팽창해서 대폭발 일으키기 일보 직전이다. 전희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었다. 나는 현관문을 벌컥 열고 문 앞에 서 있는 이를 황급히 끌어당겼다. 얼굴을 양 손으로 부둥켜 안고 깊은 키스를 나눈다. 침맛에는 술맛이 섞여 있었다. 키스를 하면서 손을 뻗어 옷 안쪽으로 손을 넣는다. 부끄럽다는 듯 몸을 비틀며 내 손을 거부하지만 이미 그런 행동은 무의미하다. 거칠 것이 없이 나아가는 내 손 아래에서 탄탄한 복부가 만져진다. 손을 더 뻗어본다. 브래지어가 없었다. 가릴 것도 없기에 더욱더 마음껏 가슴을 만질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타. 분명 아까만질때만 해도 이 정도 사이즈가 아니었는데.... 뭐랄까. 아까는 분명 뭉클-뭉클-뭉클-뭉클- 이런 기분이었다만 지금은 탱글-탱글-탱글-탱글- .........

헉!

몸을 뒤로 확 젖힌다.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을 들여다본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실루엣으로 비추어지는 짧은 머리카락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긴 생머리의 지혜가 아님이 분명하다. 이름 모를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고 나를 부른다. 

서....선배님.....

 헉! 마....마리야....

뒷걸음쳐보았지만 그래보았자 좁아터진 현관 구석이다. 손을 뻗어 조명을 켰다.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오고 그 아래에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고 몸을 비비꼬고 있는 마리가 있었다.

노....놀랬심더.... 이리 갑자기....

 아니, 저, 그게..... 그러니까.....

 윽수로... 적극적이시네예.... 지는 그저 오늘 고마웠따고 인사나 할라꼬....

 아니...난 모르고 그만....

 모르고예?

손을 내저으며 부정의 뜻을 표하자 마리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현관이 열리며 지혜가 들어왔다. 

어?

 어라?

현관에 서 있던 마리와 안으로 들어오려던 지혜가 서로 눈이 딱 마주친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나는 우주를 보았다. 우주에서 초신성이 폭발하고 또 하나의 별이 태어나는 그 과정을 나는 보았노라. 불꽃튀는 눈빛이 서로 교환되고 의문과 질문과 추궁을 담은 표정이 서로에게 쏟아진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곧바로 나로 향한다.

이 시간에 후.배.님.이랑 뭐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최한석씨?

 혹시 선배님이 이 언.니.야.를 불렀능교?

나를 향한 질문이긴 하지만 결코 나에게서 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어버어버 벙어리 삼룡이 흉내를 내고 있자 잠시 후 지혜가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리가 안 보여서 어디 갔나 찾으러 나와본거야. 이제 됐으니까 돌아가자.

역시 사회물을 먹은 사람은 달라도 뭔가 다르구나. 이 껄끄럽기 그지 없는 상황을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한 그녀가 손을 뻗어 마리의 어깨를 짚는다. 그렇게 그녀를 데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마리는 그 손을 살짝 밀어내며 말한다.

지는 그냥 선배님에게 고맙따고 할라고 왔지예. 근데 언니야는 지 찾으러 나왔담서 윽수로 야시시하게 차리고 나오네예?

 윽...

사실 지혜의 차림은 좀 그랬다. 나만 두고 혼자 보고 있었다면 참 좋아라 하며 감사했을 레이스 가득한 시스루 슬립이었지만 지금 상황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슬립 너머에는 그 재질로는 도무지 가리지 못할 환상적이게 크고 아름다운 두 개의 복숭아가 너무도 잘 익어 있었다. 지혜는 그제서야 자신의 차림을 깨닫고는 한 손으로 가슴을 감싼다. 물론 한 손으로 그게 다 가려지겠습니까만은....

나...난 원래 잘 때 이러고 자. 니가 몰라서 그래.

 하이고마. 자기 전에 항상 머리도 감꼬 향수도 뿌리나 보지예.

 남이사...

지혜와 마리는 다시 눈빛교환, 텔레파시 싸움에 돌입할 기세다. 두 사람을 뜯어말리고 집으로 돌려보내는데는 한참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 이미 내 자지는 기운을 잃고 흐물흐물해져버렸다.

울고 싶다, 정말.

 하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푹푹 내쉰다. 요 삼일간 너무나도 괴롭고도 힘들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과외하러 밖으로 나갈 스케쥴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집에 곧 내려가리라 생각했던 마리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서울 구경을 시켜달라고 졸라댔다. 점잖게 거절하고 싶었으나 왠지 덩달아 신이 난 효진이까지 조르기에 가세하여 나를 등쳐먹기 시작했다. 덕분에 남산과 명동부터 시작해서 롯데월드까지 이어지는 서울 구경 풀코스를 이틀 동안 내리달렸다. 밤이면 역시 효진과 마리의 주도하에 게임판과 술판이 벌어졌고 거기에 덧붙여 지혜를 한사코 경계하는 마리 덕분에 나는 지혜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 했다. 분명히 지혜는 나에게 많은 싸인을 보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내 주머니 속에 상비되어 있는 콘돔이 너무도 가엽고도 슬프다. 

........ 물론 더 불쌍한 녀석은 내 바지 속에 있는 쥬니어겠지.

게다가 사이클을 세워두었던 전철역에 갔더니 맙소사. 사이클이 없어졌다!!! 황망히 인근을 뒤져보았지만 나타날리 만무.... 전철역에 문의도 해보았지만 분실물로서 사아클이 들어온 것도 없고 내가 세워 두었던 쪽에는 설치되어 있는 CCTV도 없다는 절망적인 소리만 들었다. 

덕분에 나는 익숙하지도 않은 버스노선을 익히느라 시간이 꽤 걸렸고 엉겁결에 꽤나 이상한 곳에 내려버리는 바람에 거기서부터 유진이네 집까지 한참을 걸어야만 했다. 사이클로 갔으면 정말 순식간에 갈 거리를 터덜터덜 걸으며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덕분에 유진이네 아파트 앞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한참 늦어버린 후다. 비록 가르치는 건 없어도 성실 근면 하나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과외자리였건만. 이래서야 그 지 할말만 하고 싶어하는 한선영인가 뭐시기 하는 여자에게 나는 똑바로 하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땅만 보고 걸어가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늦으셨네요.

 어? 미안... 어.... 일이 좀..... 근데 너 왜 여기 있니?

1층 엘레베이터 문 앞에 유진이가 서 있었다.

아저씨 기다렸죠. 참고서 좀 사려고 하니 같이 가주세요.

 그...그러냐.

한참 걸었으니 이제 좀 앉아 쉴까 싶었는데 다시 걸어야 하다니. 낭패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유진은 먼저 앞장서더니 아파트 단지 앞에 세워져 있는 택시 중에 하나에 냉큼 올라탔다.

뭐하세요. 빨리 타요.

 어? 어....

요즘 애들은 택시에 이리도 쉽게 냉큼냉큼 타고 다니는 구나... 유진은 기사에게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형서점의 이름을 댔고 택시는 이내 출발했다.

거기라면 저 쪽에서 전철타는게 빠를텐데...

 전철은 안 타봐서요.

 그러냐.

이래서 곱게 자란 것들은! 쳇!! 누구는 버스비랑 전철비가 아까워서 자전거 타고 위험천만한 서울도로를 누비고 있건만... 그나저나 내 사이클. 나름 내 재산목록 1호였건만. 다시 사야되나? 가뜩이나 요새 지출도 이것저것 있어서 살 돈도 없는데.... 개강이 코 앞이니 교재 사는 것만 해도 또 수도 없이 많은 돈이 깨져나갈텐데..... 아이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머리를 감싸고 창문에 쿵쿵 찧고 있자니 옆에 앉아있는 유진이 나를 이상한 놈 쳐다보듯이 쳐다본다.

맞다... 난 이상한 놈이다. 이상한 놈이야. 으흐흑. 미쳤다고 사이클을 거기다 세워두었지. 아이고. 내가 미친 놈이야.

잠시 후, 서점에 도착한 우리는 참고서 코너로 가서 문제집을 골랐다. 어떤 과목 살 거냐고 묻는 내 말에 대답도 아니하고 고등학교 참고서 코너에 다가간 유진은 그 중에서 한 권의 문제집을 쑥 골라내더니 카운터로 걸어가 신속하게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 내게 돌아온다.

다 샀어요.

 머?

어이가 없다. 방금 낸 택시값만 해도 그 문제집 값보다도 더 나왔겠구만.... 게다가 구하기 어렵다거나 그런 문제집도 아니고 유명 출판사에서 나온 잘 나가는 문제집이었다. 그럴거면 그냥 집 앞에 있는 서점에서 사면 되는 거 아냐? 정말이지 이 녀석의 사고방식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그나저나 그러면 나는 왜 끌고 온 거야? 과외방식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과외선생님한테 의견도 안 묻고.... 

이 녀석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따지기 시작하면 이 나이에 뒷목 잡고 혈압관리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따지는 것은 신속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서점을 빠져나가면서 유진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이제 집으로 가냐?

유진은 대답이 없었다. 뭐하는가 싶어서 돌아보니 서점 출구쪽에 자리잡은 팬시점에 서서 뭔가 좀 웃기게 생긴 인형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해? 집에 안 가?

 이거 이쁘네요.

......이봐. 그건 내가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잖아. 그리고 구체적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런 눈빛으로 날 쳐다보지 좀 말어. 나는 애써 그 눈빛을 외면하며 인형을 관찰하는 척을 했다.

좀 이상하게 생기지 않았어?

 예쁜데요.

이런 말하기는 좀 무엇하지만 차라리 니가 더 예쁘면 예쁘지 결코 그 눈만 댑따시 큰 인형에게 예쁘다는 표현을 쓰기는 힘들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그 녀석의 미적 감각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러는 대신 지갑을 꺼내어 인형값을 치루고 사주었다. 이 녀석의 행동에 이유나 조건 같은 것은 따지지 않기로 내심 마음 먹었으니까 말이다. 유진은 그 이상하게 생긴 인형이 뭐가 그리 마음에 드는지 품에 꼭 안고 걸어갔다. 거 참. 취향 한 번 굉장히 독특한 녀석일세.

밥 사드릴게요.

 응?

서점에서 나온 유진은 내게 말했다. 내가 대답을 주저하고 있자니 내 팔을 잡아끌고는 근처에 보이는 한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끌고간다. 그리고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해물스파게티와 크림스파게티를 시킨다. 

아니, 오늘은 과외 안 해?

 걱정마세요. 오늘도 과외 한 걸로 쳐서 페이 드릴테니까요.

 아니... 그런 이야기는 아닌데....

뒤통수를 긁적여 보았지만 뭐, 별 수 있나. 나는 잠자코 앉아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한참만에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도 언니가 와 있어요.

 응? 언니? ... 아... 선영씨 말이구나.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언니가 와 있는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지? 요리보다 먼저 나온 피클을 찝적거리며 그녀에 대해 묻자 유진은 답한다.

언니가 그만두라고 했다면서요? 정말 그만 둘거에요?

 아니. ...... 넌 내가 그만 두었으면 좋겠어?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가 살짝 흔들린다.

다행이네. 너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건 우습지만... 만약 과외에서 짤린다면 나는 당장 공사판 막노동이라도 하러 나가야 돼. 개강까지는 얼마 남지도 않았고... 개강이 되고 나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대학생은...

 용돈은요?

 물론 받긴 하지만.... 노인네 혼자서 밭 일로 번 돈은 당신 위해 쓰라고 하고 싶어서 말야.

문득 괜히 내려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설에도 내려가보지 않은 집 생각이 났다. 나만 보면 술만 먹이려드는 삼촌이나 이모들은 그렇다치고 남편도 없이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온 엄마의 모습이 잠깐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전화나 한 번 해볼까.

절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저씨는 합격이에요. 특별히 사고치지 않는 이상 자르지 않겠어요.

 .....사고는 대체 뭘 말하는 거냐.

 저를 귀찮게 하는 거.

 아, 예.

 지금 들어가봤자 언니에게 싫은 소리만 들을거에요. 오늘은 여기까지 과외하는 걸로 치고 다음에 수업하죠.

 예, 예.

참 대단한 은혜로움입니다. 뭐... 사양할 필요가 없으니 그 호의는 고맙게 받겠습니다.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고 있자니 유진이 묘한 질문을 한다.

근데 저보고도 뭐 특별히 할 이야기 없어요?

 음?

내가 왜 널보고 특별한 이야기를 해야 하냐, 라고 물으려다가 다시 곰곰히 살펴본다. 평소와는 다르게 교복을 입고 있다는 점 말고는 다른 걸 모르겠는데 말이다. 내가 그녀의 과외를 시작한 게 방학중이었기에 나는 그녀의 교복 차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복을 입고 있다. 아직 방학이 안 끝났을 텐데....? 그나저나 짙은 곤색의 체크 무늬 자켓과 푸른 빛의 치마라. 왠지 어디서 많이 본 교복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난다.

오늘 학교 가는 날이었어? 교복을 왜 입고 있어?

 하아..... 이건 이번에 들어가는 고등학교 교복이구요, 아직 가는 날 아니에요.

 그래?

 ...........

 ...........

 그게 끝?

 그럼 뭔가 더 물어봐야 돼?

뭔가 질문이 부족했나? 유진의 표정이 상당히 불만스럽다. 한참 고민하다가 간신히 후속 질문을 생각해낸다.

그럼 입학식때나 입지 왜 벌써 입어?

 ...됐어요.

표정을 살짝 찡그린다. 뭐가 대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마침 식사가 나왔기에 당분간은 먹는데 집중했다. 유진은 포크로 면발을 괜히 찌르며 투덜거렸다.

쳇.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뭐? 내가 뭘?

 됐어요. 그래 가지고 여친은 어떻게 만들었나 몰라.

 여친?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맞다. 너, 그때 나한테 삐삐친 거.... 내 번호는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아저씨가 그 때 씻으러 간 사이에 봤어요. 그 때 번호를 외운 거죠.

 뭐하러?

 글쎄요. 그냥 알아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거라 생각했죠.

 그날은 왜 호출한건데?

 선영이 언니가 나한테 막 뭐라 그러길래 가게에서 아저씨가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알았죠. 그거 물어보려고 연락한거에요.

 사...고?

잠시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대체 선영은 나에 대해 뭐라고 한걸까. 모르긴 몰라도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근데 정작 아저씨는 연락도 없고 왠 아줌마한테서 연락오더니 샤워중이라질 않나..... 정말 저질이야.

 명희가 아줌마는 아닌데... 그리고 내가 왜 저질이야.

 몰라서 물어요?

항상 무표정에 가깝던 유진의 얼굴이 이례적으로 살짝 붉어졌다. 

남자랑 여자랑 있으면서... 한 명이 샤워중이라니..... 어휴, 정말 불결해.

 아아, 그게.....그러니까..... 그건 말하자면 긴데, 아, 그리고 너랑 있을때 나도 샤워했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아요?

 ..........다른가?

 달라요. 그리고 그 아줌마는 아저씨에게 삐삐왔었다는 이야기도 안 해줬어요? 왜 나중에라도 전화 안 했죠?

 아니, 그게....

니가 지금 아줌마라고 매도하는 그 사람이랑 그 당시에 굉장히 열심히 땀 흘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느라 연락할 생각을 못 했다고 대답하면 이 아이가 뭐라고 반응할까. 궁금하긴 했지만 하지 않았다. 잘 참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나...나도, 사생활이 있는 거라고. 그리고 내가 곤란해지니까 되도록이면 호출은 하지 말아줘. 이유가 좀 있거든.

 됐거든요. 앞으로는 삐삐 치라고 해도 안 칠거에요.

 그래, 알아주니 고맙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가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다며 시내 극장으로 날 끌고 간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극장 간판 그림체로 멋드러지게 그려진 한석규가 양아치 차림을 한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진이가 한석규를 좋아한단다.

니가 보고 싶다던게 저거야?

 네.

 미성년자 관람불가라고 쓰여있는데?

 아저씨가 가서 표 사오면 되잖아요.

평일이라고는 하나 저녁이 되어서 그런지 아님 영화의 인기가 좋은 건지 제법 사람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표가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예약도 안 하고 무턱대고 왔으니 자리가 있을 리 없다. 빈손으로 돌아온 나를 보며 유진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시간도 늦었는데 집에 안 가봐도 되겠어? 다음에 보러 오자.

 제가 아저씨랑 왜 영화관을 같이 가야 되요?

매진이라고 써붙여진 매표소를 뒤로 하고 유진은 몸을 홱 돌려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아, 진짜. 여기 오자고 한 건 너거든! .......하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대인배니까. 참자. 참아. 유진을 따라 걸어가던 내 눈에 한 장소가 보였다. 유진을 불러세운다.

유진아, 그럼 저기 갈래?

 어디요?

내가 가리킨 방향에는 비디오방이 있었다. 한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저기가 크고 좋은 시설에서 영화를 보는 곳이란 소리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유진은 간판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안 그럴 것처럼 그러더니 의외로....

 응? 영화보자면서? 가기 싫어?

 아뇨. 가요. 가.

오히려 나를 끌고 유진이 앞장 선다. 비디오방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꽤나 프라이빗한 공간이다. 나는 노래방 같은 분위기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그보다는 뭐랄까. 룸에 가깝다고나 할까. 앉아서 보라고 놓여 있을 소파는 거의 침대 수준이었고 몹시 친절하게 옆에는 곽티슈까지 놓여있었다. 대체 용도가 뭐지.... 막상 들어와보니 굉장히 뻘쭘해졌다. 그러나 유진은 몹시도 태연했다.

뭐해요? 영화 시작해요.

 어? 어...

먼저 자리잡고 앉은 유진의 옆자리에 앉는다. 아니, 앉는다기 보다는 거의 눕는 자세가 된다. 손을 어떻게 두나 싶다가 얌전하게 모아 배 위에 얹었다. 무슨 관 속에 들어가는 시체 마냥 말이다. 녀석과 나의 거리는 50cm도 채 되지 않을만큼 가까웠다. 가만히 누워있는 와중에 들숨과 날숨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녀석의 흉부가 몹시도 신경쓰였다. 아직 덜 자란 곳인지라 언덕이라고까지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나름 봉긋한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지혜나 명희랑 왔다면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을텐데. 아니... 팔만 두르고 끝나리라는 보장이 없다. 뜻하지 않게 유진과 나란히 누워있다보니 이상한 생각이 나고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내가 이런저런 망상에 빠져있는 동안 영화가 시작되었다. 제목이 뭐래더라. 은행나무침대인가, 은행나무의자인가.... 암튼 유진이가 좋아하는 한석규가 나오는 영화란다. 비디오방에 들어오자마자 이 녀석이 골랐다. 작년에 주변에서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은 하도 이야기를 많이들 해서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다. 뭐 환생이라던가... 사랑이라던가.... 과학적인 사실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들어가있지 않은 터무니없는 영화라고 말이다.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신기술을 썼다는데 엄청 유치하기 짝이 없다. 나는 내심 투덜거리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으아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유진을 훔쳐보았다. 이 녀석은 이 영화에서 이런 낯뜨거운 장면이 나오는지 전혀 모르고 있던걸까. 뭘 믿고 이런 영화를 고른거야. 영화의 도입부에서 의외로 강렬한 씬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동기들이랑 연구실 안쪽에서 발표용 프로젝터를 몰래 돌려서 보았던 포르노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명백히 달랐다. 유진을 힐끔 쳐다보니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다. 내가 자꾸 쳐다보는게 느껴졌는지 그 녀석도 나를 보더니 한 마디 던진다.

왜요? 흥분 돼요?

 뭐, 임마?

 남자들은 시각적인 자극에 쉽게 흥분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상한 비디오도 열심히 구해다보고 그런다면서요? 아저씨도 그래요?

 그게 그러니까..... 아니다. 말을 말자.

너무나도 정확한 사실을 말씀하시니 반박을 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대충 손을 내젓고는 무마시켰다. 다행히도 야한 장면은 빠르게 지나갔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나름 흥미로운 것이었다. 유진이는 한석규를 좋다고 했지만 나는 내심 신현준이 너무너무 멋있었다. 남자로서의 무게를 꽉 채운 그를 보고 있노라니....그런 그가 악역으로 나오다는 사실 자체가 슬퍼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결말까지.... 아후윽. 황장군님.... 아흐윽....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 동안 왼손을 들어 빠르게 눈을 비볐다. 

울었어요?

 아니. 내가 왜...

 울었잖아요.

이런 귀신같은 년. 황장군보다 더 집요한 년 같으니. 그럴때는 그냥 모른 척 해줘도 된다고!

영화가 따분해서 졸려가지고 하품을 했더니 그래서 눈물이 쬐끔 나온거야.

 따분해요? 엄청 집중해서 보고 있던데요?

 내가 언제 집중했다 그래.

 얼마나 집중하시는지... 제가 손 잡아도 모르던데요?

 뭔 손을.... 어라?

그제서야 내 오른손을 잡고 있는 녀석의 작고 보드라운 손을 발견했다. 황급히 손을 뺐다.

왜.... 왜 이래?

 그냥 수현이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싶어서요.

......뭔 뜬금없는 소리냐. 참고로 수현은 한석규의 배역명이었다. 

저런 비리비리하고 우유부단한 놈이 뭐가 좋다고. 차라리 황장군이 백 배 낫겠네.

 뭐에요. 아저씨도 황장군쪽이에요?

 아저씨도?

도라는건 나말고도 누군가 황장군을 또 좋아한다는 거잖아. 누구냐 그게.

선영이 언니도 수현보다는 황장군쪽이던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별로 반갑지 않은 이름이 나온다. 그 사람이랑 나랑 좋아하는 배우가 같다니 은근히 기분 나쁘다.

당연히 황장군이 훨씬 낫지.... 아니, 그나저나.... 너 말야 전에 이 영화 본 거였어?

 한석규 나온 영화는 LD판으로 다 가지고 있어요.

머리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시 멍때리고 있었다. 한석규 나온 영화는 가지고 있다 - 이 영화에는 한석규가 나왔다 - 그렇다면?

봤던 영화냐!

 그 사실을 한참동안 추론한 건가요?

 대체 본 영화를 왜 또 보는 건데?

 아저씨는 안 봤을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하지만....

정말이지 이 녀석의 사고패턴을 이해하려면 내 뇌구조를 완전히 뜯어고치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대체 왜 봤던 영화를 다시 돈까지 들여가면서 보는 건데? 그러고 보니 비디오방 계산도 이 녀석이 했다. 아무리 집이 잘 살아도 그렇지 돈이 썩어나나. 최근 들어 여자들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이 이 녀석 앞에서는 정말이지 무용지물이다. 비디오방을 나와 다시 택시를 타고 유진이네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인지라 아무래도 집까지 바래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집까지 바라다줄 필요가 없어보였다.

유진아!!!!!

아파트 단지 입구에 나와있던 선영이 택시에서 내리는 우리를 보자마자 황급하게 달려온다. 유진이를 한번 부둥켜 안고는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살피는 꼴이 흡사 무슨 이산가족 상봉장면 같다.

잠깐 나갔다 온다하더니 어딜 갔다 온거야! 연락도 없고!

 미안, 언니. 나도 잠깐 다녀올려 그랬는데 중간에 선생님을 만나서....

자...잠깐! 그런 소리를 하면 저 신경질쟁이 탑클래스의 여자가 나를 보고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잖아!! 역시나 내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분노 가득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이봐요! 대체 정신이 있는 거에요, 없는 거에요? 이 시간까지 애 데리고 대체 어디서 뭘 한 거죠? 제정신이에요?

 아...아니, 난 그저 유진이가 서점에 가고 싶다고 하길래....

 서점? 서~점? 지금 장난해? 시간이 몇시인데 서점 다녀오는데!!

유진이가 뜯어말리지만 않았다면 아마 선영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빼들어 나를 내려쳤을지도 모른다. 유진이 간신히 선영을 진정시키는 사이에 그 자리를 뜨기로 했다. 유진이 내 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민다. 유진과 헤어지기 직전, 살짝 물어보았다.

대체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렇게 핀치로 몰아?

 일종의 벌이에요. 쳇.

 벌?

 암튼, 영화 잘 봤고 생일 선물 고마워요. 잘 간직할게요.

 뭐? 어라?

유진은 아직도 펄펄 뛰는 선영을 밀어 아파트 쪽으로 가면서 한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흔들었다. 눈 튀어나오고 웃기게 생긴 그 인형은 유진의 손 끝에서 방정 맞은 동작을 선보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마주 흔든다.

하아, 대체 뭐냐고...

정말이지... 저 유진이라는 녀석을 이해하는데는 아마도 평생걸려도 부족할 것 같다. 아니지. 굳이 평생 보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명희와의 잊지 못할 그 날 이후.... 그러니까 명희와 모텔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낸 이후, 그녀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노예 콜 전용의 삐삐는 잠잠했다. 내가 연락을 할 수도 있고 직접 찾아가 볼 수도 있었지만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그러질 못 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그 날을 떠올려본다.

세 번인지 네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밤을 새워 몸을 녹이고 그녀 안에 나를 밀어넣은 채 그대로 골아떨어졌던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방안에 없었다. 널부러진 콘돔과 휴지를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내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대며 협박하고 강간 미수 사진을 찍어 나를 노예로 만들었던 불과 몇 달전 그녀의 모습과 전날밤 나의 몸 아래에 교성을 지르며 몸을 떨고 나를 끌어안으며 혀를 섞던 그녀의 모습은 좀처럼 겹쳐지지 않는다. 마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반가운 표정보다는 움찔하는 기색을 내비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다.

며...명희씨.

 한석씨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

과사무실에 들어갔더니 한쪽 소파에서 진호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명희와 눈이 마주쳤다. 차분한 자세로 앉아 선배와 이야기중인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포르노 처음 본 중딩이 다음날 버스에서 앉아있는 생판 처음 만난 아가씨의 모습을 보며 포르노가 연상되어서 알몸이 상상되는 것처럼 확 흥분이 달아올라버렸다. 바지 안쪽에서 급격한 팽창이 시작되고 말았다. 자동반사적으로 흥분되는 몸과는 다르게 말투는 몹시 공손하게 나왔다.

오...오셨네요. 어쩐 일로...

 진호 오빠랑 교회 관련해서 이야기할게 좀 있어서요....

 아, 예....

 ..........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남녀처럼, 우린 서먹했다. 나는 그녀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잘 모르겠다만 그녀는 또 왜 이런 반응이려나. 어쩐지 평소대로의 그녀라면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이라도 확 붙잡으면서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를 거 같은데 말이다.

하이고, 예가 과사인교? 들어오는 길 선배님이랑 안 왔시면 길 잃어버려가 뺑뺑 헤매기 딱 좋다 아입니까.

 어? 어....

명희가 내 팔을 붙잡는 게 아니라 뒤따라 들어온 활달한 후배가 내 팔을 덥썩 붙들며 사무실을 둘러본다. 며칠 사이 지혜네서 식객으로 지내고 있는 요 녀석은 스킨십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시도해온다는 점에서 꽤나 골치 아픈 녀석이다. 뭐.... 만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끈적한 스킨쉽을 이 녀석에게 시전한 내가 그런 점에 대해 지적질을 하면 곤란하겠지.

아, 이 분도 선배님인교? 안녕하십니까. 김마리라고 합니데이.

마리는 자기를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명희를 보곤 선배인줄 알고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진호 선배에게도 인사를 하러 간다. 명희쪽을 쳐다보자 그녀는 천천히 예전의 표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시니컬하고, 강하고, 독기있는...... 그런 표정 말이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야, 쟤는 또 뭐야. 엉?

 그게 그러니까....

진호 선배랑 꽤나 즐겁게 대화하며 하하거리고 있는 마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명희가 묻는다. 어느샌가 내 곁으로 바짝 다가온 그녀는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설명을 요구한다. 아니 찌르는 수준이 아니라 숫제 갈비뼈를 부수어뜨릴 요량으로 나를 강타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잘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살짝 으르렁거리듯이 말한다.

니 놈이 말한 년은 그래, 지혜인가 뭔가 하는 년이랑 효진이, 그리고 그 중딩. 셋이잖아. 저건 또 왠 거야?

 중딩은 아니고 이제 고딩인데.... 아니, 지금 그 애 이야기는 대체 왜.... 그리고 왠 거라기 보단 그게....어.....

학교에서 주워온 후배, 라고 설명하면 그녀가 이해해주려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진호 선배와 마리는 인사와 통성명을 끝내고 있었다. 학교 구경하러 며칠 전에 올라왔다는 마리의 이야기를 들은 진호 선배는 의례적으로 묻는다.

그래서 지금 어디 지내고 있는데?

 지금예? 하하. 한석 선배네서 지내고 있어예. 잘 해주시네예.

 아, 그래?

그 순간 나는 느꼈다. 아무리 후배라곤 하지만 분명히 한석이는 혼자 살고 있는데 거기에다 여자애를 재운단 말인가 싶은 의아함이 가득한 진호선배의 눈길과 별꼴이다라고 나를 비난하는 과순이의 눈빛과 이건 대체 무슨 놈의 소리냐고 내 기필코 네 놈을 죽여버리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는 명희의 기세를 말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천하의 개쌍놈, 파렴치범, 색마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저희 옆집에요!!! 친한 친구가 있어서 거기서 지내고 있어요!! 물론 여자애고요!! 그 집에....

 옆집에 친한 여자가 산다고?

진호 선배의 눈길은 명희쪽을 한 번 보았다가 나를 다시 한번 본다. 아까보단 덜 하지만 그래도 의혹이 담긴 눈빛이다. 끄아악. 그러고보니 명희와 나를 소개해준 사람이 진호 선배였지. 게다가 선배는 나랑 명희랑 지금 잘 사귀고 있는지 알고 있고.....

친하지만!! 결코 이상한 사이는 아닙니다!! 정말로요!!!

 ......누가 뭐래니...

이대로 과사에 오래있다가는 좋은 꼴을 못 당할 것 같아서 얼른 명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 끝을 지나 공대 안쪽 마당에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내 정강이는 사정 없는 로우킥을 맞아야만 했다. 분명 공격이 들어올거라고 마음 먹고 나름 대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미처 방어하지 못한 공격은 무척이나 날 아프게 한다.

으헉!

 빨리 설명해. 이 새끼야. 네 놈은 정말이지....

눈빛으로 불도 지를 수 있을 것 같은 명희는 조금만 설명이 늦었다간 나를 잡아먹을 태세다. 급한 마음에 두서없이 횡설수설 설명을 시작한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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