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돈 때문이다. 속 모르는 사람은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 건강에 좋으라고 하는 줄 아는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교통비를 줄이기 위해서란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탁한 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릴 이유가 없다.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자동차가 사람보다 많아보이는 이 도시에서, 매연으로 그득한 도로를 달리다보면 폐까지 썩어들어가는 기분이 저절로 든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걸 만나는 날에는 육체가 아니라 마음까지 썩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끼익-
브레이크가 거친 소리를 낸다. 조만간 기름칠을 한번 더 해야할 듯 싶다. 자전거를 길가에 세워두고 다가갔다. 손을 내밀어 들어올린다. 내 옆으로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이 위협적으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저들중에 범인이 있겠으나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안하다....
손에 들린 녀석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 숨은 희미하고 육체는 반쯤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회생의 기미는 없다. 내가 이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품에 안고 멍하니 있는 것 뿐이다. 그렇게 내 품안에 안긴 이름 모를 개는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시골이라면 시골이고 아니라고 애써 주장하면 아니라고 할만한 곳이다. 터미널과 다방거리를 중심으로 시장이 발달해있고 새로 생긴 공장 덕분에 인구가 북적이기 시작했지만 불과 십여분만 걸어나가면 금방 논과 밭이 펼쳐지는 그런 곳이었다. 급격한 산업화 덕분에 마을은 흥청망청할 수 있었지만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경운기를 쫓아다니던 동네 개들은 전혀 그럴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차량들의 행진에 개들은 익숙해지지 못 했고 익숙해지지 못한 개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어에 짖밟힌 주검으로 변해갔다. 살아남은 개들은 그만큼 눈치가 좋다는 이야기겠지.
다만, 아쉽게도, 우리집 개는 그렇지 못 했다.
평소에 내가 부르면 본체만체도 안하다가 삼촌들이나 어머니가 부르면 귀를 완전히 눕혀가지고 살랑거리던 그 똥개는 전혀 귀엽지도 않았고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다. 허구헌 날 대문앞에 똥을 싸질러 나로 하여금 똥담당이 되게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던 여자 아이가 우리 동네에 온 날 그 녀석 치마를 물고 늘어져서 그 아이를 한바탕 울리는 바람에 남은 학기 내내 그 아이를 피해다니게 만들었다. 그 녀석 밥그릇에 밥이 남아있는 줄도 모르고 마당을 쓸다가 밥그릇을 쳐내었더니 득달같이 달려와 나한테 으르렁 거리던 적반하장의 놈이었다.
그런데도 그 녀석의 죽음 이후, 나는 길에서 만나는 작은 시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지금만해도.... 그렇다. 아까 내가 주워들을 때까지만 해도 가냘프게 숨을 이어가던 녀석은 이제 완전히 숨을 쉬지 않았다. 내려놓고 싶었다. 죽음의 무게는 손으로 들고 있을 만큼 가볍지 않다. 어서 대지로 돌려보내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덮여있는 이 서울이라는 도시는 한 뼘의 흙도 보여주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걸어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힐끔거리며 지나간다. 마주 보며 걸어가다가 흠칫 하고 거리를 두는 사람도 있다.
유진이네 아파트 단지에 이르자 다행히도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적당한 나무 아래에 녀석을 내려놓고 관리실로 가서 삽을 빌려왔다. 배와 허리춤, 손바닥에 피를 잔뜩 묻힌 내 모습을 보고 경비원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기겁을 하였으나 내 설명을 듣고나더니 삽을 내주었다.
댁에서 키우던 개요?
아닌데요.
삽으로 구멍을 파는 동안 경비원 할아버지는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면 아는 사람이 키우던 개요?
아닌데요. 그냥 길 가다가 본 녀석이에요.
할아버지는 혀를 찼다. 구멍을 파고, 녀석을 묻고, 흙으로 다시 덮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삽을 가져다 돌려주었다. 그리고 유진이네로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잠깐, 이 꼬라지를 하고 과외를 한다고? 남의 집에 들어간다고? 특수강도로 신고당하기 딱 좋은 모습이긴 한데 그래도 어찌어찌 아는 사람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대충 손으로 피와 흙을 털어냈다. 그리고나서 벨을 누르려는데 문이 먼저 열렸다. 아직 벨도 안 눌렀는데....
어라?
들어오세요.
여전히 유진은 혼자 있었다. 표정이 무척이나 어둡다. 그러고보니 약속한 과외시간보다 30분 가량 늦게 도착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앗.... 미....미안. 그게 말이다.
변명을 하려 했지만 유진은 그런 내 말을 무참히 씹었다.
됐으니까 저기서 씻고 와요.
아, 그런가....
황급히 유진이 가리킨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대충 손을 씻고 나갔더니 유진이가 인상을 팍 쓴다.
옷 다 벗고, 샤워하세요. 갈아입을 옷 갖다 드릴게요.
어? 그래도 샤워는 좀....
피투성이 꼴하고 수업할 생각이에요? 빨리 씻어요! 벗은 옷은 여기 내놓구요.
어? 어....
유진의 박력에 밀려 얼른 욕실로 돌아갔다. 옷을 모두 벗고 문 밖에 내놓은 다음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씻고 있노라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피와 흙, 불유쾌한 것들이 씻겨나간다. 그러다 문득 묘했다. 아무리 어린 애라고 하지만 여자애 혼자 있는 집에서 남정네가 샤워라니!!! 발가벗고!!! 자지를 내놓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이상한 느낌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꺄악-
나도 모르게 사춘기 여자아이처럼 비명을 질러버렸다. 팔로는 가슴을 가린다. 아니, 이럴 때는 아래쪽을 가려야 하나.
........그쪽 안 보고 말만 할테니 듣기만 하세요. 여기 갈아입을 옷 갖다놓았으니 나올때 이걸로 입으세요. 벗어놓은 옷은 빨겠습니다.
그....그래.
무슨 히치콕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도 아니고 비명이냐, 비명은... 굉장히 뻘쭘했다.
샤워를 마치고 유진이가 가져다놓은 옷을 보니 남자옷이었다. 그것도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정장. 게다가 속옷까지 갖춰져 있었다. 주섬주섬 입어보니 얼추 맞았다. 거실로 나가니 내 가방과 삐삐가 거실 탁자에 놓여있었고 유진은 늘 앉던 자리에 앉아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내 옷은 보이지 않았다.
아, 미안. 번거롭게 했네.
됐어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늦게 되면 연락을 하시죠.
알았어.
유진은 고개를 들어보어 나를 가만히 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군다. 나를 왜 그렇게 유심히 보나 싶었는데 어쩌면 내가 아니라 이 옷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아버지는 한번도 못 뵌 거 같네. 이거 아버지 옷이야?
.......아니에요.
그래? 그럼 혹시 오빠 있는 거야? 나중에 감사하다고 말씀 좀...
오빠는 없구요. 그리고 감사인사는 전할 필요 없어요. 다시 안 볼 사람꺼니까. 아저씨가 그냥 그 옷 가지셔도 돼요.
그....그래?
왠지 유진의 말투가 단호했기에 더 물어보기가 껄끄러웠다. 내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과외가 끝나고 주문한 초밥을 기다리는 동안 - 이제는 나도 초밥을 먹는다 - 유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개에요, 고양이에요?
응?
아까 단지로 들어올때 안고 들어온거 말이에요.
유진은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가리킨 쪽으로 내다보니 아파트 단지 입구와 화단, 그러니까 아까 내가 들어오고 개를 묻은 곳이 잘 보이는 위치였다. 왠지 쑥스러웠다. 그걸 다 보고 있었단 말인가.
아아... 개였어.
선생님 개?
아니. 그냥 지나가다 본 개야.
그걸 안고 와요?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왜 그랬지. 한참을 고민해도 답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그럼 그냥 두고 올 수는 없잖아.
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하고 만다. 실속없이 웃으며 대답하긴 했지만 그걸 듣고 있던 유진의 표정은 묘했다. 한참동안 대답이 없던 녀석은 뭔가 중얼거렸다.
.......내가 죽으면 그 사람이 날 안아줄까요?
뭐?
유진이 뭔가 중얼거렸지만 제대로 듣지 못해서 재차 물으려는데, 배달원이 도착했다. 초밥을 먹기 시작하니 아까의 주제를 다시 꺼내기 힘들었다. 게다가 몹시도 침울한 표정의 유진이인지라 뭔가 말 걸기 미묘한 분위기였다. 덕분에 내 옷을 돌려달라는 소리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조용히 초밥만 먹고 돌아왔다.
비싸보이는 양복을 입고 사이클을 달리니 이 또한 미묘한 기분이다.
오늘이 드디어 월급날이다. 게다가 결전의 날이다. 두둥-
얼마전에 유진에게 받은 정장을 꺼내어 입어본다. 다소 노티나보이는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이다. 유진에게 옷을 돌려주려고 하였지만 자기 집에서는 입을 사람이 없다며 나보고 가지라고 했다. 입을 사람이 없는 옷을 그럼 왜 가지고 있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좋은 옷을 준다기에 사양도 안 하고 덥석 받아들였다. 이 놈의 거지근성. 나란 남자. 저렴한 남자.
평소와는 다른 차림으로 유진이네 집으로 향한다. 혹시나 싶어서 계속 삐삐를 들여다보았지만 이전의 [4444] 이후로 어떤 메시지도 들어와있지 않았다. 학교에서 진호 선배을 보고 뭔가 물어볼까도 싶었는데 차마 말은 꺼내지 못 했다.
예를 들어,
진호 선배, 제가 명희씨에게 오해를 하나 샀는데 그걸 풀 수 있을까요?
무슨 오해?
제가 콘돔을 가지고 있는 걸 명희씨가 보고 언짢은 생각을 했나본데요, 전 그걸 명희씨에게 쓰지 않고 다른 여자에게 썼습니다. 그러니 오해에요.
.........라고 말할 순 없잖는가. 아무리 선량하고 후배를 잘 챙기기로 소문난 진호 선배지만 이런 소리를 듣고 나를 살려둘 것 같지는 않다. 명희의 본성을 모르는 그에게 있어 그녀는 착하고 귀여운 교회 동생이니까 말이다.
일단 집을 나서기 전에 명희의 삐삐에 음성을 남겼다.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면 남기지 말라고 했던 삐삐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정중히 사과를 했다. 그리고 사과의 뜻으로 오늘 과외 끝나고 같이 레스토랑에 가자는 말도 남겼다. 호텔 레스토랑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근사한 곳으로 시내 모처에 예약을 했으니 꼭 와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시간과 위치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내가 유진이네 집에 도착하고 맨날 하는 '과외'를 마칠때까지 호출은 오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응, 그래. 너도...
두 시간 동안 꼬박 문제집을 풀던 유진이 책을 덮음과 동시에 나도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유진이 전화기를 들고 초밥 2인분을 시켜서 기다리는 동안 오늘은 어머님이 오시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뇨. 근데 왜요?
아니, 저. 그게 말야... 오늘이 그날 아닌가 싶어서 말야. 월급...
아무리 어른스러운 애라고 하지만 그래도 명백히 어린 아이에게 돈 이야기를 꺼내는 건 좀 우스웠다. 그래서 한참을 주저하다가 겨우 말을 꺼낸다.
그날....? 월급....? 아, 맞다.
항상 무표정하던 유진의 얼굴에 처음으로 살짝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유진은 다시 전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언니? 저에요, 유진이......네...........네..........엄마 있어요? 예? 음..... 네.......
한참 통화를 하던 유진은 대화를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뭔가 더 이야기하더니 전화를 끊는다. 내 이름도 몇 번 나오고 월급 어쩌구 하는 걸 봐서 월급 이야기인거 같기는 한데... 유진은 나를 쳐다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혹시 ㅇㅇ동이 어딘지 아세요?
아는데, 왜?
죄송하지만 돌아가실때 거기에 잠깐 들렸다 가시면 안 될까요? 제가 엄마한테 월급 이야기 하는 걸 깜빡했네요. 지금 언니에게 이야기해두었으니까 저희 가게에 잠시 들렸다 가주세요.
가게에 가서 돈을 받아가라니.... 낭패였다. 아무리 내가 받아야할 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일수쟁이 수금하듯이 받아가는 건 또 웃긴데 말이다.
에? 그냥 다음에 올때 주면 안 돼?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아저씨도 항상 시간을 잘 지켜주셨는데 제가 약속을 어길 순 없죠. 오늘 드리기로 했으니까 오늘 받아가세요.
뭐랄까. 이 녀석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다는 점에서 묘하게 반박하기 힘들다. 게다가 만약 지금 바로 월급을 받지 못한다면 이따가 갈 레스토랑에서도 무슨 수로 지불을 할 건지 막막하기도 했다. 내가 마지못해 수긍하자 유진은 노트 한 페이지를 찢어 거기에 약도를 그려주었다. 그리고 말로 몇 군데 보태어 설명했다.
......이쪽에서 보시면 아마 보일 거에요. 가게 이름은 로즈구요.
아, 가게 이름이 로즈. 음, 근데 뭐하는 가게인데?
..........
항상 명확하게 대답하던 유진이 왠일로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녀석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자 살짝 눈을 내리 깔고 대답했다.
가보시면 알아요. 찾기 어려우면 저한테 전화하시구요. 가서 선영이 언니 찾아서 제가 보냈다고 하세요.
선영씨? 알았어.
참고로 저희 엄마는 아마 없을 테니까요. 절대로 찾지 마시구요. 그냥 선영이 언니가 만나서 월급받으세요..
응?
뭔가 좀 이상한 뉘앙스의 말을 한다. 마치 자기 엄마를 만나지 말라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다음 달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어? 어... 그래.
유진의 단호한 말에 더 이상 궁금한 것은 전혀 물어볼 수가 없다. 곧 이어 배달된 초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사이클에 올라타고 유진이 알려준 곳으로 달려간다. 직선거리가 가까워서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곳은 유흥가로 유명한 곳이다. 말로만 들을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가보니 유흥가 중에서도 정말 최고의 정점에 달한 곳이다. 아직 오후라서 사람도 없고 연 가게도 별로 없어서 썰렁했지만 아마 해가 지고 나면 가장 밝은 곳이 여기가 아닐까 싶다. 실제 길과 약도를 맞추어 나가면서 로즈를 찾았다. 그리고 유진이 대답하기 껄끄러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로즈 Rose]
그곳은 술집이었다. 그렇다고 막 대학생들이 써클모임 갖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잔 걸치러 들어가는 그런 개방된 술집이 아니라 그 왜 있잖는가. 입구부터 딱 고급스런 분위기 물씬물씬 풍기고 지하로 들어가야 하는데다가 건물의 바로 위는 모텔로 되어있는, 그런 술집 말이다. 입구의 홀에서 둘러보니 각각의 방이 복도를 따라서 죽 늘어져 있어서 약간 노래방과 비슷하게 생긴 느낌이 든다. 물론 훨씬 더 고급스럽고 은밀한 분위기지만.
저기, 저기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보이고 맥주박스를 나르고 있는 웨이터가 보여 불렀더니 나를 힐끔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가온다. 몹시 귀찮아 하는 표정이다.
손님, 아직 영업 시작 전입니다.
아뇨. 전 그게 아니라 누구 좀 만나러 왔는데요.
아가씨들도 아직 준비 전 입니다.
아가씨들도 나오는 곳이구나. 아니, 이게 중요한게 아니지.
그게 아니라 유진이가 보냈는데 여기서 선영씨 찾으면 된다고...
아, 글쎄. 유진이고 선영이고 나발이고 아직 준비 안 되었다니까?
아무래도 이 자식은 뭔가 사회에 불만이 있는 놈인가 싶었다. 내가 딱히 진상짓을 한 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나를 다소 거칠게 밀쳐내며 나가라고 종용한다. 은근히 열이 받는다. 내가 여기에 뭐땜에 왔는데! 게다가 오늘은 큰 맘 먹고 좋은 옷도 입고 있는데!! 이렇게 민다고 밀릴 내가 아니다.
이군아~ 왜 그러니?
웨이터와 살짝 옥신각신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제지한다.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볼륨있는 몸매의 매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몸에 착 붙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 한 명이 다가왔다. 긴 생머리를 등 중반까지 늘어뜨리고 얇은 금테 안경을 살짝 걸치고 있어 꽤나 지적인 분위기였다.
아, 사장님. 지금 이 아저씨가 아직 영업도 시작 안 했는데 막 들어와서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선영씨라는 분을 만나러 온 거라니까요.
선영이가 누군데? 그런 사람 여기 없어!
엑? 유진이가 여기로 가라 그랬는데? 내가 잘못 왔나?
유진이는 또 누구야?
웨이터가 툴툴 거리는데 여자가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더니 귓속말을 좀 한다. 그러자 웨이터는 금방 표정이 변하여 내게 인사를 꾸벅하고 가버렸다. 뭔 일인가 싶어서 여자쪽을 쳐다보니 마주보며 생긋 웃는다. 화장이 조금 진했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왠지 낯익다. 분명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왜 얼굴이 낯이 익을까?
유진이 과외하시는 분 맞죠? 이군이 여기 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애라서요. 아직 잘 모르는게 많네요.
아, 예....
우리 유진이 공부 잘 하고 있죠?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예? 아, 저... 그게.... 오늘 과외 월급날이라....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벌써 그렇게 됐나?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 유진이? 어렴풋이 깨달았다. 전에 유진이네 집에 전화 걸 때 통화했던 목소리가 바로 이 목소리다. 사무실에 따라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 혹시 유진이 어머님 되시나요?
어멋~ 제가 아직 인사를 안 드렸네요. 예, 제가 유진이 엄마에요. 진유미라고 합니다.
아, 예. 최한석입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길래 나도 마주 보며 인사를 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는 가슴이 꽤나 깊게 파여져 있는 거라 몸을 숙이면서 가슴골이 훤하게 드러났다. 뭇 아가씨들이 그러하듯 손을 들어 가리거나 하는 유치한 짓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당당하게 인사를 하니 시선을 돌리기도 뭣하고 워낙 짧은 순간이었지만 고스란히 그 계곡을 감상하고 말았다. 지혜만큼은 아니지만 이분도 꽤나 상당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지혜를 본지 꽤 되었다.
오호호, 딸래미 과외 부탁드리고도 이제서야 뵙다니 꽤나 면목이 없네요. 그래도 선생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셔서 만날 수 있고, 괜찮네요.
아? 네에....
소파에 앉기를 권하기에 먼저 앉았다. 당연히 맞은 편에 앉을 줄 알았는데 유미는 내 옆에 와서 착 붙어 앉았다. 얇은 옷 너머로 그녀의 몸매 라인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유진이는 좋겠네. 이렇게 잘 생긴 선생님이랑 단둘이 과외도 하고 말이에요. 혹시 유진이가 공부 집중 못 하고 그러는 건 아니죠? 선생님 얼굴 보느라고 책도 못 보고 말이에요. 호호호호~
아뇨, 딱히 그러지는.....
댁의 따님은 세상 누구보다 책을 들이파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어느샌가 내 한 손은 그녀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끝에 옅은 진주빛으로 물든 손톱이 보인다. 손을 잡고 있다기 보단... 내 손등을 쓰다듬기도 하고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숫제 가지고 논다.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제가 워낙 배운게 없어서 그냥 웃음팔고 술팔고 그러고 살지만 유진이는 절대 그러지 않을 애니까요. 잘 이끌어주시고 보살펴 주세요.
아, 예. 유진이는 잘 하고 있습니다. 꽤 똑똑하던데요.
아빠 닮았으면 똑똑할거에요. 암요. 유진이는 아빠가 누군지 모르지만 저는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그런가요...
딸래미가 자기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는 대체 어떤 경우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녀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로 했다. 입을 다물었다는 소리다. 내 손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문득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위아래로 살짝 훑어보더니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었다.
옷이 잘 어울리네요.
네? 예... 아, 맞다. 그러고보니 이 옷은 사실....
괜찮아요. 선생님께 잘 맞는 걸 보니 그대로 입으셔도 되겠네요.
그런가요....
그때 마침 한 아가씨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유미가 아가씨에게 물었다.
혹시 1번방 준비되어 있니?
네.
이 분 좀 1번방에 모셔. 귀한 손님이니까 알아서 잘 준비해. 알았니?
네.
유미는 내 손을 잡아 끌어 아가씨쪽으로 향하게 했다. 나는 엉덩이쪽에 힘을 주어 살짝 버티며 말했다.
아뇨, 전 그게 아니라.... 그냥 페이만 주시면 되는데요. 이럴려고 온게 아닌데....
어머, 그건 제가 알아서 준비할테니까요. 좀만 쉬었다 가세요. 선생님도 참~. 이런데 와서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윙크까지 살짝 해가며 나를 부추기는 유미의 기세에 못 이기겠다. 얼굴이 꼭 닮은 이 모녀는 조금씩 방법이 다르긴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말을 거역하지 못 하게 하는 능력은 비슷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수긍하고 말았다.
그....그런가요?
그럼요. 친구네집이 중국집 하면 가서 짜장면 한 그릇씩 얻어먹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안 그래요?
그건 그렇죠.
뭐, 나도 어렸을때 방앗간 하는 영수네 집에 가서 떡 뽑을 때 꼽사리 껴서 조금씩 얻어먹기도 하고 그랬지. 그게 우리네 인심이라고는 하지만 말야,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 얻어먹고, 떡집에 가면 떡 얻어먹는게 당연하다면 술집에 가서 술 얻어먹는게 당연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약 십여분 뒤, 나는 그 당연하다는 생각에 수정을 가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제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거 한 병에 얼마인가요?
늘 친구들과 가는 호프집에서 가끔 시키는 과일안주접시와 비교할때 그 양과 질이 세 배는 족히 되어보이는 과일안주와 홀로그램 스티커가 붙어있는 양주병들과 맥주병들. 그리고 우유. 실론티. 기타 등등이 내 앞에 주욱 늘어선다. 이건 당연한 수준이라기에는 너무 과한 거 아닌가. 그 중에서 개별적으로 가장 비싸보이는 양주병 하나를 집어들고 오른쪽에서 귤을 까고 있는 아가씨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왼쪽에 있던 아가씨가 킥-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에요, 아님 장난치시는 거에요?
정말 몰라서 그러는데요. 비싼거죠? 그리고 이름이 뭐라 그러셨더라.
지나에요. 글쎄요. 한 이삼십하지 않을까요? 저희도 가격을 알고 있는 건 아니라서요. 후훗.
오른쪽에 있던 아가씨도 따라 웃는다. 오른쪽에 있는 아가씨 이름은 또 뭐였더라. 희진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정신이 없다. 어느 순간, 나는 대형룸에 덩그러니 앉아있었고 지나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희진이라는 아가씨가 들어오더니 내 좌우에 앉았다. 그리고 안주와 술이 차려졌다.
어차피 마담 손님이시니까 오빠가 내는 것도 아니잖아요. 왜요, 더 비싼걸로 시킬까요?
아뇨. 그리고 저 술은 좀.... 이따 약속도 있거든요.
어머? 그래요? 잘 됐다. 우리도 너무 일찍이라 좀 그래요.
원래는 몇시부터 하는데요?
우리야 뭐, 대충 여덟시나 되야 출근하고 그러는데 이제 다섯시도 안 됐잖아요.
음료수잔에 손을 뻗자 희진이 먼저 캔을 따서 얼음을 채운 잔에 따라준다.
고맙습니다.
뭘요.
희진은 눈웃음이 꽤나 매력적이었다. 얼굴이 막 이쁘다기보단 조목조목 예쁘게 생겼는데 특히 눈가가 꽤나 예뼜다. 왼쪽에 있는 지나보다 말이 없었다.
이런데 첨 와보시는구나? 그쵸?
네.
그럼 풀코스로 안 가도 되겠네요? 아까 마담언니가 잘 모시라고 하긴 했는데... 가야되나?
풀코스요? 그건 뭔데요?
에이, 진짜 모르는 거에요, 아님 순진한 척하는 거에요? 은근히 밝히게 생기긴 했는데~
왠지 뉘앙스는 알 것도 같았다만.... 그나저나 유진이 엄마는 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게 친구집에서 얻어먹는 수준이냐!! 으아니..... 정말,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럼 그냥 우리 노래나 부르고 놀죠. 아직 밴드 아저씨들 안 왔으니까 기계 가져올게요.
지나가 이렇게 말하자 희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아마도 지나보다 희진이가 쫄병인가 보다. 내 짐작이 맞냐고 묻자 지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가게는 애들 관리가 엄해서요. 음.... 마담언니 말 안 들으면 진짜 큰일나거든요. 그리고 왕언니 말도 안 들으면 안 되고... 뭐,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위계질서가 잡혔다고나 할까?
마담언니? 왕언니? 무슨 계급이라도.... 여기가 군대도 아닌데...
아, 맞다. 오빠는 군대 갔다 왔어요?
아뇨. 아직...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했던 입대 연기신청 결과 통지서가 날라올때가 되었는데...
와~ 그럼 진짜 나이 어리겠다. 몇 살이에요?
스물 세살이요.
오~ 나보다 어리네?
깜짝 놀랐다.
엑? 아까는 스물 두살이라면서요.
에헤헤~ 그거야 당연히 영업용 나이고. 오빠한테는 굳이 거짓말 할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말야.
그럼 저보다 연상이시라는 건데 왜 계속 오빠라 부르세요?
그럼 동생이라 부를까요? 어휴~ 우리 동생~ 귀엽네~
아주 그냥 나를 가지고 논다. 그런데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대개 동생보고 귀엽다고 할때는 볼따구를 만지거나 하지 않나요. 거기가 아니라?
그녀의 손은 볼따구가 아니라 내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위쪽으로 은근히 타고 와서는 지퍼도 슬금슬금 내리고 있었다.
후훗~ 풀코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사는 할게요. 혹시 마담언니랑 친한 분이면 좀 잘 보여야 되지 않나 싶어서~
저, 그렇게 친한 분은 아닌데....
그러나 이미 내 똘똘이는 그녀의 입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게 인사야? 아윽. 이걸 거부할 필요는 그닥 없겠지? 그냥 인사니까. 순식간에 바지 지퍼가 내려가고 내 똘똘이가 외출했다. 어머, 괜찮은데? 라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곧 프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내가 비록 여자 경험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몇 명의 여자에게 빨려본 경험을 가지고 그 Feel에 대한 순위를 매기자면 단연 이 아가씨의 압승이다. 흡입력, 감도, 전진과 후퇴의 적절한 조화, 불알의 애무, 빨때 빨고 핥을 때 핥을 줄 아는 임기응변까지... 불과 3~4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지는 마치 사춘기 중학생이 연예인 수영복 사진 앞에 두고 딸딸이 치는 것처럼 급속도로 현기증을 호소하게 된다.
'나...나올 것 같아!'
라고, 자지가 외치는 것 같다. 몽롱해진 내 시야에 다른 아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찍 싸버렸을 것이다. 아까 가라오케 기계 가지러 간다던 희진은 아니고 좀 엄해보이는 인상의, 차가운 얼굴의 아가씨였다. 몸에 착 붙는 원피스가 주력 유니폼인 이곳 아가씨들과는 달리 H라인의 정장 투피스 차림을 한, 본격적인 OL같은 분위기였다.
누....누구세요?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좀 더 예리한 눈빛을 하고 나에게 대답대신 질문을 되돌린다.
최한석씨인가요? 지금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기분탓인가. 왠지 비난하는 소리같다. 내 허벅지에 엎드려있던 지나의 등을 두드렸다. 지나는 마지막으로 자지 전체를 싸악 훑어내며 입을 뗀다.
희진이 기계 가져왔으면 연결하라고 하세.... 응? 왕언니가 여긴 왜?
잠깐 나가있어.
어? 음... 마담언니가 모시라고 한 분인데?
알고 있으니까.
지나는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곤 가볍게 목례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것 좀 집어넣어 주실래요?
아? 예! 예.... 으윽!!
서둘러 넣다보니 살짝 찝힐 뻔 했다. 게다가 팽팽해져 있는 통에 집어넣는데에 애먹을 수 밖에.
유진이가 가게 오거든 저부터 찾으라고 하지 않던가요? 왜 이러고 계신거죠?
아, 그쪽이 선영씨....?
맞아요.
그녀의 말투는 몹시 차가웠다. 마치 바람피다 딱 걸린 남친이나 남편을 대하는 여자처럼 경멸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나에게 경고하듯이 말하고 있다. 지금 나는 소파에 앉아있는 상태고 그녀는 서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어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툭- 소리와 함께 그녀가 던지다시피 한 봉투가 내 앞에 떨어졌다. 길 가다가 동냥질 하는 거지한테 동전을 던져줘도 이것보단 친절하게 줄 것 같다.
유진이 과외비입니다. 그럼 전 이만.
이, 이봐요!
내가 아무리 무골호인이라도 이런 대우를 참을 순 없었다. 봉투를 얼른 챙기고 - 이런 걸 두고 나갈 수는 없다 - 벌떡 일어나 문가로 달려간다. 문을 밀고 나가려던 선영은 우뚝 서서 막아서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그 아름다움이 무색할 정도로 차갑고 무례한 눈빛이 몹시도 짜증난다.
왜 그러시죠?
저도 여기 오자마자 그쪽부터 찾았거든요? 근데 없다고 하고, 그 이군인가 김군인가 하는 놈이 막 나가라 그러고, 그러다가 유진이 어머니가 오셔서 잠깐 앉았다 가래서 이러고 있던 겁니다. 제가 뭐 술 못 얻어먹은 귀신 붙어서 이러고 있었던 거 아니라구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뇨? 지금 그쪽이 저한테 대체 왜 떽떽거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초면에 너무 한거 아닙니까?
그녀의 말투는 차분하기 그지 없었기에 마음 놓고 화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녀가 꺼낸 말에 나는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초면에 자지부터 꺼내놓고 있던 사람은요? 그쪽 아닌가요?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진다.
.......그건 내가 꺼낸건 아닌데.....
그녀의 난데없는 퉁명함에 항의하려던 내 기세는 급격히 꺽였다.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 강렬한 단어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그리 잘하고 있던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억울하다. 이런 막무가내의 대접은 대체 뭐냐. 내가 주저하며 말을 못 하고 있으니 그녀는 차가운 말투로 한 마디 더 쏘아붙인다.
유진이가 좋게 말하길래 꽤 괜찮은 분인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알았군요.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실례할게요.
아니, 저, 그게 그러니까...
내 변명을 더 듣지도 아니하고 그녀는 바람처럼 나가버렸다. 굉장히 뻘쭘해졌다. 다시 앉아서 술이나 마실까 하다가 이 커다란 룸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술 먹고 있는 광경도 참으로 없어 보이겠다 싶었다. 한숨을 푹 쉬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 갔다. 급히 출구쪽을 향해 걸어가려는데 등뒤에서 누군가 부른다.
어머, 선생님? 벌써 가시게요?
아, 유진이 어머님...
유진이 어머니, 유미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덥썩 내 손부터 잡더니 방쪽으로 다시 이끈다.
애들이 별로던가요? 지금 애들 아직 나올때가 안 되어서 지금 있는 애들로만 넣어드렸더니 별로셨나보다. 아니면 저랑 한잔 가볍게 하실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럼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풀코스로? 호호호~
아아니, 그것도 아니구요.....
간신히 손을 빼내고 꾸벅 인사를 드렸다. 이 아주머니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뒷목이 뻣뻣해져온다.
선약이 있거든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약속이 있으시다니... 저런....
유미는 굉장히 아쉬워했다. 내 팔과 어깨를 쓰다듬으며 토닥이더니 이내 귓속말을 하듯이 내 귓가에 입을 바싹 속삭인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다음에 조용할때 오세요. 그럼 잘 해드릴게요. 알았죠?
아, 네...
딸 과외선생에게 뭘 해준다는 건지 잘 해준다는 게 어떤 건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일단 그 자리를 벗어나는게 급선무였다. 저쪽 모퉁이에서 이쪽을 째려보고 있는 선영의 눈빛이 왠지 무시무시해 보이는 건 그저 착각이길 바랄 뿐이다.
선생님, 꼭이에요. 꼭 또 오세요~
네에....
기약없는 대답을 하며 얼른 가게를 나왔다. 가게 앞에 세워두웠던 사이클에 올라타고 속도를 올렸다. 예약해둔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주인님보다는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을 주어 밟아나간다. 그러나 아까 겪었던 너무도 파란만장(?)한 경험때문이었을까. 얼마 가지 않아 힘이 빠졌다.
휴우...
그래도 간신히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중간에 사이클은 전철역에 세워두고 전철로 갈아탄게 잘한 것 같다. 그렇지 않았으면 시간을 못 맞출 뻔 했다.
예약 하셨나요?
예.
성함이....
이름을 말해주니 웨이터가 앞장 서서 안내해준다. 번잡스럽지도 않고 조용조용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잡지에도 데이트 코스로 여러번 나왔다는 곳이다. 가격도 막 비싸지 않으면서도 맛과 분위기가 중간 이상 하는 곳이라 예약을 안 하면 안 될 정도라고 했다.
자리잡고 앉아 시계를 들여다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냅킨도 놓아보며.... 그러는데도 시간이 참도 잘 흐르지 않았다. 웨이터가 두 번 정도 와서 음식을 어떻게 하냐고 물어볼 동안에도 명희는 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가게 밖에도 몇 번씩 나가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화도 나고 씁슬하기도 하고..... 기분이 복잡했다. 굳이 사이클을 두고 올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럼 그렇지....
웨이터가 세번째로 와서 식사준비에 대해 물을때쯤 난 이미 몹시도 지쳐있었다. 예약할 때 주문한대로 가져다 달라고 아무렇게나 말해버렸다. 잠시 후, 2인분의 식사가 내 앞에 차려지기 시작했다. 반대편에 놓인 1인분의 식사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내 앞에 놓인 그릇만 깨끗하게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샐러드를 다 먹고 스프를 떠 먹은 다음, 어린 송아지의 엉덩이살로 만들었다는 스테이크를 대충 썰어서 포크로 찍어 먹을 때였다.
뭔 청승이야?
......아, 명희씨...
샐쭉한 표정의 주인님이 어느새인가 내 맞은 편에 앉았다.
얼마나 돈을 잘 벌길래 이렇게 막 써? 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 했어?
그렇네요. 고마워요.
히죽히죽 웃지마. 기분나쁘니까. 너 보려고 온게 아니라 식사하러 온거니까.
어쨌든간에요. 헤헤.
명희는 인상을 팍팍 쓰며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가본 레스토랑이라는 곳은 그렇게 나쁜 곳만은 아니었다. 대화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강변에 있는 곳이라 조금만 걸어가면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기에 둘이서 나란히 걸었다. 식사 내내 말이 없던 명희가 한참만에 말을 꺼냈다.
너, 여자 있냐?
여기 명희씨 계시잖아요.
나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잠시 쫄긴 했지만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단단히 준비하고 대답했다. 괜히 그녀에게 이래저래 숨겨보았자 별로 좋은 꼴은 못 당할 것 같아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네, 있습니다.
........꼴에...
그녀의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이제 정겨울 지경이다. 혹시 나는 마조히스트일까?
그래서, 잤어?
뭐...잤다고 하면... 잔거지만....
이런 대답에는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나란 남자. 이것 참. 그러나 주인님이 다그치는 데는 도리가 없다.
씹했냐고 묻잖아. 병신아!
헙....... 명희씨, 목소리를 조금만...
내 목소리가 뭐.
가로등이 꽤나 먼 간격으로 놓여져있고 우거진 나무들이 담을 이룬 곳이라 인기척은 드물었지만 그래도 중간 중간 놓인 벤치에는 제법 사람이 있었다. 대개는 서로 엉켜있는 연인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산책로를 오가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 중에 어떤 녀석들이랑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그럴때는 서로 뻘쭘해진다. 이런 와중에 명희의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게 펼쳐지니 이 또한 난감하다.
뭐.... 그게 그러니까.....
했군. 쳇.
어쩐지 굉장히 기분 나빠한다.
하하핫... 어쩌다 보니...
변태 강간마 새끼.
말투가 점점 거칠어진다.
아니, 저기요, 강간은 아니구요.....
닥쳐! 니깟놈이랑 좋다고 할 년이 어디 있겠어? 돈 내고 했든가 그게 아니면 니 놈이 덥쳐서 했겠지. 창녀 아님 어디 한군데 병신같은 년이 아니고서야 니랑 자고 싶겠어? 엉?
아, 이건 좀 아니지. 좀 화가 났다.
.....말이 좀 심하시네요.
심해? 뭐가 심한데?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그녀의 어거지에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창녀나 병신이라뇨. 지혜나 효진이 다들 착한 애들이에요. 결코....
뭐야. 한 년도 아니고 두 년이나 돼? 그런 미친 년이 한 년이 아니고 둘씩이나 된단 말이야??
헙!!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명희쪽을 돌아보니 마치 신기한 동물 바라보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조~~~~옷?다! 신났네, 아주 그냥!
그리고 그녀는 휑하니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져갔다. 나는 황급히 그녀를 쫓아가 어깨를 짚으려 했으나....
건드리지 마!
확 뿌리치는 손길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턱주가리를 강타당했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그냥 자기를 잡는 손만 뿌리치고 마는 거 아닙니까? 무슨 백스핀 블로우펀치를 먹입니까!! 얼얼해진 턱을 붙들고 멍하니 있으려니 그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마구 소리친다.
누가 건드리래! 이 강간마야! 변태 새끼야! 내가 너같은 놈이랑 엮인 것 자체가 에러야! 저리 안 꺼져?!
아니, 명희씨... 그게 그러니까요....
이거 안 놔?! 놔, 새꺄! 놓으라구! 그때 진호오빠 이야기에 내가 발끈하지만 않았어도 너같은 새끼랑 엮일 일은 없었을텐데!!! 너같은 또라이랑 만나고 나서부터 제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어!! 저리꺼져! 이 미친 놈아!!
평소같으면 그녀의 독설을 말없이 견뎌내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우리 단둘이만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워낙 컸고 내용은 심각했기에 지나가는 행인 두 명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눈에는 경계의 빛이 잔뜩 서려있다.
이봐요. 뭔 일이요?
아뇨, 저기, 그러니까 여기에는 깊은 오해가....
공교롭게도 다가온 두 명의 행인은 왠지 운동 좀 했을 것 같은 인상의 아저씨들이었다. 짧은 키지만 다부지게 생긴 목덜미가 꽤나 튼튼해보인다. 운동뿐만 아니라 뭔가 조직적인 생활같은 것도 했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러나 독이 오를대로 오른 명희의 눈에 그런게 들어올리 없다.
너넨 또 뭐야? 뭐 줏어먹을게 있다고 괜히 끼고 지랄이야! 안 꺼져?
뭐?
자기보다 족히 열살은 더 어려보이는 여자에게 욕을 들어먹은 아저씨들은 눈이 휙 돌아갔다. 팔을 걷어붙이고 앞으로 다가오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명희와 아저씨들 사이로 끼어들어가 제지하려고 하였다.
저기요, 자...잠깐.......으헉!!
내 등짝에 강하게 내리꽂히는 명희 팔꿈치의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방금 전에 먹은 비싼 밥이 죄다 쏟아져나올 것 같은 내상을 입었다. 휘청거리는 몸은 아저씨들을 향해 덥쳐갔고 그런 움직임을 자신들을 향한 위협으로 간주한 아저씨들은 신속하게 받아쳤다.
퍽- 퍽-
혹시 평소에 듀얼 유니온 제트 스트림 어택 연습이라도 하시는 분들입니까? 한 아저씨가 내지른 주먹은 내 얼굴에, 또 다른 아저씨가 내지른 주먹은 내 복부에 절묘하게 꽂히며 나로 하여금 헉-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뭐야! 왜 사람을 치고 지랄이야, 이 아저씨들이!
등뒤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명희의 목소리. 저기여. 지금 제 몸에 꽂힌 첫번째 공격은 당신으로부터 입니다만.... 이 이야기를 전할 수는 없었다. 어느샌가 핸드백 속의 호신용품을 꺼내든 명희가 아저씨 중 한 명의 미간을 찌르며 꺼지라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가 질린 아저씨들은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고 한참동안이나 나는 제대로 숨도 못 쉬고 바닥에 주저 앉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숨을 내쉬며 몸을 추스리자 아까보다는 훨씬 차분해진 명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존나 약하네. 병신새끼.
.........불의의 공격에는 약한 편입니다.
닥쳐.
예.
차가운 바람이 달아오른 머리를 식힌 걸까. 그녀와 나는 벤치에 앉아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보냈다. 잠시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녀였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건데?
예? 어떻게 하다뇨?
노예질말야. 앞으로 계속 할 수 있겠어?
갑작스런 노예해방? 어리둥절한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 했다.
니 여자친구가 니 이러고 다니는 거 안 좋아할거 아냐. 그래, 안 그래?
얘가 이런 식으로 배려해주는 사람은 아닌데 말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니, 그게... 그러니까... 딱히 여자친구는 없는데요.
뭐?
명희의 커다란 눈이 나를 향한다.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했다.
제가 언제 여자친구 생겼다고 이야기했었던가요?
뭔 소리야! 여자랑 잤다면서 그럼...........아!
그때서야 명희는 뭔가 깨달은 듯 나를 매섭게 째려본다.
그럼 뭐야!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니랑 잤다고? 지금 그 소리야?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무래도 성질 급한 그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곤란할 거 같았다.
결국, 나는 처음부터, 그러니까 내가 지혜를 만나게 된 계기부터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그녀와 잤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굉장히 쑥스러웠지만 이미 반쯤은 말해버린거나 마찬가지 였기에 더 이상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 게다가 서로 접점이 없다뿐이지 내가 지혜를 만나게 된 이유에는 명희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으니 말이다. 효진이 이야기는 대충 얼버무렸지만 눈치빠른 명희는 얼추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아... 진짜 골 때린 새끼네. 그래서 그렇게 나 두 번이나 바람 맞히고 만난 사람이 지혜라는 사람이고 지금 니네 옆집에 산다 이거지. 그리고 효진이라는 친구랑도 어쩌다 보니 빠굴 떴고.
.......요약을 잘 하시네요.
좀 닥쳐. 씨발. 니가 어느 정도 어처구니없는 새끼인줄은 알았지만 진짜 이 정도면 거의 기네스다, 기네스. 그럼 그때 그 콘돔도 지혜랑 할때 끼고 한거냐?
아뇨. 쓰기는 효진이랑 할 때.....
닥치라니까, 좀만아.
예.
닥치길 원하면 질문을 말던가. 한참동안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있던 명희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 잘 하냐?
.........예?
생긴 거나 하는 짓거리 보면 정말 병신중에 상병신이 따로 없는데, 아랫도리 후리는 건 잘 하나보지?
........표현력이 좋으시네요.
명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콘돔 남아있어?
남아있냐고 물으신다면야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만....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쏴아아-
모텔이라는 곳은, 샤워하는 소리가 방쪽으로 아주 잘 들리게 설계되어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 이어질 행위에 대한 기대를 하게 만들기 위함일까. 아니면 그저 건설비 아낄라고 방음장치 같은 걸 전혀 시공하지 않아서 일까.
태어나서 모텔에 와본 게 오늘로 세번째고, 여자로는 두번째 여자다. 근데 그 두번째 여자가 명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는 나를 데리고 모텔로 향했고 들어오자마자 욕실로 들어가더니 이십여분째 씻고 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있다. 전에 지혜랑 올때는 들어오자마자 행위에 몰입하느라 이런 기분을 잘 몰랐는데, 욕실에서 지금 씻고 있는 여자가 조금 있다가 나랑 응응을 한다는 건 진짜 야리꼬리한 기분임에 틀림없다.
TV를 틀어보았지만 별로 집중은 안 되었다. 다시 껐다. 욕실쪽을 한번 힐끔 보았다가 다시 벽쪽을 바라본다. 우두커니 그러고 있으니 이윽고 욕실 문이 열리며 명희가 나타났다.
아, 여긴 시설이 왜 이 모양이야. 쳇. 그냥 홍대앞으로 갈걸 그랬나.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눌러 짜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샴푸 광고에 나오는 한장면 같았다. 커다란 수건으로 가슴 언저리를 둘러 마치 탑리스 원피스를 입은 것 마냥 보인다. 미처 감싸지 못한 어깨의 선이 너무도 고혹적이라 나도 모르게 넋놓고 쳐다보게 된다.
넌 안 씻어?
씻...씻어야죠.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어? 기분나쁘게.
아뇨, 예뻐서요.
너같은 놈한테 그런 아부 들어도 하나도 안 좋거든?
아부 아닌데....
그녀의 입은 험했지만 표정은 밝아보였다. 예쁘다는 소리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으니까.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예쁘다고 해드려야겠다. 나도 씻어야 겠다. 일단 상의를 벗었다. 바지를 벗기 전에 주머니에 있는 삐삐를 빼서 가방에 넣어두었다. 가방을 닫으려는데, 그 때였다.
삐삐가 울렸다.
나도 모르게 명희를 쳐다보았다. 명희는 나를 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짜내던 손이 딱 멈춰있었다.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쳐다만 보고 있는 사이 삐삐는 제 울 것을 다 울고 다시 조용해졌다. 명희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뭐야. 저거 노예콜 전용 아니었어?
맞아요. 저 아무한테도 번호 알려준 적 없었는데....
내가 가방 안으로 손을 뻗어 삐삐를 집어들려고 하자 명희가 나보다 먼저 손을 뻗어 번개처럼 낚아챈다. 삐삐에 뜬 번호를 들여다보더니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모텔 전화기로 다가가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호출하신 분이요........... 예, 맞습니다............아, 그래요? 그쪽이? (여기쯤에서 명희는 나를 한번 노려보았다. 그리고 살벌한 표정과는 정반대로 목소리가 엄청 상냥해졌다. ) 아, 예.........그렇죠. 뭐. 네, 네.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예, 한석씨는 지금 샤워중이라서요. 호호호. 네,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예. 안녕히 계세요.
철컥하고 전화기 내려놓는 소리에 내 가슴까지 철렁해진다. 대체 누구랑 통화한거지? 저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목소리로는 영업용 목소리를 낼 수 있다니. 여자란 요물이라는 옛말이 틀린게 하나 없다.
저... 명희씨 누구던가요? 혹시 지혜에요? 아님 효진이...?
하아, 진짜 이 새끼는 답이 없네...
네?
명희는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표정은 험악했다. 일촉즉발이다. 나의 본능이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미처 도망갈 시간을 주지 않고 허리에 떡하니 손을 얹고는 아직 침대에 앉아있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 나한테 뭐라 그랬어. 과외하는 애가 남자라고 그랬지?
그랬나? 그랬었나? 아, 그...그랬다. 그럼 지금 전화를 건게?
서...설마 유진이에요?
그래, 이 새끼야! 너 남한테 알려주지 말라는 번호를 뿌린다는게 기껏 중딩한테나 번호를 뿌려? 이거 완전 페도빌리아 변태새끼 아냐!
아, 아니! 전 번호를 뿌린 적이 없....
닥쳐!
스트레이트가 다가온다. 아니, 날라온다. 견제용 선행 잽이 없는 정직한 오른손 스트레이트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그녀의 손을 낚아챔과 동시에 그녀의 허리를 부둥켜 안는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매맞는 노예생활 몇 개월이면 이렇게 공격을 흘리기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모양이다. 끌어안다시피 하여 바짝 붙었더니 내 등으로 쏟아지는 주먹 난타가 떨어진다. 가까스로 견디며 그녀의 몸을 침대 위로 쓰러뜨린다.
아, 진짜라니깐요! 제가 언제 명희씨 말 안 듣는거 봤어요? 몇 가지 어긋난 건 있지만 그래도 명희씨 하라는대로 다 했잖아요! 근데 왜 맨날 제 말은 다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주먹질에 발길질만 해대는 거에요? 정말!
악에 바쳐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다. 그러나 명희의 대답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드니 두 눈 꼭 감은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고보니 자세가 좀 묘했다. 그녀의 몸을 두르고 있던 수건은 어느샌가 풀려져 있었고 나도 옷을 벗던 참이라 상반신은 이미 드러나있었다. 침대에 누운 그녀를 내가 위에서 찍어누르고 있는, 완전한 정상위의 포즈였다. 내 등을 두드리던 그녀의 주먹도 어느새 펼쳐져서 힘을 뺀 채 침대위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입만 열었다.
진짜 번호 안 준거 맞아?
예.
나보고 똑바로 이야기해봐. 맞아?
정말이에요.
나는 사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방금 샤워를 마친 깨끗하고 매끈한 몸매를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평소에 어떤 운동을 하는 건지 몸매에 군더더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슬렌더형이었다. 팔뚝과 허벅지에는 살풋 잔근육까지 잡혀있다. 쭉 뻗은 매끈한 다리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키가 작고 얼굴도 동안이라 그녀의 체형이 가슴을 제외하고는 아이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가슴도 매끈....음? 어라? 이건 뭔가 좀 이상한데....?
하아, 하긴 네 놈이 나한테 거짓말을 했으면 대번 표가 나지.
그....그렇죠?
알았다. 알았어. 그냥 잠깐 내가 욱했나봐.
항상 욱하잖아요.
......죽을래? 근데 너 지금 뭐하고 있냐?
어느샌가 명희는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매끈한 가슴을 보고 있던 나는 마님 목욕하던걸 훔쳐보던 마당쇠마냥 당황하고 말았다.
저기, 그러니까, 어, 명희씨, 가슴이.....
내 가슴이 뭐.
사....사라졌어요.
하아, 이 바보같은 놈. 평상시에는 뽕이지 임마. 내 몸매에 그런 가슴이 나오겠냐? 씨발.
그....그런가요.
꽤나 큰 가슴라인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뽕이었다니. 내가 직접 본 가슴 중에 가장 커다란 지혜만큼은 안되지만 그래도 효진이랑 비교하면 거의 비슷할 듯 싶었다.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야, 너 무슨 짓....이야....하윽.....
그녀의 두 팔은 이미 내 손에 의해 제압당해 있었다. 머리를 숙여 그녀의 가슴을 빨기 시작한다. 핑크빛 유두를 희롱하고 유륜의 둘레를 혀로 잰다. 가슴팍의 곡선을 따라 혀로 훑다가 그녀의 목덜미와 귀 뒤를 맛본다. 뜨거운 체온을 따라 바디샴푸의 향긋함이 퍼져나가고 있다. 그녀의 구석과 구석을 내 혀와 침으로 더럽힌다.
이... 이거 안 놔?
놓으면 때릴거잖아요.
안 때릴게. 놔.
싫어요.
너, 이 자식..... 하악......
그녀가 아무리 포악하고 힘이 좋아도 여자는 여자였다. 게다가 키에서부터 20센티 넘게 차이 나는 내가 위에서 찍어누르는 형국이 되자 아무래도 몸을 쉽게 빼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리로는 그녀의 몸을 조으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두 손을 모아 쥔다. 남아있는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어루만진다. 곳곳을 쓰다듬을때마다 연주되는 그녀의 소리를 듣는다.
아...흑....흠.....
그녀의 약점은 가슴인 듯 싶었다. 꼭 큰 가슴이라고 좋은게 아니라 카더라. 작은 가슴은 작은 대로의 민감성이 있는 것이니까. 한참동안이나 양쪽 유두를 번갈아 물고 빨아가며 한 손으로 그녀의 비부를 만져간다. 은근히 젖어있었다. 털은 많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를 서서히 동굴 속으로 진입시킨다. 가장자리에서부터 비벼가며 물기를 머금게 하며 집어넣자 마치 빨아들이듯이 쑥 하니 들어간다. 이 때쯤에 손을 모두 놓아주었지만 그녀는 나를 때리지 않았다. 대신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릴 뿐이었다.
이 새끼.... 건방지게.....
아래도.... 괜찮아요?
몰라, 임마. 그딴거 묻지마.
평소의 표독함이 절반, 아니 절반 이하로 줄어있었다. 나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탄탄한 느낌이 나는 허벅지를 만지는 것은 기분 좋았다. 새침한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깊이 숨어져 있는 비부를 혀로 희롱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손을 뻗어 허벅지 안쪽을 슬적 밀자 별다른 저항없이 다리가 벌려진다. 아니, 어쩌면 내가 손을 대지 않았어도 스스로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흐읍......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입가가 다 흥건해질 정도로 질퍽했다. 약간은 새큼하고, 약간은 달콤하고, 약간은 걸쭉하면서도, 또한 약간은 미끈거린다. 먹으면 먹을 수록 새로운 맛이 나고 만지면 만질수록 빠져들어간다. 혀를 넓게도 쓰고, 좁게도 쓴다. 넣기도 하고 빨기도 한다. 손에 만져지는 허벅지와 힙의 탄탄함을 즐긴다.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있다. 어느 순간 내 머리카락을 부여잡는 손길이 느껴진다.
하악....하읍....하악..... 그....그만 하고... 빨리....
네?
너 이 새끼....빨리 안....해? 흐읍......
아아.
미리 꺼내두었던 박스에서 콘돔을 꺼내고 옷을 마저 벗었다. 이미 성이 날대로 난 녀석에게 고무를 씌우고 그녀에게 올라탄다.
넣을까요?
그....그래.....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왠지 약올리고 싶었다. 귀두의 끄트머리를 가지고 그녀의 입구를 살살 간지럽힌다. 눈을 꼭 감고 이어질 뭔가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한쪽눈을 살짝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뭐...해...하윽...
조금만 공손하게 말해보세요.
뭐?
그렇잖아요. 사실 제가 한 살 더 많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