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5 악명도 명성이라면. =========================
크리스틴이,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고 한다. 그건 참 기쁜 소식이다. 혼자서 멋대로 치료를 해내다니 무슨 만화에 나오는 대마왕처럼 혼자 잘려나간 팔을 쑥 뽑아낸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크리스틴이 머무르고 있는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하얀 이불을 덮은채로 책을 읽고 있는 크리스틴이 있었다.
"아, 왔다."
크리스틴이 나를 보고 웃었다.
"크리스틴..."
나는 제대로 말을 하는 크리스틴을 보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찌 되었던 나 때문에 정신에 심한 상처를 받았던 그녀에게.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정말 미안해. 나 때문이야."
그 말에, 크리스틴이 대답했다.
"잭 때문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크리스틴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트기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 혹시, 지난 일들은 기억이 나는거야?"
그 말에, 크리스틴이 웃었다.
"저는요, 커다란 유리방 안에 갇혀있었어요. 밖에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데. 계속 잭에게 칭얼거리고 저는 그 광경을 그저 바라만봤죠. 나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무서웠으니까."
크리스틴이, 끓는 포트기의 물을 담아서 원두커피를 내려 나에게 건네었다.
"드세요."
살짝 한 모금 맛을 본 다음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그녀가 나를 보면서 웃었다.
"나가서 그런 일을 또 당할까 무서웠어요. 그래서 일부러 눈 앞에 있는 문을 무시하고 열려고 하지도 않았죠. 나가면 또 아플까봐. 그래도 항상 잭이 제 곁에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약간 입을 삐쭉거린다.
"최근에는 찾아오지도 않았지만."
그거, 미안하다. 내가 조금 정신이 없었어!
내가 변명이라도 해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녀가 내 말을 막았다.
"잭도 사정이 있었겠죠. 괜찮아요. 언제까지 제 옆에만 있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테니."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앞에서 김을 피어올리는 커피잔을 바라보던 그녀가 눈을 살짝 옆으로 돌리고 몇 번 깜박거리다가 대답했다.
"아, 질문이 이게 아니었구나. 그러니까...."
머리를 살짝 흔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운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잠깐 침묵했다.
"... 질문이 뭐였죠?"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뭐야, 그러고보니까 나 무슨 이야기를...
"유리상자에 갇혔을 때에 기억이 나냐고."
아 맞다. 라고 크리스틴이 말하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그 상태에서도, 다 볼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소변 보러 갈 때 잭이 같이 간 거랑, 무릎 위에서 제가 들썩거리던거. 뭐 왠만한 건 다 기억이 나요."
그 말에 나는 안색이 굳었다. 나를 살펴보던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 때 잭의 행동으로 탓할 생각도 없고. 오히려 고마워해야겠죠."
크리스틴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슥 뒤로 넘겼다.
"병원 생활은 괜찮아?"
그 말에, 크리스틴이 나를 바라보면서 말햇다.
"밥이... 너무 맛이 없어요. 제가 예전에 마로니에 시립공원 쪽에 놀러 갈 일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먹으면서 정말 맛 없다고 생각했죠. 근데 여기 밥은 더 맛이 없어요. 빵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요. 꼭 어렸을 때 먹었던 불량식품 같은 맛? 집 근처에 작은 핫도그 스탠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자주 먹곤 했거든요. 물론, 당시에는 먹으면서 아, 이렇게 먹으면 나 살찔텐데.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었지만..."
그리고, 말하던 그녀가. 잠깐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 그, 질문이 뭐였죠?"
야, 이건 또 참신한 여자네.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뭐가 이렇게 많이 깜박깜박거리냐. 너 그 정신상태로 잘도 커피 타서 나한테 줬구나. 나는 커피를 바라보다가 정신이 멍해졌다.
"크리스틴? 여기 후추가..."
그 말에 그녀가 내 커피잔을 바라봤다.
"어... 어? 분명 설탕이었을 텐데."
그 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커피잔을 들어서 맛을 봤다.
"... 이거 짠 맛이 나는데."
그 말에, 크리스틴이 눈썹을 잠깐 모으고 생각하다가 잔을 들어서 자신의 커피를 맛보았다.
"...어라. 왜 짠맛이.. 뭐지?"
그렇게 말한 다음에도, 그녀는 태연하게 짠맛이 나는 요상한 커피를 마셨다.
"제가, 원래 조금 깜박거리긴 했는데. 요즘 더 심해졌네요."
대단하시네요. 나는 허허허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봣다. 원래 깜박거렸다고? 이 정도 수준이면 분명히 상태창에 특기될 만한 특징이었을텐데.
말이 나온 김에 나는 크리스틴의 상태창을 확인해보았다.
= 크리스틴 에리나 : 입원 중 =
지능 : 깜박깜박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 [7]
매력 : 동치미도 좋고, 시치미도 좋지만. 역시 백치미가...[6.5]
카리스마 : 어, 그런 지시 했었나? [4]
체력 :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어요... 어, 그만큼이나 오래? [7]
힘 : 네? 이거 몇kg 라고요? [6]
성적특성 : [건망증] [매력적] [자상함] [모성애] [깊은 상처]
검은 사랑의 꽃망울 : 95%(고정됨)
지능이 이상하잖아. 깜박깜박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라며. 근데 왜 7이냐? 건망증 천재 같은 것도 세상에 존재하냐. 뉴턴 같은 느낌이야? 찜통에 달걀 대신에 시계 집어넣고 그러는 거냐.
그리고 꽃피기 직전이잖아?! 이 속도라면 내가 봤을 때에는 오늘 당장 피어도 이상한게 하나도 없을 수준인데. 고정되어있다니 이건 또 뭐야.
게다가 모성애 저거 뭐야. 커피에다가 소금이랑 후추 같은 갈비탕에 넣을 만한 물건을 넣어주면서 무슨 모성애야. 독살이지. 그래도 소피아처럼 치매로 가지는 않아서 다행인가. 자아상실 막 이런거였으면 개박살날 뻔했는데.
"원래 그랬어?"
그 말에, 크리스틴이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지금 이런데, 전에는 더 심하지 않았을까요?"
도대체 그 정신머리로 나랑 같이 오줌싸러 간 건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 나는 시계를 확인해보고 크리스틴을 바라봤다.
"미안, 오늘 일이 있어서. 일어나야 할 것 같아."
그 말에 크리스틴이 웃었다.
"그러세요."
... 엄청 찝찝하다. 소피아 때도 걔 엄청 멀쩡해 보여서 그냥 뒀는데 맛탱이가 매트릭스2 광고문구(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수준으로 날아가버렸잖아.
나는 엄청 걱정이 되기 시작하면서도. 일단은 하기로 한 일이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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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옥상에는, 굉장히 커다란 새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걸 세우는데 걸린 시간만 1시간이니까. 제대로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가져온 기계를 이용해서 그 커다란 새총의 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씨발... 범죄는 육체 노동이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마친 나는 팽팽하게 당겨진 새총의 줄을 한 번 튕겨보고 그 끝에다가 기폭장치를 설치한 큼지막한 C4 덩어리를 하나 올려놓았다. 나머지 덩어리들은 새총에다가 덕지덕지 붙이고 바닥에 휘발유를 잔뜩 들이부어놓는다.
"자, 시작하자."
무전기에 대고 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 마른 오징어를 뒤집어 썼다. 건물에서 나와 오징어 가면을 손에 들고 있는 다른 서너 명의 남자들과 합류했다.
"영광입니다."
"영광은 지랄. 가자."
그 말과 함께. 나를 포함해서 오징어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 서너 명이 우비를 뒤집어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 건물 안에서는 모금회가 열리고 있었다. 방송국에서는 사람들이 나와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두터운 봉투를 가지고 와서 모금함에 넣고 인터뷰하는 그 시시껄렁한 행사.
행사의 목표는 뭔지 모르겠지만. 보통의 모금회가 아니다. 로고스 시티에서 한끝발은 한다고 하는 부유층들은 모두 참가하는 일종의 파티 같은 행사다. 그 모금함에는 돈이 꽤 많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작한 작업이다. 나는 시계를 바라봤다. 오후 10시. 11시에 모금이 종료된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이쯤 되면 꽤나 많은 자금이 모였겠지.
내가 손짓을 하자 뒤편의 친구 중 하나가 스프링클러 조작함의 밸브 개방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사이렌이 울리면서 온 천지에 물이 쏟아져내린다. 그리고, 뒤편에 오징어 가면을 쓰고 등에 큰 장비를 짊어지고 있는 남자가 장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 우비를 벗자 마른 오징어를 얼굴에 끼고 있는 위풍당당한 네 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허공에 . 이곳을 지키고 있던 경비들이 이쪽을 향해 나서려고 하지만 나는 혀를 쯔쯔쯔 거리면서 그들을 멈췄다.
"저거 자동차 배터리 여덟개 직렬로 연결한 물건이다. 전원 올리면 니들 다 뒤져."
우리는 고무장화를 신고 있는데다가, 옷에 물기가 없으니까 괜찮겠지만. 그 말에, 경비들이 주춤하고. 나는 느긋하게 빙글 빙글 혼자 왈츠 비슷한 물건을 추면서 아나운서가 있는 자리로 다가가 그를 밀어내고 고개를 숙이며 상큼발랄하게 인사했다.
"공기는 시원하고, 하늘은 맑고, 귀뚜라미가 따스한 음색을 흘리는 아름다운 가을 밤입니다! 다들 식사는 하셨는지요. 저로 말씀드리자면 벌교 제 2차 꼬막대전에서 24명 살인, 12명 살인미수 혐의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탈옥한 '순천 피카츄' 라고 합니다. 여기 이 친구들은 '제우스와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요."
나는 말을 마치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면서 말했다.
"오늘 제가 이렇게 귀한 분들 모시고 자리를 함께 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세상이 범죄자들을 보는 시선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고작 사람 몇 명 죽였다고 정당한 죄값을 치르고 나온 저희들을 차별하고 제대로 된 직업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를 포함한 사천 팔백만 범죄자들은 배를 곯으면서 길거리에서 껌을 팔고, 사탕을 팔면서 끼니를 연명하고 있습니다."
하나에 300~400 달러 정도 받으면서 말이지.
뒤를 돌아보자, 에티오피아 기아 대책 모금회. 라고 큼지막한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에티오피아의 불쌍한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여러분의 뜨거운 마음. 저라고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저희 같은 불우한 이웃에게도 따스한 온정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뜨거운 성의를 헛되이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저희가 여러분의 온정을 조금 융자 받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뒤편의 오징어에게 큰 가방을 건네었고. 오징어가 모금함으로 다가가서 그 커다란 상자 안에 쌓인 봉투들을 싹 쓸어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확인하면서 마저 입을 열었다.
"아, 여러분의 뜨거운 성의의 무게가 여기에 있는 저에게도 느껴집니다."
작은 가방 여러 개가 가득차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건물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바라봤다. 경찰들이 벌써 오고 있네. 하여튼 방송만 탄다고 하면 민첩해진다니까.
"그럼, 오늘도 평안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버튼을 눌렀다. 이걸로 고정해놓았던 새총이 발사되겠지. 그리고, 이 건물의 벽에 턱 하고 달라붙을거다.
잠깐 기다린 나는 다시 기폭장치를 누르자 벽이 무너지는 폭음과 함께 뻥 뚫린 건물의 벽을 바라보며 건너편을 향해 석궁을 갈겼다. 휘리리리리 하는 소리를 내면서 긴 끈을 달고 날아가 박히는 석궁볼트. 저거 하나와 끈이 세트로 $700 짜리다. 박힌 뒤에 끝이 아니라, 안에서 기계가 작동되어 빠지지 않게 고정된다. 사람 서너 명과 가방 몇 개 정도는 우습게 버텨준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끈을 몇 번 당겨서 튼튼한지 확인하고 기둥에다가 그 끈을 묶었다.
"가자."
그리고, 우리는 돈이 잔뜩 들어간 가방을 손에 두어개씩 쥐고 자그마한 기계를 하나 줄에 걸었다. 경찰들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지만. 우리는 이미 기계를 통해서 그 끈을 타고 저 멀리로 가 있었다.
여기에서, 아래를 향해서 가방들을 던지자. 열려 있는 맨홀에서 또 다른 오징어가 나와 그 돈가방들을 싹 집어넣는다. 바니가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줬단 말이지.
그 사이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오징어 가면을 벗어서 아까 만든 새총과 함께 두고 그대로 새총 주변에 설치해둔 폭약을 터뜨리고, 그 비싼 볼트에도 C4를 붙여 폭파시킨 다음 밧줄을 타고 건물 아래로 내려가 맨홀 속으로 진입했다.
"고생했다. 가서 쉬자."
============================ 작품 후기 ============================
아, 확인해 봤는데. 펑키 바니가 혹시 레이첼의 남자친구가 아니냐는 코멘트가 있더라고요.
초기 구상안은 그랬습니다. 근데, 엔딩을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도 없고, 아무 효과도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그 설정은 죽였습니다.
사실, 그 이야기가 나올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놀랐습니다. 역시 독자들 무서워...
혹시, 크리스틴이 왜 혼자 회복 된 거냐! 작가 이제 정신병 관련 에피소드 쓰기 싫어서 크리스틴을 버린거냐. 라고 말하신다면.
그건 아니에요.
ps. 서평 감사합니다. 코멘트 써주시는 분들, 봐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경솔한 이야기를 후기에 썻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비축분도 없는 팔자에 무슨ㅠㅜ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