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범죄의 게임(game of crime) =========================
소피아는 이전부터 나를 굉장히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뭔가를 캐내려고 하고 있다. 요즘의 대화 흐름은 대충 이렇게 전개된다. 내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소피아를 떼어내려고 먼저 말을 건넨다.
"소피아님?"
"응?"
나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 했다.
"생각해 봤는데. 저번에 주신 정보 있지 않습니까. 그거 정말로 호핑 존스에서 찾아낸 겁니까?"
그 말에, 소피아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런데?"
나는 머리를 긁으면서 대답했다.
"아, CCTV라던가, 기록 내용이라던가 아무래도 호핑 존스의 물건이라기에는 너무 정교해서요."
소피아는 그 말에,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고 말했다.
"쓸데 없는 소리 하고 있네. 호핑 존스는 네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커."
그리고, 소피아가 자신의 손목을 들어올리면서 짜증나는 표정을 짓는다.
"도대체, 거기서 펑키 바니랑 무슨 이야기를 나눈거야!? 이 폭탄 달고 다니는게 얼마나 소름끼치는지 알고는 있어?"
그럼, 알고 있지. 펑키 바니에게서 풀려나서 위로 올라오자마자 내가 한 일이 바닥에 엎드려서 마빡을 아스팔트에 쾅쾅 찍은거니까. 소피아가 부글부글 끓는 표정을 하고도 그냥 넘어간건, 내가 컨테이너 안에서 바니를 만나 뭔가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카론이랑 노가리까면서 스틱스 강을 건너고 있을 걸 알고 있어서다.
여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 소피아가 짜증난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걸 보면서 나는 항상 머리 속에 하얀 빛 한 줄기가 스치는 환상을 느낀다.
뭔가 있어. 소피아는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다. 전형적으로 바람피는 마누라나 할 만한 행동을 한다. 나는 소피아가 자리를 떠난 사이 지도를 보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호핑 존스... 언젠가는 머리에 쓰고 있는 그 왕관을 나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오메르타가 계속 발목을 잡는다.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어마어마한 족쇄다. 소규모 사업장을 운용할 때에는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코트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덩치가 커지고, 더 커질 준비를 하고 있는 나에게는 그 코트가 구속복으로 바뀌어 있다.
호핑 존스의 간부들은 언제든지 내 사업장에 와서 원하는 것들을 보고,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호핑 존스가 위협받을 정도의 뭔가를 하게 된다면 분명히 호핑 존스는 자체적으로 나를 숙청시키려고 할 것이다.
애초에 호핑 존스의 조직원도 아니었던 나지만. 여튼 나는 영성체를 받고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겠지. 나는 잠깐 일처리를 하는 동안 보지 못했던 핸드폰을 열었고. 가볍게 미소지었다.
"... 그럼 그렇지. 개가 똥을 참지. 레이첼이 이걸 참으랴."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문자 37통, 전화 8통. 오래도 참으셨네. 칭찬이라도 해야 하나?
- 무슨 일 있는거야? 괜찮지? 왜 연락이 안 된거야?
"... 걱정마, 살아서 숨쉬고 있어. 잠깐 회의가 있었을 뿐이야."
그 말에, 레이첼이 대답한다.
- 식사는 했어?
그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레이첼, 너 그러다가 또 예전 꼴 난다?"
그 말에, 레이첼이 대답한다.
- 이제는 그럴 일 없어. 지금 일하면서 전화하는 중이야. 인이어로, 당신도 그렇게 하면 안돼?
나는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은 무리란다. 내가 트윈 헤드 오우거도 아니고 뇌가 두개가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내냐. 그리고, 잠깐 뒤에 레이첼이 말했다.
- 당신, 그냥 아가페 본거지를 그쪽으로 옮기는게 어떨까?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네 이 여자가. 미쳐가지고. 지금 여기에 소피아도 있고, 로라도 있고, 메리도 있는데. 여기에 니가 오면 무슨 세기말 풍경을 열어놓으려고 여기에 온다는 거야? 적당히 얼버무린 다음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들어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간호사가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라고 말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듣자마자 나는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했던 일로 인해서 어마어마한 피해를 봐 버린 인물.
크리스틴 에리나. 그녀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 크리스틴 에리나 : 입원 중 =
지능 : 유아기 [1]
매력 : 동치미도 좋고, 시치미도 좋지만. 역시 백치미가...[6.5]
카리스마 : 나꿍꼬또, 씨바 기싱꿍꼬또 존나 무서워또[1]
체력 : 뛰어다녀도 쉽게 지치지 않는[5]
힘 : 무거운 물건은 후들후들[4]
성적특성 : [유아퇴행] [매력적] [타인에 대한 공포] [의존증] [깊은 상처]
검은 사랑의 꽃망울 : 68%
이제 조금 뭔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나이스 보트는 상대를 그...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게 만들지만, 거기에서 진화한 '병든 사랑'은 항상 '정상적이지 않은' 형태의 사랑을 생산하는 모양이다. 물론, 얀데레가 거기에 포함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식으로 정신이 훼까닥 간 상태에서 느끼는 사랑도 있는 포함하는 모양이다.
피어날 꽃도 뭔지 확인했다. 로벨리아... 꽃말은 '악의' 그녀가 나에게 악의를 가졌다는게 아니라. 악의로 인해서 피어난 꽃이라는 의미겠지. 그 정신병자 토끼새끼가 또다시 내 머리에 떠올랐다.
- 아앗! 잭이다아아!
저 천진난만한 목소리까지 모든게 망치처럼 내 뒤통수를 죄책감으로 후려갈긴다.
- 잭, 잭! 언제 또 올꺼야? 크리스틴... 여기 무서워서..
크리스틴과 이야기를 끝내자, 전담 의사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 예, 식사도 거부하고...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았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잭님 이외의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호의를 보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저번에 갔을 때, 크리스틴은 토끼 모양만 봐도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비명을 지르고 자신의 팔에 핏자국이 남을 정도로 손톱으로 긁어대며 경련을 일으켰다. 발에 입은 부상은 아직도 치료 중이다. 레이첼과 소피아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틴의 팔목에도 작은 팔찌가 달려있다. 절대로 풀지 말라고 내가 신신당부를 해서 풀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기울어진 탑같은 정신상태. 철제 테이블과, 드릴, 토끼, 지하, 하얀 벽... 크리스틴이 고통받을 때 주변을 구성하고 있던 환경요소 중 하나만 눈 앞에 나타나도 비명과 함께 자해를 하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졸도해버릴 지경이니. 치료는 고사하고, 링거도 못 꽂고, 바르는 연고도 거부한다. 항상 나를 찾고, 없으면 울고...
치료가 가능하긴 한 걸까. 분명히 매혹적이라는 특성은 검은 사랑을 회복시키는 물건이지만... 가능하기는 할까.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틴은, 왠만하면 잠을 제외하고는 이쪽에 상주시키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저기에 있어도 모든 치료를 거부하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안심을 할 수 있는 내 곁으로 데려오는 편이 나을 것이다.
- ...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병원에서도 상당한 골치거리였던 걸까. 크리스틴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쪽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나는 미리 준비한 방으로 크리스틴을 안내했다.
"크리스틴, 밥 먹었니?"
나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래, 귀엽기는 한데. 씨발 저렇게 된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또 돌아버리겠다. 나는 눈을 잠깐 감고 있다가 미소를 띄운채로 말했다.
"밥 먹어야지. 그래야 빨리 낫는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병원 측에서 제공한 밥을 가져와서 그녀를 바라봤다.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해서 흘리는 그녀를 보다가 나는 천천히 수저를 놀려서 식사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으음, 맛있어!"
내가 항생제 성분이 포함되어있는 연고를 발등에 바르기 시작하자, 내 손을 꼭 잡고 움찔거리며 신음을 흘린다. 말 그대로, 몸은 다 컷는데 완전히 어린애가 따로 없다. 붕대를 다 감자. 크리스틴이 뭘 느꼈는지 내 팔을 꽉 잡았다.
"갈거야?"
가야 한다. 할 일도 더럽게 많고. 지금 바쁜 상황이다. 나는 머리를 긁다가 한숨을 쉬고 그녀에게 등을 내밀었다.
"자."
크리스틴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내 등에 업히고, 나는 그녀를 데리고 내 사무실로 다시 향했다.
"... 크리스틴이구나."
소피아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등 뒤에 업혀 있는게 크리스틴이라는 걸 확인하고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크리스틴은, 소피아의 말에 별 다른 대답도 없이 내 목을 감고 있는 팔에 힘을 더 준다.
"보시다시피, 이런 상황이라."
그 말에, 소피아가 웃으면서 크리스틴을 바라봤다.
"그럼, 나중에 또 보자. 크리스틴."
그걸로 자리를 비운 소피아. 나는 크리스틴을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히고.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얌전히 있어야해. 알았지?"
"나 원래 얌전해!"
그리고는, 크리스틴은 내가 일하는 동안 시선을 나에게서 떼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어, 시선이 엄청 신경쓰이지만. 어쩌겠냐. 내가 지은 원죄인걸. 나는 크리스틴의 시선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지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깐 꾸물거리던 크리스틴이 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잭... 나, 화장실..."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지금 이 여자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뭘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급해, 급해... 빨리..."
나는 한숨을 쉬고 일단은 여자화장실 앞까지 그녀를 안은 채로 데려갔다. 다리를 다쳤으니까.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그녀가 내 소매를 잡아끈다.
"같이 가줘. 무서워..."
주님,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세요. 왜 항상 나는 이런 일을 경험해야 하나요. 나중에 제가 요단강 건너갈 일 있으면 한 번 진지하게 토의해봅시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에요? 제가 싫어요? 나는 어금니를 꾹 물고 여자 화장실 안까지 들어갔다. 거듭 말하지만, 크리스틴은 걷는게 힘든 상황이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거다.
다행히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를 변기에 앉히고 문을 닫으려고 하자 크리스틴이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좁으면 무서워... 같이 있어줘."
니 미쳤니!? 아니, 어... 그치, 니가 약간 지금 그런 상태 비슷한 건 맞지만. 야아아아! 나는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고. 크리스틴이 옆에서 내 옷깃을 잡고 으윽으윽 하는 소리를 내며 다리를 더 격하게 꼰다. 그걸 보던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저러다가 팬티에 지리면 더 심각한 상황이 된다! 애초에 다른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게 지금의 크리스틴이니까. 그럼 내가 저 팬티를 벗기고, 뒷정리를 하고... 국부를 씻겨야 하는 건가!?
그건 안돼!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 젠자앙."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들어갔다. 그리고, 내 앞에서 태연하게 팬티를 훌렁 내리는 걸 보고 재빠르게 눈을 감고 하늘을 바라봤다.
귀도 막아야 하나!? 나는 내 귀로 들리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손을 올리려고 했지만, 한 손을 크리스틴이 붙잡고 있어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니, 그럴 순 없어. 물론 나도 차려놓은 밥상 마다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여자는 나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 거기에서 성욕을 느끼면 내가 인간이 아니다! 시냇물 소리가 그치고, 크리스틴이 내 팔을 몇 번 당겼다.
"... 닦아줘."
싫어어어어어어!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좀 봐달라고오오! 나는 애써 몸 안에서 들리는 악마의 유혹 비슷한 걸 참으면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여자 화장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리면 말로는 풀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니까 크게 말할 수가 없다. 간지러운지 킥킥거리는 크리스틴.
너는 재밌을지 몰라도 나는 하나도 재미없어.
"혼자서도 할 수 있어야 하는거야. 크리스틴은 다 큰 어른이잖아."
그 말을 마치고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믿음이 나의 방패라. 믿음이 나의 방패라. 씨발 믿음이 나의 방패라!
그 말에, 크리스틴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내다가 스스로 처리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아.... 그렇게, 참으로 난감한 상황을 가까스로 벗어난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면서 밖으로 나왔고.. 밖에는 지금 막 들어온 듯한 소피아가 서 있었다.
"..."
"..."
어색한 침묵. 무심코 나와버린 나의 한마디.
"어... 쾌변 하셨습니까?"
나의 말에 엄청난 표정을 지은 소피아가 대답했다.
"... 어머, 여기에 왠 변태가 하나 있었네."
"잠깐,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충분히 납득하실수..."
이 시점에 댁이 왜 여기에 있는겁니까. 손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닦고 있던 그녀의 손에 순식간에 손수건 말고 다른게 들린 채로 철컥 소리가 났고, 나에게 안긴채로 크리스틴이 바둥거리면서 외쳤다.
"잭 변태 아니야! 나 쉬 싸는거 봐줬어!"
나에게 안긴 상태로 그렇게 외치는 크리스틴.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고요한 침묵 아래에 나와 소피아, 그리고 크리스틴.
미친... 너는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 뿐이야. 이렇게 복수하는 거냐!? 그냥 내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라고! 소피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 해명은 기각한다. 일단 좀 맞는게 어때?"
이런 씨.... 나는 순간적으로 내 이마빡을 찍는 리볼버의 손잡이 덕분에 반짝이는 작은 별들을 한 번 보았다.
"... 크리스틴 상태가 생각보다 더 엄청나네."
일단 패고, 이야기를 듣는다는 원칙에 충실한 소피아가 나의 해명을 듣고, 머리를 만졌다.
"혹 났습니다."
그 말에 소피아가 대답했다.
"어머, 아프겠네. 차라리 구멍을 뚫어줄까? 그럼 조금 괜찮을지도."
말을 말자... 나는 이마를 살살 만지면서 속으로 착잡함을 삼켰다.
============================ 작품 후기 ============================
많은 독자분들이 검은 사랑에 얀데레를 생각하시지만(역시, 첫 빵이 레이첼이라...) 저는 애초부터... 세상에 사랑의 종류는 많고, 어두운 종류의 사랑도 종류가 많지요. 할 일 없고 심심해서 나이스 보트를 병든 사랑으로 바꾼 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소설에 얀데레만 득실거리면 난잡하지 않겠습니까!
... 크리스틴이 레이첼이랑 함께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는 소식 전해드리면서, 뉴스 마치겠습니다.
어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사죄의 의미로 하나 더 올렸습니다. 하나 더 할 지는 고민 중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