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흑장미 -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 =========================
며칠이 지났다.
아무리 레이첼의 머릿 속에 흑장미의 봉우리가 피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 조직의 리더인데. 그런 그녀가 나에게 신경을 얼마나 쓸 수 있겠어? 검은 사랑의 씨앗이 피었다고는 해도 조직에 관리해야 할 일도 아주 많고, 하루 하루가 바쁘게 돌아갈텐데. 그냥 시스템 상으로만 존재하는 일종의 수치 같은 거지, 실제로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칠리가 있겠어?
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는.
화장실에 놓여있는 칫솔이 새걸로 갈아져있고, 내가 마셨던 물컵은 사라져 있고... 이게 다 내 기분탓일까. 나는 한 숨을 쉬고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쭉 들이킨 다음 쓰레기통을 열었다.
이런 시발!
내가 먹고 나서 쓰레기통에 버렸던 도시락이 없어져있다! ...그래, 여전히 이건 그냥 내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등 뒤에 달라붙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감촉. 술이라도 사와서 마실까. 라는 생각으로 밖을 나와 걸어가던 내가 발걸음을 순간적으로 멈추자, 뒤편에서 타탁, 하는 발걸음이 약하게 울려퍼진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이건...
"... 안녕하십니까. 마담 맥콰이어."
밤의 골목, 코너를 도는 곳에서 가만히 서 있자,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서 그녀가 들어온다.
"... 어머, 잘 지내고 있어?"
아니, 너 때문에 못 지내고 있는 것 같은데.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지금 굉장히 무서운 상태다. 차라리 대가리에 권총을 들이밀고 러시안 룰렛을 연속으로 세 번 하고 말지. 사람의 정신을 갉아내리는 이 놀라운 공포감이 머릿 속을 절이고 있다.
이 여자 나를 스토킹하고 있는거야?! 할 일 없는거냐, 빨강 대가리!
"아가페의 근거지랑 여기는 거리가 꽤 있을텐데. 무슨 일이십니까?"
나의 말에, 그녀가 후우 하고 한 숨을 쉬고 대답한다.
"아아, 가끔 기분 전환 겸 산책을 하니까."
뻥치지마. 너 지금 완전 뻥치고 있어. 내가 궁예는 아니지만 알 수 있어. 너는 뻥을 치고 있어!
잠깐 고민을 하던 나는 게임 시간을 멈췄다. 그리고 혼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게임이 멈춘 지 삼십분이 지났을 무렵. 나는 크게 외쳤다.
"그래 씨팔! 어차피 이 세상에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가 얼마나 있다고!"
나의 사랑은 니미 바다만큼 깊고 넓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흑장미고 얀데레고 나이스 보트고! 다 들어와봐! 나의 하해같은 사랑에 녹여버려주지!
어차피 현실도 아니고 게임이니까, 한 번 직진해보자고. 어차피 저런 정신병자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먹어도 죽고 안 먹어도 죽는다면 먹고나 죽자! 으하하하하하하핫 피어라! 칠흑의 장미야! 내가 친히 구경해주지!"
그렇게 약간 정신이 나간채로 외친 나는 다시 게임을 실행시켰다. 내 눈 앞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레이첼이 서 있었다.
"마담 맥콰이어, 아니... 레이첼."
갑자기 달라진 나의 분위기에 레이첼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여유롭던 표정이 뭔가 살짝 흐트러진다.
"... 우리가 이름으로 부를 사이였던가? 건방지네."
연기하지마. 어디서 약을 팔아. 나는 그런 말을 아랑곳 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번에 제가 병원에 있을 때에 도와주셨지 않습니까."
그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말로만 고맙다고 하는건 아무래도 약간 마음에 걸립니다. 단순히 산책 나오신 거라면, 간단하게 술이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제가 사겠습니다."
와라 흑장미. 나는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 나의 말에, 레이첼이 가만히 눈을 몇 번 깜박거린다.
"... 술?"
그 말에, 나는 곧바로 반응해서 대답한다.
"아, 술이 싫으시면 간단하게 차라도."
그 말에, 레이첼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 대답했다.
"뭐, 기왕에 얻어 먹을거라면 술이 좋겠지. 아는 데라도 있나?"
그 말에, 나는 아하하... 하고 웃으면서 말을 끌었고. 레이첼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가자. 괜찮은 곳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첼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꽤나 조용한 클래식 바. 안으로 레이첼이 들어가자. 주인이 바로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마담 맥콰이어! 어쩐 일로..."
그 말에 레이첼이 슬며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머, 오면 안되는 거였나? 반응이 영 미지근하네."
그 말에 그가 다시 말한다.
"그게 아니라..."
레이첼이 가볍게 자신의 머리를 옆으로 쓸어내며 말했다.
"됐고, 방이나 하나 비워줘. 너무 큰 건 필요없고."
그 말에, 주인은 재빠르게 나와 레이첼을 안내했다.
촛불 하나가 켜져있고, 유리잔에 꽂혀있는 장미 한 송이. 편안한 소파. 방 안으로 들어온 나와 레이첼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레이첼이 대답했다.
"키르 로얄, 크뤼그 써서. 샴페인 맛 죽이면 혼난다고 말해두고."
그 말에, 종업원이 당황하면서도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떤걸로 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잠깐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페일 에일."
종업원이 인사를 하고 나간 다음. 나와 레이첼은 약간의 침묵을 고수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솔직히 나도 조금 무섭다. 그렇게 기세 좋게 떠들었지만 눈 앞에 있는 여자가 저런 모습을 하고 남의 집에 들어와서 칫솔이랑 컵 같은 걸 훔쳐갔다고 생각하니 참 여러가지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다.
"평상시에는, 뭐 하고 지내십니까?"
나의 말에, 레이첼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내다가 대답했다.
"뭐, 항상 바쁘지. 아무래도 조직관리를 하고 있다보니. 제대로 쉴 시간도 잘 나지 않는 편이야."
- 독설가가 발동됩니다.
여기서?! 지금..? 야 잠깐만... 이 미친!
"뻥치고 있네."
그 말에, 레이첼이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는 걸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 나는 인상을 한 것 구긴 상태로 대답했다.
"딱 말해라. 내 집에 들어왔었지?"
그 말에, 레이첼이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그 집에 뭐하러."
잠깐, 술이 놓이는 시간 동안 침묵했다가 다시 종업원이 나가자 내 입이 열린다.
"지랄, 내가 오늘 걸어가다가 멈추니까 뒤에서 타탁,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코너로 돌아가서 잠깐 기다렸더니 너란 년이 탁 튀어나오더라?"
그 말에, 레이첼이 재빠르게 대답한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산책 중이었다고!"
"아, 씨발. 약 팔지마. 뭐 살 건덕지도 없는 약을 왜 자꾸 팔아? 짜증나게."
다시, 내 몸에 통제권이 돌아온다. 이제는 슬슬 이 시스템이 어떤 악의와 목적을 가지고 나를 엿먹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일단, 나는 거친 말투를 급하게 바꾸어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레이첼."
"... 그러니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거야?!"
발끈하면서 화를 내는 레이첼이지만, 그 눈에는 진도 8.5를 넘어가는 강대한 지진이 미친듯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마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 모양이다.
"레이첼."
"...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지. 너랑 나랑 무슨 관계라고 자꾸 이름을 부르는데?"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저는 돌려 말하는 거 잘못하니까. 딱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걸로 내 750만원이 날라가는 길을 걸어가는 모양이다.
"저는, 레이첼에게 이성으로써의 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막 얼굴이 울긋불긋해지면서 화를 내려던 레이첼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 뭐?"
이번 역은 얀데레, 얀데레. 내리실 곳은 없습니다. 이 열차는, 이대로 직진한다 씨발!
============================ 작품 후기 ============================
얀데레가 나오면 늘상 소설 흐름이 똑같잖아요.
주인공은 막 소름끼쳐하면서 피하려 그러고. 그러면 그럴수록 얀데레는 막 따라붙고. 그러다보면 작품에 점점 얀데레의 광기만 넘치고. 스토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주인공은 불행해지고.
아니요, 여기는 그런 동네가 아닙니다. 피하지 않습니다.
정면충돌합니다. 쾅!
... 이걸로 토요일은 때우겠습니다.
내일 또 올릴 가능성... 15%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