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아무튼 얘기 좀 해봐. 궁금하다.”
분위기가 다시 가벼워지자 녹엽이 상천에게 말했다. 그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전… 고아입니다.”
그렇게 말문을 연 상천은 할 얘기가 없다던 처음과 달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물론 중간 중간에 이야기를 살짝 바꿔 자신이 문주가 아닌 그냥 문도라는 식으로 둘러댔다.
상천의 이야기가 끝나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어린 나이에 우여곡절이 많았구만. 쩝.”
녹엽이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해보라고는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얘기하지 않으려던 상천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스무 살의 나이지만 짊어져야 할 것이 많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전혀 그럴 것이 없음에도 미안하고 또 안쓰러웠다.
그렇게 상천의 이야기가 끝나고 모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때, 분위기를 상기시킨 것은 역시나 녹엽이었다.
“자, 자! 어쨌든 이제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겠지.”
그러면서 술병을 들어 올려 살짝 흔들어 보였다.
“얼마 안 남았네. 대주님, 더 시키면 좀 그렇겠지요?”
녹엽의 물음에 장여진은 미소만 지었고, 대답은 오히려 옆에 있던 서기종이 했다.
“작작 마셔라. 그러다가 내일 숙취 때문에 낙마한다.”
“흥! 그럴 일 없거든?”
서기종의 말에 녹엽이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하고 자는 게 낫겠어요. 아직 갈 길이 머니까요. 그리고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한 장여진이 살짝 웃어 보였다. 그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녹엽이 술병을 잠시 보고 있다가 상천의 잔에 남은 술을 따라주었다.
“딱 한 잔 나오네. 특별히 내가 안 먹고 자네 주는 거야. 그러니까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나 원래 이런 거 양보 잘 안 하는 사람이거든.”
그렇게 말한 녹엽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상천은 녹엽이 따라준 술잔을 들고 단박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거 시원하게 잘 마시는구만! 하하!”
녹엽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어두운 상천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술자리가 끝나고 모두가 방으로 돌아갔다.
상천과 같은 방을 쓰는 가릉은 올라가서 잠든 지 이미 오래였다.
찬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온 상천은 구름에 반쯤 가려진 반달을 보며 생각했다.
‘왜 이러지?’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장여진의 말에 긴장이 되어 그런 것 같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상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딱히 백룡문에 있는 형제들이 걱정되는 것도 아니었고, 장여진에게 말한 것처럼 긴장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계속 가라앉고 뭔가 불길하기도 한 기분이 온몸을 휩쓸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다들 즐거워하는데 혼자만 웃지를 못하고 있었다.
“안 자요?”
그때, 방에 올라간 줄 알았던 장여진이 다가와 물었다. 다들 방으로 들어갈 때 상천만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그녀가 슬그머니 따라 나온 것이다.
“그러는 장 소저는 안 주무시오?”
상천의 물음에 장여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전 잠자리가 바뀌면 잘 못 자요. 이제 앞으로는 고쳐야죠. 이번처럼 외부로 나와야 할 일이 많을 텐데.”
그녀의 대답에 상천은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찬바람을 쐬고 있음에도 기분이 나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장여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상천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오.”
“그런데 왜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아요? 기분도 안 좋은 것 같고.”
“나도 모르겠소.”
상천의 말에 장여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괜히 불길하고 기분이 가라앉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소.”
상천의 대답에 장여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진짜 긴장한 것 아니에요? 말 그대로 첫 임무잖아요. 처음. 무슨 일이든 처음이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감정은 설렘도 있지만 불안, 걱정도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상천이 생각에 잠겼다.
“며칠 안 됐으니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 들어가서 주무세요.”
장여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상천이 그녀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주무시오. 난 좀 더 밤공기 좀 쐬고 들어가겠소.”
“알겠어요.”
장여진이 먼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찬 공기를 마시며 달을 바라보던 상천이 중얼거렸다.
“진짜 그런 걸까?”
그렇게 한참 동안 밖에 서 있던 상천도 객잔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
장여진과 청운대가 도착할 때가 다가올수록 고척방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이젠 그들이 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원활하게 처리가 된 일을 어떻게 미해결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봐도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다.
“하아…….”
늦은 밤까지 고심을 하고 있는 고척방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지부장님.”
“왜!”
“아직도 고민이십니까?”
“너 같으면 고민 안 되겠냐? 이제 내일이면 도착할 텐데?”
고척방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수하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수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그에게 다가갔다.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
“뭐?”
수하의 말에 고척방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끝난 사건을 안 끝난 사건으로 만들기가 어려우면 새로운 사건을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없는 사건을 어떻게 만들어? 너 졸립냐? 그래서 헛소리하는 거야? 그럼 가서 자라.”
“제게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믿고 맡겨주십시오.”
자신있게 말하는 수하를 고척방은 ‘이놈 이거 미친 거 아냐?’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수하는 그런 눈빛을 받으면서도 자신있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늦은 밤.
어두운 공간.
창밖에서 흘러들어 오는 소량의 달빛 때문에 그나마 그 공간이 어느 방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창문을 등진 채 누군가가 침상에 앉아 있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창문에 달아놓은 하얀 천이 펄럭였고, 방금 전까지 없던 누군가가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인상착의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어떻게 됐지?”
정체불명의 사내가 음침한 목소리로 침상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계획대로.”
“좋군. 기대하지.”
그 말을 남기고 정체불명의 사내가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 안에 있던 사내는 계속해서 가만히 침상에 앉아 있었다.
***
전양지부의 아침이 밝았다.
여느 때와 똑같은 아침이었지만 지부 내의 공기는 경직되어 있었다.
본산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도착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장여진이 대주로 있는 새로 창설된 청운대가.
고척방을 비롯한 전양지부 내에서도 나름 수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야 장여진 자체도 부담이 되겠지만, 그 외 무사들에게는 본산에서 사람들이 온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큰 부담이었다.
그렇다 보니 평소와 다르게 긴장을 많이 한 모습이었다.
장여진과 청운대의 도착 예정 시간은 저녁 시간 때쯤이었지만 아침 일찍부터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수하들을 보며 고척방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어젯밤 자신에게 새로운 사건을 만들면 된다고 했던 수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고척방의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그 수하는 자신이 할 일만 묵묵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 방법이 있습니다. 청운대의 도착 예정 시간이 저녁 시간이니 그때까지는 준비가 될 겁니다.”
고척방은 전날 수하가 자신에게 은밀히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했지만 정작 당일이 되자 궁금하기도 하고 마음의 위안도 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자신만만해했으니까.’
고척방이 속으로 생각했다.
전양지부까지 반나절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청운대는 이동 속도를 늦췄다.
전양에 도착하면 또다시 한동안 묶여 지내야 하니 조금 천천히 가면서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다는 대원들의 성화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운대원들이 마냥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어 하지만은 않았다.
청운대에 들어오고 지금까지 시간이 흐르면서 제법 합산도문의 문도로서, 청운대의 대원으로서의 자각을 해나가고 있었다.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할 땐 제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되, 그전에 최대한 만끽할 수 있으면 만끽하자!’라는 것이 대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무리 속도가 느리다 해도 전양지부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다들 표정은 밝았다.
단 한 사람, 상천만 빼고.
상천의 표정은 전양지부가 점차 가까워질수록 어두워지고 있었다.
합산도문을 떠나오면서 생겼던 불안감, 불길함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편하게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안색도 많이 창백해져 있었다.
‘왜 이러지? 미치겠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상천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할 따름이었다.
[괜찮아요?]
그런 상천의 상태를 알아차린 장여진이 전음을 보내 물었다. 전음을 보낼 줄 모르는 상천은 그저 살짝 고개만 저었다.
[안색이 많이 안 좋아요. 어디 아파요?]
이번에도 상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픈 곳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몸과 정신이 무언가를 강하게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좀 쉬어가야겠네요. 너무 오래 이동하기도 했으니.]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태에서 말을 타고 있으니 더 힘든 것 같았다.
“조금 쉬어 가지요. 부대주, 적당한 자리 좀 찾아봐.”
“알겠습니다.”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이 서둘러 적당한 자리를 찾으러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얼른 두어 명의 대원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나다’ 싶으면 알아서 움직이는 대원들이 늘고 있었다.
상천은 일단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크게 몇 번 심호흡을 했다.
“괜찮은가?”
서기종이 상천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 역시도 상천이 계속해서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서기종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비친 상천은 무위는 제법 높지만 험난한 강호에서 생활하기에는 한없이 여린 존재처럼 보였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낭호와의 대결 이후로 서기종은 상천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제법 강단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그렇고 무위도 그렇고 험한 강호에서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로 연일 이런 모습이니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허약하군. 이렇게나 허약한 네놈과 비겼다는 사실이 치욕스럽다.”
그때 낭호가 상천의 옆을 지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상천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지나가던 낭호가 발걸음을 멈추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나이가 많건 적건 강호에 발을 들여놓으면 다 똑같다.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거지. 단순히 무공이 강해서 될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 낭호가 검지로 자신의 심장을 콕콕 찌르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강해야 되는 거다, 여기가. 그런데…….”
낭호가 상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를 정면으로 보고 선 낭호가 이번에는 상천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네놈은 여기가 너무 물러 터졌어. 살짝만 힘 줘도 깨져 버리는 계란처럼.”
낭호의 말에 상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허약한, 보잘것없는 네놈과 내가 비겼다는 사실이 난 너무나 치욕스럽다. 그러니 앞으로 조심해라. 내가 널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니.”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한 낭호가 몸을 홱 돌려 자신의 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상천은 가만히 서 있었고, 둘 사이의 대화를 들은 대원들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호 초출이나 다름없는 상천에게 낭호의 말은 어떻게 보면 굉장한 독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극히 옳은 말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상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말하길 좋아하고 상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녹엽이나, 계속해서 상천을 걱정하는 장여진마저도.
상천은 쉴 곳을 찾으러 간 여소정과 대원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