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저녁 하늘을 노을이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고척방과 몇몇 수하들은 전양지부의 문밖에 나가 청운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 시진 가까이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 멀리서 여러 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장여진과 청운대가 오는 소리였다.
“후우! 오는구나!”
심호흡과 함께 그렇게 중얼거린 고척방이 옆에 서 있는 수하에게 물었다.
“일 처리는 어떻게 됐어?”
“걱정 마십시오. 다 해 놨습니다.”
“그래? 잘 했다. 근데 들고 있는 건 뭐냐?”
“아! 맞다! 이거…….”
고척방의 물음에 수하가 자신의 손에 들린 병 하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뭔데 그래?”
“아까 추워서 좀 마시던 건데…….”
“뭔데? 설마 술이냐?”
고척방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요. 찹니다.”
“차? 그나마 다행이네. 얼른 치워!”
“옙.”
고척방의 말에 수하가 얼른 차가 든 병을 가지고 들어가려고 했다.
“야, 잠깐만. 좀 줘봐. 목 탄다.”
“예? 따뜻한 건데…….”
“아, 빨리 줘! 시간 없어! 벌써 저기 보이잖아!”
고척방의 말대로 천천히 말을 몰고 다가오는 청운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있습니다.”
수하가 병을 건네자 빼앗다시피 하여 병을 낚아챈 고척방이 얼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차가 목구멍을 지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얼른 치워!”
“옙!”
다시 고척방에게서 병을 받아 든 수하가 안쪽에 있는 다른 무사에게 병을 건네며 얼른 치우라고 일렀다.
“야, 근데 차 맛이 왜 이러냐?”
“맛이 이상합니까? 아까보다 좀 식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맛이 좀 쓴데?”
“제가 워낙 쓴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하여튼 네놈 입맛도 연구 대상이다. 야, 왔다.”
그렇게 말한 고척방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선두에서 말을 몰고 다가오는 장여진을 바라보았다.
전양지부에 도착한 장여진은 말에서 내려 고척방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만면에 미소를 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랜만이에요, 고 지부장님. 잘 지내셨죠?”
“그럼요. 당연히 잘 지냈지요. 하하!”
장여진도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대원들은 얼른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지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과 조금 다른 의미로 상천의 표정도 안 좋았다.
‘뭐지? 뭘까? 이 기분은? 불길하다.’
상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꾸만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질 것 같은 불길함이, 외줄을 타는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자, 이제 들어가시지요.”
“그래야지요. 대원들이 쉴 곳은 어디죠?”
“걱정 마십시오.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청운대 대주의 자리에 앉으셔서 그런가 대원들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그런가요? 호호!”
좋은 말들이 오가고 있던 그때,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낯선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고, 고척방의 의식이 점차 아득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자기 고척방이 곁에 있던 수하 한 명의 도를 빼앗아 들었다.
장여진으로부터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여소정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도를 뽑아 들었다.
‘이거였나?’
상천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상당히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것같이 보였다.
도를 들고 장여진에게 휘두르는 고척방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빠르게 다가서는 여소정의 모습.
그리고 순간적으로 달려나가는 청운대 대원들의 모습.
이 모든 것이 눈앞에서 굉장히 느린 속도로 전개되고 있었다.
촤악!
“아악!”
고척방의 도가 누군가를 베었다. 비명도 들렸다.
하지만 정작 허물어지는 신형은 고척방이었다.
빠르게 다가선 여소정의 도가 그를 벤 것이다.
먼저 들린 비명은 장여진의 것이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여소정이 재빨리 다가서며 고척방을 벤 까닭에 그가 휘두른 도의 궤적이 어그러지며 장여진의 팔에 자상을 남긴 것이다.
심각한 수준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장여진은 지금 벌어진 상황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대주님?”
여소정이 휘청거리는 장여진을 부축하며 물었다.
하지만 큰 충격을 받은 장여진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이거였어, 이거…….”
그것을 보며 상천이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전양지부가 발칵 뒤집어졌다.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아무도 잠자리에 든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지부장이, 그것도 단순히 청운대의 대주도 아니고 문주의 여식을 해하려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고척방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가 무슨 이유로, 혹은 누구의 사주를 받아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소정은 녹엽, 서기종과 함께 전양지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불러다가 심문하기 시작했고, 상처를 입고 충격에 의식을 잃은 장여진의 곁은 상천이 지켰다.
상천의 상태도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소정은 굳이 그에게 장여진을 부탁했다.
다른 대원들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청운대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는 상천 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장여진의 곁을 지키고 있는 상천은 고개를 숙인 채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고 장여진의 얼굴을 보면 자신이 눈으로 본 상황이 다시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이렇게나 충격을 받았는데 당사자인 장여진은 어떻겠는가.
두 사람이 서로 나눈 인사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듯한데, 그런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했으니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길함은 이거였어. 왜 그랬을까? 왜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원한이 있었던가?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미쳐버린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많은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그것도 여소정이 근거리에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녀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둘만 있을 때, 혹은 자신이 의심받지 않을 다른 방법을 써서 확실하게 죽일 수 있었다.
“으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장여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상천이 고개를 번쩍 들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정신이 좀 드시오?”
하지만 장여진은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신음도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하아…….”
상천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달이 지고 해가 떠오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심문이 끝났다.
전양지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데려다가 심문을 했지만 고척방이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혹시나 이번 일을 함께 계획한 동조자가 있는지도 알아보려고 했으나 전혀 의심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서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애당초 이곳에 왔던 목적인 미해결 사건 같은 건 없었다는 사실이다.
청운대가 이곳에 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고척방이 하루도 일찍 잠든 날이 없을 정도로 고심을 했으며, 결국에는 해결된 사건을 미해결 사건으로 만들어놓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아…….’
여소정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장여진이 누워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 들어가자 상천이 자지 않고 장여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대주님은 좀 어떠세요?”
“아직 의식이 없소.”
상천의 대답에 여소정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할 텐데 가서 좀 쉬세요. 여기는 제가 있을게요.”
“알겠소.”
여소정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상천이 나간 후 장여진의 곁에 다가가 앉은 여소정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던 여소정도 침상에 엎드려 쪽잠을 청했다.
밤을 꼬박 샌 탓에 청운대의 기상 시간이 늦어졌다.
정오가 다 된 시간에 기상을 완료한 청운대원들은 여소정의 지시에 따라 고척방의 집무실과 처소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누군가와 주고받은 서찰이나 이번 일을 계획할 만한 물증을 찾기 위함이었다.
대원들이 집무실과 처소를 수색하는 사이 여소정은 서둘러 본산에 서찰을 띄웠다.
갑작스레 지부장을 잃은 상황에서 지부 소속 무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이런 분위기를 수습하기에 청운대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무리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무림이라지만, 이런 일은 절대 흔하지 않았다.
그간 수없이 많은 일을 듣고, 보고, 겪었을 청운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침착하게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었다.
상천 역시 전날까지와 달리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진지하게 조사를 하고 있었다.
두 시진에 걸쳐 집무실과 처소를 뒤졌지만 결국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아…….”
여소정이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봐서는 고척방의 충동적인 단독 범행일 뿐이었다.
‘본산에서 기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이번 일이 본산에 알려지면 비전문적인 자신들과 달리 좀 더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조사할 수 있는 조사단이 파견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고척방이 죽었다 하여도 좀 더 명확한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진짜로 고 지부장의 우발적인 범행이기를…….’
여소정이 속으로 생각했다.
장여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청운대가 고척방에 대한 조사에서 손을 뗄 무렵이었다.
그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여소정을 비롯한 모든 청운대원들이 그녀가 누워 있는 방에 모였다.
“괜찮으십니까?”
여소정의 물음에 장여진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 지부장은?”
“죽었습니다.”
“그렇구나. 뭐 좀 알아낸 것 있어?”
여소정의 대답에 장여진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답답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조사를 한 바로는 고척방의 우발적인 범행으로 생각됩니다마는 단순히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많습니다.”
여소정의 말에 장여진은 눈을 꼭 감은 채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계속해서 얘기를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던 여소정이 입을 열었다.
“충동적인 범행이라 하기에도, 그렇다고 배후에 누군가가 있는 범행이라 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본산에서 조사단이 도착하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
장여진의 말에 여소정도 입을 다물었다. 대원들은 그저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