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 진광의 수작을 극복하다 >
"설마 진광 그 놈이 홍애지에서 버티다가 수미로 넘어왔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
그러게요. 덕분에 건우 님의 행보가 완전히 들통이 나고 말았네요.
"진광 그 놈이 영기 수도계와 극멸기 수도계에서 내가 한 일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일단 그 자의 손에서 벗어났으니 다행이긴 하네요.
"설마 내가 자신의 금제를 쉽게 풀어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한 거지. 나를 너무 얕잡아 본 덕분이라고 할까?"
솔직히 건우 님이 아니라면 그 자의 악독한 수단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걸요?
"태령기 완경에 이른 놈이 부린 수작이니 어지간해선 당할 수밖에 없었겠지. 하하."
건우는 진광의 수법을 인정하면서도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진광의 수작을 건우는 어렵지 않게 해결해 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들을 아공간에서 떼어낼 방법이 찾지 못했을 때는 무척 당황했다고요.
루야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때는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아직 진광이 사용한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강력한 수법이었던 것은 분명하지."
건우도 진광이 의념공간으로 침투시킨 검은 안개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그 검은 안개는 실제로는 안개가 아니라 먼지처럼 작은 생명체였다.
건우가 의념을 동원하여 그것을 세밀히 살핀 결과, 그것은 아메바처럼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기괴한 벌레였는데 몸에 사나운 술법 문양이 가득했다.
그것들은 무리를 지어서 의념공간을 떠돌며 그 공간에 존재하는 것들에 들러붙어 스며들었다.
아마 제가 그것들과 접촉했으면 저도 잡아먹히고 말았을 거예요. 진광이 성령기인 건우 님의 영체를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한 것을 보면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루야가 다시 한번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원래 수사들의 의념공간에는 그 주인이 수련을 통해서 이룩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수련의 근간인 영근은 물론이고 그 결과물인 영체에, 가장 강력한 무기인 본명법보까지.
그 모든 것이 의념공간에 존재하며, 때로는 의념으로 연화하여 의념공간에 받아들인 여러 보물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진광의 검은 벌레들은 의념 공간에 존재하는 그런 모든 것에 들러붙어 스미는 것이다.
그렇게 잠식한 후에 어떤 짓을 할 수 있을지는 건우도 알지 못하지만 진광이 멋대로 조종할 수 있을 거란 예상은 할 수 있다.
게다가이 검은 벌레들은 궁극적으로 의념 공간 전체를 잠식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사실 건우에게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었다.
"나는 그것들이 설마하니 아공간을 이루는 틀에까지 스며들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 그 때는 정말 놀랐다."
건우는 그런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를 떠올리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진광의 수작에 그것들이 아공간에 스며들자마자 건우는 곧바로 아공간을 나누어 그것들을 격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것들이 아공간의 벽까지 스며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격리된 공간을 전부 잠식한 후, 그와 연결된 다른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우는 곧바로 그것들을 아공간 밖으로 내보내려 했었다.
하지만 그 검은 벌레들에겐 건우의 의념이 통하지 않아 그것들을 버리자면 그것들이 들어 있는 아공간을 잘라내어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것들이 아공간을 이루는 벽까지 스며 있는 상황이라 그 부분을 잘라내야 했던 것이다.
"그나마 앙천적의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건우가 의념을 불러 일으켜 아공간 한쪽에 격리된 부분을 살피며 말했다. 고작 작은 방 하나 크기로 격리된 그곳에 앙천적의들이 검은 안개와 함께 존재했다.
덕분에 개미들이 이전보다 뤌씬 사나워졌잖아요.
루야도 건우와 함께 같은 곳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녀의 말처럼 그곳에 있는 앙천적의는 이전과 또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공처럼 둥근 배를 가진 어른 주먹 크기의 붉은 개미는 배에 마귀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그 마귀가 입을 벌려 진광의 검은 벌레를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처음에 앙천적의가 저것들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건우가 처음 앙천적의를 검은 벌레가 있는 공간에 투입했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때, 앙천적의는 검은 벌레에게 잠식된 후, 흐물흐물 녹아서 사라졌다.
검은 벌레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녹여 흡수하는 흉물이었던 것이다.
그 때, 그냥 포기했으면 저런 새로운 앙천적의도 없었겠죠.
루야가 말했다.
그 말처럼 처음에 투입했던 앙천적의 삼천 마리를 잃은 건우는 그냥 그 검은 벌레가 있는 아공간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앙천적의의 어미인 화의모(火!儀母)가 복수를 원했다.
자식들을 잡아먹은 그 검은 벌레를 어떻게든 응징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래서 건우는 검은 벌레가 있는 아공간의 극히 일부를 다시 분리하고 거기에 앙천적의를 투입했다.
"꽤 많이 죽었지."
건우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루야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대꾸했다.
하지만 그 불개미들, 엄청난 적응력을 가지고 있었죠. 아니 그런 식으로 돌연변이가 쉽게 일어날 줄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쉬운 건 아니지. 앙천적의가 그렇게 극한의 위기에 계속 노출될 일이 얼마나 있겠냐? 전에 극멸기를 극복할 때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지속적으로 같은 위기에 노출된 결과가 돌연변이를 만든 거지."
그렇긴 하죠. 하지만 무슨 배가 그렇게 커진데요? 꿀도 안 들어 있으면서.
루야는 처음 앙천적의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배가 공처럼 둥근 모양이 되자 꿀개미를 떠올렸다.
하지만 돌연변이 앙천적의의 둥근 배에는 강력한 독만 가득했다.
지금도 건우가 바라보고 있는 좁은 공간에서 검은 벌레를 빨아들이던 앙천적의 한 마리가 펑 하고 터졌다. 그리고 터진 배에서 쏟아진 독이 검은 벌레를 한꺼번에 씻어 내렸다.
- 저 봐요. 저런 흉한 독을 품고 있다니!
루야가 그 모습에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개미의 폭발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쯧, 아직 저런 개체가 남아 있네. 적당히 먹고 물러나야 하는데."
그래도 이젠 백에 한두 마리 정도니까 곧 해결이 되겠죠. 처음에는 백에 아흔아홉이 배가 터져 죽었다고요. 그에 비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죠. 아무튼 화의모 고것이 애를 많이 쓰긴 한 거 같아요.
어쩐 일인지 루야가 화의모를 칭찬한다.
건우는 그런 루야의 말에 조금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이번만은 루야도 화의모의 공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분에 진광 그 자의 손에서 풀려나고, 아공간도 줄이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이지 뭐예요?
"그래, 정말 다행이지."
건우가 루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사실 건우가 진광의 검은 벌레를 쉽게 떼어내지 못한 것은 그것들에게 할애한 아공간이 많이 넓었기 때문이기도했다.
진광이 검은 안개를 의념공간에 침투시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아공간을 나누긴 했지만 거기에 할당한 아공간이 제법 넓었다.
성령기 초기인 건우의 의념공간으로 너무 좁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는 설마 그 아공간을 통째로 떼어 버리느냐 마느냐를 고민할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적당히 넓은 공간을 검은 안개에게 내어 주는 실수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검은 안개 즉 그 벌레들이 아공간의 근본적인 틀까지 잠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정말 그 넓은 아공간을 버리는 것도 고려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앙천적의까지 투입했다가 실패한 후에는 정말 그 부분을 포기하려 하기도했다.
그 때 정말 그렇게 했다면 건우가 가진 의념의 크기가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걸 막아준 것이니 루야도 이번에는 화의모를 인정하고 칭찬한 것이다.
"어쨌거나 저것들은 새로운 앙천적의가 해결하고 있으니 시간만 지나면 될 일인데, 이젠 앞으로의 일이 문제구나."
건우는 검은 벌레가 차지한 영역의 일부를 분리해서 조금 전에 앙천적의의 폭발로 검은 벌레가 줄어든 곳에 연결했다.
그리고 배가 부른 앙천적의를 빼 내고, 새로운 앙천적의를 투입했다.
그러자 새로 들어간 앙천적의들은 곧바로 검은 벌레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고, 그 흡입력은 아공간의 벽에 스며든 벌레까지 뽑아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것은 바로 이것, 새로운 돌연변이 앙천적의들이 다른 것에 스며든 검은 벌레까지 뽑아내어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염된 것을 정화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그 부분을 떼어 버려야 했을 테니까.
그냥이 혼돈역에서 나가면 안 될까요? 밖으로 도망가면 진광 그 자도 어쩌지 못할 텐데요?
루야는 최대한 안전한 방법을 제안했다.
이곳 알시평 혼돈역의 입구는 오직 하나.
그리고 그 가까운 곳에는 건우가 은밀하게 만들어 둔 전송대응진이 있었다.
원래 부양도의 전송진은 좌표만 있어도 이동이 가능하지만 혼돈역은 공간 자체가 불안정하여 좌표가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미리 전송대응진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원하면 언제든 알시평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입구를 태령기 수사가 지키고 있지 않다면.
"어차피 한동안은 내가 위험할 일은 없어. 아니 도리어 진광 그 놈이 내 신분을 보장해 줄 테니까 돌아다니기 편해졌지."
뭔가 느낌이 불안한데요? 또 무슨 일을 하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진광의 신분 보장이 필요할 일이 뭔데요?
건우의 말에 루야가 벌써부터 감이 온다는 듯이 샐쭉한 표정으로 물었다.
"별 것 아니지. 그냥 7대 세력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파악을 해 보자는 거지. 진광이 태령기 완경이니 그 이름을 대면 어지간한 놈들은 다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데요? 그러다가 그 놈들이 진광처럼 건우님께 수작을 부리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러니까 진광의 이름을 판다고 하는 거지. 누가 태령기 완경하고 척을 지고 싶겠어? 또 내가 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중이라고 원조를 부탁하면, 흠흠. 뭐 좀 주지 않을까?"
이 판국에 사기를 치고 다니겠다고요?
"아니지, 사기가 아니라 나는 정말 그 방법을 연구할 거라니까? 그러니 투자를 좀 해 주면 나중에 혜택을 주겠다는, 뭐 그런 투자 설명회? 그런 걸 해 보면 어떨까 하는데?"
쳇, 몰라요. 마음대로 하세요. 제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할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지. 너도 가능성이 보이니까 안 말리는 거잖아. 내가 널 몰라?"
- ……? 저 수련하러 가요. 쳇.
"말돌리기는……
건우는 재빨리 사라지는 루야를 보며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긴 저 녀석도 수련을 좀 할 필요가 있긴 하지."
그래도 어떻게든 성령기 초기까지 올라온 루야였다.
게다가 이전 홍애지에서 고계 수사들을 수미로 옮겨 주며 얻은 재화들 중에 선계급의 혼원석(混元石)이 있어 그것을 루야에게 주었다.
이제 루야의 수련 한계가 적어도 태령기 완경까진 된다는 소리다.
혼원석의 수준을 보면 어쩌면 그 다음 경지인 진선(眞仙)까지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닥쳐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 지금 따질 문제는 아니다.
"자, 그러면 어디 한번 볼까? 이쪽이 어떤 놈들의 세력권이더라?"
건우는 검은 벌레를 처리하고 있는 돌연변이 앙천적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며 아공간의 입구를 열어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의념을 넓게 펼쳐 가까운 곳에 있는 멸계 수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정보가 부족할 때는 적당한 놈을 찾아 족치는 것이 제일 쉽고 편한 길임을 잘 알고 있는 건우였다.
< 진광의 수작을 극복하다 > 끝